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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잡서론

 2주일 전, 거울 웹진의 진아님을 통해 SINBIROUN iyagi 기사 리뷰를 요청받았을 때 대단히 곤란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필자가 글을 끔찍하게 못 쓴다거나 하는 원론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글이라는 것은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얼마나 효율적으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으며, 기사란 그러한 전달의 원칙을 더욱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가 당혹해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정작 저 자신은 SINBIROUN iyagi에 대해서 아무 것도 쓸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팬북 제작 과정? 최근 판타지 창작 사이트들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단편집들의 제작 방식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번과 이번 책의 차이점? 반양장과 양장의 차이입니다. 실린 작품의 개괄적인 평가? 팬북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저는 팬북에 실릴 팬픽들을 평가하고 선별하는 심사위원의 입장이었지만, 이것은 저 개인만의 평가가 아닌 다수 팀원의 평가가 모여서 선별된 것임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Project S.I.에서 출간한 팬북에는 저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작품들도 제법 실려있었지만, Project S.I. 팀원들이 설득력있게 자신이 눈여겨본 팬픽의 장점들을 설명해 주었기에 납득하여 팬북에 싣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저의 개인적인 눈으로 관찰하고 평가하면 SINBIROUN iyagi가 아닌 DANGHOKSROUN iyagi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에게 개괄적인 평을 실어달라 하시는 것은 잔혹한 요구가 되겠지요. 만들고 판매하는 과정? 배송을 처리해야 할 우체국이 문을 닫아서, 혼자서 72kg짜리 책들을 짊어지다가 울뻔한 추억에 대해서 상세하게 서술하면 웹진 기사가 아니라 최루성 자서전이 되겠지요. 팬북을 만들게 된 동기? ‘팬북님께서 명하여 나를 부르셨다!’ 라는 혁명가적이고 사이비 교주스러운 이야기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말 만들고 싶어서 만들었습니다. 사실 팬북을 제작하기 위해 뛰어든 초기에는 특별한 동기 부여도 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제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팬북 그 자체이지, 그 동기와 과정을 꾸며 설명하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으니까요.

 과연 저는 팬북에 대해서 무엇을 쓸 수 있을까요.

 팬북은 조합된 영어 의미 그대로 Fan+book입니다. Fan들이 만든 book인지, Fan들에게 팔기 위한 book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 주체에 Fan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진아님께 처음 청탁을 받았던 기사의 본래 목적은 SINBIROUN iyagi에 대한 소개 기사였지만, 저는 기왕 지면을 할애받은 바, 좀 더 욕심을 부려 Fanbook에 대한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Fan이 바라본 Fanbook이 아닌, Fanbook의 눈으로 바라본 Fan과, Fantasy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것이 가장 어려운 ―――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심하게 꼬여 있다는 점에서 난해한 ――― 환상문학을 소비하고 이해하는 거울 웹진 독자 분들에게 있어서는 좀 더 쉬운 이야기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SINBIROUN iyagi에 대한 소개는 차차 서술하도록 하지요. 어차피 팬북을 소개하는 일은 하나의 기사를 이루기에는 부족한 요소였기에, 이렇게 다른 이야기에 섞여 자연스럽게 서술하는 것도 필요할 거라 믿습니다. 글을 조리있게 쓸 줄 모르는 필자 때문에, 거울 웹진 역사상 가장 최악의 기사가 될 지도 모르는 기사를 어여삐 봐주시길 (_ _)


 1. 팬북Fanbook

 앞에서 말장난처럼 Fanbook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만, 저는 이 지면을 통해 ‘Fan들이 좋아하는 것을 실어놓은 book’으로서의 팬북의 의미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팬픽은 팬들이 만들고 팬들이 읽는 2차 창작물이며, 팬들의 애착이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Fan들이 좋아하는 것을 실어놓은 book’ 이라는 의미는 매우 흡족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판타지 장르에서 잠시 눈길을 돌려봅시다. 팬북은 이미 많은 문화적 분야에서 자신의 의미를 다해왔습니다. 조악한 예이지만, 90년대 중반 많은 인기를 끌었던 대중가수 H.O.T의 멤버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쓰여진 팬픽이 책으로 묶여 발간되기도 하였고 ――― 이 글의 작품성에 대해서 물으신다면 웃고 말지요 ―― 스타크래프트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팬북 또한 심심찮게 나왔습니다. 또한 일본에서는 출판사가 전략적으로 오피셜 팬북을 출간하는 경우가 흔한 편입니다. (이 경우 팬북은 ‘Fan들이 좋아하는 것을 실어놓은 book’으로서보다는 ‘Fan을 공략한 book’의 표현이 옳을 것입니다.) SF 장르에서도 심심찮게 팬북이 육성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야기만 들었을 뿐 잘 모르는 분야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국내 동인계에서도 판타지 소설 팬들을 자청하는 이들의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소설 속에서 캐릭터들의 개성이 가장 강조되고 있는 이영도 씨의 드래곤 라자, 이경영 씨의 가즈 나이트의 경우 지금도 소설 속의 캐릭터들을 아카ACA와 코믹월드로 대표되는 동인계 무대에서 심심찮게 이미지로 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동인계의 경우 소설 속의 캐릭터를 이미지화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본래의 캐릭터성을 파괴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성만을 추구하여 짜맞춘다는 단점이 있겠지만, 이것 역시 팬들이 영위할 수 있는 하나의 독특한 문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패러디로서의 파괴와 재구성과는 맥락을 달리합니다만, 마찬가지로 동인계의 방식 또한 소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으니까요. 좀 더 시야를 넓혀 동인계 자체를 바라보자면 이미 이 존재 자체가 2차 창작물의 메카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시작은 일본의 코믹 마켓Comic Market을 모방하여 시작되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 주인공을 대상을 하여 독창적인 스토리를 가미한 팬북 ――― 동인지 ――― 를 발매하는 일이 꽤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공통점에는 팬들이 존재하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떻게든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하나의 문화에 대한 애착이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고, 그 창작물이 전파되는 과정은 일찍이 보기 힘들었던 문화 현상 중 하나입니다. 팬북 또한 마찬가지로, 이전의 갇힌 문화 생산 구조를 생각한다면 생각하기 힘든 현상 중 하나입니다. 비록 상업성과 팬덤의 비대화라는 부정적인 요소는 피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영유자’인 팬들이 모여 스스로 창작의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팬북은 그 연장선에 놓여있습니다. ――― 이 장황한 말들의 해석은 다음 거울 웹진 때 본격적으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2. SINBIROUN iyagi가 이야기하는 팬북

 잠시 Project S.I.에 대해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 같습니다. Project S.I.는 이름 그대로 SINBIROUN iyagi를 출간하기 위한 프로젝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빨간펜이라는 학습지에 실린 이영도 씨의 SINBIROUN iyagi라는 단편을 발굴하여,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단편을 직접 책으로 만들어내어 같이 읽자 라는 생각이 Project S.I.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Project S.I.라는 이름은 SINBIROUN iyagi의 앞글자를 딴 것이 그대로 프로젝트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본래의 목적은 이영도 씨의 소설을 수록한 책을 내기 위한 프로젝트였지만, 나아가서 이영도 씨의 작품을 기초로 쓰여진 2차 창작물을 함께 실어보자는 데에 의견이 모였고 책의 두께 또한 두꺼워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독자가 작가에게 던질 수 있는 최고의 피드백Feedback 중 하나인 비평까지 더하여, ‘Fan들이 즐기는 Book의 의미’를 이루어 낼 수 있었습니다.

 Character라는 말 속에는 ‘성격’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소설이나 만화 속의 인물을 지칭할 때에 ‘캐릭터’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속에는 작가가 부여한 ‘성격’이 배여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영도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또한 제각각 멋진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처음 팬북에 실릴 패러디을 선정하고자 할 때 제가 가장 주목해서 본 것은 과연 ‘패러디 속에서 캐릭터에 대한 일방적인 집착이 아닌, 캐릭터를 얼마나 이해하고 그 성격을 살려낼 수 있는가.’ 였습니다. Chelsona의 '발상의 전환'은 이영도의 소설들에서 볼 수 있는 언어유희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제각각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이영도 씨의 장편 소설들 속의 등장인물의 개성을 잘 엮어내어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 위키에서 쓰여진 '오버 더 눈물워커 랩소디' 또한 이와 비슷한 발상이 엿보입니다. 파괴와 접목, 그리고 한 소설가의 소설을 즐겨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의미의 부여가 심사위원을 맡은 Project S.I. 팀원들의 마음을 이끌어냈습니다. (팬북을 구매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그것이 잘 쓰여지고 잘 못쓰여졌는지 알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신다면, www.nunsae.co.to에 방문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팬픽을 선정하는 과정에서부터 아쉽게 탈락하게 된 작품, 그리고 선별되어 이미 팬북에 실려있는 작품들이 팬픽 작가분들의 허락을 받고 그대로 올려져 있습니다.) 한 때 세간에서 기발한 유머가 되었던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는 방법' 또한 이영도의 소설 캐릭터들을 대입하여 익숙하면서도 신선한 재미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팬들에게 이러한 패러디가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이유는 ‘영위자가 창작자가 되어 직접 자신의 글을 쓸 수 있다’라는 매력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은 저 2차 창작물을 보는 영위자가, 내일은 또 다시 창작자가 되어서 패러디를 할 수 있으니까요. 소설을 쓰기 위해 복잡한 세계관을 짜고 복선을 담아내는 절차가 없이도, 자신의 아이디어가 있으면 손쉽게 써낼 수 있는 것이 패러디입니다. 팬픽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소설가가 마련한 기초적인 세계관만 잘 이해하면, 그를 바탕으로 재미있는 발상을 해낼 수 있으니 소설을 하나 창작해내는 것보다는 더 편하게 쓸 수 있습니다. (물론 창작이라는 것 자체의 어려움을 다소 무시한다면 말입니다.) 반대로 팬픽의 파급력을 생각한다면, 누구나 주체가 되어 이러한 패러디를 해낼 수 있는 만큼 대단히 포괄적이고 큰 파급력을 지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과는 반대로 제가 SINBIROUN iyagi를 만들면서 가장 애를 먹었던 것은 판타지 장르에서 팬픽이라는 것 자체가 대단히 기근이라는 사실입니다. 양질의 작품을 써내는 분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고, 드라클이나 라자동 등의 규모가 큰 팬사이트에서도 양질의 팬픽을 골라내는 일이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이영도 씨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본래의 목적을 잃고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루는 데에만 급급했고, 이는 다른 판타지 작가들의 팬덤도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대중 문화를 이끌어가는 데에 있어 비교적 큰 역할을 하는 2차 창작물이 유독 판타지에서만큼은 그 규모나 형태에 있어서 비정상적입니다.

 Project S.I.를 꾸려가게 되면서 저를 깊은 고민에 빠트렸던 것은, 제가 마주하여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들 모두 SINBIROUN iyagi를 첫 판타지 팬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다른 장르 문학에 비교하면 그 탄생 시기도 짧고 역사도 깊지 않지만, 판타지라는 장르가 자생한지 십년이 훌쩍 넘어가고, 판타지 작가만 500명이 넘어가고 있는 판국이며, 2차 창작물로 대변되는 시장의 뿌리가 갈수록 튼튼하게 갖춰지고 있는 지금, 모두들 SINBIROUN iyagi가 처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쯤은 팬픽을 바탕으로 한 팬북이 고개를 내밀 법도 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팬덤이 쪼그라들었다는 것 자체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 10년 동안, 판타지 장르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수많은 팬덤들은 팬픽의 고갈을 비롯하여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던 걸까요?

댓글 3
  • No Profile
    10년이 긴 것은 아닐 뿐더러, 태생기까지 확장하여 10년이지, 막상 태동된 이후로 보면 5년... 다섯 살 짜리가 해놓은 일 치고는 나쁘지 않잖아?

    다음 글 기대한다고, 재수생. :)
  • No Profile
    수오 04.09.25 20:31 댓글 수정 삭제
    지금은 2004년... 5년 전이면 퓨처워커 연재 끝났을 시기일 터인데. 90년 중반이면 이미 통신상에서는 판타지가 어느 정도 여물었다고 볼 수 있는 시기. 드래곤 라자의 출판 시기만을 따진다고 해도 벌써 6년이 넘어가는데?

    뭐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번에... 뭐, 이번에 아주 큰 펑크를 한 번 낼뻔한 이상 진아님이 자리를 허락할 지는 미지수 =_= (더군다나, 이거 날림의 분위기가 너무 많이 나는걸요 -_-)
  • No Profile
    진아 04.09.26 17:13 댓글 수정 삭제
    18호에는 마감 맞춰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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