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거울 시간의 잔상 11호 감상

2004.05.29 00:1805.29

Melchizedek ( melchizedek@naver.com )



처음이자 마지막 잡상 주머니. 가장 원론적인 문제들



첫째, 단편소설인가.


단편소설, 혹은 장르 단편 소설에 일정한 구조가 있다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다. 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 차라리 단편소설을 쓰지 않는 쪽을 택하겠다. 허나, 장편소설보다는 좀 덜하더라도 어떤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되는 이상, 어느 정도의 규제가 있는 법이다. 에드가 앨런 포우의 규칙 같은 것을 언급할 필요도 없다. 답은 언제나 가장 기본적인 것이므로.

〈단편이어야 한다.〉

앉은 자리에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짧아야 할 필요는 없다손 치더라도 한 화면에 보여지는 한 편만으로 완결성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당연한 진실을 글쓴이가 외면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첫째는 작가의 욕심 때문이고 둘째도 작가의 욕심 때문이다.

때때로 여타 소설 사이트의 단편소설란에 장편의 일부를 떼어다 올리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것은 프롤로그일 수도 있고 그저 장편 소설 중간의 어느 한 부분일 수도 있다. 작가로서는 자신이 대단히 잘 썼다고 자부할지도 모르지만 읽는 사람으로서는 생뚱맞는 일이다. 한 단락만으로도 내용이 완결된다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은 끝마무리가 미진하거나 내용의 일부가 뭉텅이로 빠져나갔다는 느낌을 버리기 어렵다. 마치 눈 하나에 코 둘의 사람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장편과 단편을 구분하지 못해서 생기는 헤프닝이다. 장편의 일부지만 일부로 두기에 아까울 정도의 단락이라면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손을 봐야 한다. 그렇다면 완전히 다른 소설을 창조해야 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단편 소설이라면 그 안에서 승부를 보자. 이건 연작소설이야. 여기 나오는 인물은 어디에서도 나온 사람인데……. 부질없다. 만약 한 편 안에서 독자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단편 소설이 아니다.

어느 한 부분의 묘사가 너무나 좋아 버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분으로 보면 좋지만 글 전체로 보았을 때 글의 통일성, 소설 분량 등을 고려해 보았을 때, 진주목걸이 사이에 낀 사파이어 같은 것이다. 쳐내야 하는 잔가지들이다.

글은 증식한다. 쓰다 보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늘어나고 그러다 보면 소설이 길어지고, 그래도 부족해서 2편, 3편을 제작하게 된다. 성공하면 대하소설이지만 실패하면 중구난방의 짜집기글이다. 작가가 글을 증식시켜서 실패한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별로 좋지 않다. 성공하더라도 초보 작가에게는 그리 권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다. 후에 쓰는 글에서 밸런스가 무너지가 십상이다.

단편 소설은 굳이 전체를 이끌어 가는 커다란 사건이나 갈등구조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가벼운 흥얼거림, 단순한 읊조림도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소설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장편 소설 마냥 기승전결을 가지고 있는 구조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완결성을 가지는가? 독자는 어디에서 흥미를 느낄 것인가. 이 글 안에서 절정의 부분은 어디인가. 글의 분량은 잘 분배되었는가. 장편도 당연하지만 단편의 경우에도 절정-글 전체에서 가장 강한 임펙트를 가져야 하는 곳-이 너무 짧거나 맥없이 끝나버린다면 좋은 글이라 할 수 없다.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작가가 아닌 편집장의 눈으로.

둘째, fantasy인가.

작가 이영도는 판타지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기에 가장 알맞기 때문에 판타지 소설을 쓴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아마추어들이 거기에 동의한다. 판타지를 쓰기 위한 판타지 소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선이 많다. 고매하고 콧대높은 아마추어 작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주제를 쓰기 위해 가장 적합하기 때문에 판타지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판타지는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라고 강조한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삼류가 될 것 마냥.
그러나 판타지를 위한 판타지도 필요하다. 마법학교가 있다면 재미있지 않을까. 선생님이 퇴마사라면 독특하지 않을까. 여성 남성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면 어떨까. 소설이 주제에 끌려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한 소재에서 출발한 통속소설이 못할 것은 또 뭐란 말인가. 장르소설―판타지 소설 일부의 뿌리는 대중소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거울은 환상문학웹진이다. 그렇다면 판타지 소설이 올라와야 하지 않을까.

판타지에서 시작해 보자. 판타지를 쓴다는 마음가짐으로 써 보는 것, 나쁘지 않다. 백일장식 단순한 글쓰기는 때로 생각지 못한 괴작을 내어놓기도 한다. 그리고 환상문학웹진에서 보는 것이 판타지 소설이어야 함은 자명하다.
그 판타지―환상문학이라는 특성은 단순한 글쓴이의 작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왜 일반 작가인 요시모토가 환상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되는가. 하루키를 어떻게 판타지 작가로도 분류할 수 있는가. 일상 안의 환상이란 화자의 단순한 현실 도피식의 주절거림이 아니라 어떤 당연한 사실에 대한 일탈, 부조리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환상문학이 함축하는 바가 크다 하더라도 울타리는 있는 법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거울의 성격은 아직 애매 모호하다. 그리고 환상문학을 어디까지로 정의하고 있는가도 아직 잘 모르겠다. 거울 거주민 대개도 환상문학을 아주 폭넓게 정의하고 있다. 환상문학의 독자라기 보다는 매니아 문화 향유층으로 보는 쪽이 더 맞을 것 같다.(내 쪽으로 말하자면 매니아도 못 된 일반인일 뿐이고.) 시간의 잔상의 작가들 또한 다르지 않다. 판타지 작가라기보다는 아마추어 소설가 집단이다.

그래서 내가 말하고 있는 부분은 작가의 고유권한이며 거울 편집장의 선택의 문제일 수도 있다. 이런 식의 주절거림은 가뜩이나 원고 잘 안 쓰는 작가들의 마음을 더욱더 얼어붙게 만드는 제한점일지도 모르겠다.(혼날까?) 그러니까 가려 듣기를.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니.

하지만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작가가 아닌 판타지 팬의 눈으로.

셋째, 재미있는가.

맨 앞으로 넣고 싶었지만 세 번째로 돌려놓은 것은 이 ‘재미’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이고 즉흥적인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은 작가가 글을 쓰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읽어볼 것을 권유한다. 글을 쓴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읽는 독자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의 저서 [유혹하는 글쓰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 말은 어느 정도 일리 있어 보인다. 작가는 말이 많은 수다쟁이 친구와 같다. 친구라서 좋지만 재미없이 쓸데없는 말만 많다면 냉담해질 수밖에 없다. 그의 수다가 재미있는가. 적어도 한 번은 읽을 사람의 눈으로 생각해 봤으면 싶다.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울의 단편 작가들은 정식 등단 작가들도 아니고, 많은 독자들이 자신의 것을 즐겨주거나 많이 사 주기를 원하는 프로들도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글을 게재할 공간을 원하는 것이고 자신의 느낌과 본성에 충실한 아마추어로서, 글쓰기를 즐기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을 향해서 재미없다, 라고 투덜거리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길가다 무심코 읽고 지나가게 된 독자로서 한 마디 하겠다.

혼자 책상 위에서 넘겨보며 킬킬대고 웃을 작정이 아니라면 글이 완성된 후에 한 번 더 살펴보아야 한다. 자조감에 빠지라는 것이 아니라, 빼야 할 부분, 재미를 느끼게 되는 부분이 어디인가를 냉철하게 살펴보라는 의미다.
작가가 아닌 독자의 눈으로.



p.s 한 가지 주지점. 비평가 VS 작가



정식 원고를 쓰는 사람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정식 원고를 쓰는 사람으로서 할 만한 말은 아니지만, 이번 호 원고는 하루만에 썼다.(글을 쓴 후에는 시일을 두고 타자의 눈으로 한 번 더 읽어봐야 한다고 말한 주제에 말이다.) 이것은 거울을 우습게 봐서도 내 글을 읽는 이들을 덜 배려해서도 아니다. 실은 이전에 11호 시간의 잔상 단편들을 하나하나 두고 감상문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감상글은 점점 너무나 편협한 쪽으로 흘러가서 결국엔 쓰고 있는 나 자신조차 도저히 읽어줄 수 없을 정도가 되어갔다.

이번 5월 원고는 처음부터 시간의 잔상의 단편들을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웹진 거울의 성격상으로 보나 나의 관심사로 보나 그것이 옳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마음이 동하여 쓰는 글과, 결심으로 시작하는 글이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무엇보다도 호평과 혹평으로 갈렸을 때, 어느 쪽이 더 우세할지는 눈을 감아도 뻔하다.

나는 그들이 나의 잣대에 맞추어 글을 써 주기를 원하는 것인가? 아니다.
이 단편이 내가 말하는 대로 고쳐진다면 나는 만족할 것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 감상문은 헛투루 쓰이는 글이고, 시간을 낭비한 것 뿐이었다. 나는 전부 지우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앞의 세 가지 원론적인 문제들이었다. 세세하게 썼던 감상문의 대부분은 저 세 가지 문제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문제가 남아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감상문들을 써 가야 할 텐데, 이런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나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내가 처음 거울에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내가 처음 거울에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망설인 이유 중에 하나가 나의 성향이 아주 뚜렷해서 객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나는 오만하기 짝이 없고 편견으로 똘똘 둘러싸인 옹고집쟁이이며, 아무리 물증이 확실해도 남들의 생각이나 결론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청개구리이다. 내 자신이 비관론자인데다 언해피엔딩의 작가인 주제에 염세주의의 글을 싫어하고, 에세이 읽기를 질색해 하는 이중잣대의 소유자이다. 이런 사람의 감상이 정식으로 올려져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졌을 때, 다른 이들이 혹여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면 어떡하지? 망설임은 잠시였고, 글쟁이로서의 욕심은 나의 양심을 손쉽게 이겼다. 게다가 내 글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독자 개개인의 문제가 아닌가. 그 파급효과까지 책임질 생각은 없는 불성실한 글쟁이인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포기했다. 하지만 나를 망설이게 하는 가장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바로 작가, 내가 2차 창작을 하게 만드는 글쓴이들이다.

인터넷 소설 사이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

소설 사이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비평을 신청하고 비평을 받는 모습들이다. 이건 꽤나 흥미로운 사실이다. 아마도 둘 다 아마추어들이라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비평받는 것을 고마워하고 비평하는 것을 커다란 독려의 일부로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실제로 ‘비평’이라는 것을 받고 싶어하는 작가는 드물다. ‘드물다’라고 말은 했지만 거의 대다수의 작가는 비평이라는 것에 면역이 거의 되어 있지 않다. 마치 우리 국민 대다수가 자신은 개혁을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보수주의자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이 독자인 동시에 작가인 여러분에게 묻겠다. 자신의 글줄에 대한 신랄한 비평을 듣고 기분이 좋았던 사람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그는 엄청난 내공수련자이거나 미친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다.
누구라도 자기 자식 남이 때리면 싫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내 손으로 때리는 것이 나은 법이다. 남에게서 들은 충고가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선은 기분이 나빠지고, 일의 성취 의욕이 떨어진다. 심하면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때로 겸손한 작가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비평을 거울삼아 더욱더 열심히…’ 그렇다. 비평가는 거울은 될 수 있을지언정, 얼굴에 묻은 오물을 직접 닦아 줄 수는 없다. 오물담당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 작가뿐이다. 게다가 대부분은 거울로 비춰보는 순간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는 것이 먼저다. 그 충격은 꽤나 크다. ‘내 얼굴에 눈이 세 개였다니. 믿을 수 없어. 거울이 이상한 거야.’
항상 비평이 옳은 것도 아니다.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를 보라.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안다손 치더라도 그들의 철학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세계의 유명 작가들 중 자신의 글에 누군가 간섭하는 걸 지독히도 싫어하는 이들도 많다. 스티븐 킹의 리처드 바크만 필명 사건, 아이작 아시모프의 결벽증적인 편집 자세 등은 장르 문학 초기, 대가들에게 쏟아지던 신랄한 비평들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잘 말해 준다. 대가들은 비평을 잘 받아서, 그들을 잘 이끌어 준 비평가들이 있어서 잘 된 것이 아니다. 그들 스스로의 능력일 뿐이다.

그렇다면 비평가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독불장군 스타일은 어떨까. 어떤 사이트의 모 작가는 자주 비평신청을 하곤 한다. 그는 비평을 받으면 이렇게 말한다. ‘실망이네요. 모모님은 내 글을 읽고 이해할 줄 알았는데. 내가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부질없다. 내가 봤을 때 그의 글은 스타일리쉬하지만 앞으로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을 것이다. 비평을 통해 자신의 글의 의도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도, 비평가에게 비평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우스운 짓이다. 독자는 오독 할 권리가 있다는 둥의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다. 용감하게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 거울을 보기 전에 닦아 내는 것이 상책이다. 자신의 얼굴을 더듬을 용기가 없는 사람은 거울로 비춰보아도 결론은 마찬가지이다. 거울을 욕하지, 자신을 돌아보지는 않는다. 작가가 자라고 성장하는 것은 비평가나 독자 덕이 아니라 작가, 그 자신 스스로의 수양 덕인 것이다. 우리―비평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가 할 수 있을 뿐이다.

비평가가 작가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냈다면, 그것은 작가 스스로의 힘이지 비평가가 이끌어낸 것은 아니다. 그래서 글쓰기는 외로운 작업이고 길고 질긴 혼자만의 투쟁이다. 비평가는 그 투쟁 중에 잠시 꼬이는 파리 같은 것이다. 귀찮지만 없으면 쉽게 잠이 들어 버리는.

어째 너무 슬픈가…

길게 이야기하고 보니, 어째 너무 슬픈가. 그렇다고 비평이 전혀 쓸데없다는 것은 아니다. 비평가란 작가들에게 적어도 촉매제와 같은 역할을 할 때도 있긴 하다. 없어도 상관없지만, 있으면 좀 더 빠른 변화를 촉발시키는.
유수와 같은 세계 역사의 흐름에서 호적수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발전과 변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한니발과 스키피오, 리스트와 쇼팽, 가깝게는 이승엽과 심정수에 이르기까지. 서로를 끊임없이 견제하고 가만있지 못하게 만드는 하나의 적이란 열 명의 친구보다 더 나은 법이다.

면역력만 강하다면 그런 비평을 만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비평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거울의 작가들은 그런 면역력이 있을까. 길게는 다섯 달 정도는 쓸 것 같은데, 언제까지나 내가 좋아하는 글에 호평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내가 항상 칭찬만 하는 것은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작품에는 아예 냉담해지기 때문일 뿐이다. 멍석만 깔아준다면 나도 얼마든지 독설가가 될 수 있다.

거울의 작가들이여, 긴장하고 깨어있어라. 이것은 선전포고다. 칼날을 벼려서 잘 겨냥할 것. 내 글을 보고 화를 낸대도 기쁘겠다. 어쨌든, 내 글은 그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니까.

건투를 기원한다. 다음 전투 때까지.

fighting!

-Melchizedek-

댓글 2
분류 제목 날짜
그림이 있는 벽 고양이의 죽음7 2004.06.25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8 - 헤임스크링라 10 2004.06.25
장르 황금드래곤문학상 기획자 - 김준혁님 인터뷰1 2004.05.29
거울 시간의 잔상 11호 감상2 2004.05.29
거울 11호 거울 단편 단평2 2004.05.29
그림이 있는 벽 1 2004.05.28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7 - 헤임스크링라 9 2004.05.28
거울 거울 10호 감상기4 2004.04.30
장르 황금드래곤 당선작 리뷰9 2004.04.30
그림이 있는 벽 2 2004.04.30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6 - 헤임스크링라 8 2004.04.30
그림이 있는 벽 한 호 쉽니다. 2004.03.27
장르 황금 드래곤 문학상 후기1 2004.03.26
장르 황드 문학상 비평단을 마치고2 2004.03.26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5 - 헤임스크링라 7 2004.03.26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4 - 헤임스크링라 6 2004.02.27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3 - 헤임스크링라 5 2004.01.30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2 - 헤임스크링라 4 2003.12.26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1 - 헤임스크링라 3 2003.11.28
게르만 신화 스노리의 서문 - 헤임스크링라 2 2003.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