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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의 잔상에 올라온 배명훈 님의 글을 토대로 한 리뷰입니다.

 소설이 계몽주의의 시녀역할을 하던 근대사회가 끝나가면서, 소설의 위상은 크게 변화하고 있다. 사람들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백과사전이나 위키를 뒤적이면 될 일이고, 감동을 얻기 위해서는 드라마와 영화를 찾는다. 그렇다고 유희적 매체를 찾는다고 하면 게임과 스포츠가 소설보다 그 유희적 위상에서 상당히 앞서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어느 비평가의 말처럼, 이제 소설이 재겨디딜 공간은, 그러니까 소설이 발붙일만한 땅은 한반도에서 독도만큼도 남아있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소설의 죽음. 근대문학에서 소설의 죽음이란 자아가 반성할 ‘거울’이 필요없어짐을 뜻한다. 주체의 집단적 대변인인 영웅이 ――― 그것이 소설적 영웅이든, 시민적 영웅이든 ――― 사망한 포스트모던 시대에 소설은 아마도 극소수의 매니아나 엘리트들에 의해서 읽혀질 지극히 순도높은 ‘고급문학’에서 존명하거나, 문학 바깥의 타 예술장르의 바탕이 되는 ‘소스’를 제공하는 아이템으로 전락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서 다소 기괴하게 벗어나있는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최신 유행품도 있기는 하나, 이는 한국 문단에서 다소 관점이 벗어나 있는 상태다.
 그런데 소설적 ‘자아’가 죽는다는 것이 곧 ‘이야기의 죽음’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서사문학에 있어서 ‘소설’이란 서사를 통해서 말하고자하는 미학적 지향점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이를테면 이 담론 안에는 ‘이야기’와 ‘상상력’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플롯Plot'이라는 더 과학적인 재료들을 사용할 뿐이다.
 몇몇 작가들은 서사문학의 핵심인 ‘이야기’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스스로를 ‘구연자’ 혹은 ‘이야기꾼’으로 지칭할 수 있을법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들 이야기꾼들의 특징은 자신의 글이 독자들을 끌어당기고, 그 안에 빠져든 독자들에게 ‘즐겁게’ 작품을 읽을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작품들은 실제로 많은 작가들을 빨아들이며 독자들을 즐겁게 할 이야기를 설파하고 있다. 더군다나, 근대 이후 가장 큰 탄압을 받아왔던 ‘상상력’에 가치를 두는 작가들도 존재한다.

 이 점에서 배명훈은 듀나 이래에 가장 주목을 받아야할 장르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진지한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야를 부여해줄 수 있고, 귀기울이는 독자들에게 즐거운 ‘이야기’를 던져준다. 작품 세계의 초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이 아닌 ‘이야기’에 맞추어져 있으며, 그 핵심은 이야기의 ‘시선’이 가지고 있는 환상적 마력Enchantment에 의존한다. 콜린 역시 ‘이야기’가 그의 글쓰기에서 상당한 과제로 부여돼 있는 듯도 하지만, 콜린이 지닌 실존적 차원에서의 소설적 글쓰기와는 달리, 배명훈의 이야기는 소설의 ‘내러티브Narrative’와 ‘서사Recit’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진부해진 ‘사물’에 부여하는 ‘환상적 시야’에 기반하고 있다.


 ――― 환상의 시야로서의 ‘배명훈’

 배명훈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매력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닳디닳은 사물의 관점에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에 있다. 즉, 그의 작품은 ‘리얼리즘으로 얼룩진 우리의 시야를 깨끗하게 닦아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1) 이 점에서 배명훈의 작품은 가장 극명한 의미로서의 ‘장르 판타지’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이 많은 독자들에게, 널리 읽힐 수 있는 까닭은 현대인들의 진부한 눈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재기어린 생명력에 기인하고 있다. 평범한 사물이 팔딱이는 존재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고({그녀에게 안경을 선물하기}), 가장 평범하게 기정화된 보편적 사건 배후의 상상적 논증을 정연하게 보여준다.({초록 연필}, {다이어트} 이런 작품이 가지고 있는 사물에 대한 시야는 리얼리티에 길들여진 독자들에게 신선한 바람을 넣어주고, 즐거운 공상을 하도록 도와준다. 이것이 바로 장르문학으로서 ‘판타지’가 가질 수 있는 독자적 즐거움 중의 하나다. 배명훈의 작품이 가지는 독보적인 즐거움의 가장 큰 부분은 바로 여기에 빚을 지고 있다. 90년대 중후반부터 많은 장르 작가들이 판타지소설을 내놓았지만, 작품 내적 세계가 ‘현실’과 조응하여 우리의 모든 감각을 일깨워줄수 있는 파괴력을 가진 작품은 [윈드 드리머](방지나 외, 도서출판 명상, 2000년 5월)에서 보여진 몇몇 시도 이후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었다. 배명훈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이러한 ‘사물에 대한 새로운 시야’, 혹은 ‘정밀하게 구축된 2차세계에서의 내재적 리얼리티’({석기창비록}, {논문공장} 등)가 독자에게 생동감있게 전달된다는 점에서 배명훈이라는 이름을 2000년 이후 가장 주목해야하는 작가로 지목해도 좋을 듯 하다. 그의 상상력은 이영도만큼 경이로우며, 듀나만큼 깔끔하게 조탁되어 있다. 그는 톨킨의 ‘내재적 리얼리티’가 가진 ‘경이로움’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려 노력한 작가이며, 그의 상상력은 분명 그의 세계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고 ‘독서행위’를 통하여 현실세계와 연결된다.

 이러한 그의 작품 세계에 끌어들이는 ‘사물’들은 지극히 현대적이며 범세계적이다. 여기에는 작가가 읽은 책이나 지식, 경험 등이 간접적으로 인용되며, 그러한 모든 것들이 작품 안에 용해되어 하나의 ‘시선’을 만들어내고 가공된 이야기를 짜맞추어 놓는다. {논문공장}이 가지고 있는 현실세계의 알레고리, {다이어트}가 가진 일상성, 군 생활의 몇가지 에피소드들이 모티브가 된 {Millitary! Fantastic!}, {플레인 요구르트} 등 그가 새로운 사물을 창조해내는 범위는 우리가 사는 생활의 전방위에 걸쳐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을 읽어나갈수록 우리의 주위에 있는 사물은 점점 낡은 옷을 벗어던지고 새 옷을 입는다. 게다가, 그것들을 조합해내어 2차세계를 창조하는 재능도 그에게 부여되어 있다. ({누군가를 만났어}, {냉동인간과의 인터뷰}) 어떤 면에서 그는 자신의 세계를 완벽하게 구축해 놓은 완성된 작가라고 불러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 그런데, 소설가로서의 ‘배명훈’

 그러나 위의 내용은 ‘소설가 배명훈’이아니라 ‘이야기꾼 배명훈’라는 측면에서 접근한 분석이다. 그의 작품은 ‘구연적 속성’을 강하게 띤다. 이야기는 소재와 소재의 굽이를 타고 넘어가며 번식한다. 이야기는 또다른 이야기를 낳고, 어느새 다른 이야기에게 잠식당하는가 하면, 두 이야기끼리 이종교배를 통하여 키메라같은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이것은 작가 배명훈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으로도 보인다. 이것이 ‘구연성’과 결합되어 태어난 창조물이 바로 {355 서가}인데, 이 작품은 소설이라기보다는 ‘기담’ 혹은 고전문학의 한 분야인 ‘전기소설’에 가까운 성격을 띠고 있다. (물론 현대의 ‘학원기담’이나 ‘재담류(才談類)’라는 구전서사 형태가 존재하긴 한다.) 즉, 배명훈의 작품은 ‘소설’이기 이전에 ‘상상력’에 기반한 ‘서사문학’에 훨씬 더 근접해 있다. 이것은 작가가 구축한 ‘2차세계’의 질서에 의해서 리얼리티에 간섭을 보여주는 작품에서 더욱 극명히 드러난다. 배명훈의 작품의 일차적 특징은 ‘현실과 가장 밀접한 곳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사물 이면에는 분명 생경한 세계의 ‘질서’가 부여되어 있고, 그것이 보편적인 작중의 ‘인간’에게 관여한다. 이를테면 {다이어트}에서 보여지는 비만과 자살충동 배후에는 외계인의 원대한 계획이 잠자고 있다. 이계의 초지성체의 행동이 인간의 행동에 연원이 된다는 것은 오랜 신화학적 전통이다. 그리고 이 전통은 소설의 전통이 아니라 ‘서사시’의 전통이다. 밀턴의 [실낙원](존 밀턴, 범우사, 1999년 4월)이나 세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 스펜서의 [페어리퀸] 등 르네상스 작품에서 우리는 이 전통을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다. 즉, 배명훈의 작품 성격이 ‘구연적’이라는 점은 ‘탈소설’적이라는 말도 되면서 ‘비소설적’일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배명훈의 작품이 과연 ‘소설적인가’, 혹은 ‘서사시적인가’라는 두가지 명제를 가지고 작가 배명훈이 가지고 있는 서사문학적 정체성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배명훈이 하나의 ‘이야기’ 혹은 ‘사물’ 속에서 뽑아올리는 내용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하나의 ‘사물에 대한 시선’이 과연 ‘소설’ 혹은 ‘문학’이라는 본질적 차원으로 회귀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배명훈의 작품이 ‘완성된 이야기’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소설’이라고 불리기 망설일 수 밖에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앞서 그의 작품세계의 가장 큰 매력은 마력Enchantment(이 단어는 근본적으로 ‘마법에 걸림’이라는 뜻으로서의 ‘매혹’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이에 대해서는 역시 J.R.R 톨킨의 [Tree & Leaf]에 수록된 {On Fairy Stories}를 참조하길 바란다.)이며, 그것은 서사의 범주를 넘어선 ‘시선’의 범주다. 즉, 이것은 소설의 덕목이 아니라 ‘작가’의 덕목이다. 그리고 이런 시야를 강하게 가진 작가들은 대개가 근대 이전의 작가들과 장르문학의 작가들이다. 고대 서사시Epic와 장르소설 - 특히 판타지소설의 미적 특성은 한 가지를 공유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 환상의 시야를 통한 ‘내재적 리얼리티’를 지닌다는 점이다.
 그리스 서사시는 그리스 세계의 신들의 당위적 은총으로 총화된 세계 안에 안주한다.2) 따라서 이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은 ‘리얼리즘의 눈으로 본 과학적 시선’이 아니라, 신들이 인식에 개입한 총체적 시선이고, 신화적 시선이다. 모든 자연사물은 신들로 ‘의인화’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연사물들은 ‘신들 자신’이 되어 작품에서 형상화된다. 따라서 그리스 서사시의 모든 이야기는 ‘신들의 섭리’로 귀결되며 영웅들의 장대한 최후로 결론지어진다. 그들은 신들의 기획한 운명 아래에서 쓰러지며, 신들에 의해 하늘로 돌아간다. 또한 장르 판타지의 경우 ――― 톨킨의 예를 들자면 ――― [반지의 제왕](존 로날드 로웰 톨킨, 씨앗을뿌리는사람, 2007년 5월)과 [호비트](존 로날드 로웰 톨킨, 씨앗을뿌리는사람, 2007년 5월)가 놀랄만큼 통일된 환상세계 위에서 구축된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축복과 행운의 은총’(확실히 [호비트]에 드러나는 빌보 배긴스는 그 가장 전형적인 예다)이 가톨릭적 세계관을 통하여 형상화되어 있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시선’은 그대로 작품의 가장 큰 ‘테마’를 형성하며 독자에게 커다란 울림을 준다. 그것이 바로 톨킨이 말한 ‘회복Recovery'의 미학적 특성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의 신화라고 불릴 수 있는 장르판타지소설의 가장 커다란 미학적 특질이다.
 배명훈의 작품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환상의 시야를 충분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이 부재한다. 이는 그의 작품이 단편소설도 아닌, 그렇다고 장편소설도 아닌 경장편 분량의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어느정도 영향을 받았으리라 예상되는 부분인데, 그의 작품 내에서 각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시야는 개별적이다. 따라서, 서사의 흐름이 진행되면서 드러나는 ‘이야기’의 줄거리가 독립적으로 파편화되어 있다. 쉽게 말하자면, 이야기가 한데로 모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들면 {그녀에게 안경을 선물하기}의 경우, 안경은 분명 시야를 새롭게 만드는 ‘시선’을 제공하고 있기는 하나, 그 안경의 ‘눈’과 사람 ――― 특히 작품의 ‘남녀’의 눈 ――― 에 관련되어 이것을 아우를 수 있는 거대한 ‘총체적 시선’, 즉 ‘작품의 핵심 주제’까지 닿지 않는다. 이 작품이 하나의 ‘해프닝’을 보여줄 뿐, 이야기로써 하나의 메시지, 혹은 미적 감동을 ‘통째로’ 던져주는 작업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그 점에서 이 작품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스토리텔링’에 가까운 부분이 있다. 이 텍스트에서 나오는 힘은 전적으로 ‘살아있는 안경’이라는 하나의 ‘컨텐츠’에 집중되어 있고, 그 때문에 테마는 중심을 잃고 표면적 사건과 내적 의미망 사이에서 흔들린다.
 {military! Fantastic!} 역시 괴담형식(이에 대해서는 위에서도 언급했다)의 그것과 아주 닮아있는 스토리텔링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시야를 신선하게 해주는 '컨텐츠'들이 돌아다닐뿐, 이야기의 경이감이 작가의 '정신' 혹은 '총체적 내재적 리얼리티'로 이행되어 봉합되는 부분은 없다. 배명훈의 작품은 사물을 새로이 보게는 만들지만, 그것이 새롭게 보이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고민이 결여되어 있다.(이것은 작품의 주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따라서 배명훈의 작품의 이야기는 한곳으로 모이지 않고 징검다리 타듯이 건너간다. 이것은 분명한 '라이트노벨'이 사용하는 수법이다. 그러나 배명훈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캐릭터'가 아니라 '사건'과 ‘사물’에 초점을 맞추면서 라이트노벨이 가지고 있는 연극적인 성격에서도 다소 벗어나있다. 때문에 작품은 스토리텔링적인 면에서 고전적인 '전기소설'의 형식과 매우 닮게 된다.3)
 
{철거인 6628}의 경우 이런 배명훈의 수많은 ‘사물들’이 하나의 단선적 스토리라인을 구축할 경우 어떤 작품이 탄생하는지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스토리가 엮이는 방식이 예외적이며, 다소 인위적인 결속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방사형으로 뻗어있는 이야기의 핵심에는 ‘차’가 있다. 이것은 이야기가 사물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기재로 사용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프랑소와 지라르의 영화 [레드 바이올린]도 이런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레드 바이올린]의 경우는 철저하게 시점을 제3자로 분할하고, 바이올린에 서린 ‘역사’를 추적하면서 서양 역사의 이면을 파헤치는데 어느정도 성공했지만, 그런 총체적 시선이 {철거인 6628}에서는 다소 예리하지 못하거나, 분산되어 있다.
 소설가 배명훈의 ‘기법적 특성’은 어찌보면 가장 치명적인 문제로 남을 여지도 있는데, 작품 호흡이나 알레고리의 흐름이 단편소설처럼 집약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작품의 전체적 흐름이 장편소설의 호흡임에도 장편처럼 다층위적인 이야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연애편지}의 경우, 독백극의 특징(즉, 캐릭터의 행동이 내면을 표출시키는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는)것을 전혀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4) 그것은, 주인공 '나'가 술회하는 독백의 어조가 '잡담'과 '강의', 그리고 '혼잣말'이 뒤범벅되어있다는 점에서 명백한데, 이것은 주인공의 내면 심리를 재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그 심리를 표출하는 병리적 행동, 혹은 우주적 행위에 대한 자각을 내적으로 표출하지 못한 채, ‘서사를 끌고 나가는 장치’의 하나로서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작품은 독백극의 형식을 소설에 실험적으로 차용했다고는 하나, 그 실험은 거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작품의 내적 서사를 이해하는데 방해를 주는 부작용만을 낳는다. 또한 결정적으로, 이 작품은 하나의 '연애'라는 소우주의 충돌이 '대우주'로 연결되는 다분히 모던한(?) SF적 구조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것이 작품 내적으로는 지나치게 분리되어 있고 봉합이나 융합이 되지 않아서 불협화음을 안고 있다. 이것은 {다이어트}에도 드러나는 부분으로 초기 배명훈 작품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또한 {냉동인간과의 인터뷰}는 장르적 클리셰를 담아놓은, 흡혈의 모티프를 가지고 있지만,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고딕성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흡혈 모티프의 고딕성과 이 작품에 관한 컨텐츠 내적 문제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자세히 다룬다.) 이 작품은 담담한 소품 정도로 간주될 수가 있는 것인데, 작가는 "대화체의 시도"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 역시 ‘소설’의 범주가 아닌, 하나의 ‘스토리텔링’에서 머물고 있다.
 이 작품에서 대사는 그다지 밀도감 있는 내용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데, 대화법 속에서 밀도있는 내적 세계의 드러남보다는, 표면적인 사건과 인물의 심리의 병립적 ‘진술’에 의해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이다.5) 이 역시 위에서 지적한 {연애편지}와 마찬가지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매뉴얼}과 {논문공장}에서 사용된 문체의 변화, 형식의 반전은 작품의 부분적 기법으로서 머물 뿐, 전체를 이어주는 구조적 연결이 상당히 취약하다. {매뉴얼}의 ‘이야기’는 콜린의 {문근영 대통령}과는 다르게, 작품 안의 ‘내적 세계와 외부 세계’사이의 분명한 시선의 차이를 보여주지 못하고 하나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선에서 끝나고 있다. 이것은 작품의 서사가 하나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부분으로 흩어져서 ‘각개의 이야기로서 가지쳐짐’을 뜻한다.
 {논문공장}의 2인칭 기법(편지글)은 사실 사건의 진술 속에서 화자의 심정을 토로하기 가장 좋은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이 장치의 진행(편지의 송수신)이 서사적 연결고리로만 작용되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한 마지막에 달린 SF적인 인덱스는 작품의 성격에 큰 의미를 부과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예로, 듀나의 [면세구역](듀나, 국민서관, 2000년 2월)의 경우 각 단락의 에피소드들을 한 컷의 ‘사진’형식으로 묶어서 완결을 시킨 다음, ‘사진 제목’에 해당하는 결말부에 ‘SF적인 사고인식’을 함축적으로 매듭지어서 완결성을 구축한 것에 반하여,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SF적인 사고인식이 {논문공장}의 가상성과 크게 맞닿아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한통의 편지’는 완결된 사진의 구도처럼 엮일 부분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인덱스’가 이 모든 것을 대변할만한 함축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 마치며

 배명훈의 작품은 매우 독특하고 이례적인 케이스로서, 전형적인 장르소설로, 혹은 조금 방외적인 환상소설이나, 그것도 아니면 소재 위주로 짜여지는 라이트노벨 등으로 분류하기에는 매우 무리가 따르는 듯이 보인다. 그의 작품은 이 모든 규격에서 벗어나 있으며, 또 어느 쪽에도 자리잡지 않고 있다. 분명한 점은, 그의 작품이 ‘플롯’이라기보다는 ‘스토리텔링’에 훨씬 더 근접해 있는 양상을 띤다는 점 뿐이다. 따라서 필자는 배명훈의 작품의 장르적 의의를 어느 쪽에 두어야할지는 혼란스럽다. 분명 위에서 지적한 대로, 영미의 신비평적 접근 혹은 구조주의적 분석으로 배명훈의 작품을 바라보면 굉장히 불완전하다. 그러나, 판타지비평의 시각으로 그의 작품을 보면 경이로울 정도이며(앞서 언급했지만, 이미 배명훈의 작품세계는 완전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화비평과 장르미학비평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여, SF작가나 판타지 소설 작가라 칭하기도 어렵다. 배명훈을 ‘판타지 소설 작가’라고 명명하려 한다면, 그 말은 보류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를 훌륭한 ‘판타지 작가’ 혹은 ‘판타지 스토리텔러’라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훌륭한 ‘판타지 소설가’라고 말하기엔 많은 부분들이 미완의 숙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작품세계는 경장편과 단편, 장편이라는 소설의 ‘양적 문제’의 차원에서도 어느 한쪽에 무게를 두고 있지도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도 섣불리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근대 소설’이 붕괴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소설의 ‘내적 가치’에 운운하며 작품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 역시 온전한 일은 아니다. 적어도 90년대 장르 작가들은 리얼리즘과 근대문학의 망령이 떠도는 시기에 ‘소설’을 창작하려고 고심했던 역사의 흔적들이다. 그리고, 십수년이 지난 지금 현재, ‘소설’과 ‘스토리’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소설문학이 가지고 있는 미적-담론적 영역도 붕괴되고 있다. 소설을 쓸것인가, 스토리를 쓸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대체 ‘이야기’란 작가(혹은 구연자)에게 있어서 어느 위치에 있는 것인가? 그 가장 모호한 경계선 위에 작가 배명훈이 서 있다. 우리는 어쩌면 새로운 서사장르의 탄생을 배명훈에게서 목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 J.R.R Tolkien, {On Fairy Stories}([Tree and Leaf], New York: HarperCollins, 1964), 이 에세이는 [Tree & Leaf]에 수록된 가장 중요한 톨킨의 작품으로, 그가 주장하는 환상문학론의 미학적 담론이 압축적으로 실려있다. 그는 판타지가 어른에게 가장 훌륭하게 읽힐만한 가치는 회복Recovery에 있다고 지적하며, 이 회복이란 현실성에 찌든 우리의 일상적이고 진부한 것들을 날려버리고 모든 사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경이로움’을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2) 이에 대해서는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게오르그 루카치, 문예출판사, 2007년 7월)을 참고하길 바란다.
3) 고전적인 동양의 ‘전기소설(傳奇小說)’은 캐릭터가 평면적이며, 기이한 사건이나 사물에 의하여 서사가 추진력을 얻는다. 물론 캐릭터에 의존하는 전기소설이 존재하기는 하나, 전형적인 경우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4) 이에 대해서는 브래들리의 [Shakespearean Tragedy]를 참조하였다.
5) 이에 대해서는 헤밍웨이의 {살인자들}이라는 단편을 작가가 참고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물론 헤밍웨이의 단편은 하드보일드의 전형적 예이지만, 대사가 가지고 있는 심리 상황과 서사의 응축적인 전개기법이 모범적으로 담겨 있다. 이에 대해서는 C.브룩스의 [소설의 분석]에 수록되어 있는 ‘{살인자들}분석’을 참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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