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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거울 17호 단편 단평

2004.11.26 21:3911.26

이리스 (earth_sea@hanmail.net)



0. 들어가며

  글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좋은 새 글을 많이 찾아내는 것처럼 기쁜 일도 드물 것이다. 매번 풍성한 글에 기쁨이 먼저 오고, 다음으로 짧은 소견을 풀어 단평이랍시고 올려야 한다는 부담이 생긴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독자란의 단편까지도 평을 올리겠다고 했던 것이, 어느 사이 표제글에 대한 이야기조차 제대로 풀어놓지 못하게 되어 송구한 마음 뿐이다. 매번 작가분께 신세를 지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부디 알아주십사 바라며 글을 시작한다.

1. 50년 전의 연인 - 추선비

  뱀파이어의 본질이, 성적인 공상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매혹적인 무엇인가라고 한다면, 추선비님은 단언하건데 아마추어 중에 뱀파이어의 글을 가장 잘 소화해 낼 수 있는 분 중의 하나이실 것이다.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추선비님의 글을 읽어보면 볼 수록, 이야기의 스토리와는 별개로 글에 함뿍 배어있는 그런 매력에 사로잡히게 되곤 했다. '엘루네드' 라는 블러디 퀸은, 그 존재만으로도 압도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런 중에, 어쩌면 에피소드의 가장 초기에 가까울 지도 모르는 이 글을 거울에서 보게 되어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초기작으로 짐작하는 것은 이 사건이 '귀가'보다 먼저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 아니다. 귀가에서 이 사건에 관해서 짧게 언급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글의 창작 순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게다. 그러나 여가 이 글을 이 시리즈의 초기작으로 짐작하게 되는 것은, 엘루네드라는 캐릭터의 이미지 때문이다. 이 글에서의 엘루네드도 분명 매우 매력적이지만, 다른 글에서 보았던 압도할만한 매력보다는 조금은 서툴고 어색해하는 젊은 여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귀가에서 보았던 엘루네드가 다른 일족들을 압도하듯 꾸짖는 것이나,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갖고 있던 카리스마는 이 글에서는 그렇게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어째서인지 이 뱀파이어 시리즈에서는, 모두다 엘루네드가 아닌 다른 이의 시점으로 글이 쓰여지고 있다. 타인의 눈으로 바라본 엘루네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고, 엘루네드가 많이 등장하건 적게 등장하건 간에 그는 압도적인 주인공이다. 어쩌면 이 글에서 엘루네드가 가지고 있는 조금 감정적이고 서툰 듯한 아가씨의 이미지는 바로 그런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리온이라는 이가 바라보는 엘루네드, 기억을 잃은 그가 보는 이미지란, 그가 투영하는 이상형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눈물조차 흘리지 않을 것 같은 엘루네드가, 한 사람을 미칠 듯이 갈구하고,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자신이 부여한 그 시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에 절망하는 부분에서 여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럴 수가 있나. 그 블러디 퀸이, 한 사람으로 이렇게 흔들리다니. 그런 시점에서 문득 제목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50년 전의 연인. 50년 전에 무슨 사건이 일어났었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둘은 연인이었고, 뱀파이어 순혈의 엘루네드는 그에게 영원한 시간을 부여해 버린다. 영원히 그를 소유하기 위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랬다면 리온이 혼자 여행하고 있을 이유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쩌면 불가피한 사건으로 헤어졌을지도 모른다. 엘루네드의 입으로 자신이 리온을 오랫동안 찾아 헤매어서, 뱀파이어인 그와 함께 살기를 원했다고 하니 말이다.

  이 글은 이미지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글에 가깝다. 사건은 한 뱀파이어가 과거에 그의 연인이었던 여자를 만나고,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다시 혼자가 된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 글에 매력을 부여하는 것은 엘루네드라는 캐릭터의 매력이다. 아쉽게도 화자인 리온이 피를 마실 수 없는 뱀파이어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이 글에서 추선비님의 뱀파이어 시리즈에서 느껴졌던 관능미는 다소 부족하다. 사랑스럽다고, 아름답다고, 감동적이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면서도, 그 때문인지 오히려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느낌은 감소해 버렸다고 할까. 50년 동안 금제를 지켜온 리온이었으니 그 피의 유혹이 가볍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목숨을 담보로 한 거래의 결과라면 조금 더 처절하게 몰아붙이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싶다.    

2. 현대 마법사- 달콤한 것 - 미로냥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마법사라는 판타지적인 것을 끌고 들어온 이 글은, 20대 특유의 감수성이 잘 살아난 수작이었다. 나라는 화자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되고 있으면서도 전적으로 나에게 몰입하고 있지는 않아서, 나 '유선'이 오히려 관찰자에 가깝게 느껴진다. 한 발짝 떨어져서 자신이 사랑한, 그리고 이제는 초콜릿을 먹고 사라져 버린 희원 누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으면, 어느새 이 이야기가 한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에 대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책에 쓰여진 담담한 설명을 듣고 있는 느낌으로 바뀔 정도다.

  독특한 개성의 희원은, 어쩌면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바로 20대의 한 청년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알지만,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해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누군가 말이다. 그것이 마법사의 영창과 공식이어야 하는가. 그가 진절머리가 난다며 떠난 것은 마법사의 공식이 아니라 세상의 규정이고 세상의 소소한 작은 규칙들일지 모른다. 이래야 한다는 당위, 이것이 옳은 길이라고 하는 선대들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다른 길로 가 보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의 시도란 항상 있어왔던 일이 아닌가. 4년제 대학을 나오고, 열심히 취업 준비를 하고, 몇 살 이전에 결혼을 하고 언제 은퇴를 하게 될 거라는 잘 짜여진 정규 코스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을 택하는 젊은이들은, 외부에서 보기엔 거북이가 되는 일처럼 생뚱맞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더라도, 본인이 어떻게 느낄지는 모르는 일이 아닌가.

  희원이 택한 것은 감탄하는 삶이었다. 정해진 규칙이 너무나 확고해서, 딱 하나 정해져 있지 않은 법칙에 몸을 맡긴 희원은 아마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누구도 초콜릿을 먹고 여태 있는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곧 마법사로서의 죽음, 어쩌면 생명 전체의 죽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러나 희원은 그것을 용기라 칭한다. 미래를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가고 싶지 않다고.

  희원은 분명 살기를 바랐다. 유일하게 정해지지 않은 법칙에 생명을 걸면서도, 희원은 자신이 살아남아 최선의 결과를 얻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결말은 최선은 아니었다. 희원은 후회했을까. 틀리는 것은 법칙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이기 때문에, 그 시도는 항상 실패여야만 했던 것일까. 그러나 나도 어느새 글의 종반에서 중얼거리게 되었다. 만족한다고 말해서 다행이야.
  
3. 이 뭍 - 미로냥

  현대적인 글에 이어서 곧장 전통적인 글이다. 전혀 다른 두 글을 한 달에 모두 볼 수 있어 무엇보다 반가웠다. 전호-16호에 올라왔던 글도 세련되고 멋진 글이었지만, 이번 호의 두 글도 전혀 다르면서 독특한 개성이 있다. 아직 글투가 확실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인데, 개인적으로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짧은 분량일 수밖에 없는 단편에서 비슷한 느낌과 비슷한 플롯을 고집한다는 건 그 부분에 심오한 결과를 낳게 할 수도 있지만 자가당착에 빠질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분위기를 능숙하게 써 나가시는 분이니만큼 이번 글 역시도 그런 장점이 돋보였다. 노래하는 듯한 음율을 글에 섞어내는 솜씨는 상당한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노래 풍의 문장을 만들어 내실 수 있는 능력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매끄러운 문장이나 거기 잘 어울리는 분위기에 비해 글의 스토리는 다소 빈약하다. 첫 사내에게 버림받아 섬으로 흘러들어온 여자가 다시 그 사내를 찾아 떠나면서도 차마 그 사내를 진정으로 증오하지는 못하는, 전통적인 '한'의 정서는 분명 이런 글의 분위기에 잘 어울리기는 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너무 새로운 것이 부족하지 않은가. 우리네 민초들의 이야기라고 하기에도 너무 자주 다루어진 부분이 아니었던가. 유일하게 환상성이 개입된 부분은 망부석이 사라져 버린 것인데, 그 사건 역시도 글 전체에서 보면 그리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사공이 뭍으로 떠난 여인을 생각하면서 눈시울을 적시고 돌아오는 장면 역시도, 어디선가 본 듯한 식상한 장면으로 여겨질 수 있음을 생각해 주시길 바란다.

  게다가 이 글의 전반에서 사용되고 있는 사투리의 부분이 걸린다. 여는 다른 지방의 사투리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사투리의 특성 중의 하나가 리듬이다. 전라도 사투리건 경상도 사투리건 그들 특유의 강세와 높낮이를 통해서 리듬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글에서는,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려는 노력은 돋보이지만 그 사투리 속의 리듬은 느껴지지 않는다. 문자로 쓰여졌기 때문이 아니다. 읽다 보면 어느새 입에 붙어드는 리듬감이 대화 속에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사투리를 가장 적절히 고증하는 방법은 그 현장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작가분은 사투리 사용자가 아니신 것 같은데, 가능하면 음성 언어로 사투리를 많이 접해 보셨으면 한다.

4. 웰컴 미스터 카리스마/ 가릉이가 가릉가릉 - 무한슬픔

  장르문학은, 그 자체로 정형성을 어느 정도 담보하고 있다. 로맨스물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두 인물이 사랑에 빠지고 마침내 결실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뻔하고 지루하다고 느끼거나, 여성의 콤플렉스를 만들어내는 부정적인 글이라고 인식할지도 모른다. 판타지물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글 속에 등장하는 판타지적인 존재- 그것이 드래곤과 같은 서양적인 것이든 혹은 도깨비와 같은 동양적인 것이든 간에 에 대해서 있을 수 없는 허무맹랑한 것이 어째서 글에서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의아해 할 것이다. 정형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들에게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장르의 정형성은 독자들에게 글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공포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리라고 생각한다. (여가 공포 소설에 대해서 식견이 넓지 않음은 이미 몇 차례 양해를 구한 바가 있다.) 예상할 수 있는 진행, 예상할 수 있는 소재가 공포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무언가인지도 모른다. 몇 년 전에 개봉했던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영화 '라스트 액션 히어로'를 생각해 본다. 액션물의 정형성을 전면적으로 희화화 시켰던 그 영화는 분명 새로운 면을 가지고 있었으나 흥행에서는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 영화를 보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이미, 그 영화에서 비웃고 있는 액션 영화의 정형성을 기대하여 영화관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을 집요하게 비웃고 있으니 영화관 안에선 웃을지언정 밖으로 나가 다른 액션 영화 팬에게 권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문득 여는 이런 생각을 한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감독이 바로 미스터 카리스마다' 라는 서술이, 꼭 이 글에 필요했을까? 글을 읽는 독자들은 이미 영화안에서 카리스마가 등장하지 않고, 사람들이 미쳐 밖으로 나와 살인자로 돌변하는 장면에서 섬뜩함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마지막에 감독의 독백과 비웃음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다른 추론을 할 수 조차 없게 만들고 있다. 영화를 기다려 온 기간의 서술이 비교적 자세한 데 비해 후반부의 서술이 급작스러운 것도 아쉽다.

  무한 슬픔님의 다른 작품 '가릉이가 가릉가릉'은 공포물은 아니다.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짧은 에피소드이고, 조금 상상을 도입해서 섬뜩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서는 웃음이 배어나오게 하는 가벼운 소품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도 여는 웰컴 미스터 카리스마에서와 같은 아쉬움을 느꼈다. 한 발짝을 더 나와야만 작품이 성립하는데, 어째서 평범한 전형성에서 머무르고 있는 걸까 하는 아쉬움이다. 만약 '가릉이가 가릉가릉'에서 여 주인공이 실제로 농담을 한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한 것이었다면 어땠을까. (여는 여전히 이 의심을 걷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일상의 소소한 러브 스토리가 미스터리로 바뀌는 순간의 섬뜩함을 다룬다면, 이 글은 또 다른 매력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장르의 정형성에 기대고 평이한 상상에 기대면 쉽게 읽혀지는 글은 만들 수 있다. 장르적 정서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그 글에 반가움과 안도감을 느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년 숱하게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장편 판타지들과 사람들이 칭찬하는 수작들이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골수 판타지 독자임을 자부하는 수많은 중고등학생들이 그 많은 책들을 읽으면서도 금세 그 책들을 잊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장르적 정형성에 기대어 온 작품들이 갖는 스스로의 한계다.

6. 판타스틱 조미료 - 정대영

  판타스틱 증후군의 두 번째 이야기인 이 글은 여고생 두 명의 우정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전작에서도 느꼈지만 작가분이 남자라는 것이 종종 잊혀질 정도로 작가는 여성들의 심리에 대해서 비교적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여고생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의 특징이 무척 생생하게 드러나 있어서, 솔직히 여는 무척 감동했다. 남자와 여자가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이라는 것을 체념처럼 생각하고 있는 여로서는 이런 글이 무척 반가운 것이다.

  이 글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다. 화자인 '나'는 그렇다 치고, 나에게 특별한 추억을 안겨준 친구조차도 '우산'이라는 별명으로 지칭된다. 이러한 단순화는 이름을 이용해서 개성을 부여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인물에게 더욱 개성을 부여해야 하는 숙제를 부과하게 된다. 그리고 이 글은 그런 점에서는 성공적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생생한 '여고생'들 중에서 두 사람의 개성은 분명히 다가오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재수없다고 말할 정도의 쌀쌀한 아역출신 '우산'이 '나'보다 더욱 뚜렷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마 '나'는 화자로서 자신의 심리를 모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심리를 더욱 가르쳐 줄수록 독자들이 그 인물에 대해서 개성적인 무언가는 덜 느끼게 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지만, 대부분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피상적으로 이어지던 인간관계가 서로의 비밀을 나누면서 완전히 종료된다. 그것을 '나'는 특별한 추억으로 인식한다.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는 것은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단순히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았다. 서로를 우산으로 객체화 시키더라도 둘은 충분히 다른 누구와도 구별되는 교류를 하고 있었을 뿐이고, 그래서 비밀 이야기에서 나누는 내용 자체가 어떠한 것이든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우산이 들려준 이야기는, 세상에 대한 적대감의 표현이다. 자신이 해 온 일에 대해서 가차없이 비판을 날리고, 속물적인 부모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단언하는 우산이 세상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없다. 그런 소녀가 매일 아침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서 특정 인물에게 저주를 내리는 장면을 상상해보면, 안쓰러워지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인물이 혹시 자신이 저주를 내린 사람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런 호의는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여자'아이'다. 솔직하게 마음을 열어 표현하지는 못해도 마지막 순간이니까 특별한 기억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여자 아이인 우산의 모습에, 어쩌면 평범하지 않을 이 캐릭터가 전작 '판타스틱 증후군'에서 다뤄졌던 주인공 '나'만큼이나 보통의 우리들을 닮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런 글에서, 여는 왜 아쉬움을 느끼는 것일까. 분명 이 글 한 편을 읽고 여고 시절을 떠올리기도 하고, 아아 이런 아이들이 있었지 하고 웃음을 머금게도 되는데, 이 글을 읽고 나서는 이렇게 아쉬운지. 그건 아마 전작을 보고 느꼈던 충격이 이 글에서는 그리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듯하다. 살아가는 동안에 만나게 되는 잠깐의 에피소드, 어쩌면 너무나 일상적일 모습들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 '판타스틱 시리즈'에서 작가가 의도하는 것이라면 이 의도는 성공했다. 하지만 일상적인 것을 담아내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소설은 고유한, 번득이는 무엇인가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 소설에서만 보이는 특이한 시선, 혹은 사람들을 선뜩하게 가슴 쓸어내리게 하는 인생에 대한 통찰이 아쉽다.

  이러한 것은 어쩌면 정대영 님의 글에 대해서 여가 많은 욕심을 갖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작가가 더욱 나은 글을 쓸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욕심내고 채찍질하게 되는 것인지도. 그러므로 여는 작가의 팬으로서, 다음 글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씀드린다.

7. 물속의 종  갈원경

  판타스틱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연작 단편을 표방하고 있는 글이다. 고풍스러운 문장으로 동양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에서, 아홉 개의 붓을 모으는 이야기?라고 추측된다. 그리고 이 글은 그 시리즈의 두 번째 에피소드이다.

  이 글을 읽으며 여는 '충사'를 떠올렸다. 과거의 어떠한 시점을 연상시키게 하는 설정이지만 완전히 과거만은 아닌 세계의 이야기라서 일까. 아니면 '충사'가 그러하듯이 어쩌면 잔혹하고 격동적일 이야기들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서술하는 부분 때문일까. 혹은 그 둘 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충사'의 매력에 비하면 확실히 이 글은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여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세계에 대한 현실성이 아닐까 한다. 하나의 에피소드에서 나오는 세계의 설정이 그렇게 많지 않더라도 어느새 세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매력. 담담하게 이야기를 끌어 나가면서도 읽는 이의 감정을 저릿하게 만드는 절절함 말이다.

  몇 개의 물건을 모아야 한다는 당위성도 새롭지 않다. '반지군주'의 여러 반지들을 떠올린 것은 여 뿐이었을까? 종족마다 몇 개씩의 반지를 받았고 그 모든 것 위에 절대반지가 있다는 설정처럼, 이 글의 세 인간 종족은 각각 세 개씩 붓을 가진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아홉 개를 모아야 한다는 당위는 90년대의 한국 판타지 중 하나인 '용의 신전'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여러 가지의 '이미 본 듯한' 설정을 가지고 글을 쓸 때에는, 마땅히 그러한 비슷한 점에도 불구하고 돋보이는 개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두 에피소드를 읽은 느낌은, 어쩌면 강렬할 수도 있는 이 이야기가, 개성면에서는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특히 이 두 에피소드들은 발단, 전개, 결말까지도 상당히 닮아 있어서, 어느 것이 어떤 붓으로 다루어지든지 별로 상관이 없겠다는 생각까지 들게 하는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였던 이끼의 숲에서 나온 것이 종이고, 두 번째의 에피소드에서 나온 것이 피리라고 하더라도 별반 달라질 것은 없었으리라는, 아니 더 나아가 이 두 이야기가 다른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회의까지 들게 한다.

  이 두 글에서는 계속 반복해서 '삼인은 모두 같다'고 이야기한다. 비인이 차별 받고 있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여행을 계속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정작 비인이 차별 받는 이야기는 둘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들이 외치는 구호가 공허하게 느껴지게 만들어 버린다. 더 나아가 세 인물, '탄'과 '갈'과 '아리'는 고유한 개성이 그렇게 잡혀 있지 않은 듯 하다. 모든 것을 갈에 맞추고 있는 듯한 탄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좋은 동반자'로서의 개성 외에는 없어 보이는 것이다.

  조금 더 이야기를 읽어보면 이 글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여는 이번에는 이런 정도로 이야기를 맺겠다. 조금 더 내실 있는 글이 되기를 기대한다.

8. 이제 또 결 오리라/ Sweat dream 명비

  꿈과 환상, 몽환과 실체가 뒤섞이는 두 개의 글이었다. 문장으로는 전자 쪽이 조금 더 담담하고 후자가 보다 감정적이고 역동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글은 상당히 닮았다. 동일한 작가에게 쓰여진 글이라서일까. 그러나 '미로냥'님의 글이나 '무한슬픔'님의 글처럼 두 개의 글이 게시되어도 각각의 글의 개성이 뚜렷한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같은 분이 쓰셨음에도 '현대 마법사'와 '이 뭍'을 다른 단락을 만들어 이야기한 것은 두 글을 한데 아울러 버리기에는 아쉬움이 컸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 두 개의 글은 모두 '꿈'이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길을 걸어가던 주인공이 주은 것이 친구였다가, 고양이였다가. 고양이를 친구인양 다정하게 이야기했다가, 또 쓰레기통에 버렸다거나 하는 이질적인 서술이 특별한 설명 없이 당연하게 휘몰아쳐 지나가기 때문에, 이전에 묘사되었던 부분이 뒷부분에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을 정도다. 하나하나 곱씹어 읽어내려가면 문장 문장이 모두 절절하고 날카롭지만, 그런 것들이 가득한 글 전체를 읽어 내려가는 것이 독자에게는 버겁다. 날선 문장의 '추선비'님의 글에서도 종종 만나게 되는 당혹감이지만, 추선비 님의 글에서는 보다 스토리가 선명하다고 할까.

  작가분의 건필을 빌며 후작을 기대한다.

9. 이상한 무도회 - 은림

  달콤한 것을 먹기 좋아하는 '닐라'와 확실한 성격의 '민트'가 선박왕 크루의 신부를 뽑는 파티에 초대 받는다. 닐라는 처음엔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그 초대에 응하지만, 어느새 두 사람은 온 집안과 마을의 기대를 받아 배에 오르게 된다.

  이 글의 묘미는 마지막 부분의 반전이지만, 아쉽게도 글의 분량이 길어지면서 읽는 이가 반전을 짐작할 것이 너무 많았다는 느낌이다. 물론 '그럼 제가 당신을 먹지요'라든가 '달콤한 냄새가 났거든요' 라는 등의 대사는 성적인 발언으로도 생각할 수 있지만, 직설적으로 결말을 나타내는 복선이기도 하다. 아마도 작가는 두 가지 모두의 중의성을 의도하고 복선을 배치한 것 같다. 하지만 글이 점점 길어지면서 이 선박 안에서의 일이 뭔가 비정상적이라는 느낌이 들게 하고, 그런 의심이 증폭되면서 이미 독자는 닐라가 선박왕의 안주인이 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게 되어버리지 않는가.

  작가를 알게 된 것은 '할머니 나무'에서였다. 그 글에서 여는 순문학을 떠올리게 할 정도의 담담하고도 서정적인 서술과, 번득이는 기지에 감탄했었다. 그런데 이번 글에서는 담담하고 서정적인 면을 넘어서 지나치게 서술이 부족하고 대사가 많은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대사는 압축되지 않고 여과없이 그대로 드러나는 반면 대사와 대사를 잇는 서술은 꼭 필요한 행동만을 그려주는 느낌이랄까. 배경과 가구가 없이 대사가 많은 만화를 읽는 느낌이었다.

  A4 20매 가량이나 되는 글이지만, 실제로 이 글이 꼭 길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글에서 중요한 것은 닐라와 크루의 만남, 주변에서의 기대, 배에서의 기이한 일, 그리고 마지막의 반전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인데, 모든 부분이 살이 너무 많이 붙었다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술이 자세한 것은 아니다. 만약 이 글이 배 위에서라든가 배로 들어가는 시점 같은 시기로 초점을 맞추고 나머지를 회상 처리한다거나 하면 어땠을까? 사건이 항상 많은 대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압축적인 대사 한 마디로도 얼마든지 상황을 설명할 수는 있다. 특히 주변에서의 기대 부분이나 닐라와 크루의 만남 부분은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앞 뒤 정황을 모두 늘어놓다 보니 뼈대는 앙상하고 길게 늘어진다는 느낌이 들어 버린다.

  이 글은 그다지 걸러내지 않은 듯한, 머리 속에서 떠오른 사건의 흐름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소설은, 특히 단편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면, 사건을 어떻게 압축적으로 만들어 강렬하게 만드는가도 중요하지 않은가. 스토리 상으로는 이 글이 A4 10매 정도면 충분히 담길 수 있다는 느낌이었다. 여성들의 허영심에 대한 꾸짖음, 권력자들의 횡포, 이 글이 담아내고자 하는 내용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그것이 압축되었을 때 보다 강렬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주셨으면 한다.

  정대영 님의 글과 마찬가지로 이 글 역시도 여가 작가 분께 많은 기대를 하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판타지 단편에 대한 공인된 시상이 거의 없는 중에, 제1회 황금 드래곤 문학상의 단편 부분을 수상했다는 것은 작가 분에게 상당한 책임을 부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부디 건필 하셔서 좋은 글을 계속 써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10. 맺으며

  문득 이번 원고를 쓰며 그런 생각을 했다. 여가 작가분에게 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글을 쓰는 사람의 의도가 가장 중요한 것인데, 여가 그 의도를 잘못 해석하고 단정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누차 말하지만 거울의 단편들은 상당한 수작들이 많다. 독자 단편란도 그렇고 표제작도 그렇다. 그리고 단편에 대해서 일가견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아마추어 작가들도 상당수 포진해 있는 곳이 거울이다.

  여는 그래서 작가 여러분께 무리할지도 모르는 부탁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장르의 단편 시장은 좁다. 아니 없다고 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척박한 환경을 탓하기 전에 단편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알기에 단편을 쓰고 계시는 작가분들이, 보다 글에 치열해 지셨으면 한다. 출판이 될 가능성도 별로 없고, 단편을 써서 먹고 산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글을 써서 공개하는 순간 그 글은 작가의 이름표가 되지 않는가. 한 편 한 편 공개되는 글들이 책으로 묶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지 않는다고 해서, 덜 완성되고 덜 걸러진 글들이 공개되어도 좋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단편 작가가 스스로에게 파는 함정일 수도 있다. 팔리지 않을 것이니까 아쉽다. 그래서 글에 힘이 안 들어간다. 가 되어서는 안 된다. 팔리지 않는다면, 팔릴 정도의 잘된 글을 완성해 보겠다고, 언젠가 시장이 형성되었을 때, 그 때가 언제든 옛소 여기 있다고, 그 동안 내가 연습을 이정도로 해 왔으니 이제 두려울 것은 없소 라고, 당당히 내밀 수 있는 퀄리티를 이루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댓글 3
  • No Profile
    정대영 04.11.30 23:15 댓글 수정 삭제
    분에 넘치는 단평, 언제나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가끔 너무 좋게 보아주셔서 황송하기도 하고
    우울한 날에는 일부러 와서 읽고 힘을 얻기도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보니 격월로 하나씩 올리고 있는데.
    전적으로 게으른 제탓이겠지요.
    겨울인데 감기 조심하시고, 늘 좋은 하루만 만나시길 빌겠습니다.
    워낙 미천한 실력이라 자꾸 실망만 안겨드릴 것만 같아서 두려운 요즘입니다. ^^;
    다음에 또 뵈어요. (꾸벅)
  • No Profile
    미로냥 04.12.01 13:17 댓글 수정 삭제
    항상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좀 더 제대로 써야 할텐데...;;
    좋은 하루 되시길.
  • No Profile
    이리스 04.12.16 09:25 댓글 수정 삭제
    늦게 확인했습니다.
    좋아하는 작가분 두 분이 글을 남겨 주시다니 기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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