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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SF&판타지 도서관

참가자



계림, 明, 연심, 진아, 콜린, 한별




 1. <지우전> ― 진아

 #. 도 닦는 이야기

 연심 다른 분들도 많이 이야기하셨지만, 깨달음을 얻는 내용이 참 좋아요. 좋아하는 캐릭터도 많고. 동양 판타지라는 게 흔한 건 아니잖아요? 동양 판타지를 기점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이 참 좋았고, 특히 ‘막’이라는 개념도 좋았어요. 막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 막만 넘어가면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이.

 한별 막이라는 표현도 좋아요.

 연심 보호막이라든지 천막이라든지,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인데 거기에 하나의 의미를 더 부여하니까 느낌이 자연스러워요. 이럴 때 ‘진(陳)’이라는 말을 많이 쓰잖아요. ‘진’이라고 하면 뭔가 인공적인 느낌이 나요.

 한별 한국 정서에 맞는 어휘랄까요.

 연심 시대적으로 한국을 바탕으로 했다는 게 보여요. 한국사가 배경으로 깔려있고 그 안에서 이야기가 나와서 좋았어요. 콜린님 책도 그런데,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우리나라의 문화로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거든요.

 한별 저는 리뷰를 쓰면서 ‘도 닦는 이야기’라고 표현했어요. 득도(得道)하는 인물들은 도사라고 나오는 인물들이 아니거든요. 지우나 연아나, 우리가 생각하는 도사의 이미지와는 다른데 그런 인물들이 득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미지의 역전이 일어나요. 읽으면서 “도는 낚시를 하면서도, 그릇을 빚으면서도 닦을 수 있다”는 표현이 계속 생각났어요. 독자에게도 화두를 하나씩 던지는 느낌이라.

 연심 사실 이런 순서로 된 글은 읽는 사람이 불편해요. 주인공이 절반이 지난 다음에야 나오고, 주인공인줄 알았던 인물은 주인공이 아니고. ‘걔가 주인공이었어?’ 그런 반응이 좀 나왔어요. 반전을 의도하신 건 아닐 텐데, 주인공이 누구인가가 반전이 되어버린 게 좀 있었죠.

 계림 좀 급하게 봤는데도 불구하고 읽기 너무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 오랜 세월 기다려왔던 소설이 아닐까 해요. 이 책에 나온 많은 부분들을 새로 만드신 거잖아요? 톨킨이 서양 판타지의 기반을 만들었듯이, 기반이 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이 책은 인물들이 되게 좋아서 뭐랄까, 안쪽이 딱딱하게 느껴지는 그런 것들이 좋았어요. 대사들은 다 어떻게 생각해내시는 거예요? 경험?

 진아 문장이나 대사는 정말로 퇴고하는 게 쓰는 것만큼 힘들었던 것 같아요. 저도 오늘 합평회에 나오기 전에 PDF 파일을 훑었는데, 솔직히 작가들 누구나 글 쓸 때 그런 기분 드는 순간이 한두 번은 있잖아요. ‘표현 괜찮은데?’ 그런 거. 파일을 보면서 ‘내가 이걸 쓰면서 그런 기분을 느꼈어?’ 싶어서 죽겠더라고요. (웃음)

 계림 연아는 정말 살아있어 보이는 것 같아요. 그리고 유도가 너무 좋았어요. 유도라는 인물은 정말, 이 부분에서 어떻게 나올 수 있나 싶게 나와서.

 연심 도망갔다 돌아오고.

 한별 제자가 만든 막에 갇혀 있고.

 (웃음)

 계림 연아가 나중에 시원하게 한 번 싸우길 바랐는데, 적이 없어서 싸움이 적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안 내지른 게 오히려 어울리겠구나, 그런 생각도 들고.

 연심 연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참고 참고 참고 또 참고, 한 번 확 내지르는 것 없이 참다가, 털었죠. 한 번쯤 질러보지 그랬어, 그런 심정이랄까요. 세자랑 사고라도 치지 그랬어. (웃음) 사심 어린 생각을 잠깐 했죠.

 계림 홍길동전, 전우치전, 그 뒤를 잇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영화화가 되도 좋겠다. 여기 나오는 새로운 컨벤션들이 다 말이 잘 되고.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하고 읽었는데 정말 꽉 짜이게 설정을 해놓으셔서 잘 읽히더라고요.

  저는 조금이라도 지루해지면 덮어놓고 자거든요. 그런데 이 책은 새벽 네 신가까지 읽었어요. 글은 워낙 잘 쓰는 작가니까 읽는데 어려움은 없었고. 시대적인 배경을 조선시대의 한 부분으로 설정하되 너무 드러나지 않게, 하지만 사람들이 짐작할 수 있게끔 하는 그런 게 빤하지 않으면서도 세련되어서 좋았어요. 이를테면 ‘정조 몇 년’ 이런 거 있잖아요. 허구가 분명한데도 작가 스스로가 허구가 아니라고 우기는,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요 간혹. 그런데, 글을 잘 쓰긴 잘 썼는데 너무 정갈하고 깔끔해서 전체적인 분위기가 단정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연심 막 끈적거리지도 않아요.

  뭐라고 딱히 표현을 못하겠는데, 너무 단정해서 ‘얘들이 왜 이렇게 단정할까’하고 생각했어요. 이 책에는 막나가는 인물이 거의 없어요. 허영두 같은 인물이 있긴 하지만 그런 인물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관심을 할애하지 않아요. 악역도 있고 선역도 있는데, 악역이 충분한 역할 없이 끝나요. 다음 글 쓰실 때는 조금 더 흐트러지게 써도 좋을 것 같아요. 지우와 연아의 관계, 지우와 유도의 관계, 계향과 지우와 그 부인의 관계를 빼고는 모든 관계가 거리감이 있다고 느껴졌어요. 물론 다들 친할 순 없지만, 신분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긴 한데….

 연심 행동 면에 있어서도 다들 너무 착해요. 주인공만 착한 게 아니라 나오는 사람들마저도. 악역이 조금 약하다고 해야 하나? 이 책에 나오는 악역들은 그 위치에 있어서 악역같이 보이는 거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는 잘 뚜렷하게 안 잡힌다고 해야 하나.

  대표적인 인물이 세자빈이죠.

 연심 세자빈이 지위에 비해서 너무 소녀 같은 게 있어요. 보통 저 지위가 되면 자기가 어떻게 할지, 어떻게 사람을 굴릴지 다 눈에 보일 텐데. 굉장히 소녀처럼 연아를 대하는구나, 그런 게 있어서.

 한별 인물들이 조금만 더 구질구질했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만홍, 청운 같은 도사들이 지우를 안 좋게 생각하고 잡으려는 게 사실상 부러움하고 시기심 때문이잖아요. 그런데 소유의 말을 엄청난 대주제인 양 받아들이고 그걸 그대로 말하는데, 자기들도 알 거 아니에요 구질구질하다는 거. 조금 더 대놓고 열등감 같은 걸 보였으면 그 인물들에게도 나름의 애정이 가지 않았을까 해요.

  그런 생각도 들어요. 도사들이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아닌척하고 행동하는 그런 부분들이 많잖아요. 얘들도 사회생활 하는구나, 직장 나가면 이래야지. (웃음)

 한별 여기 나오는 도사들 보면 직장인 같기도 하고 도제제도 같기도 한데, 묘하게 도사라기보다는 기술자라는 느낌에요.

 콜린 어떤 논리를 가지고 쓰느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이 책은 시작할 때 달이 지구의 1/4이고 어쩌고 하잖아요. 그런 논리로 세계를 쌓았기 때문에 도술도 그렇게 들어가야 해요. 결국 기술자처럼 돼야 하는 거죠.

 연심 그거 좋았어요. 아주 환상에 기본을 두는 게 아니라 SF적인 공학도 들어가요. 절묘하게 잘 섞인 것 같아요. 우주를 설명할 때는 공학적으로 설명하면서 막이라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설정을 넣으면, 꼬꼬마들이 ‘막도 진짜 있는 거 아니야?’ 이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또 하죠.

 한별 계향하고 만나는 도입부가 작품 전체를 쫙 꿸 수 있게 정보를 굉장히 잘 전달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이 부분을 가장 좋아해요.

 콜린 책의 도입부가 좋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진짜 좋은 도입부에요.

  인포메이션이 잘 되어있어요.

 한별 그 이후 지우가 휙 사라져버린다는 점에서도. 그 뒤에 바로 아이 이야기가 나오니까 지우가 머릿속에서 휙 사라져버리잖아요.

 연심 그 장면은 정말 아름답게 쓰신 것 같아요. 우아하게.

 진아 저는 늘 제 글에 애칭을 하나씩 붙이고 시작하는데, 그렇게 불렀던 것 같아요. 도 닦는 이야기라고. 저도 쓰면서 너무 우아한 게 아닌가 생각하긴 했어요. 전투 장면도 유혈이 낭자하지만 우아한 쪽이 맞고. <300>같은 스타일은 아니잖아요. 고민을 하긴 했는데 이 책은 그렇게 가더라고요.

 연심 게임 캐릭터의 특징이 있는 것처럼, 이건 진아님의 특징이기 때문에. (웃음)

 진아 다음에는 안 우아하게도 써보고 싶은데, 이 책은 그렇게 간 것 같고. 제가 생각한 도사들의 모델은 대학 교수님들이었어요.

 한별 왠지, 뭔가 떠오르더라. (웃음)

 진아 되게 엄격하고 어쩐지 일그러져있기도 하고. 우아하게 학문을 닦는 것 같기는 하지만 출세하려고 발버둥을 치기도 하고. 사이에서 조교들은 죽어가고. 송암이나 장제 같은 인물들이 ‘내가 도사가 되면 쟤를 키워야지’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고. 왕은 ‘그냥 해, 하라면 하는 거지 말이 많아’ 이런 유형의 사장.


 #. 모두 나를 칼이라 했다

 연심 지난번 와우북 페스티벌 때 느낀 건데, 이 책은 진짜 소개하기 힘들어요. 줄거리가 한 번에 정리가 안 돼요.

 콜린 이야기가 한 줄로 정리가 안 된다는 게 좋은 건가 나쁜 건가? 그냥 개성인 건가요?

  이건 다른 곳에서 사담으로 이야기했던 건데, 출판사가 너무 바보 같이 마케팅을 했어 요. 이건 무협지 같은 느낌도 있고, 도사까지 나오잖아요.

 연심 ‘모두 나를 칼이라 했다’가 멘트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해요. 지우만 주인공이 아니라 연아도 주인공인데, 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사람들에게 작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어 그럼 그 내용이 뭐에요?’하고 책 내용을 물어보면, 한 줄 요약이 안 돼요.

  요약이 안 되면 적어도 책에 대한 호기심이 일게 했어야 했는데….

 연심 ‘모두 나를 칼이라 했다’가 너무 강하다보니까 다른 걸로 대체해서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이 책을 여러 번 읽은 저도 이걸 딱 보니까 ‘지우는’부터 설명이 들어가는 거예요. 한줄 요약이 안 된다는 게 좀 힘들었어요.

 콜린 저는 전에 ‘독자와의 만남’ 자리에서 다 이야기해서…. 글에 대해서 많이 아는 사람이 쓴 글이고. 상당히 수려하고, 흠을 잡을 게 별로 없죠. 그리고 그런 테크닉을 바탕으로 하나의 스타일로 쭉 밀고 간 글이에요. 글의 소재가 바뀌는데 틀이 있고,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인물도 마찬가지고. 인물의 외모도 어떻게 보면 통제가 되어있는 것 같아요. 스타일이 좋아야 하고, 웃긴 사람은 웃긴 사람대로, 악역이면 악역대로 스타일이 있는 거고. ‘독자와의 만남’ 생각을 못했는데, 明님 말씀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 스타일이 안 맞는 사람한테 이 책이 어떻게 보일 것인가? 불균열하고 불균질하고 빈틈이 있으면 선택하면서 읽을 수 있는데, 스타일이 안 맞으면? 저보고 마케팅을 하라 그러면 그 스타일을 전면에 세웠을 것 같아요.

 연심 책은 참 어렵다고 생각해요. 자기계발서나 독자 폭을 넓게 잡는 책이 아닌 하에야 모두에게 잘 읽히는 책을 쓰는 건 참 힘들고, 특히나 소설은 더 그렇다고 생각해요. 소설은 작가 스타일이 굉장히 많이 녹아들고, 그 스타일이 큰 영향을 미치니까.

 콜린 구체적으로 인물관계의 키워드는 ‘믿을 사람이 없다’인 것 같아요. 가족도 마찬가지고, 스승이고 제자고. 믿을 사람이 없다는 걸 들이댔을 때 가장 배신감이 큰 건 가족이잖아요. 가족은 무조건 믿을만한, 영원한 관계로 알고 있는데 사실 그게 아니더라하면 가장 배신감이 크죠. 그래서 지우하고 연아 주변에 악당 역할을 하는 가족이 좀 많죠.

 연심 맞아요. 그래서 기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고를 깨는 의외의 인물이 많았어요. 예를 들자면 지우 형. 아니면 연아의 어머니 같이 평생 바뀌지 않고 고정적인 존재. 실제로 있을 것 같은 인물이라서 동감이 많이 되는데, 그런 식으로 현실감이 많이 녹아있어서 연아가 절절한 게 잘 보여요.

 콜린 그래서 지우도 연아도 외로운 거죠. 잘났는데도 믿을 사람이 없으니까.

  여기는 가족관계가 다 그러네요. 세자도.

 콜린 나쁜 사람들끼리 관계도 그런 것 같아요. 믿을 사람이 없어. 다 외롭고. 불신을 넘을 만한 인품도, 능력도 갖고 있는 지우와 연아 두 사람이 그걸 넘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아, 친구가 연아가 김연아냐고, (웃음) 되게 궁금해 하는 것 같아서 꺼내봤어요.

 진아 출판사에서 회의할 때 그 이야기가 결국 한 번 나왔어요. 김연아라는 한 스케이터 때문에 생긴 이미지인지 솔직히 저도 알 수 없는데, 연아라는 이름이 딱 떠오르는데 너무 어울리는 거예요. 단아한 느낌도 들고. 연아가 좀 남자애 같기 때문에 이름이 부드러울 필요도 있었고, 아주 약한 느낌도 안 들고.

 연심 거기에 성 붙이면 되게 이상하단 느낌이 들어요.

 진아 그래서 허연아라고 나올 때 한 번씩 이상한 느낌이 들어요. 아, ‘허’라는 성씨는 사연이 있어요. 제가 글 쓰는데 되게 도움을 많이 준 친구가 허씨라서 넣어준 거예요. 걔가 지우를 좋아해서.

 연심 그런데 정작 연아는 성이 잘 안 나오고….

 진아 …아 그러네.

 (웃음)


 #. 바람이 지나는 길

 진아 원하는 장면이 있으면 그 장면으로 향하기 위해 스타일 같은 게 모두 같이 가야 해요. 하나라도 미끄러지면 그 장면으로 갈 수가 없어요. 1부의 마지막까지 가는 길도 되게 힘들었고, 오대산 산채 묘사하는 게 쉽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게 반드시 있어야 해요.

 콜린 조사 많이 하고 공부 많이 한 게 딱 보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티 안 나게 잘 들어가 있어요. ‘내가 이만큼 책 읽었어’ 이런 게 없어요. 그게 참 좋더라고요. 그때 당시 사람들이 뭘 입고, 그게 소설에 왜 나와, 그걸 입히고 주인공을 내보내야지.

 계림 이 책이 전형을 허락하지 않는 부분이 있거든요. 전 그 부분이 정말 좋은데, 그걸 대중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진아님의 의지에 따라 달려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고. 대중적으로 환영받지 못했다고 흔들릴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이 책 쓰실 때 편집자가 다른 것들을 요구했나요?

 진아 아뇨, 저는 다 쓴 다음에 보내서. 문장 같은 부분적인 의견은 있었지만 많지는 않았고. 구성이 독특한 면이 있잖아요. (웃음) 다행히 편집자분들이 구성 이대로 가는 거 너무 좋다고 이야기하셨어요. 저는 솔직히 1부가 이렇게 짧아질 줄 몰랐어요. 제가 머릿속에서 구상했을 때는 스토리가 많았어요. 왕도 나오고, 반역도 나오고 전투 장면도 있고. 다 쓰고 보니 생각보다 짧네? 제가 장편을 많이 써본 게 아니잖아요. 분량에 대한 감이 안 오는 거예요. 이건 성격 문제인 것 같아요. 전 중단편 쓸 때도 다 써야 끝이지 분량을 감을 잡아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래서 2부로 넘어갔어요. 그런데 저 2부 쓰는데 정말 힘든 게 지우가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그 흐름을 놓치지 않고 나가는 게 되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문제였죠. 초조해하지 말자, 내가 초조해하면 글에 티가 난다, 이런 게 있잖아요. 작가가 불안해하면 어디선가 티가 나고. 그게 힘들었고.

 콜린 도입부가 진짜 좋은 것 같아요. 애잔한 것도 있는데 야릇한 것도 있고, 묘한 것도 있고. 그런데 여자가 주인공이 아니라니. 주인공이 아니구나 하고 넘어갔는데, 아예 안 나오는 거야? 했더니 나오더라고요.

 계림 쓰기 전에 보통 어느 정도까지 잡아두고 쓰세요?

 진아 쓰기 전에 A4로 40~60매 정도 대충 써요. 대사치기를 하거나, 여기에는 이 장면 넣어야 함, 여기에는 무슨 복선이 필요함, 여기 자료 더 찾아보자, 그 정도로 쓰고 몇 번을 고쳐요. 전체 플롯을 봐야 되니까 장면 연출을 바꾸기도 하고 인물을 바꿔보기도 하고. 그 다음에 집필에 들어가면서 많이 바뀌긴 하는데, 아주 큰 틀은 그냥 그대로 가요. 도입부는 갈아엎을 때도 있어요. 1/4, 1/3 이상 쓰면 더 이상 갈아엎을 수가 없게 되니까 그 전에 몇 번 갈아엎고. 그렇게 쓰면 자기가 얼마나 썼는지를 몰라요, 지우면서 나가기 때문에. 지우는 것도 쓰는 거래요.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지우기가 얼마나 힘든데.

 계림 어떨 때 보면 작업 방식이 작가의 특징과 개성을 만드는 것 같아요.

 진아 네, 자기만의 방식이 나오는 것 같아요. 그것도 점점 변하고. 단편도 그렇게 쓰거든요. 그리고 그게 말이 좋아서 틀을 잡아놨다고 하는데, 그래도 살 붙이면서 되게 많이 달라져요.

 연심 그래서 이분은 체력으로 글을 쓰시죠.

 진아 체력 관리해야 하나 봐요. (웃음) 솔직히 이건 체력싸움이에요 진짜. 제가 하루치 글을 쓸 때 기승전결 기복이 있어요. 늘 시작할 때는 버벅이다가 달리고, 진 빠지면 멈추고, 진 빠졌을 때 억지로 더 쓰면 망쳐놓더라고요. 이걸 오륙일을 하면 진짜 미칠 것 같아요. 하루도 안 쉬어야 하는데.

 계림 왜 하루도 안 쉬려고 그러시는데요?

 진아 초조해서요. 그런 생각 안 하려고 하다가도 (콜린을 가리키며) 저 사람 열 권 짼데 나 이제 한 권이야, 그런 생각 들잖아요.

 콜린 저 진짜 제가 낸 여덟 권 다 파묻어버리고 싶어요. 얼마나 쪽팔린 줄 알아요? 한 권 냈는데 마음에 안 들어, 그러면 좀 참을 만 하잖아요, 여덟 권이에요. 어떨 때는 숨을 못 쉬겠어요. 왜 이렇게 많지? 뭘 더 어떻게 하라는 거야?

 진아 때리고 싶다 되게. 본인에겐 절박한데. (웃음)



 2. <동네 전쟁> ― 콜린


 #. 안개에 쌓인 한남동

 연심 <동네 전쟁> 재밌게 읽었어요. 어떤 분께서는 <절망의 구>와 비슷하다는 리뷰를 써주시기도 하셨지만.

 진아 그 리뷰 봤는데, 저는 <절망의 구>와 비슷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종말소설로서 스타일이 비슷한 면이 있는 거고, 그렇게 따지면 세상 모든 로맨스는 다 똑같은 거니까. 전혀 비슷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연심 전반부는 <절망의 구>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일상적인 면모와 그렇지 않은 부분이 섞여 있었다는 거. 제가 이 책을 읽을 때 가장 힘들었던 건 한남동을 가본 적이 없다는 거였어요. 서울에서 십 년을 지내긴 했는데 이태원에 가본 적이 별로 없어요. 한남동의 구체적인 랜드 마크를 이야기해줘도 어떤 건지 아예 감도 안 잡혔거든요. 차라리 이태원! 하면 ‘외국인이 많이 있는 곳’ 하는데, 한남동은 어디야? 그런 부분이 조금 어색했어요.

 한별 저는 콜린님 글을 거의 사전지식 없이 바로 봤어요. 밤에 당직 하면서 새벽 한 시쯤에 책을 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네 시 반이 넘은 거예요. 딱 눈을 뜨니까 문 열고 영업 시작하래. 아니 이게 무슨 소리지? 저는 그렇게, 당황스러울 정도로 푹 빠져서 봤거든요. 저도 이태원 안 가봤고 한남동이 어딘지 모르고 봤는데, 하나씩 하나씩 던져지는 상황에 잡혀서 깊숙이 끌려 들어간 거죠. 이런 경험이 잘 없는데, 빠져들어요.

 연심 일단 콜린님 소설이 굉장히 몰입도가 좋아요. 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한 번 잡으면 끝까지 다 읽을 정도로. 이 책에서 몰입도가 한층 더 업그레이드가 됐다고 생각하는데, 계속 감춰져있는 게 있어요. 예를 들자면, 길이 있어요. 길이 딱 한 방향으로 가는데 안개에 쌓여 있어요. 그 속에서 이야기가 하나 나타나면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실마리가 있고, 실마리가 있고, 실마리가 있는 식으로 기점이 하나하나 나타나고, 그 사이에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그런 상황인 거예요. 말 그대로 눈 감고 손 붙잡혀 끌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한 편으로 보면 난폭하다는 인상도 받았고요. 이야기를 20% 알고 시작하는 것과 5% 알고 시작하는 것은 다르잖아요. 이 책은 5% 알고 시작하는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이 책에는 영웅이 안 나와요. 일종의 계시를 받은 보통 사람들이 그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했을 때 바통이 A라는 사람한테서 B에게로 넘어가는 식이거든요. A의 바통이 B한테 넘어가고, B의 바통이 C한테 넘어가고.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건 보통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주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 때문에 그런 구성이 필요했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형식과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잘 맞았다고 생각했어요.

 한별 A에서 B, B에서 C로 이어지는 단계가 독자들을 강하게 끌어당기기는 하는데, 이 가이드라인에서 벗어나버리면 따라가기 어려운 면이 있어요.

 연심 만약에 한 사람이라도 계시를 다르게 행동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처음부터 계시가 어디서 내려왔는지 불명확했고, 인물들이 확신은 없었지만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성공한 거잖아요. 그런 연결고리가 좀 약했다고 할까요?

 진아 A가 B를 구하고 B가 C를 구하는 과정 자체는 그렇게 드라마틱하지 않을 수 있어요. 어떻게 보면 일상적인 작은 행위가 쌓이고 연결고리가 되니까 세계를 구원하는 걸로 간 거죠. 저는 이런 식의 구조를 좋아해서 굉장히 좋았고, 콜린님 글은 잡으면 그 자리에서 보게 되요. 예전에 거울 필진 은림님이 ‘문장이 최면을 거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빨려드는 게 있어요. 그런데 <동네 전쟁>이라는 소설은 많이 아쉬웠어요. 좋은 점도 굉장히 많아요. 속도감도 있고, 작은 도움이 큰 일이 되고, 이런 건 되게 좋았는데, 마무리가 덜 된 느낌이 들어요. 적어도 한두 번은 구성과 문장에 퇴고가 필요했다고 생각해요. 너무 거친 문장들이 많이 보여서 글을 읽다가 튕겨 나오게 되요.
 서술이 좀 더 간결하면 좋았겠다거나 단역이라도 인물이 등장하기 전에 그 인물에 대한 서술이 미리 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들이 있어요.”

 콜린 진짜 날카롭게 보셨다. (웃음)

 진아 인물들이 좀 더 변별력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연심 진수랑 제인은 확실하게 티 나죠. 진수, 제인, 디팍은 워낙에 다른 사람들이라서.

 진아 디팍이 여자들을 조금 멸시하는 인물이라는 암시가 조금 더 있었어야 할 것 같아요. 디팍이 제인한테 뭐라 그러는 건 제인이 트랜스젠더이기 때문인데, 트랜스젠더를 싫어하는 것과 여자를 싫어하는 건 다르잖아요. 도입부에 인물들이 한 명씩 나오면서 성격을 드러낼 수 있는 작은 에피소드가 있잖아요. 그런 에피소드에서 이를테면 진수는 멍하니 느리게 반응하고 디팍은 머리를 굴리는 것처럼. 그러면서 배경 정경이 그려지고. 그 역할들을 1장에서 정리를 하고 끝냈어야 했다고 생각해요.

  빨간펜 첨삭지돈데? (웃음)

 연심 제가 전에 <절망의 구> 합평할 때 진짜 이렇게 들고 왔었는데. (웃음)

 진아 그런 식으로 조금 더 퇴고해주셨으면 어땠을까 싶어서 아쉬웠어요.

 연심 콜린님 소설은 굉장히 영상적인 기법으로 쓰였어요. 구성도 그렇고 묘사도 그렇고. 이 책을 봤을 때 책을 한 권 읽었다는 느낌도 있지만 한 편의 영화, 혹은 한 편의 시리즈물을 보는 느낌도 있거든요.

 진아 만화나 영화를 통해서 구현하는 것과 문장으로만 구현하는 건 완전히 달라요. 독자들이 대충 상상할 수 있는 건 있어요. 요새 독자치고 재난영화 한두 편 안 본 사람 없으니까. 그런데 작가는 거기에 의존하면 안 되죠. 독자들이 지금까지 봐온 영화나 영상 그 이상을 상상할 수 있을 만큼의 정밀한 묘사력이 필요한 거죠.

 연심 그 정도까지 묘사가 들어간다면 속도감이 이 정도로 나올 것 같진 않아요. 개념이 약간 다른데, 저는 책을 읽다보면 독자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 의존해야 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상투어가 상투어가 되는 건 많은 사람들이 그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이고, 상투어를 썼을 때 속도감이 생긴다면, 사용해도 괜찮아요. 상투어를 썼기 때문에 더 몰입할 수 있단 말도 되니까요. 지금까지 나온 콜린님의 책들이 정말 다양한 내용들을 다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몰입도가 있었던 것은 그런 영상적인 텍스트이기 때문인 것도 한몫을 한다고 생각해요. 진아님이 말씀하셨던 부분은 저도 알고 있었지만 굳이 말씀을 안 드렸어요. 그걸 상쇄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약간 미국 드라마 중 시리즈물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렇게 만들면 참 재밌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 책이 영상화를 의도하고 만든 책이라는 배경도 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한별 독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 기대고 있는 부분은 확실히 있고, 진아님이 말씀하신 부분은 상당부분 영상으로 만들면 처리가 되는 부분이라… 물론 문장은 가다듬어야겠지만 어느 부분까지는 의도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진아 슥 넘어가게 되는 문장과 독자에게 집중해서 읽어! 라고 요구하는 문장. 그런 문장을 통한 연출이 더 살아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한별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굉장히 재미있는 원안소설이랄까. <동네 전쟁>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소설을 보면 완벽해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이죠.


 #. 외국인, 트랜스젠더, 외계인

 연심 콜린님이 쓰신 책 중에서는 대화가 유난히 많은 책이에요.

 진아 진수가 더 엉뚱하고 능청맞았다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연심 진수 성격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웃음)

 한별 패닉에 빠지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통일된 느낌은 없죠.

 연심 맹하고 찌질하던데요.

 한별 주로 맹하긴 한데….

 (웃음)

 연심 찌질할수록 주인공한테 감정을 대입하기가 쉬워요.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 누가 목숨 걸고 누굴 구하러 가고 그러겠어요. 그냥 도망가지. 진수는 딱히 남을 도운 것도 아니지만 다른 사람에게 악하게 굴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가장 일반적인 사람의 반응이 아닐까 해요.

 진아 디팍도 열심히 구했고. 꼬마애도 구했잖아요. 디팍 살려달라고 애걸도 하고.

 연심 꼬마나 디팍 같은 경우는 이미 진수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된 상태잖아요. 사람을 찾아서 리더가 되는, 그런 면에 있어서는 제일 이입하기 쉬운 인물이었어요. 제인은 너무 독특한 캐릭터고, 외국인은 일단 제 입장에서는 이입할 수 있는 대상이 못 돼서.

 한별 여기 나오는 외국인들이 사실 별로 외국인 같지 않아서 읽다가 가끔 까먹고는 했어요. 외국인이었지, 하면서 흠칫흠칫 놀라고.

 진아 영상이었으면 외국인이라는 게 조금 더 와 닿았을 것 같기도 해요. 디팍이 한국말을 너무 잘하는데, 잘 하는 인물도 필요해요. 그게 주는 이질감이 있거든요. 영화 <초능력자>에서 보면 외국인들이 나와서 한국말을 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데, 그걸 소설에서 구현하기는 약간 어려움이 있는 것 같아요.

 연심 저는 이보가 캐릭터가 안 잡혔어요. 너무 소품처럼 나와요, 사람이.

 한별 뒤에 다시 나타났을 때 이보라는 걸 못 알아봤어요.

 진아 기왕에 배경을 이태원으로 잡았으면 그냥 이태원에 놀러온 관광객도 하나 출연했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연심 배경이 왜 그 동네여야만 했을까요? 작가님 사는 동네도 아니고. 이태원은 한국물을 많이 먹은 외국인이 있으면서, 비싸고, 그런 느낌? 이질적인 캐릭터들이 제일 잘 뒤섞일 수 있는 동네라는 게 그나마 제일 가깝지 않을까요? 굳이 이태원을 선택한 것은 캐릭터를 잘 잡기 위해서였을 것 같은데, 문제는 구성적으로 스토리가 난폭하게 끌고 가버려서 각 개인을 묘사를 덜 했어요. 그게 제일 큰 실수인 것 같아요. A 인물과 B 인물의 차이점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굉장히 큰 단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책을 읽으면서 제일 공감하는 부분이 사람이잖아요.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책을 덮으면 알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깊게 들어가지 않아요. 그리고 여기서는 클라이맥스가 외계인 기지가 무너지는 장면인데, 그건 사건상의 클라이맥스지 감정선의 클라이맥스는 아니잖아요. 그게 좀 안 보였다고 해야 하나요?

 진아 많은 이야기가 특정 인물에 독자를 몰입시키잖아요. 그래서 그 방법을 쓰지 않는 소설은 항상 모험이 되어버려요. 외면 받을 수도 있고. 그런 면에서는 좋았어요. 특별히 누군가에게 이입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결과적으로 지구를 구하는 구성.

 연심 그 생각은 들었어요. 이렇게 글을 쓰실 분은 아닌데, 사공이 많아서 배가 산으로 간. (웃음) 지금까지 봤던 콜린님 소설이 캐릭터는 강했거든요. 캐릭터가 이정도로 약한 책은 본 적은 없어요.

 진아 계속 그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어떻게’가 중요한 게 아니야, ‘왜’가 중요한 거야” 사실 말이 안 되게 넘어가는 부분이 있는데도 왠지 그냥 납득하게 되요. 왜 진수랑 민지는 그렇게 많이 만들었어? 쟤네들이 배신자인줄 알았던 거야 몰랐던 거야?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사실 굉장히 대담한 선언이거든요?

 계림 읽으면서 ‘내가 잘못 읽고 있는 게 아닌가’하고 나를 탓하게 되죠. (웃음) 저는 콜린님 소설을 보면서 인물이 약하다는 생각 한 번도 해 본 적 없고,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다만 이 책에서는 인물을 둘러싼 플롯이 이야기가 표방하고 있는 것에 비해 덜 짜인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작법서, 작법교실에서 캐릭터와 플롯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콜린님은 ‘캐릭터고 플롯이 뭐야’하고 그냥 쓰시고, 그게 먹힌단 말이죠. 이걸 영화화를 한다면 시나리오 작업에 많은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비주얼보다도 플롯 부분에서 좀 정리해야 할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하는데… 아무튼, 콜린님 글 읽을 때 누가 머리에 쿠킹호일을 쓰고 나온다던가 갑자기 검은 양복을 입고 나오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아요. 이런 느낌을 줄 수 있는 작가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콜린님 혹시 카프카의 소설 좋아하세요?

 콜린 잘 몰라요.

 계림 전 항상 콜린님 책 읽을 때마다 카프카가 생각이 나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하루키 느낌이 나요.

 진아 그로테스크한 게 있긴 한데….

 연심 저는 스티븐 킹 같은 느낌. 기본 바탕이 호러에요.

 계림 시각적으로 많이 헷갈린 부분이 있었어요. 하얀 안개 나오고 검은 안개 나오고, 촉수가 검은색인데 알고 봤더니 안개가 뭉쳐서 된 거였고, 벽이 있는데 안으로 축소되고 있었고. <절망의 구>는 굉장히 심플하잖아요. 검은 공 하나. 이 책에서는 묘사도 부족했지만 머릿속으로 시각화할 게 너무 많더라고요. 어수선하단 느낌도 드는 게, 뒤에 가면서 출혈 바이러스 나오고, 죽었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다니잖아요.

 연심 아까도 인물 이야기 했는데, 이놈도 저놈도 그놈도 비슷한 비중이면 하나쯤 버리는 패가 있는데, 이 책에는 버리는 패가 하나도 없었어요. 캐릭터가 다 살아남았잖아요. 무려 나지마의 엄마 아빠까지 다 살아남았잖아요. 제인만 빼고.

 진아 이 소설이 정말 재미있는 게 뭐냐면, <닥터 후>의 B급틱한 재미로 보자면 사실 다 말이 되요. 그냥 던지고 보고, 넣고 보고, 섞고 보고. 이런 식으로 써서 재밌기 힘들거든요.

 연심 영상화가 되게 기대가 되는 게, 신하균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지구를 지켜라>, 딱 그 느낌일 것 같아요. 너무 재미있게 봤거든요. 약간 맛이 갔지만 진지한, 그런 거 좋아요.
  콜린님 장편은 이 책 밖에 본 게 없고, 단편을 좀 봤는데 단편에서의 그런 섬세함이나 오밀조밀한 걸 기대했었는지 생각보다 거칠어서 놀랐어요. 진아님이 말씀하신대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장면들이 있는데도 일단 제쳐두고 ‘그래서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는데? 그래서!’ 이런 것도 좀 있었고.

 진아 이 책은 질문을 바꿔야 해요. ‘그런데를 묻지 말고 그래서를 물어라!’

 콜린 그러면 멋있지가 않잖아요. (웃음)

  단편에서는 섬세한 부분들이 마음에 들었는데, 이 책은 조금 거칠다보니까 그냥 넘어가는 부분들이 많다고 느껴졌어요. 동물에 대해서 나오는 게 말을 한다는 것 빼고는 딱 인간이 생각하는 동물인 거예요. 뭐랄까, 인간이 동물을 바라볼 때 나타나는 종속감이 느껴졌어요. 하지만 동물이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면 독립된 객체로서 뭔가 주장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동물들이 그런, 인간 생각 위주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고양이가 죽었을 때의 무게감이 떨어져요.

 진아 강아지가 죽을 때 민지가 안아주는 장면은 되게 애틋해요. 퇴고를 조금 더 하고 문장에 조금만 더 신경을 쓰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 많이 아쉬워요.

 연심 그러고 보면 오늘은 정말 극과 극이 만났네요. 콜린님 글은 사건은 팡팡 터지잖아요. 이후를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이 팡팡 터지는데, 진아님은 사건이 없어요. 싸워도 싸운 게 아니고.

 콜린 사건이 참 적어요. 아까 그 이야기를 못 했어. (웃음)


 #. 작가 전쟁

 콜린 다 맞는 말 같아요.

  한국영화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디테일할 면은 약한데 이야기는 흘러가고.

 진아 많이 부서지고.

 콜린 변명할 수가 없구나, 못 썼죠. 뭘 모르고 쓴 것도 맞고. 얼렁뚱땅 넘어간 거 정말 많고. 그런데 그렇게 하고 싶었던 면도 좀 있어요. 얼렁뚱땅. 특히 4장. 터널에서 지하철 밀고 할 때, 그땐 정말 얼렁뚱땅 다 넘어가는 걸 하고 싶었어요. 편집자 분이 ‘이게 무슨 이야기냐’고 물어보는데, 나도 모른다고. (웃음) 문장은 좀. 요즘은 약간 생각이 바뀌었어요. 수려한 문장, 화려한 문장, 써본 적은 없지만 세상엔 그런 문장이 있다는데 그게 꼭 중요한가.

 진아 사람들이 ‘좋은 문장’이라고 말할 때 수려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이런 문장을 떠올려요. 그런데 그게 좋은 문장이 아니에요. 내가 그리고 싶은 상황을 정확하게 그릴 수만 있으면 되잖아요.

 콜린 화려한 문장 말고 정확한 문장. 정확한 문장이 정말 좋은가? 요즘 약간 회의가 있어요. 베스트셀러 보면 막 정확한 문장이 좋다는데 이게 왜 좋아? 그런 게 있는 거예요. 정말 통속적인 표현, 흔히 쓰는 표현, 일본어식 표현. 왜 쓰면 안 된다는 거지? 그게 쉽게 읽힌다는데. 잘 팔리는데. 뭔가 금단의 영역…. (웃음) 마약을 하면 기분이 좋다는데 왜 하면 안 되는 거지? 이런 거 있잖아요. 전 원래 천박한 거 좋아하거든요. <쇼걸> 이런 영화 좋아해요. 원래 장점하고 단점하고 다 강한 것을 좋아해서, 문장을 단점으로 넣고 다른 걸 장점으로 넣으면… (웃음) 앞으로는 문장이 정말 이상할 거예요.

 연심 저는 문장보다는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콕 찍어서 해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다고 생각해요. <도가니> 같은 경우는 장애아에게 있었던 문제를 폭로한 거잖아요. 읽는 사람들이 보고 싶은 캐릭터들을 만들어 주고,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 사건, 이런 식으로 쓰는 거죠.

 진아 실험을 해보고 문장을 망가트려 보는 것도 문장을 가다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 같아요. 옛 문인들이 술을 꼭대기까지 마시고 쫙! 긋듯이.  

 콜린 감독님들이 시놉시스를 줬어요. 저는 이 화법이 맞는다고 본 거죠.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뭔가 계속 터져요. 쓸 때 정말 막장 드라마 쓰는 기분이었어요. 질러놓고 보는 거야. 아무나 막 죽여, 안 되겠으면 죽이고, 다시 살리고, 막 내 맘대로. (웃음) 그렇게 썼고, 사실 디팍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모르는 거죠. 그런 식인데, B급처럼 쓸려면 쓸 수도 있어요. 감독님들도 그런 걸 원하긴 했어요, B급인데 재미있는 거. 우리나라는 SF도 안 읽고 B급도 안 보는데 B급 SF는 대체 누가 읽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정말 아는 사람들만 아는 재민데. 시놉시스를 받았을 때 이 이야기를 가장 대중적인 화법으로 풀겠다는 목표가 있었고, 내가 보기에 이건 구현하긴 어렵겠지만 소설로 구현해 낸다면 미국 드라마식 화법이 가장 대중적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미국 드라마의 그런 세련된 면까지 따라가지는 못했는데, 성공했나 실패했나 아직 모르겠어요. 감이 안 와요.

 진아 그렇게 가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아예 B급처럼 황당하게.

 콜린 이게 스티븐 킹의 <언더 더 돔>하고 똑같아요. 돔 안에 마을이 갇히는 이야긴데, 저는 그걸 나중에 알고 패닉에 빠진 거예요. 이걸 어떡하지? 스티븐 킹인데. 그것도 최근작인데. 완전 패닉 상태에 빠져서 회의도 하고 그랬는데 <언더 더 돔>도 <심슨가족>하고 비슷하다고 미국에서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진아 두 작품 이상 같은 설정을 했으면 그냥 공용된 설정이에요. (웃음)

 콜린 발광체 나오고 뭔가 많이 들어가기 시작한 게 그것 때문이에요. 투명한 돔이라는 것을 되도록 지워야 하니까 소재가 막 들어가고, 그 다음부터 막 들어가는 거예요. 시놉시스에 주인공이 별 사람이 다 있었는데 다 넣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아서 막 집어넣고. 트랜스젠더는 길 가다가 진짜 한 번 봤어요. 이태원을 가는데 김성수 감독님이 ‘저 여자 키 되게 크지 않냐’고, 검은 옷 입은 여자가 가는 거예요. 키가 되게 크더라고요. 가다가 여자가 딱 돌아서 들어가는데 ‘아 트랜스젠더구나’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넣었어요. 히잡 쓴 꼬마애도 봤어요. 너무 예쁜 꼬마애가 오렌지색 히잡을 쓰고서 골목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가 저랑 눈이 마주치니까 들어가는 거예요. 저거다. 쟤는 나와야 해. 네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넣어주마. 안 넣을 수가 없었어요.

 계림 실제로 감독님들하고 작업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어요?

 콜린 미팅을 했죠. 제가 조금씩 써갔죠. 감독님이 당황하는 거예요. ‘왜 조금씩 써오지?’

 진아 줄거리 써오고, 수정하면서 살 붙이고, 그런 식으로 갈 줄 알았는데….

 콜린 다행히 끝까지 쓸 수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저만 이득인 것 같고. 왜냐면 제가 그냥 썼다면 이런 소재를 쓰지 않았을 거고, 이런 작법을 쓰지 않았을 거예요. 새로운 걸 시도했고, 어쨌든 끝까지 썼고, 뿌듯했고. 마지막으로, 가치관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저는 <동네 전쟁>이 장르소설이지만 대중소설에 가깝다고 보거든요. 둘이 약간 다르잖아요. 옮겨가는 중인 것 같아요. 당분간은 그런 소설일 거예요. 장르소설이 아니고 대중소설. 모르겠어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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