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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해망재 인터뷰

2013.10.31 16:2210.31

해망재.jpg 라키난.jpg 페나.jpg
참가자 : 해망재
진행자 : 라키난 + pena


이번 달에는 해망재 님을 인터뷰했습니다. 해망재 님은 현재 거울에서 “족두리꽃”을 연재하며 먼 여정 코너를 채워주고 계신데요. 지금까지 장편소설 [월하의 동사무소]를 내셨고, 만화 스토리로 <레이디 디텍티브>, <비원의 탑> 등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해망재 님의 [홍등의 골목]이 온우주 출판사의 단편선 시리즈 중 하나로 출간되었습니다. 이에 거울에서는 [홍등의 골목] 관련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인터뷰 자리에는 해망재 님 외에도 편집자인 pena 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인터뷰어로는 라키난 님이 수고해주셨습니다. 인터뷰 내용 중 작품에 대한 중요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은 블라인드 처리했습니다.
 
홍등의골목_표지.jpg

1. [홍등의 골목]과 ‘이사나 연작’에 대해
 
[홍등의 골목] 원고들은 출간하면서 교정이 많이 된 것 같던데.

일단 양이 많았고요. ’이사나 연작’이 전체 분량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데요. 원래 쓸 때는 따로 썼었으니까 했던 이야기가 또 나오는 거예요. 그걸 많이 쳐냈어요. 그리고 3년 전에 썼던 거라 지금에 맞게 고쳐 썼다가 다시 수정한 부분이 있어요. 처음 썼을 땐 “잡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안 넣었는데, 수정하면서 그 부분을 넣었거든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게 배경이 지금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다시 빼는 걸로. 잡스가 죽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또 “이 사람아, 커피 한 잔이면 내 시급이야” 하는 부분도 빠졌죠. 복지사회일 텐데 그 정도 시급은 아닐 것 같아서.

제 말투, 말버릇 중 교정한 게 있고요.

‘무슨, 이런, 그런, 어떤’ 등의 부분이 있었어요. 그런 구어체 같은 걸 많이 삭제했죠.

그렇군요. 타임라인을 보니까 교정을 엄청 많이 한 것 같은 거예요.

그건 이 분이 트잉여셔서. (웃음)

 
<홍등의 골목>이 표제작인 이유는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라서요. 원래는 <안나푸르나>를 표제작으로 하려고 했는데 그건 통째로 들어냈죠. 책에는 수록이 안 됐어요. 저한테는 <안나푸르나>가 참 의미가 있는 글이었는데, 그걸 넣으려고 하니까 편집장 님이 결정적인 말씀을 하셨어요. “그걸 넣으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을 거야. 당신의 흑역사가 영원히 박제되는 거지.”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빠졌습니다.

초기에 미숙할 때 쓴 거라, 제가 보기엔 의미는 있지만 소설적인 면이 부족하다고 할까요. 빼기로 하기 전에 작가님이 먼저 <홍등의 골목>이 어떠냐고 제안을 하셨어요. 책의 절반이 ‘이사나 연작’이고. 연작 중 주인공이 핵심적인 행동을 하는 작품이고. 다른 수록작에 비해 표지 이미지 잡기도 쉽고요.

홍등으로 검색을 해봤는데 사진도 예쁜 게 많더라고요. 그래서 마음에 드는 건 보여드리기도 하고.

<홍등의 골목>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요?

저는 사실 그 연작의 주인공들은 다 마음에 안 들어요. 다들 답답한 성격이라서. 그런데 <홍등의 골목>의 시작이 된 경험이 있어요. 제가 대학생 때 공부를 하려고 벤치에 앉아 수학책을 딱 펴놓으면, 정말 어디서 알고 왔는지 선교 동아리 사람들이 왔어요. 그걸 논파하기 위해 성경을 통째로 읽게 됐죠. 거기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 “나는 산 떡이고...” 하는 부분이 나오잖아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건 좋아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말을 읽는 걸 보니까 배알이 꼴리는 거예요.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싶달까요. 만약 지금 시대에 예수님이 다시 태어나시더라도 사람들은 거지 취급이나 하지 않을까 싶고.
그러다 어느 날 생각이 뭉치더라고요. 지금 시대에 정말 구세주일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어나고, 사람들은 걔를 핍박하고. 반대로 구세주일지도 모른다고 알아차린 사람들은 얘 보고 “너는 구세주니까 우리를 위해 죽어”라고 할 거라고. 이사나 연작의 마지막인 <I Love You>에서 그 아주머니는 못 쏘고 덜덜 떨잖아요. 자기 손에는 피를 안 묻히지만 상대방을 보고 죽으라고 할 수 있는 게 인간이 아닐까 싶었어요. 그리고 외계인이 나오고. 왜 기승전외계인이 되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I Love You>는 연작의 가장 마지막이잖아요. 구상은 그게 먼저였던 거예요?

아뇨.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다 생각을 했었어요. 다만 얘를 어디부터 쓸까 하다가, 구세주일지도 모른다고 폼을 잡으려면 출생부터 쓰는 게 좋겠다 싶어서 프리퀄에 해당하는 <다시 한번 크리스마스>부터 쓴 거죠.

다른 단편들에 비해 이사나 연작의 단편들은 이야기의 구조와 결말이 분명하지 않은 것 같아요. 연작을 전부 읽어야 이야기가 된달까요.

이사나 연작은 같은 이야기를 4조각으로 나눠서 한 3년에 걸쳐 쓴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 각각의 이야기에서의 응집력은 줄어든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여기서 따로 읽어도 완결성이 있는 건 <다시 한번 크리스마스>나 <홍등의 거리>죠. <진흙피리새>나 <I Love You>는 좀 소품에 가깝고요.

라이트노벨이라고 보면 메인, 외전, 메인, 외전 하는 전개인 거예요.

<I Love You>는 최근에 나온 거죠? 여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네요.

사실 더 나중에 쓰려고 했어요. 책을 묶어야 하는데 이사나 연작을 빼려니까 분량이 안 나와서, 흑역사 급의 단편들을 발굴해와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은 책 나오는 거에 맞춰 새로 썼어요.

왜 나중에 쓰려고 했어요?

그 전에 이사나가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일 시절 이야기를 하나 더 쓰려고 했었거든요.

방황하던 소녀에서 어떻게 완성형 누나가 되는지? (웃음)

전 <I Love You>에서 이사나가 딱 33살이면 되겠는데 싶었어요. 그 때가 신약에서 깨달음을 얻는 때잖아요.

네. 30대 되면 깨달음을 얻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이사나 연작에는 신이나 구세주, 종교에 대한 고민이 들어가 있잖아요. 구세주일지도 모르는 사람과 구세주로 추앙받는 외계인이 만나 인류에 대해 고민하는데요. 그에 더해 각각의 화자가 가진 고민도 들어가고요. 그런데 종교에 대해서는 제대로 답이 나오지 않은 느낌이에요.

얘한테 깨달음은 그거에요. “나는 알아야겠다”는 거. 그래서 바다를 알아보는 건 인간의 손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제가 이걸 처음 쓸 때는 걔도 33살이 될 쯤이면 깨달음을 얻겠지 했어요. 그런데 제가 33살이 되어보니 깨달음은 무슨. 33살도 여전히 애인데 뭐.
<진흙피리새>는 기독교적 구세주에서 따온 인물이 나오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불교에 가까워요.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동자는 끝없이 떠돌아다니잖아요. 그런 이미지를 쓰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결국 외계인 이야기가 되더라고요. 어쨌든 이사나 연작은 테마는 기독교에서 따왔지만 쓰면서는 불교적으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사나는 자기가 아는 걸 넓혀가는 방법으로, 스스로 자기를 완성할 거예요. 알기 위한 길이니까 개인적인 구제가 돼요. 무슨 세상 구제를.

그렇게 <레퍼런스>로 도달한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레퍼런스>는 다른 이야기긴 하지만요. 제가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알아야만 한다.” 그 경구를 되게 좋아해요. 하지만 실제로는 몇 년 후 괴델이 불완전성 원리를 발표하면서 힐베르트는 살아있는 동안 자기 말이 깨지는 걸 보게 되잖아요. 그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힐베르트 전기를 쓸 수는 없었고.

그렇구나. 애초에 초점이 종교가 아니었군요.

얘는 기독교로 칠을 해놓은 불교 이야기 같은 느낌이죠. 결국은 자기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겠다는 거니까요. 지구인의 손으로 지구를 발견할 거고, 자기 손으로 자기를 발견할 테죠. 제가 기본적으로 무신론자기도 하고요.

다른 작품도 그렇지만 특히 이사나 연작에서는 ‘소수자’가 많이 나오는데요. 일부러 맞춘 건가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얘를 굳이 레즈비언으로 할 필요는 없었어요. 하지만 이사나보다 어린 남자를 등장시키려고 하니까 그 나이 또래의 남자에 대해서는 생각만 해도 ‘시끄러워’라서 싫은 거예요. 남자는 서른부터인데 30 넘은 사람이 <I Love You>를 찍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뭐하고. 그게 첫 번째 이유고요.
그리고 이사나는 출생부터가 정말 희귀한 경우잖아요. 스트레이트라면 고민할 필요가 없겠는데, 만약 바이라서 남자든 여자든 고를 수 있다면 이왕이면 더 험난한 길을 갈 인간이 아닌가 싶어서. 외계인도 사랑하는 사람인 걸요. 첫사랑이 그 정도는 되어야 히로인이죠.
제가 겪은 감정도 있어요. 한국에서 여자고, 오덕이고, 글 쓰는 사람 중에 자기가 소수자라는 인식을 한번도 안 가져본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 때의 답답함에서 나온 것 같기도 해요. 내가 뭐가 문제야, 왜 니네가 멋대로 그래, 싶은 억울함이랄까요.
 
홍등의골목_제목_가로.png

2. 다른 수록작인천에 대해
 
<작전동 김여사의 우울>이나 <나는 매문가가 되고 싶었다>도 ‘억울함’을 정말 잘 그리는데요. 둘 다 작가 본인이 들어간 주인공이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화자가 겪는, 그리고 화자를 보는 주변사람들이 느끼는 답답함과 억울함이 확 느껴진달까요.

저는 그냥 한국에서 글 쓰는 여자가 평범하게 겪을 억울함 이상은 겪은 적이 없어요. 남들 겪는 것만큼 다 겪긴 했죠. 부족함 없이 남부럽지 않게. (웃음)

<나는 매문가가 되고 싶었다>에는 글을 써서 이름을 얻고 싶어하는 사람이 나오는데요. 제가 아는 해망재 님은 이와는 다른 사람이지만, 글을 쓰는 입장으로서 이입한 만한 부분도 있었을 것 같아요. <매문가>의 화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현실에서도 이런 타입이 많이 있죠. 그 중에는 재능은 있으면서 삽질하다가 결국은 다른 길로 가버리는 사람도 있고. 나이가 들고 들고 또 들고 나서도 비슷한 타령을 하는 사람도 있고. 저는 <매문가>를 쓰면서 제일 많이 한 생각이, ‘인간아 동시에 대여섯 개 쓰지 말고 하나라도 완결을 지어야지’ 인데요. 저도 알긴 아는 게, 만약내가 처음부터 글을 완결을 내는 버릇을 안 들였으면 비슷하게 됐을 거란 생각을 하거든요. 다행히 완결을 내고 또 계속 썼으니까 그렇게 되진 않았는데, 그래도.

애증과 안타까움이 느껴지는데요.

저는 데뷔하기 전에 인터넷을 많이 돌았거든요. 그럼 많이 보게 되죠. 그러고 보니 판갤도 돌아봤었고, 커그도 돌고, 그땐 거울은 눈팅만 했었고, 워터가이드는 좀눈팅하려고 하니까 문 닫더라고요. 그리고 전 하이텔이 아니라 나우누리에서 시작했는데, 당시에 나우누리가 학생할인이 더 되어서 하이텔보다 쌌거든요. 그래서 전 나우누리에서 시작을 하고 덕후의 테크트리를 탔습니다. 아마 처음에 하이텔에서 활동을 시작했으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매문가가 되고 싶었다>나 <작전동 김여사의 우울> 모두 왜 이렇게 공감하기 힘들고 답답한 인물을 화자로 설정했는지 궁금한데요. 작가는 공감할 대상이 아닌 것 같은데,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 인물을 골랐는지.

혹시 눈치 채셨는지 모르겠는데, <작전동 김여사의 우울>은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시리즈가 남동생 책장에 꽂혀있는 걸 보고 시작했거든요. 이후로 시리즈로 쓸 생각이었는데 김여사를 어떻게 소실시켜야 할지를 생각하지 못해서 후속작은 못 썼어요. (웃음) 원래 제목만 나와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쓴 거예요.
그리고 김여사 인물은, 만약 지금 10대가 라이트노벨을 읽으며 “크크크크, 나에겐 선이 보인다” 그러고 있다면 어딘가에는 비슷한 마인드의 50대 아줌마가 TV 드라마를 보면서 “나에게도…”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싶었어요. 50대의 중2병이에요. 드라마에 몰두해 있는 거죠. 그렇지 않고서야 아이를 보자마자 드라마 같은 스토리가 머리에 짜이진 않죠. 사실 이런 분들 찜질방에서 많이 볼 수 있어요. 찜질방 다니면서 생각을 구체화하다가, 회사 근처의 선녀 보살 집에 가봤어요. 정말로 탁구공 같은 염주를 목에 세개씩 걸고 있는데 목 아프시겠다 싶더라고요. 작중 박 보살의 말투는 동네 점집에서 들은 단어에서 많이 따왔습니다. 무속에 종사하시는 분들 연구한 논문도 있어서 그것도 참고하고.

 
작전동도 인천이죠? 인천 배경이 많이 나오잖아요. 실제로 살아본 곳이구나 싶어요. 인천에 대해 말한다면?

인천 하면 ‘마계 인천’ 소리부터 들었는데, 거기 시민으로서 공감하시나요.

그럼요. 인천역에 부평 지하상가가 있는데요. 그 바닥에는 악마 소환용 마법진도 있습니다. (웃음) 인천 애들은 옛날부터 거길 던전이라고 불렀어요. 방향치다 싶은 분들은 다 거기서 길을 잃어버립니다. 가게들이 밥먹듯 바뀌거든요. 가게를 보고 길을 기억하면 절대 못 찾아요. 바닷물은 지저분하고. 매립지 쪽에는 쓰레기 냄새가 계속 올라오고. 그리고 전 인천시장이 횡령을 해서, 인천 2호선은 땅만 파놨어요. 얼마나 돈이 없는지 시청 공무원들이 월급을 하루 늦게 받은 게 신문에 나고. 아주 좋아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회사 뒷산에서는 살인사건도 나고. 다이내믹해요.

그럼 <홍등의 골목>에 대해서는요?

그 배경이 차이나타운이에요. 인천 사람들은 하인천역이라 부르는데, 인천 1호선 인천역이 가장 오래된 중심지인데요. 인천은 하나의 도심이 없어요. 부도심이 계속 바뀌면서 인천을 발전시키는 형태에요. 거기는 옛날에 부도심이었으니까 거의 폐허에 가까웠는데, 몇 년 전부터 다시 부흥을 하고 있어요. 뭐랄까, 21세기가 아닌 듯한 곳이죠. 위로는 차이나타운이 있고 아래로는 조계지 건물들이 있고요. <홍등의 골목>의 배경에서 200m만 더 가면 <세콤, 지구를 지켜라>의 배경인 인천 교육청이 나와요. 편의점 하나 가려면 비탈을 내려가야 하고. 제가 사는 곳이니까 쓴 거긴 한데, 인천이 소설의 소재로 매우 좋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판타지인 <처형> 말고는 다 인천이 배경이네요.

이사나 연작에서는 바다가 나오잖아요. 인천 바다를 보면서 깊고 맑은 바다를 생각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요. 어떤가요, 바다는 바다인가요?

바다는 바다에요. 더러워도 바다는 바다고, 이 바다로 쭉 나가면 언젠가는 맑은 바다가 나오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인천은 해 뜨는 걸 보러 가는 바다가 아니라 해 지는 걸 보러 가는 바다죠.

의미심장하네요.

네. 대학교 땐 12월 31일에 해 지는 거 보러 갔다가 집에 가고 그랬어요.

 
<처형>은 다른 것들과 분위기가 다른데요. 다른 장편에서 파생된 이야기라고 써있던데.

아뇨. 정확히는 다른 장편의 시작이 될 이야기에요. 세계관을 공유하는 장편이 있어요.

원래 <처형>의 남주인공 가문은 “하마드리스” 가에요. 작품 분위기는 동양적인데 이름이 안 어울려서 그냥 가문 이름은 다 뺐어요.

괜찮아요. 모르는 사람은 그냥 읽을 테고, 아는 사람은 얘가 걔구나 하면서 읽을 거예요.

자유게시판에 팬아트 그려준 분께도 한 마디 하시죠. 영상편지 아니라 인터뷰 편지로.

아, 정말 좋았어요. 구도가 너무 좋아서, 제가 썰리는 느낌이었어요. (웃음) 정말 감사합니다. 진짜 멋있었어요.

책에는 <처형> 하나뿐이지만, 썼던 글 전체로 보면 현실 배경의 이야기와 <처형> 같은 분위기 중 어느 쪽의 이야기가 더 많나요?

양으로만 보면 <처형>의 분위기가 제일 많아요. 데뷔하기 전에 10메가바이트 정도 썼던 소설이라서. 아직까지 글 하나 써서 10메가를 채운 게 없거든요. 그건 이북으로도 나왔어요. 이북으로 내는 건 어렵지 않았던 게, 판타지는 이북을 내려는 출판사들이 언제나 있었거든요. 종이책으로 나오기가 어려웠던 거지 이북으로는.

제목이 뭐예요?

<황금새의 전설>이라고 옛날에 쓴 게 있어요. 이십대 초반에 썼던 거라 그 세계관으로 다른 이야기를 쓰고 싶은 건 많은데, 그거 1부를 보고 있으면 제가 힘들어서. 명이 깎이는 기분이에요.

 
3. 글쓰기 외계인에 대해
 
장편 연재도 하셨고 만화 시나리오도 하셨는데, 단편집은 처음이잖아요. 뭐가 다르던가요?

제가 블로그도 정기적으로 정리도 하고 백업도 하거든요. 그거랑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쭉 정리해서 매듭을 짓는 느낌. 출간 준비하면서 기분이 굉장히 좋았어요. 데뷔 이후에 만화 쪽 일을 많이 하게 됐었는데요. 콘티 작업하면서 좋은 것도 많이 있었지만 나쁜 것도 꽤 많았거든요. 문장이 나빠진다든가. 그래서 따로 다시 공부하기도 했고요. 계속 만화 일만 들어오니까 내가 글 쓰는 인간이 많나 하는 고민도 했었고. 그런데 이제 단편집이 나오니까, 이쯤 되면 글 쓰는 사람이라는 증명은 되겠구나 싶어요. 내가 글 쓰는 사람이 맞구나 싶어서 좋아요. 그리고 이번에 작가의 말에도 쓰긴 했지만, 제가 글 쓰는 것에 지지를 많이 못 받았었어요. 그래도 저를 보고 얘는 글을 쓸 거라고 해주셨던 분이 있었어요. 이 책은 그 분께 드리는 책입니다.

글 많이 쓰셨잖아요. 마감을 성실하게 지키는 작가, 마감을 안 할 땐 다른 글을 쓰는 작가라는 이미지인데요. 글을 계속 쓸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인가요?

일단 마감을 지키지 않으면 다음 일이 안 들어옵니다. 그리고 제가 우울할 때가 있고 밝을 때가 있는데, 그래서 일 년에 삼분의 일씩은 글을 쓰지 않으면 못 견뎌요. 밝을 때는 그래요. 글을 쓰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데로 가거든요. 압력솥에서 기압을 빼는 느낌이랄까요, 글로 빼는 거죠.

그럴 때 글을 쓰면 아닐 때와 차이가 있나요?

크게 차이는 안 나요. 어차피 마감은 기간이 좀 있잖아요. 당장 내일 모레까지 글을 내놓으라고 하는 경우는 잘 없으니까. 간격을 좀 두고 완성하다 보니 밝을 때 썼던 걸 우울할 때 수정하기도 하고, 그 반대도 하고 하면서 균형을 맞추거든요. 그래도 우울할 때는 생각을 하며 쓴다면, 밝을 때는 머리에 떠올랐다 하면 바로 쓰기 시작해서 그 날 하루만에 싹 쓰고 끝내요. 우울할 때는 보다 계획을 하고 쓰죠. 같은 양의 글을 닷새 정도에 쓰게 돼요. 하지만 어느 정도 분량은 항상 나오는 게, 데뷔하기 전에는 하루에 A4 다섯 매씩 썼어요. 그러니 상태가 안 좋을 때도 3장은 나오죠.

보통 우울할 때 나오는 묘사가 있고 그러지 않나요.

둘 다 있으니까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거죠. <작전동 김여사의 우울>은 우울할 때 썼어요. 의외로. (웃음) <나는 매문가가 되고 싶었다>와 <처형>은 밝을 때 쓴 거고. <세콤, 지구를 지켜라>도 우울할 때 쓴 거예요. 이건 제일 많이 고쳤네요. 거울에 올렸던 원본은 결말이 애매했거든요. 처음에는 찢어지게 가난한한 주사가 있었습니다, 이런 수준이었어요. 고친 버전에서는 교육청에서 잠만 자는 순둥이 주사가 있는데 사실 찢어지게 가난한 거였습니다, 이렇게 가죠.

여기에 외계인은 왜 등장하는 건가요. 가난한 거랑 외계인이랑 무슨 상관이길래.

주사도 가난하고 세콤 업체 직원도 가난하잖아요. 둘은 처지도 비슷하고 생활 공간도 비슷한데 못 만나고 있죠. 둘을 만나게 하려면 초현실적인 경험을 하나 끼워야겠더라고요. 그렇다고 외계인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아니긴 한데.

네. 작중에 외계인이 종종 등장하는데, 외계인이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더라도 외계인 자체가 해결책은 아니라는 인식이 강하게 드러나요. 외계인에 대한 생각은 언제 어떻게 굳어졌는지도 궁금한데요.

계기는 따로 없어요. 하지만 외계인이 존재한다고 해도… 중간에 개와 인간의 관계로 비교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개가 보기에 인간은 신처럼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전능한 건 아니잖아요. 건프라를 만들고 고치고 꾸미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전능한 건 아니고요. 그러니까 사람이 신처럼 여기는 외계인도 전지전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도 전능하지는 않다, 그런 생각이에요.

 
글은 어떻게 쓰게 되었나요?

초등학교 때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읽고 나서요. 거기에 제로델이라는 캐릭터가 있는데, 단역이에요. 그런데 얘한테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서 쓰기 시작했어요. 나중에는 오스칼의 조카인 루루가 나오는 이야기를 조금 썼고요. 그러다 중학교에 갔는데, 컴퓨터실이 있고 아래아한글 1.2 버전을 복사해주더라고요. 그걸 들고 가서 디스켓에 추리소설을 썼어요. <레이디 디텍티브> 후기에도 썼는데, 마이크로프트가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를 썼어요. 홈즈가 데뷔하기 전에, 아직 말단 공무원이었던 20대의 마이크로프트가 자기 상사의 딸인 레이디가 짜증을 낼 때마다 하나씩 추리를 해주는 이야기였어요.
그 다음엔 엘러리 퀸을 읽었고. 또 그 무렵에 고려원에서 국내 작가의 추리소설을 내주기 시작했죠. 그걸 읽다 한국이 배경인 걸 써보자 싶어서, 형사인 아빠와 중학생인 딸이 잘린 손목을 두고 범인을 찾아서 국철 1호선을 타고 다니는 이야기를 썼었어요. 만화잡지들이 나오길래 <바람의 나라>나 <삼국지> 팬픽도 좀 썼어요. <베르사이유의 장미>도 계속 썼고. 책 한 권 분량을 처음 썼던 건 고등학교 때에요.

애정으로 시작한 글쓰기네요. 그럼, 앞으로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읽으면서 계속 생각하게 하는 글이요. 감상적이고 마음으로 느끼게 되는 글 말고, 내용이 풍부하고 레퍼런스가 많은 글이요. 덕후가 보면 좋아하고, 아닌 사람이 보면 신기하다 싶어서 찾아보게 되는 그런 글이요.

일반적인 의미에서 ‘생각하게 되는 글’과는 좀 다르네요. 공부하게 하는 글에 가까운데요.

그런가요? 찾아보는 것에서 생각이 시작되잖아요. 어차피 작가가 덕후인 이상 보편적인 독자의 보편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글은 쓸 수 없어요. 그보다는 특정 사람들에게 맞는 글을 잘 쓰겠죠. 저는 사람에게 공감하고 이입하고 하는 게 잘 안 되거든요. 생각하고 고민하는 쪽을 더 좋아해요. 그게 제 한계이면서 제 특징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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