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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서(faerierov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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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그 자체로서의 환상 - 진아와 환상소설

  문단 작가들이 환상소설을 쓸 때 당면하게 되는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모든 이야기를 ‘현실’의 틀 속으로 수렴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문단 출신의, 혹은 문학교육을 받으며 글을 써온 작가들의 환상소설 속에는 환상이 일종의 도구적 성향으로 가두어져 있든가, 환상 본연의 자유로움이 조작된 ‘인위적인’ 냄새가 풍기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이런 문단, 혹은 작법 교육으로부터 몇 발 떨어져 자생한 작가 팬덤 ――― 특히 PC통신 시절부터 이어져온 자생적인 팬덤 ――― 의 사람들은 문단에서 생각도 못한 방식으로 환상의 환상을 이야기한다. 많은 작가들이 착각하고 있는 도식 중 하나는 현실의 대립체로서의 환상을 다루는 것이다. (이는 다분히 포스트모던적인 제스처를 강제로 부과하기도 한다) 그러나 환상이 언제나 현실의 대립체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현실의 ‘다른 방식’ 중 하나로 그려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를 많은 환상소설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런 현실의 다른 면으로서 환상을 바라볼 경우, 우리는 소위 말하는 ‘판타지소설’도 아닌, 그렇다고 중남미의 ‘마술적 사실주의’적인 소설도 아닌, 환상소설의 제3출구가 열리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진아의 작품들은 바로 거기에 위치한다.


  현실의 다른 면으로서의 환상

  진아의 소설에는 톨킨이 말하는 ‘내재적 리얼리티’도, 중남미 소설의 그것처럼 ‘현실의 일그러진 왜곡’이 담겨 있지도 않다. 그녀는 PC통신 세대 작가층의 가장 훌륭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는 ‘현실의 다른 면으로서의 환상’을 작품에 그리려고 움직인다. 그녀의 모든 작품에 나타나는 환상성은 몽상으로서의 환상이 아니라 현실의 가정으로써, 혹은 현실 그 자체로써의 환상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부조리에 맞서는 치열한 문제적 주인공도, 사회 앞에서 침몰하는 자아의 비판과 성찰도 없다. 그렇다고 우리를 2차 세계로 인도하는 놀라운 경이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 때문에 현실 바로 곁에 존재하는 것들이 환상의 해방구를 통해서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학교}나 {클론}은 이런 진아의 작품이 담고 있는 환상성의 본질을 가장 훌륭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학교}의 공포 어릴 정도로 숨 막히는 경쟁구도나, {클론}에서의 아이러니 ――― 클론이 늘어나도 업무량은 변하지 않는 ――― 들은 환상 속에 투과된 현실이 아니라 현실 자체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담겨 있다. 물론 진아의 환상소설이 가지고 있는 경이감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으로 독자들이 얻는 효과이지, 작품의 제1명제는 아닌 듯하다. 이것은 일반적인 판타지에서 얻게 되는 ‘경이감’과는 다른, 또 다른 작품의 내적 특징이다. 그녀의 텍스트는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이런 현실과 유착된 환상, 현실의 이면이 아닌 현실로서의 환상에 대한 면모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즉, 그녀 작품의 환상이 실은 '사실'임이 어렵지 않게 포착된다. 그래서 작품에 드러나는 환상이 놀랄 정도로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번엔 외계인이냐?}의 인어 희수의 존재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에 드러나는 환상적 존재들은 마치 현실에 존재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녀의 문체와 필법 등의 기교들은 모두 이런 비일상적인 것들을 일상적으로 끌어오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하다. 요컨대, 그녀는 자신이 본 것들을 그대로 그려내는 데에 가장 먼저 포커스를 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사실적 성향은 그녀의 작품이 ‘환상소설’로서 공명을 얻는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


  은유가 아닌, 환상으로서의 알레고리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알레고리’다. 알레고리란 낭만주의 문학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개념이지만, 진아의 작품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적용된다. 알레고리의 가장 큰 키워드는 사실 은유를 통해 사물의 원래 의미를 지워내고 그 위에 새로운 의미를 부과하면서 현실의 거울을 만드는 행동이다. 즉 알레고리란 낭만을 현실화시키는 방식으로 ‘은유적 이야기’를 끌어오고, 그 은유를 진실로 빚어내는 데에 골몰한다. 그런데, 진아의 작품에서 은연중에 드러나는 알레고리는 ‘은유’가 아니라 ‘사실’ 그 자체다. 이 점은 환상적 성향이 다소 적은 {심연}의 바다를 묘사하는 부분 같은 데에서 낭만적 스케치와 가까운 구석이 보인다는 점, {선물}의 뱀파이어가 흡혈 능력보다 존재론적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환상이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세상을 그려내는 이야기에서 ‘반드시 필요하거나’ 혹은 ‘더욱 적합하기’ 때문이다. 진아는 본능적으로 현실을 알레고리로 삼아 환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사실 그 ‘환상’의 진의는 현실의 옆에 있는 또 다른 현실 혹은 상황이다.
  그녀의 작품이 가지는 이런 역전된 알레고리는 종종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환상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이번에는 외계인이냐?}의 시점 교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진아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교란’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현실의 범위가 확장된다’는 것이다. 이 점은 대다수의 낭만주의 소설이나 톨킨적인 주브네일 판타지와도 닿아 있는 점이지만, 그 장치적 프로세스는 두 스타일과 현격하게 다른 방식을 가지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진아의 작품에 드러나는 ‘환상’은 현실에 대한 인식의 확장이 아니라 바로 ‘현실’의 다른 면을 바라보는 창으로 그려진다. 일반적인 환상소설이 사물에 숨어 있는 더 많은 의미를 캐내려 한다면, 진아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알레고리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후기 작품들이 가지는 특징들과 일련의 유사한 방식으로 현실의 옆얼굴을 스케치하고 있다. 그녀의 환상은 ‘가짜’가 아니라 ‘현실’이다.


  환상소설과 전기소설의 사이에서

  그렇게 바라본다면, 굉장히 재밌는 한 가지 가설을 도출할 수 있다. 왜 그녀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알레고리가 ‘환상’이 아니라 ‘현실’로 돌아오는, 유럽의 환상소설과 역전된 방식으로 풀어지는 걸까? 이 점은 유럽소설에서 환상성이 차지하는 위치와 동양소설에서 환상성이 차지하는 위치가 다르다는, 다분히 차이가 나는 문화적 토양에서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소설에 가지는 환상성은 조선시대까지 가장 활발하게 창작된 전기소설 혹은 한국식 기담의 그것들과 놀랄 정도로 비슷한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전기소설의 특징은 현실의 뒷면에 있는 또 다른 존재들이 원념이나 한 등으로 인하여 현실로 내동댕이쳐지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런데, 당시에 이런 귀신이나 요괴, 저승차사들의 존재는 모두 ‘현실의 일부’였다. (차례를 지내는 의미를 생각해보자.) 마찬가지의 전기성을 진아의 작품에서는 ‘현재 버전’으로 다시 불러오고 있다. 그러므로 진아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어는 유럽인들의 상속의 인어가 아니며, 클론은 SF에 등장하는 클론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게임이나 동화책, TV를 통해 삶 속에 침잠해 있는 인어고, 우리 주변에 있는 클론이다. 그녀의 모든 환상적 알레고리는 원형상징이 아니라 상식선에서 그려지고 그럼으로써 친근성과 현실성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이런 환상적인 ‘이름’들은 모두 현실의 일부로 포섭되면서 전기소설의 그것처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등장한다. 바로 ‘일상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것이다! 동양의 전기소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은 일상 속에서 환상이 등장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제반 상황을 설정해준다는 것이다. 왜냐면 귀신이나 신들의 존재가 ‘전기소설이 창작되는 시점’에서는 이미 현실의 영역 안에 있기 때문이다. (현대적 전기의 가장 대표적인 전범은 학교괴담인데, 그것이 무서운 까닭도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퇴보}나 {학교}, {여우비}, {갈증}이나 {희망}같은 작품에서 드러나는 리얼할 정도의 그로테스크한 성격들은 완전한 허구로서의 환상이 아니라 현실의 일부로서 ‘가정’ 혹은 ‘가설’로서 그려지는 현실들이다. 그리고 이 환상의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우리의 일상과 교집합으로 걸쳐져 있다. 이런 현실과 환상 사이의 관계는 ‘경계’가 아니라 ‘병합’이다. 몇몇 국문학자들이 제기했던 ‘조선시대 전기소설의 목적이 인식의 상승’이라고 말한 바는 현실의 범위를 설정하려는 양반 작가들의 목적의식 아래에서 가능했다. 마찬가지로 진아의 소설에서는 현실 옆에 놓인 현실을, 환상을 통해서 현실을 바라보려 함으로써, 한국 소설계보가 가지고 있는 전기적 성격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맺는말

  그녀는 아마 현재 활동하는 환상소설 작가들 중에서 문단과 가장 거리가 멀리 떨어진 작가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뒤집어서 우리 문학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환상성과 가장 거리가 가까운 작품일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본다. 이 가정은 여전히 논증이 미제인 상태이며 반론이 제기되지도 않은 상태다. 그러나 그녀 작품이 가지고 있는 놀라울 정도로 특이한 ‘환상성’은 유럽의 환상문학 이론이나 포스트모던 이론을 끌어다 쓰더라도 해결이 곤란한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뒤집어 말하자면 우리 문화 안에서 숙성되어 태어난 ‘한국의 소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혈통’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문단의 유럽 리얼리즘에도, 장르적 문법에도 길들여지지 않은 가장 거친 들판에서 ‘진아’이라는 꽃이 피어 있다. 그 꽃의 종과 속이 어떤 것인지, 어떤 꽃가루와 열매를 품고 있는지 거슬러 올라가며 연구해야 할 학자들은 바로 장르 쪽 사람들이 아니라 ‘문학 연구자’들이다.





 현서

 경기도 부천 출생. 여러 대학과 강단 등을 유랑하며 철학, 미학, 종교학, 신화학, 문화인류학, 오컬트·포츈텔링 등을 공부하며 이십대의 대부분을 보냈다. 독문학과에서 낭만주의 미학을, 국문학과에서 조선 전기 몽유록계소설과 민속학을 전공했으며, 현재는 취업준비랍시고 일본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10년째 소설가를 꿈꾸고 있지만, 정작 창작보다는 비평과 미학적 사유를 즐기는 기묘한 작가 지망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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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아 11.08.04 01:08 댓글 수정 삭제
    제 글을 이런 방향에서 읽어주신 분이 없어서... 저 개인으로 몹시 기쁘고 고맙고, 한 편으로 장르 문학에 발을 디딘 비평가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해주네요.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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