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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kinan@naver.com



0. 소개

갈원경 님은 거울에서도 오래 활동해 오신 작가로, 현재 부산에서 수학 교사로 재직하고 계십니다. 장편소설 [Total Eclipse], [바람], [Alpha] 등을 연재하셨고, 공동소설창작 프로젝트 ILN(일른, lunabell.net/iln)에 다른 장편소설 [종이로 만든 성]을 연재 중입니다. 거울에서는 [2004 환상문학웹진 거울 단편선]에 {푸른 돌 하나가}를, [2007 환상문학 단편선]에 {빗속의 나비}를 수록하셨습니다. 또한 거울 73호부터 2기 독자우수단편 선정단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홉 개의 붓]으로 이번 2012년에 제4회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 대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오랫동안 글쓰기를 해오신 결실이 드디어 책으로 나왔는데요. 한국적인 환상성이 물씬 느껴지는 이야기입니다. 판타지라고는 하지만, 특출난 한 명의 영웅이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세상을 만든 아홉 감이 만든 아홉 ‘붓’, 그 주인들이 고루 뜻을 모아야 하는 내용이죠. 인간은 삼인(천인, 비인, 상인)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땅과 나무의 감이 만든 비인은 상인보다 수명도 길고 손재주도 좋지만 누울 자리 하나 있으면 족한 사람들입니다. 반면 상대적으로 수명이 짧지만 자손이 많고 농사를 지으며 노력하는 상인들은 그게 불만입니다. 상인들은 뿔 달린 비인들을 사람도 아니라 부르며 마을에서 쫓아내곤 했죠. 그렇게 사람들이 서로 싸우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비인과 상인 사이의 아이인 ‘갈’은 아홉 붓을 찾아 떠납니다. 아홉 붓을 모두 모으게 되면 삼인이 조화롭게 살 수 있다는 말에요. 이번 인터뷰에서는 갈원경 님의 다른 작품들 중 [아홉 개의 붓]을 보다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본 인터뷰는 직접 대면 대신 메신저를 통해 진행되었습니다. 메신저를 통한 인터뷰도 색다른 경험이었는데요. 목소리나 표정 같은 생생한 느낌을 살리기 힘들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내용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 모두 인터뷰어의 탓입니다.



1. [아홉 개의 붓]에 대해

새로 태어난 [아홉 개의 붓]

라키난 처음에는 최근 출간하신 [아홉 개의 붓]에 대한 내용부터 하려고 합니다. 이번에 제4회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을 수상한 [아홉 개의 붓]은 이전 문학상에도 출품했던 작품이라고 들었는데요. 지금 작품은 이전에 비해 어떻게 개작하신 건가요?



▲ 제4회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 수상 후 출간된 [아홉 개의 붓].

갈원경 문학상 1회 때 응모한 건 거울에 게재했던 작품 그대로였어요. 거울에 게재했던 작품은 옴니버스 단편 형식이었고, 인칭은 주로 1인칭이었고요. 결말은 나지 않은 상태였어요. 거기에 따로 손대지 않고 그대로 파일만 쭉 합해서 보냈어요. 그리고 문학상 2, 3회 기간 동안에 개작을 하면서, 1인칭에서 3인칭 시점으로 바뀌었고, 옴니버스 형식이 옅어졌고, 사건들이 하나로 연결되었어요. 출판된 것에서는 게재된 것에 비해 에피소드가 세 개 정도 추가됐지요.

라키난 추가된 부분은 어떤 의미에서 들어간 건가요?

갈원경 서두 부분에 글의 전체적인 배경이면서 주인공이 여행을 떠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에피소드가 하나, 도중에 붓을 찾는 에피소드가 하나 더 추가됐고, 엔딩이 만들어졌죠. 그러면서 전체적으로 사건들을 유기적으로 묶었고요.

라키난 원래 통일된 이야기를 생각한 건 아니었던 건가요?

갈원경 처음엔 단편으로 출발한 이야기였고요. 스스로도 이 주인공들이 어떻게 붓을 모으고 어떤 미래를 맞게 될까를 고민하는 단계였어요. 붓의 의미는 처음부터 잡혀 있었지만 그걸 주인공이 어떻게 깨닫고 어떻게 찾아가게 하는지가 잡혀 있지 않았죠.
1회 때 심사평을 보고 나서, 또 3년이라는 시간이 있었고, 직장생활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고. 개인적으로는 아프기도 하고 결혼도 하고. 그러면서 장편이 됐어요.

라키난 1회 때 심사평은 어떤 내용이었나요?

갈원경 대략적으로, “계층의식이 부족하다”, “주제의식을 좀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 “완성도가 부족하다”, 그 세 가지 점을 들었어요. “한국적인 걸 탐구하려는 노력은 살 만 하다” 도요. 그래서 한국적인 걸 추구하는 노력은 괜찮다는 거니까 설정 자체는 그대로 두기로 하고. 주인공들이 차별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쓰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그리고 납득할만한 결말을 지어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네요.
소설의 완성도라는 건 옴니버스라는 형식에서 나온 걸 수도 있어서 전체적으로 좀 더 유기적으로 짜려면 옴니버스성을 덜어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고요. 결말은, 원래 결말 장면 자체는 짜여 있었던 건데 거기까지 어떻게 가게 하는가가 문제였죠.

라키난 글이 그렇게 의미를 찾아가는 게 꽤나 인상 깊은 작업일 것 같아요. 추가된 에피소드는 그렇게 통일된 이야기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추가됐으리라 보이는데, 붓 찾는 에피소드는 어떤 장면이 추가된 장면이죠?
        
갈원경 거울에 연재된 부분에 붓이란 게 밝혀지지 않은 채로 등장한 붓들이 있었거든요. 그게 붓인 게 밝혀졌어요. 그리고 거울 최근화에 실었던 에피소드 <스물세 번째 부족>과 마지막 붓(거울에 공개 안 된) 에피소드가 추가됐어요. 이번 4회 때 완전히 새로 나온 붓은 두 개죠.


한국적인 것?

라키난 '한국적인 것'에 대해서는 원래 관심이 많으셨나요?

갈원경 예전에 하이텔 판타지 동호회에서 ‘가상세계’라고, 마스터가 세계를 설정하면 그 세계에서 사람들이 캐릭터를 만들어서 소설을 써 나가는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그 때 친한 동생들이랑 만든 게 고대 고구려, 아랍, 유럽에 해당하는 나라들이 있는 세계였죠. 전 판타지를 읽고 판타지를 쓴 세대가 아니라서요. ‘뭔가 글을 썼는데, 이게 판타지가 아닐까?’ 라고 생각한 쪽이라서 판타지라고 했을 때 떠올리는 이미지가 좀 넓었던 것 같아요. 제가 제일 처음 감동하면서 읽은 게 [어스시의 마법사]였거든요. 그 뒤에 톨킨을 읽었고요. 그러니까 엘프나 마법, 뭐 이런 것들이 꼭 판타지라기보단 어디까지나 판타지 안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러니까 우리 나라의 도깨비 이야기도 당연히 저한테는 판타지였죠.
‘꼭 한국적인 걸 써야지!’ 했던 건 아니지만, 저한테 익숙한 건 한국적인 거잖아요. 어릴 때부터 들었던 민담이나, 옛날 이야기나. 그래서 그런 느낌으로 쓰게 됐어요.
그리고 영웅이 적을 물리치고 점점 위대해지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저에게 익숙하지도 않았고요. 무리해서 쓰더라도 저 스스로도 어색했고. 당연히 독자들에게도 어색했을 거고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적인 분위기로 갔던 것 같아요. 사실 다른 판타지는 전혀 한국적이지 않은 배경도 있어요.

라키난 [아홉 개의 붓]에 등장하는, 꽃 이름이나 소품들을 보면 '잘 알고 있는 사람' 분위기가 나요.

갈원경 그건 당연히... 공부하지요. (웃음)
제가 독자한테 받은 메일 중에 뜨끔했던 게, 원래 "그림자 감찰사" 라는 부분이 있었어요. 작중 인물 중 이부명이라는 나름 악역의 직책이었는데요. 그런데 그 분이 말씀하시길, 한이나 아사 이런 건 다 우리 나라에 유래가 있는데 ‘감찰사’는 일본 직책이라고요. 우리 나라에 있었던 적이 없는 관직이라는 거에요. 저도 놀랐어요. 아 정말 조심해서 써야 하는구나 하고. 그래서 이후로는 ‘목련은 근대에 들어온 꽃이니까 이 시기엔 없지’ 라든가, ‘이 시절이면 철검이 귀하지’, ‘이 시절이면 초는 없지’, 이런 식으로 확인하고 쓰죠.

라키난 철검이 귀하다는 묘사가 그래서 들어가는군요.

갈원경 네. 쓰고 나서 소품이나 고유명사 등은 대부분 확인을 해요.

라키난 마을 이름들이 다 유래가 연상되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어떤 특징이나 지형에서 따온 이름인지 바로 알 수 있는 이름이라.

갈원경 그것도 연재할 때는 한자어 지명과 고유명사를 섞어 썼다가, 통일성을 살리려고 고유어 표기로 다 바꾸었죠.

라키난 아홉 개의 붓이 이루어주는 게 행복이 아니라 ‘조화’라는 것도 참 한국적이다, 혹은 잘 어울린다 싶었는데요. 이건 처음부터 생각하셨던 건가요?

갈원경 네. 첫 에피소드, 그러니까 피리 부는 소녀 아리를 만나는 <그림자의 숲>이 처음 쓴 단편인데요. 그건 첫 에피소드에서 장편으로 더 쓰겠다고 마음먹을 때부터 생각했던 거였어요. 아홉 개의 붓은 그냥 아홉 개가 아니라 3×3 이잖아요. 아홉 붓을 다 쓰려면 삼인(비인, 상인, 천인)이 다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니까. 그렇게 구상할 때부터 본질적으로는 조화를 전제로 할 수 밖에 없는 거라고 두고 시작했어요.


첫 출간작

라키난 출간작으로는 첫 작품인데, 의미가 깊을 것 같아요. 어떤가요?

갈원경 네. 판타지를 쓴다, 에서 20년째니까요. 환갑 되기 전까지 한 권 정도는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참이라, 생각만큼 늦지는 않았구나 해요. 등단한 작가들 등단한 나이도 확인하고 그랬어요. ‘아, 이제 신경숙님보다 늦었네. 그럼 이제 누구 남았지...’ 하는데 박완서님이 많이 늦으셨더라고요. 그래서 ‘박완서님보다는 안 늦으면 좋겠네… 뭐 그래도 늦으면 환갑 전에는?’ 자포자기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했어요.

라키난 초조하기도 하고, 일부러 느긋해지기도 하고, 그랬겠어요. 공모전도 많이 도전하셨던 것 같은데.

갈원경 네. 순문학 쪽도 여기저기 많이 냈어요. 20대 젊은이들의 이야기나 10대 아이들 이야기. 주로 제 제자들이 모델이 많이 됐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순문학 쪽은 본선에 올라간 것도 없네요.

라키난 쓸 땐 어땠어요? 잘 써진다, 뭐 그런 거요.

갈원경 순문학도 판타지도 다 매력적이에요.
저한테는 순문학이 좀 더 직설적이고, 판타지는 조금 돌려 말하는 혹은 은유를 하는 그런 느낌이네요. 주제의식 면에서, 현실을 얼마나 직설적으로 보여주느냐 하는 점에서요. 결국 현실 이야기라고 생각하니까요, 소설은.


2. 수학 선생님

라키난 교사로는 얼마나 계셨나요?

갈원경 15년을 바라보고 있어요.

라키난 어떤가요? 교사로 지낸다는 건?

갈원경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죠. 학생도, 학부모도, 교사도. 졸업한 제자들도요. 아직 경력이 그렇게 길진 않아서 나이 많은 아이들이라고 해도 20대 중후반 정도지만요.

라키난 지금 쓰는 이야기의 대상쯤이네요. 사람을 많이 보는 일이니까, 역시 글 쓸 때 도움이 되나요?

갈원경 그렇죠.

라키난 병행하려면 바쁘진 않나요?

갈원경 아무래도 인문계 고등학교에 있다 보니까 시간상으로는 많이 쫓기긴 해요. 실제로 고2 담임하던 재작년 같은 경우엔 [아홉 개의 붓]은 손도 못 댔거든요. 퇴근해서 집에 오면 11시라서. 일주일에 두 번 야자감독을 하고, 두 번 심야 특강이 있었고요. 한 번은 토요일 오후~저녁까지. 남은 두 번은 대학원엘 다닐 때였어요. 그러니까 평일엔 집에 오면 매일 11시였어요.

라키난 대학원은 어떤 전공으로요?

갈원경 수학교육학이에요. 8월에 석사가 됩니다. 이번 학기가 논문학기였어요.

라키난 뭐였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갈원경 복소계의 연속함수에 의한 샌드위치 타입 정리의 보존성에 관한 연구. (웃음)

라키난 안 물어본 거랑 다를 바 없는 느낌이네요...

갈원경 네, 논문은 수학으로 써서요.

라키난 그러게요. 교육학 쪽이 아니네요. 그럼 대학원을 다니게 된 건, 일하다 보니 필요성을 느껴서 보다는 공부하는 게 좋아서 다니신 건가요?

갈원경 네. 기본적으로 공부하는 걸 좋아해요. 20살 이후로 뭔가 공부하지 않은 적이 없네요. 공부하고 있지 않으면 허전한가 봐요. 게으르게 살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갈원경 님의 배움에 대한 관심. 수학교육학 전공으로 수학과 정교사 자격 취득. 그리고 그 와중에 독학으로 국문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교에 발령받아 수학 교사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법학을 전공하는 기간 중이었다. 이 역시 해당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학위를 취득했다. 또 꾸준히 공부해서 일본어 능력시험인 JLPT도 통과. 공부가 생활의 일환인 사람다운 경력이었다. 수학과 인문학이 어우러져 있는 게 재미있는 부분.

라키난 수학이랑 글 쓰는 건 언어가 완전히 다르잖아요. 둘 다 구사하면 느낌이 어떤가요?

갈원경 수학이 좀 더 추상적이에요. 하지만 누가 봐도 논리적으로 납득이 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것 같아요. 소설 속의 인물들이 뜬금없이 행동하면 독자가 “이게 뭐야” 하잖아요. 수학도 증명이나 답안이 비약적이면 “이게 뭐야” 하지요.


3. 글쓰기: 지금까지

글 쓰는 사람이 꾸준히 글을 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갈원경 님은 일본 유학 중 2008년에 제 6회 유학생 문학상에서 단편 {神社の夜}으로 입선하였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이전에도 이후로도 글은 계속 쓰고 있었다고 한다. 그 여정에 대해서 질문하기로 했다.

라키난 첫 경력이 일본에서 유학생으로 발표한 글이시던데. 그러고 보면 이쪽도 공부길이었군요. 다른 언어로 글을 쓴다는 건 어떤가요? 혹시 지금도 하시나요?

갈원경 일본어 공부는 지금도 하고 있고요. 일본어로 글을 쓰는 건 귀국하고 나서는 하지 않았어요.

라키난 그땐 어떤 계기로 썼던 건가요?

갈원경 그 글은 원래 우리말로 썼던 글이었어요. 배경이 일본이고, 화자가 일본에 유학간 한국 학생이고요.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여자애의 이야기였어요. 일본 유학 중 대학 게시판에 그 공모전 포스터가 붙었더라고요. 그래서 유학생만 할 수 있는 대회니까 그 글을 일본어로 번역하기로 했던 거죠. 배경도 일본이고 대사도 처음 쓸 때 일본어를 상상하면서 쓴 거니까 쉬울 줄 알았죠.

라키난 아. 안 쉬웠나요?

갈원경 읽는 거랑 쓰는 거랑은 다르더라고요. 일본어 소설도 많이 봤으니까 괜찮겠지 했는데 글을 마감에 빠듯하게 완성해서 겨우 부쳤어요.

라키난 그리고 당선됐고요. 기뻤겠어요. 첫 경력이고.

갈원경 최고당선은 아니었는걸요. 그렇지만 시상식에 갔더니 대회 관계자 분들이 글을 많이 좋아해 주셔서 기쁘긴 했어요.

라키난 그런 기억이 있어서 꾸준히 공모전에 응모하실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어떤가요? 너무 넘겨짚었나요?

갈원경 제가 원래 포기를 잘 못해요. (웃음)


글 쓰는 사람

라키난 글을 쓰게 된, 그리고 지금도 꾸준히 계속 쓰고 있는 이유는 뭔가요?

갈원경 음. 글은, 생각하면 항상 쓰고 있었어요.

라키난 글쓰기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인가요? 아니면 중독적?

갈원경 안 쓰고 있는 것만으로 스트레스가 되는걸요. ‘글 못 쓴지 한 달째다…’ 하고 마지막에 쓴 파일의 저장일자를 보고 괴로워한다거나.

라키난 사는 데 충실하지 못한 듯한 느낌?

갈원경 비슷할지도요. 나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라키난 나는 글 쓰는 사람이다, 같은 거요?

갈원경 네. 그래서 거울에 왜 새 글 안 올라오냐는 댓글을 봤을 때도 좀. 글은 쓰고 있는데 올릴 건 아니고, 고치고 있는 건 또 새 글은 아니고. 사람들이 이제 다들 내가 붓 이야기는 안 쓰는 줄 알겠구나 하고 지레 짐작하면서 찔리고 그랬어요. 공모전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어디 내느라 고치고 있네요” 라고 할 수도 없고.

라키난 지금은 출간도 됐으니 떨치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겠네요.

갈원경 거울에서 “본문 삭제 해주세요” 하고 올렸을 때가 제일 두근거렸죠. 당선 인터뷰 하고 아직 신문에는 나기 전이었거든요. 그러니까 공모전 당선됐다고는 못 쓰고. 하지만 책 나올 예정이라는 말은 틀린 건 아니니까, 그렇게.

라키난 당선 소식 나왔을 때 주변에서 깜짝 놀랐겠네요?

갈원경 네. 학교에서도 한 분이 아침부터 신문 보시고 신문을 들고 오셔서 교무실 게시판에 붙이셨어요. 학생들도 한마디씩 하고.

라키난 아이들은 선생님이 글 쓴다는 거 알고 있었나요?

갈원경 아뇨. 졸업생은 몇 명 알고 있었더라고요. 학교에선 이야기 한 적이 없어서 모르려니 했는데, 홈페이지를 검색으로 찾아서 글 쓰는 거 알고 있었던 졸업생들이 있었어요. 그래도 제가 굳이 안 밝히니까 먼저 말은 안 했더라고요. 졸업생이 편지로, 사실은 글 쓰시는 건 홈페이지에서 봤는데 책이 된다니 너무 좋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사인 받으러는 몇 명 왔던데, 재미있었다고 하긴 하더라고요. 짤막하게 이름이랑 메모 적어주고 사인해주고 그랬어요. “고등학교 생활 알차게 보내고 꼭 네 꿈을 이루길 기도할게”, 이런 말들요.

라키난 부럽네요. (웃음)


4. 글쓰기: 현재진행형

라키난 다른 작품들도 계속 쓰고 계신데요. 작품들이 작가 마음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 같은 건 어떤가요. 제일 애착이 간다든가, 새로운 시도를 해봤다든가, 그런 거요.

갈원경 [아홉 개의 붓]이 애착이 많이 가는 글이고, 제일 오랫동안 쓴 글이에요. 머릿속에서는 네 명의 이미지가 제일 선명하고. (웃음) 그래서 가능하면 언젠가 속편을 쓰고 싶기도 하고, 다른 매체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꿈도 꾸고요.

라키난 그것도 좋겠네요. 영화라든가. 동화라든가.

갈원경 게임이라든가요.

라키난 아홉 개의 붓 말고 다른 작품은요?

갈원경 음, 지금은 일단 지금 쓰고 있는 글에 최선을 다하고 싶고요. 일른(ILN, http://lunabell.net/iln)에서 하고 있는 글이 빅토리안 시대에 작가이자 교사로서 살고 있는 17살 소녀의 이야기인데, 그게 잘 마무리되어서 책으로 묶이면 좋겠어요.

라키난 10대-20대를 소재로 쓰셨으면 아무래도 성장, 방황의 이야기가 많겠네요.

갈원경 네. [아홉 개의 붓]도 어떻게 보면 성장의 이야기고. 지금 쓰고 있는 장편이 두 개인데, 둘 다 성장의 이야기네요. 일른의 <종이로 만든 성>은 완전히 10대 여자애 이야기고요. 순문학 쪽으로 쓰고 있는 건 20대 초중반의 이야기네요. 그 주제가 가장 이야기할 것들이 많은 것 같아요. 제가 가장 많이 보고 느끼는 부분이기도 하고.

라키난 글 쓰는 사람으로서,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지, 혹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요.

갈원경 음... 일단은, 제 애가 나중에 자라서 읽었을 때 창피하지 않을 글을 쓰고 싶어요. 5년 후, 10년 후에도 누군가가 읽어줄 글, 그런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고요. 글이라는 건 결국 작가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 스스로도 더 성장해야겠죠? 그래야 내가 쓰는 이야기들에 좀 더 깊이가 생기고, 사람들의 아픔과 상처나 기쁨이나 보람 이런 삶을 잘 담아낼 수 있을 테니까요. 10년 뒤에 지금 글보다 훨씬 나은 글을 쓰고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글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네요. (웃음)


공동창작

앞서 말이 나왔던 ILN(일른)은, 1892년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당시 실존했던 런던의 주간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Illustrated London News)>를 중심 삼아 이루어지고 있는 공동 소설 창작 프로젝트이다. 홈페이지(http://iln.pe.kr)를 기반으로 네오 빅토리안(Neo Victorian) 장르의 역사장편소설이 연재되고 있다. 현재까지 네 편의 작품 <런던 행복론>, <페이션스>, <그려지지 않은 그림>, <종이로 만든 성>이 연재되고 있으며, 이들은 독립적 이야기이지만 공통된 배경, 인물, 사건 들을 공유한다. 갈원경 님은 ‘먼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종이로 만든 성>을 연재하는 중이다.

라키난 일른도 그렇고, 하이텔의 ‘가상세계’에서도 그렇고, 공동창작을 여러 번 하셨는데요. 공동창작을 좋아하시나요? 아니면 공동창작의 매력이라든가.

갈원경 책임감이 생겨서 좋아요. 강제 마감이 생긴다는 점이요. 그리고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피드백을 보여주고, 그 사람들 글에서 또 내가 배우니까요.
작가들에겐 피드백이 무척 힘이 돼요. 연재를 하면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데, 혼자 쓰는 작업은 그렇게 하기 힘들고요. 연재한 글은 결국 완성하고 나선 무척 많이 고쳐야 하긴 하지만 피드백이라는 건 놓치기 어렵죠

라키난 장르 쪽과는 달리 순문학 쪽은 연재할 자리가 드물지 않나 싶은데. 어떤가요?

갈원경 네 거의 없죠

라키난 그런 점에서 순문학 쓰기가 더 어렵다든가.

갈원경 혼자 쓰는 글쓰기는 어렵죠. (웃음)

라키난 음. 네. 그런 점에서는 거울이 참 좋은 장소인 것 같네요.

갈원경 네, 악플도 거의 없고요. 지금도 책 제목으로 검색해보면 악플이 없진 않거든요. 그렇지만 거울은 조용하죠.


5. 거울에서

라키난 웹진 거울의 필진이 되어서 좋은 점이 있다면요?

갈원경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랑,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과 공통 공간이 생겼다는 점.

라키난 거울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나요?

갈원경 판타지 동호회에서 1대 편집장이랑 아는 사이어서요. 웹진을 만들었다고 들었고. 그래서 비교적 초기에 글을 올렸어요.

라키난 독자우수단편 선정단으로도 활동하고 계신데요. 다른 사람의 글을 계속 접한다는 것, 그리고 계속 평을 쓴다는 건 어떤가요?

갈원경 자기 글을 많이 되돌아보게 돼요. 이런 장점은 나도 닮고 싶다 하는 글도 자주 만나고요. 반대로 조심해야겠다 싶은 것도. 아무래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작가들이 있으니까요. 나도 이런 부분이 있겠구나 싶고요. 좋은 글 보면 반갑고 부럽고.

라키난 닮고 싶다, 혹은 조심해야겠다 싶었던 것에서 예를 들어주실 만한 게 있나요?

갈원경 자주 하는 말 중에, “처음부터 글의 플롯을 짜놓고 쓰라”고, 붓 가는 대로 쓰는 건 소설이 아니라고 하는 말이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독자가 이해하기 힘든 결말로 치닫게 되거든요.
그리고 “장편과 단편의 호흡은 다르다” 라는 말이요. 단편은 짧게는 70매에서 길어야 150매 정도에 압축적으로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이야기의 배경도 설정도 너무 과하면 안 되는데, 인물의 행동 하나하나를 파고들어서 서술하다가 결국 중심 사건은 빈약해지는 경우가 있어요. 장편이라면 더 큰 사건이 전체적으로 일어나니까 괜찮지만 단편은 그 분량 안에서 독자에게 클라이막스를 줘야 하니까요. 좀 더 치밀하게 필요 없는 부분을 쳐내고 중요한 부분에 힘을 줄 필요가 있죠.

라키난 단편 부문을 보시니까 그런 게 더 많이 보이겠어요.

갈원경 네. 특히 판타지를 쓰는 사람들 중엔 장편을 쓰고 읽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자신도 모르게 장편 호흡에 맞춰지는 경우가 있어요.
그리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말장난이라든가. 클리셰들이 넘치는 경우가 있죠. 자주 보이는 걸로, "xx라고 부르지 말랬지!" 라고 별명으로 버럭대는 장면이 있는데요. 그게 필요한 장면이라면 상관없죠. 하지만 단편에선 거의 필요가 없고요.
아니면 “~~는 이렇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라고 해놓고 정작 뒷부분에 가면 그 버릇은 사라지고 없다거나. 작가가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설정을 집어넣고 스스로도 그걸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반성을 많이 하죠. 나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걸 별 생각 없이 가져오진 않나 하고.

라키난 또 뭐 없나요?

갈원경 그리고 자주 안타까운 게, 자기가 모르는 세상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작가는 20대인데 40대의 이야기를 하고 아니면 작가는 10대인데 30대의 이야기를 하고. 불가능하진 않죠, 많이 공부하고 알아보고 쓰면. 그런데 자신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니까 글에서 표시가 나요. 30대라고 하는 등장인물들이 보이는 행동이나 대사나 혹은 심리가 10대인 거죠. 그래서 '쓰고 싶은 것'과 '쓸 수 있는 것'은 다르다고 조심하려고 해요. 부족하지만 공부하려고 하고. 제가 저렇게 평을 해놓고 제 글이 그런 단점을 갖고 있으면 안되니까요.

라키난 다른 사람 글에 평을 발표한다는 게 부담스럽진 않나요? 자기 글에 조심하게 되는 것 말고도, 그냥 평을 쓴다는 거 자체가요.

갈원경 조심스럽고 부담스럽죠. 가끔 반박글도 올라오고요. 독자단편에 글이 줄어드는 게 심사단 때문이라는 글이 한 번 올라왔었어요. 참 괴롭더라고요.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 심사를 원하지 않으면 [심사제외] 말머리를 써달라고 했으니 원하지 않는 사람은 말머리를 써서 올리면 되는데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그래도 꾸준히 글 올려주시는 분들이 있으니까 열심히 하자 했죠.

라키난 오래 하셨으니, 나름 자부심도 생기고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갈원경 네. 출산 때문에 좀 쉬기로 이야기를 해두었는데. 오래 기억에 남을 경험이었어요.

라키난 매달 평을 해야 한다는 게 참 성실함과 책임감이 필요할 것 같아요.

갈원경 제가 자신한테 칭찬을 잘 안 해요. 그래서 이번 상반기에는 좀 날 칭찬해보자 하고 블로그에 남겨놓은 게,
1. 대학원 마친 것.
2. 일른 연재 한 번 빼곤 다 마감 지킨 것.
3. 독자단편 심사 펑크 안 낸 것.
4. 이번 수상.
이런 순서로 적었어요. 어쨌든 나 자신으로서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라키난 그럼 심사는 지금은 쉬고 계신 거죠? 몸 추스리시면 계속 하실 건가요?

갈원경 일단은 조금 쉬려고요. 이번 달부터는 김주영(적어)님이 혼자서 하실 거고요. 전 출산 후에 상황이 예측이 안돼서 일단은 좀 쉬기로 했어요.

거울의 ‘독자단편’ 게시판에서는 매달마다 우수단편을 선정하여 거울 메인에 게재하고 있다. 한 달에 올라오는 작품 수에는 편차가 있긴 하지만 매달 몇 편이든 꼬박꼬박 올라오는 편이다. 게시판에 올라오는 작품 중 일정 규정을 지키는 작품들에 대해서는 독자우수단편 선정단의 심사평이 달린다. 규정이란 다름이 아니라 자신이 창작한 글일 것, 분량이 단편 분량에 맞을 것, 수상 경력이 있는 글이 아닐 것 등 기본적인 사항이다. 수상 경력이 있는 글을 제외하는 이유는 이미 평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기도 하고, 해당 작품을 선정한 심사위원의 견해를 존중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자기 작품에 대한 평이 보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평이 달리도록 하는 방침이다. 같은 맥락에서, 글을 공개하고는 싶지만 평을 받고 싶지는 않을 경우 게시글 제목에 [심사제외] 말머리를 달아 이를 거부할 수 있다. 앞서 나온 [심사제외] 말머리는 이를 말한다.
독자단편 게시판에서 작품이 우수단편으로 선정되어 거울의 필진으로 합류한 사람이 상당수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독자우수단편 선정단은 거울의 중요한 공간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라키난 그럼 슬슬 마지막으로, 거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거울에 할 말이 있다면?

갈원경 거울은 [아홉 개의 붓]을 계속 공개하게 해 준 곳이고. 독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해줬고요. 글을 공개하는 곳 중에 이렇게 독자들이 따뜻한 곳은 잘 없을 거에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와 주면 더 좋겠지만, 그 '착한 독자'들은 계속 있었으면 좋겠어요. 다른 곳에서 날선 댓글을 쓰는 사람들도 거울에서는 안 그런 걸 자주 보거든요. 그게 거울의 분위기인 것 같아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작가들을 많이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독자단편을 통해서든, 다른 곳에서든 새 필진들이 계속 들어오고 긍정적인 피드백이 계속 일어나는 그런 곳이면 좋겠네요.

라키난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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