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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머리칼의 하랄드의 사가 24 - 헤임스크링라 46

번역 및 주석 hermod (http://cafe.naver.com/hermod.cafe)


제40장     ‘착한 하콘’의 탄생

  하랄드왕이 지방에 있는 사이에는, 라데의 하콘 그뢰트가르드손 백작이 드론트헤임을 통치했다. 드론트헤임에서 하콘 백작은 왕과 어깨를 견주며, 다른 모든 자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었다. 하콘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시구르드가 드론트헤임을 계승하였다. 백작이 된 시구르드의 거처는 라데에 있었다. 시구르드의 아버지 하콘 때부터 그곳에서 길러져 온 하랄드왕의 아들인 검은 할프단과 시그뢰드는, 시구르드 때에도 그곳에 머물렀다. 하랄드와 시구르드의 아들들은 거의 동갑이었다.당시에 가장 현명한 자들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던 시구르드 백작은 ‘조용한 토리 백작’의 딸 베르글뢰트와 결혼했다. 베르글뢰트의 어머니는 ‘아름다운 머리칼의 하랄드’의 딸인 알로프 아르보트였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랄드왕은 호르달란드에 자리한 자신의 대농장들 – 알렉스타드, 새임, 피탸르, 우드스테인, 코름트섬의 아우그발드스네스 등 - 에 머물렀다. 70살이 되었을 때, 하랄드왕은 토라 모스테르스탕이라는 소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얻었다. 소녀의 이름은, 그녀의 가족들이 모스테르에서 온 데에서 유래했다. 그녀는 호르데-카레와 연관이 있는 좋은 가문 출신이었다. 그녀는 매우 건강하고 매우 아름다웠다. 그녀는 왕의 시중을 드는 여성이라 불렸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좋은 신분의 남녀가 왕에게 봉사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귀족들사이에는, 자신들의 아기에게 술을 끼얹어 주고 이름을 붙여줄 사람을 찾는데 큰 관심을 기울이는 관습이 있었다. 모스테르에 살고 있던, 출산을 앞둔 토라라는 여자가, 당시 새임에 머물고 있던 하랄드왕을 찾아갔다. 그 후 그녀는 시구르드 백작 소유의 배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다. 배는 밤에 육지에 가까와졌고, 그녀는 해안의 바위 사이에서 사내아이를 낳았다. 시구르드 백작이 그 아기에게 물을 붇고, 자신의 아버지인 라데의 하콘 백작의 이름을 그 아기에게 붙여주었다. 그 아기는 곧 멋있고 강건하게 자랐다. 그 모습은 하랄드와 매우 닮았다. 그 아이의 유년기 동안, 하랄드왕은 그와 그의 모친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다.

제41장     아델스탄왕의 전언

당시 아델스탄왕 King Athelstan(주1)이 잉글란드 왕국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승리하는 자’ 또는 ‘신앙심 깊은 자’라 불렸다. 그는 노르웨이의 하랄드왕에게 사신을 보내, 칼자루를 금을 도금한 칼, 금과 은으로 장식한 칼, 값비싼 보석들을 전달했다. 아델스탄왕의 사신들은 하랄드왕에게 말했다. “여기, 아델스탄왕이 당신에게 보내는 칼이 있습니다. 당신이 이것을 받으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왕은 칼자루를 받아 쥐었다. 다시 아델스탄왕의 사신들이 말했다. “이제 당신은 우리 왕의 희망대로 칼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제 우리 왕의 신하입니다”. 하랄드왕은 이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무언가가 자신을 화나게 할 때엔 마음을 가라앉혀 격정을 제거한 뒤에 문제를 냉철하게 심사숙고하는 것이 자기 자신의 규칙임을 상기했다. 왕은 우선 사신들을 안전히 귀향하게 한 후, 자신의 친구들과 상의했다.

제42장     하우크가 영국으로 항해하다

이듬해 여름, 하를드왕은 하우크 하브록 Hauk Haabrok에게 배를 한 척 주어 영국으로 보냈다. 그는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유능한 전사였다. 왕은 그에게 아들 하콘을 맡겼다. 영국에 도착한 하우크는 런던으로 아델스탄왕을 찾아갔다. 왕은 마침 연회를 베풀고 있었다. 하우크는 부하들에게, 지금부터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지시했다. “제일 처음 들어간 사람은 가장 늦게 나와야 하고, 모든 자가 탁자에서 일렬로 앉아야 하며, 그 간격은 일정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왼쪽에 칼을 차야 하지만, 외투를 앞에서 잠궈서 칼이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 그 후 하우크가 이끄는 30명은 회관으로 들어갔다. 하우크는 왕에게 인사했고, 왕은 그를 환영했다. 그 후 하우크는 하콘을 데리고 가서 왕의 무릎 위에 놓았다. 왕은 이 행위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다. 하우크가 답했다. “하랄드는, 자신을 시중드는 여자의 아이를 당신의 양자로 삼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격노한 아델스탄왕은, 옆에 놓여 있던 칼을 집어들어 그 아이를 죽일 것처럼 뽑아들었다. 하우크가 말했다. “이미 당신은 그 아이를 당신의 무릎에 두었습니다. 당신이 원하면 그 아이를 죽일 수는 있겠지만, 하랄드의 아들들 전부를 그런 식으로 죽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우크는 부하들을 이끌고 회관밖으로 나가, 곧장 배로 향하여 – 그들은 출항 준비를 미리 해두었다 - 바다를 항해하여 하랄드왕에게 돌아갔다. 왕은 크게 즐거워했다. 당시의 풍습으로, 다른 사람의 아이를 양자로 삼는 사람은 그 사람보다 지위가 낮다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주2). 두 왕 사이의 이러한 행동에서 유추하건대, 두 왕은 서로 상대편보다 더 위대해보이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진실로 그들 각자의 존엄함에는 어떠한 해도 입지 않았으니, 죽는 날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한 왕이었기 때문이다.

제43장     아델스탄왕의 양자 하콘이 세례를 받다

아델스탄왕은 하콘이 세례를 받게 하고, 올바른 신앙과 선한 습관으로 그를 양육하였다(주3). 그는 모든 친족들 중 하콘을 가장 아꼈으며, 하콘은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아델스탄왕은 이해력과 웅변력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좋은 기독교도였다. 아델스탄왕은 하콘에게, 자루와 손잡이가 금으로 되어있고, 칼날은 그보다 더욱 고귀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칼을 주었다. 하콘은 이 칼을 맷돌의 가운데 구멍에 넣어 맷돌을 잘랐기 때문에, 이후 ‘맷돌을 자른 자’라 불렸다. 이보다 더 좋은 칼이 노르웨이에 소개된 적은 없었으며, 하콘은 죽는 날까지 이 칼을 아꼈다.

제44장     에릭에게 주권이 주어지다

하랄드왕이 80살이 되자 매우 거동이 불편해져서, 나라를 둘러보기 위해 장기간의 여행을 하는 등의 왕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에릭을 왕좌로 데려와, 그에게 노르웨이 전국에 대한 권력과 지휘권을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하랄드왕의 다른 아들들 중, 검은 할프단도 왕좌를 차지하고 주민들의 동의하에 상위왕(high king)으로서 드론트헤임 전체를 지배했다. 상인왕 뵈른이 죽은 뒤, 그의 형제 올라프가 베스트푈드 전체를 차지하고, 뵈른의 아들 구드뢰드를 양자로 삼았다. 올라프의 아들은 트뤼그비라 불렸다. 두 형제는 거의 동갑이었으며, 똑같이 전도유망하고 현명했다. 특히 트뤼그비는 건장하고 강한 남자로 주목받았다. 호르덴의 주민들이 에릭을 상위왕으로 삼았다는 말을 들은 비켄 주민들은, 올라프를 비켄의 상위왕으로 추대했다.
2년 뒤, 드론트헤임에서 열린 연회에서 검은 할프단이 급사했다. 군힐드가 마술사를 매수하여 죽음의 술을 그에게 주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후 드론트헤임의 주민들은 시그뢰드를 왕으로 추대했다.

제45장     하랄드왕의 죽음

에릭에게 왕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과, 로갈란드와 호르달란드에 있는 자기 소유의 대농장 대부분을 준 하랄드왕은, 그 후로 3년 간 더 살았다. 에릭과 군힐드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하랄드왕은 그 아기에게 물을 끼얹고 자신의 이름을 붙여준 뒤, 그가 에릭을 이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하랄드왕은 왕국 안의 대부분의 백작들의 딸과 결혼했음, 그로부터 많은 위대한 가문들이 유래했다. 하랄드왕은 로갈란드의 집에서 병사하여, 코름순드의 하우가르에 묻혔다. 하우게순드에는 지금도 교회가 서있으며, 교회 서북쪽 멀지 않은 곳에 왕의 무덤이 있다. 13.5피트의 높이와 2엘의 폭으로 되어 있는 그의 묘비는 교회 서쪽에 서있다. 무덤과 비석은 오늘날에도 거기에 있다(주4).
지혜로운 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아름다운 머리칼의 하랄드왕은 탁월하게 아름다운 외모에 건장하고, 부하들에게는 매우 관대하고 상냥했다. 젊은 시절에는 대단한 전사였다. 사람들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모친이 꾼 꿈에 이러한 점들이 예언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꿈속에서는 나무의 가장 아랫부분이 피처럼 붉었고, 줄기는 초록색으로 아름다웠는데, 이는 그의 번영하는 왕국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 나무의 끝은 하얀 빛이어서, 그가 노년에 백발이 되리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굵은 가지와 잔가지는, 온 땅에 퍼진 그의 후손들을 상징했다. 그 이래로 노르웨이는 언제나 그의 혈족이 지배했다(주5).

제46장     올라프와 시그뢰드의 죽음(최종장)

하랄드왕이 죽은 다음 겨울에, 에릭왕은 하랄드왕의 신하들을 계승했다. 그러나, 비켄 지역의 신하들은 올라프가, 드론테헤임 지역의 신하들은 그들의 형제 시그뢰드가 계승했다. 에릭은 이를 매우 불쾌해했다. 에릭왕이, 아버지와 똑같은 방식으로 군대를 이용하여 노르웨이 전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려한다는 보고가 올라프와 시그뢰드에게 들어왔다. 두 사람 사이에 사신들이 오고갔다. 그들은 회합 장소를 지정한 뒤, 봄이 되자 시그뢰드가 동쪽 비켄으로 이동하여, 형제 올라프와 함께 툰스베르그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같은 봄에 에릭왕은 많은 병사와 배를 징발하여 비켄으로 진격했다. 거세고 균일한 바람을 받아 밤낮으로 항해하여, 에릭왕은 자신의 예상보다 빨리 툰스베르그에 도착했다. 그 때 올라프와 시그뢰드는 군대를 이끌고 어떤 산등성이의 약간 동쪽에 자리한 마을에서 나와 전열을 가다듬었다(주6). 그러나 병사가 더 많았던 에릭왕이 전투에서 승리했다. 올라프와 시그뢰드는 그곳에서 전사했다. 그들이 죽은 언덕 위에 그들의 무덤이 있다. 에릭왕은 비켄 지역으로 진격하여 그곳을 복속시키고, 여름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구드뢰드와 트뤼그비는 웁란드로 도망쳤다.
에릭왕은 강건하고 잘생기고 힘세고 매우 남자다운 사람이었다. 또한 전투에서는 용맹하고 운이 따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악하고 거칠고 비우호적이고 조용했다. 그의 아내 군힐드는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었으며, 현명하고 박식하고 활기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악하고 잔인했다. 에릭과 군힐드의 자식들 중 감리가 가장 연장자였으며, 그 아래로 구토름, 하랄드, 라근프리드, 라근힐드, 에를링, 구드뢰드, 시구르드 슬레비가 있었다. 그들 모두 잘생기고 남자다웠다.
(아름다운 머리칼의 하랄드왕의 사가 끝)


주1) 아델스탄왕은 알프레드 대왕의 손자. 924-940년 사이에 잉글란드를 통치.
주2) 영국에 이러한 관습이 존재했다는 다른 증거는 없지만, 이 행위가 아이를 양자로 삼는다는 암시는 존재한다.
주3) 당시 영국은 기독교로 개종해있었다.
주4) 비석과 무덤의 흔적이 아직도 가르 Gar 또는 가르드 Gaard에 아직 남아있다. 그 곳은 코름순드 교구에 있는 주요한 농장이다. 본문에 언급된 교회는 16세기에 헐렸고, 그 자리에 1872년에 하랄드왕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곳에는 11피트 8인치 X 4피트 1인치되는 옛 무덤돌이 놓여 있었다.
주5) Shoening에 따르면, 아름다운 머리칼의 하랄드는 936년에 죽었다. 그의 아들 하콘은 923년에 태어나 931년에 영국으로 건너갔다. 색슨연대기에 따르면 영국의 아델스탄은 941년 10월에 죽었다.
주6) Bakken. 현재는 Moellebakken. Toensberg 동쪽 끝에 있다. 그곳에 존재하는 두 개의 고분은 올라프와 시그뢰드의 것으로 간주된다.


1. 이로서, 수 년에 걸쳐 연재해 온 <<헤임스크링라 Heimskringla>>의 번역이 1/3 끝났습니다. <아름다운 머리칼의 하랄드의 사가> 뒤에는 <착한 하콘의 사가>, <하랄드 그라펠드왕과, 시구르드의 아들 하콘 백작의 사가>, <올라프 트뤼그바손왕의 사가>, <성 올라프의 사가>, <착한 마그누스의 사가>, <하랄드 하르드라데의 사가>, <올라프 퀴레의 사가>, <맨발의 마그누스의 사가>, <십자군 시구르드와 그의 형제 에이스타인 & 올라프의 사가>, <맹인 마그누스와 하랄드 길레의 사가>, <하랄드의 아들 시구르드 & 잉게 & 에인스타인의 사가>, <넓은 어깨의 하콘의 사가>, <마그누스 에를링손의 사가>가 이어집니다. 그러나 게르만 신화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머리칼의 하랄드의 사가>까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헤임스크링라>>의 번역은 여기서 중단합니다.
이후, <<덴마크인의 사적>>(게스타 다노룸, Gesta Danorum)을 번역하고 싶은 바램은 있지만, 번역자의 개인 사정으로 인해 당분간은 착수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멀지 않은 장래에 다시 뵐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2. 이 한국어 번역의 저본은 Everyman's Library No.847 <<Heimskringla : The Norse King Sagas>> (tr. By Samuel Laing & rev. by J.M.Dent&Sons LTD., 1951)이며, 1996-1998년 사이에 초벌 번역한 것을 온라인 공개한 것입니다. 초벌 번역의 현 단계에서는 상당한 오역이 존재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이 번역의 상업적 이용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한국어 번역문에는 저작권이 존재합니다. The Online Medieval and Classical Library (OMACL) 에는 <<Heimskringla>>의 영역본이 게재되어 있습니다(http://omacl.org/Heimskringla/).

3. 지금까지 연재한 게르만 신화의 내용은, 웹진 거울 (http://mirror.pe.kr) 과 <게르만 신화(북유럽 신화) 연구소 + 북유럽 통신사>(http://cafe.naver.com/hermod.cafe)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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