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당신도 ‘일단은’ 소설을 쓸 수 있다니까!? 
2. 소설을 쓸 때는 어떤 문장을 써야 하는가?


DOSKHARAAS(손지상)


알리는 말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제가 전에 쓴 기사를 읽으신 분이시겠죠? <당신도 ‘일단은’ 소설을 쓸 수 있다> 말입니다. 

아, 안 읽으셨군요. 맞나요?

만일 그렇다면, 먼저 위의 기사를 읽고 오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이미 읽으셨다고 전제로 하고 글을 진행할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이해하시는 데에도 필요할 것 입니다.

기다릴 테니 읽고 오세요! 

……

읽고 오셨나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키워드 1: 의미


절대적으로 잘 쓴 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문장을 다룰 예정입니다만, 먼저 당신에게 한 마디 해두겠습니다. (충격 받을 준비 하세요. 별로 안 받으시려나?)

“절대적으로 잘 쓴 문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문장에는 의미가 담겨있지 않다.”
“따라서 당신이 쓴 문장은 그 자체로는 타인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의 구조와 과정 탓입니다. 특히 활자가 가진 특성과 한계 탓입니다. 이를 검토하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읽는 활자가 뇌에서 어떤 작용을 통해 임장감(臨場感, Reality)을 얻는지를 검증한 뒤, 거꾸로 이를 이용해 소설을 위한 문장 쓰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입니다. 

바로 실전으로 넘어가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편에서 말했듯 타오(道) 없이 테(德)도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번 기사에서는 왜 시스템이 중요한 가에 대해서는 잔뜩 적었지요. 타오(道)와 테(德). 기억하시죠? 이 두 개념을 이용해 앞으로 이야기 할 내용인 활자의 태생적 한계는 이것입니다.

“작자의 테는 직접 전달할 수 없다. 독자와 작자가 공유하는 타오를 전달하여, 독자가 자신의 테를 채워 넣어야 한다.”

이 한계가 거꾸로 활자의 힘이기도 합니다. 활자를 통해서는(엄밀히는 모든 의사소통 매체가) 작자는 자신이 의도한 의미를 전달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애초에 의미는 정황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손지상!” 하고 부른다고 가정해보지요. 이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만일 기차 플랫폼에서 어떤 여자가 반가움에 겨워 외친 말이라면, “드디어 만났군요! 반가워요!” 라는 의미를 담아 부른 것이겠지요. 

반면에, 만일 화장실 안에서 누군가가 외친 말이라면, “휴지 좀 가져다 줘!” 라는 의미를 담아 부른 것이겠지요. 

의미는 발화의도와 정황에 담겨있습니다. 의미를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말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말을 꺼낸 사람과 듣는 사람이 상황을 공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공유 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경험도 필요합니다. 


“독자의 경험이 
의미를 결정한다.”

이제 갓 말을 알아듣게 된 어린아이가 “손지상!” 하고 부르는 말을 들었다고 해 봅시다. 아이의 뇌는 분명 그 말이 아니라 주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려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의 음절이나 형태소를 분석한다고 해서 그 말의 의미를 알아내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없이는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상상할 재료가 없습니다. 이 경우 아무리 정황을 공유한다고 해도 이 말은 아무 의미 없는 소리일 뿐입니다.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경험을 갖추지 않다면 같은 수준으로 정황을 공유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자동적으로 이 말의 의미 혹은 발화의도가 전달되지 않습니다. 

반갑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휴지를 달라는 의미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경험이 필요합니다. 정황을 공유하기 위해 그 만큼 경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언어는 특히 다른 감각채널에 비해 특별히 ‘추상적’입니다. 활자는 거기에 더해 정황마저 제거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활자의 맹점, 활자의 한계입니다. 그리고 이 점이 바로 활자의 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추상’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키워드 2: 추상도


분석철학의 존재론
-부분함수

소설에서 어떤 문장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상도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개념을 이해한다면 여러 가지로 예술표현의 중요한 점이 보이실 겁니다. 특히 활자가 가진 한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점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꾹 참고 잘 따라오십시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활자는 비록 문맥이 있기는 해도 매우 제한적인 매체입니다. 의미를 전달하는 매체임에도 전적으로 읽는 사람의 경험에 의존합니다. 지식과 경험 모두 활자를 사용하는 사람이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나마 일상 언어를 활자로 이용한다면 모를 까, 수학공식과 같이 더더욱 추상적인 활자라면 “따라 올 사람만 따라와라”가 되어버립니다. 논문이라면 이 방법도 방법이지만 우리는 소설을 쓰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읽는 사람의 임장감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추상적’이라는 말에 대해 먼저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추상적’이라는 말은 ‘구체적’이라는 말과 서로 반대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정보량을 기준으로 나누게 됩니다. 

정보량이 적으면 ‘추상적’이고, 정보량이 많으면 ‘구체적’입니다. 그리고 이 추상적인 정도를 ‘추상도’라 부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보량에 대한 설명은 앞으로 나올 테니, 일단은 정보량 대신 필터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추상도는 본래 분석철학에서도 존재론(Ontology)에서 사용되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존재를 정의하는 방법론 중 하나입니다. 존재를 정의한다, 하면 굉장히 어렵게 들리겠지만 간단합니다. 만일 이 지구에서 구글 검색하듯 저 손지상을 검색해야 한다면, 어떤 검색어를 넣어야 할까요?

“생물, 척추동물, 포유류, 영장류, 인간, 남자, 손씨 성을 가진 사람, 이름이 지상인 사람, 1986년 3월 5일 대전광역시 출생……”

이런 식으로 점점 검색어어의 범위를 좁혀나가겠지요? 이렇게 전체에서 특정한 범위의 정보를 검색(=걸러내는, 분리하는)하는 함수를 부분함수(Partional Funcion)라고 합니다. 

손지상이라는 존재는 곧 전 우주에서 손지상에 관련된 정보만 분리해내는 부분함수이며, 손지상 외의 모든 우주의 존재를 정의하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이 세상의 인간에는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뭐뭐요, 다른 하나는 뭐뭐이다.” 하는 식의 표현입니다. 즉 모든 존재(=개념)은 전 우주에서 그 존재와 관련된 정보를 걸러내는 부분함수라 할 수 있습니다. 

부분함수의 정보량(=검색조건)을 늘려나가면 구체적으로 변하지요? 이렇듯 검색조건을 늘려나가는 것을 정보량을 늘리는 것이라 합니다. 반대로 정보량을 줄이면 더 큰 범주의 집합을 정의하게 됩니다. 구체적이 될수록 적용범위는 줄어들고, 추상적이 될수록 적용범위는 늘어납니다. 이 적용범위의 정도, 즉 어떤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량의 정도가 바로 추상도입니다.


히에르라르키(Hierarcky)
-추상 : 구체 = 포섭(包攝) : 모순(矛盾)

추상도에는 재미있는 성질이 있습니다. 명확하게 나뉘는 것은 아니지만 추상도에는 상하위계가 있습니다. 이를 정보량이 적은(=추상적)인 개념이 정보량이 많은(=구체적)인 개념을 포섭(包攝)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포유류라는 개념은 개라는 개념보다 분명 더 적은 정보(조건)을 사용해 정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포유류는 개에 포섭됩니다. 그러나 개와 고양이는 포유류라는 추상도에 포섭되기는 하지만 서로 비교를 하면 어느 쪽이 더 정보량이 많은지 우열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완전히 상하관계를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렇듯 완전히 순서를 보이지 않으나 어느 정도 순서를 보이는 집합을 ‘반순서집합’이라고 합니다. 우리 우주는 반순서집합인 셈입니다.

자, 그럼 이 순서 중 가장 아래단계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달리 말하면 가장 구체적인 개념, 검색기준인 정보량이 가장 많은 추상도는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개와 고양이라는 두 개념이 있으면 이 두 개념의 가장 아래, 가장 구체적인 개념은 무엇일까요? 두 개념의 정보량이 모두 들어가 있는 개념이겠죠? 예를 들면, “그루밍을 한다거나, 헤어볼을 토하는 요크셔테리어”, “멍멍 하고 짖는 코리안숏헤어” 등등.

서양의 분석철학자들은 이를 ‘모순’이라 불렀습니다. 정보량이 너무 많다보니, 그 개념은 다른 개념과 서로 같지 않은 고유하고 독자적인 개념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념은 곧 존재와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따라서 모순은 고유, 절대와 비슷한 의미가 됩니다. 

예를 들어 당신 자신은 다른 존재와 모순되는 존재입니다. 왜냐면 당신이 복수 존재할 수는 없으니까요. 복제인간이 있지 않느냐?! 하고 반론을 제기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그 복제인간은 고유의 존재가 되어버리니(복제된 이후로 서로 다른 경험을 하니) 결국은 모순된 존재입니다. 

그럼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모순된 존재라 존재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위에서 설명한 포섭, 그리고 추상도가 등장합니다. 

추상도를 기준으로 모든 개념은 상하관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피라미드 상태처럼, 맨 마지막 층에는 모순이 있고,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추상도를 높여 포섭해 나갈수록) 더 추상적이고 범주가 넓고 정보량은 적은 상태가 됩니다. 여기서 한 번 더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말하는 정보량은 그 개념을 걸러내는 데에 필요한 조건입니다. 

집합의 범주가 넓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개념 자체의 잠재 정보량은 늘어납니다. 모든 개념에는 아무리 모순되고 동떨어져 보여도 이를 포섭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와 당신을 포섭하는 개념은 아마 한국인, 혹은 남자, 혹은 인간 등이 있을 겁니다. 아프리카 초원의 돌과 나를 포섭하는 개념은, 음, 똑같이 철분을 함유하고 있는 물체, 억지가 있지만 이런 식으로 가능합니다. 이렇게 포섭하는 순간 모순은 사라지고 ‘공유’가 시작됩니다. 기억나나요? 상황을 공유해야만 의미가 발생한다는 말이요. 

개를 좋아하는 사람과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개와 고양이는 서로 모순됩니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을 동시에 포섭하는 포유류라는 개념을 제시하면 개와 고양이는 서로 같아집니다. (사실은 이 메커니즘이 기독교의 아가페와 같습니다.) 

따라서 개가 좋다, 고양이가 좋다, 하고 싸우는 사람들에게 “둘 다 포유류를 좋아하는 것이니 같은 거잖아.”라고 납득시킬 수만 있다면 싸움은 사라집니다. 둘은 서로를 공유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유가 곧 소통입니다.


소통의 알고리즘

추상도에 대해 이렇게 길게 이야기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흔히 소설은 독자와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고 합니다. 이 말에 대한 의미를 저는 위에서 설명했습니다. 소설은 나의 경험과 독자의 경험을 서로 포섭하는 추상적인 그릇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오에 켄자부로우(大江健三郎)가 “소설은 독자와 작자의 상상력을 동시에 활성화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내가 직접 체험한 경험(德)은 추상도가 매우 낮습니다. 달리 말하면 오감이라는 감각채널을 전부 사용하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고유한 경험입니다. 위에서 말했듯 고유한 경험 그 자체는 매우 추상도가 낮은 경험이기 때문에 타인에게 전달하려 하면 모순이 일어납니다. 

선불교에서는 자신이 체험한 진리는 문자로는 전달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를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합니다. 진리를 체험한 행위 그 자체는 매우 고유한 경험이라 전달하려 해도 과정 상 모순이나 왜곡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석가모니가 제자들에게 단순히 ‘설법’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수준의 추상도를 공유할 수 있도록, 체험할 수 있도록 명상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제자에게 맞는 추상도에 맞춰서 설법했습니다. 이를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는 모든 방법으로 법을 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법을 알아들을 수 있는 상태로 듣는 이의 추상도를 높이고 이에 임장감을 느끼게 하려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불교도 그래서 불립문자라고 하면서 좌선을 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높은 추상도의 커뮤니케이션을 지속해온 것입니다. 선문답이니 화두니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좌선은 임장감의 추상도를 높이는 과정입니다. 이를 전제로 추상도가 높은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합니다. “두 손으로 박수를 치면 소리가 난다. 그럼 한 손으로는 무슨 소리가 나느냐?”, “喝”, “(테이블을 주장자로) 쾅!” 등등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현재 상황에서 매우 모순된 행동을 해 패닉을 일으킵니다. 이 상황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임장감의 추상도를 높여야만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그는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패닉을 일으키지 않고 적절한 반응을 했다면 임장감의 추상도를 높여 소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임장감의 추상도를 깨달음의 수준으로 높이는 과정입니다. 

선문답이 성공했다는 것은 두 사람을 포섭하는 같은 추상도의 공간을 공유했다는 말이고, 이는 바로 깨달음의 공간입니다. 선문답이 성공했다는 말은 제자가 스승의 깨달음을 공유할 만큼 추상도가 올라갔다는 말이니까, 깨달았다고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의사소통도 결국은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1. 갑돌이는 을돌이에게 “힝”이라는 정보를 전달하려 합니다. 그러나 갑돌과 을돌은 서로 모순 상태여서 의사소통이 불가능합니다.

  2. 갑돌이는 자신과 을돌이를 모두 포섭하는 한 단계 높은 추상도인 정보공간 ‘뿡’을 설정하고, 이를 공유합니다. (심리학 용어로는 라포(Rapport)라고 합니다.)

  3. 갑돌이는 뿡 안에서 “힝”보다 추상도가 하나 높은 “ㅎ”을 서로 공유하고 있는 특정한 표현 매체를 사용해 전달합니다.

  4. 을돌이는 전달받은 “ㅎ”에 포섭되며 “힝”과 같은 추상도인 “힝‘”을 기억 중에서 떠올리게 됩니다. 이를 통해 정보가 전달됩니다.



왜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가 소설을 쓰는 것은 바로 소설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공간의 공유를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가 전달하려는 것이 스토리든 캐릭터든 테마든 혹은 당신의 경험이든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사고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려 합니다. 사람들이 소설 표현에서 흔히 보이는 실수가 바로 이것이라 지적합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 자주 하는 실수는 바로 이 고유한 경험을 그냥 내보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유한 경험이 매우 임장감이 높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쓴 활자를 통해 자신의 경험이 매우 생생하게 환기되고 되살아나기 때문에 누구나 그럴 것이라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 경험을 직접 해보지요. 포유류를 떠올려보세요. 지금 당신은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떠올릴 겁니다. 포유류에 해당하는 엄청나게 많은 ‘존재’들을 말이죠. 하지만 당신은 실수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포유류’를 떠올리라고 했는데, 당신은 포유류에 포섭되는 수많은 하위개념인 ‘개’, ‘고양이’, ‘원숭이’, ‘쥐’ 등등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포유류를 떠올릴 수 있나요? 제 말은, 포유류라는 것을 감각적으로 경험한 기억이 떠오르나요?

없을 겁니다. 왜냐면 ‘포유류’는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물리우주)에는 포유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보공간에만 존재하지요. 당신은 포유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많은 구체적인 개념을 떠올리고, 이를 위해 당신의 경험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포유류 그 자체를 당신이 떠올려 보세요. 

언어와 의미가 아닌 감각으로 설명하려 하면, 무언가 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의상 야릇한 감각일 것입니다. 머릿속이 직접적인 기억이 되었다가 무언가 “후왕” 하고 붕 뜬 무언가가 되었다가 할 것입니다. 바로 그 지점입니다!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 경험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선승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요.)

포유류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통해 환기하는 구체적인 기억과 경험,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 특정한 임장감이 생기는 것. 이것이 바로 활자가 임장감을 일으키는 비밀입니다. 모든 의사소통이 다 같은 알고리즘입니다. 이때 사용하는 표현 매체가 언어면 언어적 의사소통, 감각이면 비언어적 의사소통일 뿐입니다. 선불교의 한계가 바로 이 지점에서 나타나지만 이 글은 소설쓰기에 관한 것이니 다음 기회로 넘기겠습니다.

소설의 문장은 활자를 이용해 타인의 임장감을 높이는 것이지, 자신의 임장감을 높여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의 임장감을 높이는 방식은 잘못된 방식입니다. 

자신이 가진 ‘힝’을 가장 구체적이고 고유한 ‘힝’으로 만드는 것이 소설을 통해 의사소통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구체화, 추상도를 낮추는 방식입니다. 생생한 임장감은 얻을 수 있지만 그만큼 다른 사람의 경험과 모순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활자는 추상적인 언어 중에서도 가장 추상적인 표현 매체입니다. 왜냐면 정황이 제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게 정확하게 일치하는 경험을 환기시킬 수 있을지 없을지 매우 수상한 매체입니다. 거기에 더해 독자의 경험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다른 이와 경험을 공유하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모순’이 발생하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체험한 경험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려 하면 둘 사이에 공통된 경험을 찾아 경험을 ‘추상화’ 하여야 합니다. 즉, 당신의 경험이 가진 추상도를 올려야 합니다. 나만 아는 고유명사를 들먹인다거나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애초에 절대적으로 잘 쓴 문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독자와 작자 사이에 적절한 추상도를 찾아내어 둘의 경험이 포섭되게 하느냐 입니다.

그런데 왜 그 방법이 잘못된 것일까요? 추상도를 낮추어 정보량을 늘리는 것이오. 흔히 그런 말을 하지 않나요? 신은 세부에 머문다, 디테일을 높여야 한다, 등등. 정확히 말하자면 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자가 제대로 임장감을 느끼게 하려면 디테일과 정보량은 필연적으로 필요합니다. 그것도 많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활자의 디테일은 무작정 높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단은 연극을 예로 들어, 자기 자신의 추상도와 임장감을 높이는 방법을 설명하겠습니다. 이후 활자와 다른 예술과의 차이를 들겠습니다.



키워드 3: 임장감


메소드 연기, 그리고 존재감

메소드 연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연기술의 일종으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자신이 평소에 경험했던 과거의 기억이나 감정을 되살려내 연기의 임장감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위에서 말한 추상도를 낮추는 방법 그 자체로 보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풍부한 뉘앙스와 감정적 상태를 만들어 그 공간에 특정한 ‘상황’이나 ‘맥락’을 만들고, 자신이 이 상황에 충분히 빠져들어 있으면 보는 사람들은 그 공간 안으로 빨려들어갑니다. 말 그대로 ‘존재감’ 만으로 연기의 설득력을 만드는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모든 예술은 특정한 상황이나 공간을 이미 공유하고 있습니다. 음악을 음반의 형태로 관람할 수 있기 전까지는 연극이든 연주든 그 상황 안에 직접 가지 않으면 즐길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미 공유가 끝난 상황이라면 압도적으로 정보량을 늘린 구체적이고 고유한 경험을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양한 하위 개념이 활성화되어 관객은 압도적인 임장감을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연극에서 배우가 무대 위에 서서 임장감 있는 이미지를 가지고 연기를 하면, 관객에게 그 이미지가 직접적으로 전달되지는 않아도 특정한 이미지가 관객들에게 전달되게 됩니다. 어떤 특정한 동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배우가 자기 안에서 압도적인 임장감을 느끼고 이를 신체를 통해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단순한 동작도, 혹은 아예 아무 동작도 안하고 있는 순간에도 관객은 특정한 가상현실(=연극공간)을 임장감을 가지고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흔히 연기를 할 때는 이완되어 있어야 하고, 편안해야 하고, 관객을 의식하지 말아야 하고, 집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완되어 있지 않으면 뇌의 활동이 둔화되어 추상도가 낮아집니다. 편안한 기분이 아니라면 감정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관객을 의식하면 자기 안의 이미지에 집중할 수 없어 관객이 공유할 이미지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집중하지 않으면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생생히 느낄 수 없습니다.

연극을 배울 때는 감각훈련을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지 않는 행동을 기억을 재구성해서 연기하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 행동을 하는 것이지요. 커피를 마시는 행동이나 샤워를 하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추상도가 높은 기억을 임장감 있게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제 경험을 예로 들자면 메소드 훈련으로,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으며 대답을 한다거나, 기합을 내지르며 공을 던지고 받는다거나, 눈을 감고 지시하는 상황을 떠올리며 걸음을 걷는다거나, 손에 커피를 들고 마셔 본다거나, 대사가 없이 의미 없는 소리(지버리쉬gibberish)를 하며 서로 의사소통을 하려 한다거나 같은 다양한 감각훈련을 합니다. 이는 곧 자신의 경험을 ‘추상화’시키는 훈련입니다. 이렇게 추상화시킴으로써 실제 연기에도 적용시킬 수 있게 되고 보는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더 나아가 감정을 다루는 훈련도 합니다. 슬펐던 일, 즐거웠던 일 등 희로애락의 감정과 관련된 일을 상기하고 그 순간을 다시 체험해보거나, 이를 언어로 표현해보거나 하는 것입니다. 안젤리나 졸리가 이런 훈련을 어릴 때부터 했다고 합니다. 안젤리나 졸리는 대배우 존 보이드의 딸이기는 했지만, 이혼하여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어머니도 역시 배우로써 메소드 연기의 창시자인 리 스트라스버그에게 사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대여섯 살 때부터, 화가 나거나 하면 어머니가 “지금 어떤 느낌이니?” “지금 어떤 기분이 드니?” “지금 어떤 감각이 느껴지니?” 같은 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객관화(=추상화)시켰다고 합니다.

저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이러한 훈련을 거치는 것이 좋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의 감각과 감정을 언어로 최대한 세밀하게 표현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위에서 말한 자신만의 고유한 이미지를 구축해 소통을 실패하는 것이라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는 다릅니다.

연극을 비롯해 영화, 음악, 미술 등 다양한 예술과 달리 소설은 감각정보가 거의 없습니다. 사실 상 추상적인 언어만으로, 그것도 맥락도 제거된 채 임장감을 느껴야 합니다. 이는 곧 독자 쪽에서도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자신의 감각이나 감정을 추상화시키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감정과 감각이나 이미지를 최대한 세밀하게 언어화하는 것은 곧 언어라는 추상적인 표현 매체를 이용해 고유한 감각을 추상화시키는 행위입니다. 

이는 불교에서도 명상이라는 이름으로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일일이 언어화 시키거나 의식하는 ‘위빠사나 명상’, 특정한 이미지를 임장감 있는 실체로 머릿속에서 재현하는 ‘관상 명상’,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지관타좌 명상’ 혹은 ‘참선’ 같은 행위가 이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추상화시키면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경험이 많아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경험은 단순히 여러 가지 일을 겪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얼마나 세밀하게 의식하고 받아들였나입니다. 이는 나이와 관계없이 얼마나 농밀하게 살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소설을 쓰고자 하는 분은 일단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주변에 모든 일에 감각을 세우고, 감정을 의식하고, 이를 언어화시키는 훈련을 하시길 바랍니다. 이에 사용 가능한 다양한 메소드를 소개하겠습니다. 일단은 간단한 역복식호흡과 위빠사나 명상, 그리고 관상 명상을 간략화한 메소드입니다. 이를 따로따로 하지 마시고 동시에 하시는 편이 좋습니다만 어려울 테니 일단은 각각 연습해보세요.


역복식호흡

사람의 몸은 이완이 되어있지 않으면 몸은 긴장하여 추상적인 사고보다는 눈앞의 일에만 좌우되고 감정적으로 변하고 맙니다. 따라서 가장 먼저 이완하십시오.

이완을 위한 팁을 조금 이야기하자면 먼저 몸의 힘을 빼는 방법으로 역복식호흡(逆複式呼吸)이 있습니다. 원래 근육의 긴장을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이완은 가능합니다. 이 방법으로 메소드 연기자들은 40분, 50분에 걸쳐서 자신의 근육을 이완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요. 그래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역복식호흡을 추천합니다. 

매우 간단합니다. 사람의 몸은 숨을 내쉴 때 긴장하고 들이쉴 때 이완합니다. 그러니 숨을 내쉬면서 몸에 힘을 빼는 것입니다. 이를 위빠사나 명상과 함께 하면 금방 몸이 이완될 것입니다.


위빠사나 명상

위빠사나 명상은 본래 상좌부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하는 명상으로 석가모니는 위빠사나 명상과 아나파나사티 명상이라는 호흡법을 합쳐 수행했다고 합니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위빠사나 명상은 최면의 기본 원리이기도 합니다. 최면의 원리는 피시술자가 최면술사의 언어와 비언어 의사소통을 통해 그가 전달하는 가상의 정보에 리얼리티를 느끼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최면의 순서는 먼저 몸을 이완시키고, 피시술자의 주변에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을 언어화시켜 피시술자에게 피드백합니다. 위에서 설명한 추상화랑 똑같지요? 엉덩이가 의자에 닿는 감촉을 느껴보라, 내 목소리만 들린다, 숨이 들어가고, 나간다, 등등 감각으로 느껴지는 일들을 언어로 표현합니다. 특히 청각-시각-피부감각-후각 등 계속해서 감각을 바꿔가면서 언어로 피드백하면 쉽게 최면상태에 빠집니다. 감각을 계속해서 전환시키는 것으로 모순을 발생시키고, 이 때문에 추상도를 높이게끔 유도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점점 피시술자는 자신의 감각에서 느껴지는 고유한 체험에서 언어로 임장감을 옮겨가게 됩니다. 완전히 넘어가게 되면 최면술사가 전하는 가상의 정보에 리얼리티를 느끼게 됩니다. 양파를 사과라고 하고 주면 사과로 느껴지고 지금 벤츠 운전석에 앉아 있다고 하면 그렇게 느껴지게 됩니다.

이는 소설과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소설들이 도입부에서부터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감정이나 감각 정보를 전달하려 하거나, 캐릭터를 등장시켜 그가 느낄 법한 감각이나 감정을 조금씩, 조금씩 전달하려 하는 이유는 이 과정을 통해 책을 들고 앉아 있는 현실의 세계에서 소설 속의 세계로 점점 이끌려가다 완전히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명상을 훈련하는 것은 흡인력 있는 문장을 쓰는 데에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어디에서나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모든 감각기관으로 느껴지는 일과 감정을 언어로 라벨을 붙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치 사물을 대하듯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소리가 들리네, 숨이 들어오네, 어깨가 무겁네, 발이 바닥에 닿았구나, 하고 세밀하게 자신의 감각과 감정에 라벨을 붙이는 것입니다.

이 메소드를 통해 당신은 이전 글에서 설명한 문장술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앞으로 설명할 여러 가지 메소드의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관상 명상

관상 명상은 주로 밀교에서 하는 명상법인데, 압도적인 임장감을 일으키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 방법을 이용해 메소드 연기자는 강력한 프라나(Prana, 氣)를 쌓을 수 있다고 합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내공을 쌓는 것입니다. 강력한 프라나를 뿜을 수 있는 배우는 단지 눈길을 주며 프라나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관객을 매료시킬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헛소리 같다고 여겨지시면 메소드 연기자의 목록을 들어보시겠습니까? 알 파치노, 로버트 드 니로, 크리스토퍼 월큰, 하비 카이틀, 제임스 딘, 말론 브랜도, 마릴린 먼로, 안젤리나 졸리, 더스틴 호프먼, 앤서니 홉킨스, 잭 니컬슨, 최민식, 송강호를 비롯한 한국의 연극인 출신 모든 연기자들 등등등등등……. 이래도 농담으로 보이시나요?

프라나는 그 자체로 존재감입니다. 그리고 작품의 에너지입니다. 이를 훈련하면 엄청난 흡인력을 가진 문장을 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머릿속으로 익숙한 건물을 하나 떠올리십시오. 실제로 보는 것처럼 모든 부분을 재현합니다. 심지어는 벽 내부의 모습이나 땅속에서 올려다 본 모습 등 최대한 3차원으로 떠올리고 체험합니다. 그런 다음 이리저리 돌리고 확대축소하고 색을 칠하고 음악으로 표현해보고 직접 거인이 되어 만져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상 만으로도 프라나가 강해집니다. 먼저 위빠사나와 역복식호흡으로 준비상태를 거친 뒤에 하시면 좋습니다.

크면 클수록 좋습니다. 되도록 스케일이 큰 것을 상상하십시오. 크툴후 신화보다 큰 스케일로요. 처음부터는 어려울 테니 일단은 건물 수준으로 시작했다가 점차 거대한 것을 상상하고 이를 세부에 달하는 모든 부분을 임장감 있고 세밀하게 재현해 보십시오. 여담입니다만 세뇌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훈련에서도, 밀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소환술로도 이 방식을 훈련합니다. 둘은 동일한 방식인데 신이나 영웅 등 거대하고 위대한 존재를 완전히 재현하여 이 이미지와 자신이 합일한다고 관상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주 전체와 합일하는 것이 도교에서 말하는 대주천(大周天)입니다.

이 과정 중에서 만일 이완이 깊지 못하다면, 정수리에 의식을 집중하고, 의식적으로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뜨고, 눈알을 좌우로 매우 천천히 움직여보십시오. 정수리에 의식을 집중하면 몸이 상승하는 느낌이 들면서 순간적으로 최면상태에 빠지고, 눈을 움직이면 최면 상태가 매우 깊어집니다.

이 과정은 소설 세계의 임장감을 높이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이를 통해 현실감 있는 배경과 인물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활자와 연극의 차이

임장감을 높이는 메소드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임장감을 높이는 메소드를 익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소설의 문장을 쓸 수 있을까요? 여기서 활자의 한계가 발목을 잡습니다. 다른 예술이라면 이러한 과정만으로도 풍부한 호소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활자는 아닙니다. 문제는 활자 자체로 정황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활자가 가지고 있는 추상도 때문에 그리 손쉽게 임장감을 느끼게 하지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신이 활자, 혹은 언어에 임장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당신이 좋은 소설을 쓸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따라서 가장 먼저 당신은 읽어야 합니다. 

아, 또 다독 다작 다상량인가, 하는 분들! 맞습니다. 하지만 조금 달라요.

일단 다상량. 다상량은 위에서 말한 위빠사나 명상과 관상 명상입니다. 많이 하세요. 그리고 다작도 포함됩니다. 자신이 겪는 감정이나 감각을 언어로 자세하고 세밀하게 묘사해보라고 했죠? 이 과정이 곧 다작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다독이지요? 그럼 다독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독의 목적은 곧 활자를 통해 임장감을 얻는 훈련입니다. 따라서 내용에 관계없이 많이 읽으세요. 활자로 된 것은 모두 다!

이 훈련이 기초훈련이 됩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활자가 가지고 있는 힘을 설명하겠습니다. 왜 활자가 추상적인데 굳이 이용해야 하는가를 말입니다.



키워드 4: 활자


인간적인 요인(Human factors)과 
자아를 때리는 글쓰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애초에 절대적으로 잘 쓴 문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독자와 작자 사이에 적절한 추상도를 찾아내어 둘의 경험이 포섭되게 하느냐 입니다. 그럼 도대체 뭐가 독자와 작자의 경험을 포섭하는 추상도의 개념일까요

오노레 드 발자크를 아시나요? 발자크는 문장이 악문으로 유명하면서도(세상에, 한번 보시면 압니다. 그 문장이 수십 번 고친 문장이라니!) 거인 같은 문체로 전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얼마 전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을 읽었습니다. 그 많디 많은 묘사와 디테일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에다 이해가 잘 안가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분명 다 읽고 났을 때는 감정이 엄청나게 움직이며 어찌 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말 그대로 감동(感動)이었습니다. 이는 <골짜기의 백합>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고리오 영감>을 다 읽었을 때는 전율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었고, <나귀 가죽>도 <사라진느>도 <미지의 걸작>도 마찬가지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까 제가 말한 것과 꽤나 모순되는 부분이 있다면 발자크는 엄청나게 많은 고유명사를 이용해 그 당시 사람에게 임장감을 주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사실주의의 창시자라 불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상황이나 과도할 정도로 사용하는 수식어와 묘사, 은유 등 소설의 모든 레벨에서 읽는 이가 인간으로써 공통적으로 경험했을 법한 상황이나 감정을 환기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이 그를 소설의 시조이자 스토리텔러로 만들어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그레이엄 그린이 있습니다. 그레이엄 그린은 스토리텔러로 유명하고, 문장도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 작가입니다. (꼭 읽어보시길!) 노벨상 수상 후보이기까지 한 문학성을 인정받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영화화도 많이 된 엔터테인먼트 작가이기도 합니다. 문장도 매우 탄탄하고 아름답습니다.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문장은 없습니다만, 분명 미감을 주는 문장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레이엄 그린과 발자크를 포섭하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문장은 아닐 겁니다. 문장이 시적이고 아름다우나 사라진 많은 작가지망생들과 그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문장이 아름다운 것만으로는 감동을 줄 수 없는 것일까요? 중요한 것은 스토리일까요? 혹은 직접적으로 한 경험일까요? 

예를 들어 그레이엄 그린은 직접 스파이 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쓴 스파이 소설이 각별히 재미있는 것일까요? 물론 이는 무시 못합니다. 구체적인 경험을 넣으면 임장감이 올라가니까요. 그러나 그의 스파이 소설은 경험에서 우러난 디테일뿐 아니라, 스토리텔링이 뛰어나 엔터테인먼트로써도 상급의 재미를 줍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인간 드라마로써도 커다란 감동을 줍니다. 

그렇다면 역시 스토리일까요? 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발자크와 그레이엄 그린은 스토리텔러로써 발군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왜냐면 역시나 스토리텔링이 뛰어나 사람들이 즐거워하지만 감동을 주지 못한 채 끝나는 작품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소설에 공통적으로 포섭되는 감동을 주는 ‘인간적인 요인(Human Factor)’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는 사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겪은 경험과 관찰이 배어나오는 것이니 기술의 영역을 넘은 것입니다. 즉 작가의 인간성과 경험이 추상화된 것이지요. 저는 이미 이를 위한 메소드를 위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대로 끝나면 안 되고, 상대방의 임장감을 높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메소드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미리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입니다만, 활자가 가진 한계가 있는데도 왜 우리는 활자를 이용해서 예술을 하려고 할까요? 요새같이 영화가 발달하고 텔레비전이 있는데 소설, 책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소설의 임장감이 영화나 텔레비전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릅니다. 임장감을 높이기 위해 영상매체는 해상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추상도를 낮추는 것입니다. 추상도를 낮추면 필연적으로 예술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추상적인 메시지가 전달 불가능해집니다. 그랬다가는 모순이 일어나니까요.

반면 활자의 경우 추상성이 높기 때문에 그만큼 임장감을 주는 데 성공하면 독자에게 벌어지는 영향이 엄청납니다. 달리 말하자면 활자를 통해 자아를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합니다. 활자는 인간을 바꿉니다. 그 비밀은 활자가 감정을 움직이는 성질, 기억을 환기시키는 성질에 있습니다.


애퍼메이션(Affirmation)이 효과적인 이유
-자아는 부분함수이자 평가함수

위에서 말한 성질을 이용한 자기계발 메소드가 애퍼메이션입니다. 자기긍정이라고 번역하고는 하는데,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언어화하여 이를 반복해서 말해 이상형에 대한 임장감을 높여 자아를 변화시키는 메소드입니다. 이를 가능케 하는 이유는 활자의 특성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언어의 특성입니다만, 언어는 특정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성질이 있다고 위에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방식으로 어떻게 자아가 변한다는 것일까요? 이를 위해서 간단하게 자아가 무엇인지 정의하겠습니다. 

자아는 부분함수입니다. 기억나시죠? 전체에서 일부를 떼어내는 함수요. 자아는 당신이라는 존재와 관계된 모든 정보를 걸러내는 부분함수입니다. 그런데 정보를 걸러내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면 정보를 걸러내는 과정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우주 전체를 다 확인해야 합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메커니즘이 바로 평가함수(Evaluation Function)입니다.

평가함수란 정보 간에 우열을 정하는 함수입니다. 내게 중요한가 아닌가를 평가하는 함수입니다. 나와 관련이 있는 것뿐 아니라, 내게 중요한 것만 골라내는 것이 바로 자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가함수의 평가기준은 무엇일까요? 바로 감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감정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의 감정이 아닙니다. 감정은 생존을 위해 몸이 내리는 긴급명령과 같습니다. 무서운 사람을 보면 공포에 질리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 기분이 좋은 그런 종류의 감정입니다. 이는 앞으로 그 행동을 더 하거나 덜 하게 만들어 생존에 도움이 되게 합니다. 이러한 종류의 감정이 사실 우리의 자아를 만듭니다.

조금 전문적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우리의 뇌가 어떻게 자아를 만드는지 설명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감각기관으로 정보가 들어옵니다. 이 정보는 뇌간의 일부인 그물활성계(Reticular Activating System, RAS)를 자극합니다. 이 부분은 정보가 필요한지 아닌지 걸러내는 필터 작용을 합니다. 바로 부분함수이죠. 그리고 우리가 처리하는 정보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이 부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는 병이 알츠하이머입니다. 그물활성계가 활동을 시작하면 이 정보는 편도체와 해마 등으로 넘어갑니다. 해마는 장기기억에서 이 정보를 해석하는 데 필요한 틀을 꺼내옵니다. 이 틀에 얽힌 감정을 편도체가 만들어내고 이를 증폭하거나 축소시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일반화가 일어납니다.) 이를 통해 감정이 되살아나고, 기록됩니다. 이를 통해 필터링된 정보가 전두엽을 통해 평가되고 정리되어, 장기기억 할 필요가 있다 판단하면 해마로 다시 옮깁니다. 해마에서 측두엽으로 들어갑니다.

그물활성계가 장기기억을 바탕으로 형성된 틀을 기준으로 정보를 거를 때는 예측에 실패한 정보를 골라냅니다. 인간의 뇌는 최대한 일을 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쓰도록 진화해왔기 때문에 이미 저장해둔 기억을 재활용해 현실 세계를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 이미 알고 있지 않은 정보로는 예측하지 못한 정보가 있다면 이를 처리하여 기억으로 옮깁니다. 그렇지 않으면 원시시대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해 죽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뇌는 실패를 인덱스로 삼아 기억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물 활성계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일치하는 정보는 역시나 인식하지 않습니다. 이미 있는 정보를 다시 인식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어긋나서(=실패) 정보를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을 때만 인식합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이야기한 이화효과는 과학적으로 타당합니다. 익숙하면서도 조금 달라 생소한 것만을 인간은 인식합니다. 이런 면에서 클리셰(Cliche)는 이화효과가 없이 익숙한 틀이 되어버려서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처리’되어 버리고 맙니다. 분명 임장감은 낳지만 추상도를 높여 얻을 수 있는 이점은 얻지 못합니다. 마셜 맥루언의 말을 빌리자면, 클리셰는 영상처럼 쿨해서 속도가 빠르고 임장감은 얻어도 영향은 미치지 못합니다.

특히나 이화효과를 얻는 부분이 감정의 기억입니다. 이를 정동(情動) 기억이라 하는 데, 일화기억이라 불리는 에피소드식 기억과 함께 스토리로써 저장됩니다. 인간이 스토리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장기기억을 스토리의 형태로 기억합니다. 다만 내가 관심 있고 좋아하는 것, 혹은 내가 매우 싫어하는 것, 나와 관계 있는 것이라는 필터가 있습니다. 평가하고 걸러내는 필터가 바로 자아입니다. 그러나 자아는 단순히 필터가 아닙니다. 사람이 자신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감정이라는 필터를 이용해 평가하고 분리하는 과정을 추상도가 높은 상태로 정의한 개념입니다. 


영상과 소설적 문장

인간이 활자를 접하면, 감각기관을 통할 수 없기에 우선 전두엽에서 측두엽에게 의미기억과 일화기억 중 이 단어에 관련된 정보를 꺼내오게 시킵니다. 그다음은 위에서 적어놓은 작업을 거칩니다. 즉 실제 삶에서 경험하는 경험과 같은 경험을 다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퍼메이션은 반복하면 그 자체로 임장감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냥 반복하는 것으로는 자아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정동기억을 건드려야만 합니다. 

어퍼메이션에는 감정적인 수식어가 항상 붙어 있습니다. (발자크가 그렇게 감정에 매달리고, 도스또옙스키가 그렇게 감정에 매달린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감정과 생생한 이미지를 이용해 만든 어퍼메이션을 반복하면, 일화기억이나 정동기억을 꺼내 다시 체험하게 만듭니다. 이 과정을 통해 오감을 통해서는 불가능한 감정(情)을 움직이는(動) 것이 가능하고, 이를 통해 자아를 변화시킬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활자로는 자아를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책을 읽고 인생이 변했다는 사람이 많아도 영화나 음악으로 인생이 변했다는 말을 듣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책이 정보량도 많고 추상적이라 자아의 구조를 변화시킬 만큼의 시간과 정동기억 변형이 가능한 것입니다.

왜 오감으로는 이러한 행동이 안 될까요. 이는 미리 이야기했듯 오감이 너무 구체적인 정보라 추상도가 낮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감각기억을 동시에 활성화시키지 못한다는 단점 때문입니다. 임장감은 압도적으로 주지만 그 자체로 모순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추상도를 높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반대로 영화 등을 이용해 모순이나 혼돈을 보여주어 보는 사람이 “뭔 말을 하는지는 몰라도 뭔가 있어 보인다”라는 화두를 접한 선승 같은 상태를 만들고, 이를 넘어서 특정한 추상적 의미를 만들어내면 영화는 그 순간 문학성을 갖게 됩니다. 혹은 컬트성을 갖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이시이 테루오, 알레한도로 조도르스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데이비드 린치 등등의 감독들이 모순이나 혼란을 내포해 보는 이가 자신의 추상도를 높이지 않으면 안 되는 영상을 이용합니다. 

이러한 영상은 대중적이지 않습니다. 위에서 최면의 원리에서 설명했듯이, 점진적으로 추상도가 높은 세계로 끌어와야 합니다. 안 그러면 추상도의 공유가 불가능합니다. 괜히 선불교가 죽을 각오로 참선해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자아는 생명 유지를 위해 존재하고 이를 목적으로 합니다. 자아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로 혼란스럽고 모순이 가득하면 파괴될 위험이 있습니다.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생존에 위협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받아줄 수 있을 관객이 아니면 무리입니다.

활자에는 이러한 혼란을 덜 주고도 추상도를 획득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임장감이 낮다는 활자가 가지고 있는 한계가 오히려 정동기억을 건드린다는 점에서는 가능성이 되는 것입니다. 활자는 조금 더 완만하게 정동기억을 건드려 자아를 건드릴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한 문장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그 대답이 소설적 문장입니다.


이화효과와 <드래곤 퀘스트>

허나 여기서 인간이 활자를 인식하는 데 첫 번째 벽이 있습니다. 인간이 활자를 보는 대로 다 읽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위에서도 말했듯 이화효과, 다시 말해 익숙한 것과 생소한 것이 세트로 묶여있지 않으면 반응하지도 인식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힌트를 조금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화효과를 내면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가? 이미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만, 추상도가 높은(=익숙한) 개념과 이에 포섭되는 추상도가 낮은(=고유한) 하위개념을 한 세트로 묶는 것입니다.

저는 이 법칙을 ‘드래곤 퀘스트의 법칙’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캐릭터가 곧 만화다, 라는 주장으로 많은 크리에이터를 키워온 코이케 카즈오의 제자 호리에 유우지의 일화에서 따온 것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코이케 카즈오의 제자는 엄청난 사람들뿐입니다. 한번 조사해보세요.

호리에 유우지는 게임 <드래곤 퀘스트>를 만든 사람입니다. 그는 이름을 지을 때, 스승 코이케 카즈오의 가르침대로 ‘익숙한 것과 생소한 것을 합치는’ 전략으로 흔하게 알려져 있던 ‘드래곤’과 당시 생소하던 ‘퀘스트’를 합쳐, 추상도의 포섭과 고유한 개성(=캐릭터)를 동시에 만족시켰던 것입니다. 이 법칙은 소설의 플롯 구성에서부터 인물의 캐릭터, 그리고 소설적 문장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됩니다. (어차피 이화효과와 동의어지만요.)


소설적 문장을 쓰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

소설적 문장이 전달해야 할 것은 감각, 감정, 서스펜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각과 감정은 인물을 필요로 한다는 점입니다. 서스펜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정보를 아직 파악하지 못하는 인물을 필요로 합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고전 작품이나 대중 작품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재미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말은 인도유럽어권의 언어와 달리 주어가 애매모호하거나 시제가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말은 인칭이 애매모호한 경우도 많은데, 이 부분은 타임라인의 차이로 저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연속성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생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입니다. 그러나 이는 조금 주제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소설적 문장은 독자와 작자가 서로 포섭되는 추상도에서 임장감을 높이는 방법입니다. 고유명사를 다용하거나 과도할 정도로 감각정보를 전달하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완만하게 서서히 독자의 임장감을 흔들어 현실 세계에서 소설 세계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독자와의 적정한 추상도를 찾는 것입니다. 하나 우리는 독자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독자의 경험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독자를 미리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스티븐 킹이 가상의 독자를 설정하라 조언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자와 작자를 포섭하는 추상도를 설정했다면 이 추상도를 유지하면서 정보량을 높입니다. 


소설적 문장의 실례

이대로는 이해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니 예시문을 들겠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작업하고 있는 시나리오의 일부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설해나가겠습니다.

“노진규의 방은 평범한 학생의 방이다. 벽에는 록 스타의 포스터가 붙어있고, 책상 위는 언제나 책이며 필기구 등으로 어지럽다. 바닥에 늙은 암컷 고양이, 라에가 방석 위에 앉아, 느긋하게 게맛살을 씹고 있다. 라에는 고등어라 불리는 곤색과 흰색이 섞인 얼룩무늬에 통통하게 살집이 있는 코리안 밥테일로, 지역에서는 알아주는 여장부였으나 요새는 한가하게 여유를 즐기고 있다.”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이 있다고 합시다. (물론 이 문장은 시나리오용이기 때문에 소설에는 적당하지 않습니다만.) 가장 첫 문장은 가장 먼저 등장인물의 이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서스펜스입니다. 독자는 그가 누구인지 몰라 그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어 합니다. 이를 위해 문장을 계속 읽도록 유도합니다. 그러나 좋은 문장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이화효과를 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평범한 학생의 방입니다. 머릿속에서 단어로 인식되지 못하고 방의 이미지로 휙 하고 지나가버립니다. 만일 이런 문장이 지속된다면 독자는 더 이상 읽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방의 디테일이 이어집니다만 록 스타는 누구인지, 책과 필기구는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를 고유명사로 들이밀었다가는 이를 아는 사람은 엄청난 임장감을 느끼고, 이 등장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이 가능하겠지만 모르는 사람은 그저 모르는 정보로써 혼란스러워 도망치고 싶어 할 뿐입니다. 따라서 초반에 어떤 독자를 상정하는가에 따라 이 부분의 정보 밀도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다음에야 고양이 라에가 나옵니다. 늙은 암컷 고양이가 방석 위에 앉아 맛살을 씹고 있다는 묘사는 이화효과를 내면서도 특정한 이미지나 감각을 환기시킵니다. 이때 놓치지 않고 털 색깔이나 외형을 묘사한 뒤 고유명사를 내,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추상적인 개인 정보도 제공하여 개성을 고착시킵니다. 하나 전체 인상을 보았을 때, 이 장면은 전체적으로 이미지가 흐릿합니다. 정동기억을 움직일 만큼의 분량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억의 환기가 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이 예시문을 소설적 문장으로 옮겨보겠습니다. 고양이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20대 후반의 남자(접니다.)를 대상 독자로 써 보겠습니다.

“라에가 방석 위에 앉아, 평소와는 다른 불안한 기분이 들어 맛도 모른 채 기계적으로 맛살을 씹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별 관심이 없던 벽에 붙은 외국 록 스타의 포스터나 창문 밖의 회색 담벼락이며 책상 위에 어지럽게 내팽겨진 교과서와 필기구까지 평소와 같은데도 일일이 신경을 거슬렀다. 고등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고양이 종류인 라에가 곤색과 흰색이 섞인 얼룩무늬 털을 신경질적으로 정리하는 모습은 평소에 큰 덩치로 지역에서 존경받는 여장부로는 보이지 않았다.”

자, 무엇이 바뀌었을까요? 우선, 모든 것이 라에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감정과 감각을 전달하기 위해 특정한 캐릭터의 시점에서 진행하는 편이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일단은 내가 중심으로 삼겠다는 라에라는 캐릭터를 전달하기 위해 이름과 방석 위에 앉아 있다는 상태를 제시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추상적이고 평범한 묘사라 누구나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다음에는 조금 추상도를 낮추어 구체적인 묘사를 합니다. 전편의 기사에서도 설명했듯이 소설적 문장은 은유와 묘사가 중요합니다. 이미 추상도가 있는 이미지로 포섭해 독자와 공간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디테일을 채워 넣어 임장감을 살리는 것입니다. 미리 포섭된 상태기 때문에 프라나를 이용한 존재감과 같은 맥락으로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게 됩니다. 아까 위에서 말한 ‘드래곤 퀘스트의 법칙’을 생각해보세요!

“평소와는 다른 불안한 기분”은 감정입니다. 

“맛도 모른 채 기계적으로 맛살을 씹는” 것은 감각, 미각과 운동감입니다. 특히 묘사에서 중요한 것은 운동감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운동감을 전달하지 않으면 묘사하는 이미지가 고정되어버립니다. 고정된 이미지는 추상도가 낮기 때문에 읽는 이의 모순을 야기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 점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전까지는 별 관심이 없던”이라는 말로 그럼 지금은 무슨 일이기에? 하는 서스펜스를 유도합니다. 

“외국 록 스타의 포스터나 창문 밖의 회색 담벼락이며 책상 위에 어지럽게 내팽겨진 교과서와 필기구까지”라는 열거는 방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환기시킵니다. 특히 맨 마지막에 “어지럽게 내팽겨진 교과서와 필기구”를 통해 라에가 있는 방의 주인이 학생이며 성격이 그다지 꼼꼼하지 않다는 점을 전달합니다. 

“일일이 신경을 거슬렀다.”는 감정입니다. 감정을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이유는 미리 이야기했듯 감정을 느끼는 것이 곧 소설적 문장의 목적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고등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고양이 종류인 라에가” 서스펜스입니다. 고등어라는 별명에서 갑자기 고양이라는 새로운 정보가 나옵니다. 여기서 독자는 더 자세한 정보를 얻으려 합니다. 그래서 이후에 연달아 나오는 추상도가 낮은 디테일을 받아들이려 하게 됩니다.

“곤색과 흰색이 섞인 얼룩무늬 털을” 시각입니다.

“신경질적으로 정리하는 모습은” 얼핏 보면 시각입니다만 신경질적으로 정리한다는 표현은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이며 동시에 운동감을 환기시킵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어떤 동작을 일일이 적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가지고 있는 경험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 편이 더 추상도가 있는 임장감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큰 덩치로 지역에서 존경받는 여장부로는 보이지 않았다.” 추상적인 정보지만 누구나 이런 사람에 대한 경험은 가지고 있지요. 그러나 이는 인간에 대한 묘사지요. 그런데 이를 고양이에게 하면서 이화효과를 노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보인다, 라는 표현은 감각묘사입니다.

좋은 예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떤 방식으로 해야 좋을지는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을 참고로 여러분도 소설적 문장을 구사해보시기 바랍니다.



결론을 대신해서


남은 문제
-보여주기와 말하기?

마지막으로 간략하게 남은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흔히 보여주기와 말하기라는 표현으로 소설의 문장을 쓰는 것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보통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 라고 지적하고는 하지요. 그런데 저는 이에 대해 해석을 좀 가하고 싶습니다.

제가 정의하는 ‘보여주기’는 말 그대로 감각묘사를 이용하는 서술, ‘말하기’는 추상도가 있는 개념을 이용하는 서술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소설, 특히 우리나라 말로 된 소설은 말하기에 더 적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시점(주어)를 명확하게 하지 않는다는 점, 시제를 명확하게 하지 않는다는 점, 시간선이 내재적이라는 점 등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 글의 범주를 벗어나기 때문에 다루지 않겠습니다.

다만 위의 설명을 적용하자면, 말하기를 통해 먼저 포섭한 뒤 보여주기로 임장감을 높이는 편이 소설적 문장으로 더 잘 기능한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 라는 말의 의미는 우리나라 말의 어법이나 특성상 말하기에만 머무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임장감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추상적이기만 해 임장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위에서 계속 추상도를 강조하기는 했지만, 위빠사나 명상에서도 설명했듯 결국 정동기억을 움직이는 것은 디테일입니다. 다만 포섭되지 않은 디테일은 독자와 모순되기 때문에 이를 강조했을 뿐입니다. 포섭되지 않은 보여주기는 고유명사를 그냥 보여주는 것이 되어, 시대나 배경을 공유하고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 시간이 지나면 임장감이 떨어진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미니멀리즘이나 하드보일드, 빅토르 위고나 오노레 드 발자크의 소설 등의 한계이고, 더 나아가 스티븐 킹이 우리나라에서 잘 안 먹히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꿔 말하자면 공유만 한다면 영화와 버금가는 임장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압도적인 임장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임장감이고, 임장감을 낳는 구체적인 경험입니다. 


대화문과 자유간접화법

대화문은 소설적 문장보다 더 추상도가 높은 개념입니다. 대화문은 행위이고 보여주기입니다. 특히 대화문은 언어와 청각의 유사성 때문에 매우 임장감이 높습니다. 말의 어투나 단어의 선택으로 인물의 캐릭터(=성격)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임장감도 높고 추상도도 높습니다.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소설쓰기의 모든 것 part 4 대화>와 <유혹하는 글쓰기>를 참고하시면 좋습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역시나 보여주기이기 때문에 추상도를 잘 고려해야 합니다.

같은 맥락으로 자유간접화법을 이용한다면 내면의 목소리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매우 효과적으로 감정이입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영미권 소설에서는 필수적인 테크닉입니다. 하나 이에 대해서는 영미권 소설이 ‘리얼리즘 소설의 문체’로써 독자들의 임장감을 훈련시켜온 과거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방향에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다음 기회에 이를 다루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추상도와 높은 단계를 설정해 독자를 포섭하고, 정황을 공유한 상태에서 임장감 높은 하위정보를 전달하여 독자의 임장감을 높이고, 이렇게 만든 가상의 현실에서 감정을 움직여 독자의 자아에 영향을 주는 것, 이 과정이 곧 소설이고 이를 위해 의도한 문장이 소설적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한 평소의 훈련법과 구체적인 실례를 설명했지만 아직 여러 가지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는 무엇보다, 평소의 훈련법으로 말씀드린 여러 명상법을 실천하시길 권유합니다. 결국 소설의 힘은 문장 그 자체보다는 문장을 통해 전달하려는 자신의 경험을 얼마나 추상화시켜 많은 이들을 포섭하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글은 플롯에 대해 이야기할 예정입니다. 기대 바랍니다!
댓글 6
  • No Profile
    빈테르만 13.08.02 22:27 댓글

    잘 읽었습니다. 디테일한 경험을 추상화 시켜서 소설적 문장으로 임장감을 높인다는 내용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네요.

    메소드 연기법은 글쓰기 말고도 멘탈 관리나 삶의 여러 부분에 대입 시켜도 좋을 듯 합니다. 많은 걸 배워갑니다.

  • 빈테르만님께
    No Profile
    도스까라아스 13.08.03 17:01 댓글

    감사합니다! 결국 절대적으로 명료한 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상황, 정황, 독자, 작자 등 여러가지 요소에 최대공약수가 명료한 문장을 만드는 것이겠지요. 그 명료함은 유통기한이 있을 겁니다. (결국 이게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설일 것입니다. 절대적인 것은 없고 특정 조건 하에만 한정적으로 절대성이 존재한다.)


    멘탈관리에는 위빠사나 명상을 추천합니다.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 No Profile
    이서 13.08.05 20:31 댓글 수정 삭제

    정말 잘 읽었습니다. 블로그에 가져가도 될까요? 출처는 물론 남기겠습니다. 너무 좋은 글이어서요.

  • 이서님께
    No Profile
    도스까라아스 13.08.06 00:59 댓글

    으음... 이 부분은 제가 뭐라 이야기하기가 조금 그렇네요... 이 글의 링크만 일단 가져가시는 건 어떠신지...?

  • 이서님께
    No Profile
    글쓴이 양원영 13.08.06 08:46 댓글

    가급적이면 글의 링크만 가져가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 No Profile
    이서 13.08.11 21:47 댓글 수정 삭제

    이제서야 덧글을 읽네요. 글 내리고 링크를 걸어놨습니다. 늦게 내려서 죄송해요. ;;

분류 제목 날짜
그림이 있는 벽 시월 사일, 육교 위로 2013.11.30
기획 3. 글뼈대 다섯 단계만 밟으면 단편소설이 완성된다.2 2013.11.30
그림이 있는 벽 무섭지?!2 2013.10.31
대담 해망재 인터뷰 2013.10.31
기획 러시아 민담 모음1 2013.10.27
기획 [특집4] Redfish Chronicles 2013.09.30
대담 미로냥 인터뷰 2013.09.30
대담 [특집6] 김주영 인터뷰 2013.09.29
그림이 있는 벽 [특집7] 천사가 거기에 있다1 2013.09.28
기획 [특집5] 우주의 방정식 : 해(解) 2013.09.28
대담 계림 인터뷰 2013.08.31
그림이 있는 벽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연인들1 2013.08.31
기획 아름다운 헬레나 2013.08.31
그림이 있는 벽 이러시면 곤란합니다2 2013.07.31
대담 앤윈 인터뷰 2013.07.31
기획 2. 소설을 쓸 때는 어떤 문장을 써야 하는가?6 2013.07.31
대담 정도경 인터뷰 2013.06.30
거울 거울 10주년 축하 인사 모음 2013.06.30
그림이 있는 벽 열 번 째의 봄에서, 활짝!4 2013.05.31
기획 당신도 '일단은' 소설을 쓸 수 있다21 2013.05.31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 25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