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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미로냥 인터뷰

2013.09.30 01:51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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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13. 09. 10

참가자 : 미로냥

진행자 : 라키난 + pena

 


이 인터뷰는 <홀연>의 출간 기념으로 이루어진 미로냥(김인정) 님의 인터뷰입니다. <홀연>은 출판사 온우주에서 출간한 단편선 시리즈의 하나로, 벌써 7번째 책입니다. 작품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다루기 때문에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확실한 스포일러는 블라인드로 처리했습니다. 인터뷰 자리에는 미로냥 님 외에도 담당 편집자이자 거울의 편집장이신 pena 님이 함께하셨습니다. 인터뷰에는 라키난 님이 수고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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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홀연> 출간에 대해


 책이 나온 소감은?


 부끄러워요.


 어떻게 부끄러운가요.


 보여주고 싶지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그런 게 있어요.


 책이 나왔으니까 책 나왔다고 자랑도 하고 그래야 하잖아요.


 얘기는 해야죠.


 해야죠. (웃음) 부끄러워하면 안 되잖아요.


 부끄러운걸요. (웃음) 주위 사람에게 책을 선물로 주고는 싶지만 안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느낌이에요.


 글을 올릴 때도 그런 느낌이었어요?


 올릴 때도 그렇죠. 누가 봐주면 좋겠는데 부끄러우니까 자세히는 안 봤으면 좋겠다 싶은.


 어쨌건 책이 나왔죠. 나왔는데요. 수록작은 어떻게 골랐나요?


 처음에 편집장님이 보시고 1차로 목록을 보내주셨는데요. 제가 거기서 빼자고 한 것도 있고, 분량 문제도 있고 해서 바뀌었어요. 저는 스스로 동양풍을 너무 많이 쓰니까 서양풍도 써보자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다시 보니까 되게 다양하더라고요. 좋게 말하면 다양하고 아니면 중구난방이고. 괜찮은 것들끼리 뽑아봤더니 너무 스타일이 다양하니까 책으로는 안 어울리는 거예요. 주제를 뽑아서 묶어봤더니 그것도 이상하고.


 사제(師弟)라는 주제로만 묶어봤거든요. 저는 괜찮았는데 작가 본인이 부끄러워하셔서.


 저는 기본적으로 취미로 글 쓰는 게 맞는데요. 그래도 소설이라고 쓰는 거랑 더 가볍게 쓰는 게 있어요. 분명 똑같이 글을 쓰는 건데 가벼운 건 보여주기 부끄러워요. 같은 레이블이 아니라는 느낌이랄까요. 그러니까 계속 목록이 안 나오는 거예요. 두 번째로 정할 때는 타로도 쳤어요. (웃음)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 정하다 보니까. 지금은 처음에 정했던 거랑 거의 비슷하게 나왔어요.


 둘의 차이는 뭐예요?


 소녀소설이라는 느낌? 수록작 중에서는 <심각하게 찬란한> 같은 게 그렇죠. <동백>은 애초에 이런 만화가 있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쓰기 시작했던 거고요. 개인적으로 진짜 무겁다고 생각한 것들은 다 빠졌어요.


 부록 만화는 <동백>으로 들어가요. 예전 [악어의 맛]에서 <로보를 위하여>를 그려주셨던 일월님이 해주시고요.


 콘티를 봤는데, 저는 만화 느낌으로 썼지만 진짜 만화와는 차이가 많이 나더라고요.


 책을 만들면서 고친 부분은 따로 없나요? 옛날에 썼던 것도 꺼내고는 하니까 새로 고친 것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런 건 없어요. 그보다는 말 하나하나를 고친 게 많아요. 특이한 문체가 있으시거든요. 특이한 단어를 쓰거나, 돌려서 표현을 하다가 오히려 틀린 단어를 쓰신 게 있어서요. 교정 볼 때 재미있었던 게, 계속 종이를종일이라고 쓰신 거예요. 아마 글자수나 어감 때문인 것 같은데. 이게 하루 종일을 말하는 건지 종이를 말하는 건지 헷갈리잖아요. “왜 자꾸 줄일까…” 하고 포스트잇에 써놨더니, “그러게요…” 하고 답이 달렸어요.


 개인적인 운율이 있어요. 거기에 입각해서 써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특이한 문체가 나오는 것 같아요. 뒤로 가면 동화 같은 말이 많이 나오잖아요. 시대를 특정할 수 없는 어딘가의 동화 같은 말이요. <천 번의 밤 천 번의 낮>에서 특히 그렇네요. 수록 순서는 어떻게 정했어요? 가벼움에서 무거움으로 가는 것 같은데.


 . 만담 시리즈가 가벼우니까 앞에 들어갔고요. 원래 <백탑의 도시>는 맨 뒤에 있었는데, 해설 써주신 정도경 님이 “<천 번의 밤 천 번의 낮>완성됐다고 끝나니까 끝에 들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해서 냉큼 바꿨어요.


 표제작이 없더라고요. 제목은 어떻게 정한 거예요?


 원래는 작품에서 따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했어요. <천 번의 밤 천 번의 낮>이 제일 무난하긴 한데, 그게 예전에 제가 e-book으로 작품집 냈을 때의 제목이거든요. 겹치면 안 되니까 빼고. 하지만 다른 걸 붙이기엔 어려웠고요.


 지금 <홀연>은 마음에 들어요?


 “어중간하고 좋아요그러더라고요. 작가가 이래요.


 더 길게 하기엔 떠오르는 제목도 없긴 했고.


 계약은 대체로 작년에 한꺼번에 했는데, 뒤에 출간된 작가들은 제목이나 순서를 논의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았어요. 곽재식 님이나 정도경 님은 바로 출간해야 했으니 계약할 때 논의한 대로 나왔고요. 이서영 님이나 김현중 님은 있는 걸 다 묶어야 했고. 김인정 님이 처음으로 시간을 많이 두고 이야기할 수 있었죠. 컨셉을 어디로 잡아야 하나 많이 망설였어요. 가벼운 건 길게 쓰시거든요. 그래서 가벼운 걸 묶으면 몇 편 안 들어가는 거예요.


 제가 계약하고 책 나올 때까지 시간이 좀 있었으니까, 그 사이에 작품을 고치거나 새로 하나 써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손도 못 대겠더라고요. 고친 것들은 있죠. <심각하게 찬란한>의 경우에는 설명이 부족해서 추가된 부분이 많은데, 그래도 아예 새로 쓰지는 못 했고요. 만담 시리즈도 너무 옛날 글이라 다시 쓰는 게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새로 쓰면 그 느낌이 안 나올 것 같더라고요.

 


2. 어정쩡한 장르행복할 수 없는 로맨스


 거울 프로필에는 어정쩡한 장르를 쓴다고 되어있는데요. 왜 어정쩡한 장르인가요.


 판타지와 무협 둘 다 아닌 걸 많이 써서요. 책에 들어갈 프로필은 새로 써야 하는데, 뭐라고 쓸지 고민이네요.


 어정쩡한 장르라는 게 납득이 가는 게. 로맨스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이 많은데, 정말로 로맨스에 집중했다는 느낌이 드는 건 <동백>밖에 없는 거예요. 다른 건 이래저래 섞인 느낌.


 끼얹었죠. 옛다, 별사탕이다, 이런 느낌으로. (웃음)


 아까 가벼운 건 길어서 빠졌다고 했는데요. 왜 길어요?


 대화도 많고, 캐릭터 묘사가 많아요. 스토리와 상관 없이 캐릭터가 나타나는 부분 있잖아요.


 게임 감성으로 쓰는 게 많긴 해요. 예전에는 캐릭터 다루는 걸 잘 못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하면서 그 부분을 훈련한다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게임 시나리오 쓰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일을 오래 해서 그런지 이제는 정신차려 보니까 버릇처럼 그렇게 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잘 한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패턴이 비슷해서.


 전형적인 패턴의 남자가 꽤 나오죠. <동백>의 남주인공도 그렇잖아요. 여자애는 얼굴을 보고 당황해서 새빨개져 있는데 남자는 아무 것도 모르고 괜히 손으로 짚으면서 왜 그러나, 처자.” 이러는 부분이 패턴이잖아요. <심각하게 찬란한>도 패턴이 있는 로맨스에 빠지잖아요.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는 줄 알고 고민하잖아요.

다만 <심각하게 찬란한>은 주인공 여자애가 또래 여자애들을 보는 시선이 특이했던 것 같아요. 보통 애들은 자기 또래를 객관적으로 보거나 귀엽다고 생각하지는 않잖아요. “하는 짓이 귀엽네가 아니라, “쟤네 왜 날 빼놓고 이야기하지?” 하죠. 주인공은 애초부터 특이한 애였으니까 괜찮긴 하지만.


 그게 제 감성이에요. 제가 한창 상담 받을 때 그런 지적을 받았거든요. 감정을 직시하지 않고 얼려뒀다가, 나중에야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보는 버릇이 있다고. 그러니까 화가 날 만한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귀엽네하고 말할 수 있는 거죠. 마침 그 때쯤 <심각하게 찬란한>이 떠올라서 마무리를 지었어요. 마무리만 안 짓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울어도 괜찮아 라는 마무리가 나오는 거군요?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워낙 사람 기억 잘 못 하는 것도 있고, 잘 잊어버리거든요. 그런 것 때문에 쓴 거라서.


 <심각하게 찬란한>의 남자애, 서겸이 진짜 취향 이상하지 않아요?


 걔가 사람 보고 귀엽다는 말을 제일 많이 한단 말이에요. 제일 수상한 애야.


 나중에 여주인공 단해도 알잖아요. 서겸이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귀엽다고 하는 건 사실 아무도 상관이 없기 때문이라고. 되게 비뚤어진 애에요. 분명히 고등학생 아닌 것 같아. 잠입한 걸 거야.


 저번에 얼핏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이 둘은 정말 망가진 커플이라서요. 단해가 성장해서 서겸이를 제대로 바라보게 되면 얘는 도망갈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단해와 서겸이도 로맨스라고 생각하고 썼거든요. 그래서 안 되나 봐.


 가장 행복한 커플은 앞의 만담 시리즈, <월훤잡기>밖에 없지 않나요.


 걔네가 차라리 커플이죠.


 어쩌다 이렇게 다 망했지.


 <월훤잡기> 시리즈는 더 안 나오는 건가요?


 더 쓰려고 해도 쓰기가 힘들어서 안 나오더라고요. 나중에 써야지 하다가 그만. 옛날에 사이트에 <맹하만담>이라는 다음 편을 올린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사이트가 사라지면서 파일이 사라졌어요. 무슨 내용인지 어렴풋하게 기억이 날 듯하지만 안 나니까 이젠 모르겠다 싶어서. ‘맹하라고 하면 초여름이란 의미거든요. 장마가 져야 하는데 비가 오지 않아서 곤란해지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월훤잡기>도 그렇고 군신관계, 사제관계가 많이 나오는데요. 로망이라도 있나요?


 그냥 좋아요. 모르겠어요. 스승이나 왕 같은 포지션에 있는 사람이 이끌어주는 관계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전반적으로, 위에 있는 사람은 제멋대로거나 남의 말을 안 듣거나 타인에게 상관할 필요가 없는 캐릭터더라고요.


 부끄럽다남캐 취향이, 성격은 나쁜데 요령은 없는 남자라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렇구나, 이렇게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구나.


 그래서 다들 연애를 못 하는구나.


 그런가 봐요. 그리고 이번에 순정풍 장편을 쓰면서 연애가 나오는 이야기를 많이 썼거든요. 그러면서 느낀 건데요. 연애를 다루려면 아예 코드만으로 다루거나 이해를 하고 써야 하는데, 이해를 하고 쓰기엔 저 자신이 너무 어린 거예요. 연애를 다루려면 필연적으로 사람의 바닥을 봐야 하는데, 그게 너무 구질구질해서 힘들어요. 연애를 하면서 트러블이 생기면 제가 제 바닥을 봐야 하니까 힘들어서 피한 거죠. 지금까지 쓴 작품들 보니까 대부분 연애 감정을 인지하거나 아니면 사랑인 것 같다는 정도에서 끝나지, 이루어지진 않는 거예요. 왜냐면 이루어지고 나면 바닥이 있으니까. 딱 현실인 거죠. 행복하게 결혼식 하고 축하해 축하해 하고 끝내야지, 결혼 이후에 펼쳐진 현실로 돌아가기엔 정말연애를 시작하게 되면 그 뒤를 다 봐야 하는 건데 이걸 잘 못 그린 거죠. 왜냐하면 그러기에는 애들이 양쪽 다 이상하거든.


 현실을 직면하더라도 사람들이 계속 연애를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좋은 점이 있고 쌓이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잖아요.


 그래야 하는데, 그걸 쓰면서 제가 많은 반성과, 또 다른 연중을 했는데. 제가 이렇게 도망을 가요.


 작가가 도망을 가면 캐릭터는 어떡하라고! 끝을 내주세요.


 

3. 글쓰기에 대해

 

 소설에 고풍스러운 단어가 많이 나오잖아요. 참고자료가 있나요? 아니면 평소 취향에서 나오는 건가요.


 사전도 있고요, 예전에는 나름 덕질을 할 때였으니까 책을 많이 샀었죠. 별로 참고를 하진 않는데요. 우리옷 복식사 같은 책들 좋아하고요. 아니면 아예 한시어사전이 있어요. 한시에 나오는 말들에 대한 사전이고, 국어사전에는 없는 말들요. 국학자료원에서 나온 한국학 사전도 있습니다. 요즘은 좋은 책이 워낙 많아서요.


 등장인물 이름 같은 건 어떻게 지어요? 이름도 한자어가 많잖아요.


 그냥 말이 좋아서 지은 이름이 많아요.


 <백탑의 도시>에 나온 작품이 국적불명의 이름이 많지 않아요?


 그건 어감에 맞춰서 지은 거. 나름대로의 맥락에 맞는 말이랄까요.


 어떤 건 알 거 같아요. 사람들이 한글 이름을 짓는 거 보면 실제로 있는 예쁜 단어에서 따오는 것도 있고, 특이한 한글 단어에서 따오는 경우도 있잖아요. 어감만 보고 지은 것 같은 느낌이 나요. 하지만 그냥 한글만 아니라 한자도 있잖아요?


 있는 이름에서 따오는 경우도 많이 있거든요. 음만 정하고 있는 이름에서 따오는 경우도 있고. 여러 이름을 합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한자 사전에서 너무 이상하지 않은 한자를 넣죠.


 <심각하게 찬란한>에서는 단 거, 먹는 것들이 매우 많이 나오는데요. 저 먹을 거에 민감해서 표현을 잘 외우거든요. 아몬드 마카롱으로 된 날개에 귤 젤리 몸통의 나비라든가. 그런데 먹을 거 이름은 많이 나오는데 무슨 맛인지는 묘사가 안 나와요. 작가가 좋아해서 들어간 게 아니라 일부러 넣은 기분인 거예요.


 일부러 넣은 거죠. 의도해서 썼어요. 그리고 이상하게 저는 맛에 대한 묘사는 안 하게 되더라고요. 저도 먹방소설을 쓰고 싶은데. 저는 관련 책은 갖고 있거든요, 좋아하니까. 운동하면서도 꼭 푸드채널 보고 침 질질 흘리고 그래요. 그래서 끝나고 꼭 뭐 먹어요. 트레이너는 아직 몰라. 어쨌든 먹는 묘사를 읽는 건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쓰지는 못해요. 쓰려고 하면 정작 나는 먹고 싶어지질 않더라고요.


 그리고 주인공이 너무 먹죠. 엄청 먹는데, 맛에 신경을 쓰지 않는 느낌?


 저는 좋아하기는 하는데 많이 못 먹거든요. 하지만 그 주인공은 좋아하지 않는 느낌이죠. <심각하게 찬란한>은 많이 고친 작품인데, 고치는 과정에서 메뉴가 더 밥이 아닌 것들로 바뀌었어요. 그게 더 이상하잖아요. 알록달록한 먹을거리는 잔뜩 나오고, 도시락 메뉴 구성도 이상하고, 주인공은 맛과 상관 없이 먹기만 하는 느낌이죠. 일부러 비정상적으로 쓴 거예요.


 역시 병들었어. 로맨틱한 분위기가 나는 건 <동백>밖에 없다니까요. 마음 잡고 로맨스를 쓸 생각 있나요?


 쓴 건 있어요. 길어서 책에는 빠졌어요.


 수록작 중 <화선>은 제일 무거운 작품이 아니었나 싶은데요. 다른 건 비극적이기는 해도, 인물들이 인간이 아니라 추상적인 존재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그들이 겪는 비극도 신화나 동화에 나오는 비극으로 보이는데요. <화선>은 인간적인 갈등이 나오잖아요. 그런 점에서 무겁다는 생각이 들어요.


 굉장히 회의주의적이죠. 발전이나 이상에 대한 믿음이 없는 느낌. 그보다는 부정적인 것에 대한 믿음, 언젠가는 꼭 망가질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이 보여요. 내 팔자가 이렇게 좋을 리 없어. 끝이 이렇게 잘 날 리가 없어.


 해피엔딩은 이야기니까 쓰는 거예요. 아까의 연애 이야기랑 상통하는 것 같은데, 행복해진 다음의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어요. 아무리 차근차근 쌓아도 끝이 없고, 누구라도 분명히 잘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치유나 회복에 대한 생각이 저에게 부족한 것 같기는 한데, 그게 어떻게 나아질 수가 있지 싶어요.

<호천기연담> 관련해서 외전이 둘 있는데, 하나는 책에 실린 <화선>이고 다른 하나는 <화적>이거든요. <화적>조신의 꿈에서 따온 거예요. 원래 조신의 꿈에서는 스님이 여자를 만나서 매우 행복했다가 비참하게 죽는 꿈을 꾸잖아요. 꿈에서 깨어난 뒤 역시 부처님이 짱이야 인간 세상 따위 이러고 끝나잖아요. 그에 대한 의문이 있었어요. 한 때 좋았잖아요. 나중에 안 좋아질 거라는 걸 알더라도, 삶은 언제나 안 좋아질 수 있으니까, 그렇더라도 그 길로 안 가는 건 이상하지 않나 싶었어요. 그에 대한 내용이에요. 결국 행복해지지는 않죠.


 인간이 아닌 존재가 굉장히 많이 나오잖아요. 거의 다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인간이 아닌 존재가 기본적으로 많이 나오는데. 그것도 관련이 있을까요?


 인간이 아닌 것들은 영원하고 인간이 아닌 것들은 신뢰를 지키고. 그런 게 있어요. 제가 약속을 어기는 건 인간이라는 뉘앙스의 말을 제가 많이 썼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웃긴 건 그들은 인간을 사랑하고 있거든요. 이게 바로 귀엽네라고 생각하는 그 감성인 것 같아요.


 게임회사에서 시나리오 쓰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소설을 쓰는 거랑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게임은 정말 직관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다듬고 다듬으면 보드게임이나 영웅설화와 비슷하게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게임에 따라서 보여줄 수 있는 게 다르잖아요. 무엇을 보여줄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기술적 한계가 항상 있고요. 게임을 플레이하는 방식에 따라서도 달라지는데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같은 경우에는 세계가 움직이고 유저는 중요하지 않은 존재잖아요. 그런데 제가 참가했던 <테일즈위버> <드래곤 네스트>의 경우에는 캐릭터가 중심이에요. 유저들이 플레이하는 그 캐릭터가 중심이니까 거기에 공을 쏟아야 하죠.

그리고 사건도 더 강렬해야 하고요. 누가 찔렀다, 죽었다, 배신했다, 이런 단도직입적이고 강렬한 상황이어야 해요. 그래야 플레이할 때 하나라도 더 머리에 남으니까요. 또 상황에 맞게 맞춰서 써야 하는 게 굉장히 많아요. <반지의 제왕> 영화를 찍는 걸로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중간에 보로미르가 죽어요. 죽는 거에 어울리게 이야기 다 짜놨어요. 근데 기획사에서 요청을 하는 거죠. 우리 보로미르 역할에 유명한 배우 섭외했으니까 죽이면 안 된다. 그럼 거기에 맞춰서 써야죠. 그러면서 시나리오도 잘 나와야 하고, 그러면서 리소스도 많이 쓰면 안 되고요. 스토리 원작자가 따로 있으면 이 과정이 더 복잡해지고요.


 그렇게 쓰다가 소설 쓰면 편하지 않아요?


 그 과정도 나름대로 재미있어요. 캐릭터가 많이 등장하잖아요. 제가 잘 못 다루는 스타일의 인물도 있고요. 그에 맞춰서 써야 하니까, 나름대로 어떻게 쓰게 되는 점이 있어서 재미있었어요.


 이것도 귀엽네와 비슷한 거 아니에요?


 아니 그런데 실제로 재미있어요. 제가 전형적인 까빠라는 이야기를 듣는데요. 엄청 까는 것 같은데 사실 팬인 거. 그런 느낌으로 좋아합니다. 오래 쓰기도 했고요. 열심히 썼고요.


 마지막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어떤 작가로 남고 싶은지.


 쓰고 싶은 글은 항상 있어요. 군상극을 쓰고 싶어요. 군상극이나 스케일이 큰 역사소설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데, 정작 쓸 때는 개중에 몇 명에만 꽂혀서 쓰는 경우가 많거든요. 꽉 짜여있으면서 군상극인 소설을 써보고 싶어요.

작가로서는, 흔히 말하는 취미로 글 쓰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회사에서 글 쓰고 집에서도 글 쓰고 하니까 양쪽 다 안 되는 느낌이 있어요. 글을 쓰려면 그 하나를 계속 생각을 해야 하잖아요. 결국 시나리오를 쓰는 건 논문을 쓰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두 개의 논문을 동시에 진행하는 건 힘드니까요. 그래서 일을 하면서 작가로 있기 위해서 취미로 글 쓰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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