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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홍대 Cafe:U
합평작 [신의 궤도](배명훈, 문학동네, 2011)
참가자 진아(사회), 날개, 라키난, 배명훈, 앤윈, 콜린, 한별(기록)



0. 궤도에 진입합니다

2월 11일 합평회 첫 작품은 배명훈 작가님의 [신의 궤도]입니다. <타워>에 이은 두 번째 책이자 첫 번째 장편 소설이기도 하죠. 상하권 두 권을 옆으로 펼치면 작품에 등장하는 빨간 복엽기가 완성되는 독특하고 신기한 디자인으로 기억하시는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배명훈 작가님이 가장 먼저 도착하시면서 시작된 합평회는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작품들을 압박하며 두 시간 가량 이어졌습니다. 이하는 그 기록입니다. 파일 관리자의 실수로 녹음 파일을 날려버릴 뻔했는데, 이렇게 보여드리게 되어서 기쁘네요.


Ⅰ. 나니예에 대하여

ⅰ. 복엽기와 유목민

진아 새삼스럽지만 출간 축하드려요. [신의 궤도]에는 명훈님 단편을 계속 봐온 사람은 알 수 있는, 명훈님이 좋아하는 요소가 굉장히 많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게 많은 작가들의 첫 장편의 특징인 것 같기도 하단 생각을 하게 돼요.

[신의 궤도]는 인물이 중심인 소설이 아니잖아요? 중심이 되는 인물들이 있지만 그 인물들이 안 나오는 장면도 많고, 퍼즐 같은 느낌으로 그 자리에 필요해서 등장하기도 하고.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방법이 어떻게 보면 독자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지점이 될 수도 있는데 그렇진 않았던 것 같아요. 우리의 사랑스러운 은경이가 마침내 장편 데뷔를!

한별 장편 데뷔와 동시에 장편 급의 고통을…. 2권 시작해서 30페이지 만에 굉장히 놀라게 되죠.

(웃음)

진아 도입부에서 은경과 경라의 음습한 복수 같은 거 있잖아요? 그런 게 굉장히 짧은 편지에 확 드러나잖아요. 그런 면도 굉장히 좋았고, 도입부를 세게 치고 간다는 공식도 잘 맞았던 게 아닐까 해요.

한별 복엽기를 목축한다는 발상이나 복엽기로 행성을 전체를 다닐 수 있는 세계관이 재미있었어요. 작가님이 비행기를 날려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진아 <조개를 읽어요> 식의 재미있는 상상력이 보이는 부분들이 있어요. 가축 비행기라든가 새를 유목한다든가. 약간 바꾼 건데 굉장히 신선하고 굉장히 재미있어지고, 그런 부분들이 되게 많이 보여요.

한별 비행기를 유목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 양식을 보면 진짜 유목민이거든요. 약간 비틀었는데 원형은 잘 지키고 있고. 정말 잘 구성하신 것 같아요.

진아 최근 양치기에 대한 자료를 이리저리 찾아봤었는데, 그게 정확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 지점이나, 그런 것도 재미있었고.

ⅱ. 사고조사보고서

진아 그런데 저는 조금 아쉽기는 했어요. 조금만 더 밀도가 있었으면. 그런 느낌? 명훈님의 단편 중에는 굉장히 농축된 밀도를 담는 작품들이 있잖아요. 저도 모르게 좀 더 밀도 있는, 그런 걸 바란 것 같아요. 그런데 약간 좀, 모르겠어요, 제목을 보고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아요. 제목도 신의 궤도고, 조금 더 밀도 있는 SF가 나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그거랑은 방향은 달랐던 것 같아요.

배명훈 왜 자꾸 저를 보면서 말씀하세요, 대답해야 할 것 같잖아요. (웃음)

진아 보면서 말해야 해, 너무 심하게 말하는 건 아닌가, 살피면서 해야지. (웃음)

한별 제목은 ‘신의 궤도’인데 책 안으로 들어가면 목차가 시작되기 전에 바로 ‘나니예 사고조사보고서’로 시작하잖아요? 중간중간에 보고서가 나와서 그런지 소설을 읽다가도 진짜 보고서 읽는 느낌이 나기도 하는데, 이런 어떻게 이런 연출을 하게 되었는지 여쭤보고 싶어요.

진아 보고서를 보면 결국 사건이 얘네 시대에 일어난 게 아니었다는 게 밝혀지잖아요? 이게 반전이 될 수도 있고 허무할 수도 있는 경계에 있어요. 왜냐면 독자들은 읽으면서 끊임없이 긴장하거든요. 그렇게 많은 보고서 중에서 주요 인물들과 상관없는 보고서들도 있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들어요. 개인적인 녹취록이나 라디오에 나와서 녹음한 것처럼 굉장히 사소한 것까지 다 들어가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미 삼천 년 전 일인데. 한두 개 정도 독자들이 ‘이건 뭐지?’ 라고 생각할 정도로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문건들이 그럴싸하게 들어갔으면 덜 허무했을 것 같은데, 은경과 나물에 대한 자료가 많다 보니까 이렇게까지 조사를 했어야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고요. 보고서가 복선 역할을 했으면 어땠을까요?

한별 보고서 내에서 던진 질문점이 보고서 내에서 해결되고, 그런 식이 되었으면 보고서로 봐도 재미있고 소설로 봐도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어요.

날개 외적인 이야긴데, 디테일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나 보고서 외의 다른 것도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는 결국 분량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될 수도 있거든요. 만약 이게 3권 정도의 분량이 되었다면 그런 디테일도 더 들어갈 수 있었을 테고, 보고서도 더 다양하게 들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2권 구성이 아쉽다고 느껴요. 보고서 형식인데 왠지 보고서의 일부만 읽고 있는 느낌? 보고서 전체를 보는 게 아니라 부분만 발췌해 놓은 걸 보는 것 같은 기분이라 미진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허무해지는 느낌도 받았거든요. 이걸 강하게 느끼는 독자라면 안 좋게 생각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요. [신의 궤도]의 장단점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보고서를 작성하는 입장에서는 어마어마한 사고가 나긴 했지만 큰 단위에서 보면 별 게 아닌 거고, 그러면 독자 입장에서는 두 권이나 되는 책을 읽었지만 허탈감에 빠질 수도 있는 거고…. 저도 그런 느낌을 조금 받았어요.

진아 한편으로는 멋있기도 했어요. <닥터 후>라는 영국 드라마가 있는데, 거기에 주인공들이 블랙홀의 궤도에 서는 이야기가 있어요. 항해사가 뚜껑을 열더니 그런 말을 해요. 지금 이 장면 꼭 봐야 한다고. 바깥을 딱 내다보니까 빛이 하나 유성처럼 블랙홀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데, 지금 수억 년 동안 지속된 문명이 사멸하는 순간이라고, 그래서 이 장면은 꼭 봐야 한다고 말해요.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우주선 내에서 사건이 벌어지면서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사고로 우주선 밖으로 튕겨 나가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요. 이게 굉장히 멋있었던 게, 수억 년에 이르는 문명의 죽음과 갓 스무 살 된 여자아이의 죽음을 같이 다루는 거잖아요. 그것도 40분 남짓한 드라마 한 화에서.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수억 년에 이르는 문명이 사멸하는 광경은 바쁜 일을 때려치고서라도 봐줘야 할 것 같은데, 갓 스무 살 먹은 여자애의 죽음은 너무 슬픈 거예요. 거기서 경이감을 느꼈어요. [신의 궤도]도 마지막에 반은 허무하지만 반은 굉장히 좋았던 지점은, 이 난리 끝에 수많은 사람들이 소멸했다는 것. 그렇게 읽으면 굉장히 좋을 수도 있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역시, 독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어야 했어요. 뭔가 어긋나 있다는 복선이 있었다면 그런 느낌이 더 확 오고, 어떤 경이감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점이 약간 아쉬웠고, 또 아쉬웠던 건 이십대 여자애나 칠십대 할아버지나 말투가 너무 비슷해요. 기본적으로 모든 인물들의 말투가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특히 혼잣말 하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느낌들이 너무 일관된 말투로 가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게 명훈님 문체의 특징이기도 해요. 단편에서는 인물도 많지 않고 대사도 그렇게 많지 않아서 티가 안 났는데, 장편에서 여러 인물들이 나오다 보니까 그런 아쉬움이 생기더라고요.

라키난 보고서와 3권 분량과 이야기의 밀도가 다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요, 사실 보고서가 다루는 건 보다 큰 스케일의 이야기고, 이야기에서 따라가는 건 은경과 나물이잖아요? 그런데 뭐랄까, 큰 스케일의 이야기가 너무 늦게 나오고 후다닥 넘어가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보고서 부분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과 맥이 닿는 것 같은데, 그런 점에서 분량을 늘렸더라면 조금 더 균형을 맞춰서 충실하게, 허무함이나 허탈감 없이 쓸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또 한편으로는 이야기의 밀도가 좀 얕다고 느꼈던 건, 이 이야기가 뭔가 정해진 궤도가 있고 하나씩 하나씩 클리어해가면서 단계를 밟아나가는 식으로 전개된 게 아니라, 2권에서 1권의 처음을 되풀이하잖아요? 그런 식으로 뭔가 선형적인 게 아니라 왔다갔다한다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그러다보니까 하나하나를 밀도 있게 다룬 게 아니라 엉성하게 쌓아올렸다는 느낌도 있고. 3권 분량으로 만들었으면 이 구조가 무너지거나 재구성해야 되지 않았을까요?

진아 분량을 안 늘렸으면 좋을 거란 건가요?

라키난 이야기의 분량을 늘려서 차근차근 복선도 넣고, 조금 더 큰 스케일의 이야기도 다루어주고 그랬다면 이 엉성한 느낌이 없어졌겠지만, 그렇다면 지금 [신의 궤도]가 가지고 있는 구조는 완전히 해체되었을 거란 거죠.

진아 저는 엉성하다고까지는 생각하진 않고요, 밀도가 약한 게 아쉽지만 이 자체로 완결이 되어있어서 굳이 분량을 늘리거나 줄여야 더 좋은 글이 되었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물론 제가 보고서에 대해서 이런 내용이 들어갔으면, 이라고 생각했던 건 있지만 그건 몇 쪽 안 되잖아요? 설사 넣더라도 몇 쪽 안 되죠. 이 이야기 자체로 변별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예쁘게 잘 쌓아 올린 탑이고, 정점을 향해서 많은 사건들이 달려가고 있고.

ⅲ. 막막한 전쟁

진아 저는 제가 직접 읽기 전에는 리뷰도 안 보고 서평도 안 보고 아무 것도 안 보거든요. 그냥 생짜로 부딪히는 편인데, [신의 궤도]는 좀 아기자기한 느낌이었어요. 등장인물 이름도 반소매, 민소매 이러고. 이름 자체로도 재밌지만 지구의 문명이 미묘하게 남아있다 보니까 보통명사가 고유명사로 바뀌어서 녹아 들어간 거나, 그런 자잘하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전쟁 장면이나 전투 장면도 재미있었고. 명훈님은 설정이나 전황, 과학적인 사실, 그런 것들을 서술로 풀이할 때 재미있어요. 전열을 갖추고 하는 전쟁 장면들도 재밌었어요. 그런 장면은 잘못 쓰면 논문인지 소설인지 모르게 되기도 하는데.

한별 전쟁 장면 같은 경우는 지금까지 읽었던 소설들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었어요. 이해하기도 쉽고.

라키난 읽다 보니까 느낀 게, 사람이 죽는 게 그렇게 슬프거나 잔인하다는 느낌이 별로 없어요.

날개 대사도 문체도 일관성 있잖아요? 전쟁 상황에서 극한의 긴장감, 이런 문체의 높낮이가 없이 일관적으로 유머스럽고 담백하게 간단하게 서술이 돼서 인물들이 살아있는 캐릭터로 보여지기 보다는 게임 캐릭터적인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전략이나 비행전술을 재밌게 읽었는데, 인터넷 감상을 보면 전쟁 장면이 지루했다는 의견도 많더라고요. 전쟁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지루했구나, 라는 걸 느꼈어요.

한별 이 정도면 친절하게 잘 되어 있는 전쟁 장면인데.

날개 그걸 가장 재미없게 본 사람이 많더라고요.

라키난 그걸 전부 이해하고 읽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읽으면 거기서 막힐 것 같아요.

날개 그 파트가 분량을 많이 차지한다는 거죠.


Ⅱ. 신과 인간과 숭고함

ⅰ. 신화적으로 읽기

진아 복제인간 같은 SF적 설정 같은 것들이 많이 흔해졌어요. 그래서 작가가 그걸 쓸 때 그걸 어떻게 써야 하는지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됐어요. [신의 궤도]는 그런 면을 굉장히 능숙하게 넘겼다는 생각하는 게, 옛날 같으면 본인이 복제인간인 걸 알면 엄청난 충격을 받고 괴로워하고 그랬을 텐데, [신의 궤도]에서는 너무 담담하게, 독자들이 눈치를 채서 모를 수 없는 지점에서 가볍게 인정해주는 거죠. ‘그럼 나도 알고 있었어. 너네 읽었잖니?’ 이런 식으로.

한편으로는 경라와 은경 사이에 굉장히 살벌한 감정의 골이 있잖아요? 그게 이 두 사람의 상황이면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는데 안타까운 게, 결국 바람 핀 아버지와 배다른 언니를 증오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라서 그런지 무려 두 권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도 약간 소품 같은 느낌이 들어요. 갈등의 시작이 그게 아니었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갈등의 시작이 그게 아니라 다른 문제였다면 조금 더 우주적인 존재의 이야기로, 더 높이 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야기 자체는 굉장히 좋았어요. 멋모르는 아버지의 철없는 사랑 같은 거. 아버지는 은경을 위해서 비행기만으로 모든 게 가능한 세계를 만들어줬는데 은경이는 그게 끔찍하게 싫을 수도 있고, 그런 엇갈리는 것? 감정선도 좋았고 전반적으로 굉장히 좋았는데도, 이야기가 그런 작은 문제에서 시작 되서 그랬는지 약간 소품처럼 느껴져요.

앤윈 인터넷에서 제가 봤던 신의 궤도에 대한 악평 중에 ‘막장 드라마’라는 게 있어요.

배명훈 그게 왜 악평이죠? (웃음)

(웃음)

앤윈 이거 그냥 막장 드라마의 SF판 아니냐, 그런 식의 글을 봤는데, 저는 가족사에서 출발해서 신화 같은 느낌이 든다고 생각했어요. 예수에게서 상징화되는 신의 딸인 은경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은경은 적자(嫡子)가 아닐 수 있다는 거죠. 구약의 신이랑 신약의 신은 다르잖아요? 구약의 신은 사람을 엄청 가혹하게 대하는데 신약의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노력한단 말이죠. 인간의 몸을 입은 은경이 인류에게 예수 같은 역할을 수행하려면 그런 가족사적 속성이 필요한 거죠. 예수도 엄청난 일을 하지만 결국에는 ‘아버지 저에게 왜 이러시나이까’를 계속 반복하잖아요. 저는 그런 느낌이라서, 가족사에서 출발해서 이야기가 신화 같은 느낌이 생긴다고 생각했어요.

진아 오, 그렇게 생각은 못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멋있네요.

앤윈 계속 부활하잖아요.

라키난 그러고 보니까 그런 게 있어요. 그리스 고전 비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위대해지기 위해서 평면적일 수밖에 없거든요. 경라는 굉장히 평면적이잖아요? 한 번 증오하기 시작했는데 이 증오가 나이를 먹어서 어른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고착되어 있고, 이게 전혀 변하지 않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더 소품 같은 느낌이 드나 싶기도 한데, 또 한편으로는 그리스 고전 비극은 인물에게 자유를 줘요. 오이디푸스의 예를 들자면, 오이디푸스가 같이 잔 여자가 자기 어머니라는 걸 알게 되는 건 그 인물의 자유에요. 그리스 고전 비극은 그런 식으로 인물에게 선택할 여지를 줘서 위대함을 부여해요. 운명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인물이 그 상황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위대함이 주어지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인물이 성격이 변해서 후회하고 고민하고 갈등하면 위대함이 없어져요. 왜냐면 그러면 평범한 인간이 되니까. 그런 기술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경라와 은경은 그렇게 변화한다는 느낌이 드는 인물은 아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은경이가 폭발할 것을 아는 첼린저 호에 탄다거나 하는 상황이 의미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날개 그런 식의 해석이 들어가면 색달라지는 것 같아요. 막장 드라마나 경라의 스토커 이야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그렇게 시선을 좁혀버리면 이 소설의 여러 가지 함의를 못 보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거든요. 저는 소품 같은 느낌을 배제하고 다른 측면들에 집중을 했거든요. 우주선 이야기라든지, 전체적으로 다른 걸 읽어내려고 했었고, 그런 측면에서 저는 재미있게 읽었는데 사람들이 다른 협소한 지점에만 집중하려고 해서 아쉬웠어요. 그런데 그게 이 책의 도입부를 친근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도 한다고 봤어요. 처음에 평범한 일상을 이야기하다가 몇만 년을 뛰어넘는 부분과 엄청난 경이감과 재미를 느꼈거든요.

앤윈 몇만 년을 한 번에 뛰어넘는 바람에 놀라기는 했어요. ‘지금부터 이런 이야기가 펼쳐지… 뭐라고?!’ 이런 느낌이긴 했는데, 저는 이 책을 기독교 신화에 중점을 맞춰 읽었어요. 자폭해서 세계를 구하려, 책무를 떠안고 지상에 떨어진 신의 딸 은경에게 계속 초점을 맞춰서 읽었거든요. 은경이 새로 태어날 때마다 누군가 계속 은경에게 ‘너는 신의 딸이야’라면서 말해주잖아요. 부여되는 어떤 게 있고, 그걸 깨닫고, 희생하기로 결의해서 나아가기까지의 은경의 감정이나 태도에 주목하면서 읽어서 되게 좋았어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인간을 구하기 위한 신화니까요. 사람과 사람의 신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세계가 다시 뒤집히는 순간이기도 하고. 그런 점들이 되게 좋았어요.

라키난 읽는 사람들이 보다 신화라는 느낌을 느끼게 하려면 그것에 걸맞은 장엄함 같은 것들이 깔려야 하는데 ‘신의 딸’ 같은 표현이 일상적으로 나와서 몇만 년의 신화 자체가 소품 느낌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뭐랄까, 세계를 만들었는데 ‘신화창조야, 세계창조야!’ 이런 게 아니라 ‘아 그렇구나, 아버지가 딸을 사랑했구나, 철없는 아버지 같으니라고’ 이렇게 반응하게 되어버리잖아요.

ⅱ. 복잡한 서랍

앤윈 제가 그렇게 읽어서 아쉬운 게 있다면, 요소가 너무 많아요. 서랍이 있다고 하면, 안에 물건이 너무 많은 느낌이에요. 없는 거보다는 많은 게 낫다고 생각지만, 서랍에서 양말을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진아 저도 동의해요. 조금만 더 절제해서 몇 개만 더 덜어냈다면. 조금만 더 다이어트를 했으면 밀도가 더 올라갔을 것 같고. 그리고 저도 듣다보니까 이 소설을 신화적으로 읽는다는 걸 제가 생각을 못 했던 것 같아요. 그럴 거면 차라리 보고서 부분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해요. 보고서가 없었다면 이 글이 조금 더 열린 구조처럼 보이지 않았을까요? 아기자기한 소품도 많고 뻗어나갈 가능성도 많은데. 그리고 저는 독자들이 막장 드라마에 집중하게 되는 이유가 경라와 은경이 서로 증오하는 장면이 이 소설 전체에 걸쳐서 가장 강렬한 감정이 느껴지는 부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은경과 나물이 사랑하는 게 그렇게 절절하게 와 닿지 않고, 혁명군들이 혁명을 위한다고 말하는 것도….

앤윈 오히려 미은이 나물을 사랑하는 게 훨씬 절절하게 느껴져요.

진아 맞아요. 도입부의 경라와 은경 자매의 격렬한 감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어디에도 없어요. 그게 너무 색이 강해서 다른 것들이 묻히고 있어요.

앤윈 미은이 사랑하지 은경이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걸 만약에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인간에 대한 총체적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훨씬 더 위엄 있게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아 감정을 구구절절 묘사하지 않아도 은경이 나물에게 ‘나 너 몰라’라고 했을 때 독자가 놀랄 수 있을 만한 요소가 조금만 더 강했다면….

앤윈 은경이 “죽을 수도 있죠”라면서 우주선에 타잖아요. 그 장면이 굉장히 감동적이고 비장한 장면인데 그런 분위기가 강하게 들어 있지 않고 경라의 증오가 훨씬 더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 장면에서 은경의 희생에 대한 감동이 약간 떨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라키난 아까 서랍에 뭐가 너무 많이 들어있다는 느낌이라고 하셨잖아요? 서랍에 뭐가 많이 들어있어도 구획 정리가 잘 되어 있으면 괜찮거든요. 분류할 수 있으면 괜찮은데, 은경이 “죽을 수도 있죠”라고 하는 부분이 경라의 증오랑 얽혀있고, 아기자기한 부분이랑 얽혀있고.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한 소품 분위기로 덮여있기 때문에 양말들 사이에 있는 나이프나 경전이나 보고서 같은 것들이 전체적인 분위기에 덮여서 고유의 분위기를 내지 못하고, 어떤 의미를 낳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앤윈 저는 아기자기한 분위기 속에 칼날이 숨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은 굉장히 좋아요. 지금 그 이야기 하시니까 생각이 나는 게, 히스토리오그라피아 타뮤로니안, 우주선의 사가(史家) 부분에서는 아기자기한 것 안에 응축된 슬픔 같은 게 굉장히 잘 느껴졌어요. 그런데 주인공인 은경은 사가만큼 슬픔이나 그런 게 응축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진아 저도 동의하는 게, 은경이 몇만 년 후로 날아가기 전에 비행에 대한 갈망이 있었잖아요. 그건 굉장히 절절하게 와 닿았어요. 그런데 수없이 죽으면서 목숨을 걸고 비행하는 부분에선 그만큼의 절절함이 안 느껴지는 거예요. 앞에서는 학비, 증오하는 아빠한테 도움 받기, 이상한 마피아, 이런 것들이 은경을 스트레스 상황으로 몰아가는데도 ‘난 저걸 해야 돼’ 하고 갈망하는 게 느껴졌는데, 뒤에서는 목숨을 거는데도….

앤윈 이야기 듣다 보니까 뭐가 그런 느낌을 받게 하는지 약간 깨달았어요. 은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은경이에요. 그러니까, 구세주로 각성하는 기회가 없어요. 양질전환이 안 된다고 해야 하나?

라키난 각성이 되긴 되는데 너무 은근슬쩍 넘어가버려서 느껴지지 않은 거예요.

앤윈 은경이 다른 것들이랑 결합해서 새로운 은경이가 된 순간은 알겠어요. 그리고 그걸 분명히 보여주려고 하신 부분도 알겠는데, 은경의 감정과 사람들의 감동으로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고리가 약한 것 같아요.

라키난 의미나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는 요소는 많이 있어요. 계속 반복되는 첼린저 호의 추락이라든가 궤도를 반복해서 도는 것들, 혹은 나니예 사람들이 믿는 신이라든가, 그런 것들과 연결을 시키면 경이감이 느껴지는데 그게 좀 약해요. 은경이의 “죽을 수도 있죠” 라는 대사나 첼린저 호의 폭발이 짠하게 와 닿아야 하는데, 그 주변에 뭐가 너무 많아요.

앤윈 다른 것에 신경을 많이 쓰다보니까 거기까지 신경을 쓸 기력이 없는 것 같아요.

라키난 그래서 읽고 나면 다른 이야기가 굉장히 많은데도 불구하고 기억이 나는 건 막장 드라마라고 하게 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에요.

앤윈 그래도 역시 전 은경이가 그렇게 죽음을 결심한 게 너무 좋아요. 제가 거기에 이입해서 읽어서 그 부분에서 폭발적인 감정을 느꼈으면 펑펑 울었을 것 같은데, 제가 운 건 사가 부분이거든요.

배명훈 한 번 울었으면 됐죠. (웃음)

(웃음)

진아 은경이 계속 죽음을 택하는 장면을 무덤덤한 톤으로 그렸으면 실제로 우주선이 폭파되는 걸 몇 번 그리는 것도 괜찮았을 것 같아요. 작가가 너무 앞서서 설명해준 것 같아요. ‘은경은 그렇게 프로그래밍 된 애야’ 라고. 독자가 그걸 깨닫는 순간 은경의 희생이 너무 기계적이 되어버려요.

라키난 그렇게 프로그래밍 된 걸 알아도 충분히 감정이입 할 수 있잖아요? 어쨌거나 은경이 선택을 하는 거니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데, 은경에게 감정이입이 잘 안 돼요. 그게 문제인 것 같아요.

앤윈 1권까지는 폭풍 감정이입 되지 않았어요?

라키난 그랬는데. (웃음) 2권에서 조금 멀어진 다음에 다시 은경에게 가는 게 안 되는 것 같아요.

앤윈 은경이가 자꾸 ‘새 사람’이 돼서,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왜, 얘랑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바뀌어서 못 알아보면 놀라는 것처럼. 계속 은경이 새 사람이 되니까 안쓰러우면서도 감정선을 따라가기가 힘들어요. 어쨌건 그건 다른 인간이니까요. 그게 작가가 의도한 걸까요?

라키난 그건 그래요. 은경이 계속 새 사람이 되는데, 이게 같은 인물이라고 보기도 애매하고 다른 인물이라고 보기도 애매하고. 다른 인물이지만 같은 은경이다, 이것도 잘 안 돼요.
앤윈 그건 사실 애매할 수밖에 없는 문제 같기도 해요.

라키난 1권의 은경은 나물을 보고 ‘바클라바다’ 하고 인간적인 스케일에서 고민하는데, 2권에 가면 은경이 나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클라바 사랑해’나 ‘나물아 사랑해’가 아니라 ‘내 너를 사랑하리라’가 되어버린단 말이죠. (웃음) ‘사랑해’가 ‘내 너를 사랑하리라’로 스케일이 변하고, 1권의 은경이 반복되는 프로그램이 돼서 세계랑 연관이 되는데 그 스케일이 안 느껴져요. 크다는 건 알겠는데. 감정이입의 문제인 것 같아요.

앤윈 나니예가 작은 행성이라서 더 그런 느낌일까 싶기도 해요.

진아 나니예는 사람이 사는 곳 같지는 않아요. 제가 계속 애매하게 느끼는 게, 나니예 행성의 폭발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단 말이죠. 그런데 그게 독자에게 한 번도 위기감으로 안 와요. 그 부분을 담담하게라도 그려줬어야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첫 번째 은경이가 굉장히 오래 나왔단 말이에요? 그런데 너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요. 독자들의 마음 한 구석에 첫 번째 은경이 계속 남을 수도 있는데,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어요. 물론 짐작을 하게는 했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이 은경도 저렇게 죽겠구나, 라는 걸 느낄 수 있게 해줬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라키난 맞아요, 1권의 은경과 2권의 은경의 연결고리가 뚜렷하지 않아요.

진아 너무 애매한 시점에서 죽어요. 차라리 첫 은경이 1권 말에 사라지거나 다른 은경이 조금 더 빨리 등장해야 했다고 생각해요. 1권 마지막에 은경이 죽으면서 끝났으면 괜찮았을 것 같은데, 너무 낚신가. (웃음) 분책을 많이 해보신 분들은 분량에 따라서 마지막 권 배치를 하시기도 하더라고요. 분책을 할 때는 그런 스킬도 조금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첫 은경이 너무 어정쩡한 시점에 너무 허무하게 사라져요.

라키난 최소한 첫 번째 은경에 대한 두 번째 은경이의 감상 같은 것들이 있었으면 첫 번째 은경에 대한 태도를 뚜렷이 할 수 있었을 것 같기도 해요. 그런 서술이 있기야 있는데, 모든 은경에 대해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느낌이란 말이죠.

배명훈 내 은경이에요, 건들지 마세요. 나만의. (웃음)

(웃음)

ⅲ. 은경의 내면

진아 저는 가끔 은경이가 예쁘다는 묘사가 나올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요.

앤윈 저도요. 저도 놀라요.

진아 너무 낯설어. 그 표현이 너무 뜬금없이 등장해요. 인물을 제대로 서술을 한 번 해주고 시작했어야 했다고 생각해요.

앤윈 은경이 왜 예뻐야 하는 거예요? (명훈 보며) 왜 예뻐요?

진아 여자주인공이잖아요. 여자 주인공은 예뻐야 해요. (웃음) 그런 식으로 순간순간 위화감이 들기 때문에 은경이 살아있는 인물 같지가 않고, 살아있는 인물처럼 안 느껴지니까 희생도….

라키난 명훈님 작품을 계속 따라가면서 읽었기 때문이겠지만, 저는 은경이 무슨 짓을 하면 이 소설의 은경이 보이는 게 아니라 ‘은경아 너는 여기서 이러고 있구나’ 이런 느낌이에요. 마치 영화 <해리 포터>를 보면서 데이비드 테넌트를 발견하고 ‘닥터 왜 거기 있어? 이번엔 미친놈이야?’ 하게 되는 것처럼.

앤윈 그건 좋은 것 같아요. 은경이 늘 나오고, 그 은경이 같은 은경으로 여겨진다면 그건 작가의 매력적인 장점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자면 <400번의 구타>를 만든 프랑수와 트뤼포 감독은 똑같은 배우를 계속 쓰는데, 그걸 보면 배우의 일대기를 다루는 것 같아서 되게 매력적이거든요.

라키난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는 성우가 같기 때문에 가능한 성우 개그가 있잖아요? 성우 개그가 재미있으려면 기본적으로는 그 작품의 캐릭터에 충실해야 하는데, 저는 모든 은경이가 두루뭉술하다는 느낌이었어요. 소설 내의 요소들에 대해서도 ‘이건 어디서 나왔던 요소랑 비슷한데?’ 같은 게 좀 많았고.

앤윈 전 이 소설에서 은경이라는 캐릭터에 불만이 있다면 그냥 그 정도에요. 은경이 정말 가장 중요한 일을 행하는 순간에 은경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 게 가장 아쉬워요. 그 순간에 나물의 감정은 분명하게 알겠는데, 아직도 은경의 감정은 잘 모르겠어요. 다시 읽었는데도 잘 모르겠어요.

진아 인물의 심리를 파고 들어가는 소설은 아니긴 해요. 인물의 심리를 깊이 있게 파고, 인물과 정서적인 공감을 일으키거나, 이런 종류의 소설은 분명히 아니에요. 작가가 그걸 바라고 쓴 소설은 아니지만, 작가가 가려는 목적지에 독자들이 같이 가기 위해서는 그런 면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는 거죠. 여기서 독자가 충격을 받을까? 이쯤에서 이걸 던져줄까? 안타까운 지점이 거기서 나오는 것 같아요. 굉장히 많이 생각하고 풀이하고 해석을 하면 분명히 굉장히 멋있는 책인데… 아서 C. 클라크 같은 작가도 감정선을 서술한 작가는 아니지만 그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 제 마음 속에 어떤 감정선이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란 말이에요.

앤윈 제가 원했던 건 심리를 파고드는 게 아니라 그런 거였어요. 내가 죽으러 간다고 하면 그럴 때의 감정이 있잖아요. ‘내가 어때어때어때’ 말해주지 않아도 ‘이런 상황이야’라고 했을 때 기본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부분들. 전 이 책을 증오를 다른 무엇에 대한 사랑으로 뛰어넘은 이야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세상을, 인류를 구하는 게 한 메시아가 아니었던 거죠. 나물이 있었고 그를 도운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래서 저는 은경의 심리가 어느 정도는 메시아의 심리에 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은경이라는 인물이 그렇게 변화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줘야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부분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라키난 그래요, 은경이가 세계를 구한다는 느낌이 별로 없어요. 맥락을 따져보면 은경이 희생해서 세상을 구원하는 것 같긴 한데, 서술이 은경을 따라가는데도 불구하고 은경이 세계를 구하려고 할 때 세계를 구하러 간다는 느낌이 별로 없어요.

날개 저는 이렇게 은경을 특별히 묘사한 게 작가의 의도 같아서 함부로 생각을 정리를 못 하고 있었는데, 저도 비슷하게 느꼈던 것 같아요. 1권의 은경은 어드벤처 게임을 할 때 플레이어의 느낌이었다면 2권의 은경은 NPC가 되어버린 거예요. 은경의 감정이나 사고나 생각을 잘 읽을 수가 없어서 NPC구나,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게 여러 사람들에게 아쉬움 같은 걸 느끼게 하는 것 같아요. 은경이가 당차고 거침없고 그렇긴 한데 그게 기호적이라서. 아까 은경의 위치와 예수의 위치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는데, 성경에서도 예수가 잡히기 전에 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는 것처럼 고민하는 지점을 한 번은 내비치잖아요. 이 책에서는 그런 게 없어요.

저는 또 떠올랐던 게, <에반게리온>을 보면 레이라는 캐릭터가 은경과 비슷한데, 레이 같은 경우는 왠지 지켜주고 싶고 안쓰러운 감정이 들었는데, 그게 왜 그런가 생각하면 어떤 감정이입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은경은 그런 면이 너무 없었던 것 같아요.

앤윈 은경이과 레이 중에서는 레이가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에반게리온>을 볼 때 신지의 눈으로 보지 레이의 눈으로 안 보잖아요. 그런데 [신의 궤도]는 은경의 눈으로 봐야 되잖아요. 레이는 물건으로 볼 수 있도록 대상화된 캐릭터죠. 레이 쪽이 훨씬 그리기 편했을 거예요.

라키난 은경이 아무 생각이나 감정 없이 행동하더라도 다른 인물들의 피드백을 받으면 독자들은 인물에 이입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나물이나 다른 인물들 역시 은경을 이해하지 못한달까, 캐릭터는 이해한 것 같은데 독자는 모르겠달까.

날개 독자나 나물이나 비슷한 위치였던 것 같기도 해요.

ⅳ. 신을 대하는 패기

진아 그게 생각이 나요. 아서 C. 클라크의 <낙원의 샘>이라는 작품을 보면 할아버지가 심장에 무리가 있어서 심장 안에 경보기가 들어가 있어요. 할아버지가 그걸 달고 굳이 밖에 나가서 고쳐야겠다고 우겨요. 그러다가 중간에 심장마비가 한 번 와서 기절하고, 경보음이 울렸는데 우주라서 119를 부를 수 없는 상황이고, 다시 도전하고. 이런 과정이 몇 쪽 안 되게 나오는데 거기에 목숨을 걸고라도 저 일을 반드시 하리라, 그런 서술은 전혀 없어요. 굉장히 담담하게 진행하는데, 숭고함이 보이거든요. 여기서 독자가 개입할 여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게 그런 방식인 것 같아요. 많이 안 들어가도 돼요, 한 장면만 빛나도 독자가 알아서 각인하기 때문에.

앤윈 제가 느낀 감정이 딱 그거였던 것 같아요. 은경이 숭고하지 않은 건 아닌데, 약간 모자라요.

진아 꼭 그 방식을 권하는 건 아니지만 구구절절 감정을 파는 것보다는 그런 게 명훈님 소설과 어울리는 방식이 아닐까 싶어요.

콜린 뒤로 가면 신에게 가느냐 못 가느냐가 중요한데, 가잖아요. 한 권 반을 쌓아 와서 드디어 잡은 건데, 제가 보기에는 성공한 것 같아요. 독자로서 쾌감도 있고. 읽고 나서 우리가 경이감 같은 무언가 받을 수 있는 SF 장편 소설이 나오길 기다렸는데 저한테는 [신의 궤도]가 처음이었어요. 물론 그 전에도 SF 장편은 있었고 훌륭한 단편도 있긴 했는데 장편에서는 처음 느꼈고, 배명훈이라는 작가가 두 번째 책을 통해서 얻은 경이로움이 10년 후에 새롭게 평가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한국 SF에 몇 번의 분기점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번이 [신의 궤도]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고, 데뷔작 같기도 하고 복잡한 글이기도 한데 복잡해서 좋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다가 끔찍하기도 하다가 냉정하기도 하고. 상관이 없는 이야기인가 싶으면서도 나중에 읽어보면 상관이 있고, 이렇게 복잡한데 그래서 좋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작품에 있어서 뭔가 하나를 성취했을 때 단점도 장점이 된다고 보는데, 그런 글이 아닐까 싶어요. 굉장히 좋게 봤어요.

앤윈 제가 요소가 많다고 말한 그 부분에서 패기를 느끼긴 했어요. 정리를 못할 지도 모르지만 하고 싶은 걸 다 집어넣고 ‘난 정리를 할 수 있을 거야’ 라는 그런 패기.

콜린 그걸 장점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단점으로 보는 사람도 있잖아요? 저는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라키난 맞아요, 몇십 년 쓰신 분들은 딱 적절하게만 넣잖아요. 그게 아니라 막 넣어서 불탄다! 뭐 이런 느낌?

앤윈 제가 처음에 찾기 힘들긴 하지만 적은 것보다는 많은 게 낫다고 했잖아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기보다는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느낀 그 기분이 제가 ‘패기’라고 표현한 장점이랑 연결되어 있겠죠. 저는 그 연결고리를 찾아내는데 고생했는데, 그 연결고리가 조금 더 깔쌈하게 보이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라키난 시작에 신에 대한 존재론과 관념론, 신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이런 게 되게 중요한 듯 등장하는데 은경이가 워낙에 신이 안중에 없다 보니… 신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쪽으로도 이야기가 나와야 될 것 같아요. 우주선이나 은경이가 신의 존재에 도달하는데도 불구하고 신이 좀 안중에 없어요. 제우스가 아무리 바람을 펴대고 기독교의 신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신이기 때문에 신에 덧붙여지는 온갖 인간의 해석과 숭고함, 위대한 감정들이 있잖아요. 이 층은 잘 구성이 안 된 것 같아요.

진아 문득 생각난 건데, 적자가 나쁜 놈이고 배다른 딸이 구원자라는 것도 재미있네요. 저도 까먹고 있었는데, 신을 장난처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소설이 흔하지 않거든요. 이런 구도(求道) 소설류를 보면 신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애틋하고, 깨달음이 무언지는 단 한 번도 직접 서술하지 않아요. 단지 그 과정을 통해서 인물이 무엇을 느꼈고 깨달았고, 그걸 막연한 형태로 독자에게 전달하죠. 그런데 [신의 궤도]에서 신은 너무 확고한 존재를 가지고 있어요. 심지어 망원경으로 신을 찾으려 하고. 그래서 신은 이론상으로만 존재한다와 실제 존재한다는 팽팽한 싸움에서부터 그렇게, 신을 가지고 노는 소설이잖아요. 사실 이거야말로 젊은 작가의 패기가 아닐까요.

앤윈 맞아, 멋있어요.

라키난 분명히 신을 그렇게 정면으로 다루는데도 불구하고 신에 대해서 잘 생각이 안 들잖아요?

진아 한쪽에서는 절실하게 신이라고 믿는데, 은경에게는 그냥 망나니 아버지이기도 해서.

라키난 ‘신의 딸’에서의 신이 아니라 나니예 궤도를 도는 신의 존재가 있잖아요? 은경이 목표로 만나러 가는 신이 사실 어떻게 보면 우주선 잔해고 어떻게 보면 신이고, 그런데 이게 딱히 의미가 부여가 되지 않았다는 느낌이에요. 예를 들면 <하느님 끌기>라는 소설이 있는데, 여기는 신의 시체가 나와요. 이걸 북극으로 인양해 가는 게 내용이거든요. 여기서 신부랑 수녀가 나오는데, 시체를 볼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신은 죽었잖아요? 하느님 시체 앞에서 ‘그런데 신은 죽었잖아?’ 하고 패닉에 빠져요. 이런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신의 궤도]에서는 신의 존재가 그렇게 이야기의 전면에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의미부여를 안 한다는 느낌이에요.

앤윈 신의 의미라고 이야기하셨잖아요? 신은 원래 존재가 의미잖아요. 신은 존재하면 그걸로 의미가 생기는 거잖아요. 신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신에 대해 연구하고, 이러는 사람이 있다는 게 재기발랄하기도 하지만 신의 본질적인 의미는 훼손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존재함으로서 사람들에게 의미가 되고, 의미 자체가 또 의미가 되고. 의미로서 의미를 재생산하면서, 그냥 존재하는 것? 그건 그대로 살아있다고 생각해요.

라키난 우주선의 오랜 삶과 신의 존재와 은경이의 반복되는 죽음이 ‘신의 궤도’와 연관시키면 아까 이야기가 나왔던 숭고함 같은 의미 해석의 여지들이 태어날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게 잘 연관이 안 돼요.

ⅴ. 붙이는 이야기

진아 이제 작가의 변도 있고 합평작도 밀려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 한 번씩 하고 정리하도록 할 게요.

라키난 반소매, 민소매 장군 너무 좋아요. 이 말이 꼭 하고 싶었어요. (웃음)

날개 이 소설은 어떻게 보면 끝이 이상하게도 닫힌 결말이라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어떤 의도가 있는지 작가분의 언급을 듣고 싶은데, <초록연필> 같은 경우는 인공위성으로 마지막에 목적을 달성하면서 희생자가 발생하고 이 소설에도 마지막에 행성을 구하기 위해서 희생자가 발생하잖아요. 그 존재들은 소설 외부에 있어서 묘사도 잘 안 되고, 우리가 추측할 수밖에 없어서 그 존재들의 미래 같은 것은 상상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데, 소설의 결말에 대한 작가의 의도가 궁금해요.

앤윈 지금까지 하지 못한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혁명군이 나오잖아요? 명훈님이 군대가 서로 싸울 때 진형이라든가, 이런 것에 대해 묘사하시는 걸 보면 훨씬 더 잘 쓰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에서의 혁명군이 굉장히 파편화된 게릴라 같은 느낌이라 조금 아쉬웠어요. 다음에는 조금 더 조직적인 무언가를 보고 싶어요. 미은 같은 인물들이 사실 혁명군 자체라기보다는 그 안의 일부잖아요. 그게 조금 잘 드러나지 않아서. 다음에 그런 게 보고 싶어요. 팬심? (웃음)

콜린 사람들이 원한 걸 딱 보여준 것 같아요. 담론을 아우른다고 해야 하나? SF는 작은 게토지만 그 안에는 담론이 원하는 게 있고, 작가들의 목표도 있고, 복잡한 지형도도 있는데 거기에 뭔가 해답 내놓은 것 같아요. ‘이게 한국 SF라는 덩어리에 대한 내 해답이다, 어떠냐?’는 느낌? <타워>랑 <안녕, 인공존재>까지 생각해보면 훌륭한 한 걸음인 것 같아요.

진아 작가가 되게 듣고 싶은 말인데.

앤윈 콜린님은 말씀하실 때마다 SF에 대해서 통시적이에요.

콜린 미시적인 걸 준비 못 했어요. (웃음)

진아 미시적인 이야기는 우리끼리 많이 했고, 멋진 말 해주신 것 같아요. (웃음) 저도 마지막으로. 저는 혁명군이 자기들이 납치했다고 믿는 장면에서 미치겠는 거예요!

(웃음)

앤윈 그때 생각했어, 얘네 혁명 못 할 거야. (웃음)

진아 너무 귀여워가지고 정말. 걔네 둘로 단편 소설 하나 써주세요, 너무 사랑스러웠어요.

앤윈 사람들이 조직으로 존재하지 않고 떨어져 있으면 얼마나 망가지는지….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웃음)


Ⅲ. 작가의 변

ⅰ. Q&A

진아 작가의 변 시작할게요.

배명훈 오랜만에 [신의 궤도]를 다시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서 들어보니까 되게 재밌네요. 책 뒤에 작가의 말을 보면 모니터 과정을 많이 거쳤다고 했는데, 그때 나온 것들 중에 오늘 말이 나온 문제들도 여럿 있었어요. 이걸 넣는 게 좋은가 빼는 게 좋은가, 어느 부분을 강화하는 게 좋은가 죽이는 게 좋은가, 분량이 더 컴팩트한 게 좋은가 늘리는 게 좋은가. 여기에서는 분량을 더 늘리는 게 좋다는 쪽이 우세한데 그쪽에서는 더 줄이는 게 좋다고 했고, 그런 과정을 거쳤어요. 작가의 말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썼는데, 모니터 과정에서 1년에 책 한 권 읽는 독자나 편집자들도 재미있다고 해서 ‘나는 재미있다’고 선언하고 낸 책이라는 의미에요. 저는 여기 들어가 있는 많은 요소들을 중심을 잡고 끌고 갔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출판을 해도 된다고 결정했어요. 1권에서 속도가 느리다가 2권 중간 이후부터 속도가 촥 올라가게 썼다고 생각해요. 저는 분량을 더 늘리고 싶었는데 더 늘릴 수는 없어서 아쉬웠는데, 분량이 압축되면서 구조가 복잡해진 부분도 있고 더 썼어야 하는 부분인데 여유가 없었던 부분도 있고. 그게 아쉬운데, 1권 중간 이후부터 2권까지 가는 흐름이 다시 쓴다고 이렇게 쓸 수 있을까 싶게 나와 있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굉장히 만족스럽게 생각해요. 이건 오히려 잘못 손대면 흐트러지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대목이 아마 그 대목일 거예요, 여기에서도 이야기를 할 때 결국 인물분석으로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제가 쓴 느낌은 인물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세계에 대한 거예요. 신문 같은 곳에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이 짧게 나오면 처음 들어갈 때 ‘재벌가의 서녀 은경이는’ 이렇게 들어가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들어가길 바라는 게 아니라 위에서부터 들어오길 바라는 입장이에요. 서문으로 사고조사보고서 형식이 들어가게 된 세 가지 이유 중 하나에요. (웃음) 여러 관점, 여러 시점으로 썼는데 제가 그리고 싶었던 건 세계니까 이걸 통일하고 싶지 않았어요. 다른 두 가지 이유는 생략하고, 제가 생각하는 구조는 관리사무소라는 북반구의 도시문명 세계와 남반구의 유목적인 세계의 싸움이라고 해야 되나? 이 책의 주제라면 나니예라는 세계 전체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이에요. 무너질 것 같은 낙원인데, 왜 무너지느냐? 원죄 때문에 무너지는데, 거기에 대한 답으로 신이라는 게 있어요. 이 신은 <안녕, 인공존재>의 신을 확장한 신인데, <안녕, 인공존재>의 신은 개인의 존재에 대한 답을 줘야 하는 그런 존재였다면 나니예의 신은 세계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답을 줘야 하는 존재로 설정을 해놨어요. 북반구와 남반구, 그리고 천문교까지 해서 세 개의 세계에서 신을 찾아야 답이 된다는 건 알고 있는데 그 답이 무엇일지는 다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거죠. 각각이 어떤 세계의 반응을 가지고 있는 거죠. 남반구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관리사무소장은 활주로만 가지고 있지 나머지는 다 우리 땅이야” 라고. 완전히 다른 하나의 나니예를 가지고 있는데, 각자 어느 세계관으로 이 세계를 이야기 할 것인가 하는 싸움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날개님의 질문에 대한 답은 그래요. <안녕, 인공존재>의 존재를 세계로 확장한, 인공존재를 뛰어넘은 나니예라는 세계. 존재폭발이라는 테마를 가져왔는데, 폭발이라는 테마가 제 옛날 단편들에 쭉 나오잖아요. 멸망하게 되는 폭발. 제 안에서는 폭발의 파괴력을 보여주기 위한 거였던 것 같아요. ‘이게 이만한 폭발을 일으켰어, 이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였어’ 라는.

ⅱ. 인물 분석에 대하여

배명훈 인물 중심으로 글을 읽고 나서 글을 해석을 할 수 있는 다양한 길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오늘도 한 길이 아니었고, 저는 그게 매력 포인트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리뷰들을 보면 한국에서 소설을 읽고 나면 이런 식으로 리뷰를 하라는 방법이 있는 것 같아요. 분석에 들어가면 인물 분석을 해요. 분명 읽었을 때는 그렇게 안 그렇게 읽었을 것 같은데. 그걸 느낀 게, 편집자들도 처음 읽었을 때는 분명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는데 ‘나중에 열심히 읽을 게요’ 라고 해요. 편집자들이 열심히 읽는다는 건 인물 관계도를 그리는 거예요. 거기서 처음 읽었을 때하고 다른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 같아요. 그걸 국제정치학에서는 인물에 이야기를 환원한다고 하거든요.

앤윈 알 것 같아요. 거시사를 미시사로 만들어버린다는 거죠?

배명훈 네. 예를 들면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랑 동맹을 맺었어요. 분명 사인한 사람이 있을 거잖아요? 역사를 서술할 때 그 동맹을 그 사람이 맺었다고 서술하진 않거든요. 찬성한 의원이고 반대한 의원이고 명단이 쭉 나오지만 그 사람들의 결정의 합은 아니니까요. 그걸 인물의 이야기로 바꾸면 그 사건을 인물로 환원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최소한 분석할 때는 그 관점으로 읽게 되어있는 것 같아요. 좌담 같은 곳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이건 세계를 다루고 있는 글이에요’ 하는데 막상 분석에 들어가면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요. (웃음) 그렇게 읽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은데, 제가 아쉬운 건 실제로 제가 중심이라고 생각한 부분은 언급이 안 되는 것 같은 느낌인 거죠? 꼭 그대로 따라야 하는 건 아닌데 아마도 실제로 읽으셨을 때는 제가 원한 흐름대로 가게 된 면이 어느 정도 있을 거예요. 그런 면에서는 책이 나오고 나서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이 아쉬워요. 아무런 훈련도 안 받은 사람은 그렇게 안 읽거든요. 전쟁소설, 재미있는 이야기, 그쪽으로 먼저 읽게 되요. 글에 대한 아쉬움은 그렇게 많지 않고, 잘 썼다고 생각하고,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이 어디 있어, 라고 생각하는데, (웃음) 이 글이 놓인 환경에 대해서는 아쉬운 게 있어요. 앞으로도 계속 그런 환경에 놓여야 하나, 그런 생각도 들고. 어쩌면 이 부분을 맛보는 법을 내가 학습시켜야 하는 건가? 그럼 굉장히 먼 작업이 되잖아요. 아득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그런 작업인 것 같아요.

앤윈 사람들이 인물에 치중해서 소설을 읽는 것은 인물에 심정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방금 말씀하신대로라면 저는 충분히 그렇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한 인물이 단순히 그 인물이 아니라 그 세계의 그 사람이 대표하는 인간층이 있다는 거죠. 인물 분석이라고 말씀하신, 그런 식으로 읽힌다면 그건 세계관의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아까 이야기에서 의원들이 반대를 찍고 찬성을 찍고 했다면 이유가 있기 때문이잖아요. 그 사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원했기 때문이잖아요. 그런 식으로 본다면 인물 분석이라는 게 그렇게 거치적거리는 무언가는 아닐 것 같아요.

진아 창작자는 선구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존에 쌓여 있지 않은 토양을 가지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초기에 도전을 받는달까?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는 과정은 필연적인 것 같아요. 만약 그걸 감수하고 싶지 않다면 남들이 가는 방식으로 가야 되는데 사실 그건 작가에게 있어서 선택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자기 이야기를 100% 통제하는 것도 아니고.

배명훈 인물 중심의 분석이 거슬리고 싫다는 게 아니라 인물 중심으로 분석하시는 분들의 ‘이것 외의 방법은 없어’ 라고 주장하는 태도라고 해야 하나? 그게 문제인 거죠. 아시잖아요, 판타지든 SF든 인터넷 사이트에 습작 처음 올리는 사람이 인물 시놉시스로 올리지 않잖아요, 세계관으로 올리지. 우리는 분명히 세계 쪽에서 시작해서 인물과의 배합을 잘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저쪽은 인물 시놉시스만 끝나면 다 설정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완전히 다른 집단에서 시작된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도 세계관 설정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잖아요. 중간에 배합해야 하고 스펙트럼이 꽤 넓을 수 있단 걸 생각하고 있는데, 특히 한국문학의 분석 방법은 인물만 분석이 끝나면 끝난다는 식이죠. 다른 걸 뭘 썼든 결국 인물 안에 그게 구현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식이죠. [신의 궤도]에서는 같은 비행기로 싸울 때도 북반구가 싸우는 방법과 남반구가 싸우는 방법은 달라요. 날아가는 방법도 다르고. 저 같은 경우는 그런 식으로 쓰고 있는데, 이런 부분은 언급이 잘 안 되더라고요.

라키난 인물 분석이 조금 더 보편화된 방법이기도 한데, [신의 궤도]에서 사람들이 더 인물 분석에 치중하게 되는 건 인물이 전면에 드러나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인물에 상징을 부여하거나 해석하는 2차 방법으로 가야 하는데 그 연결이 잘 안 되고. 세계도 잘 구성되어 있고 인물도 있는데 그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게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세계에 집중해서 읽으면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고 굉장히 많은 의미나 해석을 뽑아낼 수 있는데, 전면에 나와 있는 게 인물이다 보니까 이쪽으로 잘 안 넘어가게 되는 것 같아요.

배명훈 전 [신의 궤도]는 전쟁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전쟁소설이라고 안 읽힐 수가 없는 글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책은 절대 전쟁소설이 될 수 없고 전쟁은 소품이라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실은 전쟁 장면이 굉장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야구만화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야구 경기 장면이랑 갈등의 고조선이 연결되는 거잖아요. 저도 전쟁소설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쓰는데, 그렇게 갈등이 고조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전투가 딱 나오는데, 이 부분을 싹 안 읽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생각한 갈등구조하고 전혀 다른 갈등구조로 읽히게 되고, 인물 분석으로 이 글을 따라가면 다른 걸 발견하게 되는 거죠. 그건 풍부한 해석일 수 있고, 틀린 해석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데 첫 번째 해석이냐 하면? 잘 모르겠어요.

라키난 아예 조직이나 세계에 확실하게 중점을 두고 써보시는 건 어때요?

배명훈 그렇게 쓴 거거든요. (웃음) 전투 이야기를 하면서 개인의 입장에서 쓰면 개인의 죽음을 더 처절하게 그리는 방법으로 갈 거예요. 집단의 차원으로 쓰면 사기가 꺾이는 순간, 사기가 올라가는 순간, 등 집단 전체의 감성으로 글을 쓰는 방법을 쓰는데, [신의 궤도]는 계속 그렇게 쓰여 있어요. 비행기 몇 대가 어떻게 추락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언제 이 집단 전체의 사기가 툭 끊어졌느냐가 중요한 거죠. 긴장의 끈이 툭 끊어지는 부분을 묘사한 부분들이 있어요.

ⅲ. 세계관이란

진아 장르문학에서는 작품의 배경이 왕족체제냐, 계절은 어떠냐, 언어는 뭘 쓰냐, 하는 설정을 좁은 의미의 세계관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신의 궤도]의 세계는 그런 세계보다 넓은, 어떤 담론을 가지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그게 진짜 세계관인데. 장르문학 쪽에서 ‘세계’라고 말할 너무 좁은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그것도 작품에서 세계가 무엇인가라고 말하는 걸 사람들이 주의 깊게 안 읽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가 되는 것 같아요. 진짜를 못 따라가고 지엽적인 것에 집중하게 만드는 면이 있어서, 그런 면에서 보면 이해받기 쉬운 토양에 있는 건 아니고. 저도 답답하게 생각하고, 안타깝긴 해요.

배명훈 우리끼리 말할 때는 사실 무슨 이야기인지 대충 아니까 괜찮은데, 팬덤 쪽에서 먼저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하지 않고 세계관을 설정이라고 말해버리면 안 될 것 같아요. 저쪽에서 ‘설정’이라고 말할 때는 뭔가 폄훼의 의미가 있어요.

진아 여러분, 지금 시간이 됐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 있으시면 정리하고 넘어갈게요.

배명훈 어, 재미있었어요. (웃음)

(박수)

―. 궤도 이탈합니다

크게 요약하자면 인물 분석과 세계관 분석의 이야기가 나왔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은경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온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볼 수 있겠군요. 열성적으로 토론에 참여해주신 분들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안타깝지만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음 기회로 넘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가 오기 전에 각자 나름의 답을 내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관리사무소와 유목민들과 천문교가 바라본 나니예가 다른 세계이듯, 저와 여러분이 보고 있는 나니예도 완전히 같지는 않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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