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내가 [드래곤 라자](이영도, 황금가지, 1998년 5월)를 만난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그 당시 [드래곤 라자]를 만났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숨 막히게 재미있는 부분에서는 책장을 덮고 숨을 몰아쉬어야 할 정도로 완전히 다른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때 그 충격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이후로 나를 전혀 다른 세계로 이끄는 소설을 만나기란 쉽지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어릴 적 추억으로,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버린 소설. 새로운 시장을 창조하고, 새로운 문화를 이끌었던 소설. 그 [드래곤 라자]가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10년이란 긴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뇌리 속에는 한국 판타지 소설 하면 ‘드래곤 라자’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한국 판타지 소설을 이야기하는 기사나 평론에는 ‘드래곤 라자’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그만큼 ‘드래곤 라자’는 아직도 한국 판타지 소설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드래곤 라자]를 두들긴 타자가 돌아왔다. [드래곤 라자] 양장본 출간과 10주년 기념작 [그림자 자국](이영도, 황금가지, 2008년 11월)을 가지고.

 현재 한국에서 장르를 다루는 유일한 웹진인 ‘거울’에서도 [드래곤 라자] 10주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미 수십 차례 언론에 기사가 나가고, 기자간담회와 독자들과의 대화까지 가진 타자에게 조심스럽게 이메일로 서면 인터뷰를 부탁했다(놀랍게도 타자는 오래전부터 쓰던 하이텔 메일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었다). 다행히 타자가 흔쾌히 승낙한 덕분에 올해 마지막 웹진 ‘거울’의 기획 기사로 타자의 인터뷰를 가졌다.


  

 거울 : 안녕하세요? 타자님. 먼저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진행하는 인터뷰인 만큼, ‘거울’의 인상이나 이미지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환상문학웹진 ‘거울’을 둘러보신 적이 있나요? ‘거울’은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거울’을 보면서 느낀 점이나,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영도 : 예. 자주 들르는 편입니다. 넷상에서 장르 단편들을 많이 구경할 수 있는 드문 장소이니까요. 자신의 색조를 뚜렷이 지켜가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점이 어떻게 보면 배타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만 개방성이 그저 좋은 것만도 아니지요. 라니안, 라다가스트, 워터가이드 등이 모두 사라진 지금도 ‘거울’이 오롯하게 유지되는 힘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거울’의 바로 그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건 사이트 운영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외부인이 느낀 인상에 불과합니다만.

  
   ▲ [드래곤 라자] 10주년 지도 그리기 이벤트 당첨 지도. 한정 세트에만 들어간 지도로 kypris님의 작품이다.

 거울 : 이번 [드래곤 라자] 10주년 양장본을 받아본 소감은 어떠신가요? 나무상자 같은 특이한 상품도 한정으로 시도가 되었고, 컬러 지도 같은 건 독자들이 직접 응모한 지도 일러스트에서 선정이 되었는데, 그것들을 보신 소감이라든지요. 또, 소설 속 운차이가 말한 이야기가 동화책으로 나온 것도 정말 보기 드문 경우인데, 이 [사막의 지혜]를 보신 느낌은 어떠셨나요?

 이영도 : 제 격에 맞지 않는 비싼 신발을 신고 비틀거리는 느낌입니다만 이 행사는 전부 독자분들이 원해서 기획된 것이고 독자분들이 즐거워하신다면 만족합니다. [사막의 지혜]를 본 느낌은…… 언제나, 어떤 글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글 좀 더 잘 쓸 걸 하는 생각이죠.

  
   ▲ 운차이의 우화를 토대로 만들어진 그림 동화 [사막의 지혜]. 2,000개의 한정 세트로만 구할 수 있는 비매품.

 거울 : 이영도님 작품은 많은 인기를 얻었고 따라서 다양한 팬픽들이 탄생했습니다. [신비로운 이야기] 같은 팬북이 나오기도 했지요. 이런 팬픽의 이야기를 읽고 오히려 작가가 설정이나 세계관이 팬픽의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나요?

 이영도 : 팬픽들은 언제나 고맙게, 그리고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설정이나 세계관이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두드리는 것들은 제가 접하고 느낀 것들에 영향을 받을 테니 그런 영향이라면 팬픽들에게서도 받았겠지요. 하지만 그 영향들은 아마 그 다음 글에서 무의식적으로 반영되거나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두드리고 있던 글의 설정을 중간에 크게 바꾸면 제가 헷갈려서 글을 두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거울 : 싸인회 때나 또 이번 다과회 때 독자들에게 선물을 받기도 하시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팬의 선물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여러 개 말해주셔도 되고요.

 이영도 : 다 고마운 선물이지요. 고를 수가 없습니다.

 거울 : 예전에 영화평을 쓰신 기억도 납니다. 가장 최근에 본 영화는 무엇인가요? 어떤 장르의 영화를 즐겨 보시는지요.

 이영도 : 영화에 대해선 별로 아는 것도 없는데 우회적으로 들어와서 거부하기 힘든 부탁이 있거나 해서 두드렸던 것들이지요. 가장 최근에 본 건, 음, 며칠 전 술 마시면서 [블레이드 러너] DVD를 다시 꽂았습니다. 해리슨 포드 씨의 그 심드렁한 듯하면서 정감 있는 눈빛은 역시 젊었을 적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지요. 특별히 더 선호하는 장르는 없습니다.

 거울 : [드래곤 라자] 연재 시절 잡담을 보면 축구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옵니다. 요즘 한국 축구의 모습을 어떻게 보시나요? 월드컵을 잘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또 박지성 선수의 활약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영도 : 국대 축구 말씀인가요? 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무리없이 통과할 것 같습니다. 클럽 축구 역사가 이 정도니 통과 못하는 것도 좀 민망한 일이지요. 좋았던 역사도 있고 돌이키기 싫은 역사도 있지만 그것이 또한 역사가 길었던 증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이상에 대해서는 고작 애호가의 입장에 불과한 저로서는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공은 둥그니까요. 박지성 선수는 참 잘하죠. 20세기의 심장과 21세기의 머리를 갖춘 훌륭한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낡은 심장이냐고 되묻는 분도 있는데, 그런 뜻은 아닙니다. 무심한 듯 시크한 21세기의 정서와 다른 열혈, 피와 땀, 뭔가 눈이 뒤집히면 드라이브 슛도 날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20세기의 정서가 있지요. 박 선수가 뛰는 걸 보면 가끔 그런 걸 느낍니다.

 거울 : 타자에게 후치란?

 이영도 : 귀엽죠. 그래서 마음대로 웬수라고 부르기도 하고.

 거울 : 이번에 요청과 달리 단편이 아닌 장편으로 나왔다는 신작 [그림자 자국]의 구상 기간과 집필 기간이 각각 궁금합니다. 그리고 구상을 하거나 설정은 보통 공책에다가 하시는 편인가요? 아니면 처음부터 컴퓨터에 정리를 하시나요? 그리고 이번에 [판타스틱] 12월호에서 [드래곤 라자]의 구상 기간이 7개월이 넘는다고 밝히셨는데, 그렇다면 [폴라리스 랩소디]와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는 각각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이영도 : [그림자 자국]을 두드린 건 한 달이 좀 넘었던가……. 잘 기억이 안 나는군요. 죽 두드렸던 것이 아니라서. 구상이야 언제나 이것저것 하고 있어서 특별히 기간을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설정은 내키는 대로 합니다. 공책에 할 때도 있고 컴퓨터에 두드리기도 합니다. [그림자 자국]은 컴퓨터에 했군요. [폴라리스 랩소디]는 다른 것들에 비해 좀 짧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갑자기 신문에 연재를 하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인상에 불과해서 정확한 기한은 모르겠군요. 사실 기자분들은 언제나 그런 질문을 하십니다만 얼마나 구상했던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모판에 씨를 뿌리면 반 년 뒤에 추수를 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니까요. 저는 씨를 뿌리기도 하고 김을 매기도 하고 가끔은 밭을 갈아엎기도 하지요. 그러는 와중에 어떤 것은 빨리 자라나고 어떤 것은 몇 년 후 저도 모르는 곳에서 갑자기 피어나기도 하지요.

 거울 : 연재 때 잡담을 보면 컴퓨터가 고장이 나서 직접 수리를 하곤 하셨는데요. 컴퓨터가 그동안 많이 업그레이드가 되었나요? 아니면 별로 바뀐 게 없는지 궁금하네요. 모니터는 아직도 CRT를 쓰고 계신지, 아니면 최신형 컴퓨터인지 타자의 작업 도구가 궁금합니다.

 이영도 : 지난 10년은 ‘200메가는 대형 하드 디스크 수준의 용량이다’에서 ‘2기가는 주 메모리 수준의 용량이다’로 바뀐 시절이었으니까 제 컴퓨터도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건 한 2, 3년 되었으니 그리 최신형은 아닙니다. 모니터는 LCD를 쓰고 있습니다만 역시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 한 3년 전의 보통 퍼스널 컴퓨터를 생각하시면 거의 비슷할 것 같군요.

 거울 : 연락을 주고받는 다른 작가분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가끔 안부를 묻고 교류를 하는 작가가 있는지 또 작가 중에 술친구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영도 : 꾸준히 교우하는 분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대한민국 인구의 반이 살고 있다는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고, 또 사교 활동을 즐기는 성격도 아니라서요.

 거울 : 타자에게 좀비란?

 이영도 : 독자분들 말씀이지요? 걸어주시는 기대만큼 좋은 글 보여드리지 못해서 언제나 마음 한편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분들이지요.

 거울 : 황금가지에서 주최하는 ‘황금드래곤 문학상’이 오랜 침묵을 깨고 내년에 4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황금드래곤 문학상’에 심사위원으로 계속 참여하셨는데, ‘황금드래곤 문학상’에 대한 소회 같은 것을 적어 주신다면요. 그리고 앞으로 응모할 분들에게 해주실 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영도 : 그게…… 본선 심사에 몇 번 참가했을 뿐이지요. 꼬박꼬박 참가했다고 말하긴 민망한 수준입니다. 그래서 소회를 말하기도 뭣합니다. 응모하실 분들에겐 좋은 글, 자신의 글 많이 보여달라는 말씀 외엔 드릴 것이 없군요.

 거울 : 현재 국내에는 휴고상이나 네뷸러상 같이 이미 출간된 작품에 수여하는 장르소설상이 없습니다. 앞으로 이런 장르소설상이 생겨야 한다는 의견도 많은데 여기에 대해서 타자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이런 성격의 상이 잘 만들어져서 운영될 수 있다고 보시나요? 그리고 현재 국내 장르 시장은 노블레스 클럽이나 라이트노벨 브랜드인 시드노벨 등 대여점 시장에서 서점으로 바뀌어가는 변화가 보이고 있는데, 앞으로 한국 장르 시장의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영도 : 글쎄요. 분야가 다르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저는 한국 만화계가 떠오르는군요. 한국 만화는 그 역사가 반세기이고 부천에서 국제만화제도 열리지요. 하지만 한국의 만화상 중에 휴고상이나 네뷸러상에 비할 만큼 권위 있고 명망 높은 만화상은 없습니다. 물론 YWCA 만화상이나 만화대상, 독만상 같은 상들이 꾸준히 있었습니다만 그 상들이 한국의 만화 독자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상인가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요. 그런 한국 만화계에 비해 볼 때 한국 장르 문학은 아직 장르 축제 하나 없지요(휴고상은 SF 축제에서 결정되지요?). 저명하고 공신력 있는 저자 협회도 없고요. 그 상황에서 문학상이라……. 까마득하다는 생각밖에 안드는군요. 훨씬 미래에 생각해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한국 장르 시장의 미래에 대해선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작년에 한국의 주가가 참마도 맞은 것마냥 반토막 나고 환율이 제비라도 벨 것처럼 치솟을 거라는 예상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습니다. 경제 같은 피부에 와닿는 문제에 대해서도 미래를 알기 어려운데 장르 문학이 어떻게 될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원론적이지만, 좋은 글이 많이 나오면 잘 되겠지요.

  

 거울 : 타자님의 작품을 보면 종종 생경한 어휘들이 사용되곤 합니다. 글을 쓸 때 일부러 다양한 어휘를 사용하려고 의식하고 쓰시는 것인지, 아니면 작품을 쓰다보면 자연스럽게 익힌 어휘들이 사용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또한 그동안 작품을 쓰면서 문체가 변화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따로 문장 쓰기를 위해서 하신 것이 있으셨는지,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달라진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이영도 : 의미를 잘 전달할 만한 어휘들을 고르려고 하는 것뿐이죠. 따로 문장 쓰기를 위해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계속 읽고 계속 두드리는 것뿐입니다.

 거울 : [그림자 자국]을 발표하기 전까지 단편을 종종 발표하셨습니다. 이 단편들이 묶여서 두 번째 단편집으로 나올 수 있을까요? 그리고 글 쓰는 입장에서 장편과 단편의 차이는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장편과 단편 중 무엇이 두드리는 데 더 재미있고 잘 써지는지 궁금합니다.

 이영도 : 책을 펴내는 것은 출판사의 일이겠지요. 저 졸문들을 엮어내고 싶어할 출판사가 있을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장편과 단편의 차이는 호흡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 미터는 무호흡으로 뛰지만 마라톤은 그럴 수 없지요. 그것이 거의 정확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단편과 장편 중에 특별히 더 재미있고 두드리기 쉬운 것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단편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장편으로 두드리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힘들 뿐이지요.

 거울 : 마지막으로 ‘거울’에 들리는 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영도 : ‘거울’ 필진들이 좋은 글 많이 쓰도록 모두들 문학의 신께 공물을 바칩시다. 담배를 산 채로 불태운다거나 소주병에게 공(空)을 가르친다거나…… 혹은 퇴폐적인 타자는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다른 영험한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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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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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ultail 08.12.27 00:08 댓글 수정 삭제
    담배를 산 채로 불태운다거나 소주병에게 공(空)을 가르친다거나……

    껄껄 이영도 씨의 독특한 언어유희만 있으면 참 만족스러운 읽기를 할 수 있군요.

    언젠가 이영도 만담집 같은 걸 볼 수 있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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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울숲 08.12.27 19:11 댓글 수정 삭제

    조만간 과수원에 서리 하러 가야 겟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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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a 09.01.03 19:08 댓글 수정 삭제
    이영도님 인터뷰를 가끔 접했지만, 그 중 가장 풍성한 인터뷰가 아닐까 합니다. 질문도 답도 좋아요. 일은 늘 팬이 해야 한다는 걸 다시 느낍니다.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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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담 09.05.19 08:01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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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에서 작가님만의 색깔이 여지없이 묻어나오네요. 많은걸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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