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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거울 16호 단편 단평

2004.10.30 01:1210.30

이리스 ( earth_sea @ hanmail.net )



0. 들어가며

16호는 다른 때보다도 단편이 충실한 호였다. 기획 기사나 그 밖의 것들이 충실하지 않았다거나, 지금껏 다른 호의 단편이 부실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16호의 업데이트를 처음 보았을 때 여는 필진들의 이름에 반가움을 느꼈고, 각각의 글을 읽으면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글들에 기뻐했다. 그런 기쁨을 다른 독자들도 분명 느꼈으리라 믿으며, 글을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한다.

1. 뮌헨의 꿈 - 미로냥

가장 위쪽의 리스트에 올라온 글이라, 가장 먼저 읽게 되었다. 미로냥 님의 글 중에 한국적인 느낌이 담겨 있는 것을 많이 보다 보니, 이번 글이 도리어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글을 덮은 후 잠시 생각해 보고 다시 읽어 보았다.

이 글의 주된 사건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이국을 여행중인 화자 '나'는 꿈 속에서 자신이 지나쳐 온 한 여행자를 만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자신을 아는 듯이 구는 소년과 만난다. 소년은 자신에게 절실한 무엇인가가 있는 듯 굴지만 나는 소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소년이 자신의 환상 속에 있어왔음을 깨닫는다. 탑에 갇힌 자신을 구하기 위해, 드래곤의 손에서 자신을 되찾기 위해서 요정의 칼을 들었던 소년. 그것은 단일한 환상이 아닌 수많은 꿈과 기억의 중첩이다. 소년은 잠시간 유예를 해 줄 것을 부탁하지만 나는 깨어나서 소년을 잊는다.

이 글의 매력이라면 이런 단순한 스토리를 감싸는 능숙한 문장 전개라 할 수 있다. 꿈 속에서 만난 장소에 대한 기억이 여행에서 겪은 실제의 경험과 매끄럽게 맞물려가며, 꿈 속의 소년은 더욱 환상적인 존재가 된다. 소년에 대한 묘사는 몽환적이며 신비롭다. 소년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는 동안에 언뜻언뜻 환상의 흔적을 느끼는 부분처럼 주된 사건은 흐릿하게 뭉그러지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강조되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는 마치 화자가 된 냥,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묻는 소년의 질문에 움츠러들어 버린다. "나는 당신을 잊었어요, 버린 거예요." 그 대사에 자신의 먼 기억 속의 누군가, 잊은, 버린, 누군가가 있지 않았는가 죄책감을 느낀다.

짧은 분량 덕에 이야기가 혼란스럽게 치닫지도 않으며, 처음 소년의 등장이 신비로웠듯이 소년의 사라짐도 신비롭다. 소년은 환상 속의 존재인 때문이다.

글의 인칭을 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니 1인칭 관찰자 시점이니 하는 분류는 이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수많은 소설에서 여러 가지 시점이 혼재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글의 분위기와 전개에 글의 시점이 얼마나 융화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 글은 그런 점에서 뛰어나다. 1인칭이 아니라면, 꿈이라는 시점이 아니었다면 이 글의 매력은 분명 반감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깔끔한 마무리 역시 돋보였다. 글의 중반에 간혹 문장이 너무 길어져 주체와 서술이 녹아 들지 못하고 어지러워지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글을 읽고 난 느낌이 깔끔하다. 글의 서사를 완전히 독자에게 알리지 못하고 추상적인 말을 늘어놓는 데 더 치중한 듯한 작가의 글을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이 글은 다르다. 글의 서술이 서사를 삼킬 정도로 과도한 것이 위험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되겠다. 지나친 사변의 흐름으로 흐르지 않고 지금의 적절한 거리에서 분위기를 작가가 제어할 수 있는 그런 글을 앞으로도 기대한다.


2. 별장 - bluewind

몇 호 전의 글에서 여는 bluewind님의 신작을 간절히 바란다고 한 적이 있었다. 매번 업데이트 할 때마다 혹시 이번 호에는 하고 기대를 하다가, 16호가 되어서야 작가의 아이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번 업데이트의 작가진을 훑었을 때에 가장 반가웠던 이름이었음을먼저 밝혀둔다.

이번 호에는 '식인'에 관련한 글이 두 개가 함께 올라왔다. 우연이 분명하겠지만 재미있는 현상이었다. 공포소설에서 식인이라는소재는 매우 매력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건 동족살해라는 금기를 포함하고 있으면서, 우리 자신이 누군가의 객체가 될 수 있다는 가설에 섬뜩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을 하늘로 보내기 위해 그 시체를 나누어 먹는다고 했던가. 간혹 금기는 위반한 자에게 강력한 힘을 제안하는 경우가 있다. 주된 소재는 아니었지만 아르하님의 '상냥한 마녀'에서도 이러한 금기가 다루어졌다. 근친상간이라는 금기를 위반하여 태어난 아이가 강력한 마법사가 된다고 하는 금기. 어째서 금기가 이러한 강력한 힘의 환상과 함께 제시되는가. 그것은 인간이금기를 바라보는 데 달콤한 유혹이 되며, 또한 금기를 어겨 버린 자들에게 사악한 변명거리가 되기 때문은 아닌지.

이번 16호의 '별장'과 초대 단편인 '공포 소설을 쓰는 남자' 는 동일한 금기를 동일한 해석으로 접근하고 있다. 식인이라고 하는 금기를, '먹힌 자의 능력을 흡수한다' 로 해석하는 것은 새롭지는 않다. 젊고 아름다운 처녀의 피로 목욕을 하여 영원한 미모를 손에 넣었다고 하는 전설에서 보듯이, 외부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들여 섭취하는 기본적인 기능인 '먹는 행위' 를 '외부 능력의 섭취'와 동일시하는 것은 가장 평이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그것이 반전이나 독특한 스토리로서의 가능성을 잃었다면, 작가가 이러한 소재로 써낼 수 있는 방법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결국 동일하고 평범한 스토리를 어떠한 분위기로 살려 나가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 되는 것이다. 먹는 행위를 또 하나의 기본적인 욕구인 성욕과 결합시켜 성적인 환상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흡혈귀가 종종 성적인 상상으로 다루어지는 것처럼) . 타인의 능력을 섭취한 강력한 존재가 그 근원을 간파당해 몰락해 가는 이야기를 다룰 수도 있다. 그러면 글은 금기를 위반한 자에 대한 징벌, 즉, 인간이 두려워하는 행위를 한 자를 스스로 징벌한다는 점에서 공포 이상의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낼 수도 있겠다.

그러나 bluewind님의 별장이나 조재형 님의 '공포소설을 쓰는 남자' 둘 다 약속이나 한 듯이 그 이상의 이야기는 다루지 않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초대단편의 경우 살인 그 이후, 그 객체의 딸을 다시 만나는 정도의 사건이 일어나지만,  이 글에서는 식인을 경험한 주인공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익숙해지는 것으로 이야기가 종료된다.

그렇다면 이 두 개의 글을 그런 이유로 낮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는 이 별장이라는 글을 처음 읽어나갈 때, 냉장고 안의 고기를 발견하는 순간 이미 섬뜩함을 느꼈다. 부재중인 주인이 바로 이 고기가 아닌가 하고 가정해 버린 것이다. 비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추측이었는데 중반을 넘어가면서 그 예측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결말을 읽은 후 이 글의 가치를 폄하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글이 소재로서의 독특함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글을 전개하는 것에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인공, 오래 전에 붓을 놓은 사람이 붓을 쥐기 까지, 신경이 쭈볏쭈볏 일어나는 듯한 긴장감이 글의 기저에 깔려 있다. 몰래 타인의 집에 들어가는 긴장감, 불을 켤 수 없는 상황, 그림 속의 여인을 만나고 여인의 시체를 발견하기까지의 소름끼치는 느낌이 이 글에는 생생히 살아있다.

문장 하나가 강하게 튀어나오는 것도 없다. 어떻게 보면 평범하기까지 한 문장이다. 작가의 개성이 그렇게 강하지 않은 것이 bluewind님의 글의 특징이기도 한 것이다. 여성적인 듯 하고 또한 남성적인 듯도 한, 지극히 평범하고 그렇기 때문에 조금만이라도 엉망으로 비틀리면 금새 눈에 띄게 될 문장을 적당히 배열한 솜씨를 무시할 수 없다.

다만 앞서 지적했듯이 이미 충분히 다루어진 소재라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평범한 소재를 이렇게 풀어낸 솜씨도 좋지만 평범한 소재를 평범하지 않게 제련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이미 진아 님이 지적한 바 있듯이 주인공의 감정이 너무나 급격하게 변화하는 것도 걸린다. 식인 전의 공포,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릴 때의 소름 끼치는 두려움이 식인을 인정하는 순간 급선회하는 과정이 너무 간단하다.

작가 분은 글을 무척이나 꼼꼼히 숙고해서 쓰시는 분이 아닐까 여는 생각한다. 글 하나하나에 공을 들이는 과정도 무척이나 중요한 작업이지만, 많은 글을 써 봐야만 깨닫게 되는 것도 있지 않을까. 조금 더 글을 써 주시기를 바란다. 탄탄한 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이 균형감 있는 글을 계속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3. 오디션, 지하철의 악마 - 무한슬픔

익살스러운 꽁트 하나와 공포물 하나. 무한슬픔 님은 이번에도 글 두개를 내시는 기염을 토하셨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평으로 보자면 오디션 쪽에 사람들의 호감이 더 많은 듯하다. 공포라는 감정을 제거했을 때의 무한슬픔님의 글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관심을 가지고 기대하고 있던 여였으므로 이번 글은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사실 오디션의 상황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충분히 공포스러운 상황이긴 하다. 길고 강력한 턱을 가진 트로이트 종족의 도움으로 겨우 멸종을 면하고 은하계 전체에서 변방의 미개 종족으로 여겨지고 있는 인간이라니. 하지만 그런 설정을 제외하면 이 글은 기본적으로 유쾌하며, 심지어 지구인에 대한 묘한 우월감까지도 느껴지는 글이다. 비록 작가가 설정한 외계인에 비해서-라는 가정이 있기는 하지만. 이 글을 인류의 오만 불손에 대한 비판으로 보아야 할지 혹은 그래도 인간은 그런 이유로 강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느낌으로 보아야 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욕설을 늘어놓는 지훈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통쾌함을 느낄 수 있다면 이 글은 분명 희극에 속할 것 같다.

지하철의 악마는 반면 무한슬픔님 다운 공포 소설이다. 일상의 한 순간이 비틀리며 공포스러운 상황이 만들어진다. 이번에도 그 시작이 성별의 문제라는 것은 조금 아쉽다. 삶에 찌들리며 살아가다가 지하철 안에서 우연히 치한 짓을 하다가 그 칸의 여성들에게 난자 당해 죽어버리는 주인공의 모습은 공포스럽기보단 묘한 껄끄러움을 남긴다.

여는 이 글을 읽으며 문득 어떤 블로그에서 보았던 글을 떠올렸다. 한국의 20대 이상의 여성들 가운데 1년에 한 번 이상 성추행이나 성적 모욕감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라는. 여전히 지하철에서 여성들은 무방비하다. 그들은 이렇게 성적인 가해자를 둘러싸서 칼을 날릴 수도 없다. 아쉽게도 이 나라는 여전히, 성추행을 당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거나 항의를 하면 도리어 그 피해자를 이상한 눈으로 보는 곳이다. 직장 여성들은 회식 뒤풀이 자리에서 상관이나 동료들에게 명백히 성희롱에 해당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고, 혹은 신체적인 접촉을 당한다. 그래서 이 나라의 젊은 여성들의 상당한 비율은, 자신이 혼자 있을 때에 주변의 모든 남자들을 경계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을 가리켜 피해의식이 과한 거라고 하든, 혹은 자의식 과잉이라고 하든, 그것은 현실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가해자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데 왜 대부분의 여성들은 피해자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것은 단순한 피해의식이 아니라 실제의 경험이다.

한 지인은 또 이렇게 말했다. "남성들은 가해자가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단지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가해자로 변할 수 있는 잠재적인 가해자일 뿐이죠." 그 역시도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여는 이 말을 하고 싶다. 어렸을 때부터 여성들은 계속해서, 성적으로 치욕감을 당하는 경험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그러므로 여는 이 살해된 남성을 동정하지 않는다. 그가 어떠한 상황으로 고통 받고 있든 간에, 자신의 의지로, 타인을 모욕한 것은 사실이다. 여는 이 극단적인 결말이 자칫 이 남성을 동정하는 반어적 표현이 아닐까 염려된다.

다른 분들의 글과 달리 무한슬픔 님의 글에는 상당히 정치적인(혹은 사회적인) 문제가 많이 녹아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무의식 중에 드러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항상 공포나 웃음으로 넘기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무엇인가가 무한슬픔 님의 글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무거운 부분이 가볍게 다루어지는 것은 아닌지. 공포 소설이든 코믹 소설이든 사람의 감정을 한 가지로 유도하는 소설이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다루는 것은 양날의 검이 아닐까.


4. 상냥한 마녀 - 아르하

코니 윌리스의 '화재 감시원'의 서두로 시작한 이 글은, 이 서두와 어떤 면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전적으로 무지한 곳에 내던져진 주인공의 이야기라는 점이 그렇다. 여는 이 글을 읽으면서 과연 이 서두가 이 글과 무슨 관련을 가지고 있길래 제시된 것인지 풀고 싶어졌다.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이 글은 그저 오래 전 문학적으로 인정받은 SF소설의 이름을 들고 옴으로서 호기심을 자극한 것밖에 없을 것이므로. 하지만 작가가 늘 진지한 글을 쓰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득한 마음으로 글을 읽기로 했다. '화재 감시원'이라면 시간여행이라는 평범한 소재를 가지고 인간성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했다는 평가를 받은 글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글도 마녀 이야기라는 평범한 소재로 깊은 사색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여는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이 글을 읽기 시작했다.

이 글은 전체적으로 화재 감시원의 시점과 비슷하다. 낯선 공간에 들어가려고 하는 주인공의 두려움과, 그런 상황을 만든 주변에 대한 분노가 글의 서두에서부터 깔려 있다. 게다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혈연이라는 무게를 가지고 길을 가는 주인공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무거운 짐을 모두 버리는 호수에 와서도 아버지의 책은 버리지 못한다. 그것은 자신이 부담스러워 하고 힘들어 하는 아버지의 이름에서 자신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맡은 일, 마녀를 판별하는 일을 무사히 해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영광된 졸업을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는 마을에서 리메르라는 마법사와, 어쩐지 두려움에 빠져 있는 그의 제자 즈어를 만난다. 자신이 판별해야 하는 마녀는 이미 자살했지만, 그의 동생이 새로운 마녀로 몰려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마을에는 성직자와 마법사 사이의 알력까지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마녀라고 하는 라트리는 주인공을 적대적으로 대하지만, 마녀로 보이지는 않는다. 즈어는 매일 밤 그 방 앞을 감시한다. 주인공은 계속해서 꿈을 꾼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이 했던 말들,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일그러져 뒤섞이는 꿈은 곧 주인공의 정신 상태를 반영한다. 그러면서 그는 반복적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말 "밤이 되면 모든 것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쓴다.

사실 이 글 역시도 배후의 진실이 그렇게 독특하지는 않다. 언니가 사랑하는 여동생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리고 자살했다는 것, 그러면서도 여동생은 여전히 언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즈어가 계속 공포에 질려 있는 것, 그 모든 것의 의미를 조합해 본 순간에 이 사건의 진실은 금새 떠오른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근친상간이라는 금기다. 마녀로 취급을 받았던 두 여자아이가 사실은 아버지에게 계속 성적으로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 자상한 아버지의 얼굴을 한 마법사가 실제로는 잔인한 가해자였다는 것은 반전으로 보기에는 조금 부족한 것이 아닐까.

만약 반전의 의도가 아니었다면, 화자가 입 밖으로 이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이 사건의 내용을 제공해 주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물론 눈치빠른 독자가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화자가 즈어의 멱살을 쥐는 장면은 조금 당황스럽다. 천천히 글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마을 사람들이 라트리를 화형하려고 찾아오는 클라이막스 장면에서, 침착하게 대응하던 화자가 마법사 리메르에게 주먹질을 날리기 전에, 리메르가 분노하는 이유를 한 번쯤 제시해 주는 것이 어땠을지.

다시 호수를 찾아온 화자는 라트리가 언니의 일기장을 버리는 것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찾는다. 그는 언니의 무게에서 벗어나는 라트리를 보고, 아버지의 책을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화재 감시원'에서 계속 시험에 집착하고 있던 주인공이 분노하며 일어서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화재 감시원에서는 주인공이 먼저 집착에서 벗어나 결론을 내리지만, 이 글에서는 자신의 진실을 획득한 주인공이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집착에서 벗어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이없는 맞춤법 오류가 거슬리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매끄럽고 좋은 글이었다. 아쉬운 것은 평범한 소재에 평범한 반전, 평범한 결말이라는 것이다. 구성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조금 더 개성적인 무언가가 아쉽다. 아르하 님의 전작들의 개성을 생각하면 더욱 더 그런 아쉬움이 크다.  

이번 글도 신작은 아니라는 것이 유감이다. 작가 분도 많은 고민을 하고 계실 테지만, 조만간 멋진 새 글을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5. 몽 쎙 미셀의 전설

솔직히 고백하건데 여는 명비님의 글을 제대로 읽고 있지 못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십여 회를 넘게 읽어도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 글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토록 잡히지 않을 수 있을까. 문장 하나하나 노래하듯이 감미롭고 단어 하나하나를 골라 쓴 것이 역력히 드러나는 명비님의 글이, 매번 여에게는 읽기 고통스러운 것이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이것이 전부일 리 없다고 다시 글을 읽게 된다. 그리고 심지어 여는 이러한 감상문을 쓸 자격이 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곤 한다.

몽 쎙 미셀의 전설 역시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담겨 있다. 우주 이야기가 나오는 SF적인 소재에다, 마녀가 악마를 퇴치하는 판타지적인 소재가 뒤섞여 있는데, 그보다 더 강렬한 것은 항상 그렇듯이 명비 님의 문장이다. 이야기의 흐름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문장이다. 아니 그 이상으로, 일부러 이야기를 흐리게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마녀이거나 혹은 인간을 초월한 신적인 존재이거나 혹은 외계인일지도 모르는 몽 쌩 미셀, 몽 상 미설, 몽상미설이라는 여성의 이야기는, 그 입에서 나오는 대사만큼이나 기이하게 비틀려 있는 것이다.

화자는 이야기를 일관되게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여기 저기 수사를 가져다 와서 늘어놓는다. 때때로 자신의 감정까지 더해져 이야기는 더욱 더 몽롱해진다. 이야기가 뒤섞이는 것도 여전하다. 빨간 머리 앤과 길버트의 이야기가 슬쩍 들어가는가 하면, 주인공의 이름마저도 뒤섞인다. 문장 하나 보통의 어조로 말해지는 것이 없이, 모두 다 상징과 비유와 수사로 걸러져 원래의 의미를 추측하기가 버거워져 버린다. 요정의 성과 엘리베이터와 우주도마뱀이 혼재하고 마녀와 경비견과 시민과 운용경영진이라는 병립하기 힘들어 보이는 설정들이 함께 있는 세계다. 전쟁은 유희가 되고 허공에서는 설탕물이 쏟아져 내리는 뒤섞임이다.

소설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의 당위성을 말할 수 있냐고 누군가가 여에게 물으면, 여는 '소설은 이야기이고 인생이다'라고 말하겠다. 수필이 자신의 이야기라면, 소설은 작위의 이야기다. 이러한 전제로 출발하는 여이기 때문에 명비님의 소설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글이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스토리가 있고, 사건이 있음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어째서 항상 이 멋지고 완벽한 문장들은 스토리를 억눌러 버리는가. 넘쳐나는 상징에 이야기가 숨죽여 눈치를 보는 형국이 되고 마는가.

만약 작가분이 이런 것을 의도하였다면 그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겠다. 개인적으로 별로 호감을 갖고 있지는 않으나 인터넷 소설의 붐을 가리켜 한 교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극치'라고 평가하였다고 한다. 바야흐로 모든 형식이 파괴되는 시대다. 소설 역시 그 형식을 파괴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작가가 그것을 의도하였다면 말이다.

그러나 아직 소설의 중심은 이야기이고 인생이며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여로서는, 시적인 문장은 소설에서 조금만 등장해 주었으면 한다. 아니, 시적인 문장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중심의 이야기를 덮을 정도는 아니었으면 한다. 그것이 아직 고루한 소설관을 가지고 있는 여의 바람이다.


6. 율리아 - hermod

이 글은 신화집에서 빠져 나온 듯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독일 신화를 번역하고 계시는 분이니 무리도 아니지만, 단편이라는 소설의 형식보다는 신화의 형식에 가깝다는 것이 특이하다. 죽은 연인을 찾아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난 주인공이 마침내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끝없는 방황에서 벗어나 완전한 죽음으로 인도하는 이야기는, 극적인 전환이나 반전도 없으며 딱히 뾰족하게 강조된 사건도 없다. 그저 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하고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 구전문학으로서의 설화의 형태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설화와 같은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라면 이 글은 성공적이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 단편 소설로서의 개성을 가지고자 하였다면, 이러한 사건 전개가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건이 이어져서 글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 승 전 결을 가지고 완결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소설이 가져야 할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설화 같은 이야기 속에 조금 더 극적인 것이 들어갔다면 어떨까. 그녀가 죽어버리게 된 근거를 강조할 수도 있을 것이며,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좀 더 강조할 수도 있겠다. 주인공이 연인을 찾으러 가는 길의 고난을 더욱 강조해보는 것도 방법이 되겠다.


7. 영원한 수요일 - 적어

적어 님의 단편 다운 깔끔한 글이다. 그러나 쉽게 쓰여진 글인듯, 처음의 시작과 말미의 완결성은 다소 부족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번 호의 대부분의 글들이 '이미 많이 다루어졌던 소재'를 서술하고 있는 데 반하여 영원한 수요일은 시간의 재배열이라는 다소 독특한 소재를 가져오고 있다. 하지만 그 소재를 풀어나가는 방식에서 '영원할 수 없는 사랑', 즉 한 사람은 지극히 순수하고 상대는 그렇지 않을 때 생겨나는 비극을 가지고 왔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이 글을 읽으면서 주인공인 훼렌이 꽃뱀이라는 사실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여가 적어 님의 글을 읽어온 시간의 대가일지도 모른다. 글의 제목을 보고 글이 점점 두 연인의 이야기로 돌아가겠다는 분위기가 되는 순간에, 여는 어째서인지 이 영원한 수요일이 비극적인 파국의 반복이리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시간을 재배열해서 사람들이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서 이것을 이용해서 행복하게 살게 되는 사람의 이야기를 적어 님이 쓸 리가 없다는 확신이랄까.  그렇다면 영원한 수요일의 의미란, 감히 영원한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은 루카스가 그 신념 때문에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파국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여의 이러한 확신은 어긋나지 않고 맞았다.

언뜻 생각한다면, 자신의 의지대로 인생을 재배치한다면 인생은 무척 즐거워 질 것 같지 않은가. 아작처럼 시대를 들쭉날쭉 겪어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고, 루카스처럼 거꾸로 젊어져 가는 인생도 그 나름대로 재미가 있을 듯 싶다. 그런데, 그렇게 흘러 간다면야 그러한 이야기를 초반부터 풀어나갈 리가 없다. 사람들이 이 하나하나로 세분되어 있는 세계에서 집착하는 영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적어 님은 평소 답지 않은 목소리로, 아니 지극히 평소다운 목소리로 반문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사랑을 믿을 마음이 듭니까? 라고.

앞서 여는, 이 글이 적어님 답지 않게 시작과 결말이 매끄럽지 않다고 지적했다. 서두에서 달변가의 말투로 늘어놓는 시간의 명칭들, 티메레스의 설정. 마치 장편을 보는 것 같은 장황한 설명이, 작가 특유의 매끄러운 말솜씨로 풀어져 있기는 해도, 단편에 과연 적합할 정도의 분량인가. 게다가 그 설명을 글의 서두에서 모두 해야 하는 일이었는가. 이 글의 플롯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시간을 마음대로 재배치할 수 있는 티메레스에서 영원한 사랑을 믿은 청년 루카스의 짧은 사랑과 비극적인 결말, 그걸 이용해서 독자에게 뭔가를 비꼬려 하거나 혹은 코믹한 웃음을 던져주려 했었다면, 설정은 글의 안쪽에 녹아드는 쪽이 나았다. 이 글의 서두에서 모든 것을 장황하게 설명해 버린 덕분에 여는 이미 루카스가 영원한 사랑을 가지지는 못하리라고 확신하게 되었고, 급기야 영원한 수요일은 루카스가 반복해서 불행을 겪는 날이라고 이해하기까지 해 버렸으니 말이다.

글에서 아작의 돌출 행동이나 기이한 말투는 아작의 개성을 잘 드러내 주었다. 그러나 루카스는 어떠한가. 시간을 거꾸로 살아오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개성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그는 어째서 스무 살 풋내기 청년처럼 사랑을 고백하고 그 연인과 멋진 아침을 맞는 주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아작 보다도 흐릿한 이미지로 남는 것일까. 게다가 아작은 자신의 시간에서 노년의 시간을 먼저 보낸 인물이다. 늙고 허약한 몸으로 살아가는 동안 그가 얻은 성찰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 그의 사랑에 대한 철없는 감정은, 20대 중에서도 철없는 축에 속할 듯 보이는데, 거꾸로 살아온 기간을 세어도 그는 그보다는 더 철이 들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만약 그의 철없음을 강조하려 하였다면 차라리 루카스 시간 배분을 평범하게 잡아보는 것은 어땠을까 싶다. 개성적인 아작과 대조해서 루카스의 개성을 '치밀하고 사려깊은' 성격으로 잡았다면, 그가 시간을 배분하는 것에 걸맞게 어울리는 감정의 흐름이 필요했던 게 아닌지. 청혼하는 순간에 반지를 선물하고자 계획했던 사람이, 꽃뱀인 여자를 그렇게나 모를 수 있었을까.

코믹한 이야기로 흐르고자 했는지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는지 모호한 것도 아쉽다. 작가의 평소의 글에 비해서 쉽게 써내려 갔다는 느낌이 강하다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너스레를 떨던 코믹한 이야기나, 깊이 있는 주제를 능숙하게 풀어 나가던 작가의 평소의 글들이 아쉽다.


8. 맺으며


앞서 말했듯이 소설이 어떠한 글인가 하는 점은 뭐라고 단정짓기 어렵다.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른 소설관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소설로서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소품'이라는 단정을 내리든 혹은 '단편'이라는 진지한 이름을 붙이든 간에 그 글이 하나로서 독립된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본다. 커다랗게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게 되는 연작 소설이라고 할지라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하나의 제목을 가지고 올라오는 글들은 그 안에서 독립된 완결성을 가져야 하며, 그 안에 독립적인 네러티브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여는 요즈음 거울에 올라오는 단편들이 고마우면서도 또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다.

인터넷 공간이라고 하더라도, 본명이 아닌 닉네임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고 하더라도 소설은 작가의 이름을 걸고 내보이는 분신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미 손을 떠나는 순간에 남들에게 내어 보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소에 단편 작가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든 혹은 장편 작가로 유명한 사람이든, 그도 아니면 이제 바로 처음 단편을 공개하는 작가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이름을 거는 만큼의 진지함이 요구되는 것이다. 물론 아주 쉬운 변명거리도 있다. 이 글은 습작입니다 라는 말이 그것이다. 하지만 습작이라면 차라리 공개하지 않는 편이 낫다. 비록 아마추어인 이상 완벽을 요구할 수는 없는 거라고 할 지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그 순간의 최선이 실려 있는 글이어야만 독자들에게 떳떳하지 않을지.

모든 것이 불황인 요즈음이다. 출판 시장의 불황으로 작가들의 활로가 더욱 더 좁아지고 있다고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런 불황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신이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외부가 아닌 자신의 내부로 눈을 돌릴 일이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은 자신의 최선인가, 더 나아질 수는 없는가. 그런 숙고의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글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는 매번 표제작들을 읽으면서, 많은 작가들이 비슷한 오류를 매번 범하고 있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결국 여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작가들은 그것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여가 생각하는 오류는 결국 여가 보는 시선일 뿐이고, 작가들은 그것을 자신의 개성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부디 많은 글을 읽는 만큼 자신의 글을 계속 읽어 주시기를 바란다. 더 이상 고칠 데가 없다고 하는 완전한 순간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은 고개를 들 수 있다고 하는 마음이 아니면 안될 일이다. 타인의 글의 장점을 섭취하고, 자신의 단점을 고쳐나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대답은 의외로 자신 안에 있는 법이다.

거울 작가진들의 변함없는 정진을 부탁드리며 이만 줄인다.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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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비 04.10.30 03:42 댓글 수정 삭제
    ...버리지 말아 주세요. ㅠ.ㅠ

    꽤 전부터,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명비 글에 대한 변명을 올리고자 또 맘 먹었지만요오.
    막상 손댈 때마다 괴로워서, 괴로워서어, 그러다가.
    몇 달이나 날을 넘겨 버렸네요. orz

    요즈음, 이리스님 감평 받는 즐거움으로 글 만드는
    명비, 면목 없이도 뒤늦게야. 인사 드립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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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리스 04.11.01 01:25 댓글 수정 삭제
    저;;; 저;;; 저 안버렸어요;;;
    고맙습니다. 작가분들의 리엑션이 힘이 됩니다. 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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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한슬픔 04.11.01 02:14 댓글 수정 삭제
    정치적일리가 -_- 아무 생각없는 저로서는. 그치만 이리스님의 말 그대로 단지 무거운 부분을 잘라내고는 제 식대로 가볍게 바라보는 부분이 있네요. 그치만 ㅠ.ㅠ 그게 저라는 인간. 글의 문제가 아니라 제 삶의 시선의 문제군요. 좀더 나은 인간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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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냥 04.11.01 14:10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ㅁ; 아유 좀 나아져야 할텐데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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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rmod 04.11.12 08:43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설화와 같은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사실 제 희망이랍니다. 그런 의미가 전달된 것 같아서 기쁩니다. 다만, 역시 지적하신대로 소설적 측면도 더 생각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독일 신화'를 포함한 '게르만 신화'를 번역하고 있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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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리스 04.11.12 23:23 댓글 수정 삭제
    hermod님/ 앗 죄송합니다. 오류였습니다. '게르만 신화'를 '독일 신화'로 생각해 버렸군요. 무식의 소치입니다. orz
    미로냥님/ 늘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
    무한슬픔님/ 무거운 부분을 비교적 가볍게 다루어 버림으로서 일어나는 '불편함'이 무한 슬픔님의 글의 특징이기도 하니까요. 그게 장점이 될 수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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