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faerierover@naver.com


   이야기 공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야기 농부로 살아가려는 사람의 진짜 이야기들

   적어도 낭만주의 시대까지 이야기라는 것은 작가가 신에게 하사받은 권능의 일종이었다. 신들은 세계의 비밀을 인간에게 알려주기 위하여 신화(神話)라는 것을 만들었고, 이것을 받은 음유시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선포했다. 즉 이야기에는 비밀이 담겨 있다. 그것을 많은 작가들은 ‘삶’이라는 하나의 단일 요소로 함축한다. 작가의 이야기는 하나의 세계이고, 작품은 세계가 존재하는 이유, 세계가 움직이는 근원, 세계 속의 인간이 살아가는 존재양태를 설명해 준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 속에 파묻혀 살고 있다. 게오르그 루카치의  말처럼, 인간의 삶은 이제 신들의 이야기에서 떨어져 나와 격렬한 사회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렸고*1, 이 이야기들은 신에게로 돌아갈 수 없이 온전히 인간에게 남겨진 짐들이 됐다. 게다가 다국적 자본주의가 창궐한 현대의 이야기들은 허공 속에서 수없이 부유하다가 소멸된다. 더 이상 ‘이야기’라는 것을 생산해낼 가치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세계, 소설이 아니라도 TV와 영화와 인터넷만 열면 어떤 이야기든 만날 수 있는 세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작가라는 집단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초기 콜린의 작품들은 이러한 작가들의 고민을 솔직하게 담아내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다분히 모던한 양식을 가지고, 선대의 작가들의 양식을 나름대로 흡수한 독자적 패러다임을 구축해 내고 있다.

   그에게 글쓰기란 자아를 둘러싼 세계가 소비되는 것을 거부하고, 이야기를 자신에게로 수렴하려는 하나의 실천적 행위로 보인다. 롤랑 바르트나 파스칼 키냐르가 지적했듯이, 작가는 본질적으로 욕망의 실현태다.*2 어떤 속성의 욕망이냐에 따라서 작가에게 요구되는 글이 다분히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이 속성은 기본적으로 작가들이 거부할 수 없다. {스타벅스 기행문}에서 주인공이 가지는 ‘욕망’에 대한 강박증은 이야기를 쓰려는 작가의 이러한 욕망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그 욕망은 ‘작가’라는 실현태로서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작가 본연으로서의 욕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진지한 탐구를 하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욕망과 작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제시를 해 주고 있다.

   “거리를 내려다보면 모든 사람이 그 아이로 보였다. 모든 이야기가 그 아이의 이야기로 보였다. 수십억개의 이야기는 다른 수십억의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다른 수십억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의 이야기는 모두의 이야기이며, 모두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걸 깨달은 순간 나는 작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스타벅스 기행문을 썼고, 서울의 많은 스타벅스들을 돌아다닌 후에야 그 말을 깨달았다. 나는 작가였고, 나는 스타벅스 기행문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콜린, {스타벅스 기행문} 中

  작가에게 이야기란 본질적으로 소비되고 사라져버리는 상품이 아니라, 자신이 그 이야기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낭만적이고도 휴머니즘적인 믿음에서 그 추진력을 얻는다.*3 그리하여 작품의 이야기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글쓰는 사람(작가)을 통하여 그 세계가 하나의 참된 ‘실재의 우주축(axis)’을 이루는 중요한 존재라고 설파한다.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에서 이런 소외된 이야기를 삶의 중심으로 끌고 오려는 주인공의 여러 행위는 단지 상품성(혹은 경쟁력)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만을 가지고 있는 현대 ’이야기‘의 부조리함을 짚어내는 실천적 행위로서의 작가적 태도를 견지한다. {천사가 지나갔어} 역시, 일상에서 지나치고 매몰된 하나의 소외된 이야기를 주체의 숭고함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그에게 버려질 수 있는 이야기라는 건 없다. 모든 이야기는 이야기 안의 ‘주체’(주인공이라고 해도 좋다)가 사는 삶의 중심이고 빅뱅의 근원이 된다({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 그런 면에서 작가는 이야기를 수집하는 수집가가 아니라, 이야기를 실천하는 구연자(혹은 연기자), 혹은 청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제의 위치가 되어야 한다. 읽히지 않고 묻혀버리는 책들은 그래서 원한을 가지고, 작가는 그에 대한 원죄의식을 느낄 수도 있다({마르셀 뒤샹은 왜 재채기를 하지 않는가}). 작가에게 이야기란 실천의 대상이지, 수집과 즐거움의 도구일 수 없다. 거기서 일어나는 고통과 고뇌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작가가 해내야하는 초월적 이야기들만의 세계―――이를테면 작가들의 황홀경―――사이의 끊임없는 사투다({버지니아 울프 가라사대}). 이를테면 그는 글쓰는 행위 속에서 삶의 실천적 지표를 찾으려는 작가의 자화상을 그리는 데에 글쓰기의 테마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과업은 보편적이라기보다는 특수적 상황이다. 그것은 필자가 앞에서 제시한 낭만주의 시대의 작가들과 다른 상황에 놓인 현대의 절체절명인 상황을 대변하는 목소리일 수도 있다. 콜린이 그려나가는 작가들의 이미지는 다른 ‘이야기’들이 범람하는 현대의 ‘문자화된 이야기’일 것이다. 그것은 {종이 바깥의 영화}에서 매우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는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공백과, 그것에 대한 강박증, 다른 미디어 텍스트에 대한 교차 등을 통하여 소설의 핵심 담론을 ‘이야기’로 단단하게 굳히고 있다. 그에게 소설이냐 영화냐, 들은 이야기냐 경험한 이야기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공백을 가득 채우는 이야기들이며, 그것을 주체적 행동(글쓰기)으로 수렴시키는 연금술사가 바로 작가인 것이다.  

  
   콜린 님의 시간의 잔상.

   ‘시간의 잔상’에서 콜린의 작품들을 순차적으로 읽어보면, 그의 이러한 글쓰기에 대한 탐구(?)가 2006년을 기점으로 멈추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과연 콜린은 이 작가라는 신비한 직업에 대한 탐구를 {종이 바깥의 영화}를 통해서 매듭을 지은 것인가, 아니면 아직도 고민 중인 것인가? 앞으로 주시하고 지켜 볼 일이다.



   모더니즘 작가로서의 콜린

   진지한 글쓰기를 모색하는 작가라면, 누구든 한번쯤 모더니즘 문학의 개울을 건너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적이든 그렇지 못하든 유익하다. 이를 통해 작가는 하나의 세계를 더 탐구할만한 문학적 재원(材源)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콜린이 잡은 이 중요 재원은 몇 가지가 있는데, 특히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메타픽션(meta fiction:소설가 소설)이다.
   그는 교차서술, 소설가적 자의식을 통하여 소설가, 글쓰는 사람이 가지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소설 안에 풀어넣으려 한다. 최초의 시도인 {스타벅스 기행문}에서는 현재진행형인 ‘스타벅스 기행문 쓰기’의 행동을 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쓴다는 행위 자체에 주체성을 찾기 위한 접근을 감행했다. 이 작품에서는 수없이 범람하는 이야기들 속에서 그것을 잡지 않고 아이가 고집하는 ‘스타벅스 기행문’이라는 것을 잡아야하는 까닭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는 무엇이든 글로 쓸 수 있는 존재이긴 하지만, 모두 다 쓸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아래의 부분을 읽어보자.

   “나는 옆자리의 두 여자를 본다. 인형만큼이나 예쁜 그들은 인형만큼이나 예쁜 표정으로 스콘을 베어먹는다. 반대 테이블의 두 여자는 남자 친구 이야기를 하며 미친듯이 웃어댄다. 짱이야 짱 짱, 둘의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뒤에 앉은 커플은 스타벅스의 시끄럽고 더운 공기를 지겨워한다. 이제 막 매장에 들어온 여자는 빨간 목도리를 쓰다듬으며 빈자리를 찾는다. 그녀가 내 가방이 놓인 빈 의자를 힐끔거리는 것이 나는 못내 부담스럽다. 길거리의 연인은 스타벅스를 올려보며 누가 손님으로 앉아있는 지를 궁금해한다…….”
―――콜린, {스타벅스 기행문} 中

   주인공 곁으로 이러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스쳐지나가지만, 작중에서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글을 쓰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면 주인공에게 이 이야기들은 ‘작가의 안으로 수렴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타벅스 기행문}의 주인공은 자신에게 수렴된 이야기들을 글로 쓴다. ‘스타벅스 기행문’을 쓰는 이유도 그것을 권유한 ‘아이’의 이야기가 주인공 삶 안으로 수렴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드러내기는 작품 전체에 굉장히 일목요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주인공이 언급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주인공 삶속에서 일어나거나 삶 속으로 들어온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천적 행위―――스타벅스를 돌아다니는―――로 이어지면서 작가의 주체적 행동에 동기를 부여한다.
   이런 메타픽션적 구도는 이 작품에서 ‘글쓰는 원인’과 ‘글쓰는 행동’ 사이의 긴밀한 긴장관계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의 가장 바닥에 있는 ‘의식’의 단계를 건드리지는 못했다. 상당히 아쉽게도 콜린이 써나가는 대다수의 메타픽션은 ‘표면 위의 이야기’는 상당히 훌륭하게 풀어냈지만, 작가가 안고 있는 사건의 ‘표면 밑의 이야기’를 건드리는 데는 실패했다. {스타벅스 기행문}에서 작가가 가지고 있는 ‘욕망의 근원적인 면’을 모호하게 처리한 다음, 그 뒤에 따라오는 이야기가 ‘표면적 사건들의 연속’이라는 점은, 작가의식의 내외에 대한 설명에 상당한 불연속면을 만들어내고 있다.*4 욕망을 뛰어넘지 못하는 ‘표면적 사건들’―――이를테면 가족의 간섭―――이 어떻게 하여 욕망을 현실 앞에서 굴복시킬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내적 설명이 생략된 이런 서사는 주인공이 치열하게 했어야하는 고민들(자신이 글을 써봤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 중에 이 문제를 심각하게 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리라 믿는다)을 작품의 표면 밑으로 가라앉혀 버렸다. 때문에 주인공이 세상의 이야기들을 자신의 이야기로 포용하는 과정에 ‘성찰’이라는 중대한 나사가 하나 빠져버린 셈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상당히 짜임새 있게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작품 안에 담겨있는 가장 커다란 테마가 ‘실천적 행동으로서의 글쓰기’에 맞추어져 있고, 그에 관한 드러내기가 함축적으로 정제되어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대개 이런 작품에서는 외적 구조와 내적 의식의 갈등 관계를 파고드는 것이 관건이다. 모더니즘이라는 예술 구조는 형식과 내용이 관습을 깬 접속으로 이루어지는 변증적 유기체다.*5 대개의 이러한 작품들은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n)의 의도적 배반과 새로운 연결관계를 찾으려 하며, 적어도 미술과 시(詩) 장르에 있어서, 이것은 ‘제목’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천사가 지나갔어}와 {껍데기}는 이러한 모더니즘의 전통을 따르는 전형적인 소품으로 볼 수 있다. {천사가 지나갔어}는 반복된 문장이 ‘실재의 현상’과 일치한다는 점―――수많은 부재중 통화―――에서 시적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텍스트의 내용과 형식―――여기서는 제목이 될 수 있다―――이 새로운 의미관계를 찾으면서 작품의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다만, 그것이 관습이 허용되는 패러다임 안에서 조립되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신선함을 상실해버렸다. 따라서 {천사가 지나갔어}는 조금 더 정격에서 벗어난 파격의 이미지를 심어줄 필요가 있고, 그것은 본 텍스트로서가 아닌, 다른 메타텍스트를 통해서도 가능한 부분이니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고 생각된다. 반면에 {껍데기}는 여러 모호한 기표들을 이용하여 하나의 집약된 ‘알맹이’ (문자들)를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데에는 성공한 듯 하다. 필자가 읽기에 작품 속의 수많은 ‘네모’는 원고지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새로운 ‘기표’가 새로운 ‘의미’와 연결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작품의 내적 의미와 형식은 같은 궤를 긋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제목 때문인데, 제목이 나타내는 ‘기표와 기의’, 그리고 텍스트가 나타내는 ‘기표와 기의’가 모두 일치하기 때문에 의미의 이미지가 상당히 많이 감쇄된다(쉽게 말해 제목의 ‘껍데기’의 의미와 작품 안에 담긴 ‘껍데기’의 의미가 서로 같은 데서 온다는 뜻). 따라서, 이 작품은 제목 선정에 조금 더 신중을 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마르셀 뒤샹은 왜 재채기를 하지 않는가}는 마치 미하엘 엔데의 {보로메오 콜미의 통로}를 연상시키는 경쾌한 소품이다. 엔데가 이 작품을 보르헤스의 오마주로 썼음을 감안한다면, 콜린 역시 보르헤스에 대한 경외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단지, ‘표면 위’와 ‘표면 밑’으로 의식 구조를 이분화하여, 끝내는 ‘나’로 수렴시키려는 내적 서사를 의도했다면, ‘책’과 ‘나’와 ‘가게’와 ‘다이어리’의 의식 안팎의 구조를 좀 더 구체화하여 제시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6
   {버지니아 울프 가라사대}는 그런 점에서 소설가를 테마로 한 조금은 안정된 텍스트로 읽힐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복잡한 기법은 사용하지 않고, ‘구멍’이라는 단순한 매개체 하나를 통해서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명쾌하게 제시했다. 물론 그것이 투박할지라도, 작품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는 매우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한가지 문제는, 작품의 호흡이다. 이 작품은 어느 소설가의 비현실적인 죽을 통하여 ‘문학적 지향점의 끝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하여’ 보여주는 소설이다. 따라서 작품은 소설가의 죽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관찰자인 옆집 사람과의 매개체가 ‘소설책’이라는 것 하나 뿐이다. 이 간단한 내적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 작품의 절반을 소모했다는 것은 작품의 서사 밀도가 상당히 편중되어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첫 번째 인물의 히스테릭한 상황과 대여점 주인과의 싸움, 인터넷을 통한 자살 정보 검색 등의 지난한 이야기들이 이 작품에 어떤 ‘서사적 추진력’을 주는 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가 남는다.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는 굉장히 포스트모던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잡다하게 널려있는 세상의 이야기들을 하나의 참된 실재로 재탄생시키려 한다. 이 점에서는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과 닮아있다. 그는 이야기를 자동기술하며 하나의 ‘소설’ 속에 위화감없이 공존시키고 있다. 여러 가지 떠도는 이야기들은 현실에 어려움 없이 끼어들고, 자아의 삶은 이야기화된다. 이 작품은 작가의 주제의식이 가장 집약되어 있는 작품이면서, 가장 농밀한 무게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로 꽉 짜여져 있다. {문근영 대통령}에서 보여주었던 SF적인 세계 교차가 이 작품에서는 완전히 내재화되어 유기적으로 엮여있다. 몇 개의 다층적 세계는 하나의 ‘이야기’안에서 움직이며, 그 이야기는 다시 세계 속의 ‘삶’이 되면서 재의미를 가진다. 교차서술이 가장 정직하게 성공한 작품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범람할 정도로 엮어진 파편화된 이야기들을 모두 하나의 소설 안에 담아넣으면서 발생되는 초점의 분산은 작가가 다듬어야할 부분으로 지적될 수 있으나, 독서행위에서 이 점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주제를 끌고나가는 서사의 추진력이 매우 탄탄하다.



   장르작가로서의 콜린

   콜린이 쓴 작품 중에서 장르적 특성을 묶을 수 있는 작품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문근영 대통령}은 [스즈미야 하루히]를 떠올릴 수 있는 라이트노벨로 읽을 수 있으며, {변신!}{01001한 로봇 친구들}은 SF소설로 읽힐 여지가 있다. 이 작품들은 딱히 지금까지 언급한 작품들과 긴밀한 성격적 유사성을 찾을 수는 없으나,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여기서는 이 세 작품에 대한 장르적 접근을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문근영 대통령}은 SF적 성격이 가미된 라이트노벨, 즉 [스즈미야 하루히]를 떠올릴 수 있는 혐의를 가지고 있다. 소설의 캐릭터 자체가 그러하며*7, 이야기의 단순한 구조가 그러하고, 평행우주 속에서 전개되는 개인의 ‘의식 폭주’가 그러하다. 다만, 여기서는 현실의 세계와 연루되어 작품의 주제가 ‘어른’와 ‘아이’의 구도로 짜여져 있다는 큰 차이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서 {문근영 대통령}이 라이트노벨로 읽히기 어려운 이유는 대중적으로 쉽게 읽힐 수 있는 명쾌한 구조를 가진 작품도 아니거니와, 그렇게 보기에는 흘러가는 서사의 방향과 모아지는 주제가 조금 다르다.
   문제는 이 작품의 주제를 과연 ‘어른과 아이의 세계가 충돌하는 전쟁’으로 단정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먼저 이 작품에 나오는 모든 ‘아이들’(학생들이라 불러도 좋다)은 아이로서 가지는 특징을 대변할 수 없다. 일단 {문근영 대통령}에 드러나는 ‘아이’의 아이콘은 굉장히 모호하며 구체적이지 못하다.

   “모든 성인 남자들은 다 사라졌어요. 그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 처럼 사라졌어요. 아이들은 어른이 되지 않아요. 자신이 성장하겠다고 자각하면 청소년은 될 수 있지만 어른은 되지 않아요. 대통령은 19세 미만의 여자아이들만이 될 수 있어요. 오직 소녀들만이 가능한 거죠. 그래서 제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거고요.
   더 거친 변화도 많았어요. 기존의 고정된 것들은 모두 자유스러워졌어요. 동물도 말을 할 수 있어요.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권리가 주어졌죠. 하늘의 색은 제멋대로죠. 해와 달과 별도 마음대로 뜨고 져요. 시간 역시 불규칙하게 흐르고요. 계절 역시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이 모두 없어졌다고 생각하셔도 좋아요…….”

―――콜린, {문근영 대통령} 中

   아이에서 어른으로 진행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어른이란 존재는 아이의 대립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 작품에서 이 부분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물론 이야기 전체적인 총괄로 보았을 때, 이것은 금기와 성(性)에 대한 트라우마가 세계에 투영된 사건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이에 대한 성격을 보여주는 부분들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두 번째 단락부터 보여주는 이 세계의 특징은 다분히 ‘네버랜드’적인 동화의 세계이다.*8 작가가 가지고 있는 ‘아이’라는 의식세계가 하나의 총체적 특성으로 묶여있지 않고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작가는 이 작품의 ‘세계’에서 아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분명하고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따라서, 남는 것은 ‘미소녀’라는 캐리커쳐와 그들이 살아가는 마리아의 세계뿐이며, 작품 전체의 주제를 포괄하는 세계가 되기에는 상당히 미약하다.
   반면에 ‘어른’의 세계란 이 작품에서―――주인공의 의식에 의해―――왜곡되어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왜곡되거나 재단된 ‘어른’이라는 세계는 이 작품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기껏해야 주인공이 목격한 ‘스너프 필름’에 대한 단편적 사고와 괴물의 모습으로 등장할 뿐이다. 괴물들은 ‘파괴적 성격’만 드러내고 있으며, 그것이 ‘소녀들의 겁탈’이나 ‘아동에 대한 파쇼적 폭력’이 아니라, 심지어 프로이트적인 ‘꿈상징’으로도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세계의 파괴에만 머물러 있다. 분명 주인공에 의하여 ‘어른의 세계’가 하나의 성격으로 보여진다는 점은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특징임에 분명하지만, 그런 ‘어른의 세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세계이며, 현실과 2차세계에서 어떤 성격을 가지고 폭압적 행동을 자행하는 것인지에 대한 표현은 극단적으로 자제되어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이 정말 ‘어른과 아이의 전쟁인가’에 대한 질문은 필자로서는 이 상황에서 대답하기 곤란한다.
   어른과 아이의 전쟁을 다룬 대표적인 작품으로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El Laberinto Del Fauno, 2006)를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 어른과 아이의 대결은 ‘무한한 정신을 존중하는 상상력의 세계’와 ‘현실의 삶과 죽음을 마주한 치열한 세계’라는 구체적 세계를 제시함으로서 설득력을 가진다.*9 이러한 두 세계의 구체적 대립관계가 강화시키지 않는 한,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현실과 2차세계에서 갈등하는 문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이 작품을 라이트노벨로 읽기 어려운 결정적인 이유는 마리아와 주인공 소년 사이의 교감을 통하여 ‘성장’하는 필수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끝을 맺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성장을 통한 대단원이 아니라 성찰을 위한 대단원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그 구조나 성격이 라이트노벨과 닮아있다고 할지라도, 라이트노벨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기 망설여지는 것이다. 작품이 ‘두 아이의 성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면, 싸우는 그 자체에 무게가 주어질 수 밖에 없다(그리고 사실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이 전쟁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위에서 제시한 이유로 그 대립은 실감나고 구체적이지 못하다. 이 점은 이 작품의 가장 큰 약점으로 남는다.


   {변신!}은 과학과 인류의 진화단계를 가정에 올려두고 풀어나간 SF소설이다. 이 작품이 일반적인 사이버펑크(이 작품을 사이버펑크로 보기 다소 모호하지만, 본지에서는 이렇게 쓰도록 하겠다) 작품과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사이버펑크가 가져오는 윤리의식의 문제나, 자아의 비자아화에 대한 정체성에 의문점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도로 중립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과학이 극도로 발달하면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특징을 포기한 상태의 삶에 대해서 보고서의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고전적인 SF의 미학적 주제를 탐구하고 있는 작품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기술을 형상화하면서 인류의 행동과 사유양식이 어떻게 변하는지만 객관적인 태도로 추적한다. 이 작품의 존재의의에 대한 문제는 바로 여기서 일어나는데, 작가가 작품 내에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는지에 대한 입장이 매우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간접적으로 작가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가능성의 대목은 있다.

   인터뷰어   일이 힘들진 않습니까?
   ㅇㅇ씨   시간에 맞춰 영양액을 주기적으로 넣고 온도 조절장치가 항상 지켜보는 일이 까다롭긴 하지만 육체적으로는 힘들지 않아요.
   인터뷰어   저렇게 비닐 주머니로 변신한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ㅇㅇ씨   아무 생각 없는데요.
   인터뷰어   ㅇㅇ씨는 신체를 전혀 개조하지 않았는데요, 그것에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요즘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체를 취향에 맞게 바꾸잖아요.
   ㅇㅇ씨   그냥 이렇게 있고 싶어서요.”

―――콜린, {변신!} 中

   그러나 이 부분을 작품의 내용에 대한 작가의 대답으로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왜냐면, 전체적인 보고서의 맥락은 인간의 변화를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으며, 마지막 부분에서 “그리하여 인간은 변신을 배우게 되었다”라고 기술하는 데에서는 오히려 긍정의 뉘앙스가 풍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변화하는 인류에 대한 시니컬한 대답보다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음도 권리로 가질 수 있는 그 세계의 한 단면으로 읽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가상세계에 대한 짧은 리포트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물론 상상력의 유희로서 작품을 읽을 수는 있겠지만, SF문학 특유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이렇게 소품으로 창작된 작품의 의도는 다소 모호해진다.
  
   {01001한 로봇 친구들}은 인간의 감정을 가지길 희망하는 로봇과 인간의 만남을 그린 단편이다. 이 작품은 인간에게서 독립한 로봇들이 사는 로보니아에서 홀로 칼럼을 쓰는 인간이 인간의 감정을 배우기를 원하는 ‘엄마 컴퓨터’에 의해 인간의 성격을 가지는 두 로봇과 만나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그린 작품이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전개를 가지고 있으며, 가독성을 높이는 속도감 있는 문체도 이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꼽을 수 있다. 다만, 테마의 진부성을 떠나서, 이계의 존재―――로봇들―――과 인간 사이의 차이에서 개별 종족의 존재론적 차이와 질문에 대해서는 깊게 제시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은 있지만, 대중적 성격의 단편 소품으로서 신선한 시야를 제시하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받을만 하다. 이 작품은 ‘시간의 잔상’에 올라온 콜린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 아닐까 한다.



   마치며

   콜린의 작품세계는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실험적인 기법을 사용하는 모더니즘계의 흐름부터 시작하여, SF와 판타지, 환상적 사실주의 계열의 장르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이 그 안에 녹아 있고, 글쓰기 자체를 탐구하는 작가주의적 성향이 진하게 감지된다. 그의 작품 세계는 매우 진지하기도 하고, 또한 매우 경쾌하기도 하다. 즉, 이 작가는 하나의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다양한 현상들을 바라보려는 욕심을 가진 작가이다. 그리고 그 욕심은 아주 바람직하다. 필자는 그의 작품 세계가 아직 ‘직조중’이라고 생각한다. 일련의 작품들을 읽어본 결과,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있는 세계의 사물들을 열심히 바라보고, 소통을 원하고 있다. 따라서, 소설이 가진, 삶의 비밀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을 기대하는 독자들이라면, 이 사람을 조금 더 주목하고 기다려도 좋을 것 같다.





   *1   게오르그 루카치, [소설의 이론](김경식 옮김, 문예출판사, 2007년 7월)

   *2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김희영 옮김, 동문선, 1997년 2월); 파스칼 키냐르,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5년 5월)

   *3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위에 제시한 콜린의 작품들과 실천적 휴머니즘 작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생 떽쥐페리의 [어린 왕자]의 마지막 대화를 비교해 보라.

   *4   왜냐하면 이 작품에서 설명하는 ‘욕망’이라는 것들은 상당히 ‘표면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일차적 욕망에 의해 글쓰는 작가는 많지만, 그것이 본질적 욕망으로 자리 잡을 수는 없다. 글쓰기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욕망이고, 본작에서 그것이 ‘작가적 욕망’이라고 한다면, 그 작가적 욕망이라는 것의 실체에 연관되는 ‘욕망의 행위’들이 제시되야 하지만, 여기서 드러나는 ‘욕망의 실재 현상’은 짝사랑에서 시작한 표면적 욕망이다. 이것이 글쓰는 주체적 행위의 ‘작가적 욕망’으로 숙성되는 과정이 결여되어 있다. 작가가 이 부분을 소설에서 제시하는 테마로 상정하려 했다면,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의 회고담에서 이 부분을 집약적으로 파고 들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5   이에 대해서는 아도르노의 [미학이론](홍승용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7년 11월) 혹은 허버트 리드의 [현대미술의 원리](김윤수 옮김, 열화당, 1981년 6월) 등 모더니즘 예술 이론서를 참조하길 바란다.

   *6   이 작품의 모든 현상은 주인공 ‘나’의 의식과 사건 안에서 일어나고 끝난다. 따라서, 나를 둘러싼 사건은 모두 ‘표면적’으로 보이게 될 뿐이다. 이 작품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일종의 ‘환상적 사실주의’의 소설이라면 책들의 소리를 듣는 ‘균열’의 부분이 나의 의식 안, 즉 ‘표면 밑’으로 파고든 이야기일 것이며, 나머지는 나를 둘러싼 의식 ‘밖’의 이야기들이다(환상적 사실주의의 이런 기법적 특징에 대해서는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의 {틈새}라는 단편을 참조하길 바란다). 다이어리 이름에 대해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이 ‘표면밑’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나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나의 안으로 들어오는 상황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이런 모호함은, 끝에 ‘나의 이야기’를 제시하는 부분에서 큰 불협을 가져온다. ‘나’에 대해 일어난 모든 일들은 ‘표면 밖’에서 보이는 이야기들이다. 물론 다이어리가 ‘이름을 얻었다’는 점, 실제로 ‘쓰여졌다는 점’에서 표면 안팎의 변증적 작용이 일어나고는 있지만, 그것이 주인공의 ‘의식’까지 도달하는 부분은 상당히 미약하다. 물론 이런 문제점들은 크게 부각되는 부분도 아니고, 문제될 부분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가 있겠지만, 작가가 의식적으로 이런 대립구도를 형성하려 했다면, ‘표면위와 표면밑’ 혹은 의식의 ‘안팎’에 대한 고찰이 조금은 더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7   소위 말하는 일본의 라이트노벨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중 몇 가지는, 평범한 주인공이 초인적 세계의 중심인물이 되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것, 그리고 그를 둘러싼 소녀들이 연루된다는 것, 또한 결정적으로 그것을 이루는 세계의 이면에는 그들에 대한 ‘결핍’의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 등을 꼽을 수 있다. 물론, 그 결핍의 상태라는 것이 [스즈미야 하루히]와는 다른 부분이지만, 그 결핍을 통해서 소설의 동력이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캐릭터의 특성이 서사에 반영되는 라이트노벨과 같은 방향성을 가지는 것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라이트노벨의 정의와 그 ‘구조주의적 특성’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논의를 해야할 필요가 있지만, 지면상 그 부분은 이 글에서 생략한다.

   *8   자연의 법칙이 무시되는 동화적 세계Fairyland에 대해서는 J.R.R. 톨킨의 {On Fairy Stories}([Tree and Leaf], New York: HarperCollins, 1964)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톨킨의 이 텍스트에 제시된 ‘환상의 나라’에 대한 성격과 {문근영 대통령}의 이 부분에서 제시한 세계의 성격은 ‘설명’의 차원에서 대단히 비슷하다. 따라서 두 번째 단락에서 설명된 이야기는 추가적인 의미제시가 없는 한 ‘네버랜드적’이라고 볼 수 있다.

   *9   델 토로는 [판의 미로]에서 아이의 세계와 어른의 세계를 끊임없이 교차대비시키면서 단순한 사물들에 특별한 의미를, 일상적 사건에 심오한 무게를 부과하면서 두 세계를 끊임없이 긴장시킨다. 오필리아는 ‘분필’을 사용하므로써 동화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듯이, 비달 대위는 ‘시계’를 극복해야만 삶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오필리아가 엄마를 낫게 하기위하여 ‘만드라고라’를 받아오는 것과 대조적으로 비달 대위는 ‘의사’를 부른다. 이러한 구체적 대립과 제시를 통하여 이 영화는 어른과 아이의 세계가 가지는 심각한 괴리를 부각시키고, 그 전쟁을 ‘오필리아와 비달 대위의 갈등’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





현서/푸른꽃 님은?
경기도 부천 출생. 여러 대학과 강단 등을 유랑하며 철학, 미학, 종교학, 신화학, 문화인류학, 오컬트ㆍ포츈텔링 등을 공부하며 이십대의 대부분을 보냈다. 현재 국어국문학과에서 소설을 쓰며 놀고 있다.
댓글 0
Prev 1 ...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 25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