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7년. 2003년 6월에 창간된 환상문학웹진 거울이 걸어왔던 시간이다. 인터넷이 한국에 들어온 이래 수많은 장르 관련 사이트들이 생겨났지만 이 정도의 역사를 쌓았고 또 지금도 쌓아가는 사이트는 많지 않다. 그나마도 거울과 같은 웹진류로 한정한다면, SF&판타지 계열에서는 사실상 거울이 유일하다. 그 사실 자체가 이 기사에도 붙어 있는 ‘86호’라는 숫자와 함께 거울의 저력을 보여주는 증표인 셈이다.

그 긴 세월을 거슬러온 거울이 새로운 길을 걷는다. 창간호부터 85호까지 초대 편집장으로서 거울의 공식 업무를 총괄하셨던 진아님이 일반 필진으로 물러나고, 86호부터는 유서하님의 2대 편집장 체제가 시작된다.

유서하님은 1981년생으로, 대학에서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거울에 합류하기 이전부터 환상서고, 딤비 등 여러 판타지 창작 동호회에서 활동했다. 거울에는 44호에 {웨딩 마치}를 발표하며 합류. 그 뒤에는 소설 창작 외에 거울 홈페이지 리뉴얼, 거울 책 디자인 등을 맡는 등 편집장이 되기 이전에도 거울 운영에 많은 기여를 한 필진이다.

이미 거울이 리뉴얼되었을 때 한 차례 유서하님을 인터뷰한 적이 있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소 다르다. 그때의 인터뷰가 리뉴얼을 담당한 웹디자이너로서의 유서하님에 주목했다면 지금의 인터뷰는 소설가로서의 유서하님과 신임 편집장으로서의 유서하님을 주목하고자 한다.


지난 인터뷰 보기 유서하 인터뷰: 스파게티, 리뉴얼, 플라스틱 프린세스

이번 인터뷰는 아프락사스가 진행했고, 추선비가 게스트 인터뷰어로 참석했다.



▲ 왼쪽부터 유서하, 아프락사스, 추선비.


1. 소설가로서의 유서하

아프락사스 장르 쪽이나 창작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신 거예요?

유서하 고등학교 때였는데, 친구가 D&D 세트를 샀거든요. 교내 동아리를 만들어서 RPG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장르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 때가, [드래곤 라자]가 히트하고 난 뒤 [퓨처 워커]가 하이텔에 한창 연재되던 때이기도 했거든요. 연습장에 판타지 소설을 쓰는 친구들에게 영향을 받아서 저도 쓰기 시작했고요. 친구들끼리 서로 보여주고 그랬어요.

다 읽고 나면 연습장 위아래 여백에 서로 코멘트를 달아주기도 했어요. 연습장 덧글이었던 셈이죠. 요즘 게시판에 덧글 달리듯이.

추선비 친구들이 더 가차없이 평하지 않나요?

유서하 그렇죠. 절대로 봐주지 않아요. 얼마나 냉정한데요. 소설에 등장하는 장치 하나하나마다 ‘이건 [퓨처 워커]에서 따왔지?’ ‘이건 [불멸의 기사]랑 비슷한데?’ 이러면서요. (웃음)

추선비 그 때 친구들이 지금도 읽어주나요?

유서하 아픈 데를 마구 찔러주죠. (웃음)

추선비 친구들에게 받아본 가운데 가장 아픈 평이 어떤 것이었나요?

유서하 {플라스틱 프린세스}를 썼을 때였어요. 그 때 휴대폰 SMS 문자메시지를 문학적 장치로 써보고 싶었거든요. SF 커뮤니티에서 종종 하는 이야기인데, SF에 익숙하지 않은 작가들이 SF를 처음 쓸 때, 과학기술에 대한 설명을 등장인물들이 직접 말하게 한다잖아요. 그나마도 별 의미 없이 사용되거나. 그런 거 말고, 글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장치로서 문자메시지를 사용해보고 싶었어요. {플라스틱 프린세스} 초고의 결말에서, 화자의 친구는 미래로 예약 문자메시지를 보내요. 자기가 죽은 뒤, 친구에게 그 문자메시지가 도착할 수 있게 한 거죠.

그런데 제 친구 중 한 명이 그건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설정이라고, 고쳐야 하지 않느냐고 그랬어요. 우리는 SMS 문자메시지가 지금처럼 미래에도 사용될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을 거라는 거예요. 외국에서는 이미 이메일이 SMS 문자메시지를 대신하는 추세인데 과연 몇 십 년 뒤까지 그 매체가 남아 있겠냐는 거죠. 그래서 그 친구한테 그럼 어떡하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물었더니 차라리 음성메시지가 어떻겠냐는 거였어요. ‘아, 문자메시지 대신 목소리를 직접 전달하는 것도 (소설 속에서) 의미가 있겠지’ 하고 위안 삼으면서 바꿨어요.

아프락사스 작중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쓰고 싶으셨다면 거기에 상관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게다가 그 친구 분이야 그런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었겠지만 일반 독자나, 등장인물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수가 있죠. 그렇다면 기술적으로 적합한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그냥 문학적 상징으로 쓸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추선비 그렇지만 거기에 대해 문제를 지적하고,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나온다면 그걸 고치는 게 맞겠죠.

아프락사스 하긴…… 듣고 보니 5,60년대에 나온 SF소설에서 배경은 2000년대인데 데이터 저장 매체는 여전히 테이프더라 같은 설정이 사용되는걸 보면 굉장히 위화감이 들긴 하죠.

유서하 네, 맞아요. (웃음) 그 당시 상상할 수 있었던 최첨단의 매체가 그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썼을 텐데 지금 독자들의 눈으로 보면 굉장히 이상하죠.

그리고 또 하나 기억나는 게, 어딘가에 발표할 생각 없이 개인적 용도로 가볍게 쓴 글이 있었어요. 아이돌 팬픽션이었는데, 이번에도 그 친구에게 보여줬더니, 캐릭터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제가 쓴 글 중에서 가장 잘 쓴 것 같다는 거예요. (웃음) 충격 때문에 한참 동안 글을 못 썼어요.

추선비 그런 쪽 글도 쓰시는군요. (웃음)

유서하 네. 재밌어요. 왜 자꾸 그런 글만 쓰는지 모르겠지만. (웃음)

추선비 거울에 오기 전에도 여러 곳에서 활동하셨죠? 딤비나…….

아프락사스 환상서고에서도 활동하셨고요.

유서하 네, 여기저기서…… 환상서고 이야기는 부끄럽지만요. (웃음) 어릴 때잖아요, 20대 초반!

아프락사스 하긴, [환상서고] 단편집이 나왔던 2001년부터 쳐도 9년이 지났죠.


▲ 창작 소모임 환상서고에서 드림필드 출판사를 통해 발간했던 단편집, [환상서고]. SF&판타지 단편집이 지금보다도 더 출간되기 어려웠던 시절에 나왔던 의미있는 책이기도 하다. 당시 ‘이렌첼’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며 소모임 회장으로서 환상서고를 운영하던 유서하 님의 서문이 권두에 실려 있으며, 유서하님의 단편 {웨딩 마치}가 수록되어 있다.

추선비 그렇다면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기억할 수 있는 시점은 언제부터인가요?

유서하 딤비ㆍ거울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를, 제가 소설가 지망생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한 때로 생각해요. 그러니까 {플라스틱 프린세스}를 썼을 때부터는 그렇게까지 부끄럽지 않은데, 흐릿한 경계선 위에 있는 {웨딩 마치}는 끼워줄까 말까 싶기도 하고…….


가. 플라스틱 프린세스

추선비 {플라스틱 프린세스}를 보면서 느낀 건데, 여고생들을 굉장히 잘 묘사하셨다는 생각을 했어요. 심리 묘사도 그렇지만 등장인물들끼리의 관계 묘사가 정말 좋았거든요. 그맘 때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오가는 관계에 대한 묘사가……. 혹시 처음부터 그런 쪽의 묘사를 의도하고 쓰신 건가요?


▲ {플라스틱 프린세스}는 유서하님이 거울에 들어오기 전, 거울 32호에 독자우수단편으로 선정되었던 작품이다. 2004년 중단편선에 실리기도 했던 이 단편소설은 이후 크로스로드 2007년 9월호에 게재되었고 단편집 [앱솔루트 바디]에도 수록되었다. 웹에서 이 작품을 읽고 싶다면 여기를 클릭하면 된다.

유서하 감사합니다. (웃음) 의식하지는 않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친구들과 함께 인생의 영화 같은 거 뽑아봐도 다 비슷비슷한 영화만 나오거든요. [천상의 피조물], [불량공주 모모코], [린다 린다 린다]……. (웃음)

추선비 {플라스틱 프린세스}에서 신체를 갈아 끼운다는 발상 자체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는 게 굉장히 재밌었는데, 그런 발상은 어떻게 하시게 되었어요?

유서하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의체라는 아이템 자체는 새로운 것은 아니니까요. 남들 다 아는 작품만 생각해도 당장 [공각기동대]가 나오니 무척 오래된 거죠. 원래는 의체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생각한 게 아니라 2차 성징에 대한 소설을 쓰겠다는 아이디어가 먼저였어요.

남자든 여자든 2차 성징이 시작될 때 자기 몸을 예쁜 눈으로 바라보기는 어렵거든요. 보통은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 걸까,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계속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까짓 것 잘라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신체 일부를 자기 마음대로 절단해도 살 수 있다면 그 뒤는 어떤 식으로 진행될까, 그렇다면 그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지금은 아니겠고…… 하다 보니까 미래로 가게 됐죠.

추선비 그렇다면 원래는 2차 성징에 대한 혐오를 신체적으로 끌어내기 위한 것에서 시작하신 거군요.

유서하 네. 2차 성징이 일어나는 자기 몸에 대한 혐오와, 그 나이 또래 여자아이들이 친구들에게 갖는, 사랑까지는 아니지만 우정이라기에는 조금 멀리 나간 감정들 같은 게 섞인 거죠.


나. Happy Birthday


▲ {Happy birthday}는 2009년 환상문학웹진 타로카드 앤솔로지인 [타로카드 22제]에 수록된 단편이다.

추선비 예전에 진행했던 인터뷰에서 쓰고 계시던 소설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 소설이 어떤 날짜를 기준으로 해서 전후가 대칭의 아름다움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하신 적이 있잖아요. 그 작품이 {Happy Birthday}인가요?

진아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으세요?
유서하 그것도 계속 바뀌지만, 최근 제가 혼자 쓰고 있는 글들을 읽으면 저 스스로도 어떤 경향이 눈에 띄어요. 그건 조금 전에 말씀드린 미니멀함과 형식미에 대한 집착이예요.
아직 수정 중인 단편소설이 한 편 있는데, 어떤 날짜를 기준으로 그 전과 그 후로 이야기가 나뉘어요. 그 전후가 마치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대칭된 아름다움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계속 조금씩 고치는 중이예요.

유서하 네, 그렇죠.

추선비 {Happy Birthday}에서 시도하셨던 형식적 외형이, 아직은 원하셨던 만큼 충분히 하신 것 같진 않아 보이던데요.

유서하 네, 맞아요.

추선비 그렇다면 다음 작품에서 또 다른 식으로 그런 형식미를 가져오실 생각이신건가요?

유서하 어떤 형식을 시도할지는 그때그때 생각해요. 지금 쓰고 있는 단편이 하나 있는데, 오래된 한국 소설처럼 느껴지도록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민주화운동이 한창일 때의 소설들을 보면 스크럼 짜고 화염병 던지고 그러잖아요? 그렇게 오래 전도 아닌데도 그때 소설들은 지금과 느낌이 많이 달라요. 어떤 단어들을 사용하느냐는 것보다는 그 시대의 트렌드와 감성, 문체라는 게 있어요. 그걸 가져와서 써보고 싶은데 잘 안되더라고요.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을 잘리면 바로 쫓겨나던 그런 시기의 감성이나 문체, 단어를 써보고 싶어요.

추선비 {플라스틱 프린세스}는 주제의 발전에 집중하셨던 글로 보이는데, {Happy Birthday} 쪽은 그보다는 형식미에 많이 치중하신 것 같거든요. 전자와 후자가 같은 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는 주제를 다루는데도 불구하고 치중하는 포인트가 많이 다른데, 일부러 그렇게 하신 건가요?

유서하 처음부터 어떤 형식으로 써봐야지, 하는 식으로 되지는 않아요. {Happy Birthday}는 시제가 과거형인 1부와 현재형으로 진행되는 2부에서 누가 누구를 구원하는지의 관계가 달라지거든요. 처음에는 상대방을 구원하는 사람은 화자였지만, 후반부에는 내가 그 화자에게 구원받는……. 그런 관계의 변화에 대한 내용을 먼저 생각한 뒤, 그 서로 다른 관계에 대한 내용을 1, 2부로 나누는 형식을 나중에 생각하게 되는 거죠. 평은 그렇게 좋지 않았지만요.

추선비 저는 형식적 시도 자체는 좋았는데, 역할의 전환이라는 장치가 처음 사용된 건 아니잖아요? 옛날부터 사람들이 많이 쓰던 이야기 중 하나인데, 보통 이런 경우에는 그 전의 관계와 후의 관계가 전환이 되는 분기점이랄까 그런 것들이 굉장히 부각이 되는 편인데 그게 선명하게 두드러지지 않아서 그게 신경 쓰였어요.

유서하 네, 그건 판단 실패였어요. {Happy Birthday}는 원래 다른 곳에서 릴레이 소설 비슷하게 쓰여졌어요. 릴레이 참가작 하나하나는 독립된 단편소설이지만 시간적ㆍ공간적 배경, 그리고 주인공들에게 일어나는 커다란 사건은 공유하는 방식이었어요. 그래서 쓸 때는 배경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문제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독립된 단편이 되니까 그 모든 게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걸 다 수정했다고 생각했지만 잘 안됐던 거예요.

추선비 그래서 원래는 재난이라는 설정 자체에 대한 설명도 별로 없었던 거네요? 릴레이기 때문에.

유서하 그렇기도 하고요.

추선비 아니면 또 의도하신 게 있나요? 설명이 별로 없었던 게.

유서하 외계인에 대해서도,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설명하지 않는, 대신 창문이 깨져나간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언급하면서 폐쇄적인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수위 조절에 실패했지만요. 읽으신 분들께서 대부분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시더라구요. (웃음) 작가 자신이 만족하기 전에 소설을 내놔야 할 수도 있다고 배명훈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저는 그게 잘 안 돼요. 늘 한참 더 고쳐야 하고.

추선비 네 맞아요.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손댈 수 없는 게 있죠. 그 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다르기 때문에 지금의 자신이 고치면…….

유서하 다른 사람이 쓴 게 되죠.

추선비 네. 그렇기 때문에 못 고치죠.

유서하 사실 쓰는 기간은 짧아야 하고, 나중에 최소한만 고쳐야 하는데 항상 그게 어렵죠. 진득하게 붙어서 써야 하는데 아무래도 직장인이 시간을 내기는 쉽지 않잖아요.



▲ 인터뷰중입니다. 추선비가 인터뷰 기록을 위해 가져온 넷북, 그리고 아프락사스가 녹음기 대신 사용한 아이폰.


2. 디자이너로서의 유서하

아프락사스 거울에서 디자인을 하시게 된 게 언제부터였죠?

추선비 리뉴얼도 하셨고…….

유서하 [제15종 근접조우] 때 표지 일러스트를 그리면서부터예요. 그때는 일러스트만이었어요. 디자인은 은림 님께서 해주셨죠.



▲ 유서하가 디자인한 거울 중단편선들. 왼쪽부터 2008년 중단편선 [눈 늑대], 2009년 중단편선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그리고 타로카드 앤솔로지 [타로카드 22제].

추선비 거울 책 표지가 유서하님 들어오시기 전과 후로 나뉘잖아요. 유서하님 들어오신 다음부터 거울 책이 동인지스러운게 많이 사라졌어요. ISBN 코드만 넣으면 서점에 진열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정도가 되었죠.

유서하 감사합니다. (웃음)

추선비 앞으로의 디자인에 있어서 새롭게 시도해고 싶으신 게 있으시다면요? 예전 인터뷰에서 띠지를 새롭게 사용해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때와 지금은 거울이 많이 달라졌고 서하님이 하고 싶으신 것도 달라지셨을 수도 있는데요, 앞으로 하고 싶으신 디자인이 있나요?

아프락사스 언젠가는 양장본으로 된 책이 나올지도 모르죠. (웃음)

유서하 예산이 한정되어 있어서 많은 걸 시도하기는 어려워요. 양장본을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은 늘 있지만 당장은 안되겠죠. (웃음)

거울에서 기획한 책이 출판사를 통해 정식 출간되는 경우도 많아졌고, 제 스스로는 출판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 보니 그런 욕심은 많이 충족되었어요. 요즘은 거울 책에서 안 해본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 요즘 유행하는 캘리그래피, 일러스트 같은 것으로 꽉 찬 표지도 좋지만, [붉은 손가락] 같은 고전적인 그래픽디자인 같은 표지의 책도 만들어보고 싶어요.

추선비 [타로카드 22제]가 그런 표지였죠.

유서하 네, 그렇기는 하지만 사실 그때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그런 표지를 의도한 게 아니었거든요.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그랬던 거라서.

아프락사스 그래도 결과물은 좋았으니까 잘 되었어요.

추선비 {플라스틱 프린세스}와 {Happy Birthday} 등 일련의 작품을 읽다보면, 거울 홈페이지 디자인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글쓰기와 디자인을 하실 때, 공통된 가치관 같은 것이 있으신가요?

유서하 공통된 가치관이라고까지 말할 만한 건 없는 것 같지만…… 미대입시를 준비할 때 이야기인데, 소묘를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세부적인 부분에만 집중하곤 했어요. 다른 데는 내버려둔 채 눈만 계속 파고 있다던가……. 그때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소설을 쓸 때도 마찬가지예요. 항상 고민해요.

그때만이 아니라 학과에서도 디자인을 배우다 보니 컨텐츠가 전체적으로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거울 홈페이지 디자인도 마찬가지예요. 시간의 잔상 게시판을 예로 들면, 이달에 업데이트된 단편소설을 읽기 위해 접근하는 경로는 메인 화면에서 클릭해도 되지만, 시간의 잔상 메뉴를 클릭해도 되고, 오른쪽 필진 프로필을 통해서도 볼 수 있게 되어 있죠. 이런 식으로, 컨텐츠에 접근하려면 컨텐츠와 같은 이름의 메뉴를 클릭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독자분들이 어떤 방식으로 홈페이지를 이용하게 될지 고민한 뒤 마우스 커서를 가져가게 될 법한 곳들마다 링크를 넣었어요. 홈페이지가 유기물처럼 운영되도록요.

하지만 그렇게 했는데도 기획 꼭지가 상대적으로 잘 부각되지 않는 부분은 아쉬워요. 기획 꼭지는 매호 공이 많이 드는데도, 오프라인 잡지에서처럼 기획이 그 호의 잡지 전체를 끌고 가는 역할을 하지는 못해요. 물론 거울은 장르문학 웹진이니까, 기획이 아니라 소설이 가장 중심적인 컨텐츠가 되어야 한다는 점도 있죠. 두 가지를 조율하려면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야겠죠.

디자이너로서의 유서하님은 지난 인터뷰에서도 잘 드러났던 부분인지라 이번 인터뷰에서는 굳이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지난 인터뷰 보기 유서하 인터뷰: 스파게티, 리뉴얼, 플라스틱 프린세스



3. 편집장으로서의 유서하

추선비 거울 편집장을 결심하시게 된 계기는?

유서하 사실 고민은 별로 안했어요. 한 일주일쯤 고민했나?

아프락사스 그 정도면 충분히 많이 하신 것 같은데. (웃음)

유서하 그런가요. (웃음) 사실 편집장을 맡을지에 대한 고민은 의외로 별로 하지 않았어요. 맡게 된다면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일주일짜리였던 거죠.

원래는 저 혼자서, 거울에서의 활동과는 별개로 1인 웹진을 만들어보고 싶어 했었어요. 웹디자인도 제가 하고, 소설이나 기사도 제가 쓰고, 업데이트는 제가 내킬 때 비정기적으로 하는 식으로요. (웃음) 문학 웹진은 아니지만 소설을 다루게 되면 거울과 겹치는 아이템이 생길 수도 있어서, 그렇지 않게 하려고 이쪽저쪽으로 피하기도 했거든요. 그러다가 거울 편집장이 공석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아, 그러면 내가 거울 편집장이 되면 안 피해도 되겠네……. (웃음)



▲ 인터뷰가 후반부로 접어들자, 메모도 점점 늘어난다. 나중에 알아볼 수 있을까?


가. 기획 중심의 웹진을 향해서

추선비 앞으로 거울은 어떻게 운영하실 생각이세요?

유서하 진아님께서 인수인계 중에 하신 말씀이 있는데, ‘신임 편집장으로서 하고 싶은 일이 굉장히 많겠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할 때가 많다. 그리고 거울은 일반 웹진이 아니라 ‘문학’ 웹진이라 문학 웹진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고……. 지금은 아직 고민하는 단계라서, 거울에 가시적인 변화가 있으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요.

일단 리뉴얼을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은 기획 꼭지가 많은 메뉴들 중 하나일 뿐이라, 특집호를 만들어도 눈에 잘 띄지 않거든요.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기획 꼭지를 중심으로 편집되는 웹진으로 바뀔 수 있다면, 배치도 좀 더 디자인적으로 의미 있게 되어야겠죠.

추선비 그런데 예전 리뉴얼은 진아 님과 유서하님 두 분이서 진행하지 않으셨나요? 새로 리뉴얼을 한다면 좀 더 분업하는 체계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해요. 이를테면 기획자가 있고 진행하는 사람이 있고. 잘 나눠서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유서하 단순 데이터 이동 같은 건 도와달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지만, 사이트 자체는 혼자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진아 님과 회의했을 때도 이런 기능 넣어주세요, 저런 기능 빼주세요, 하는 논의는 있었지만 제 입장에서는 이런 기획을 진행하려면 이런 기능이 필요하다고 다시 진아 님을 설득하게 되거든요. 기획 단계에서는 다른 분들과 많이 논의를 하겠지만 작업은 또 혼자 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추선비 작업은 혼자 하시는 게 더 편한 건가요?

유서하 사실은 그렇죠. 그 대신, 작업이 끝난 뒤에는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해요. 리뉴얼 때도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생각만큼 잘 안 됐어요. 태그 통일 문제도 그렇고.


나. 비평 레퍼런스의 확충

유서하 또 거울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로맨스나 라이트노벨 같은 장르도 다뤄보고 싶어요. 지금 거울은 SF, 판타지 외에는 잘 다루지 않으니까요.

아프락사스 거울이 SF나 판타지만이 아닌 장르문학 전반을 다루는 웹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유서하 아뇨,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그건 이매진이잖아요. (웃음)



▲ Wayback Machine으로 다시 찾아가 본 이매진. 시공사에서 서비스했던 장르문학 웹진으로, 무협소설가 진산이 편집장이었다. 2002년에 폐간. 이후에는 ‘디겐’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부활했다가 2003년에 완전히 문을 닫았다.

추선비 맞아요, 그렇죠.

유서하 제대로 된 레퍼런스를 축적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예요. 그리폰북스나 행복한책읽기 SF총서가 나오고 나서 10년 정도 지나자 작가들이 배출되기 시작했어요. 좋은 작품을 읽고서 거기에서 영향을 받은 작가들이 나오는 거죠. 그게 레퍼런스의 역할인데, 창작 쪽만이 아니라 비평 쪽 레퍼런스도 쌓아야 해요.

인터넷에서 새로 나온 책이나 영화 리뷰를 읽다 보면 블로거들이 보도자료를 베껴오는 데서 그치는 경우를 자주 봐요. 보도자료는 출판사가 그 책에서 독자에게 어필할 만하다고 생각한 요소들을 뽑아서 부각시키기 마련이라서, 작품의 본질을 짚어내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독자들은 보도자료가 해석한 면만을 본 뒤 그걸 자신의 해석이라고 여기는 것으로 만족해버리는 거죠. 인터넷에 올라온 많은 리뷰들이, 내용은 거의 다르지 않을 때가 많아요. 그런 것과는 다른 관점에서 다른 면을 보는 비평이 많이 생산되고, 그걸 읽고 참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필진 확충이 쉽지 않다는 것이 걸림돌이죠. 단문으로 좋은 리뷰를 쓰는 분들은 적지 않지만, 긴 글을 쓰는 분들은 아무래도 많지 않고, 그게 정말 좋은 리뷰인지 지속적으로 좋은 리뷰를 쓸 수 있는 분인지 판단하는 시간도 오래 걸리거든요. 특히 라이트노벨처럼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장르의 작품을 다루는 리뷰는 판단하기가 더 어렵죠.

추선비 거울 내에서 라노베를 다룰 수 있을 만한 필진들이 그리 많지 않아요.

유서하 필진 확충이 어렵다면 객원 멤버라도 초청해서 글을 부탁드리고 싶은데, 그게 쉽지가 않은 거죠. 또, 기사로 올릴만한 장문의 글을 쓸 수 있는 분들은 굳이 모임에 참여할 필요가 없는 경우도 많아요.
작품론과는 별개로 작가론도 필요해요. 사실 웹진이나 잡지 쪽에서 장르작가론을 쓰면 대개 정해져 있어요. 해외 작가로는 1호 톨킨, 2호 루이스, 3호 러브크래프트. 국내 작가로는 1호 이영도, 2호 듀나, 3호 김종일. 거기까지 하고 나서 많이들 폐간되죠. (일동 폭소)

그렇게 많이들 다루는 작가들 말고,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작가들에 대한 작가론을 기획해보고 싶어요. 장르 쪽 작가들에게 분명 영향을 주었는데도 장르 외에 속한다는 이유로 조명 받지 못하는 작가들이 많거든요. 카도노 코우헤이나 교고쿠 나츠히코가 그렇고, 미야베 미유키가 그렇죠.

추선비 온다 리쿠도 있죠.

유서하 네, 그렇죠.

아프락사스 개별 작품만을 분석하는 건 한계가 있기 마련이죠. 작품이 작가의 경력이나 관련 독자들에게 의미하는 바를 명확하게 캐내기가 어렵고…… 글을 쓰다 보면 좀 더 큰 맥락에서 짚어야 하기 마련이라서 결국에는 작가론이나 장르론으로 나아가야 해요. 그러면 앞으로 거울에서 작가론을 다룰 때 거울 외부에서 활동하는 국내 작가나 해외 작가에 대한 기사가 실릴 수도 있는 건가요? 물론 말씀하셨듯이 많이 거론되었던 작가는 제외하고요.

유서하 그런 작가들에 대한 작가론을 쓸 수 있는 필진을 찾고 있고, 컨택하는 중이예요. 로맨스도 다뤄보고 싶어요. 거울 필진 중에도 직접 로맨스를 쓰시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로맨스 장르의 영향을 받은 글을 쓰시는 분들이 계셔서, 한 번 짚어볼 만한 지점인데…… 쉽지 않아요.

추선비 어떻게든 비평이 필요하긴 해요. 비평이 좀 더 풍요로운 레퍼런스를 만들고, 작품을 읽어야 하는 방향을 제시해줄 수도 있고, 최소한 배명훈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돌출된 담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화두가 되어주니까.

유서하 거울에 좀 센 비평이 실리면 독자분들께서도 오랜만에 비평이 실렸다며 읽어주시기는 하지만, 그건 어떻게 보면 비평보다는 흔히 말하는 ‘키배’에 대한 관심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예전에 유로스님과 박가분님이 [판타스틱]에 관해 벌이셨던 논쟁도 그렇게 소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키배처럼 재미있게 읽기는 하지만, 끼어들기 쉬운 이슈는 아니다 보니 정작 덧글은 많지 않게 되고…….

관련 논쟁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거울 73호 판타스틱 2009 여름호 (유로스)
거울 74호 환상문학의 이퀼리브리엄 (박가분)
거울 74호 장르문학 평론의 허와 실: 허구적 프레임과 결핍에 대하여 (유로스)


아프락사스 그 때는 박가분님이 응하지 않으셨으면 그나마 묻힐 뻔했었죠. 일단 리뷰 필진이 워낙 적다 보니까 그런 시도가 이뤄져도 상대해줄 사람이 너무 적어요.

유서하 의도하고 만든 기획은 아니었지만 나름 재밌었어요. 게시판을 마련하는 것 말고라도, 만약 그 필진이 원하는 것이 ‘키배’라면 키배를 벌일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기획 꼭지에 걸기만 하는 식으로는 피드백이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필진 본인을 위한 마케팅이 될 만한 장을 마련해주자는 거죠. 예를 들면 [판타스틱] 욕하면 덧글이 달릴 수밖에 없거든요. (웃음) [판타스틱]이 웹진이 된 시점에서 유로스님께 [판타스틱] 관련기사를 써달라고 한다거나…….

추선비 서하님이 너무나 조용하고 나긋나긋한 어조로 무서운 말씀을 하세요. (웃음)

유서하 그런가요. (웃음) 오해가 있을까 봐 말씀드리지만 저 [판타스틱] 좋아해요. (웃음) 아무튼 그런 식으로 의욕 있는 필진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결론적으로 리뉴얼이 아니면 안되지 않을까 싶어요.

추선비 앞으로 많이 바쁘시겠네요. 글쓰기에 편집장 일에, 개인사에.

유서하 열심히 해야죠. (웃음)


다. 편집 데스크가 필요하다.

유서하 기사를 쓰더라도 한 명 정도는 보는 체계를 만들었으면 좋겠더라고요. 자신은 잘 썼다고 생각하는데 빠지는 부분도 있을 수 있고, 필진끼리는 아는데 독자들은 모르는 내용이라던가. 다들 아는 것 같아도 인터뷰할 때 프로필 한 번 더 넣는 거라던가.

아프락사스 네. 그 작가를 처음 접하는 독자도 무슨 이야긴지 알아들을 수 있게 해야겠죠.

유서하 저번 배명훈님 인터뷰에서 아쉬웠던 게, 배명훈님 책이 나온다는데 그 책 제목이 잘 부각되지 않았어요. 그게 나중에 보니 [안녕, 인공 존재!] 이야기였는데, 제가 꼼꼼하게 읽진 않았지만 책 제목이 대화 도중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딱 한 번 나오던가, 그래요. 그래서 책이나 그 책을 쓴 작가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접근하기 힘든 기사처럼 보였죠. 이런 걸 체크하려면 누가 한번 읽긴 해야겠구나, 지문이나 편집자 주 같은 것으로 한 번 강조하는 편집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했었어요,

아프락사스 저뿐만 아니라 인터뷰 참여했던 분들 모두 확인하셨는데도 모두 그냥 넘어가버린 거죠.

유서하 네. 기사 작성자나 작가와는 별개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데스크가 필요해요. 외부인의 시선이라는 게 중요한데, 정말 외부인에게 읽힐 수는 없으니까 다들 또 다른 자아를 가지고 읽어야 한단 말이죠. (웃음)

추선비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겠네요. 그걸 다 서하님이 확인하시기는 힘들고…….

유서하 그래서 그걸 확인하는 사람들이 필요한데,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때그때 사정되는 분에게 부탁드려야 하나, 아니면 담당자를 뽑아야 하나…….

아프락사스 가능하면 담당자가 생기는 게 좋지만, 그걸 해줄 수 있는 분이 많지 않죠.

유서하 그러니까요. 감수에도 나름 능력이 필요해서요. 좀 하다 보면 일 잘하는 사람에게 일이 몰리기 마련이고, 그런 식으로 일이 진행돼요.

추선비 거울에서는 재능이 많으면 일이 몰리죠. 그거야 거울만 그런 게 아니라 회사도 그렇지만요.

유서하 회사에서야 자기 일이 아니면 자를 수는 있죠. 회사에서는 그게 돼요. 거울은 그게 어렵죠.

추선비 거울은 심정적으로, 저 쪽에서 못하겠다고 하는 건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는 걸 이해해주니까요. 다들 생계가 따로 있고.

유서하 사실 어지간하면 해주시니까요. 다들 좋은 분이셔서. 콜린님이 이벤트 담당이시라니까 출판사 담당자분께서 놀라셨다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김이환 님께 보내시면 됩니다’라고 했더니 그쪽에서 ‘혹시 그분이신가요’ 해서 ‘네. 그 분이에요’ 했다고. (웃음)


4. 인터뷰를 마치며

유서하 제가 쓴 게 별로 없잖아요? 지금까지 세 편밖에 안 되는데, 이러다 보니 독자 분들이 저를 필진이 아니라 디자인하는 사람, 편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많이 들어요.

편집장이라는 큰 짐을 짊어지기로 결심하신 서하님 입장에서는 역시 고민할 수밖에 없는 부분일 터이다.

추선비 저번 호에 ida님 인터뷰를 할 때 ida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프로필에서 게임 시나리오 작가 경력을 표기하지 않으셨던 게 게임 시나리오 작가로 기억되는 게 싫었기 때문이라고요. ‘소설가로서의 기반을 쌓아놓지 않은 상태에서 개발자라는 것을 밝히면 게임 이야기밖에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추선비 왜 요즘 들어 ida님에게 게임 시나리오 관련 질문이 많이 들어올까요?
ida 재밌는 게, 제가 지금까지 출판된 책에는 이력에 게임개발자라는 말을 한 번도 넣어본 적이 없어요. 이번에 처음 넣었더니 많이들 물어보세요. 이게 싫어서 지금까지 말을 안했었어요. 제가 어느 정도 소설가로서의 기반을 쌓아놓지 않은 상태에서 밝히면 정말 게임 이야기밖에 안나올 것 같아서.

유서하 네, 저도 읽었어요. 자신의 작품이 소설가의 그것으로 읽히는 대신 게임 시나리오 작가의 작업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싫으셨을 거예요.

저는 군대에서 읽었던 어떤 소설이 자주 생각나요. 표지가 없어서 제목도 작가도 모르고, 뒷부분이 뜯겨나간 바람에 결말도 모르지만,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도 아닌 어떤 캐릭터가 인상 깊었거든요. 삼류 화가인데, 작중에서 그 사람의 친구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해요.

화가는 그 사건에 대한 증인으로 증언을 요청받지만 거부하죠. 수사관이 왜 증언을 거부하느냐고 물으니까 화가가 이렇게 대답해요. ‘나는 나의 작품으로, 화가로서 기억되고 싶다. 시대가 나를 살인사건의 증인 중 한 명으로 기억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냥 넘어가는 독자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화가가 아니더라도 작가라면 그 대사가 얼마나 피를 토하는 심정에서 나오는 말인지 알 거예요.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억되고 싶다…….

아프락사스 가드너 도조와가 생각나네요. 단편으로 휴고 상을 몇 번이나 탄 작가인데도 편집자로 하도 유명해지니까 아무도 그 사람을 작가로 생각하지 않더라는 사람 말이죠. 휴고 상까지 탈 정도면 창작 쪽에서도 나름 재능이 있었다는 이야기일 텐데도요.

유서하 어떻게 기억되느냐의 문제죠. 도조와도 한 번 편집자로 기억되고 나니까, 휴고 상 수상작가가 아니라 ‘편집자이지만 소설도 쓴 적 있다’는 식의 가십으로 남는 거죠.

아프락사스 예전 인터뷰에서는 ‘작가와 디자이너로서의 비중이 반반쯤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죠. 이제는 편집장이라는 역할까지 추가된 셈인데,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보세요?

유서하 가장 이상적인 건 역시 1:1:1이 되는 거겠죠. 그렇게 하려면…… 많이 노력해야 할 테고요. (웃음)

스티븐 킹은 “저술은 인간이 하고, 편집은 신이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작품이 독자들에게 다가서는 과정에서 편집자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비단 작품만이 아니라 거울과 같은 단체들도 예외가 아니다. 거울이라는 공간 자체를 ‘편집’하는 역할을 맡기 마련인 편집장의 교체는 환상문학웹진 거울에 큰 변화를 요구할 것이다. 그 변화의 기미는 종전의 거울에서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았던 ‘기획’과 ‘비평’에 대한 유서하님의 관심에서도 드러난다.

물론 거울의 본질, 필진들의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보장한다는 원칙만큼은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거울이 7년 동안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환상문학웹진’이라는 이름이 증명하듯이. 거울은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끊임없이 변화하되 그 중심부만큼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한 명의 필진과 한 명의 독자로서 믿고 기대한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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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a 10.08.12 01:09 댓글 수정 삭제
    새 편집장님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인터뷰였습니다. 잘 봤습니다. ^^ 믿음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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