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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 (yiyeon@gmail.com)



  '책'이란 단어에서 어린 시절에 동화를 두근거리며 읽었던 향수를 떠올리거나, 갓 찍어낸 잉크 냄새는 물론이고 누렇게 퇴색된 종이에서 풍기는 곰팡내까지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면 그 앞에 '전자'를 붙이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넘긴 책장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며 이야기 속에 몰두하던 추억을 모니터, 혹은 PDA의 액정에 빼앗겨 버리는 기분이 들 수도 있을 테고요.
  한 때, 전자책은 금세 종이책을 대체할 것처럼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면서 새로운 황금알을 낳는 시장으로 떠오르곤 했었죠. 지금 그런 열광은 주춤하지만, 기존 출판 시장에서 할 수 없었던 전자책만의 영역이 조금씩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점차 개인의 생활에서 이동성이 증대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지하철로 회사를 가든, 3박 4일 동안 출장을 가든, 한 달 동안 여행을 가거나 몇 년 동안 유학을 가는 일은 이제 누구에게나 익숙한 일상이 되고 있거든요. 전자책은 이런 생활 패턴에 종이책보다 훨씬 유리합니다. 외국에서도 한글로 된 책을 다운로드 받아서 볼 수 있고, 몇십 권, 몇백 권의 책을 휴대해서 다니는 것도 가능하지요. 저 먼 남국의 바닷가 해먹에 몸을 뉘인 채, 그리운 모국어가 깜박이는 액정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낭만적인 책읽기가 되지 않을까요?
  아직까지 전자책은 그리 활성화되어 있지 않지만, 국내외를 막론하고 전자책 매출의 상당 부분은 장르문학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전자책 덕분에 장르문학 팬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수혜는 작품을 접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는 점일 거예요. 좁은 시장 탓인지, 국내에서는 유행하는 특정 부류의 작품 외의 책을 서점에서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지요. 아무리 목 빠지게 기다려도 나온다 나온다 소문만 무성하고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나오지 않는 책의 목록을 볼 때마다 우울해집니다. 게다가 절판은 왜 그리 빨리 된답니까. 비록 현재는 전자책 서점에서 다양한 장르문학 콘텐츠를 찾긴 어렵지만 전자책은 이런 아쉬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명 전자책 서점인 Fictionwise.com(http://www.fictionwise.com )에서는 장르문학 중 단편집으로 묶이지 않은 단편 하나씩만 독자들이 구매할 수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장르문학 단편집 판매를 꺼리는 국내 상황에서 이런 방식은 독자들이 쉽게 단편과 접할 수 있는 유용한 통로가 될 것입니다. 유통과 재고에 대한 부담이 없는 전자책의 특성상 절판되어서 구할 수 없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고요.
  또한, 더 나아가 전자책을 통해 새로운 형식의 문학이 등장하고 전파되리라는 은근한 기대도 있습니다.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야기가 이어지고 끝나는 선형적 구조 대신, 링크와 노드를 통해 얽힌 비선형적 구조의 서사로 전개되는 하이퍼텍스트나 문자 텍스트에 이미지, 사운드, 무비를 결합시킨 하이퍼미디어의 시도도 전자책의 보급과 함께 늘어나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장르문학에서 이러한 시도는 더욱 의미 있는 실험이 될 것입니다.
  전자책 서점 북토피아(http://www.booktopia.com )에서는 위와 같은 이유들로 장르문학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책을 출판하는 리스크가 일반 종이책 출판사보다 훨씬 작다는 이점을 바탕으로 다양한 장르문학을 전자책으로 만드는 시도를 계획 중입니다. 내기 힘든 단편집, 유행하는 스타일과 거리가 있다고 해서 대여점에서 들여놓지 않는 작품 등도 꾸준히 독자들과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거든요. 어차피 절판되지 않고 계속 유통될 수 있는 전자책의 특성상, 꾸준히 읽혀질 수 있는 가치의 작품이라면 당장은 팔리지 않더라도 절대 시장에서 외면 당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으니까요.
  전자책이 종이책을 완전히 대체하는 날이 올까요? 비록 지구상에서 종이 때문에 베여나가는 나무가 아깝긴 해도, 종이책에 대한 사랑은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자책은 전자책 나름의 영역을 구축해 나갈 테고요. 책장을 넘기건, 클릭을 하건 간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즐거움은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것이 구전의 형태건, 인쇄물의 형태건, 디지털 콘텐츠의 형태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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