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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절영이 읽은 거울 1

2006.01.28 00:2901.28

M. 절영 ( m e l c h i z e d e k @ n a v e r . c o m )



[절영독경] 장르를 읽다

#0
원고를 쓰겠다고 했지만 지난 번 경험을 통해 남의 글을 비평하기에 내가 여러모로 부족하다는 점을 알았다. 그리고 격월로 원고를 쓰면 지난 번처럼 '거울 ○호 감상'이라는 말도 붙이기 어려울 듯 하다. 그래서 먼저 제목을 하나 짓기로 했다. 비평도 아니고 매호 감상도 아닌 이 이상한 원고에 주제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
'절영이 읽은 거울'이라는 아주 주관적인 독자리뷰라 칭하고 싶다. 거울을 읽는 일반 애독자로써 읽어본 후 그 느낌이나 감상을 이야기하겠다는 얘기다. 어쩌면 소설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내가 느낀 철학적 관점에 더 포커스가 맞춰질지도 모르겠다.
자주 말했던 것 같지만 다시 첨언하자면, 거울은 그 읽는 독자만큼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 의미들이 모인다면? '거울'이라는 단어처럼 무한시야경초연현상이 일어날지 혹시 아나. 엘리베이터를 타면 양 쪽의 거울이 서로를 비춰 그 안에는 무한대의 내가 펼쳐진다. 눈의 한계를 벗어나 그 무한대 저 너머에 있는 이미지까지 읽을 수 있게 된다면, 그리고 그 너머를 읽는 데 있어 내 리뷰가 작은 빛이라도 될 수 있다면 나는 무척이나 기쁘겠다.
그러니까 너무 주관적이라고 화내지 말도록. 건강에 안 좋다. 나는 왜곡된 거울상일 뿐이니까, 그걸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본인들이 알아서 해 주길 바란다.

(정 맘에 안 들면 탄핵하시오. 난 재미있을 것 같은데. 댓글들의 무한시야경초연현상도.)

#1
최근 개봉영화 중 다른 기대작을 제치고 왕의 남자가 대박을 터뜨렸다. 여러 행운이 덧붙여진 덕이라 해도 이 영화 자체가 가진 능력 자체를 낮게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즘은 여러 매체에서 이 영화의 성공원인을 분석하는 데 재미를 들인 것 같다. 이준기 특집과 더불어서지만. 그 중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내용이 코드 관련이야기다. 왕의 남자는 나이와 성별에 따라 영화 내용과 인물에 감정이입하는 포인트가 달라질 여지가 많다. 한 마디로 말해서 관객층을 폭넓게 잡을 수 있었다는 말이겠다. 일부 매니아층을 여러 번 보게 하는 것 뿐 아니라 원래 기획했던 영화관람층보다 더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극장에 끌어들였고, 공감을 이끌어 냈다는 얘기다.
참으로 공감가는 이야기이다. '사랑'만으로 보아도 각색의 이야기가 나오고 사회·정치적인 해석도 다르게 나온다. 이것은 이 영화를 아름다운 한국적 배경이 함께하는 전통사극으로도, 감수성 풍부한 여학생을 자극하는 성적판타지로도, 치정이 얽힌 묵직한 정치극으로도 읽을 수 있게 한다. 다양한 코드, 이것은 왕의 남자가 한가지 색으로만 무장한 여타 기대작들을 무릎꿇게 만든 강력한 힘이었다.

#2
장르문학이 장르문학이라 일컬어진 까닭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반적인 경우, 그냥 '문학'과 떨어져 분류되는 큰 까닭 중 하나는 그것을 읽는 독자층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판타지나 SF, 호러 등의 장르는 읽는 사람이 일정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을 때 비로서 읽는다는 행위가 일어날 수 있는 분야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탁류를 읽는 10대에게보다 스티븐 킹을 읽는 10대에게 더 많은 의문부호가 향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일반은 그렇다 치더라도 장르안에서조차 그 분야에 따른  호불호가(그것도 일부에 따라서는 꽤나 강력한) 존재하고 있어서 이 모든 것을 단지 '장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판타지를 즐기는 사람은 밀리터리물을 모두 좋아하는가? SF를 즐기는 이들은 판타지 또한 즐기는 것일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호러 애독자가 항상 로맨스소설을 좋아한다는 말만큼이나 웃기는 얘기다. 장르독자들은 교집합은 가지고 있을 지언정 합집합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집합체이다.
하지만 말이다, 그 교집합의 개체수가 일반과의 교집합보다 훨씬 많은 것이 장르독자라면, 이들을 단순히 개개로 떼어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아니, 떼어내기엔 너무 아까운 독자층이 아닌가.

***여기서는 SF를 판타지의 진부분집합으로 볼 것인가의 여부는 생략. 그렇게 보면 판타지는 모든 장르의 전체집합으로도 볼 수 있어지므로 얘기가 복잡해진다. 소집합체로서의 판타지를 얘기하겠다. 간단히 이야기해서 여기서 판타지와 SF는 초자연적현상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교집합을 이루지만 그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과 태도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로 우선 단순 정의.***

#3
[이방인]{미로냥}은 감성적인 판타지이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언어와 시각이라는 틀 사이에 생기는 미묘한 틈이라는 공간―혹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말 그대로 무척이나 짧은 이 단편은 아이디어를 풀어놓을 뿐 어떤 사상이나 주제, 철학을 드러내지 않는다. 인물간의 관계도 모호하게 제시했을 뿐이다. 이미지만으로 치자면 매우 아름다운 글이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명료한 내용이 없으니,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도, 맹숭맹숭한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연애편지]{배명훈}는 이성적인 SF다. 형식이 새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내용이 새로운 거다. (거울에서 이런 글을 보게 되어서 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아이디어에 기대어 선 글이다. 희곡이라는 형식의 변화를 주었지만(사실 이렇게 나타낼 수밖에 없었을 듯 싶지만) 일인극으로 읽기엔 극의 흐름이 재미 없고, 세계 밖의 또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질리도록 들었으니 새로울 거 없다.
허나 전작에서도 느꼈지만 이 작가의 이야기 제조 방법은 참 재미있어서 끝까지 읽어나가면 결국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잠시잠깐 사이에 멋진 사기꾼한테 당한 듯한 느낌. 하지만 이 사기꾼은 자신의 외모보다도 단정한 글씨로 써 내려간 엉터리 수학공식을 더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두 이야기 모두 아이디어에 기댄 글이지만 작가가 풀어나간 형식은 매우 다르다. [이방인]은 인간이 재단한 언어로 지정할 수 없는 미묘한 /시간/의 틈을, [연애편지]는 미묘한 /공간/의 틈을 희롱했다. 아이디어에 기댄 글이지만 이렇게나 다르고 아마 그만큼 독자의도 다를 것 같다. 잘 썼는가, 못 썼는가가 아니다. 독자의 취향에 따른 호/불호다. 이건 밥을 짓는 방법의 正道 문제가 아니라 한상궁이 최상궁에게 이긴 이유와 비슷한 얘기다.

#4
[다른 방식의 진화]{赤魚}는 인문학 SF의 성격을 띄고 있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 과학이라면 인간을 발전시키는 것은 아마도 문학일 터이다. 미래 인간의 존재론적 문제를 재미있게 풀어내었다. 아마도 과학으로 인간이 멸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문학이 먼저 전멸하지 않은 한. 이런 소설이 여러 코드의 독자층을 흡수한다.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SF는 약간의 거부감만 제한다면 읽는 사람에게 제각각의 화두를 던질만 하다.

[다이어트]{배명훈}는 일반적으로 사회낙오자라 일컬어질만한 사람에 대해 SF적 상상력을 덧붙여 만든 보고서다. 블랙유머라 말하는 것도 이 작품을 너무 단순화시킨다는 느낌이 든다. 진지한 성찰과 간단한 상황적 꽁트가 맞물려 오가는 소설의 대화가 백미다. SF적 아이디어의 끝을 알 수 없는, 놀라움을 던져주는 작품이다.

[변신]{로비}은 SF인 척 하는 판타지이다. 미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속지 마시길. 이것은 분명 판타지다. 판타지도 SF도 현실을 풍자할 수 있지만 좀 더 극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장르는 판타지다. 돈키호테의 허풍처럼 끝없는 인간 욕망의 귀환점이 어린 시절 거대로봇 만화에서나 볼 법한 상황으로 치닫는 결말은 황당할 수 있다. 논리적 귀결과 이성적 판단력을 동원했을 때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니므로 SF로 읽으면 황당하다. 하지만 다른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은 재미있는 한편의 2X세기 우화인 것이다.

[다이어트], [변신], [다른 방식의 진화]는 인간의 변화에 대해 각각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변신]과 [다른 방식의 진화]는 미래상을 다루고 있다는 데서, [다이어트]와 [변신]은 위트와 농담으로 치장되어 있다는 점에서 또다른 공통점을 가진다. 하지만 독자층은 많이 다를 듯 싶다.

#5
판타지냐, SF냐. 이 해묵은 논란거리는 참 재미있다. 어슐러 르 귄 같은 작가의 작품은 서로의 진영에게 끌어오고 싶어한다. 은하영웅전설은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인가, SF인가.
요는 그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얼마나 (소위) '꽂힐' 수 있느냐의 여부일 터다. 르 귄의 경우는 두 장르 독자 모두에게 각자의 코드에서 보았을 때 꽂혔다는 거고 은하영웅전설은 한 쪽의 독자 중 일부에게 거부감을 일으켰다는 점의 차이일 것이다.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자본가의 입장에서나 작가의 입장에서나. 그런 것은 비평가들에게나 끊임없는 논쟁거리일 뿐이다. 하지만 장르는 코드이고, 코드는 곧 독자―글을 읽는 사람의 수를 가늠하게 한다. 많은 코드로 읽을 수 있을수록 좋은 작품이다.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을 테니까. 어차피 글이란 자기만족이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내가 보기에 그것들에겐(나 포함) 자신이 동감하는 일들을 나누어 함께 느끼고자 하는 바람, 욕구, 욕망은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어떤 장르의 글을 쓰고 있는가, 혹은 어떤 장르의 글에 더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는가를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굳이 장르가 아니라도 좋다. 내가 읽는―혹은 내가 쓰는 소설은 어떤 코드를 가지고 있는가, 한 번 돌아보면 생각지도 못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것이 '글'이니까.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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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2.01 09:33 댓글 수정 삭제
    저에게 미로냥 님의 글은 code보다는 chord가 맞아서 눈여겨 보게 되었습니다만, 그게 참... 단순히 아이디어에 기댄 것보다는 좀 더 나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강요해서 되는 문제는 아니지만, 저는 그 글의 주제를 봤는데요. code는 확실히 독자 수에 관한 것이고 뼈아프게도 시장의 크기에 관한 것이지만, chord는 조회수하고는 또 좀 다른 차원의 게임을 가능하게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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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영 06.02.14 13:49 댓글 수정 삭제
    글쓰면서 참, 공부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장르'와 '코드'는 따로 언급해야 하는데, 그냥 뭉뚱그려 쓰다보니...;;; chord는 생각 못했구요. //그렇죠, 어느 글에 주제가 있다, 없다 말하는 건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기는 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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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2.14 13:54 댓글 수정 삭제
    저도 역시 리플 달아놓고 나서 제대로 알고 쓴 게 맞는지 뜨끔뜨끔하답니다. 책임 못 질 말 쓰면 안 되는 거니까 다시 지우지도 못하고.
    소중한 리뷰를 해 주는 분께 딴지를 걸어서는 안 되는 건데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위의 글에 써 있는 것처럼 마주 놓은 거울처럼 됐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리플 달았습니다. 부디 무대 밖에서 말 많은 작가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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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영 06.02.16 11:48 댓글 수정 삭제
    아닙니다!!! 저얼대~ 아니에요! 이렇게 글 하나하나에 댓글 남겨주시는 배명훈님의 모습, 참 존경스러울 정도인걸요. 좋은 말씀에 너무너무 감사했는데, 댓글 안달면 혹시 화난 걸로 보일까 봐 몇 줄 덧붙인 겁니다. 오해하지 말아주세요.ㅠㅠ
    개인적인 험담류만 아니라면 저, 이런 딴지 좋아합니다^^ 더 많은 분이 딴지 걸어주면 좋겠어요.^0^(p.s 오해하실까 봐. '딴지'는 장난스런 표현입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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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2.17 09:17 댓글 수정 삭제
    에이, 오해는요 무슨. 저도 글 쓴 사람 입장에서는 리플은 달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여기저기 달고 다니는데요, 요즘은 좀 아껴야겠다는 생각도 들네요. 다들 자기 분신 같은 글들을 올려 놨고, 리플은 거기에다 다는 거니까요.
    절영 님의 리뷰,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는 뭐니뭐니해도 뜨끔뜨끔한 맛이 있어야 빠릿빠릿해지는 법이지 않겠어요. 그리고 개별적으로 써 낸 여러편의 단편들을 한 회나 두 회 분량의 공동 작업으로 종합해 내지 않으면, 거울은 웹진이 아니라 게시판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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