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거울 14호 거울 단편 단평

2004.08.28 02:1008.28

이리스(earth_sea@hanmail.net)

  
  
  0. 들어가며
  
  더위에 모든 것에 의욕을 잃기 쉬운 여름이었다. 여(余)는 매일의 일과를 보내고 얻는 휴식시간에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애를 먹었다. 즐겨듣던 음악도 귀에 거슬리기 일쑤였고, 즐겨 하던 놀이도 짜증스럽게 불끈 솟구치곤 하는 것이다. 지난 달의 감상을 거른 것도 이 더위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8월의 하순이 되자 더위도 한풀 꺾였고 선선한 아침 저녁 나절의 바람이 글읽기 좋은 날이 되었다.
  
  이번달의 글은 유월의 것처럼 하나로 묶기에는 어렵다. 한 분이 쓰신 두 글조차도 서로 확연히 다르다. 각기 개성이 다른 글을 읽는 것은 즐겁다. 글마다 공통된 단점이나 미덕이 보이지는 않으니 하나씩 살피도록 하겠다. 순서는 표제에 게재된 순서대로 한다.
  
  1. 한여름밤의 꿈 - 무한슬픔
  
  무한슬픔님의 글이 이번에 두 개나 실렸다. 13호에 이어서 두 번째다. 두 달간 단편 넷. 글을 빨리 쓰시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간 모아둔 글이 많으신 듯하다. 독자로서는 많은 글이 눈 앞에 주어지면 고맙고 반갑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14호(8월)의 두 글은 그간의 무한슬픔님의 글에서 느꼈던 미덕이 부족해 보인다. 혹 여처럼 더위로 일에 효율이 떨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가 이 글을 읽고 가장 먼저 한 것은 작가의 다른 글을 다시 읽는 것이었다. 여가 기억하고 있던 그 느낌이 착각이었던가? 간결한 문장으로 순식간에 휘몰아치듯이 독자를 후리던 그 글은 어디로 갔을까.
  
  무한슬픔님의 글은 사건을 오래 붙잡고 있지 않는다. 감성적으로 사건에 대해 설명하며 함몰하지도 않으며, 사족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다. 꼭 필요한- 아니 어쩌면 조금은 부족한 듯도 보이는- 문장과 서술만으로 쓰여진 글, 마치 근육만이 단단히 붙어있는 야생동물같다. 만약 독자가 글에 부연설명이라도 요구하면 매섭게 노려볼 것 같은 느낌이랄까. 처음 거울의 표제작으로 나왔던 ‘원혼택시’도 그러했다. 주제라든지 목적의식이라든지를 물을 여유도 없이 섬뜩한 공포감만을 툭 던져놓고 가 버리는 것이다. 감정을 늘어놓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화자나 주인공에 동화되지도 않으며, 그러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여는 공포소설에 대해 잘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공포소설은, 거울에 실린 글이 아니라면 애써 피해 버릴 정도다. 아무리 좋아하는 감독과 배우가 나오더라도 공포라는 이름이 붙으면 보지 않으며, 공포작가로 누가 유명한지조차 모른다. 이러한 무식의 소치로, 여는 공포소설이라는 장르가 무엇을 미덕으로 삼고 무엇이 요구되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무한슬픔님의 글은 늘 감상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맹세하건데 읽기는 매번 열심히 읽었지만) 껄끄러웠던 부분에 대해서 말하려 하면 혹시 여가 익숙치 않은 이 장르를 모르는 탓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까 해서다.
  
  다른 글을 읽을 때 종종 여는 ‘그래서 작가는 무엇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가?’하고 묻는다. 질문하기 전에 자연히 그 답이 우러나는 경우도 있었고 숙고해서 재차 읽고 나서야 이것이 아닐까 답을 흐릿하게 짐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동일한 질문을 이제야 무한슬픔님의 글에 해 본다. 그래서 작가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한여름밤에 일어난 주인공 민호의 괴이한 사고에서, 사물들이 모두 주인공을 비웃고 주인공조차 함께 웃어버리는 이 결말은 무슨 뜻인가. 여의 능력이 부족한 탓에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이 글은 공포소설인가 아니면 환상소설인가. 장르의 구분이 반드시 명확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방 안의 사물이 모두 주인공에 위해를 가하고 비웃는 이 사건에 대해 여는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간결함을 넘어 부족함이 지나쳐 보이는 문장도 아쉽다. 잦은 단락변환으로 여백이 많은 이 글은 90년대의 일본 대중소설을 연상시키긴 하지만 명쾌하기보다는 허전하고 빈약한 느낌을 가중시킨다. 서술은 주인공의 시선과 일치되어 삼인칭인지 일인칭인지 혼란스럽다. 군데군데 삽입된, 주인공의 감정을 표현하는 짧은 문장들은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하고 거칠다.
  
  여는 ‘이블데드’를 보지 못해, 영화 속에서의 장면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이 사건이 영화 속의 장면을 기초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영화를 보지 않은 여가 더욱 잘 볼 수 있는 면도 있을 것이다. 소설이 영화의 오마쥬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 때라 할지라도 소설은 그것만으로 완전히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이 글만으로는 이 장면이 어떤 분위기였는지 여로서는 알 수 없다.
  
  만약 무한슬픔님이 이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언가 따로 있었다면, 부디 이 글을 새로 고쳐 써 주십사 부탁드린다. 간결하다는 느낌이 아니라 뼈대만 남아있는 것 같은 이 글이 지금껏 보아왔던 무한슬픔님의 다른 글이 가지고 있는 미덕을 가지기를 바란다.
  
  
  2. 드래건과의 삼일 - 무한슬픔
  
  무한슬픔님의 두 번째 글이다. 앞서 이야기한 ‘한여름밤의 꿈’과는 무척 대조적인 글이었고, 전작들과도 전혀 다른 느낌이다. 작가가 ‘공포소설’이라는 그간의 토대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발을 뻗으려는 시험작인지, 아니면 원래 여러 장르의 글을 쓰던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글 다 적잖게 여를 놀라게 만들었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려 둔다.
  
  이 글은 이종족간의 짧은 사랑- 혹은 생식행위의 전후라고 할지라도-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환상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그간의 무한슬픔님의 글에서 느껴졌던 날카로운 적대감이 없다. 화자(주인공과 일치되었건 아니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부드럽다. 이 글의 주인공이며 화자인 ‘나’가 성인식에 대해 언급할 때라던가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처럼 가끔 시니컬한 어조가 될 때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시야는 온순하다. 대부분 ‘이상형과 97퍼센트가 일치하’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여서인지도 모르지만.
  
  드래곤이 폴리모프한 자그마한 외모의 ‘그녀’의 허벅지를 만지다가 ‘하늘을 나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든가 하는 경쾌한 서술이 이 글의 매력이다. ‘그녀’가 표정의 변화도 별로 없이 초콜릿 파이와 애플파이를 성벽에 던지는 것과 같이, 이 글은 감정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별로 없다. 특히, 이 글이 일인칭소설이라고 하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그녀’의 감정은 거의 나타나있지 않다. 이종족이라는 점을 작가가 의식해서인가?
  
  그러나 이 글이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성적 판타지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이 글에 무언가 부족한 점이 있지는 않은가? 이종족과의 교감이, ‘그녀’처럼 초콜릿파이를 성벽에 집어던진다고 해서, 삼일간에 두 사람이 서로 이해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괜찮다고, 곧 이해할 거라고 하지만 나는 ‘그녀’의 표현 쪽에 손을 든다. ‘그건 아직 모르겠어.’ 라고. 바로 전날 ‘생각보다 크다’고 했던 말이 다음날에 ‘생각보다 크지 않다’고 바뀌어도 ‘그녀’는 그 차이를 알지 못한다. ‘그녀’는 미소로 넘어간 24명의 여자애와는 달랐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의 25번째 스쳐지난 여자가 되었을 뿐인 것은 아닌지. 화자가 고향으로 돌아가 이 일을 회상하며 자신은 종족간의 완전한 교감을 이루었노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이 글은 반전으로 독자를 휘어잡지 않는다. 감정묘사가 적어 감수성에 호소한다고 하기도 어렵다. 전체적으로 보이는 위트와, 곳곳에 삽입되어 있는 예리한 표현들이 오히려 이 글의 매력인 것이다. 이 글이 판타지소설로서 혹은 그보다 넓은 범주로서의 환상소설로서 가치를 갖추려면, 이 장점을 더욱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아니면 가연님이 먼저 지적해주신 바와 같이 로맨스 소설의 플롯을 취하고 있는 만큼 로맨스 소설의 장르적 미덕을 가져오는 것은 어떨까. 만약 무한슬픔님이 지금껏 써오던 글과 구별되는 다른 무엇을 쓰고자 한다면, 지금의 장점을 부각시키거나 부족한 점을 채워야 할 것이다. ‘그녀’는 이종족이어서 감정적인 면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화자의 경우는 어떠한가. 정말로 25번째의 여자를 꼬신 것이 아닌 무엇인가가 두 사람 사이에 있었다는 것을 독자가 느끼게 해 줄 수는 없을까. 이름조차 나오지 않은 ‘그녀’가 캐릭터리티를 더욱 확실히하고 두 사람의 감정 변화가 나타난다면 이 글은 판타지 로맨스 소설로서의 자리를 확실히 가질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무한슬픔님의 새로운 도전이 좋은 결실을 맺기를 축원하며, 보다 나은 글을 앞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3. 그림자의 꿈-redfish
  
  적어님의 글은 ‘크레바스 보험사’와 같이 희극적인 분위기를 가질 때도 있고 ‘TOP’와 같이 건조하고 빠른 서술일 때도 있다. ‘돌아오는 여름이 다시 여름인 것처럼’에서 보여주었던 절제된 감정으로 인생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다가, ‘나호 시리즈’의 일부에서 보이는 장난기어린 사건으로 웃음짓게도 한다. 그만큼 글의 주제에 따라 어떤 분위기와 문체를 사용해야 할지 잘 알고 있는 작가라는 뜻이다. 한 가지 문체나 주제에 대한 깊이있는 탐구라는 수준을 넘어서서 스스로 판 함정에서 허우적대면서 매번 똑같은 글만 쏟아내는 작가는 기성 문단에조차 흔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적어님의 글은 항상 독자를 기대하게 만든다. 이번에는 어떤 글로 여를 놀라게 할 것인지 기대하고, 또 대부분 만족스럽게 글을 맺는다. 거울의 독자중의 한 사람으로서 보다 자주 적어님의 글을 거울에서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이번의 글은 거울에서의 전작인 ‘돌아오는 여름이…’보다 전체적으로 무겁다. 서술 역시도 추상적이고 인물들의 대화?서술이 직접적이지 않고 상징적이다. 무리도 아니다. 그림자와 본체에 관한 이야기라니. 사물의 정과 반, 양과 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상징의 근원에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글이니 글이 무거워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상당히 긴 - A4용지로 15매가 훌쩍 넘어버리는 이 글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추상의 극단으로 치달아 사람들의 손에 잡기 힘들어지는 지점에 이르지 않도록 줄타기를 한 글 같다.
  
  그림자가 없는 세계에서, 그림자로 변하는 병에 걸리는 사람들. 그리고 그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꾸는 ‘그림자의 꿈’. 이것이 후반부에 나오는 <그림자 왕국>의 정체에 대한 복선으로 이야기 초반부터 등장하고, ‘나’는 그 그림자의 꿈에서 물 속에 침잠해 있는 여자가 되기를 바란다. ‘나’는 <그림자 사냥꾼>을, 아니 그림자가 달린 모든 것을 싫어한다. ‘나’는 꿈조차 제어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그림자왕국>을 두려워한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욕망과 공포가 내 것임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버스 안에서, 그는 다시 꿈에서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한다. 이 쯤 되면 오히려 이 ‘나’가 그림자왕국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리라는 짐작은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생뚱맞게도 나와 이야기를 종종 나누었던 하석이 그림자로 변해 <그림자사냥꾼>에게 잡혀가 버린다. 그리고 ‘나’는 공포를 무릅쓰고, 자신의 동료였던 하석을 되찾기 위해서 <그림자 왕국>에 들어선다.
  
  반복되어서 나오는 ‘나’의 꿈 이야기는 서늘하게 독자의 신경을 세운다. 이 꿈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이다. 그리고 글의 중반, 돌연 꿈속의 ‘나’와 ‘여자’의 시선의 위치가 바뀌며 ‘여자’가 그림자처럼 자신에게 녹아든다. 이것이 바로 후반의 해답이지만 독자들은 모른다. 글을 다 읽은 후에야, 어떠면 두어번 더 읽은 후에야 이것이 답이었고 이미 주어졌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가 그림자 왕국에서 만나는 것은 하나의 금기禁忌다. 붉은 벽돌길 밖을 나서지 말 것. 그것은 그림자가 없는 곳은 붉은 벽돌길 뿐이기 때문이며, 곧 그림자를 가진 존재- 실체 - 들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실체가 아닌 그림자가 자신의 실체를 만나, 자신이 그림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곧 적의에 휩싸인다고 <그림자 사냥꾼>의 입을 빌어 작가는 말한다. 자문해본다. 만약 내 자신이 실체가 아니라면, 누군가의 꿈으로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비실체라면, 실체를 만났을 때 처음으로 만나는 것은 공포감과, 적의가 아닐까.
  
  오래전 보았던 영화 ‘그림자 사나이’에서 ‘나’는 이름난 소설가이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글을 대신해서 쓰고 있다는 공포에 휩싸인다. 그가 범인을 찾기 위해 평생을 살아왔던 마을을 떠나 도시에 닿았을 때 그는 알게 된다. 자신이 본인을 주인공으로 쓴 픽션 속의 인물이며, 자신의 실체는 단 한권의 책도 출판해본 적이 없는 작가 지망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소멸되는 쪽을 택한다. 10대였던 여는 당시에 그 결말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환경과 나 자신이 실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생각이 나만의 생각이 아닌 것을 곧 알았다. ‘트루먼쇼’에서 주인공은 교묘하게 잘 짜여진 TV속의 인물에 지나지 않았고, ‘매트릭스’에서 세계는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 현실에 대해서 갖고 있는 이러한 느낌은 모든 사람이 한번쯤 해왔던, 그리고 마음 속 깊이 감추어왔던 두려움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결국 내가 누구인가라고 하는 자아에 대한 문제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 글에서 작가는 그림자를 욕망이며 또한 공포라고 이야기한다. <그림자왕국>의 경계를 넘을 때 실체와 그림자가 서로 뒤바뀌는 것처럼 ‘나’는 그림자로 ‘레이나’의 뒤에 붙어 있으며 ‘나’는 ‘레이나’의 꿈을, ‘레이나’는 ‘나’의 꿈을 꾼다. 서로가 서로를 동경하면서 또한 두려워한다. 안정된 사람이 자유를 동경하지만 자유를 만나면 안정을 잃을까 걱정하는 것처럼. <그림자사냥꾼>이 어째서 왕국 안에서와 밖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는지, 그 경계를 넘을 때 그들 역시 그림자와 실체가 서로 뒤바뀌었던 것인지, 하석과 하석이 체포한 범인은 동일인의 꿈에서 나온 두 개의 그림자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것들은 남아 있다. 이것이 글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또한 어째서 ‘레이나’만큼은 그토록 ‘그림자’인 ‘나’를 담담히 볼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 남는다. ‘나’가 ‘레이나’를 두려워하듯이 ‘레이나’도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욕망과 공포가 항상 같은 양으로 있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 그저 넘기는 것도 좋겠다. 확실히 풀리지 않은 점은 그대로 두어야 할 지도 모른다. 이 글은 실체와 허구, 욕망과 공포, 꿈과 그림자,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 양자를 모두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 글이 후반부, ‘나’와 ‘레이나’의 만남 이후로 긴장도가 떨어지는 것이 아쉽다. ‘나’의 꿈에 대한 공포와 함께 팽팽히 당겨졌던 서술이 왕국에서 레이나를 만나 관람차를 타면서부터 풀어져버리는 느낌이었다. 단편으로 시작해서 단편 구성에 치밀한 작가가 어째서 이런 아쉬움을 남겼는지 의문이다. 무거운 주제를 끝까지 끌고 가는 것이 무척 어려운 작업임에는 틀림없지만 글의 전체적인 구성이 흐트러져서야 안 된다. ‘나’가 그림자의 모습으로 <그림자의 왕국>을 나와 경찰서로 들어가는 지점에서는 너무 달리고 있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마지막까지 서두름 없이, 마무리해주었으면 더욱 좋았겠다.
  
  4. 단출취산꽃차례-명비
  
  A4용지로 29장. 원고지로 250매 가까이 되는 분량이다. 단편으로는 꽤 길다. 원고지 70매 가량을 단편소설로 보통 잡으니, 중편으로 넣는 것이 맞겠다. 그러나 내용으로 보면 또 중편소설로 잡기에 무리가 있다. 일반 순문학에서의 기준이지만 단편소설이 인생의 단면을 예리하게 잡아내는 것을 말하고 장편소설이 인생의 복잡한 면을 다루는 것을 말한다고 할 때 중편은 그 중간, 인생의 조금 복잡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고 하는 막연한 기준을 갖게 된다. 즉 중편소설은 단편소설보다 분량면에서뿐만 아니라 구성과 내용 면에서도 더욱 양적으로 풍부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환상문학의 경우에도 그 비슷한 기준을 둘 수 있겠다. 그러나 아쉽게도 단출취산꽃차례에서 이야기하는 ‘이야기’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달의 공주님과 염마왕, 나나와 김씨, 이들이 서로의 이야기속에서 등장하고 얽히는 이야기지만, 반복되는 서술 부분을 제외하면 그들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는 단순하다.
  
  이 글 전체를 정독하고 난 느낌은, 여전히 문장이 참 멋지시구나 였다.
  이 글 전체를 두 번 정독하고 난 느낌은, 여전히 이야기를 난해하게 쓰시는구나 였다.
  
  글을 재차 다시 읽어가면서 글의 느낌이 잡혔다. 2003년 초여름이라는 글의 서두의 이야기와는 전혀 맞지 않을 듯 싶은 서술과, 인물들의 대화가 기이하다. 차라리 이 글이 염마귀의 부분을 서술하고, 달의 공주의 이야기를 서술할 때에는 과거의 내용이겠다 싶어 납득하지만, 그런 부분에조차 ‘신촌’이 등장하고 ‘신대방’이 등장하니 사극에서 등장한 핸드폰을 본 것처럼 마음이 편치 않다. 작가가 이러한 부조합을 의도하였다면 할 말이 없다. ‘니나’(송구스럽지만 이 이름을 보고 여가 떠올린 것은 ‘니나노’였다.)라는 인물은 2003년의 서울을 살고, 홍등가에서 불빛 아래에서 몸을 팔지만 대화는 아무리 최근으로 잡아도 일제 말엽 같다. 이것도 명비님이 계속 써온 ‘서울’처럼 이름만 서울인 세계인가. 이 세계는 이제 현실의 비틀기를 벗어나 아주 먼 과거의 이야기로 바뀌어 버렸는가. 알 수 없다. 작가는 어째서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이야기라고, 전설이라고, 자신이 쓴 글이라고, 들려주게 하여 이들의 세계를 다시 꼬아놓을까. 게임에서 종종 등장하곤 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과거와 현재가 서로 꼬여 있는 것인가. 과거가 미래에 개입하고 미래가 다시 과거의 원인이 되는 구조처럼 이 인물들은 서로가 서로를 언급하면서 실은 한 인물이기라도 한 것인가.
  
  도대체 이 글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주제의 이야기가 아니다. 작가가 담고자 한 사상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서로 관계되어 있는가. 의식의 흐름처럼 감정에 함몰되어 치닫던 전작들에는 시간이 꼬인 적은 없었다. 적어도 여가 읽기에는 그랬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 여는 완전히 패배를 선언하고 말았다. 여의 읽기 능력이 이렇게 부족한 줄 몰랐다. 어째서 몇 번을 다시 읽고 다시 읽어도, 이 플롯이 잡히지 않는 것인지.
  
  그러나 여전히 여는 명비님의 다음 글을 기다린다. 사전에서 외에는 본 적이 없었던 단어들들이 자리잡은 문장을 보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며, 노래하듯 이어지는 문장을 만나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이 그것만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다가서려면,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지는 좀 더 명확해야 하지 않을지. 읽기 능력이 부족한 여 같은 독자를 위해서라도 조금은 독자를 배려해주실 수는 없는지, 감히 바란다.
  
  5. 나으리 나으리 우리 일곱 나으리 - unica
  
  전형적인 unica님의 글이었다. 어쩌면 작가 본인은 달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배경이 천계로 바뀌고 서구적 이름들이 문곡성 나리라든가 거문성 나리라든가 하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긴 해도, 이 글은 오래 전부터 보아왔던 unica님의 소녀적인 감수성의 연애담에서 별로 바뀌지 않은 이야기였다. 여전히 유쾌하고, 과거가 어땠든 앞으로는 행복만이 할 거라는 희망찬 결론을 내리고 맺는다.
  
  그러나 아쉽게도 전작들에서 느껴졌던 아쉬움들이 여전히 이번 글에서도 남아있다. 문장이 길어져서 엉켜 생겼던 비문들은 눈에 들어나지 않지만, ‘백년 묶은’이라는 표현처럼 맞춤법이 틀린 것이 여전히 보인다. ‘나으리’는 나리의 시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미약한 안도의 한숨’ 같은 어색한 표현은 분위기를 전통적으로 만들려 하다 생긴 오류일 듯하지만.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장난스럽게 너스레 떨며 이야기하는 이 즐거운 화자의 소설에, 여전히 복선이랄 것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건이 화자의 ‘말’을 빌어 설명되는 것도 여전하다. 유아는 구미호 모녀가 온다는 것에 어째서 그 어미쪽이 자신과 말을 놓은 의자매 사이임을 몰랐을까. 아이를 보고 바로 알았던 것을 보면 미리 몰랐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독자에게는 말해주지 않다가, 후반에 가서야 문곡성 나리에게 유아가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저러해서 이랬지요 라고. 아이 구미호에게 물려 쓰러진 것을 치료한 것이 문곡성이라는 걸 나중에 문곡성 본인에게 쏘아붙이는 것도 ‘유아’ 본인이다. 그 전까지는 ‘아버지의 입맞춤’같다고 느꼈다는 것밖에 나오지 않다가, 문곡성이 자신의 몸을 걱정하자 당신이 치료해주지 않았느냐고 되려 쏘아붙인다. 짐작이었다면 자신의 짐작이 맞은 것에 기뻐하는 것이라도 있어야 할텐데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쏘아붙일 뿐이다.
  
  구미호 아이 ‘연랑’의 방에 결계를 만든 것이 문곡성이라는 것을 모른 듯이 의아해하더니, 연랑을 달랜 후에 말할 때에는 문곡성이 결계를 만들었으니 감사하라 말한다. 독자를 놀라게 하려는 반전도 아니다. 그냥 계속해서 자신이 스스로 궁금해하고 또 스스로 당연하다는 듯이 답을 말한다. 파군성과의 내기로 구미호가 인간이 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도 후반에야 평이하게 이야기한다. 손 가는 대로 글을 써 나간 것이 아니라면, 독자가 납득이 안 갈 설명은 삼가는 것이 좋겠다.
  
  또한 우문愚問이지만, 이 나으리들이 꼭 일곱 나으리여야 했을까? 사실 글의 전체적인 면에서 보면 문곡성과 파군성 나으리 두 명 정도가 비중이 있을 뿐이고, 결론을 보면 그저 제목을 ‘나으리 우리 나으리’로 해도 무방했을 듯하다.
  
  서로 상극처럼 보이던 두 사람이 만나서 티격태격하다가 사실은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여 해피엔딩을 맞는다는 것은 로맨스물의 전형적인 패턴 중의 하나다. unica님의 글에서도 ‘그림’에서 이미 본 바 있듯이 이런 구성을 몇 번 사용했던 적이 있었다. 전형적인 패턴이라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신데렐라 이야기를 변형시킨 드라마가 여전히 대중적으로 인기를 모으는 것처럼 패턴은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패턴이 되는 법이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전형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신데렐라물에서 여자애가 아주 착하기만 한 애가 아니라 강단도 있고 성격도 똑부러지더라는 변형, 왕자님이 그저 친절하기만 한 게 아니라 처음엔 무뚝뚝하다가 여자애의 마음에 변화하더라는 정도의 변형, 사람들은 적당히 변형되고 개성을 더한 패턴을 즐겁게 다시 즐기는 것이다. unica님의 소녀적인 글에서도 그러한 변형을 기대하고 있다. 패턴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활용하면서 작가의 톡톡튀는 개성을 더한 멋진 글들을 거울에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6. 병 속에 든 바다 - 루나벨
  
  루나벨 님의 글이 종종 탐미로 치달을 때가 있다는 것은 지난번 ‘월아’의 감상 때 이야기한 적이 있다. 감수성 풍부한 소녀들의 글이 그러하듯이 루나벨 님의 글은 거울에 게재되기 시작한 후에도 계속 변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이 작가 본인이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매번 조금 다른 느낌으로 보게 되는 글은 또 각별한 기쁨이다.
  
  이 글의 장점은 1인칭 소설에서 나타나는 감정의 흐름들을, 정말로 치밀하고 꼼꼼히 잡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절친한 친구의 죽음 이후에 서서히 사물을 잊어버리면서 자신의 머리가 이상해지고 있다고 느끼는 소녀가 자신의 방, 밀폐된 공간 안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후의 이야기는, 이 플롯만으로도 무거운 중압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이 글의 감정 묘사는 독자를 화자에 매우 가깝게 밀착시켜 주인공과의 동화를 유도한 후, 복잡하고 불안정한 감정의 노선을 달려나간다.
  
  [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었고,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고 어느 누구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했다. ]
  
  선언하는 문장 앞에는 여학생이 겪어온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이 담담하게, 그러나 숨이 막히도록 서술되고 있다. TV를 끈 후에 극심하게 찾아오는 고독, 영화 한편을 수십번을 돌려보았던 청소년기의 열정, 담배를 꺼내 피우는 행위로 나타내지는 금기에 대한 동경. 1인칭에 동화되어서 읽어가다 보면 독자까지도 그러한 과거를 겪은 듯이 가까워져서,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에 동화되어버릴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마침내 화자는 상상으로 구축된 바다에 닿는다. 자신이 만들어낸 공상의 세계인 바다에는, 자신이 꿈꾸던 이상의 모든 것인 ‘그’가 있다. 너무나 긴 시간 후에 처음 만난 타인에 대해서 경계하던 마음이 허물어진 후에 ‘나’는 급속도로 그에게 의존하게 되어버린다. 그것은 그가 있었던 바다를 동경하는 마음으로 표현하지만 사실 ‘나’는 자신의 그림을 그려줄 누군가를 동경하고 있는 것이다. 벽에 걸려있는 마티스의 그림 대신에 자신의 그림이 걸려 있는 환상을 보는 것은, 자신을 직면하고자 하는 무의식의 발로인 동시에 누군가가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발로이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며, ‘나’의 마음은 여전히 K의 죽음으로 텅 비어 있다. 누군가의 아이를 임신하고 그 자신이 환상에 시달렸을지도 모르는 K, ‘나’는 K의 죽음을 잊어버렸다고 글의 초반에 말하지만 그것은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K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것을 뜻하는 것이다.
  
  환상에 함몰되어가면서 나는 비로소 K의 죽음 이후 자신이 삶의 의미를 잃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 뿐이다. 나는 ‘그’의 환상에 더욱 집착하고 그가 자신을 보듬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므로 만날 수 없다. 자신을 사랑해줄 존재를 원한다면 스스로를 유예한 감옥에서 자신의 발로 걸어나와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있는 바다 속에 빠져드는 길을 택한다. 쉬운 도피처. 소중한 친구의 죽음에서 헤어나지 못한 ‘나’는 환상 속으로 도피해버린다. 영원한 도피라는 ‘죽음’으로. ‘나’는 그것이 본연의 나 자신에게 도망치지 않고 맞서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과연 그런가.
  
  글을 읽고 난 후 마음이 무거웠다. 독자와 화자의 거리가 가깝다보니 ‘나’가 택한 죽음이 더욱 심장에 닿았던 모양이다. 글에서 결말을 어떻게 택하는가 하는 것은 작가의 마음이며, 그것에 대해서 독자가 뭐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 독자가 무어라 말하든 작가는 거기에 연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여는 아쉽다. 환상 속에 침몰해가던 20대 후반의 아가씨가 왜 그 곳을 빠져나오지 못했는지 아쉽다. 왜 죽음이 본연의 자신을 만나는 길이라 여겼는지 안타깝다.
  
  7. 맺으며
  
  글을 쓰는 작가로서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독자들은 작가에게 무엇을 가장 바랄까? 이런 물음에 정확한 답을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는 작가의 눈이 아니라 독자의 눈을 가지고 글을 본다. 작가 본인이 보는 눈은 다를 거라는 이야기다.
  
  독자를 만족시키는 글을 쓴다는 것은 쉽지도 않고, 꼭 그것이 옳은 것만도 아니다.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좋은 책이라 할 수도 없을 것이고, 100년 후에 새로 가치를 평가받을 글도 얼마든지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소설이라는 장르는 항상 독자를 전제로 하고 만들어진다. 작가가 어떠한 독자를 상정해서 쓰는가는 작가의 마음이지만, 모든 독자를 무시하고 쓰여지는 소설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글은 작가의 마스터베이션이 아니고 독자와 교감하는 수단이어야 한다고 여는 믿기 때문이다.
  
  단편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모두 그러한 것은 아니겠지만, 짧은 내용 속에 들어가 있을 결말을 찾기 위해서 눈을 부릅뜬다. 그러한 독자에게 적절한 힌트를 주고 나중에 답을 제시하는 것이 작가의 기술인 것이다. 독자의 뒤통수를 쳐서 깜짝 놀라게 하는 것도 독자로서는 즐거운 일이고, 예상이 적중해서 결말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또 하나의 재미는 글에 숨어있을 작가의 의식을 찾는 것이다. 작가가 이 소설 뒤에 어떠한 생각을 숨기고 있는가 하는 것, 소위 ‘주제의식’이라는 것을 찾았을 때 독자는 그 글을 다른 각도로 평가할 기회를 얻게 된다. 숭고한 사상을 담고 있어서 존경받을 소설도 있을 것이며, 즐겁게 읽었지만 주제면에서는 공감할 수 없다고 평가될 글도 있을 것이다. 환상소설이든 순소설이든, 소설이라는 형식-단편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한 이 두 가지 부분이 여가 글을 읽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문장이 유려하고 빼어나서 매력적인 글도 있고, 이야기가 박진감있고 재미있는 글도 있다. 이것 역시 글 읽는 즐거움이다.
  
  매번 거울의 표제작과 단편란의 글들을 읽으면서 여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이야기나눌 길 없는 작가를 상정해서 묻는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이 글의 가장 멋진 점은 무엇인가. 작가는 이 글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여는 정말로 궁금해졌다. 작가들은 왜 소설을 쓸까. 어떨 때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며, 왜 특정한 글을 쓰게 되는 것일까. 앞으로도 계속 여는 그런 질문을 되풀이할 것이다. 그 답을 얻으려면 아직 많은 글을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댓글 3
  • No Profile
    redfish 04.08.30 22:32 댓글 수정 삭제
    성실하고 정성스러운 감상 늘 잘 읽고 있습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
  • No Profile
    무한슬픔 04.08.31 00:03 댓글 수정 삭제
    많이 깨닫고 느끼게 되네요. 좀더 공부하고 해서 올린 단편들을 고쳐나가도록 해야겠어요.
  • No Profile
    이리스 04.09.02 17:06 댓글 수정 삭제
    작가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아야 할텐데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다면 기쁩니다.
분류 제목 날짜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12 - 헤임스크링라 14 2004.10.30
기획 [SINBIROUN iyagi를 통해 본 팬덤Fandom의 한계와 미래 (1)]3 2004.09.25
장르 북토피아 - 장르문학의 터전을 꿈꾸는 전자책 2004.09.24
기획 SF 벼룩시장2 2004.09.24
장르 과학소설 읽는 행복한 세상 만들기 2004.09.24
거울 15호 거울 단편 단평2 2004.09.24
그림이 있는 벽 소환(召喚)3 2004.09.24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11 - 헤임스크링라 13 2004.09.24
장르 리딩 판타지 2004.08.28
거울 14호 거울 장편 감상5 2004.08.28
거울 14호 거울 단편 단평3 2004.08.28
그림이 있는 벽 잠식3 2004.08.28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10 - 헤임스크링라 12 2004.08.28
장르 테일즈 소개 2004.07.30
거울 13호 거울 감상기 2004.07.30
그림이 있는 벽 Snowy day in July2 2004.07.30
게르만 신화 윙링아 사가 9 - 헤임스크링라 11 2004.07.30
장르 드림워커 소개3 2004.06.25
거울 12호 거울 감상기 2004.06.25
거울 6월 거울 단편 단평1 2004.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