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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사일, 육교 위로

저녁 하늘을 보러 갔다.
어제는 타는 듯이 붉어 뉘인가 장렬히 피 흘리며 죽어가는구나 싶더니 오늘은 갓 가을 물이 든 감처럼 풋내 나는 홍황색이기에, 꼭 좀 봐야겠다 싶어 허둥지둥 나섰다.

인적은 드문데 들고 나는 차는 많아 사람 목소리를 듣기 어려운 큰길가, 자동차 펜스를 사이에 두고 두 명의 사내아이가 제각기 저희 몫의 자전거를 세운 채 나란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드니 용오름 모양의 구름이 비스듬히 가로놓인 저녁하늘로 노을이 툭 터지듯 번져나갔다. 나는 멈추어 섰다. 인적은 드문데 들고 나는 차는 끝도 없고 누구 하나 뒤를 돌아 보지 않는 날. 두 소년은 아무 말도 없이 구름을 가리키며 서로 마주보고는 씩 웃었다. 그리고 각자 반대 방향으로 자전거를 밀기 시작했다. 바퀴 구르는 소리와 함께 한 명은 내 바로 곁을 거슬러 지나고 다른 한 명은 저편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용오름 같은 희한한 구름은 소리도 없는데,
거기 용은 없다.

제각기 지어 올려 멋도 규칙도 없는 수십 수백의 건물들이, 침전한 루이보스 찻잎 빛깔 놀을 등지고 어둑한 그림자로 떠올랐다. 해지는 순간이 좋다.
해가 지는 그 순간이,
순간이라기엔 영원처럼 길고 사람의 일생처럼 무어라 잘라 말하기 어려운 그 남루가 좋다.
도시의 마천루에, 초록을 찾기 어려운 지상의 경계선에, 아쉽게 내려 앉아 무수한 가로등 불빛에 이내 되비쳐 머쓱하게 흩어지는 찰나와 찰나들. 높다란 산길을 내달릴 때 이르게 날아와 징그럽도록 짙은 녹색과 청색과 도리어 인상이 옅기까지 한 진홍빛과 뒤엉켜 수풀의 우듬지를 단숨에 집어삼키는, 원시의 밤이 저 언저리에 걸려 있을 것이다.

용이 죽은 이야기를 할까 했다.
구름은 흩고 날은 저물고.
두 소년이 힘껏 달리던 자전거를 멈추고 일제히 뒤를 돌아볼 때 용이 떠났다는 이야기를 할까 했다.
낮도 밤도 아닌 시간마다 한껏 엄숙한 기분으로 해는 새롭게 지더라고. 죽거나 태어나거나 깨어나거나 혹은 떠나버리는 용에 대해서 나도 언젠가는 말 해야만 하리라고.

시월 사일. 육교 위로,
저녁 하늘을 보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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