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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14호 거울 장편 감상

2004.08.28 02:1208.28

Melchizedek ( melchizedek@naver.com )
  


  한 달이라는 공백을 사이에 두고 글줄을 잇자니 어째 어색한 기분이 드는군요. 역시 부족하나마 한 페이지 안에서 끝내는 것이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에서 기억을 떠올려 볼까요. 지난 번에 거울의 장편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그 전에 인터넷 소설의 지는 해와 뜨는 해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했었고요.
  
  지난 번에도 말했다시피 넷상에서의 판타지 소설의 길은 멀고도 험난해 보입니다. 사실상 1세대 작가의 오프라인 진출 이외에서는 이렇다할 성과물도 나와주지 않고 있고요. 게다가 계속된 오프라인 진출 또한 장르 울궈먹기에 급급하다는 비판을 피할만한 일도 나와주지 못하고 있지요. 귀여니가 성공적인 중국 진출을 이룬 것과 정말 비견될단까요. :)
  그렇지만 사실, 이런 절대적인 비교는 그리 신뢰할만한 것은 아닙니다. 대중소설로서의 유연함을 따지고 보자면 이미 결론이 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대중적인 성공 여부가 문학작품 자체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절대적인 잣대가 돌 수 있을리도 없고요. 사실, 인터넷 소설 일단의 성공들이 어느정도나 지속될 것인가도 미지수입니다. 가까운 일례로 지금의 판타지 소설 시장을 보면 알 수 있지요. :-(
  
  현재 우리나라 판타지는 출판 시장이 아주 왜곡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창작활동이나 커뮤니티 활동도 90년대만큼 활발하지는 못합니다.(규모는 커졌을지 모르지만 전반적으로 질적인 대화―상호작용은 많이 떨어졌다고 보여요. 어쩌면 인터넷의 상용화로 인한 우리나라 인터넷 사회의 전반적인 현상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것이 ‘한국 판타지 소설은 죽었다’라는 것으로 귀결될 이유는 없습니다. 원래 처음부터 한국의 판타지 문화는 아주 자생적으로 성장해 왔던 분야니까 말이지요. 전반적인 대중의 흐름에서 떨궈져나가는 것 같다고 벌써부터 허둥거릴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아직 글을 쓰는 사람이 있고, 읽어주는 사람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어떤 식으로 변화해 나갈지는 모릅니다. 이런 류의 문제는 아주 유동적이고 변화하기 쉬운 것들이니까요. 작은 흐름이 큰 물결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법이지요. :)
  
  이제껏 팽창해 오면서 한국 판타지 소설이 손해만 보아왔던 것은 아닙니다. 우선, 양적인 성장 그 자체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어요. 군소 커뮤니티로 시작되었던 판타지가 이제는 서너개 이상의 잘 알려진 거대 인터넷 사이트로 자라났습니다. 대중 사회에서 ‘잘 알려졌다’라는 사실 만큼 큰 무기는 없을 겁니다. 적어도 장르 소설 중에서는 가장 성공적으로 대중들에게 접근한 케이스라고 보여지니까요. 대중들이 뭔지 모를 거부감을 느끼는 SF나 폐쇄적인 매니아 체제의 느낌이 강한 무협과 달리 별 무리 없이 일상사에 녹아들었어요. 적어도 판타지를 읽는 층은 10대 소녀에서 30대 아저씨까지 꽤나 다양한 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장점은 그 양적 팽창 과정에서 얻어진, 서브 장르의 다양화입니다. 퓨전이니 환협지니 하는 괴상한 장르명까지 이야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원하는 사람이 다양하니, 그 수만큼 분화가 이루어진 것 뿐이지요. 순정만화 풍의 야오이성 스토리 듬뿍의 미소년(녀)물에서부터 극강의 먼치킨물까지, 로우와 하이판타지를 모두 넘나듭니다. 거기에 더해서 한국적인 색채를 덧붙인 독자적인 세계관의 작품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혹자는 판타지가 B급 장르물로 떨어지는 것 같은 모모 작품들에 대해서 큰 우려를 표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것도 우리나라의 판타지가 분화되어 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느 한 쪽이 엄청나게 패배하는 일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거울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7편밖에 되지 않는 장편 소설을 두고 한국 판타지 소설의 흐름을 논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긴 합니다만, 초기의 거울에 비해선 상당히 그 색깔 면에서 다양해졌다는 것은 인정하실 거에요. 아직 거울은 가벼운 퓨전 장르물에 대해서는 엄격한 편입니다. 거울을 찾는 이들의 성향탓도 있겠지만, 그것이 소규모 커뮤니티 체제인 현재 거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있는 만물상이 아닌 바에야, 억지로 모든 서브장르를 보듬어 안으려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어떤어떤 사이트라고 표방하고 나섰다면 적어도 다른 곳과는 차별화할만한 대표적인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요즘의 거대 사이트들은 너무 천편일률적이거든요. :( 방문자의 편의를 돌보는 것도 좋지만 말에요.
  
  대신, 그 외의 분야에서는 상당히 괜찮지요. 앞 글에서 언급했으니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대표적으로 [소녀, 내달리다]나 [테라의 마법사]를 이야기 해 보고 싶어요.
  
  [소녀, 내달리다]는 기본 설정이 애니같고 일본의 라이트 노벨스러워요. 소녀들을 내세운 퇴마물이라는 점이라든가, 글쓴이의 서술자체가 술술 읽히는 부드러운 느낌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아직 어린 소녀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더욱더 그런 느낌을 받은 것 같아요. 마치 미소년전대물처럼 하나의 전형화된 패턴이랄까요. 아마, 이런 스타일은 기존의 단단한 팬층을 가지고 있겠지요. 글의 흐름 자체도 안정적인 편이고요. 너무 부드럽게 읽히는 긴 서술들에 쥐약인 저같은 사람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글쓴이가 글을 잘 리드하고 있고 장면을 눈에 보이듯 또렷하게(이건 독자 성향에 따라 정말 독이 될수도/익이 될수도 있는 부분이지요.:)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시리즈물 같은 성격을 풍기는 것도 특징입니다. 제가 잘 다루지 못하는 분야라 길게 이야기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상당히 인상깊은 소설이었습니다. 양적인 면이나 연재 면에서나 거울 장편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는 소설이라고 느꼈거든요.
  
  [테라의 마법사]는 거울이 꽤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즈음에 들어선 작품인데, 저는 이 작품이 들어서면서부터 거울이 좀 더 다양한 성향의 장편을 연재하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비교적)잔잔한 다른 작에 비해 [테라의 마법사]는 꽤나 하드한 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아직 이야기가 진행중이고 [테라...]가 과학적 아이디어 중심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소설이긴 합니다만, 조금 가벼운 SF물 정도로 보아도 무방할 거라고 봅니다. [테라...]의 설정들이 소프트한 SF 장르물에서 보았던 아주 낯익은 것들이거든요. 일례로 ‘링’의 존재를 봅시다. 사실, 인격을 가진 작동물에 대한 설정은 특별한 게 아닙니다. 당장만 해도 엔더 위긴 시리즈의 제인이라든가 스칼렛 위저드의 다이애나 들이 있겠군요. 무어, 이들간에는 세부적인 약간씩의 차이점이 있겠습니다만(다이애나가 감응두뇌라면, 링은 고스트라는 식의) 결국 소설에서의 기본적인 용도는 비슷한 것들이니까요. 그리고 그 비슷한 가운데서의 차이점이 [테라...]를 특징짓고요. 사자의 대변인에서 제인은 제4종족으로 소설의 큰 주제 중 하나의 줄기를 이뤄요. 그런 만큼 인간과 아주 ‘다른’ 존재이지요. 독자가 감정이입하고 지켜보기에는 조금 껄끄러운 존잽니다. 스칼렛...의 다이애나는 라이트노벨의 등장인답게 매우 가볍긴 한데 너무 가벼운 느낌이라 조금 거부감이 듭니다.(이건 제 자신의 문제일수도 있어요. 카야타의 먼치킨성 인물에는 아무래도 적응이 안 되는 인간인지라.-_-a) 링은 바로 그 중간단계 쯤 됩니다. 유사인간이지만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읽히지는 않습니다. 그저 발랄한 ‘인간’처럼 보이지요. 감정이입이 쉬워요. 이것이 테라...의 전체적인 느낌입니다. 작가분이 아마 가벼운 장르물을 쓰고 싶어-라는 기분으로 쓴 게 아닐까 싶습니다. 굉장히 특별한 새로운 가치의 소설이라기 보다는, 기존의 즐거움이 좀 더 세련되게 범벅되어 있는 장르 소설말이에요.(아니라면 뭐...;) 그리고 저는 그게 꽤나 성공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소녀, 내달리다]나 [dear papa], [pouring rain]등의 작품에 [테라...]가 덧붙여지고, 더불어 독자란의 [화조풍월]이나 [내일의 꽃]같은 작품을 언급한다면 거울의 장편을 두고 ‘한국 판타지 소설의 다양성’어쩌고를 운운해도 별 무리는 없겠지요? :) 특히나 굳건하게 독자 장편란을 지키고 있는 [화조풍월]이나 [내일의 꽃]은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거울 장편을 지켜주고 있어요. 먼여정의 장편들이 그야말로 연재가 ‘먼’ 여정을 하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말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조금 작금의 장편 연재 상황에는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현재 거울의 장편 작품 수는 7개. 완결작이 한 편 있고요, 분량으로 내용상으로나 아직 본궤도에 오르지 않았다고 판단되는 [엣센지아]나 [제로의 기억]을 제외하고 나면 4편이 연재되고 있는 셈입니다. 아니, ‘연재되고 있었다’라고 해야할까요. 8월달에 한편이라도 올라온 작품은 [제로의 기억]과 [마녀 이야기] 단 두 작품 뿐이고, 그남 가장 최근의 연재분은 8월 15일입니다. 완결작인 [디어 파파]도 거울 연재 중에 완결된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고요.(이 부분은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저는 디어파파를 다른 곳에서 보았기 때문에 말이지요, 아무래도 거울에서의 연재완결작이라고는 보이지 않아요.) 갓 1년된 신생 문학웹진에서 말입니다, 꾸준히 작가 수를 불려오고 있는 시간의 잔상란에 비하자면 조금 초라한 성적이 아닐까 싶은데 말이에요.
  
  
  
  
  거울의 장편들이 뭔가 혁신적이고, 기존의 문화를 와전 뒤엎을만한 창조적인 것들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분명 그 발걸음들은 작습니다. 하지만 가볍지는 않아요. 사실 A.D. 2000년을 넘어가는 세상에서 기존이 것을 전복할만한 새로운 가치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든 창조자들의 고민일거에요. 발명은 이미 기존의 것에 덧붙이는 쪽이 늘었고, 작가들도 텍스트의 텍스트를 찾기 시작했어요. 이제 우리나라의 판타지도 그럴 수 있는 날이 온 것이지요.
  
  아직 덜 자란 판타지 소설들의 때이른 출판 진출은 외국 판타지 소설들의 번역붐을 일궈냈습니다. 이제 한국의 일반 독자들도 꽤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저도 쬐끔은요. :▷) 제자리 걸음이라고 얘기했지만, 어쨌든, 출판된 수많은 다양한 판타지 소설들도 있고 말이지요. 이제 그 액기스(!)를 뽑아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얻을 것은 얻고 버릴 것은 버리는. 거울의 장편은 그 과도기에 있다고 보입니다. 앞 글에서 말했듯 서술은 안정적이고 작품 수준도 평균작 이상이지요. 걱정이 있다면 연재 주기정도인데, 이게 좀 심각하다고 봐요. 한 두작품도 아니고, 전체적인 침체기처럼 보이거든요. 빨리 부진을 씻고 좋은 글줄을 찾아오시길 빌겠습니다. 오랜만에 말해 볼까요.
  '건필하세요' :)
  
  
  
  
  p.s 사실은, 여러모로 할 말이 많았는데, 능력 부족으로 증언부언만 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글이고 하니 좀 더 그럴듯하게 쓰고 싶었는데 욕심만 너무 과했던 것 같아요. 마지막까지 뭐, 이렇습니다. ‘_’a
  그 동안 부족한 글줄 읽어주신 분들게 감사드리며 이만 허섭한 작자는 물러나겠습니다. 물론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좀 더 가벼운 자리에서 거울의 글을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거울을 위해 애쓰시는 많은 작가, 독자 여러분들의 건투를 기원합니다. 그럼 이만, 안녕히 계세요.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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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댕! 04.08.30 14:19 댓글 수정 삭제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
    라이트 노벨틱하다니- 웬지 신납니다. 우후후후훗..>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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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lchizede 04.09.02 13:07 댓글 수정 삭제
    댕!/쓸 때는 몰랐는데 어쩌면 언짢으셨을수도 있었겠네요. 물론 저는 좋은 의미였지만요.^^ 부드럽고, 유연한 느낌이 참 좋았어요.

    이지문/메일로 보낼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닌 것 같아 그냥 댓글로 붙입니다. 아직 몇 편 되지 않아서 긴 이야기 할 것도 없구요. 내일의 꽃을 보고 저는 르 귄의 어둠의 왼손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낯선 곳의 이방인...이라는 점 때문일까요.(갸웃) 어쩌면 뭐든지 비교해 보는 저의 나쁜 성정때문일지도 모르죠. 어쨌든, 새로운 개념을 일부러 설명하거나 주입시키려 하지 않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읽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앞으로 그걸 어떤 식으로 알려주실지 기대하겠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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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y 04.09.07 20:43 댓글 수정 삭제
    아앗, melchizede님의 거울 리뷰는 이번으로 끝나는 건가요. 이리스님의 단평과 함께 정말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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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lchizede 04.09.09 09:53 댓글 수정 삭제
    생각지도 못한 칭찬을 받아서 무척인 기쁩니다. 감사해요.^^
  • No Profile
    플루토 04.09.30 15:53 댓글 수정 삭제
    정확히 보셨어요~ 후후훗;;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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