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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밀이 베이징 현지에서 전해드리는! 은 아니지만 과거의 베이징으로부터 전해드리는! 아시아 퍼시픽 SF 컨벤션 리포트입니다. 컨벤션은 5월 19일과 20일, 양일에 걸쳐 열렸는데요. 첫날은 19일 후기는 여기에서 읽으실 수 있어요.

둘째날 아침이 밝고, 중국답게 푸짐한 조식을 먹은 저는 무거운 몸과 가벼운 마음으로 (^^) 일행분들과 함께 행사장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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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참관한 프로그램은 ‘SF에서의 여성 파워’ 토크였습니다. 여성의 SF 창작, SF 속의 여성, 젠더의 제약을 돌파하는 여성들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패널 토론이었어요. K.A.Teryna(러시아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Lucie Lukačovičová(체코 작가, 편집자, 번역가), 糖匪(중국 SF, 판타지, 무협 작가), 双翅目(작가 및 철학자), 杨枫(청두팔광분문화사 CEO), 그리고 한국의 김보영 작가님이 패널로 참석하셨습니다.

이번 토크는 중국측 패널이 여러 명 참석한 덕분에 중국 SF계의 여성 이슈들을 여러 각도에서 들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방청객들에게 정식으로 통역이 제공되지는 않아서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대략적인 쟁점들은 알 수 있었어요.
컨벤션의 주최측인 FAA의 인력 구성도 그렇고, 컨벤션의 초대 손님들이나 참관객들이나 여성이 많이 보여서 중국 SF계에는 전반적으로 여성 비율이 높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도 여성 차별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중국에서 여성 작가들이 전면으로 출현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가라고 하면 너무나 당연하게 남성을 떠올리는 분위기였다고 해요. 지금도 그 불균형은 여전해서 남성 창작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반면, 편집자들은 대부분 여성이라고 하더군요. ‘남성이 큰 일을 하고 여성은 뒷받침을 한다’는 형국이 지속되고 있는 셈이지요. 특히 SF라면 성별이 무관해질 미래를 자유롭게 상상하고 준비할 수 있어야 할 텐데도, SF계의 많은 사람이 여전히 성별 고정관념에 얽매여 있는 현실을 성토하는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한국 문학은 여성 창작자들이 많은 편이지만, 학문적 권위와 명예는 중견 남성 작가들이 독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2016년 문학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서 공론화되었듯이, 주로 여성으로 구성된 편집자들이 권위 있는 남성 작가들을 지원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 자주 발생한다는 문제점도 떠올랐어요.
저는 남성 작가들만 ‘큰 일’을 한다는 고정관념을 해체하려면 남성 작가들의 독점하는 권위를 여성 작가들이 가져오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문학적 권위 자체가 사라져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학 창작의 권위가 유지되는 한, 그 권위를 뒷받침하고 보조하는 계층(가장 대표적으로는 편집자)이 끊임없이 여성화-주변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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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분이 김보영 작가님)

그런 의미에서 러시아의 작가 K.A.Teryna 님의 발표는 시사점을 던져주었습니다. 문학에서 작품과 작가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관점이었어요. 여성 작가들이라고 이른바 ‘여성적인’ 이야기만 쓰는 것은 아니고, 남성 작가들도 여성에 대한 훌륭한 이야기들을 쓴 바 있으니, 이 맥락에서 작가에겐 성별이 없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작가의 성별과 무관하게 작품은 그 자체만으로 독해되고 평가받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요.
김보영 님도 한국의 듀나 작가를 언급하며 비슷한 맥락의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한국 현대 SF작가 중 ‘원로’격이라 할 수 있는 듀나는 공식적으로 성별과 신상을 밝히지 않은 채 작품활동을 하고 있고, 이는 작가의 성별과 무관하게 작품 자체만으로 읽힐 수 있는 조건으로 작용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SF계에서 가장 권위 있어야 할 작가가 이러한 노선을 택하고 있으니, 작가들의 성별에 따라 작품에 권위를 안기거나 안기지 않는 등의 시도가 전체적으로 무색해지는 분위기가 있다는 것이죠.
저는 새삼 한국의 이러한 사례가 꽤 이례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작가가 자신에 대한 성별 특정은 물론 개인성 자체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한 장르에서 주요한 비중을 담당하는 경우 말이죠. 김보영 님 역시 자신의 작품들이 작가의 성별을 비롯한 개인성 일체에 대해 생각할 수 없도록 쓰는 것이 목표라고 밝혀주시기도 했어요. 이런 시도는 여성 작가들이 성별의 편견을 극복할 전략으로도 유효하겠지만, 남성적 권위의 아우라를 벗어난 진정한 문학적 가치를 추구하는 남성 작가들 역시 고민할 방향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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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마이크를 쥐신 분이 Lucie Lukačovičová 작가님)

하지만 성별의 라벨을 부착하지 않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작품 앞으로 나와야 할 때도 있고요. 체코의 Lucie Lukačovičová 님은 여성 작가로서 자신이 여성임을 밝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말씀해주셨어요. 체코에서는 여성 작가들이 성별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남성 필명을 쓰는 경우가 많고 자신도 그런 조언을 받았지만, 자신은 여성으로서 맞서 싸우고 싶었기 때문에 여성의 이름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고요. 자신은 소위 ‘여성적인’ 스타일의 글을 쓰지 않지만, 여성 작가라고 해서 창작의 방향이나 주제에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되며, 무엇이든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국의 침략과 공산주의 정권의 탄압으로 여러 질곡을 겪어왔던 체코 문학계에서, 언젠간 자신의 조국이 사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여성 작가가, 여성 작가로서의 족적을 사회에 남기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었습니다.

여러 나라의 여성 작가들이 모여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는 정말 뜻깊었습니다. 국가는 다 다르지만 여성으로서 느끼는 문제의식은 비슷하구나 싶어서 유대감도 들었고, 저마다 다른 현실에서 비롯된 고유의 방향과 생각 들을 더 많이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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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김주영, 김보영, Vera, 아밀)

토크를 마친 뒤, 저와 김주영 작가님, 김보영 작가님이 함께 이번 FAA에서 한국 패널들 초청을 담당해주신 Vera님을 만나 대화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길다면 긴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작품 교류를 진행해왔던 거울과 FAA 양측이 드디어 직접 대면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는데요! 양측 모두 이번 교류가 참여 독자들에게나 양국 독자들에게나 무척 뜻깊고 귀중한 경험이었고, 앞으로도 다른 방법으로 교류를 지속하고 싶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했답니다.
양국 독자들의 반응이 어땠는지도 공유했는데요. 중국 측 작가들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젊고 이력이 짧은 작가인 완샹펑녠의 <후빙하시대 이야기>가 한국에서 유난히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는데, 이에 대해 Vera님이 무척 신기해하는 반응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왕샹펑녠 작가가 기존에 인지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저희 또한 김보영 작가님의 <진화 신화>, 김주영 작가님의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 그리고 저의 <로드킬>이 중국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끈 작품들에 속한다는 말에 놀랐어요. 이런 교류는 작가들이 한층 넓은 독자층에 작품을 선보일 수 있을 뿐아니라, 국내의 여러 조건이나 가치 기준을 벗어나 새로운 차원에서 평가받을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현대 SF 출판 시장은 서양 작품들이 독식하다시피 하는 형편이고, 서구 SF가 한국이나 중국과 같은 문학적 ‘신대륙’에 1세계의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지탱되는 경향이 있는데요. 이제까지 한국 SF계는 “국산 SF도 재미있다”라고 자국 내 독자들만을 설득하는 방식으로 그 흐름을 극복하고자 했는데, 이번 한중 교류를 통해, 더 나아가 APSF컨벤션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보게 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로의 문학을 많이 접하고 교류를 이어간다면, 기존의 1세계 중심적 출판 경향과는 다른 조류를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요. 더욱 주체적인 저변을 넓힐 수 있을 테고, 더 나아가 SF 장르 자체의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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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배명훈, 아밀, 김주영, 윤여경, 김보영)

공식 일정이 끝나고, 이번 컨벤션에 참여한 한국인 방문단 분들이 모두 모여 기념 사진 촬영을 했습니다. 거울 필진 작가들도 김보영 작가님과 함께 따로 모여서 사진을 찍었어요.
사실 한국에서도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사는 작가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기가 쉽지 않은데요. 컨벤션 자체도 좋았지만, 짧은 일정이나마 모처럼 많은 작가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중국 음식도 너무너무 맛있었고요! :)
여러분은 어떠셨나요? 컨벤션에서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오고 갔던 수많은 대화와 유대의 순간들을 제가 모두 전할 수는 없지만, 이 후기를 통해 조금이나마 맛보실 수 있는 시간이었기를 바라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가 즐거웠던 만큼, 여러분도 즐거우셨기를!

(모든 사진의 저작권은 아밀과 유창석 님에게 있습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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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na 18.07.22 08:05 댓글

    경험과 생각의 폭을 넓히는 기회였던 것 같아요. 귀한 것을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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