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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거울 10호 감상기

2004.04.30 23:5904.30

melchizedek@naver.com
Melchizedek ( melchizedek@naver.com )



 잡상 꾸러미 하나. [스튜어트 리틀] 내 남동생은 말이지요……

 그리 영화를 즐기는 편이 아닌데도 [스튜어트 리틀]은 꽤나 즐겁게 본 기억이 있다. 이 영화는 대중적인 흥행에도 꽤 성공을 거둬서, 2002년도에 2편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2편은 생각만큼 그리 큰 재미를 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스튜어트 리틀 1]이 그 당시 그리도 내 마음에 콱! 들어버렸던 것은, 실사를 방불케 하는 놀라운 CG 스튜어트 리틀 때문도 아니요, 롱키스굿나잇 이후로 컷스로트 아일랜드, 비틀쥬스(연도순 아님. 나의 관람순)에 이르기까지 내 마음에 연타석 홈런을 날렸던 지나 데이비스 때문도 아니었다. 만약 그런 이유들 때문이었다면 스튜어트 리틀 2가 그렇게 허무하고 재미없어 보이지는 않았을 터이다.

 우선 영화 내용을 돌아보자. 리틀 씨 부부는 흔히 미국인들이 그러하듯 청교도적 봉사 정신과 전인류애적인 사명감을 가지고 고아 한 명을 입양하기로 결정한다. 그들의 귀여운 아들 조지에게 멋진 남동생을 한 명 선물할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막상 입양기관에서 그들이 데리고 온 것은 하얗고 조그마한 새앙쥐, 스튜어트. 이 수더분하고 말 잘 하는 쥐새*의 입양, 거기서부터 선량한 두 부부의 삶은 꼬이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픽션이 그러하듯 [스튜어트 리틀] 또한 하나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바로 선량한 의도가 예기치 않은 벽에 막혀서 생겨나는 헤프닝들. [스튜어트 리틀]에서 리틀씨 부부에게 생긴 문제점은 ‘입양아가 새앙쥐’라는 사실이었다. 조지는 자신과 축구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대등한 놀이상대가 되지도 못하는 남동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스노우벨은 먹이감에 지나지 않은 생쥐가 가족에 일원 ――― 혹은 주인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탐탁치 못하다. 리틀가문의 사람들 또한 그들이 선물한 자전거를 탈 수 없는 친척이 부담스럽다. 그 갈등을 풀어나가는 선량한 사람들의 모습도 꽤나 재미있지만 그 이야기는 우선 넘어가자. 이건 어디까지나 글의 도입부에 불과하니까. 언제나 그렇듯이 나의 도입부는 너무 길어지고 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는데 이상한 점을 느낀 사람은 없는가. 그렇다. ‘말하는’ 새앙쥐의 등장이다! [스튜어트 리틀]에서는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새앙쥐가 등장하며, 인간의 말을 할 줄 모르는 ――― 그러나 스튜어트와는 말이 통하는 ――― 고양이 스노우벨이 있다. 그런데도 이 사실로 스튜어트는 누구에게도 이상한 시선을 받지 않으며, FBI에서는 스컬리와 멀더를 파견하지도 않는다. 고작 그들이 나타내는 반응이라곤, ‘아아~ 아주 귀여운데~’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시선이 고아 새앙쥐 소년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뿐이다. 영화 안에서의 갈등은 스튜어트가 가진 신체적 특징으로 인한 것이지, ‘쥐가 말을 한다’라는 세계멸망의 이상징후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흔한 헐리우드식 가족 영화임에도 굉장히 독특해 보인다. 영화 안에는 상영 내내 묘한 이질감이 맴돈다. 일상적인 상황 속에 비일상이 끼어들었는데도 영화 인물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그것을 세상의 일반 법칙 가운데 아무 이견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보는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시치미를 딱 떼는 영화 속 사람들의 모습은 꽤나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잡상 꾸러미 두울. 일상 중의 비일상 혹은, 비일상 중의 일상.



 소위 판타지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이 단어를 나열해 보지 않은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이란 무엇이며 비일상이란 무엇인가. 영국의 뒷골목 어딘가에 빛나고 있을 마법의 세계며, 자동차를 타고 달리다보면 나타나는 주황빛 하늘, 혹은 시장 한복판을 걷다 보면 드러나는 옛 거리든지, 어쨌든 그 곳에도 우리가 사는 세상처럼 평범한 학교가 있고, 치열한 정치적 암투가 판을 치며, 결국 이성을 가진 존재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다. 비일상적이라지만, 그 속에는 분명 일상적인 부분이 있는 법이다. 아니, 있어야만 하는 법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허구란 얼마나 진짜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느냐의 문제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개념이다. 결국 픽션 안에 얼마나 남들이 동의할 수 있을 만한 일상성을 집어 넣느냐가 판타지 소설의, 더 나아가서는 일반 소설에 이르기까지의 고민이 아닐까 싶다. 특히 판타지의 경우 그것은 더욱 치열해야 할 고민이다. 허황된 이야기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독자와 대중들에게 그럴 듯 하게 보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판타지 작가가 잊지 않아야 할 중점사항이다. 판타지 소설 사이트에서 많은 아마추어 비평가 ――― 혹은 독자 ――― 들이 초점을 맞추는 것도 그러한 문제이다. ‘여기서 주인공이 왜 이렇게 행동해요?’ ‘이 전쟁의 규모로 봤을 때 마법으로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는……’ ‘에이~ 이러이러한 것은 말도 안 돼.’ …… 표현방식은 다를지라도 그들은 한결같이 작가가 만든 이세계(異世界)에 대해 납득할 만한 해답을 제시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작가들은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는’ 주인공이 슬퍼하도록 ――― 즉, 일반적인 반응을 보이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슬퍼하지 않는다면, 그에 알맞는 설명을 부가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가 어렸을 때의 상처로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독자들이 용납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반응, 그것은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여기, 거울 10호에 그런 고민들과는 동떨어진 소설 두 편이 실렸다.

 해외단편란의 [정원에서](조 왈톤. jay 번역) 와 시간의 잔상의 새 멤버 cancoffee1님의 [도서관의 악마].

 매우 짧은 글줄 안에서, 비일상적 상황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비일상적 태도는 눈에 부실 정도의 활약상을 보여준다. ‘정원에서’ 뜬금없이 나타난 요정이란 존재는 아이들에게 흥미로운 곤충 수집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며, ‘도서관’에서 나타난 이종족 악마는 이슈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너도 소원 한 번 빌어보지 그래?”라며 마치 점집 한 번 찾아가보라는 식의 여상스런 반응은 있지만.) 다른 작가들이 슬슬 회피하며 돌아가는 문제를 이 소설들은 정면으로 돌파한다. ‘봐라, 이 곳에서는 이게 진실이야?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라고.

 그래서 그 느낌은 꽤나 강렬하다.
 그리고 그것이 단편문학만이 줄 수 있는 또다른 재미임을 알겠다. 단순하고 소소한 소재를 이용한 일상에 대한 유쾌한 반란, 짧은 시간 안에 시선을 화악 끌어당기는 상쾌한 박하사탕의 맛이 이 소설들에는 있다.



 잡상 꾸러미 셋. 미니픽션



 〔잡상 중에 잡담〕사실, 때때로, 소설 ――― 어떤 이의 창조물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매우 정나미 떨어지고, 의미 없어 보이는 경우가 있다. 지금처럼 작품보다 긴 감상글을 남기게 될 때가 한 예인데, 글을 써 가는 현재에도 내가 오히려 작품의 감동을 깎아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가 문득문득 서린다. 그래도 하기로 한 바, 하고 싶은 이야기는 끝내야겠다. 다음 번에는 이보다 훨씬 짧게 써야겠다고, 언제나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면서.

 나는 최근 미니픽션이라는 장르에 흥미가 생겼다.
 미니픽션은 2000단어 미만의, 원고지 약 70매 이하 분량의 단편소설을 말한다.(물론 분량적인 면만으로 미니픽션을 정의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미니픽션의 대표작 아우구스토 몬테로소의 [공룡]은 ‘눈을 떠보니 공룡은 아직도 거기 있었다.’라는 이 여섯 개의 어절이 전부이다. 그러면서도 이 여섯 개 어절이 가지고 있는 강렬함은 문학적 텍스트로나 문학 외적 텍스트로나 분량 긴 소설들에 뒤지지 않는다. 눈을 떠보니 ‘공룡’이 있었다니, 이미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판타지․소설적인 면을 가지고 있으며, ‘아직도’라는 어감을 통해서 이 짧은 문장 안에 어떤 거대한 음모 내지는 사건이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이 한 문장만 가지고도 읽는 이에 따라 스릴러로도 SF로도, 혹은 추리 소설로도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혹은 문학 외적 텍스트로서 ‘공룡’이 의미하는 바를 해석할 수 있다면 이 작품은 훌륭한 풍자문학으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적 혹은 문학 외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텍스트의 다양성과 애매성. 이러한 특징을 가진 미니픽션이야말로 빠른 변화와 다채로움을 요구하는 21세기 사회에 가장 어울리는 텍스트가 아닐까 싶다.

 전통적인 단편이 원고지 70매내지 150매사이인 것을 생각해 봤을 때, 70매가 되지 않은 짧은 분량의 미니픽션은 일반 서적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분야인지도 모른다. 허나 인터넷 세대에게는 그런 의문이 무색할 정도로 일반화되어 있기도 하다. 넷상에서 공개되는 대부분의 단편 소설들은 70매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각광받는 사이버 문학의 단편 대부분은 미니픽션의 형식을 띄고 있다. 미니픽션과 사이버 문학이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많은 부분에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즉, 분량이 길어 커서를 내리며 읽는 소설과 달리 한 눈에 텍스트가 전부 들어오며 문학성 또한 기존의 것들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미니픽션이라면, 사이버 소설로서도 훌륭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독자의 적극적 참여(능동적 독서)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미니픽션과 사이버 문학은 같으며, 다원적 문학으로 발전하지 못한 사이버 문학과 독자와 작가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미니픽션의 단점 등이 잘 보완될 수 있다면 서로 ‘상생하는’ 창조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번 해외 단편으로 소개된 [정원에서]도 원고지 10매가 채 되지 않는(직접 세어 본 것은 아니지만) 짧은 플래쉬픽션(Flash Fiction)으로, 미니픽션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정원에서]는 제목이 의미하는 것처럼 어느 정원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을 순간적인 이미지로 캐치해 낸, 에피그람적 성격이 짙은 글이다. 사건은 단순하다. 소설에는 우연히 발견한 요정이라는 괴상한 생명체를 가지고 ‘사이좋게 잘’ 놀고 있는 두 명의 아이와, 그것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두 명의 어머니가 있을 뿐이다. 소설상 필수적인 갈등조차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레네 자하바가 말했던 ‘급하게 커피를 마시거나 공중전화에서 기본통화를 할 때 할 수 있을만한’ 이야기라는 정의에도 만족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만약, ‘요정’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말이다.

 이 텍스트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요정이라는 환상적인 존재의 등장 때문이다.
 잠자리, 혹은 여느 곤충이라도 들어설 수 있을 그 자리에 요정이라는 독특한 의미를 지닌 존재를 내려놓음으로서 조 왈톤의 [정원에서]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는다. 판타지라는 장르적 속성으로서 뿐 아니라, 읽는 이의 위치에 따라 아이들의 잔인성, 혹은 사건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이 지닌 무지, 생명체를 소중히 여겨야 겠다는 경각심 등, 여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풍자소설이기도 하다. 단 하나의 발상 전환으로, 2000단어 내에서 이 정도의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 놀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하다. 이래서 단편을 읽는 것은 즐겁다. 장편에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상식의 비틀음, 생각의 변화. 이런 것들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사소한 기쁨은 의외로 크다.

 (전체적인 개괄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요정’이라는 존재가 캐티 마이가 사는 동네에서 흔한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해석 또한 재미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치 현실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들이 사는 동네가 모기처럼 요정이 흔한 곳이라면? 어쩌면 부인네들은 이야기를 소담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모기채를 휘두를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요정들은 찍! 파란 피를 흘리며 찌그러지고……. 아아, 생각이 진행되어 갈수록 호러가 되어 가고 있다;;
 혹은 캐티 마이의 동네에서 흔한 것이 아니라면? 아이들이 새로운 생명체에게 접근해 가는 방식은 잔인할 정도로 적나라하다. 때로는 자신 스스로까지 학대 ――― 독버섯을 먹는다던가 하는 식으로 ――― 하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요정’의 발견이 전세계적으로 획기적이라든가 하는 사실은 중요치 않은 것이다. 그것이 흔한 것이든 진귀한 것이든 마찬가지의 잔인한 본성을 드러낼 뿐이다.)

 잔잔한 호숫가에 던져진 한 개의 조약돌. 그것이 몰고 온 파문은 고요하지만 넓고 깊다. ‘요정’이라는 조약돌은 어느 호수에나 마찬가지인 파문만을 만들어 내고 있지만 그 조약돌이 가지고 온 세상변화의 흐름은 여상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스러운 일을 전혀 이상스럽지 않게 서술해서 생기는 혼란과 재미. 작지만 깊은 재미다.



 잡상 꾸러미 넷. cancoffe1.



 우선 cancoffee1님의 디겐 단편공모전에 차석이 되신 것을 축하드리며 네 번째 잡상 꾸러미를 푸르고자 한다. 그리고 내가 그 곳에서 cancoffee1님의 다른 단편들마저 남김없이 읽었음을 살짜기 고백하면서.

 내 감상 스타일 자체가 내재적 관점보다는 외재적 관점에 가깝고 그 중에서도 한 사람의 작가가 좋아지면 그의 다른 작품들까지 살펴보게 되는 일반 독자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변명 중;) 그리고 거울의 감상을 맡은 이상 거울 내에서 이야기 해 보고 싶었지만, 새로운 멤버이신 cancoffee1님의 입성을 축하하는 의미에서도 다양한 정보수집이 필요했다.(...라고 변명하는 것뿐이다. 실은 읽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던 중에 cancoffee1님의 글에서 몇 가지 재미있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도서관의 악마]는 오히려 cancoffee1님의 특성을 그리 많이 보여주는 소설이 아니면서 대표적으로 작가의 성향을 나타내고 있는 글이기도 하다. 거울에 첫 번째 실린 글을 이것으로 선택한 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다. 어쨌든, 그런 것은 작가가 아닌 이상 알 수 없으니 넘어가기로 하고.


 cancoffee1님은 소설가라기 보다는 입담가나 재담가에 가깝다. 일인칭 시점이 주류인데, 화자의 이야기는 곧잘 삼천포로 빠지기를 잘한다.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닌데도 이 분의 글은 잘 읽혔다. 아마도 짧은 분량, 발상의 신선한 전환 등이 한 몫하지 않았는가 싶다. [도서관의 악마]는 다른 작에 비해 삼천포 비율은 적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 한 작만 가지고 cancofee1님의 글을 모두 읽었다고 보기는 어렵겠다.

 하지만 가장 일상적인 부분에서 가장 비일상적인 요소를 뽑아낸다는 점에서 [도서관의 악마]는 작가의 특질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도서관’과 ‘악마’. 이 비정상적인 조합의 단어는 그야말로 비뚤어진 바닥 위에 놓여진 탁자처럼 결과 없고 규칙  없이 재미있다.

 결과 없다는 말처럼 이 이야기도 앞서 말한 [정원에서]처럼 큰 줄기의 갈등을 찾아보기 힘들다. 도서관에 나타난, 소원을 들어준다는 악마의 등장은 [정원에서]보다는 좀 더 파급력 있어 보이는 조약돌이긴 하지만, 그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더 시큰둥할 정도다. 적어도 내 고등학교 시절에 교내에서 김밥아줌마가 장사를 시작했을 때보다 더 고요하니 말이다.(점심시간이고 쉬는 시간이고 간에 항상 북적북적 거렸더란다. 교내 매점도 있었건만, 그 특이성 면에서 히트를 쳤던 것 같다. 그 아줌마는 결국 주임선생님께 쫓겨나고 말았었지만.) *강력한 스포일러 주의!*주인공은 소원을 들어주는 악마와 대면하기는 하지만 결국 아무 것도 빌지 않는다.*스포일러 끝* 갈등의 완급조절이고 뭐고도 없다. 호숫가에 떨어진 조약돌은 파문조차 던지지 못하고 가라앉는다. 이것은 여타의 작품이라고 다르지 않는다.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동은 아무 일 없이 가라앉고[세상의 중심] 감정을 가진 인공지능 복구 실험은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예이츠] 이야기의 결말 자체가 처음과 같을 수밖에 없는 [페르마의 부탁]같은 작품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 재밌다. 핵폭탄급 조약돌이 아무런 위력도 발휘하지 않는다는 그 독특한 상황 설정이 독자의 눈길을 끌고 배꼽을 잡게 만드는 게다. 절대적인 지옥권세를 가진 악마 앞에서 라면 부는 것을 걱정하고[페르마의 부탁] 과학적인 학구열이나 명예욕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이 매진 영화표에만 정신을 팔지를 않나[예이츠], 모든 소동의 근원지이면서도 끊임없이 잡생각뿐인 [세상의 중심]의 주인공의 모습 같은 것은, 깊이 본다면 세상의 풍자로도 읽어 낼 수도 있다.

 (사족이지만 내가 읽은 여섯 개의 작품 중 다섯 개에 ‘악마’가 등장한다. 주동으로든 엑스트라로든. cancoffee1님은 ‘악마’라는 조약돌을 꽤나 좋아하는 듯 싶다. 하긴 등장 횟수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기는 한다.)





 수많은 작가가 끊임없이 글을 토해내는 인터넷의 세상에서 독특함이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특질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나쁘게 말하면 맹숭맹숭하다, 혹은 힘이 딸린다 라고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미니픽션의 특성, 사이버 문학으로서의 강점, 자신만의 개성과 창의성을 가진 보기 드문 단편작가라는 점 등에서 나는 cancoffee1님께 후한 점수를 드리고 싶다. 무엇보다 재미있다. 벌써부터 다음호가 보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되는 작가의 거울 입성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앞으로 끊임없이 발전이 있으시기를 기원드린다.



 잡담 꾸러미 다섯. {으뜸 잡담} 마치면서……



 너무 두서없고 여기저기 뻣대 놓은 감이 없지 않아 송구스러운 마음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래서 '잡상 꾸러미'가 아니겠는가. 저런 식의 소제목을 달아 붙이며 읽는 이들에게 양해를 부탁한다. 앞으로도 몇 달간은 이런 글들을 보아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웃음)

 거울 감상글 부탁을 너무 덥썩 받아먹은 것이 아닌가 싶은 우려가 생긴다. 내 짧은(?) 글이 누군가에게 폐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비판, 비난, 비방 환영. 그러나 칭찬은 더더욱 환영.

   ……;;;

――― Melchizedek ―――






댓글 4
  • No Profile
    Jay 04.05.02 10:10 댓글 수정 삭제
    거울 감상기 기획, 멋진 아이디어입니다! 앞으로도 계속되면 좋겠네요. 게다가 '정원에서'를 다루어 주셔서 대략 기쁩니다. 히히.
  • No Profile
    airygale 04.05.02 14:38 댓글 수정 삭제
    나이스~ 좋은 내용입니다.
  • No Profile
    airygale 04.05.02 15:54 댓글 수정 삭제
    조만간 편지 띄울게요~ 요샌 개인적인 시간이 별로 없어서;
  • No Profile
    yunn 04.05.03 13:47 댓글 수정 삭제
    저도 동감.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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