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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팔이소녀 보라님을 만나다
- 부제 : 딱히 불만이 없는 인터뷰어와 함께

참가 : 보라, 아프락사스, 진아
정리 및 기사 : 아프락사스



▲ 새파란상상에서 나온 보라님의 첫 장편 소설, [문이 열렸다]와 그 작가 보라님!

모월 며칠, 보라님의 장편 소설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거울에서는 단편으로 활발한 활약을 보여주셨던 보라님의 첫 장편 출간! 이 기쁜 소식을 모른 척 할 정도로 무심한 거울이 아니다. 독자들 앞에 첫 장편 소설을 내놓은 보라님을 만나기 위해 모월 모일, 홍대의 모 카페에서 진아님과 함께 보라님을 만났다.
인터뷰어인 내가 엄청나게 지각을 하는 바람에 인터뷰가 상당히 지체되었지만, 내가 카페에 허겁지겁 들어갔을 때 두 분은 딱히 탓하지 않았고 차분히 점심 식사를 하고 계셨다. 너그러운 두 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 후 밀린 잡담을 나누고 곧장 인터뷰에 들어갔다.


▲ 진아님과 보라님이 너그러운 모습으로 드셨던 식사 중 하나.





보라님에게 묻는다. 보라님은 누구인가!

보라님은 거울에서 실명으로 활동하신다. 거울에서는 흔치 않은 경우라 냉큼 그것부터 물어보았다.

아프락사스(이하 아프)        필명을 실명으로 정하셨는데… 무슨 생각에서 그렇게 하신 거였어요?

실제 어조는 이렇게 버릇없지 않았습니다. -_-!


▲ 좌측은 버릇없지 않은 인터뷰어. 우측은 진아님을 대신한 다이어리.

보라        제가 그렇게까지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닌데…(웃음) 처음에는 필명 쓰려고 했어요. 번역 처음 시작했을 때는 주변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필명을 쓰라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진아        보라님은 정말 그런 오해를 많이 받아요. '정보라' 이러면 본명 같다 생각할 수 있는데 그냥 '보라' 이러면…
보라        저도 여자 주인공에게서 이름을 몇 개 따봤는데, 그게 앞으로의 내 이름이다 생각하니까 뭘 써도 안 어울리는 거예요.

작가가 아닌 보라님에 대해서

진아        본명인데 필명 같은 느낌을 주는 이름이 많죠. 임태운님도 그렇고. 아, 근데 괜찮으시면 직업이랑 그런 거 이야기해주셔도 돼요?
보라        현재는 모 대학교 강사고, 러시아 문화 쪽 수업을 가르치고 있죠.
아프        러시아 문화에요? 문학이 아니라?
보라        네, 문화에요. 나름 전공 수업이라서 긴장하고 들어가는데 학생들에게 제가 강의를 혼자서 운영해보는 것은 처음이거든요. 그러니까 학생들에게 어떤 식으로 전달을 해야 할지 고민돼요. 제대로 전달이 되고 있는지 그것도 잘 모르겠고.
진아        예전에는 어디서 강의하셨는데요?
보라        유학할 때 주로 어학 강의했었고, 수업 조교도 해봤고, 문화 수업의 조교를 해봤던 적도 있어요. 그런데 그건 오래 전이고 그 때는 미국이라 수업 방식도 많이 다르고 그래서 그대로 적용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문학 전공자로 산다는 것

보라님의 전공은 흔치 않은 러시아문학이다. 마침 전공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 쪽에 대한 이야기를 파고들어보려 했다.

아프        원래 문학 전공자시잖아요. 그런데 문화 수업을 하시네요?
보라        그렇게 많이 해요.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문학 전공자가 문화 쪽으로 이렇게 영역을 많이 넓히는 추세에요. 어차피 겹치잖아요. 문학이 문화의 일부니까 결국은… 뭐 그리고 소설 속에 온갖 요소가 다 들어가잖아요. 당시의 문화가 다 들어가니까.
진아        전공이 정확히 뭐죠?
보라        소비에트 문학이요. 이건 내지 말아주세요. 소련 문학 했다고 잡혀갈지도 몰라요. 요즘 같은 세상에.  ^^;;
진아        소비에트문학이 전공이고 거기에서 세부적으로 들어가는 건가요?
보라        아뇨. 보통은 1920년대 문학이라고 해요. 소비에트 초기 문학이라고..
진아        예전에 러시아/폴란드 문학 전공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보라        폴란드문학도 했어요. 그러니까 이중전공을 했는데 논문에서 다뤘던 폴란드 작가가 결국은 소련으로 건너가서 거기서 작가 활동을 1920년대랑 30년대에 했기 때문에, 가장 세부적인 전공은 소련 1920년대 30년대 문학이에요.
아프        그런데 왜 러시아문학을 좋아하셨어요?
보라        저도 몰라요. 내 인생 왜 이렇게 된 거야. (울음)
아프         하하. 아, 사실 장르 쪽에 문학 전공자가 워낙 적긴 한데 러시아문학 전공한 분은 정말 못봐서 되게 재밌었거든요.
보라        그게… 학부 때 영문학 노문학 같이 했었고, 사실 제가 러시아 문자를 읽고 싶었어요. 그게 되게 신기해보여서. 제가 문자를 좋아하거든요. 러시아어도 그래서 배웠는데, 무진장 어려웠지만 러시아 문화나 사고방식이 제 성향에 잘 맞는 것 같아요. 되게 엉뚱하고 사람들이, 사람들이 우리나라하고도 다르고 영미권하고도 다르고 알듯 말듯 하면서도 잘 알 수 없는 그런 부분이 있어서. 그리고 굉장히 감정적이고 격정적이거든요. 너무 감정적이라 못알아듣는 경우도 있지만 또 엄청나게 심금을 울리는 부분이 있는데... 한편으로는 서양적인 것 같으면서도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심금을 울리는 부분이 있어요. 읽으면 읽을수록 좋더라구요.
아프        러시아가 좀 재밌는 나라죠.
보라        다들 미쳤죠. 다들 제정신이 아니에요
아프        요새 읽은 책은 뭐 없으세요? 블로그에서 보니까 수업 교재 찾으러 갔다가 엉뚱한 책만 보신다고…
보라        계속 엉뚱한 책만 읽고 있어요. 아, 그거하고 수업하고 반쯤은 관련있고 반쯤은 관련없는 러시아 설화집, 민화집 뭐 이런거 되게 재밌어요.
아프        요전에도 합평회에 들고 나오신 단편 중에 그런거 있었잖아요. 설화가 많이 들어간 거.
보라        러시아 설화는 없었을 거예요 아마.
아프        예. 없었는데, 배경이 그쪽이고…
진아        아 맞다. 그런거 있었어요.
아프        용 나오고… 어둠의 작가인 보라님이 빛의 단편을 쓰고 싶다고 말씀하고 쓰신…
보라        {사막의 빛}!

{사막의 빛}은 거울 77호에 올라왔던 단편 소설이다. 어두운 소재를 즐겨 쓰시는 보라님이 밝은 내용의 단편도 잘 쓰신다는 걸 증명해준 멋진 작품이다. (링크)

보라님의 문학론


▲ 이것이 작가 보라님의 손!

진아        제일 좋아하는 작가라면? 흔한 질문인데..
보라        제가 좋아하는 작가는 아무도 발음할 수 없어요.
아프        그러면 제가 나중에 듣고 러시아어 문자로 타이핑해야 하는 건가요? ^^;;
보라        미하일 불가코프도 좋아하고요,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그 사람도 좋아하고요.
아프        그 사람 번역된 것도 있지 않나요?
보라        제가 번역했어요. 죄송합니다. ^^;;


▲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던 보라님의 번역서.

보라        그리고 브루노 야셴스키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도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고요. 굉장히 감정적이고 급진적인 사람인데… 그러니까 진정한 혁명가에요.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게 그 사람에게는 이념이 아니고 진짜 너무 절박한 거예요 자기한테. 그런데 사람이 진심으로 믿는 거를 쓰면 그게 글에 나타나잖아요. 나도 바꿔야 할 것 같잖아요. 그래서 읽다 보면 진짜 마음을 움직이는 면이 있어요. 이 사람은 정말 자기가 하는 말을 믿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작가가 인간적으로 가깝게 느껴져요.
아프        그러면 장르문학 쪽에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신 거예요?
보라        저 원래 관심 없었어요. 지금도 별로 관심 없어요. (웃음)
아프        전혀?

환상문학웹진에서 활동하는 작가가 '장르문학'에 전혀 관심이 없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어보기로 했다.

진아        판타스틱에 쓰셨던 기사에 보니까 동유럽쪽, 그러니까 러시아/폴란드 문학이 원래 그렇게 리얼리즘과 환상이 많이 엄격하게 구분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보라        그래서 한국에 와서 이렇게 장르문학이라고 딱 구분을 해서… 굉장히 분리되어 있잖아요 지금. 그리고 순문학 쪽에서도 천대를 하고. 그런 실상을 보고 되게 놀랐어요. 제 전공에서는 그게 그렇게까지 구분이 되지 않거든요.
예를 들면 아주 리얼하고 현실적인 소설에 민담이나 전승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등장한다거나 아니면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간다거나 그런 출전을 언급한다거나 하는 게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서양 문학 중 19세기의 낭만주의 시대가 그래요. 낭만주의가 좀 초자연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성격이 강하거든요. 그래서 낭만주의 보면 맨날 하나님 등장하고 맨날 신이 등장해서 주인공에게 계시를 주고... 그게 거기선 굉장히 문학적인 컨텍스트 안에서 모든 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연스러운데, 그거를 딱히 환상문학이라고 분류하거나 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전 러시아/폴란드 문학 쪽에 더 끌리기도 했고.
문학적 완성도라거나 하고 싶은 이야기에 맞기만 하다면 그런 요소들을 집어넣을 수 있고 이야기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데 와서 봤더니... 제가 환상문학웹진의 필진으로 있으면 저도 일단 장르 작가잖아요. 그렇게 철저하게 구분이 된 걸 보고 스스로 되게 놀랐었어요.
아프        아, 그래서 환상문학의 에로틱한…
보라        전혀 에로틱하지 않았던!

80호 기획기사 {환상문학의 에로틱한 난교파티를 찾아서}(링크) 참조. 보라님의 환상문학론에 대해 들을 수 있다.

아프        기사 말미에 그런 말씀 하시더라구요. 어떤 걸 이야기하는가에 따라 정해졌으면 좋겠다고…
진아        뭔가 환상 소설로 장르를 써야지, 하는게 아니라 환상 소설이나 하는걸 구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써 왔는데 한국에 와서 보니까 환상 소설 작가가 되어버린… 그 작품을 수용해주는게 장르 쪽이다 보니까.
보라        네.
아프        되게 재밌지 않나요? 예전에 듀나라던가 이영도라던가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장르 작가라는 명백한 인식 속에서 글을 썼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배명훈 님도 그렇고 보라님도 그렇고 딱히 뭐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고 쓰다 보니까 '어라, 내 글이 이 쪽이네' 하는 게 많은 것 같아요. 개인적으론 되게 재밌게 생각하고 있어요.
보라        그게 좋은 것 같아요. 장르문학 할 때의 그 장르가 아니고 문학 장르를 가리지 않고 서로 포용해주는게 결국 문학이 풍부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문학의 장르가 철저하게 구분된다는게 장르의 공식을 따른다는 거잖아요. 맨날 공식 따르는 이야기만 쓰면… 한 10권만 읽으면 나도 쓸 수 있는데. 그러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맨날 똑같은 소리만 되풀이하고 있으면.
아프        정말 멋진 작품은 사조와 장르를 뛰어넘어서 걸작이죠.
보라        그게 쓰는 입장에서나 읽는 입장에서나 그렇고… 전공이 문학이라는 건 문학 비평을 한다는 얘긴데, 비평하는 입장에서 봤을 때 풍부한 텍스트라는게 이런 쪽에서도 볼 수 있고 저런 쪽에서도 볼 수 있고 이 이론도 적용할 수 있고 저 이론도 적용할 수 있고… 한 작품에 대해 연구할수록 뭔가 계속 나오는게 그게 고전이고 풍부한 텍스트거든요. 그런 작품은 장르 공식 이런 거 상관이 없죠. 공식을 자기가 세운 작품이면 몰라도 그렇게 세워진 공식을 그대로 따라가는 작품이라면 읽을 가치가 없죠. 연구할 가치도 없고요.
아프        그래서 그러려나? 보라님 글 읽다보면 현실과 환상이 결합되어있는데, 현실 쪽에서는 나름의 리얼리티를 살리려고 하고… 아까 이야기했던 <사막의 빛>의 무대도 되게 현실감 있게 묘사되잖아요. 러시아 역사 같은 거하고 연결시켜가면서. 그런데 용 같은거 튀어나오고. 상당히 재밌었거든요.
보라        감사합니다.
아프        러시아 소설 중에 [거장과 마르가리타]도 그런 작품이잖아요. 현실의 이야기인듯 한데 악마가 튀어나오고… 러시아문학 전공하시다 보니까 그런 쪽에서 영향 받은게 아닌가 싶었거든요. 딱히 그런건 없나요?
보라        영향을 받았겠죠. 받지 않았을리 없죠. 맨날 읽는게 그런 건데. 문체가 되게 특이한 작가도 있고 불가코프처럼 상상력이 되게 특이한 작가도 있고… 사조와 장르가 구분된다는건 그 나름의 공식이 있다는 거잖아요. 그런 공식도 조금만 가져다 비틀어 써보기도 하고… 저 나름에는 시도를 많이 하고 있는데 그런 시도가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제가 모르는 영역도 있을 거예요 아마. 너무 당연해서 저는 생각조차 안하는 부분도 있겠죠. 아 이야기하다 보니까 너무 잘난 체하고 있어 ^^;;
모두        하하
아프        (마이크에 대고) 보라님이 잘난 척을 하셨다.
보라        (웃으며) 잘난 체를 하며 파운드 케잌을 먹었다.


거울에 오기 전까지

아프        그럼 처음부터 창작 생각하셨어요?
보라        아뇨. 그 뭐냐… 돈이 필요했는데 소설 공모를 한다고 해서, 가장 자본을 적게 들이면서 상금 탈 가능성이 있겠다 싶어서 썼어요.
진아        르 귄이 SF를 쓰게 된 이유와 비슷하죠. 당시 순문학 쪽보다 SF 쪽이 고료를 좀 더 주는데, 그게 가난한 부부에게는 꽤 큰 돈이 되었던 거죠. 그래서 SF를 쓰기 시작했다고 하던데… 코난 도일도 그렇고요.
보라        안톤 체호프도 그렇게 단어 당 얼마씩 받으며 글을 썼어요. 단편이 천 편이 넘는데… 체호프가 가난한 시골 의사였기 때문에 돈을 주니까 계속 쓴 거예요. 그런데 원고료가 제한이 있어서 분량을 어느 정도 넘기면 안됐거든요.
아프        그래서 그렇게 짧은 소설이 많군요!
보라        네. 한 번에 긴 걸 팔 수 없었기 때문에 조금씩 잘라서 팔았던 거죠.
아프        어떤 작가는 지붕 수리비 받으려고 글 쓰기도 하고…
보라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박 빚 갚으려고…
아프        그렇게 썼는데 그 사람은 세계 최고 소리 듣잖아요. 그런 식으로 절박함이 드러나면 뭐가 되긴 하나봐요. 그런데 설마 보라님이 다작하시는 건…
보라        저는 빚 없어요 ^^;; 그러나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엄숙)
아프        지금 거울에서는 엄청나게 많이 쓰는 편에 속하시잖아요.
보라        제가 처음에는 상금을 타기 위해 글을 쓰긴 했는데… 그게 98년이었거든요. 그 때는 1년에 한 편 정도 찔끔찔끔 썼는데, 2000년에 유학을 갔더니 내가 쓰지 않으면 한국어를 볼 일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혼자 썼는데, 외국에 있으니까 발표할 통로가 없더라구요. 저는 하이텔 같은 통신 모임에 가입한 것도 아니었고… 외부에서 제 글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전혀 몰랐고, 어떤 매체를 통해서 발표할 수 있는지도 몰랐고… 잠깐 학교 생활 힘들 때는 몇 년 정도 못쓰고 그렇게 쌓아놓기만 했거든요. 제가 지금 다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물론 한 달에 한편씩 내려고 노력하고 있긴 하지만 못 썼을 때는 예전에 썼던 거 내기도 하고… 그냥 있었던 게 아니에요. 전 10년 동안 묵혀둔 한 맺힌 작품들이라서… 그걸 올릴 수 있게 된게 좋아서 저는 계속 올리는 거예요.



아프        합평회 때도 합평작 안올라왔을 때 '보라님 살려주세요!' 이러면 보라님이 쓱 하고 단편 올리시고….
보라        파일을 막 뒤져서 예전에 썼던 거…
아프        지금은 수업도 있으니까 많이는 못쓰시겠네요.
보라        그래서 저번에는 건너뛰었잖아요. 건너뛰고서는 막 슬퍼했는데.
아프        이번에는 중간고사가 있으니까 또 어려우시겠네요.
보라        에, 그렇네요. 채점을 빨리 끝내고 갈게요 ^^;;

과연 보라님은 4월 필진 합평회에 단편을 들고 나오셨다. 멋쟁이 보라님

아프        거울에는 어떻게 오셨어요?
보라        전부터 곽재식 님 블로그를 자주 드나들었는데, 거기에 거울에다 투고를 한다는 내용을 올리셨더라구요. 그래서 거울에 묻지마 투고를 했더니…
아프        역시 낚이는 거군요. ^^;;
보라        아, 곽재식님은 전혀 모르세요. 전 눈팅만 하다가 들어온 거라서…
아프        곽재식 님 블로그는 어떤게 좋으셨어요? 영화?
보라        영화평도 좋고… 제가 간 건 심야괴담특선 이런 거 때문이었어요.

작가 보라

진아        보라님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뭔가요? 발표한 작품이건 안한 작품이건.
보라        몽땅 다 그지 같다고 생각하는데… (괴로워한다)
진아        그래도 얘는 깨물면 좀 아프다, 이런 거요.
보라        그런 거라면,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요.


▲ 보라님의 단편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가 수록된, 거울의 2009년 중단편선.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는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하다.

진아        왜요?
보라        그게 연대기 부분은 정말 생각 없이 써서… 사람이 자기 머리를 잘라서 들고 있는 거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어요. 거기에서 시작해서…
진아        그게 무슨 전설이죠? 목 없는 기사.
아프        듀라한이요.
보라        그런 전설이 있어요?
아프        네. 아일랜드 쪽엔가 있어요.
진아        전 일부러 차용하신 건 줄 알았는데. 그거 꽤 유명한 전설이잖아요.
보라        아뇨. 그건 아니고, 아더왕 전설에 보면 가웨인이 녹색의 기사와 결투를 하는데 그 결투에서 이겨요. 녹색의 기사가 자기 목을 베라고 하는데 가웨인이 '너 누군지 모르고 왜 결투를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목을 벨 순 없다'고 하니까 녹색의 기사가 자꾸 우겨요. 그래서 가웨인이 기사의 명예까지 위협당할 지경까지 몰리니까 할 수 없이 목을 베죠. 그랬더니 자기 목을 들고 가버리는 거예요. 내년에 다시 오겠다고 했던가. 그거 보면서 몰라 뭐야 무서워 이랬는데… 여튼 약속한 시간에 만나서 재결투를 하는데 이번에는 가웨인이 져요. 그래도 녹색의 기사가 목 잘릴 걸 알면서도 온 용기를 높이 사서 그냥 풀어주죠.
제가 그 전설을 읽을 때가 유학 2년차였는데, 머리를 빼서 어디 찬물에 보관했다가 다시 끼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원래 머리 이야기를 좀 좋아해요. 98년에 상금 탄 작품도 변기에서 머리가 나온다는 내용이었고.
여튼 이 이야기를 어떻게든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도중에 할머니 돌아가셔서 장례식 치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새로운 작품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옛날 파일 뒤지다가 나온 자료를 덧붙여서 쓴게 그 단편이고… 그래서 할머니 장례식 이야기가 많죠.

진아        보라님은 어둠의 작가 이런 칭호가 있으시잖아요. 이야기들이 불륜 치정… 작품이 야하다기보다는 그 관계가… {귀향}이나 {어두운 입맞춤}도 그렇고 굉장히 어둡고 움울하고 가학적이기도 한데… 막장 드라마 같은 설정인데 이야기는 생동감이 있고, 그게 되게 신기해요. 보라님 글에는 늘 약동하는 생동감이 있어요. 그렇다고 밝음의 작가는 아니고.
보라        확실히 몇 년간 연애를 못해본 노처녀의 욕망이…
진아        사람들이 진짠 줄 알면 어떻게 하시려고.
보라        진짜에요. 저의 모든 욕망을 투영해서 만든 남자주인공인데 당연히 생동감 넘치죠.
아프        역시 어둠의 작가 보라! 그런데 괴담은 왜 좋아하세요?
보라        제가 현실에서 일어나는 현실같지 앟은 이야기를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이 바닥에서 이러고 있는 건데… 그런 이야기가 가장 많이 보이는 게 괴담 같아요. 현실에서 귀신이 나온다거나 신비한 일이 벌어진다거나 하는 거…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한 번씩 겪거나 듣잖아요. 일상에 굉장히 가깝게 있는 건데… 그러면서도 각 잡고 물어보면 보통은 다들 그 존재를 부정하잖아요. 나는 합리적인 사람이다 이러고.
아프        [문이 열렸다]에도 과학자 캐릭터가 나오죠. 재밌네요. 같은 사건이 환상의 세계에서 일어나면 그냥 판타지로 웃고 즐길 수 있는데, 그게 현실 공간에서 일어나면 공포로 받아들여진단 말이죠. 그 경계가 재밌어요.
진아        저는 보라님 글 매력이 거기 있는 것 같아요. 이야기가 굉장히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거. 캐릭터가 생각하는 거나 행동하는 게…
보라        좋은 장르문학 작품은 다 그렇지 않나요. (책 읽는 풍으로) ‘라고 말해놓고 자화자찬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진아님과 아프락사스님의 비웃음을 받으며 괴로워했다.’

이 때 잠시 모두가 웃었다.

진아        그렇죠. 어쨌든 모든 이야기는 현실감이 있어야 하니까요. 다 사람 사는 이야기고…
보라        그러니까 저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프        그런 건 마이크에 대고 말씀하셔야죠.(웃음)
보라        현실감을 굉장히 신경 쓰고 있어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 재미는 있는데 왜 썼는지는 모르겠다 싶은 이야기는 안 쓰고 싶고… 누군가에게는 와닿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그래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요. 흔히 '작가님은 작품의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으시나요?'라는 질문을 많이들 하는데 어디서 사오는 게 아니고(웃음) 그런 식으로라도 현실감을 주고 싶고, 사람이 실제로 이렇게 생각을 하고 활동을 한다는 걸 관찰해서 보여주려 하고 있어요.
아프        [문이 열렸다] 후기에서도 그런 내용 봤던 것 같아요. 이건 그냥 일반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다 하는거. 로맨스는 아니었지만.
보라        로맨스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썼어요. 지금까지 제가 썼던 소설들 중에 남녀 주인공이 맺어지는 경우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얘네들만이라도 행복하게 살아줘, 라는 심정으로.

[문이 열렸다]를 쓰기 전에

진아        장편 내기 전에 전자책도 내셨잖아요? 전자책이긴 하지만 개인 단편선이고요. 전자책이긴 해도 첫 개인책이었는데, 거기 수록 작품은 어떻게 결정하신 거예요?


▲ 보라님은 장편 소설을 내기 전에도 전자책으로 단독 단편집을 한번 내셨었다.

보라        그 쪽에서 지정해준 분량이 있었어요. 작품의 질은 보지 않고 분량만을 따졌기 때문에, 제가 제 기준에 따라 원하는 작품을 줄 수 있었어요. 이런 기회는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해서, 아무도 사가지 않을 거 같은 작품만을 집어서 보냈어요. 그래서 그런 책이 되었죠.
진아        전자책은 회사에서도 책 한 권 만들 때 큰 돈을 들이는게 아니라서 어찌 보면 작가에게 더 큰 자유가 주어지는 것 같더라구요. 출판사 입장에선 재고 비용도 안드니까 부담도 적고요.
보라        전 표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작품하고 잘 어울리더라구요. 제가 좋아하는 분위기였어요. 또 피우리에게 죄송한 게, 그 쪽에서 메일을 두 통 보내셨는데 그게 다 스팸 통으로 들어간 거예요. 나중에 피우리에서 전화를 주셔서 혹시 전자책을 쓰기 싫은게 아닌가 물어오셔서 확인해보니까 그렇게 되었더라구요. 그런 사건이 있어도 원고 파일을 보내니까 바로 전화 확인 주시고 그렇더라구요.

문이 열렸다가 나오기까지



진아        거울은 보통 예비 작가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잖아요. 그래서 작품 출간 과정을 궁금해하시는 분도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작가는 글을 쓰면 늘 작가긴 하지만..
보라        전 늘 묻지마 투고를 했어요.
진아        판타스틱에 실린 죽은 팔은 청탁 아니었나요?
보라        네. 생애 최초의 청탁이었죠 아마. 최원택 기자님이 거울에서 보시고 싣고 싶다고 연락해오셔서… 그 때 좀 재밌었던게 미국 시간으로 늦은 시각이고 한국 시간으로는 오후였거든요. 그런데 마침 제가 계속 메일을 확인하고 있어서, 실시간으로 순식간에 진행되었어요. 신기했어요.
진아        계약서는 어떻게 진행되었어요?
보라        안썼어요. 한번 싣고 마는 거라 그랬나봐요.
진아        여하간 새파란상상에는 투고하신 거죠? 새파란상상에는 투고 방식이 있어서…
보라        네.
진아        이게 파란에서 로맨스 라인이 아니라 판타지 라인으로 나왔죠?
아프        충분히 로맨스로도 나올 수 있는 것 같긴 한데..
보라        근데 저는 그게 좀 기뻤어요. 그쪽에서 대표님도 그러시고 이문영 작가님도 그러시고, 남자하고 여자하고 주고받으면서 티격태격하면서 연애가 되어가는 과정이 재밌었다고 하셨어요. 그게 많이 기뻤어요. 두 사람이 행복해지는구나! 작가 프로필은 제가 썼어요. 그냥 간단하게 써서 보냈는데, 책날개에 보니까 제 뒷조사(!)를 굉장히 자세하게 해서 막 굉장한 작가인 것처럼 프로필을 만들어 주셨더라구요. 감사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그리고 작품 요약도 저보고 쓰라고 하시더라구요. 대표님하고 이문영 작가님하고 두분이 앉아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시더니 엄청 곤란한 표정으로 '어지간하면 어떻게든 우리가 해보려 했는데… 도저히 요약이 안되네요' 이러시더라구요.
진아        그런데 진짜 어려울 것 같아요. 이걸 달걀 귀신과 늑대 인간의 사랑 이야기라고 해버리면 너무 진부해지고, 그렇다고 이야기를 너무 풀기에는 이 애들의 관계가 너무 복잡해서…
아프        그런데 소설은 언제 짬을 내서 쓰신 거예요?

보라님은 현재 거울에서 단편을 가장 왕성하게 발표하시는 작가 중 한 분이다. 그래서 보라님의 장편 소설이 나온다고 했을 때 굉장히 놀랐던 게 사실이었다.

보라        장편을… 그 때 논문 쓰는 게 너무 싫어서. 그 때 학위 논문 막바지였는데, 본문은 다 써놓고 고치는 중이었거든요. 원래 고치는 게 새로 쓰는 것보다 더 지겹잖아요.
아프        그래서 새로 쓰신 거군요!
보라        그렇게 된 거죠.
아프        읽으면서 단편에 가깝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었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작가 후기에 보니까 단편을 쓰려다가 장편을 쓰시게 된 거라고… 정말 그렇게 쓰신 거예요?
보라        네. 저도 그게 되는지는 몰랐어요. 예전에 석사 논문 쓸 때도 80페이지 분량을 쓰라고 하시더라구요. 영어로 80페이지를 쓴다는 게 어렵잖아요. 그래서 떨고 있는데 지도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구요. 같은 주제에 대한 짧은 페이퍼를 여러 개 쓴다고 생각하라고. 소설도 그렇게 접근했어요.
아프        그러면 소설도 붙여 쓰신 건가요?
보라        처음에는 장편을 쓰게 될 줄 몰랐기 때문에 단편을 썼다가 나중에 장편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어느 순서로 붙이면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아프        아, 그러면 소설이 번호를 붙여 나가는 것도… 그런데 소설이 처음에는 1번 2번으로 나가다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0번으로 돌아오잖아요?
보라        제 감각에서는 1번 2번 이렇게 나가는 건 사건이 진행되는 순서나 중요한 순서대로 나가는 건데, 0번이라는 건 사건이 종료되거나 이 상태가 지속될 거라는 정도로 생각했어요. 사실 그렇게 큰 의미는 없어요.
아프        아, 그래요? 전 이 소설의 후속작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문이 열렸다]에 대해서

진아        작품 소개 좀 해주세요.
보라        논문 쓰기 싫어서 괴담을 열심히 읽었는데, 그 중에 가로등 이야기가 꽤 많더라구요. 계속 고장 나는 가로등이라든가, 가로등 아래 뭔가 이상한 게 있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하나 써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원래 소설 제목도 ‘가로등’이었는데, 나중에 출판사에서 너무 80년대 삘이 난다고 제목을 바꾸셨지만… 그래도 책 표지에 저 구불구불한 가로등이 나와서 좋았어요. 책이 예쁘게 나와서 굉장히 기뻐요. (끌어안고 표지를 어루만진다) 그리고 작품 소개 계속하자면…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사정이 내게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남에게도 있더라, 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는데, 그게 엮여 나온게 이 소설인 거죠. 그렇게 엮어서 엮어서… 아, 나는 정말 논문 쓰기 싫다 생각하면서.
아프        문이 열렸다의 주제는 '논문 쓰기 싫었다'군요.
보라        예, 사실 그래요. 시작은 그렇게 간단하게 해서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저도 몰랐기 때문에 저도 신기했어요. 어떻게 이야기가 이어지는지.
아프        그러면 악역에게도 뭔가 심오한 설정 같은 건 없는 거네요?
보라        아, 그건 또 제가 그 당시 논문 쓰기 싫어서 한국이랑 미국 드라마를 엄청나게 봤는데, 한국 드라마 중에 [마왕]이란 게 있잖아요. 거기에 변호사로 나오는 주지훈 분위기가 되게 특이했어요. 한번 그런 분위기로 만들어보고 싶었고, 마침 더 이상 볼 드라마가 없어서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그 프로그램 사회자 분위기도 섞이고… 그래서 주인공 남녀는 평범한데 이 악역만 분위기가 기묘하잖아요. 그게 소설과 잘 어울릴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최대한 기묘한 인상을 주려 했어요.
아프        저는 [올드보이]의 유지태를 생각했었는데.
보라        유지태는 이런 악역 이미지 치고는 얼굴이 너무 순하게 생겼어요.
진아        작중에 나오는 의사 있잖아요. 그 의사하고도 단편 만들어도 재밌을 것 같아요. 가지치면 되게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데.
아프        의사도 그렇고 그 누나도 재밌는 캐릭터죠.
진아        가로등이라는게 은근히 무섭기는 해요. 그게 길을 밝히라고 있는 건데, 그게 꺼져 있어도 무섭지만 켜져 있다는 것도 이상해요. 사람이 없어도 가로등이 켜져 있다는 게. 그런데 가로등은 원래 주택가에 있는 건데 주택가를 무서워한다는 게 되게 이상한 일이잖아요. 그게 사실은 내가 무슨 일을 당해도 저 집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구 하나 나와 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거죠.
보라        그게 무섭기도 한데 쓸쓸하기도 했어요. 사람 사는 게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게.

이후 잠깐 동안 집안에서 쓸쓸하게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괴담이 이어졌다.

진아        골목길이 무섭고 쓸쓸하다… 주위에 다 사람이 사는 집인데 담 하나 걸쳐 있다고 아무도 없는 공간이 되잖아요.
보라        사실 저는 지난 10년 간 한국에서 안살았었기 때문에 한국의 골목길에 대한 감이 별로 없는데, 마왕에 나오는 골목길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어요. 거기는 무섭다기보다는 쓸쓸하고도 상당히 낭만적이었는데… 그것보다 유학 생활 동안 내가 죽어도 아무도 신경 안쓸거라는 걸 일상 속에서 뼈저리게 느끼면서 몇 년을 보냈었어요. 그런 게 되게 쓸쓸했었어요. 주택가도 그렇고 골목길도 그렇고. 그런 쓸쓸하고 무서운 잘 살리기 좋은 배경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제가 괴담을 좋아하나봐요.
아프        생각해보니 작품의 두 주인공 모두 외로운 사람들이네요. 그나마 남자 주인공은 후반부에 편의점 알바생과의 친한 모습이라도 보여주는데 여자 주인공은 카페 손님들 외에는 아무런 관계도 보여주지 않고.
진아        가끔 그런 생각도 해요. 보라님이랑도 그런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드라마에서는 왜 여자들이 나쁜 남자를 좋아할까. 미드에서는 시즌제로 가잖아요. 그러면 완벽한 남자하고는 바로 깨져요. 그게 패턴이더라구요. 나쁜 남자하고 한 시즌 시달리다가 헤어지고 다음 시즌에서는 완벽한 남자를 만나는데, 그 다음 시즌에서는 다시 처음의 남자에게 돌아가는… 도대체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완벽한 남자로는 드라마가 안나오더라구요.
아프        하하
진아        그렇잖아요. 부족한 게 없는데 무슨 이야기를 써요. 그리고 이건 ER에서 봤는데 완벽한 남자를 만나더니, 아예 캐릭터가 드라마에서 빠지더라구요. 언제부터인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나라 순문학에서도 특히 소통의 단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쓰잖아요. 물론 직장에서건 가정에서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인물로는 소설을 못 쓰겠지만, 어찌 보면 그건 소설을 쉽게 쓰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때론 그런 반복되는 소재가 지겨울 때가 있거든요. 물론 보라님 소설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걸 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보라        괴담!
진아        그런데 그거 진짜 재밌는 것 같아요. 지하철 플랫폼에서 남들은 다 멀쩡한데 나만 그걸 보고 있을 때의 굉장한 단절감. 그런게 되게 재밌었어요.
아프        늑대인간으로 변할 때도 그렇잖아요. 그걸 친구한테든 가족한테든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으니까 자기가 때렸던 여자에게 가서 하소연하고…
진아        그리고 변신이라는 게 자기가 되게 고통스러운 순간인데, 누군가가 자신에게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 얘는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가야 하잖아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서 혼자 있어야 한다는 것도 굉장히 아픈 이야기잖아요.
보라        저는 이 남자 주인공이 굉장히 바보 같고 코믹한 캐릭터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괴롭다고 생각하지 않았고요…
아프        바보죠 바보.
보라        감사합니다. 남자 분이 바보라고 해주셔서 안심돼요. (웃음) 내 생각에만 바보면 안되는데.
아프        자기 여동생에게 그렇게 바보 취급을 당하면서도 '네 말이 맞어' 이러는 남자애들은 별로 없거든요. 정말 자기가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은… 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보라        얘는 자기가 바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내가 얘를 죽일지도 모른다. 그게 너무 무서운 거예요. 어쨌거나, 출판사 사장님하고도 그 이야기를 했었어요. 주인공 3명이 있는데 그 세 명 중에서 둘이 완전히 단절된 캐릭터라고. 남자 주인공은 그래도 가족이 있고, 가족이 자기를 싫어하는 건 아니잖아요. 여동생이 이러니 저러니 해도 오빠가 사고 치면 나와서 다 수습을 해주고. 감옥에서도 꺼내주고…
진아        그것도 여동생스러워요.
아프        못난 오빠를 챙겨주고.
보라        막 잔소리하면서도 다 챙겨주고. 오빠한텐 큰 소리 치면서도 ‘카페 언니’에게는 쩔쩔 매고. 엄마도 전화 걸어서 동생하고 무슨 문제 있냐고 물어보잖아요. 그러니까 이 남자는 그렇게까지 외로운 사람은 아닌데, 자기에게 개인적인 문제가 있는 거죠.
아프        문제는 여자 주인공에게 있죠.
보라        이 소설은 사실 남자 주인공 시점에서 쓴 소설이라서 나머지 두 사람의 상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어요. 이 남자가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는 거죠. 게다가 정말로 친구가 한 명도 없는 사람은 없는 법이어서 여자도 자기 친구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있죠. 하지만 남자 입장에서 보면 알 수가 없는 거죠. 각자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 건데, 사실 그 나이쯤 되면 남들에겐 몰라도 자신에게는 중요한 사정이라는 게 하나씩 있기 마련이라서…
진아        저는 악당이 가장 불쌍하다고 생각해요. 이 사람은 끊임없이 거짓말로만 관계를 맺잖아요. 최면을 걸고 거짓말을 하고… 마지막까지도 이 사람이 자신에 대해 한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잖아요. 그 미묘한 경계가 있는 건데,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있어요. 아무와도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고. 그래서 전 이 사람이 가장 불쌍해보였어요. 사실 되게 나쁜 놈인 것도 맞는데, 삐뚤어져서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게… 다른 두 주인공에게는 늑대 인간이나 달걀귀신이라는 핑계가 있는데 이 악당의 경우는 스스로에게 그런 핑계를 만들어줄 수 없는 거죠.
보라        그 사람에 대해서는 저도 많이 생각 안해봤는데… 일관성이 있는데 조금씩 조금씩 어긋나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노력은 했어요.
아프        다크 나이트에 나오는 조커 같네요.
보라        전 그 조커를 되게 싫어해요.
아프        그런데 거기 나오는 조커가 그렇잖아요. 자기 과거에 대해 말할 때마다 말이 달라지죠.
보라        그건 참고를 했어요. 참고했다기보다는 영화를 보는 내내 무척 신경이 쓰였었는데… 그 사람은 자기가 불쌍한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매번 이야기가 달라지더라구요. 사실 진부한 사연들이잖아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들을 읊는 건지, 정말 자신에게 관계된 이야긴지 알 수가 없는 거죠.
옛날 학생 중에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는 애가 있었어요. 매일 거짓말을 하는데, 그중에 애가 저의 동정심을 얻기 위해 쓰는 레파토리 중 하나가 부모님 사이가 안 좋다는 거였어요. 걔가 계속 문제를 일으켜서 무슨 증빙서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어머니하고는 연락이 안 되고 아버지와는 사이가 안 좋기 때문에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런데 얼굴에서 보이더라구요. 걔는 선생님들이 부모님에게 가서 뭔가를 해오라고 할 때 그렇게 말하면 모두가 한풀 죽어줬던 거예요. 그래서 그 가정사를 조자룡 헌창 쓰듯 쓴 건데, 물론 정말로 가정 문제가 있는 것 같긴 한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걔는 거기에 대해 아무 신경도 안쓰고.
제가 살았던 곳이 미국에서도 굉장히 가난한 주(州)라서 가정 사정이 비슷하게 안 좋은 애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어쨌거나 자기하고 비슷한 사연이 있고 거기에서 진짜 상처를 받고, 자기 잘못이 없는데도 거기에 대한 결과를 자기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사람들이 같은 교실에 있는데, 아주 자랑스러운 얼굴로 나는 가정불화가 있으니까 넌 날 잘 봐줘야 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비슷한 처지에서 진짜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그 애들이 18세를 넘겨서 그 나라 법으로는 이미 성인이었기 때문에 부모님 핑계를 댈 나이도 지나갔구요. 쓰면서 그 아이 생각을 많이 하긴 했어요. 쓰면서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어요.

[문이 열렸다] 이후

아프        지금 쓰시는 건 있어요?
보라        작년부터 쓰던 게 있는데 그건 본격 괴담인데… 이게 끝이 안나요. 결말은 났는데 결말까지 가는 과정을 세우질 못하고 있고, 남여주인공의 설정을 바꿔서 다 뜯어고쳐야할 것 같아요.
아프        본격 장편 작가의 길을 걷게 되시는군요?
보라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그것은 또 모 웹진의 편집장님께서… 작가 후기에서 감사하게 된 이유가 있는데, 장편 하나 써봐야 하지 않겠냐고 옆에서 찌르셔서… 시키면 써야 하나보다 (하하) 말을 되게 잘 듣는 사람이기 때문에 써야 하나보다, 하고 시작했는데, 끝을 내라는 명령을 아직 못 들었기 때문에 끝이 안 나요.
진아        완결내세요 (냉큼)

인터뷰를 마치면서

인터뷰가 장장 세 시간에 걸쳐 진행된 후에도 이야기는 계속해서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저녁 이후에 각자의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인터뷰를 끊어야 했다.

진아        인터뷰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씀. 꼭 독자에게가 아니더라도.
아프        보라님 표정이 막 어두워지시는데…
진아        왜요. 명훈 님은 당당하게 '많이 팔아주세요' 하셨는데. ^^;;
보라        예, 책 좀 사주세요 제발. 성냥 사주세요 말고 책 사세요~
아프        책을 태우면 나오는 환상을 보면서 우와- 이러고.
모두하하

그래서 인터뷰의 제목은 ‘책팔이소녀 보라님을 만나다’가 되었습니다. :)



▲처음부터 끝까지 수고해준 질문지, 녹음기와 함께 한 컷!

후일담1 : ‘소비에트문학’이 굵은줄에 밑줄까지 쳐진 이유

(문제의 단어가 나온 직후)

진아        아, 녹취록 푼 다음에 파란색으로 수정/편집/삭제해서 보내주세요… 거울은 모든 걸 검열해요. 작가가.
아프        작가가!
보라        저도 이거 지워달라고 그랬더니 굵은 글자로 나오는 거 아니죠?
진아        보라님이 지워달라고 요청한 부분입니다.
보라        굵은 글자로 밑줄까지 쳐서 '지워달라고 그랬습니다' 이렇게 나오고…
모두        하하
진아        나중에 지워드릴 테니까 지금은 일단…

하지만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는 인터뷰어는 검열에 저항하기로 하였습니다. -_-! …가 아니라, 보라님께서 기사에 넣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역시 너그러우신 보라님 ^^;;

후일담2 : 부제가 지어진 사연

(인터뷰가 끝난 후)

보라        (씨익 웃으며) 자, 인터뷰가 끝났으니 이제 인터뷰어에 대한 인터뷰를 해보죠.
아프        저, 저요?
보라        네. 인터뷰하면서 쌓인 불만에 대해 들어보는 거죠.
아프        아, 어. 제가 보라님에 대해 쌓인 불만요? 딱히 그런거 없는데.
보라        (실망한듯) 감사합니다. 꼭 넣어주세요. '저는 평소 쌓인 불만이 없었습니다.' :(
댓글 4
  • No Profile
    Jay 10.05.02 15:24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
  • No Profile
    cho 10.05.04 23:16 댓글 수정 삭제
    1탄은 어디있나요?
  • No Profile
    날개 10.05.05 00:09 댓글 수정 삭제
    cho / 보라 특집 기획 ①은 시간의 잔상에 올라온 단편입니다.^^;;; 전에 특집 기사들은 이렇게 표기를 안 해서 혼란을 초래한 것 같아 죄송하네요. 'ㅁ' 음.
  • No Profile
    보라 10.05.07 16:00 댓글 수정 삭제
    사실은 저도 1번 어디 갔니! 하고 목놓아 찾아 헤맸더랬습니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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