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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15호 거울 단편 단평

2004.09.24 22:4409.24

이리스 (earth_sea@hanmail.net)



  0. 들어가며

  글을 쓰는 심장들도 조금 푸근해들 졌나보다. 긴장감에 날서 있는 듯하던 단편들이 온화하고 부드러워졌다. 아니 그것이 아니면 글을 읽는 여의 마음가짐이 바뀌어 버린 것인가? 어느 쪽이든 8월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매우 유쾌하였다는 것을 먼저 말해 둔다. 몇 개의 글을 읽으면서 어느새 입술이 풀어지거나 하였고, 서늘한 느낌이 등줄기를 훑어놓는 글도 만났다. 작가들의 개성이 잘 드러난 글에서는 역시 하고 고개를 끄덕였고, 전작보다 훨씬 수작으로 돌아온 작가께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글을 평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다 같지는 않더라도,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는 글에 평을 댈 사람은 드물 것이다. 악의가 가득차 어떤 글을 흠집잡는 사람들은 한 귀로 흘려버리면 족하겠지만, 글을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에 늘어놓는 아쉬움의 말들은 부디 마음 한 구석에라도 넣어 주십사 바란다.  
      

  1. 사랑스런 아내여 - crazyjam

  crazyjam님의 글은 하이텔 VT 때부터 종종 읽어왔는데, 글간의 격차가 매우 심한 편이다. 초기의 비교적 건조하고 단조로운, 감정이 섞이지 않은 글들은 조금 거칠긴 해도 그만의 매력이 있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글 중의 하나가, 몰락해가는 한 콜로니 이야기였다. 이 즈음해서 여는 crazyjam님의 글에 감정이 실릴 때 어떻게 바뀌는 지 직접 보고 매우 놀랐었다. 짧고 간결한 문장 안에 언뜻언뜻 특유의 부드러운 감정과 날카로운 센스가 들어가는데, 고백하자면 이 때부터 여는 작가의 단편에 팬이 되었던 것 같다. 비교적 초기에 해당하는 '미궁' 이야기도 매우 매력적이었지만, 미래세계나 현재, 혹은 조금 세련된 도회적인 분위기가 담긴 글이 더욱 더 취향이었다.

  그러던 중에 읽은 것이 이 글이다. 여의 기억이 맞다면 1년이 넘은 듯하다. 작가의 도회적인 감수성을 좋아하는 여로서는 작가가 소위 말하는 전통적인 판타지의 형식을 취할 때 조금 실망하곤 한다. 그건 글에 대한 장· 단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미려한 문장과 날렵한 전개가 전통적인 형식의 판타지에서는 잘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의 정통 판타지와 작가의 미래 판타지 사이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여는 주저 없이 후자를 고를 것이다. 과학소설이라고 하는 sf의 기준에서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여는 이 작가의 미래물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다.

  드래곤과 기사란 중세 환타지라고 보통 말하는 글에서 종종 등장하는 소재다. 장편으로도 드래곤라자 외 많은 글들이 있었고 단편도 마찬가지다. 판타지를 쓰는 작가들 중에 용이나 드래곤이 등장하는 글을 한번이라도 쓰지 않았던 작가가 더 드물 듯하다. 그만큼 흔히 등장하는 소재니만큼 자칫 잘못하면 흔하고 상투적인 글이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드래곤이라는 존재의 강함과 신비로움을 강조해서 글의 중앙에 놓고 장중한 분위기를 써 나갈 것인가, 혹은 드래곤을 한 소재로서 단순화 할 것인가의 기로에서 글은 전혀 다른 출발점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사랑스런 아내여'는 드래곤이라는 소재를 중앙에 놓으면서도 그 기본적인 전제, 독자들이 가정하는 드래곤에 대한 선입관을 비틀어버린다. 두 명의 드래곤을 처치해 죽지 않는 기사로 불리는 주인공이 붉은 드래곤에 잡혀간 아내를 구하기 위해 드래곤이 있는 산으로 쳐들어간다는, 메르헨에 흔히 나올 법한 소재다. 그런데 글은 드래곤과 기사의 장중한(이라고 쓰고 진부한이라고 읽는) 전투를 다루는 대신 두 중심 캐릭터가 의기투합하는 과정을 보여줘 버리는 것이다. 그 이유라는 것은 아내들의 잔소리와 물욕에 지친 중년남들의 동지의식이다.

  글의 후미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독백은 독자들이 키득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 남자, 사실은 잔소리쟁이 아내를 처치할 뿐만 아니라 고상한 미망인을 꼬실 계획까지 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잘난 남자들이 여자를 허영덩어리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여성인 여로서는 분개할 수도 있을 일이다. 그런데 어쩌나, 웃음만 나오는 것을. 이 잘난 남자들이 밉다기보단 가엾고 안쓰럽고 귀여워 보이는 것이다. 오죽하면 저런 결론을 내렸겠냐고 아내들의 죄로 돌리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저 이 주인공과 드래곤이, 외부의 시선을 계속 의식하며 힘들다는 내색 한번 못한 채 어깨를 곧추 세우고 살아야 하는 안쓰러운 남성이라는 존재를 보여주는 것 같은 것이다. 아름다운 외모만을 보고 결혼한 여성을 평생 책임지면서, 서로 의사소통의 과정도 가지지 못하고, 가질 줄도 모르는 이 남자. '사랑'이라는 말조차 모르는 드래곤이나 주인공 랜돌프나 다를 게 뭔가.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지도 못하고 명예를 지킨다는 말 아래에 죽음을 무릅쓰고 드래곤을 향해 달리는 기사의 모습은, 멋진 남성이라기보단 안쓰러운 막내 동생 같기도 하다.

  그래서 글을 읽고 나니, 이 글은 작가의 정통 판타지라기보단 특유의 감수성을 스윽 능청스럽게 감추고 있는 못된 글이 아닌가. 드래곤과 기사의 등장으로 이미 결말과 전개를 예측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슬며시 뒤통수를 때리고는 속았지? 라고 깔깔 웃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처음 이 글을 보았을 때는 그래서 꽤 웃었다. 나 역시 작가의 장난에 당해버렸다는 유쾌한 느낌이었다. 이 글을 거울에서 다시 보니 또 반갑고 웃음이 난다. 그러나 물론 이 작가가 이번에도 신작을 내지 않았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는 없다.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게 마무리하는 작가의 개성적인 단편들을 언제쯤 새로이 볼 수 있을지. 부디 다음 번에는 신작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 판타스틱 신드롬 - 정대영

  처음 글을 읽고 나서 갸웃 고개를 저었고, 다시 서두로 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목의 구성으로 보니 연작 소설의 형식이겠다. 판타스틱 신드롬이라는 제목과 글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그에 대해서 단정해서는 안 되겠다. 연작 소설이라고 하면 그 시리즈 전부를 고려해서 글의 제목을 선정했을 테니 말이다.

  정대영(이하 댕)님의 글을 읽어온 지도 꽤 시간이 많이 지났다. 대략적으로 잡아도 5년은 훨씬 넘었을 듯하다. 하이텔 VT동에서 장편을 몇 편인가 읽었었는데, 완결을 보지는 못했다. 그 때도 사람을 빨아들이는 문장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마찬가지다. 여태 완결되지 못한 수많은 글들을 아쉽게 되새기는 사람이 하나쯤 더 있다고 하더라도 작가분은 그저 흘리시려나, 모르겠다. 그렇게 많은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댕님의 글을 읽고 있는 걸 보면 아마 그 때 댕님의 글에 홀려 버린 게 틀림없다. 소녀를 아직 완결하지도 않고-새로운 에피소드가 올라오지도 않고, 도대체 인간이랑 도깨비랑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잔뜩 궁금하게만 해 놓고- 두문불출 보이지 않으시더니, 대뜸 표제작에 연작을 쓰신다고 나타난 게다. 원한이 쌓여서 바다가 되어도 되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독자라는 것이 한 작가에게 홀려 버리면, 중간에 글을 중단하더라도 이번에는 무슨 원인이 작가분이 글을 못쓰시게 했냐며 화살을 딴데로 돌리는 것을. 여태 기다리고 있는 이 글 저 글 그 글의 다음 화도 여전히 생각하면서도 새 글이 시작되면 또 다시 반가워 하는 것을.

  그런데 이번 시리즈는 조금 다르다. 멜키세덱 님이 '일본의 라이트 노블을 연상시킨다'고 하신 바 있는 특유의 빠른 속도감과 흡인력이 이 글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흡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댕님의 소녀 시리즈에서 보았던 피가 낭자하는 느낌이, 사건과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며 뭔가 더욱 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긴장감이, 이 글에는 없는 것이다.

  이 글은 평범한 일상 중의 하루다. 보통의 여자 회사원이 점차 사회생활에 쌓여가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서 몸부림친다. 그렇다고 격한 싸움이 보이지는 않는다. 월차 한 번 쓰지 않으면서 불평만 해대는 동료들에 대해서 머리 속으로는 냉소를 퍼부어대도 주인공은 침묵한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스트레스가 가득 차 있는데, 주인공이 택하는 것은 의외로 컴퓨터를 포맷하는 일이다. 게임, 웹, 아니면 요즘 열풍이라는 싸이질,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면 오히려 컴퓨터 속에 침잠하는 것이 빠를 듯한데 주인공은 도리어 컴퓨터를 완전히 초기화 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건 결국 자신의 삶을 포멧하고 싶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하지도 않고, 그저 '끈덕끈덕'해지는 감성에 불쾌감을 느낀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담아두는 감정이 터져 나올 계기도 없다. 처음처럼, 이러한 지금의 현실이 생겨나기 전의 상태로 포맷하기. 그렇게 하면 이 날뛰는 무의식을 진정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주인공인 여자는 지금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를 지움으로써 감정을 터뜨리는 계기를 만들려 한다. 정말 대단한 사랑을 했던 듯이 오열하고, 그리움에 몸서리치며, 선물 받은 물건들을 보며 펑펑 눈물을 터뜨리고 싶어한다. 감정을 지우고 싶어하면서도 그 감정을 표출하기를 원하는 양면의 감정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을 때, 여자는 감정을 표출할 계기쪽으로 기울어진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를 떠나 보냄으로써 자신을 괴롭히려 한다. 그러면 그 핑계로 자신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므로.

  다음화가 어떤 이야기일지 궁금해지는 장편은 많지 않다. 연작물은 그래서 조금 위험한 핸디캡을 안게 되는 것이다. 다음화를 궁금하게 하려면 가장 전통적인 방법이 결정적인 순간에 이야기를 돌연 중단하는 것인데, 연작물은 또 각각의 에피소드가 독립되고 완결되어야 한다. 그래서 연작물을 쓰면서 독자들이 다음 화를 기다리게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도 작가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저 글을 완결하고, 제목에 대해 한 번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 고작이다. 이 평범한 일상에서의 두 연인 이야기는, 서술로 하면 두 줄로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 글이 하나로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작가의 역량을 잘 알 수 있을 부분이다.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그리고 이번 연작물은 부디 작가 분이 처음 의도하신 모든 글이 다 나오기를, 완결하시기를, 소망해 본다.


  3.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 무한슬픔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이 제목의 글을 처음 보았을 때 여는 적잖이 당황했었다. 이 제목의 원문 글은 비평란에서 작가분이 밝히신 바도 있지만, 많은 고학력 여성들이 자신의 능력을 펼치지 못하고 가정이나 사회의 벽에 부딪혀 꿈을 포기하는 데에 대한 비판글이다. 직접 뵌 적은 없지만 글에서 나타나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보면 무한슬픔님은 분명 남자분일 듯하다. 그런데 이상적인 드래곤과의 스쳐 지나가는 성교 이야기를 쓴 바로 그 무한슬픔님이 웬 일로 이런 제목의 글을 쓰신 것일까. 호기심으로 유심히 보았더니, 이 역시 사랑의 이야기다. 하지만 드래곤과의 삼일에서 본 것처럼 로맨틱하고 환상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불신으로 비극적 종말을 맞는 연애의 이야기였다.

  이 글에서 제목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 여가 생각한 것은 '그녀'의 과거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조교로 생활하던 중에, 아버지의 친구인 교수에게 농락당한 과거. 자신의 아버지와 아는 사이라는 걸 확인한 순간 '그녀'는 공황상태에 빠지고, 칼을 아무렇게나 휘두르던 '그녀'는 나와 처음 만난다. 어쩌면 박사 과정을 마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어했을지도 모르는 그녀다. 어쩌면 그 분야에서 일인자가 될 꿈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돈과 권력이라고 하는 힘 앞에서 그녀는 무너져버린다. 그리고 그 꿈을 접는다. 사회의 높은 벽에 부딪힌 여학생들이 그 꿈을 접어버리는 것을 그녀로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그래서 모래사장의 글을 그녀는 되풀이해서 읽었던 것일까.

  그러나 '돈을 쫓아 떠나버린' 여자애를 저주하며 술을 마시는 주인공이, 시체 앞에서 가장 먼저 그녀를 의심하는 주인공이, 상처 입은 여학생을 구해줄 수 있는 조력자가 될 수는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사회의 한 일부분으로서의 자신을 보이는 것, 즉 그녀를 더욱 더 상처 입히는 가해자로서의 역할이다. 아직 스킨십에 공포를 일으키는 그녀의 여행에 동행할 상대로 애정행각이 심각한 친구 커플을 데려오는 것이 과연 주인공의 주장대로 그녀를 위한 것일까. 정말로 그녀를 위하는 마음이었다면 그녀의 비명소리에 머리보다 몸이 먼저 그 곳으로 달려가지 않았을지.

  사람이 사람을 믿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보여주려 했다면 이 글은 성공적이었다. 존경하던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사회를 불신하고 남성 전체를 불신하던 그녀는,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누군가를 믿고 사랑하지만 결국 그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니까. 그래서 이 글은 주인공에 대한 공포 소설 이라기보다는 죽은 그녀의 시각에서 공포 소설이다. 다리를 다쳐 꼼짝하지 못하는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한 바보 같은 여자가, 두 사람의 살인범으로 몰려 무참히 살해당한 비극적인 이야기다.

  여가 글을 읽을 때 아무런 정보도 없는 작가의 성별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소설에 등장한 캐릭터들의 성별을 유심히 보는 것이다. 특히 여성에 대한 묘사를 보면 거의 작가의 성별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성별과 반대되는 성별을 묘사하는 것은 확실히 힘들기 때문에, 여성을 묘사할 때 어색함이 느껴진다면 그 글의 작가는 거의 남자라고 보면 된다. 무한슬픔님도 그렇다. 무한 슬픔님의 글에서 등장하는 여성들은, 아쉽게도 마치 남성들이 그린 만화에 등장한 여자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성별이 강조되어 그려진 여성의 프로포션이 무한슬픔님의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떠올라 버린다. 돈과 감언이설과 권력이 있으니 어떻게 안 넘어가겠냐고 말하는 그녀의 대사에서 여는 실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을 농락한 교수가 어떻게 더 자신을 괴롭혔는지를 묘사하는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애정행각이 지나친 친구 커플은 또 어떤가. 싫다고, 그만두라고 말하는 대사를 보면 분명 남자가 지나치게 구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대사를 들으며 주인공은 그저 웃고 있는 것이다.

  여성 작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상화된 남성이 등장하여 모든 것을 다 구원해준다거나, 남성들이 생각하는 남성성이 아닌 여성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성성-포용심, 인자함, 온화함, 과감함-같은 것들로 과장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여의 지인들 중에는 여성 작가의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남자들은 80% 정도는 순정만화 주인공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 정도다. 물론 인간은 필연적으로 한 가지 성별을 타고 나기 때문에, 다른 성별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성별이 묘사하고 있는 그들의 성별을 조금만 유심히 살피더라도 이런 어색함은 조금 없어지지 않을까. 여류작가의 소설을 즐겨 읽곤 하는 남성 작가가 여성으로 오해 받을 만큼 여성 심리를 능숙하게 묘사한다거나, 남성작가의 소설을 훨씬 더 많이 읽었다는 여성 작가가 남성으로 오해 받는 일도 종종 일어나곤 하니 말이다. 결국 다른 성별을 자연스럽게 묘사하기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이해가 기반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성별 뿐만이 아니다. 작가가 하나의 인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얼마나 정밀한 작업인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이 표면적으로 만들어진 캐릭터가 마치 종이조각처럼, 껍데기처럼 보인다는 것은 어느 정도 글을 읽어내는 눈이 있는 독자라면 알 수 있다. 작가가 이 직업군에 대해, 이러한 성격에 대해, 이러한 지방색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공감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인물은 실존하는 듯 생명력을 가질 수도 있고 그저 소설의 구색 맞추기로 전락하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껏 판타지 소설에서 사람들이 손꼽는 멋진 캐릭터들은, 결코 평면적인 인물들이 아니다. 아라고른 왕은 어땠는가, 빌보 배긴스는, 모모는, 어스시 시리즈의 게드는, 초쟁이 후치는, 그들이 작가가 말하려는 스토리를 위해 역할 놀이를 하고 있는 종이인형이 아니라 생생한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멋진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장편만이 아니다. 단편이 다룰 수 있는 것이 한정되어 있다고는 하더라도 그 일부분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인물에 생명력을 부여할 수는 있는 것이다. 다른 글이지만 '판타스틱 신드롬'의 남자친구는 어떤가. 마지막 장면에만 등장했지만 맨솔 담배 연기를 일부러 고개를 돌려 내뿜는 그 동작에, 여자친구의 결별 선언에 일상적이고 과장되지 않은 대사로 반박하는 그것만으로 캐릭터는 그림이 아니라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길이의 제한으로 수단이 한정되어 있는 가운데 인물에 생생하게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이, 단편의 매력이 아닐까.


4. 밤 너머에 - jxk160

  처음에 jxk160님의 글을 처음 본 것이 '빼앗긴 땅'이었다. 무척이나 강렬한 글이고, 무거웠다. 서두 부분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추상적인 대화들로 논쟁이 이뤄지더니 중반 이후에는 성별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가 나왔다. 삶과 죽음, 새로 태어나는 것도 완전한 죽음도 없는 닫힌 세계의 이야기는, 고백하자면 여의 마음을 통째 가져가버렸다. 원래대로라면 그 달의 단평에서 이 글을 다루어야 했겠지만, 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면 너무 많은 내용들이 흘러나와 도저히 맺을 수가 없었다. 단점이 많은 글이었다. 거울의 글들이 대개 수준작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서두를 지나 중반까지 가기 전에 글을 읽는 것을 포기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글을 다 읽고 나니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되었다. 알 수 없었다. 난해하고, 플롯도 잘 잡히지 않고, 결말도 이해가 되지 않으며, 누가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도 때로 모호한 그 글에 어째서 그렇게 매료되었던 것인지. 그러나 지금은 알겠다. 작가분의 글이 가지고 있는 흡인력이란,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감추어지지 않는 독특하고 탁월한 상징과 설정이었다. 그리고 전작의 단점이 많이 극복된 이 글에서 작가의 설정은 더욱 더 빛을 발한다.

  이 글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닫힌 세계의 이야기이다. 전작에서는 섹스가 생명의 탄생과 아무런 연관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성별에 무심하더니, 이번에는 한 술 더 떠서, 인물들에게 성적인 특성들을 모두 제거해 버린 느낌이다. 인물들의 이름들도 성별을 짐작조차 할 수 없고, 그들이 서로를 지칭할 때에도 성별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은 생산과는 상관없는, 그래서 그 세계만으로는 지속될 수 없는 거대한 알 속에서 산다. 모든 생산품들은 외부로부터 공급 받으며 그들의 생산이란 물리적 생산이 아니라 지성에 의한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사고하고 사고 하고 또한 연구한다. 그들의 사회적 위치가 오직 그들이 이룬 학문적 완성도에 의해서만 결정되고, 모든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2명 이하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10살이 되면 혼자 살 수 있는 사회, 생명의 근원인 부모와는 무관하게 어린이들은 한 명의 후견자에 의해 키워진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두뇌의 힘이며, 사고의 능력이고, 비판하는 힘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모든 캐릭터들은, 아주 일부분을 제외하면 아예 감정조차 없는 존재들로 보여지기까지 한다. 여는 글 속의 캐릭터들이 독자들에게 어떤 성별로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름이나 대명사가 일단 먼저일 것이다. 제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부연설명이 없는 한 그 캐릭터는 여성이라고 생각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녀'라든가 '여자애' 라든가 여성성을 나타내는 지칭이 사용된다면 그 캐릭터는 여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다 없어진다면? 여는 실제로 인물을 지칭하는 데 성별의 특징을 나타내지 않는 작가들을 몇 번 보았다. 개인적인 이야기로 마지막 부분에 두 인물이 결혼을 했을 때야 사람들이 한 인물이 여자인 것을 알더라며 쓴웃음을 짓는 경우도 있었다. 도대체 독자들은 캐릭터의 성별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하는 것일까.

  그리고 여는, 조금은 섬뜩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여가 어떠한 인물이 여성일 거라고 판단하는 근거가, 너무나 편협하다는 사실이었다. 여는 어느새 이 글 속의 인물이 남성이라고 가정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놀랐다. 글의 중반에서 등장하는 ''출산'이라는 대사에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여성이라면 감정적인 대사를 할 것이다, 여성이라면 부드러운 표현을 쓸 것이다-, 이들처럼 학술적익이고 건조한 대화들, 이성에 근거한 대화를 하는 이들이라면 분명 남자일 것이다...라고 어느새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알 수 없다. 작가는 이 글에서 그러한 독자의 허를 찌르려고 한 것일까?

  이 소설은 사실은 페미니즘 소설로 보아야 할 것인가. 그러나 페미니즘 소설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제외하더라도 이 글은 매력적인 글이다. 이 글의 많은 상징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전제다. 어째서 공벌레의 에피소드가 서두에 나오나 했더니 후반으로 들어가니 그 세계에서 죽었다고 단정짓는 존재들이 우리들의 기준으로는 죽지 않았다고 하는 반전을 슬쩍 비춰주는 복선이었다. 범상하게 지나치는 인물들의 대화가 사실은 두 인물 사이의 커다란 감정적 에피소드였다는 것을 나타내주기도 한다. 셴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절제된 감정선을 따라 서술되는 사건은 건조하지만 전작에 비해서 훨씬 명쾌하다. 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전작에 비해서 훨씬 구체적이다. 종교에 대한 집착은 후반부에 들어가면 주인공 셴이 꾸는 악몽의 근거가 된다.

  오직 이성만이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며, 그 이성의 결과물만이 한 인간의 사회적 위치를 결정하는 이 사회에서 감정은 부수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글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들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다른 어떠한 존재로 보이기까지 한다. 르 귄의 어둠의 왼손이 그랬던가. 지구인이 우리와 절대 같은 수 없는 한 별에서 그들과 교류해가는 동안에 접하게 되는 수많은 오류들과 비틀림. 그 세계에서 성별은 생식을 위한 시기에만 발현되는 것으로 부수적이다. 그러나 그 세계의 인물들이 성별을 초월한 존재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남성이면서도 여성인, 성별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여성의 격정과 남성의 격정을 모두 갖고 있는 그들이란, 우리에겐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었다. 한 인간 안에 양면성이 모두 드러나 있더라도 그들은 우리와 다르면서도 또 비슷해 보였다. 그에 비하면 이 글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말 그대로 거세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태어나자마자 거세되어 성적인 특징은 아무 것도 갖추지 않은 듯한, 오직 머리만이 살아 움직이는 다른 존재. 일본의 '성계 시리즈'에서 보았던 외계의 인종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그보다 더 굳어 있다. 그래서 언뜻 언뜻, 이들이 비치는 감정적인 측면이 크게 보인다. 샤뮌을 기억하며 반 공황 상태에 빠지는 셴의 모습에서 오히려 안도감을 느끼게 될 정도다. 배신과 배반, 질투의 감정들이 실제 그 감정이 드러나는 형태보다도 더욱 강조되어 보인다. 이성만이 남은 세계에서도 감정은 완전히 제거될 수 없다는 것을 작가는 보여주려 한 것일까.

  중편소설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이 글은 전반부의 소소한 작은 에피소드들이 결말에 이르러 완벽하게 마무리되는 멋진 짜임새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장편보다는 짧고 단편보다는 길다고 하는 중편소설에 대한 추상적인 정의부터가, 중편 소설이 가진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단편처럼 명쾌하고 단순하면 중편을 쓸 필요가 없으며, 복잡하게 짜여진 인생의 다양한 측면을 다루려면 중편은 부족하다.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중편소설의 특징은, 양쪽 어떠한 분야로도 다루기 힘들 정도의 에피소드와 주제와 플롯을 요구한다. 이 글은 그런 중편소설의 특징을 잘 이해하고 적절히 짜여진, 잘 만들어진 글이다.

  물론 전작에서 나타난 단점이 완전히 극복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전작에 비해서는 덜하지만 인물들은 조금 버겁지 않나 싶을만큼 등장한다. 그런데 사실 인물들이 객관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인물이 많다고 느껴지는 것은, 이 인물들의 개성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감정이나 육체적인 면이 배제되어 있는 이 세계에서, 인물들의 대화가 이성적인 것으로 치우칠 수 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은 각자의 개성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가 인물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더라도 그 행동과 대사로 인물들이 특징 지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인으로서 중심 인물인 셴 샤뮌 시빌르, 파시파르가 과연 구별될 만한 개성을 가지고 있는가. 아이들 3인은 더하다. 주인공의 곁에 있는 게덴을 제외하고 램지와 아뉴르는 별로 구별되지 않는다. 3인이 함께 있을 때의 대화들을 옮겨 놓은 것을 보면 어떤 것이 누구의 대화인지 확신할 수 없다.

  또한 이 글의 길이에 비해서 삶과 죽음의 문제와 함께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두 주제, 감정에 대한 것과 종교에 대한 것이, 모두 삶과 죽음이라는 대주제에 아우러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전작에 비해서 훨씬 구체성을 띄며 서술되고 있는 글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글 안에 너무 많은 것이 들어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여는 여전히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전작에 비해서 이만큼이나 단점을 극복해 낸 작가가 아닌가. 다음 작품은 또 얼마나 성장해 있을 것인가. 이 서툰 독자를 얼마나 감동시킬지 기대하게 만드는 작가는 흔히 만날 수 없기 때문에. 빠른 시간 안에 작가의 다음 작품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5. 어딘가 이상하지만 - 명비

  명비님의 단편을 만날 때마다 여는 당황한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여를 당혹스럽게 할 것인지 염려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명비 님의 글을 읽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명비 님의 글이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서울요정 1호'와 같이, 스타벅스의 커피를 비틀어 놓은 듯한 수많은 상징물이 등장하는 이 글에서 주제를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주인공이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들과 일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은, 의인화된 일상에 대한 칭송 만큼이나 '어딘가 이상하'다. 그래서 이 소설은 어떠한 스토리를 갖추고 분명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설이라기보단 한 편의 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서른 넘은 남자가 20대의 여자와 연애를 한다. 매번 만나면 두 번 이상의 섹스를 하고, 그들 둘의 관계는 지극히 평온해 보인다.

  아무렇지도 않게 흡혈귀가 서울 시내에서 요정의 피, 인간의 피를 캔을 따 마신다. 이들이 무언가의 상징임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작가의 단순한 장난기의 발로인가? 알 수 없다. 장편란에서 본 작가의 글은 이보다는 덜 난해했었다.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때에 세계는 상징이 아니라 그 세계의 구성이 되었다. 전통적인 분위기의 문장과 복잡하게 짜여진 세계가 멋지게 어울린다. 그래서 묻게 된다. 과연 작가는 이러한 난해한 단편들을 쓰면서 무엇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배경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는 아니다. '먼여정'의 장편은 그래도 이 단편들만큼 난해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여는 작가가 일련의 단편들을 쓰면서 등장시키는 그 많은 고유명사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궁금해 하면서도, 계속해서 그런 궁금증을 풀어주지는 않고 새로운 궁금증만을 더하게 하는 작가에게 원망을 보낸다.
    

  6. 맺으며

  글에서 '인물'이란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주체인 동시에 플롯의 중심이 된다. 작가의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사건을 이끌어나가며 결말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이 인물의 요건이라 할 수는 없다. 인물이 단지 스토리의 일부분이고 플롯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면, 같은 주제와 비슷한 스토리로 이루어져 있는 글들은 다 비슷비슷해 질 테니 말이다.

  하나의 소설이 다른 소설과 구별되는 특징을 갖기 위해서, 소설의 고유한 개성을 갖기 위해 인물은 그 중심이 된다. 개성적인 인물이건 평면적인 인물이건, 그 인물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번 등장하고 사라질,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라면 꼭 개성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럴 때라도 인물은 자신의 역할에 맞는 '타당한' 특징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인물들이 묵은 여관의 주인이라면 여관 주인다워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다른 특징이 글에서 어떤 이유로 부각되었는지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고전인 반지군주의 '성큼걸이(황금가지 판과 예문 판의 스트라이더)'를 생각해 보자. 그는 처음 등장했을 때 주변을 탐색하는 자, 레인저로서의 특징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주인공을 도와주고 글에서 사라질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등장했을 때부터 카리스마 있는 인물로 보여지고 있다. 그가 담배를 물고 나타나 호빗들을 겁주는 장면은 얼마나 선뜩했던가. 그리고 글의 후반에 가자 그 카리스마의 원인이 나타난다. 이후에 '성큼걸이'는 '아라손의 아들 아라곤', 즉 인간의 왕위를 이을 자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처럼 인물을 나타낼 때에는 그가 어떠한 역할을 가지고 있는지 뿐만이 아니라 그의 출생, 그의 국적, 그의 성별과 같이 다양한 측면들을 모두 고려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소설 속의 인물은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들에게 다가서는 것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예전부터 종종 있어 온 마법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천덕꾸러기지만 알고 보면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인 주인공'이라는 설정 때문이 아니다. 그러한 설정은 예전에도 있어왔다. 해리는 그 억울한 상황에 참고만 있는 콩쥐가 아니고, 마법을 익힌 후에 자신을 괴롭힌 인물들에게 복수도 할 수 있는 인간적인 인물이다. 공부벌레인 헤르미온느는 공부를 좋아하는 모범생의 평면적인 특징을 모두 갖고 있지만, 부모님이 머글이기 때문에 억압받는다는 개성이 더해져 있다. 헤르미온느가 주인공 못지 않은 인기를 얻는 이유는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태도를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부분이다. 그 인물의 배경에서 유추되는 '예상되는 특징'과 그 인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개성'이 잘 조화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 인물에 매력을 느낀다. 앞서 잠시 이야기했던 '드래곤 라자'의 황태자도 그랬다. 칼과 이야기하면서 그 말솜씨에 휘둘려 연신 실수를 해대던 것이 그의 개성이었고, 왕위를 계승하기에 충분히 어울리는 능력과 카리스마가, 그의 '예상되는 특징'이었다. 그래서 주인공 후치가 '왕은 뒷모습을 보이는 사람이야'라고 말했을 때에 독자들은 과연 그렇다고, 황태자는 과연 왕으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위에서 다루었던 글들이 모두 장편이기 때문에, 단편에서는 달라야 한다고 말할 독자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꼭 다양한 에피소드와 다양한 사건이 있어야만 인물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단편은 한 가지의 주제와 사건을 농축시켜 담아내는 함축적 장르다. 인물 역시도 그러하다. 다양한 측면을 모두 가지지는 않더라도 저런 인물이 과연 있을 법 하다고, 타당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해야 하지 않을까. 인물의 개성을 나타내는 것은 아주 작은 요소로 충분하지 않은가. Crazyjam 님의 '사랑스런 아내여'에서 등장하는 붉은 드래곤이나, '판타스틱 신드롬'의 남자친구처럼.

  어떤 쪽이 더 매력적일까? 스토리에 따라,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슬퍼해야 하기 때문에 슬퍼하는 인물과, 깊이 갈등하거나 혹은 한순간의 정열에 빠져 사랑하고, 일상의 한 순간에 가슴 사무치는 슬픔에 눈물 흘리는, 바로 내 옆에 앉아 있는 사람 같은 인물 중에. 배경이 미래이건 현재이건 우리의 세계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인물은 그 자체로 살아있어야 한다. 작가들은 하나의 인물을 낳는 어머니 같은 존재다. 그 인물이 소설 속의 세계에서 살아 있으려면, 그들 자신이 움직일 법한 생명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작가들이 그 인물에 대해서 자식과 같은 애정을 가져 주시길 부탁드리며 이 달의 두서 없는 주절거림을 마친다.


댓글 2
  • No Profile
    이리스 04.09.25 00:13 댓글 수정 삭제
    마감에 맞춰 급히 서두르다보니 전개가 이상한 부분이 많습니다. 부디 양해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No Profile
    jxk160 04.09.28 15:14 댓글 수정 삭제
    멋진 감상, 평... 고맙습니다. >_< 기분 업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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