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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앤윈 인터뷰

2013.07.31 17:37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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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 : 앤윈
진행자 : 라키난, pena
일시 : 2013년 7월 20일 토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앤윈 님입니다. ‘소설 쓰는 사회주의자’로서 다양한 이야기를 쓰셨는데요. 이번에 그 결과물이 작품집 <악어의 맛>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악어의 맛>은 출판사 온우주의 단편선 시리즈로 시리즈 중 통산 다섯 번째 책입니다. 이에 앤윈 님을 모시고 소설에 대해, 캐릭터에 대해 팬심 가득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인터뷰에는 온우주 출판사의 편집자 페나 님이 함께했습니다. 인터뷰어로는 라키난 님이 수고해주셨습니다. 중요한 스포일러 부분은 드래그를 하셔야 읽을 수 있습니다.
 
악어의 맛_표지.jpg  

1. <악어의 맛> 출간에 대해
 
책이 나왔는데, 소감이 어떤지.

기분이 좋기도 하고, 긴장도 되는데, 감개무량하기도 하고요. <악어의 맛> 중 작가의 말 맨 앞에 이렇게 썼어요. 고등학교 진학할 때 어머니께 예고 문창과 가고 싶다고 그랬는데, 글 쓰고 싶은 마음은 사실 3분의 1이었고 나머지는 수학 공부하기 싫은 마음과 예술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다고. 수학 공부하기 싫은 마음으로 10년 동안 글을 썼더니 책이 나오게 됐잖아요. 엄마한테 책이 나오면 매우 성공할 것처럼 사기를 쳐왔는데, 이제 책이 나왔으니까 사기값을 갚아야 한다고.
기분이 묘해요. 책을 굉장히 내고 싶었고, 책이 나와서 행복해요. 동시에 이제부터 평가받는다는 생각이 드니까 긴장도 되고. 이걸 낸다고 끝이 아니라, 이걸로 시작되는 거잖아요. 그에 대한 책임감도 드네요.

이제부터 정말 값을 갚아나가야겠는데. (웃음) 제목은 원래 ‘로맨틱 펀치’로 하려고 했었잖아요?

표지 디자이너님이 ‘로맨틱 펀치’로는 떠오르는 게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좋은 표지가 나오면 좋지, 싶어서 그러자고 했어요. 제 동생도, 회화 전공인데, 자기도 ‘악어의 맛’이 더 강렬해서 그리고 싶은 생각이 들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온우주 출판사에서는 책이 계속 한 달에 두 권씩 나오다가 이번 달은 한 권이 나왔는데요. 책 만드는 입장에서는 편했을 것 같기도 하고, 작가 입장에서는 신경쓰였을 것 같기도 해요.

저는 상대적으로 더 편하죠. 솔직히 저번 달 스케쥴이 지옥이었거든요.

전 신경쓰이죠. 어차피 원고량이 압도적으로 부족하니까 두 권으로 만드는 건 무리인데, 그래도 두 권씩 나오다가 한 권 나오니까 약간 허전한 느낌.

내년부터는 한 달에 두 권 안 내렵니다. 내가 죽다 살아났다 진짜.

저는 지금까지 온우주에서 나온 책을 전부 읽게 됐는데,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이미 리뷰의 첫 줄도 생각하고 있어요. “글이 너무 좋으니까 ‘대체 이런 작품이 어디에 숨어있었던 거지’ 싶은 생각이 드는데, 사실 어디에 숨어있었는지는 우리가 다 알고.”

옷장 정리하다가 안 입던 옷 발견한 그런 느낌?

지금 발견하니까 너무 예뻐!

유능한 테일러에게 재단도 받고요.

출간하면서 교정이 많이 됐던데, 힘들진 않았어요?

힘든 부분도 있었고 별로 안 힘든 부분도 있었어요. 이를 테면 설정에 있는 구멍을 메우는 건 힘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삶’ 같은 건 거의 이틀 내내 고민했는데. <히스테리아 선언>에 “삶은 지속된다”는 문장이 있었어요. 절망적인 상황 뒤에, 그리고 약간 나아진 뒤에, 이렇게 두 번 들어가는 문장이거든요. 저는 이 문장을 ‘차라리 삶이 끝나버렸으면 싶을 때에도 삶은 지속된다. 상황이 나아진다고 하더라도 이 절망은 언제나 잠복해서 날 기다린다.’ 그런 뜻으로 썼어요. 문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거죠. 왜냐면 저한테는 당연히 삶은 총체적으로 고통을 내재하는 거니까. 교정지에 표시되어 돌아온 걸 보고 당황했어요. 이게 희망적인 뜻으로 읽히더라고요. 그러니까 고쳐야겠는데, 제 속에 있는 “삶은 지속된다”는 문장이 빨리 변환이 안 되는 거예요. 인쇄하기 전날 한밤중에 메일로 보내서 겨우 고쳤어요.

그걸 그대로 살려서 쓰면 좋았을 텐데, 어떻게 바꿔도 안 되더라고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말도 있잖아요.

네, 그게 너무 유명해서. 그 영화에서 스칼렛도 굉장히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는 말이잖아요. 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죠.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에게 그런 의지가 없어요. 살아지니까 살고 있는 거고.

 
수록 순서는 어떻게 정한 거예요?

<밥줄을 지켜라>가 가장 진입하기 쉬워서 맨 앞이에요. <종의 기원>도 스토리 라인이 뚜렷해서 쉬운 편이고요. <악어의 맛>은 표제작이니까 서너 번째에는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주로 여성의 입장에서 쓰인 소설이 묶였고요. <너의 낡은 캐주얼화>와 <노병들>은 한국 사회의 현실이 드러나는 거라 뒤에서 같이 묶였어요.

수록작은 어떻게 골랐어요? 그냥 전부?

네. 있는 거 다 골랐어요. <왕자와 거지>라는 엽편 하나 빼고 전부. 그 엽편은 이제 대통령이 바뀌어서 이젠 시기에 맞지 않아요.

사실 <악어의 맛>이 표제작인 걸 보고 놀랐거든요. 제목으로는 가장 괜찮긴 한데. 어, 그래서 고른 건가요?

그런 것만은 아니고요. 제일 우화적이고 상징적이어서 나머지를 포괄할 수 있을 느낌? 아이러니한 제목이라 궁금함을 유발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악어의 맛>이 앤윈님의 테마에 잘 어울리는 것 같았어요. ‘자매들’이 악어를 사랑하잖아요. 악어는 굉장히 파괴적인 존재인데. 그런, 세상의 쓴맛 같은 거.

삶은 고통? ‘로맨틱 펀치’에서 여기까지 오나요.

그것도 진짜 ‘로맨틱’한 건 아니고, 세상에는 언제나 싸움이 있는데 그 안에서 사랑과 연민을 느낄 수 있다는 뜻으로.

사랑은 폭력? 해설에 그렇게 되어있던데.

(웃음) 네, 해설에 그렇게 들어가 있죠.
 
 
2. ‘여성’‘사회주의’에 대해
 
앤윈님 정체성이 ‘소설 쓰는 사회주의자’인데요. 사회주의 말고도, 고통받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큰 줄기를 차지하는 것 같아요. 화자도 여성이 대부분이고,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많이 겪잖아요. ‘여성’이 중요한 주제인가요?

제가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의도적으로 쓰는 건 아니에요. 스스로 제 한계라고 느끼고, 제 특성이기도 한데, 저는 제가 여성이라는 걸 많이 의식하는 여성이에요. 성 정체성이 굉장히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인 거예요. 그리고 그걸 체화해서 살고 있거든요. 작은 걸 생각할 때도 여성의 입장이 들어가는 거죠. 그래서 의도하지 않아도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큰 줄기를 차지하는 것 같아요. 여성이라는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 많아요.

이런 점도 있죠. 작가를 이야기꾼 유형과 예술가 유형으로 나눈다면, 이 사람은 명백하게 예술가 쪽인 거죠. 그래서 자기가 느끼는 게 아니면 못 쓰는 거죠. 본인이 여자라서 여자에 대해 쓰고.

그 부분에 대해서도 궁금한데요. 작가가 여자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경험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부분들이 있었거든요. 체험이 글이 되는 과정도 궁금해요. 그게 바로 글이 되는 건 아니니까.

바로 글이 될 수도 없고요. 물론 ‘이거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면 바로 잘 쓰는 분들 많이 계시죠. 작가가 남자든 여자든 자기 정체성에 상관없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시는 분들 많잖아요. 저는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체험이 글로 변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동안에는 딱히 글로 써내야겠다는 생각도 안 해요. 그냥 놔둬요. 물감이 섞이다 보면 다른 색깔이 나오잖아요. 그렇게 될 때까지 내버려두면 쓸 수 있게 돼요.

술 빚는 것처럼 쓴다는 생각도 드네요. 많이 쓰는 비유이긴 해요.

비슷한 점이 있네요. 발효되어야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발효되는 걸 보는 본인의 느낌은 어때요?

사실 저는 발효되는 동안 많이 섞여서, 나중에 글을 보면 별로 생각이 안 나요. 한참 지나서야 깨닫거나, 다른 사람들이 말해줘서 깨닫거나 해요. 그러면 글과 일체감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약간 부끄러울 때도 있어요. ‘앗, 들켰어’ 하는 느낌.
 
여자에 대해서는 넘어가고. 소설 전반에 깔려 있는 사회주의에 대해. 왜 사회주의인가?

왜 사회주의인가, 책을 한 권 써야 할 제목이네요. 너무 거대한데. (웃음) 그런데 이 소설 안에서 분명하게 사회주의라고 이야기할 건 별로 없어요. 정확히는 노동운동까지죠. 사회주의적 신념을 가진 사람은 한 둘 정도 나오는 것 같아요. <너의 낡은 캐주얼화>에 나오는 아들과, <노병들>의 ‘엿가락’. 나머지는 사회주의자라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생존 때문에 몰려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죠. 그냥 현실에 있는 사람들이고.
저는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긴 해요. 그리고 어쨌건 저는 계급의 투쟁을 통해 역사가 발전한다고 생각하는 종류의 사람이기 때문에, 계급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싶다는 욕망은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문학이, 이를 테면 사회주의 혁명의 전선에 복무했으면 좋겠다는 식의 생각은 없어요. 활동가의 역할과 예술가의 역할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물론 활동가이면서 예술가일 수도 있는데요. 그 사람이 활동가일 때 하는 행동과 예술가일 때 하는 행동은 다르다는 거죠. 활동가는 지도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게 엘리트주의처럼 들릴까 걱정스럽긴 한데요. 대중들은 활동가의 기대보다는 항상 뒤에 있어요. 활동가의 이상은 항상 앞에 있죠. 그래서 활동가들은 그걸 지도하려는 의지를 가지지 않으면 활동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예술가는 다르죠. 예술가는 그 세계의 가장 뒤쳐진 걸음까지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세계가 모순덩어리라면, 그 모순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노력하는, 그걸 관조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예술가라고 저는 생각해요. 전 계급 투쟁 이야기를 다루고 싶고, 그게 제가 직시하고 있는 현실이에요. 그리고 현실을 벗어난 이야기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요.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고 보고요. 그리고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건, 어떤, 굉장히 뒤쳐진 걸음, 보기 힘들고 부담스러운 것, 말하기 어려운 것까지 통틀어 봐야지 그게 문학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문학이, 말하자면 혁명의 전장에 뛰어드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 카프 같은 건 힘들어요. 루카치 좋아하는데 읽다 보면 힘들고 그래요.

활동가의 입장에서 쓰는 소설은 계몽주의가 묻어날 수밖에 없잖아요. 근데 그런 느낌은 안 나거든요.

그렇다면 그건 저에겐 매우 기쁜 일이에요.

그런 게 느껴졌으면 필진으로 섭외를 안 했을 거예요. 그러면 부담스럽거든요. 전 앤윈님 소설이 그런 쪽으로 빠지지 않는다는 데 점수를 높게 줬던 것 같아요.

 
소설 때문에 싸운 적은 없어요? 정치 사회적 지향이 드러나잖아요.

제 정치 사회적 지향에 대해 이견이 있는 사람은, 그냥 그런 거죠. 이견이 있을 수 있죠. 그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아요. 하지만 이런 건 있죠. 저는 제 소설이, 다른 지향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재미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나랑 지향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한테도 “아, 이 작가 빨갱이라서 마음에는 안 드는데, 재미는 있더라.” 그런 평을 들으면 좋겠어요.
소설에는 어떤 정치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술이잖아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노래를 들었을 때 가사는 마음에 안 들지만 노래는 좋아. 소설도 결론은 마음에 안 들더라도 결론으로 가는 길에는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같은 사회에 기반하고 있고요.

네. 소설을 쓴다는 건 사회를 반영하는 작업인 거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통찰이 없으면 전 그 소설은 실패했다고 생각해요. 제 소설에도, 마지막에 책을 집어던진다고 하더라도, 맞는 말이긴 하다고 생각할 부분이 있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면 전 <레미제라블>을 정말 좋아해요. 특히 장발장이 마리우스를 업고 파리의 하수구를 통과하는 장면이 좋아요. 그 소설의 결말은 저한테 정치적으로 매력적이지는 않아요. 장발장이라는 한 인간이 이룩해내는 것들은 경이롭지만, 그걸 풀어내는 맥락이 너무 종교적이고요. 마리우스의 이상이라는 것도 삶의 아주 작은 편향 정도로만 묘사가 되잖아요. 그에 대한 불만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 이야기는 굉장히 아름다운 이야기에요. 장발장이라는 한 인간이 인류애를 끌어올리는, 경이로운 사랑의 단계까지 나아가는 이야기잖아요. 정치적 지향에 상관없이.
그래서 정치적 지향에 대해서 뭐라고 하면 상처받지 않는 것 같아요. 저는 제 정치적 지향과 저를 동일시하지는 않아요. 저는 계속 변화 가능한 존재이고, 제 지향이라는 것도 바뀔 수 있고요. 저는 지금의 제 지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죠. <사형집행일> 이야기할 때도 그랬잖아요. 과거의 나는 내가 아닌 거죠. 이게 책임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나가면 곤란하겠지만요. 자신이 지향하는 바가 현재의 자기 자신 그 자체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저랑 정치적 지향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설득하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설득이 안 되면 그냥 안 되는 거죠. 그리고 저는 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종류의 사회주의자인데요. 아니 나 혼자서 정치를 할 수 있고, 혼자서 세계를 변혁할 수 있고 구성할 수 있다면, 당이 왜 필요하겠어요. 내가 곧 이념인 게 아니고, 나 혼자서는 이념을 이룰 수 없으니까 당이 필요한 거잖아요.

소설 읽으면서, 밥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랄까요. <종의 기원>에는 노골적으로 ‘밥’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밥줄을 지켜라>는 밥줄을 지키는 이야기죠. 그런 식으로 ‘사람이 먹고 살아야 하지 않냐’는, 모두가 공감할 만한 출발점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바로 사회주의죠. 저는 마르크스의 위대한 점이 그거라고 생각해요. 먹고 사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점.

먹고 사는 게 정말 중요한 사람들은 교육 받기도 힘들었으니까. 그런 시대가 지나고 먹고 사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할 민중 사상가가 나온 건 멋지다는 생각도 들어요.

 
<너의 낡은 캐주얼화>에서는 ‘운동권’이 등장하잖아요. 80년대 이후, 주로 90년대에 운동권을 다루는 작품을 보면 운동권의 몰락이나 변질에 대한 면이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너의 낡은 캐주얼화>는 그렇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요. 찌질한 모습이 나오긴 하는데, 회의적인 시선으로 보지는 않잖아요.

80년대 말, 정확히는 90년대 초부터 시작한 그런 소설을 후일담 소설이라고 하죠. 그때 왜 회의적이었냐면, 운동이 망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망했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활동가들을 보고 있으면 찌질하긴 하죠. 찌질해요. 가끔 저 사람들이 활동을 안 하면 뭐 하고 살까 답답할 때도 있어요. 생계유지가 힘들잖아요. 오히려 남의 돈 받아쓰고. 활동가는 일이긴 하지만 직업이 아니잖아요. 보다 보면 대체 이건 뭔가 싶은데, 어쨌든 이들에게는 운동이 망한 게 아니에요. 자기 운동이 있는 거죠.
사실 저는 활동가가 다른 일 하지 않고 고립되는 게 활동가로서도 바람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만큼 대중들과의 접점이 사라지잖아요. 그러다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 자기 자신이 재생산이 되어야 활동도 하죠. 전 활동가로서 이렇게 생각해요. 저러면 대중도 만날 수 없고, 활동가로서 재생산도 안 되고, 이런 시스템은 좋지 않고, 그러니까 안 된다고. 하지만 그건 활동가로서의 생각인 거고. 중요한 건, 전 소설가이기도 하잖아요. 소설가로서는 그 사람들의 진정성이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짠해요.
[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라는 책이 있어요. 저자는 NL이었다가 나온 사람이고, 자기가 겪은 NL에 대한 이야기를 해요. 어떻게 활동가가 생겨나고, 어쩌다 비민주적이 되는가를 애정을 담아서 쓴 책이에요. 그 책 서문을 읽으면서 제가 활동가를 바라보는 시선과 굉장히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자기가 살면서 본 가장 착한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저도 활동가에 대해 딱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제가 본 가장 착한 사람들이고 가장 안쓰러운 사람들이에요. 누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을 때, 갈 데가 없어 사무실에서 생활하면서도 사람이 오면 그냥 너무 반가워하는. 왜냐면 동지니까요. 전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계, 꿈꾸는 세계에 대한 지지와 애정이 커요. 그래서 저는 회의적으로 쓸 수 없었어요.

‘로맨틱 펀치’의 ‘로맨틱’은 이런 걸 말한 거예요. 사랑과 연민.

<너의 낡은 캐주얼화>에 나오는 ‘엄마’는 아들의 삶의 방식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잖아요. 불투명하긴 하지만 결국은 신발을 들고 가니까. 그러다 떨어뜨리고 도망가죠. 그 때 새벽 동이 트잖아요. 동이 튼다는 것, 그게 제겐 중요한 것 같아요.
후일담 소설을 쓴 사람들은 거의 자기가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고, 역사적 개인적 경험으로 인해 회의를 갖게 된 거잖아요. 물론 그런 역사적 경험을 극복하는 사람들도 있죠. 이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작가들 중에도 있고. 그런데 저는, 저도 나름대로 역사적 경험이나 운동의 부침을 겪긴 했지만, 이를 테면 PD동지들에게 소련이 무너지는 그런 충격은 없었기도 해요.

‘엄마’에 대해서는, ‘엄마’ 입장도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게 활동가가 갖는 사회와의 접점이기도 한 것 같은데요. 어떤 세계를 꿈꾸든 활동가는 현실 사회에 자리한 사람이니까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데, 그걸 없다고 치고 활동할 수는 없잖아요.

이상이 얼마나 훌륭하든 인물이 이상을 따라갈 수는 없어요. 그건 안 되는 거죠. 사실 마르크스만 봐도 그렇잖아요. 제가 그릴 수 있는 고결한 인간이란 <노병들>의 주인공이 한계에요. 제 입장에서는 그 남자가 정말 고결한 인물이에요. 문제는 그 사람은 일상의 인물이라는 거죠. 일상의 인간은 천상에 있는 것처럼 고결할 수 없고, 이상만큼 고결할 수도 없어요. <노병들>의 주인공도 꼰대에다가 자존심만 세고 자기가 며느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도 모르잖아요. 우리는 다들 서로가 서로에게 폐를 끼치며 살아야 하죠. <너의 낡은 캐주얼화>의 경우에도, ‘아들’은 열심히 살아요. 다만 ‘엄마’에게 폐를 끼치면서 열심히 살죠.

삶은 고통. (웃음) 이거 정말 테마인데요.

그리고 운동하는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넘어야 할 관문이 집인데, 그건 영원히 넘어야 할 관문이기도 해요. 끊임없이 부모님이 날 포기하도록 만드는 과정이죠. 그런데 얼마나 서글퍼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이 날 포기하게 만들어야 내가 기대하는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거잖아요. 정말 찌질한데, 아름답죠.
누가 ‘아들’처럼 살더라도 그를 사랑하길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 가족을 포함해서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도 아름답다고 느껴요. 활동 그만하라고 하는 그 정서도. “왜 그걸 꼭 네가 해야 돼?”라고 말하게 되는 그 마음 있잖아요. 물론 그건 꼰대질이죠. 하지만 그걸 꼰대질이라고 폄하할 수만은 없는 거죠.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요. 설령 내가 결국에는 말을 듣지 않고 사람들의 기대를 계속해서 배신하기로 결정한다고 하더라도.

<너의 낡은 캐주얼화>의 후기에도 실제 인물에 대한 언급이 나오잖아요.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는데.

잊어버렸을 걸요. 봐도 자기인지 모를 거예요. 이건 분명히 해둬야 하는데, 그 소설에 현실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 있긴 하지만 전부 사실인 건 아니에요. 이를 테면 <너의 낡은 캐주얼화>에 나오는 공장 노동자 투쟁은 쌍차 투쟁을 모델로 쓴 거예요. 거기 나오는 선거는 경기도지사 선거였어요. 심상정이 사퇴하고 김문수가 당선됐던. 주인공도 모델이 있긴 한데 특정 인물은 아니에요. 제가 본 여러 활동가들의 모습을 모아서 만든 건데, 친구 한 명이 이걸 보고 묻는 거예요. “야, 누구 전 부인이 진짜 누구 부인이야?” 아니에요! 그건 완전히 허구라고요. 소설이에요.

그건 현실에서 소재를 가져온 모든 작가들에게 독자들이 지긋지긋하게 물어보는 거기도 하죠. “너 진짜 깨진 거야?”, “그렇게 힘들면 말을 하지 그랬어.” 이미 결론도 다 내리고.

그래도 나에 대해서 하는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남에 대해서 하는 건 명예훼손이에요. 큰일 나요. 어디 가서 잘못 말하고 다니면 어떡해. 굉장히 당황했어요.

모든 인터뷰에 맨날 말해야 해요. 소설은 픽션입니다. 작가와 캐릭터는 동일인물이 아닙니다. 특히 현실 배경의 글을 쓰는 사람일수록.
 
 
3. 글쓰기에 대해
 
글은 어떻게 쓰게 됐어요?

처음 글을 쓴 건 X-Japan 팬픽인데요. (웃음)

역시 사랑에서 시작해야.

네, 사랑에서 시작했어요. 읽는 걸 좋아하는 애들이 많이 쓰잖아요. 전 읽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고, 초등학교 중학교 때 백일장에 불려다니는 편이었어요. 하지만 정말 즐거운 건 집에서 팬픽 쓰는 거였죠. 팬픽을 쓰다 보니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도 있고요. 열심히 팬픽을 쓰다 보니 주변 사람들을 가지고도 팬픽을 쓰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그러다 보니 거기에 자꾸 나를 투영한 인물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다 예고에 갔죠. 뭔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계속 있었어요. 이대로 인문계에 가면 난 수학 때문에 망할 거라는 생각도 있었고. 근데 예고에 들어갔더니 반드시 소설을 써야 하는 거죠. 처음으로 소설이라고 할 만한 글을 쓴 건 고등학교 때가 처음인 것 같아요. 그 소설은 지금은 생각도 하기 싫네요. (웃음)

왜 학교에서 글 쓰는 애들은 보통 반 내에 소문난 존잘님 되잖아요.

전 반에 소문이 날 수가 없었어요. 반 애들은 H.O.T나 젝키 팬픽을 읽지 X-Japan을 읽지 않아요. 팬픽 졸업하고 나서 어느 날은 갑자기 팬픽이 읽고 싶어서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누가 제가 썼던 걸 자기가 썼다고 올려놓은 걸 봤어요. 그걸 보고 약간 빡쳐서 다 읽어봤죠. 쭉 읽은 다음에… ‘그래 네가 쓴 거야’ 하고 나온 적이 있었어요. (웃음) 내가 뭘 쓴 거야!

남에게로 넘겨버렸군요.

(웃음) 네. 나의 수치를 네가 가져가겠다는데 뭐라고 할 거야. 음, 그랬었죠.

 
글 쓰는 데 어려운 점은 없어요?

어렵죠. 글 쓰는 건 원래 어려운 것 같아요. 전에 곽재식 작가님은 쉬는 느낌으로 글을 쓴다고 하신 적이 있어요. 저는 아니에요. 전 글 쓰면 되게 힘들고요. 특히 전투 장면 쓰고 나면, 쓸 때는 신이 나서 쓰는데 쓰고 나면 지치고 화나고 그래요. 아니면 섬세한 심리 묘사나 진지한 독백을 쓰거나 하면, 한 문장 쓰는 게 너무 짜증나요. 막 자기한테 화나고요. 그냥 글 쓰는 건 힘든 것 같아요. 쉽게 글을 쓴다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쉬운 건 아니고, 이런 게 있더라고요. 자기 에너지를 소비해서 쓰는 사람이 있고, 자기가 힘이 남을 때 쓰는 사람이 있고.

나쓰메 소세키가 유희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소세키 소설을 읽어보면 유희로 쓴 느낌이 들어요. 소세키가 만들어내는 인물들의 감정적 결이나 관계를 보면, 인간의 근저까지 내려가기보다는 그걸 투영하잖아요. 근저를 얼핏 엿볼 수 있는 정도에서 그걸 다루기 때문에 아름다운 게 있죠. 그런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보면 작가가 쓰면서 힘들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요. 저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 같아요.

이런 사람이 문장이나 글 전체에 많이 신경 쓴다? 퇴고를 많이 해요.

그렇죠. 글은 마지막 피리어드를 찍는 순간 시작하는 거죠.

 
표제작 <악어의 맛>은 매우 비유적이잖아요. 대개의 장르문학은 직설적인데 반해서. 그리고 사회를 표현하고 싶다면 굳이 장르일 필요는 없잖아요. 그런데 왜 장르적인 이야기를 쓰는지.

이건 제가 계산해서 쓰는 건 아니에요. 취향인 것 같아요. 학교에서 읽으라고 권유하는 종류의 작가나 책들 있잖아요. 그런 작가들에 매력을 크게 못 느꼈어요. 그냥 장르를 좋아한 거죠. 장르적인 설정이나 서사를 좋아해요.

<노병들>에서 능력자들이 나오는 건 신의 한 수이지 않나. 재미있었거든요.

하지만 기껏 능력자가 나오는데 왜 이런 이야기인가, 이런 반응도 있어요.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나오는 쾌감은 없잖아요. 젊은 애들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다고 <래드>처럼 노인들이 한탕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건 다르네요. 장르적 서사는 마지막 파토스에 주는 방점이 저와 달라요. 저도 마지막에 폭발하는 서사를 좋아하는데, 저와 폭발하는 맥락이 달라요.

<래드>보다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쪽이죠.

그거 괜찮네요. “슈퍼히어로를 위한 노인의 나라는 없다.”

“어벤저스, 과연 너희가 60년 후에도 어벤저스일까?”

좋네요. <노병들>의 카피로 생각해봄이.

저는 <노병들>이 제일 좋긴 했는데, 이게 제일 좋다고 꼽을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기도 해요. 여러 시선이 들어가 있잖아요. 인물이 여러 명인데 각각 입장이 달라서. 전 그 점이 좋았던 것 같아요. 작가가 따로 서술하지 않더라도 미루어 생각할 수 있고.

일단은 길어서요. 해설하신 분은 좋게 읽은 것 같아요. 편집자로서 이야기하자면, 호불호가 갈린다 해도 어쨌든 작가로서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작가로서의 역량이 총집되기도 했고. 마지막에 들어가기 어울리죠.
 
 
4. 작품에 대해
 
<악어의 맛>에는 동물이 많이 나오죠. 고양이, 악어, 늑대, 코끼리 등. 동물원인가.

사실은 동물원 표지도 바랐어요.

왜 그렇게 동물이 많나요?

동물을 좋아해서요. (웃음) 동물에서 받는 영감도 많은 것 같아요. 어떤 동물을 머리에 떠올렸을 때, 동물에 따라서 각각 느낌이 다르잖아요. 고양이를 떠올렸을 때의 마음과 홍학을 떠올렸을 때의 마음은 다르잖아요. 동물들한테서 받는 영향이 커요.

악어에 대한 감정은 뭐예요?

옛날에 동생과 동물농장을 보는데 새끼돼지가 너무 귀여운 거예요. 동생이 말하길, “새끼는 다 귀여워. 악어도 귀여울걸?” 그런 적이 있었어요. 영미권에서 악어는 추함의 대명사잖아요. 어느 날 생각난 김에 악어 새끼를 찾아봤는데, 악어 새끼는 안 귀여운 거예요. 되게 무서워요. 그 뒤에 내셔널 지오그래피를 보는데, 악어가 영역다툼을 하는 모습이 나왔어요. 그러다 악어 하나가 위턱이 날아가는 거예요. 악어는 대상을 씹어서 죽이니까 위턱으로 내리찍어서 공격하잖아요. 그런데 턱이 없어질 정도로 격렬하게 싸우는 거죠.
새끼조차 귀엽지 않고, 파충류처럼 통째로 삼키는 데다, 그 탐욕 때문에 서로 싸우다가 턱을 날려버릴 정도로 전투적인 동물인 거죠. ‘악어의 눈물’처럼 음흉스럽다는 이미지도 있고요. 자본 문제에 대해 공부하다가 ‘계속해서 불어나는 탐욕스러운 동물’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랐는데, 악어 말고는 연결이 안 되더라고요. 그 때부터 막 썼어요.
덧붙여, ‘자매들’은 악어를 사랑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악어가 추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자매들’은 자기의 추함을 투영해서 악어를 아름답게 느끼고요. 그런데 그 소설에서 사랑을 받은 악어는 정말로 아름다워지거든요. 그렇게 아름다움과 추함이 등을 돌리고 결합되어 있는 이미지로 악어를 떠올렸던 것 같아요.

<악어의 맛>에서, 초콜릿 만드는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미추에 대한 이야기임과 동시에 고독에 대한 이야기라고 느꼈거든요. 그런데 그 고독과 함께하는 게 바로 초콜릿이란 말이죠. 초콜릿에 대한 애증이라도 있는 건가.

초콜릿을 일단 굉장히 좋아하고요. 초콜릿이란 음식이 가진 특별함도 있다고 생각해요. 유혹적인 달콤함이란 게 있잖아요. <악어의 맛>에선 ‘자매들’처럼 추한 것에서 굉장히 아름다운 게 만들어지고, 그게 다시 악어라는 추함으로 들어가서 끔찍한 아름다움으로 재생산되잖아요. 그 과정에서 머리에 떠오른 게 초콜릿이었어요. 초콜릿에 대한 길티 플레저가 있는 것 같아요. 좋아하니까.

궁금한 게, <악어의 맛>에서 창부한테는 왜 남자가 끊기나요.

그 창부가 사랑에 빠져서요. 남자를 계속 기다리잖아요.

그래서 잡아먹히고.

네. 사랑에 빠졌으니까 고독해지는 거죠. 자매들도 처음엔 외롭지 않았잖아요. 악어한테 사랑에 빠지면서 서로 이해할 수 없게 되고, 유대도 끊기고요. 창부도 그 남자를 사랑하기 전까지는 괜찮았던 거예요. 그런데 사랑하게 되면서 외로워지고, 악어는 고독의 냄새를 맡는 거죠.

이 사람은 참, 삶은 괴롭고, 사랑은 외롭고.

 로보002.jpg  로보003.jpg

수록작 중에는 <로보를 위하여>가 좀 가볍잖아요. 그건 쓸 때도 감정적으로 더 쉬웠을 거라는 느낌이 드는데요.

네, 좀 덜했어요. 처음에 쓰고 싶었던 건 훨씬 복잡한 이야기였어요. 그런데 많이 덜어냈거든요. 처음에 쓸 때는 너무 힘들어서 덜어내기 시작했어요. 다 덜어내고 나니까 편해졌어요.

만화는 거기서 더 덜어냈으니까요. 심각한 부분은 다 덜어내서 만화작가 분이 콘티 처음 짜왔을 때 많이 고민했어요. 자기 그림체나 분량 때문에 일부러 많이 뺐는데, 작가 분이 화내지 않을까 하고.

아뇨. 저 그 소설에 대해서 소개할 때 하이틴 로맨스 소설이라고 소개했었어요. 그런데 만화작가님이 진짜로 훈훈한 하이틴 로맨스로 탈바꿈시켜주셨어요.

남자애가 잘 생겼다는 설정에서 시작하는 이야기였죠, 그거.

남자가 ‘빛나도록’ 잘생긴 거잖아요. (웃음) 혹시 ‘김정우’는 저번에 이야기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서 나온 거 아닌가.

아. 전에 첫사랑 이야기를 했었는데, 생각해보니 제가 첫눈에 반한 경험이 있더라고요. 초등학교 때 문방구에서 걸어놓은 <로미오와 줄리엣> 포스터에 제가 반했더라고요. 그것도 정말 첫눈에 반한 사람처럼. 그냥 포스터를 봤는데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들어와서, 집에 가는 길에 포스터에 나오는 남자 생각을 하다가, 그날 밤 꿈에도 나왔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젊은 시절이면 다 인정할 텐데요, 뭐. <타이타닉>의 손가락 장면. 어릴 때는 몰랐거든요. 자라서 보니까 그 장면이 정말.

진짜 야하죠. 저도 그냥 야한 장면이겠거니 했었는데요. 커서 보니까, 김이 꽉 차서 그 안에서… 와, 정말. 저는 그 사람이 ‘불안정한 미소년’의 캐릭터를 계속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좋아해요. 소년은 여러 특징이 있잖아요. 맑고 순수한 것도 물론 있죠. 그렇지만 그게 발현되는 방식이, 순수하기 때문에 세상과 불화해서 일그러진 형태로 나타나잖아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그런 캐릭터를 갖고 있죠. 이를 테면 <위대한 개츠비>, <캐치 미 이프 유 캔>, <갱스 오브 뉴욕>. 또 <에비에이터>가 정말 그렇죠.

이래도 ‘김정우’가 거기서 나온 게 아니라고요? (웃음)

(웃음) 세상과 불화해서 마음이 비뚤어진 소년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잘생기고?

잘생겨야죠. 착하지 않아도 돼요. 속은 비뚤어질 때까지 비뚤어져서 곪아 터져도 돼요. ‘김정우’는 나이가 어리잖아요. 세상에 덜 녹은 거지. 그런데 ‘김정우’의 정신 상태를 갖고 나이를 먹으면 아집이 되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집이 된 다음에도 여전히 불안정한 사람이라 자기 자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마음만 소년인 노인이 좋아요.

그게 <사형집행인>의 남자 아닌가요?

그런 면도 있네요. 그러고보니 그 소설 합평할 때, 어떤 분은 그 남자가 너무 싫은 거예요. 아저씨인데 머리가 길고 배가 나오고 교복을 입고 있어. 빨리 죽이라고. (웃음)

교복을 입고 있죠. 덜 자란 사람이고요.

저도 그 인물은 덜 자랐다고 생각해요. <사형집행일>은, 어차피 타자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내가 돌아보는 것은 내 과거일 뿐이지, 거기에 대해서 내가 이해하거나 집행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 소설은 후기가 없는데, 이게 후기 대신이 되겠네요.

지긋지긋한 구남친이라는 느낌? 내가 그 사람과 한때 시간을 같이 했다는 것마저도 회의가 들고, 내가 과거에는 대체 왜 그랬을까 하고 계속 붙잡고 생각해보게 되는.

그 시간에 대해서 돌아본다고 해봤자, 그 시간이 내가 기억하는 그 시간일지는 나는 알 수 없는 거잖아요. 가서 확인해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확인한다고 해봤자 과거의 나는 내가 아니고요. 다른 사람인 거예요. <사형집행일>에 보면, 소녀였던 때의 자신이 행복해하면서 그 남자를 만나러 가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 소녀는 지금 내가 아닌 거예요. 어차피 그 때의 내가 바라보는 세계와 지금 내가 바라보는 세계는 다를 수밖에 없는 거죠.
설혹 내가 기억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 기억이 진실한 기억인지 아닌지 나는 확신할 수 없고. 나는 내가 가진 기억을 투영해서 저 사람을 바라보는데,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 정말 저 사람인지는 알 수 없는. 그런 혼란을 담고 있어요.

그런 소설이네요. 남이 보면 개새끼인데.

사실 그 소설에서 제일 개새끼인 건 현재 애인이에요. 애정을 창출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사랑하는 건 아니고. 서로 상대에 대해 연민하는 관계죠. 사랑과 연민은 닮은 것 같은데. 연민이지만 적극적이지 않은 연민. 인생 다 그런 거지, 하고 한숨 쉬는.

그게 실패하는 연애로 가는 지름길이거든요. 나쁜 남자한테 걸려드는 방법이니까. 그리고 나쁜 남자라면 여자가 연민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그걸 이용하죠. 절대 어느 여자건 마다하지 않아.

그러다 여자가 정말 한계에 달해서,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하면 “싫으면 가” 하는. 살살 꼬셔서 다 받아먹어놓고는.

“네가 좋아서 해줘놓고 왜 지금 와서 나한테 이래? 어차피 넌 네 만족감 때문에 나한테 잘해준 거잖아.” 그런 식이죠. (웃음)

 
첫 수록작이 <밥줄을 지켜라>인데, 여기 나오는 ‘여자’에는 실제 모델이 있잖아요. 실제 형숙 언니는 이 작품을 알고 계신지 궁금한데요.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 초고를 마치고 제일 처음으로 언니한테 갖다줬어요. 나 소설 다 썼다고. 다음에 만나서 읽어봤냐고 물어봤더니, 이 동네 고양이들이랑 다 인터뷰하고 다녔냐고 그러던데요. (웃음) 본인에 대해서는 언급하길 쑥스러워 하시거든요.

본인의 이야기는 교정하면서 많이 빠졌잖아요. 작품 전체를 생각해서 뺐겠구나 싶었는데, 스쿠버 다이빙 같은 건 예뻤었으니까 아쉬웠어요.

물을 꿈꾸는 장면까지는 나올 거예요.

현실의 사람을 모델로 했기 때문에 자세한 설정이 있는데, 작품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그게 안 와닿고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죠.

 
이 이야기도 해야죠. <밥줄을 지켜라> 후기에 보면 <홍대기담>에 실린 작품이라고 되어있던데요. <홍대기담>에 대한 소개 좀 해주세요.

<홍대기담>은 홍대에서 리치몬드 제과점이 없어진 일을 계기로, 사라지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는 의견이 나왔어요. 그렇게 거울을 위시한 작가들이 참가한 프로젝트고요. 홍대에 대한 신기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홍대기담>이에요. 제 작품은 그렇다 치고, 아밀 님의 <고양이를 찾아드립니다>가 참 좋아요. 처음에 들어간 페나 님의 <클럽 ANGEL>도 좋고, 정세랑 님의 <청기와 주유소>도 좋고, 다 좋아요. 곧 단편집이 나올 거예요.

사라지는 공간에 대해서 말고도 <홍대기담>이 어떤 시도를 했냐면요. 일상적으로 접하는 장소를 환상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아밀 님이 서문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죠. 사실은 여기에서 정말로 선과 악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 이야기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공간의 뒷면에서 이어지고 있었을 수 있다. 그 이야기들을 우리가 만들어냄으로써 이 공간을 좀 더 친숙하면서도 색다르고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적인 판타지’란 사실은 이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홍대라는 공간이 가진 특수성 말고 보편성이 있다면, 작은 문화공간으로 시작해서 자리를 잡으니 자본에 의해 밀려나는 것. 그런 현상은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는 일이잖아요. 홍대라는 공간의 독특한 아기자기함과 거기에 침입해오는 자본의 괴물의 보편성, 이런 걸 결합해서 한국적인 판타지로 만들면 좋겠다 싶었어요.

홍대라는 공간의 특수성에는 그런 게 있죠. 방금 이야기하신 자본의 괴물성이라는 게 실제로는 ’아기자기함’으로 팔리고 있다는 거죠. 어떤 독립성을 확보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독립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하잖아요. 그런 점들이 작가들로 하여금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도록 동기부여를 했던 것 같아요.

넵. <악어의 맛>이 잘 돼서 <홍대기담>도 잘 되면 좋겠네요.

<홍대기담>에 작품을 실은 작가들은 단편선이든 어디든 최소한 한 편 이상씩 글을 실었던 프로 작가들이에요. 그런 면에서도 괜찮을 겁니다.

가지각색의 다양한 매력을 볼 수 있어요. 작가들마다 성격이 달라서.

릴레이 같은 요소도 있어요. 사람들이 각자 한번에 쓴 게 아니고, <텍스툰>에 실었었잖아요. <텍스툰>은 3개월에 한 권씩 나오거든요. 우리가 9명이었는데 한번에 1명만 실으면 너무 오래 걸리니까 한번에 3명씩 연재를 했어요.

연작 같은 요소를 찾아내는 것도 진짜 재미있어요. 먼저 실린 작품에 나온 설정을 따온 작품들도 있거든요. 되게 뿌듯하더라고요. 아밀 님이 제 설정을 가져다 쓰셨는데, 너무 기분이 좋은 거예요.

심지어 지원금도 받았었잖아요.

그렇죠. 의미도 재미도 잡은 흔치 않은 테마 단편집이랄까.

언제 나오나요?

거의 다 끝난 것 같던데, 8월 초쯤 나올 거예요.

 
작품들 중 가장 좋아하는 걸 골라본다면?

어렵네요. <노병들>이요. 좋아하는 요소를 아끼지 않고 열심히 넣었어요. 슈퍼히어로가 그렇고요. 근대사와 환상의 결합이라는 것도 좋아하는 요소에요. 그리고 ‘철구’도. ‘철구’는 모델이 있어요. 클린트 이스트우드에요. (웃음) 비루하지만 정신은 성성한데, 그래서 그 때문에 상처받고 또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인물이잖아요. 자기가 옳다고 분명하게 믿고. 저는 ‘철구’의 사상에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그는 자기가 옳다고 믿고 굉장히 당당하잖아요. 그 나이에도 무게감이 있고요. 그게 멋지다기보다는 안쓰럽다는 느낌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거기서 따왔어요.
‘마녀’도 좋아해요. 흑백영화의 고전적인 여주인공이나 쇼걸 같은. 리타 헤이워드처럼요. 마릴린 먼로는 천진한 느낌이 강하지만 리타 헤이워드는 요염한 느낌이 있잖아요. 그런 흑백영화의 여배우 같은 여자에다, 고전적이고 비루한 느낌의 남자가 있는 거죠. 좋아하는 요소를 쏟아 부으면서 정치적인 이야기도 실컷 했어요. 거기다 평소에는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못 하는 것도 많이 넣었네요. 제가 쓰면서도 오글거려서 괴로워했던 부분이 몇 군데 있어요. 대체로 ‘마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마치 열대의 꽃처럼 보였다”든가. 원래는 잘 못 쓰는데 고전영화 같은 분위기에 취해서 썼어요. 쓰면서 ‘내가 대체 뭐라고 쓰는 거지, 하지만 멈출 수가 없어!’ (웃음) 제가 교정하면서 이걸 다시 봤을 거 아니에요. 다시 보면서도 막 진짜…

‘철구’가 묘사하는 것도 그렇죠. 하얀 허벅지에서 눈을 못 떼면서 “저 잡스러운 허벅지”라고 표현한다든가.

‘철구’의 그 캐릭터가 좋은 거예요. 마초인데 젠틀맨인, 올곧은 마초 꼰대.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즘. 그런 거 있잖아요. 약한 자들을 괴롭히면 안 되고. 남자라면 자기 말에 책임을 져야 하고.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하고.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약한 남자들을 경멸하고. 다른 데 한눈 팔면 안 되고.

‘마녀’를 보고 와서 아들한테 “공순이들은 아무한테나 달라붙는 애들이니 그런 애들과 만나면 안 된다”고 잔소리하는데, 아내가 바로 공순이잖아요. 그것도 집에 돈이 없으니까 일하다가 늦게 들어오는 거고. 그런 식으로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는 점이 있죠.

그건 한국 사회에서 올곧은 마초들이 흔히 가지는 정신분열 같아요. 자기는 올바른 마초로 살고 싶은데, 사실 마초가 되면 올바르지 않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분열이 오는 거죠.

‘트위터 전사’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아니 진짜, 그 이전까지는 근대 느낌이 많이 나잖아요. 그런데 트위터 전사 학교가 갑자기 나오면서 분위기가 확 깨지고 현대가 되는 거예요.

근데 사실 할아버지들은 계속 근대에 살고 있죠. 근대에 살다가 가끔 현대에 나오는 거지. 몸은 현대에 있는데 머릿속은 근대에 있고.

“왜, 투이타가 너무 어려웠어?”

아. ‘엿가락’. 너무 좋아요. ‘엿가락’은 히피 같죠. 매력적인 캐릭터고요. 근데 전 너무 매력적인 캐릭터라 별로 애정이 가질 않아요.

왜 그렇게 연민이 기본이에요. 삶은 고통, 사랑은 폭력, 애정은 연민.

앤윈님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쪽을 좋아해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긴 하죠. 갭모에야.

할아버지들을 좋아하는 것도 있어요. 두루마기 입고 다니는 할아버지 좋아요. 큰 돋보기 안경 쓰거나. 학교 교감까지 하고 퇴직했을 것 같은 그런 느낌. 꼬장꼬장한 매력이 있어야 좋아요. 아니면 이런 할아버지들도 좋아요. ‘엿가락’ 같은 할아버지들은 대체로 여성에게 매너가 좋아요.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자기가 남성이라는 걸 잊지 않아요. 예를 들면 이 사람은 할아버지이고 난 손녀뻘인데, 이 할아버지 앞에 있으면 이 사람은 남자고 나는 여자야.
‘엿가락’은 모델 비슷한 게 있어요. 탑골공원을 갔는데, 제 앞에 할아버지 한 분이 지나가는데 거기에 눈이 꽂힌 거예요. 헐렁한 민소매 옷에, 구불거리는 머리를 하나로 묶고, 어깨에 큼지막하게 마리화나 문신이 있었어요. 과거에 히피 생활 좀 했을 것 같은? 그 모습 하나만 보고 ‘저 할아버지는 성격이 이럴 거야’라고 떠올리며 썼어요.

 
마지막으로, <악어의 맛>이 어떻게 읽혔으면 좋겠는지, 내가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지.

일단 재미있게 읽히길 바라죠. 전 소설의 역할에서 제일 중요한 게 재미라고 생각해요. 소설이잖아요. 교과서도 아니고 팜플렛도 아니고, 유희잖아요. 재미가 중요하죠.
한편으로, 저는 세계의 모순을 잘 반영하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저는 세계가 모순투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세상의 모순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하는 방식을 통해 세상을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 방법을 고민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 한 면만 보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총체적으로 사고하려고 하고요. 글 위에 세상을 통째로 올려놓고 그 전부를 깊이 들여다보고 싶어요.
저는 세상이 그렇게 희망적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만히 있으면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잘 될 거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아요. 항상 안 좋은 방향으로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세상은 언제나 설령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안 좋은 방향으로 안 되는 부분을 갖고 있어요. 동시에 그건 상황이 굉장히 나쁠 때조차도 좋아질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도 되지만요. 어쨌건 저는 세상에 대해 깊은 불신을 품고 있고, 그런 비관에서 출발해요.
다른 사람들도 의식적으로 깨닫지는 않아도 다들 속으로는 모순을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표면적으로 인식하느냐 내면적으로 인식하느냐의 차이죠. 우리는 모두 모순적인 인간이고, 모순 속에서 발전하는 존재들이니까요. 세상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모순을 표현할 유일한 길은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제게 있어서는 소설을 계속 쓰는 거예요. 이면의 일그러진 부분을 지켜볼 힘이 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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