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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 홍대 Cafe:U
 합평작 정세랑, [덧니가 보고 싶어], 난다, 2011.
 참가자 진아(사회), pena, toonism, 배명훈, 라키난, 앤윈, 정세랑, 한별(기록)




 始. 합평회를 시작하겠습니다

 1월 21일 장편 합평회가 있었습니다. 2012년 첫 번째 합평회 작품은 정세랑 작가님의 첫 번째 장편소설인 [덧니가 보고 싶어](이하 [덧니])입니다. 네, ‘저 귀여운 표지는 사기’ ‘덧니에 물렸다’ ‘녹의홍상’ 등의 평가를 받고 있는 그 책입니다. 멍하니 보다보면 덧니에 콱 물리고, 정신 차리고 보다보면 가슴에 상처가 아려오는 그 책입니다.


 거울 내부에서도 많은 분들이 참가하셨고, toonism님과 104호부터 기사 필진으로 합류하신 라키난님이 특별 게스트로 합평회에 참가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더 좋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 좋은 이야기를 전해드릴 수 있어서 기록하는 입장에서도 기쁘네요.
좋은 기회에 흥분한 참가자들이 일찍 모여 합평회의 주인공인 세랑님을 기다렸습니다. 아, 저기 들어오시네요. 그럼, 합평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1. 용기와 재화의 상관관계

 ―. 발랄하게 감정 폭발

 (다들 모인 가운데 뒤늦게 세랑 입장)

 정세랑 늦어서 죄송합니다!

 toonism 소개 없이 바로 시작하는 거죠?

 진아 늦으셨잖아요. 세랑님 오시면 바로 시작하기로 했어요. (웃음) 어느 분 먼저 하실래요? (명훈 보며) 오늘따라 왜 그렇게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계세요?

 배명훈 비상대책위원회처럼 막 떠들다가 합평회 시작할게요! 그러니까 다 쉿….

 (웃음)

 pena 저와 한별님은 저번에 인터뷰 할 때 세랑님한테 ‘이런 사기꾼!’하고 이야기 했어요. 발랄하고 귀여운 소설인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울었어요. 두 번째 읽으니 그래도 덜 우네요.

 진아 어떤 면에서 그렇게 자꾸 눈물이 났나요?

 pena 작가가 이별을 소화하는 방법이랄까요? 이야기로 소화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감정 같은 것들에 많이 공감해서 울었죠. <항해사, 선장이 되다(이하 <항해사>)>의 좌표 이야기가 기억에 많이 남았고, <늑대 숲에 팔을 두고 왔어(이하 <늑대 숲>)>에서 특히 가슴이 쿵 했어요. <늑대 숲>은 아름다운 세계가 멸망하는데 아름답게 슬픈, <모노노케히메>나 영화 <아바타>에서 홈트리가 쓰러질 때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앤윈 저는 [덧니]가 장편이란 느낌이 별로 안 들고, 장편을 쓰기 위해서 단편들을 모아 낸 것 같은 느낌을 좀 받았어요. 옴니버스로서 재미있게 기능한 것 같은데, 감정적 폭발이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그런 면에서 나온 것 같아요. 문장 하나하나가 가지는 무게가 커서 단편 같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pena 저는 그래서 ‘이건 연재로 읽었어야 했어!’라는 느낌을 받은 적 있어요.

 앤윈 장편 치고는 무게가 크게 실린 문장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는 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마 감정적 폭발이 잦을 수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있어요.

 진아 글에 독자들이 이입할 요소가 굉장히 많았던 것 같아요. 책에 포스트잇을 많이 붙였는데, 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표시한 거예요. 이보다 두꺼운 장편에서도 한 문장 건지기가 힘든데.

 pena 전 책 읽으면서 웹페이지에 발췌문을 쓰는데, 포기했어요.

 toonism 읽으면서 괜찮은 문장이 있으면 트윗해야지, 했는데 좋은 문장이 계속 나와서 읽는 흐름이 끊기는 거예요. 그래서 네 문장 정도 올리고 포기했어요. 그 다음부터는 그냥 쭉 읽는데, 다시 읽을 때는 포스트잇 붙여가면서 읽어야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라키난 저는 연재할 때 읽고 책으로 다시 읽었는데, 연재할 때는 확실히 한 회 한 회 끊어서 보니까 훨씬 더 천천히 읽게 되고 진지하게 읽었는데, 책으로 한 번에 쭉 볼 때는 깨알 같은 개그들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연재분으로 볼 때는 한 회 한 회 집중해서 무겁게 봤다면 책으로 볼 때는 조금 더 가볍게, 한 번에 쭉 본 것 같아요.

 앤윈 문장도 속도감이 있어서 한 번에 쭉 읽기 편한 면이 있었어요. 이건 취향인데, 저는 이런 문장에 대해서 약간 ‘돋아’ 하는 편이에요. 다른 분들이 발췌하고 싶으셨다고 말씀하신 문장들이 제가 읽으면서 오그라들었던 그 문장들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요. 그런데도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작가의 자의식이 깊이 들어가 있으면 거기에 대해서 오그라들어 하는 것 같아요. ‘좋아 여기서 한 번 반짝거리게 해주겠어!’ 이런 걸 잘 못 견디는데, 문장이 겉이 반질거리는 게 아니라 폐부를 찌르는 느낌이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진아 인터뷰들에서 가볍고 발랄하게만 보는 경우가 좀 있다고 하셨는데, 세랑님 글을 가볍고 발랄하다고만 받아들이는 분들은 글을 깊이 있게 못 읽는 것 같아요. 단편도 그렇고 [덧니]도 그렇고, 세랑님 글에는 반짝반짝하고 꺄삐꺄삐한 문장들 사이사이에 굉장히 깊은 슬픔이 있어요.



 ―. 내면의 목소리

 진아 저는 약간 문장에 집착하는 편인데, 어떤 표현들은 소설에서 수용해도 괜찮은 표현인지 고민하기도 했어요. 이를테면 치위생사에 대한 서술 중에 ‘젠틀한’이란 묘사가 있었어요. 그리고 우리말은 문장 중간에 ‘그러나’를 안 넣는데, 그걸 한 곳에서 봤어요. 그런데 ‘굳이 이걸 이야기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는 이런 식의 구어체 소설에 ‘소설을 이렇게 써도 되나?’란 고민이 있었는데, 읽으면서 ‘괜찮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든 거예요.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에 되는 게 어디 있고 안 되는 게 어디 있겠어요. 작가가 자기 이야기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식으로 가는 거죠.
 서술은 괜찮았는데 대사가, 옛날에 판타지 소설 유행하던 때 끝없이 말장난 하는 경향이 좀 있었는데 약간 그 느낌이 났어요. 서술은 작가의 목소리고 대사는 그 인물이 하는 말인데 사람이 매번 매순간 반짝반짝한 말장난들을 할까? 그래서 대사에서 위화감을 느끼기는 했는데, 그것도 굳이―――란 생각이 들어요. 왜냐면 전체적으로 빛나는 표현들이 많아서. “언젠가 늑대에게 죽고 싶어했던 그는, 사람에게 죽었다”는 문장에서는 굉장히 울컥했거든요. 읽으면 읽을수록 음미할 대목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 작은 서술 방식이 큰 의미가 있을까?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한별 [덧니]는 옴니버스나 연작소설에 가까운 형태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장편하고는 읽는 법이 다를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진아 옴니버스나 단편 연작처럼 보여서 좋은 문장이 많은 것 같지는 않아요. 세랑님 재능인 것 같아요. 가끔 전경린 작가가 생각나는 반짝반짝한 묘사들이나. 전경린 작가도 묘사를 굉장히 예쁘게 할 때가 있는데 그 사람은 무언가를 눈앞에 보여주는 것처럼 하는 서술이라면 세랑님은 뭔가…….

 앤윈 훨씬 비유적이죠. 이야기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방식도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감정을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 가졌던 관계의 단면들을 비유로 보여준 거잖아요? 저는 좋은 소설은 형식과 이야기가 분리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비유의 부분들이나 이 소설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커다란 비유라고 느껴지고 문장들도 계속 비유적인 문장들이 나와서. 총체적이라고 생각했어요.

 라키난 제가 처음에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게, 짧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간접적이고 비유적으로 묘사해서 더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주인공인 재화의 성격을 생각해 볼 때 그 어린 여자 친구와는 달리 재화는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고 똑바로 말하지 않고 돌려서 말하는 그런 인물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소설 자체가 재화의 소통 방식과 어울리지 않았나 생각해요.

 pena 작가 중에 그런 사람이 있을 것 같아요. 보통 사람들은 ‘왜 그걸 못해?’ 하는 그런 말들을 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생각하고, 그게 꼭 이야기로만 나오고, 결국 내 생각은 이랬다는 걸 글을 쓰고 나서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그런 면이 와 닿았던 것 같아요.

 배명훈 저는 이야기에 삽입된 짧은 소설들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어요. 하나하나 따져 읽어도 다시 평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정도의 글들이 들어가 있어요. 재화라는, 혹은 정세랑이라는 장르소설 작가의 진짜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인식이 분명히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장르소설 작가는 그걸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라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잖아요. 전체 줄거리는 용기와 재화의 이야기고 그 들어있는 조그만 이야기들은 그냥 에피소드에 불과하다는 인터넷 리뷰들의 관점이 너무 아쉬운 거예요. 그냥 그렇게 넘어갈 이야기들이 아닌 것 같아요.

 앤윈 쓰라는 항의가 아닐까요? (웃음)

 배명훈 지금은 그냥 로맨스 소설처럼 되어있고, 읽다보면 끝부분에서 뒤통수를 맞는 사람도 있고 중간에서 뒤통수를 맞는 사람도 있는데, 그냥 로맨스로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책은 딱 보면 그렇게 되어있어요. 말랑말랑할 것 같은 느낌이고.

 pena 속았다니까요 진짜.

 배명훈 속았단 사람 많아요. (웃음) 삽화 안만 장르소설이고 밖은 일반소설인 게 아니라 삽화 바깥에 있는 용기와 재화의 세계까지 삽화들이 삐져나오잖아요? 장르소설 작가로서의 자부심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쓰는 문장이 그냥 책 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 책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다는 자부심은 굉장한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 용기는 어디 갔니?

 배명훈 그런데 결말이 아쉬웠던 게, 분명히 인과적으로 튀지는 않아요. 그런데 제가 앞에서부터 흥미롭게 봤던, 용기의 몸에 문장이 새겨지는 그런 부분들이 결론에서 확 타오르지 않은 것 같아서 그게 아쉬워요. 분명히 지금 결말도 인과관계 문제는 없게 처리는 잘 되어 있어요. 잘 되어 있는데, 읽고 나서 ‘아 왜 이렇게 결말을 냈지?’란 생각을 좀 했어요. 지적할 만큼 딱 튀는 문제는 아닌 것 같지만.

 앤윈 저는 전체 구조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 쓰진 않은 것 같아요. 매 삽화, 삽화가 매력적이어서 삽화에 몰입해 마지막에 가서는 애닳아서 ‘빨리 구하러 와라!’ 그러고 있었거든요. 깊이를 삽화에서 찾아서 전체 구조를 그렇게까지 보지 못한 것 같네요.

 pena 저는 대화문에 대해서 반대로 느꼈던 게, 소설에서는 톡톡 튀는 대화들만 있을 수도 있어요. 너무 일상적인 것까지 넣을 수는 없고. 그건 좋은데, 작가가 서술을 대신하고 있는 부분들에서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어요. 특히 용기. 아니 무슨 대학교 2학년 때까지 럭비만 했던 남자가 이렇게 섬세해?

 진아 오히려 운동선수들이 섬세하던데요?

 pena 그러면 작가가 용기의 말을 굉장히 많이 번역해 준 거죠. 내면에 소녀가 있을 수는 있어도 어휘력이 이만큼 있을 리가 없어요. 아, 그런 번역이 없으면 또 이상하긴 하죠, 용기와 재화 부분이 왔다갔다하면서 이중인격처럼 보이니까. 글 전체를 세랑님 글투로 감싸놨기 때문에 하나의 글이 되긴 하는데, 서술에 있어서 여기는 용기 이야기고 여기는 재화 이야기인데 계속 재화가 이야기하는 것 같은, 그런 부분이 있어요.

 진아 그 느낌은 알 것 같아요. 용기가 직업적인 부분을 서술할 때는 진짜 남자 같은데 어린 여자 친구나 재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서술 방식은 굉장히 여성스러워서 그 사이에 괴리감이 좀…. 섬세한 인물이면 직업적인 면을 서술할 때도 그런 면이 드러났으면 괴리감이 덜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앤윈 아까 ‘젠틀’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저는 그게 이 이야기와 연결 되는 것 같은데, [덧니]는 입말로 쓰였잖아요. 전 이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입말로 되어있다고 생각했고, 그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인물들이 하는 말이 다 입말이어서 그렇게 된 것 같은데, 굉장히 양면적이어서 어떻게 하는 게 더 좋을지 모르겠어요.

 pena 균형이 되게 어려운 문제인데, 나쁘게까지 말하면 위화감이 느껴지고 좋게 말하면 한 사람이 쓴 글이니까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죠. 반대로 뒤집어보면 한 부분에서는 남성적인 면을 살렸다는 게 신기하지 않나요?

 라키난 앞부분에 용기가 재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나오잖아요? 재화가 용기를 생각할 때, 용기는 재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용기가 생각할 때 재화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었고. 용기가 재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더 확실하게 했으면 용기의 캐릭터가 이중적이지 않고 확실한 하나의 인물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pena 이해하지 못함을 너무 유려하게 설명해서 위화감이 느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라키난 재화의 캐릭터는 굉장히 납득이 되고 이해가 갔어요. 그런데 용기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는 거예요. 이런 면도 있고 이런 면도 있는데, 얘가 어떻게 앞으로 할지 예상할 정도로는 파악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확실히 재화가 주요 인물이고 용기가 부수적인 인물이라는 느낌이 있었어요. 심지어 두 번째 읽었을 때 놀랐던 게, 처음부터 용기는 고집 세고 틈이 없는 인물로 나오더라고요. 첫 번째 읽었을 때는 그런 생각이 안 들었거든요. 그냥 모호한 인물이었거든요. 그래서 확실히 용기의 캐릭터가 통일되지 않았거나, 혹은 깊이 있고 다층적인 인물이라도 그게 드러나지 않은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앤윈 저는 용기의 감성은 코알라 이야기에서 극대화되었다고 생각해요.

 pena 사실 남자는 잘 안 쓰는 표현 아닌가요? “그 둔한 외모로 예쁨 받는단 말이지” 어쩌고.

 진아 여자들이 남자들에 대한 편견이 있는 것 같은데, 현대 남자들을 기준으로 삼으면 용기가 그렇게까지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앤윈 저는 그 부분에서 기시감을 느껴서 짠한 거였거든요. 남성이 그런 감성을 갖지 않는 건 확실히 아닌 것 같아요. 기시감을 느껴서 그 부분이 너무 좋았던 거니까.

 pena 제가 주위에 너무 마초만 있나 봐요.

 라키난 그러면 그런 점에서, 여기 계시는 현대 남성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배명훈 ‘남자들이 이래요’라는 말의 절반 이상은 ‘남자들은 이래야 돼요’인 경우인 것 같아요.

 toonism 저는 지금 이야기하는 남성성이나 여성성에 대한 이야기가 과도하게 말하자면 혈액형점 있잖아요? 그런 것과 비슷하지 않나 싶어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지 실제로 모든 남성들이, 또는 여성들이 그렇진 않잖아요. 결국 전체를 조망할 순 없는 거니까요. 저는 용기의 생각이나 서술이 여성스럽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재화의 생각이 남성스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것처럼. 저는 여기서 그런 남성과 여성의 차이라든지, 그런 걸 느끼지는 못했어요.

 배명훈 저도 그럴만하다고 생각했어요. 남성성 여성성 자체가 안 떠올랐어요.

 한별 남성성 여성성 문제를 떠나서,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이 사람 대할 때와 저 사람 대할 때가 다르잖아요? 일할 때는 남성적인 면모를 보이는 용기에게 재화는 여성적인 면모를 보여주게 되는 인물일 수도 있는 거죠. 그건 남성성 여성성 문제로 따질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굴 대하느냐에 따라 태도는 바뀌기 나름이니까.


 2. 소설 속의 소설 이야기

 ―. 시공의 용과 아홉 번 죽은 용기

 앤윈 저는 사실 그게 듣고 싶어요. 안에 있는 삽화에 대한 생각.

 진아 삽화에 대해서 말해볼까요? 첫 번째 게 뭐죠?

 한별 <시공의 용과 열다섯 연인들(이하 <시공의 용>)>. 이거 마무리가 좋지 않아요? “내가 또 저렇게 이름과 일치하지 않는 인간은 용서하지 못하지” 하면서 푹찍.

 앤윈 상큼하긴 한데, 그 뒤에 나오는 <러브 오브 툰드라(이하 <툰드라>)>나 <늑대 숲>에 비해선 소품 같은 느낌이 강하긴 했어요.

 진아 저는 이게 굉장히 도발적인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첫 문장을 강하게 써라, 그런 말 있잖아요. “재화는 용기를 아홉 번 죽였다.”는 이 도입부는, 어우, 뭐지? 순간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이 소설의 장르는 무엇인가, 용기를 아홉 번 죽였다는 게 상징적인 것이냐, 아니면 용기가 목숨이 아홉 개인 것이냐. 그리고 어쨌든 결말이 로맨스잖아요? 도입부에서 선언하거든요. 용이 그래요, “로맨스만이 유일무이한 거라고.”

 배명훈 재기발랄하고 통통 튀고…….

 (웃음)

 진아 신인 작가들이 들을 수 있는 모든 찬사가 어울리는 재기발랄하고 꺄삐꺄삐한 그런 글이에요.

 pena 세랑님은 가면을 되게 잘 쓴 거라고 생각해요. 인생의 쓴맛을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가면이에요.

 toonism 저는 “꼬리에 압사당했다. 찍”이 너무 강해서요. 이게 용기 몸에 처음으로 남는 문장이잖아요. 이 다음부터 도대체 어떤 문장이 나올지 궁금해서 안에 있는 단편들을 한 번씩 더 읽게 되더라고요.

 pena 이별하고 나서 초반에는 그렇게 확 죽여버리고 싶죠. ‘이러지 않았을까 저러지 않았을까’ 하다가 옛날 일을 되돌아보면서 이야기들이 조금씩 변해간다는 면에서도 현실적이었어요.

 toonism 죽는 등장인물에 대한 분노가 느껴지죠.

 앤윈 모든 삽화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이 다 너무 짠해요.

 진아 세랑님 소설이 황당무계하다면 황당무계할 수 있는 이야기면서도 순간순간 굉장히 현실감이 있는 게, “재화는 교정지를 얼굴에 얹었다가 연필심과 수성펜과 편집자의 담배 냄새에 얼른 치워버렸다”는 굉장히 실감나는 서술들이 있어요. 그런 작은 것 하나가 인물을 생생하게 만들어주는 지점이 되어주는 것 같아요.

 pena 그런 면에선 작가의 법칙을 굉장히 잘 지켰죠. ‘자기가 잘 아는 이야기를 해라.’


 ―. 늑대 숲에서의 고민

 한별 다음은 <늑대 숲>이죠.

 앤윈 다들 너무 좋다고 하셨던 것 같아요.

 pena 저는 진짜로 좋았어요. 앞부분의 삽화가 더 슬픈 것 같기도 하고. 분노 다음에 슬픔이 온 건가? 받아들이기 5단계, 이런 느낌.

 앤윈 앞에 있는 작품들은 끝이 유난히 절망적이에요. 비극이 단순히 비극이 아니라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비극들이라서. “용도 없고, 로맨스도 없”는 곳으로 보내 달라 그러질 않나.

 배명훈 재화가 느끼는 ‘용기를 죽여버리겠어!’하는 마음이 소설 플롯상 퍽 죽여버리고, 퍽 멸망시켜버리고, 진행되다가 확 다운시켜버리는 식으로 나타나는, 그런 느낌이 앞쪽의 삽화들에 있는 것 같아요. 뒤쪽에는 죽지 않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잖아요. 뒤의 이야기 밖으로 나오는 <나랑 시합을 할래?(이하 <시합을 할래>)>가 제일 좋은 삽화라고 생각하는데, 주제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앞의 퍽 죽여버리는 이야기와 대치가 되는 것 같아요. 애잔함도 읽히지만 가볍게 죽인 것 같은, 그런 느낌도 읽히는 것 같아요. 사실 그걸 되게 잘 쓴 건데.

 라키난 삽화들의 배치가 이별한 다음부터 다시 사귀게 되기까지의 감정의 흐름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깨진 다음에 ‘개자식!’ 하고 잠깐 분노했다가, 조금 지나가면 ‘아 나한텐 아무 것도 없어, 남자친구도 없고, 그놈 잘 살고 있는데 세상은 우울하고’ 이러다가, 조금 더 나아가서 ‘그래, 그래도 살 만 하지’ 이러다가, 용기와 다시 접점이 생기면서 ‘아, 얘는 이랬었지’ 생각하다가, 용기가 구출 재화를 구출하거나 혹은 이야기 밖으로 나오거나 혹은 죽이지 않는 걸로 발전하는 거죠.

 pena 거기다 조금만 더 덧붙이자면, <늑대 숲>은 문명의 사멸, 이런 것 말고도 ‘아 나는 지금 폐허가 되었구나’는 게 느껴졌고, <닭 발은 창가에(이하 <닭 발>)>에서는 ‘감히 네가?’ 이런 느낌이었다가, <항해사>에서 ‘우리는 뭐가 그렇게 잘못됐었을까?’하고 이성을 찾는 거죠.

 배명훈 앞부분에서 등장인물을 퍽퍽 죽어버리는데, 그냥 고민 안 하고 거기서 죽여버린 흔적이 보이잖아요. 거기서 나오는 경쾌함이 느껴지게 만들다가 뒤로 가면 뭔가 생각하기 시작해요. 다른 방법으로 가는 변수가 있었을까? 그게 이야기에 들어오기 시작해서 결국 안 죽는 이야기로 흘러가죠.

 진아 전 엽편들에 대해 그런 느낌을 받는데, 더하지도 빼지도 않았으면 좋겠어요. 굳이 이 이야기들이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게 아니라, 일본 SF 작가 호시 신이치는 엽편을 한 천 편 썼잖아요. 보통 엽편은 아주 작은 지면은 가지고 재치 있게 쓰는 거란 말이죠. 그런데 세랑님은 세랑님만의 엽편 장르를 낳을 수 있을 지도 몰라요. 책도 작은데 이 작은 책에서 40~45쪽 안에 모든 서사를 담았다는 사실이 놀랍고, 저는 이야기도 그렇게 압축적으로 느껴지진 않았어요.

 pena 이 엽편들이 원래 있던 건데 전체를 생각하면서 이은 걸까, 아니면 이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차례차례 썼을까, 이런 것들이 궁금해졌어요.



 ―. 안드로이드와 고양이 남자의 SF 스릴러

 한별 다음은 <해피 마릴린(이하 <마릴린>)>이요.

 앤윈 정말 좋아요. 특히 판사의 아내가 로봇한테 구해지는 그 에피소드 너무 좋아요. 감동적이었어요. 중간에 들어있는 구조도 너무 훌륭하고 그 이야기도 너무 좋고. 그 소설 너무 좋아요.

 한별 [덧니] 안에 <마릴린> 안에 판사 이야기가 들어가는데, 세 개가 무리 없이 이어지는 것도 신기했고요.

 배명훈 저는 판사가 말하는 부분이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갑자기 말을 하잖아요. 그런 부분이 다른 곳에는 전혀 없는데 여기서만 판사가 말로 스토리를 전개시켜버리니까.

 라키난 <마릴린>에서 용기의 몸에 새겨진 문장은 “그 오만한 판사가 죽었다”잖아요? 거기가 잘 납득이 안 갔던 게, 오만한 판사에게서 전혀 용기의 모습을 볼 수 없었거든요.

 진아 재화의 모습이 안드로이드에 들어가 있던 거죠. 전 그걸 생각을 못했어요. 작가가 자기 이야기를 녹여내는 게 독자의 예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들어가 있을 수도 있단 것이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마지막 정리가 이 이야기에는 필요하지 않았나 싶어요.

 앤윈 전 그냥 이야기로 이해했는데, 등장인물이 안드로이드들에게 말을 계속 걸고, 말을 건 인물은 살았잖아요. 재화는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초록색 같은 앤데, 용기는 그걸 참고 견디고 말하고 끌어내주지 않고 재화를 재단(裁斷)하고 가버렸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용기를 오만한 형체로 만들고 그 대척점에 서 있는 다른 판사를 등장시켜서 ‘넌 이렇게 할 수도 있었다!’라고 전달하는 이야기로 읽었어요.

 라키난 그런 점에서도 용기가 부수적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마릴린>이 가장 용기가 들어가지 않는 삽화잖아요. 마릴린은 재화라는 느낌이 팍팍 오잖아요. 혼자 생각하고, 고양이남자가 꼬시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전 뭐랄까, 다른 이야기는 용기가 주요 인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왜 용기가 안 나오지? 했어요.

 toonism 저도 작품 안에서 용기의 색깔이 굳이 나올 필요는 없었지 않나 생각하거든요. 예를 들어 <툰드라> 같은 경우에도 용기는 그냥 첫 번째로 방문해서 드릴에 죽잖아요. 굳이 독자들도 ‘용기야!’라고 알 수 있을 만큼 삽화에서까지 서술할 필요는 없었지 않나 생각하거든요. 등장인물들이 서로 알았다고 하면 되는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pena 재화는 용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남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더라, 라고는 하죠.

 진아 <마릴린>에서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안드로이드와 인공지능 이야기가 SF중에는 많잖아요. 그런데 <마릴린>은 좋은 지점을 짚었고, 굉장히 멀리 갔다고 생각해요. 굉장히 재미있는 지점을 짚으면서 굉장히 잘 갔어요. 위화감도 없고.

 배명훈 저는 왜 위화감을 느꼈을까요? 멀리 안 간 것 같은 느낌이에요.

 pena 저는 <마릴린>이 딱히 SF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식물이나 동물도 노래 불러주면 잘 자란다잖아요. 그거랑 많이 비슷한 이야기잖아요 사실. 사람이 다른 사물이나 모든 걸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지 SF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배명훈 그런 의미에요. SF든 아니든, 많이 다룬 주제인데 더 멀리 나갔는지, 저는 그 대목을 모르겠어요.

 진아 감성적으로 굉장히 설득력이 있었어요. 모르겠어요. 이야기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럴 수도 있고, 그냥 뭔가 사랑스럽고 그림이 그려지잖아요. 그리고 삽화들 중에서 가장 편하고 사랑스럽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라는 면도 있어요. 그리고 그 장면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고모가 되기 위해서 업데이트를 받는다는 장면. 전 그 부분에서 그걸 느꼈던 것 같아요, ‘나도 이제 자라야겠구나’라는 지점이.

 한별 업데이트를 받아들이기로 한 지점이 절묘했다고 생각해요. 장난스럽기도 하고 중요한 시점이기도 하고.

 진아 확 설득력이 있잖아요.

 라키난 저는 사실 <마릴린>의 마지막에 고양이 남자가 등장해서 프로포즈를 하는 장면이 되게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 말에 마릴린이 왜 넘어갔는지는 대체 모르겠다”고 소설에서 말하지만 저는 그게 이해가 가는 거예요. 고양이 남자가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하잖아요. 조금 더 성장할 것을 손을 내밀며 이야기하잖아요. 그래서 재화, 혹은 마릴린이 여기에 넘어가서 손을 잡는 게, 그런 면에 공감이 되고 감정이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에 들었거든요.

 앤윈 저도 그 부분이 좋았는데 새로운, 약한, 아직까지 어떤 권리도 가지지 못한, 말하자면 소외된 자들끼리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매력적이라고 느꼈어요.

 pena 본인이 좋아하는 주제 같은데요. (웃음)

 앤윈 네, 그렇죠. 제가 좋아하는 주제에요. (웃음)

 진아 저는 이걸 보고 소외된 자들의 결합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앤윈 제가 최근에 [SF 명예의 전당] 3권을 읽고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짐승 취급 받는 고양이족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사람과 교배해서 태어난 고양이족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사람의 이야기에요. 인공지능을 가진 컴퓨터가 ‘나는 애도할 권리가 있어!’라고 이야기하고, 고양이 남자와 만나가지고 삶을 새롭게 만들어 간다는 게 저는 그렇게 읽혀서, 힘차서 더 좋았어요.

 pena 그런데 고양이 남자는 진화의 고리에서 갑자기 나타났다고는 하지만 인간인데 로봇하고 결합하면 로봇 새끼 고양이가 진짜로 태어나나? 정말로 실현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꼬시는데 좋은 장면, 좋은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 매력인가? 넘어간 게 그 지점인가? 이런 느낌이에요. 정말 말도 안 되잖아?

 라키난 전혀 딴소린데요, 치위생사가 그런 변태만 아니었으면 재화와 둘이 잘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진아 <마릴린>에서 행복한 엔딩을 맞았는데 재화가 재즈음악 소리를 듣는 이 챕터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그게 참 잘 넘어가서 저도 처음에는 얘도 애인이 생기나? 생각했어요.
 라키난 그런데 뒤통수 맞고…….

 진아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어요. 스릴러나 추리소설에서 가장 피해야 하는 게 엑스트라로 한 번 등장했던 인물이 범인인 거거든요. [덧니]는 스릴러나 추리소설은 아니지만, 그게 좀. 치위생사가 왔을 때 제 머릿속에 떠오른 게 ‘아 엑스트라였는데.’ 이전에 등장을 시켰으니까 작가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약간 반칙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요.

 pena 두 번째 읽어보면 계속 연결고리가 나오긴 했구나 싶어요. 옆집 남자라던가 피아노 소리라던가. 치위생사인 것만이 아니라 옆집 사는 피아노 치는 남자이기도 했던 거니까. 일단 그래서 나름 복선을 깔았다고 생각했고, 법칙 같은 건 허다하게 다들 무너트리는 거니까요.
 진아 그런데 스릴러나 추리물을 처음 쓰는 작가들의 90%가 한 번쯤 해보는 게 그냥 엑스트라 중에 하나가 범인이었어! 이런 거라…….

 pena [덧니]는 전혀 스릴러가 아니잖아요.

 진아 그렇긴 하죠.

 pena 정서적인 뒤통수인 거죠. 옆집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에 좋은 생각도 많이 하고 다정함도 느끼고 등등, 하지만 이런 게 좋은 걸로 연결될 것 같죠? 안 생겨요. 뭐 이런 거.
 진아 재미있는 게, [덧니]가 스릴러는 아니지만 세랑님이 장르나 이야기의 문법이 바뀔 때마다 거기 너무 충실하신 거예요. 이게 로맨스라면 재화가 그렇게 이가 빠지기 전에는 구하러 왔어야 해요. 그런데 그 순간에는 진지하게 스릴러로 쓰시는 거야.

 (탄식과 혼란)

 toonism 이미 여섯 개가 빠졌대…….

 앤윈 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간대…….

 한별 잠시, 여러분 모두 진정하시고요!

 라키난 아니 그런데 진짜 어떻게 피가 그렇게 꿀렁꿀렁 마시다가 지칠 정도로…….

 pena 심지어 나중에는 지혈도 안 해줬대…….

 진아 그래서 저는 기왕에 그렇게 갈 거였으면 이가 빠진 상태의 오물거리는 입모양을 묘사해 주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다시 혼란)

 pena 세랑님의 특징은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것을 세랑님 말투로 그냥 하는 거죠. 끔찍한 이야기도 발랄한 이야기도 모두 그냥 흘러가는 게 특징이라고 생각해요.

 앤윈 그건 되게 매력적이었어요.



 ―. 가볍고 싱거운 닭 발

 진아 <물고기 왕자의 전설(이하 ‘물고기 왕자’)> 할까요?

 한별 <닭 발> 안 하지 않았나요?

 toonism <마릴린> 했으니까 <툰드라> 해야죠.

 진아 <툰드라>는 이어서 한 걸로 하죠.

 한별 그럼 <닭 발>.

 앤윈 전 <닭 발>은 잘 모르겠던데.

 toonism 누가 말씀하셨죠? ‘나 없이 잘 되나 보자.’ 딱 그런 느낌이라.

 앤윈 네, 딱 그 이상은 못 느꼈어요. 여기서 ‘닭 발’이 왜 나온 거죠?

 toonism ‘닭 발’은 마지막 한 줄로 반전하기 위한 용도인 것 같아요.

 pena 굉장히 싱겁게 쓰인 글이라고 생각하는 게, 싱겁게 죽었잖아요. 낙마해서 죽고.

 toonism 전 이걸 농담스럽게 읽으면서 속으로는 ‘와, 여성의 한이란,’ 이런 걸 느꼈어요.

 pena 되게 문학적인 한 아닌가요?

 toonism 네, 결국 시문으로 엿 먹이는 거죠.

 진아 저는 이런 거 되게 좋아해서. 규진이 떠나기 전에 “어홍과 나 사이엔 언제나 이 땅에서 달까지의 거리가 누워 있겠지만 연정만은 이어져 있을 것이오” 라고 하는데, 이게 그냥 떼어내려고 하는 말이긴 한데, 그게 아니었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말이 너무 예쁜 거예요. 멋있는데? 헤어지자는 말이야?

 라키난 어홍이 하는 문학적 표현들은 어홍의 진심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한 멋있는 말들인데 규진이 하는 말은 멋있지만 그냥 수사잖아요. ‘너 저리가’를 꾸민 말이잖아요. 그런 면에서 진정성에 차이가 있고, 그런 점에서 그 뒤에 나오는 단심(丹心)과 연결되는 것 같아요. ‘진정성을 담아라!’라는 점에서 이 엽편의 싱거움이 더 의미가 있지 않나.

 pena 또 웃기는 건 어홍은 끝에 가서 멋지게 문학적인 한을 풀어내지만 그 전에는 까칠하게 대하잖아요. “관자가 너무 커 보입니다 그려” 그러면서. 이것도 재화구나 싶은 느낌이에요.

 진아 관자가 너무 커 보인다는 건 당신의 얼굴이 작아 보인다는 칭찬 아니에요?

 라키난 규진 입장에서는 아닐 것 같은데요. 어린애 취급하는 그런 느낌 아닌가요?

 pena 그 앞에 “돈이 좋긴 좋습니다”라는 말도 있고.

 진아 저는 완곡히 말해달라기에 완곡하게 말한 건 줄 알았는데.

 한별 완곡히 놀린 거죠.

 진아 저 선비와 기생들의 말장난 너무 좋아서. 저도 한 번 해보고 싶은데.

 한별 이미 해보신 걸로…….

 toonism [지우전] 시작하자마자 했잖아요. (웃음)

 pena 이것 봐요, 평소에 좋아하는 취향이 나와요. (웃음)

 앤윈 다시 태어난 규진의 인생이 어떻게 꼬였는지가 나왔으면 속이 좀 시원했을 것 같아요.

 진아 저는 이 허망한 죽음이야말로 삼류 건달에게 딱 맞는 죽음이었다고 생각해요.

 앤윈 간단하게 세 문장 정도로라도, 대학에 떨어져서 인생이 어떻게 ‘좆망’했는지, 아주 단순하게라도 서술해주면 속이 시원해졌을 것 같아요. 사실 아주 작은 곳에서 삐끗한 걸로 인생이 나락으로 치달을 수도 있잖아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주 골로 보냈으면 좋겠어요.

 한별 여기 독자의 강한 원한이…….

 라키난 학력고사에서 망하고 좋아하던 여자한테 고백도 못하고 차여서 꼬였다는 식으로 끝나면 더 좋을 것 같네요. 개인적인 사심이에요. 이 편은 정말, 용기 혹은 규진을 작은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편이죠. 관자가 참으로 커 보이는……. (웃음)

 진아 어우, 두 분 이야기 하시는데, 한기가.



 ―. 떠날 수 없었던 물고기 왕자

 한별 <닭 발>은 더 하면 원한만 나올 것 같은데요. (웃음) <물고기 왕자> 하죠. 전 여기 나온 삽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글이에요. 주인공이 변화하면서 자기가 찾던, 혹은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던 존재가 되는 거잖아요. 변화하고, 상황을 변화시키는 존재가 되는 이야기라서, 재화의 변화의 기미라고 볼 수 있기도 하고. 그걸 떠나서 이야기 자체도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배명훈 결말이 좋아요. 끝에 점점 시들시들해서 없어졌는데, 다시 확 밀고 들어오고.

 앤윈 읽으면서 약간 <진화신화>를 떠올렸었어요.

 라키난 <닭 발>의 경우에는 용기 혹은 규진이 굉장히 작은 존재가 되어버려서 ‘니깟 게 감히’라던가 ‘너 그렇게 살면 안 돼’라는 말을 하는 반면 <물고기 왕자>의 경우에는 태도를 뒤집어서 ‘그래도 얘도 좋은 점이 있지 않았나? 진지함과 고집 같은 건 얘의 장점이 아니었나?’라고 생각이 바뀌는 게 보이지 않아요?

 pena 사실 죽은 건 소년인데 전 소년이 더 재화 같았어요. 뭐든지 다 먹는 소녀가 용기 같았어요.

 한별 그렇게 봐도 맞지 않나 싶어요. 굳이 남녀로 가를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용기를 이입한 대상이 소녀가 될 수도 있는 거고.

 앤윈 그런데 여기에서 용기의 몸에 남은 “소년의 아가미 문신이 완전히 잠겼다”는 글씨를 보면 소년이 용기가 되는 게 아닌가요?

 진아 그게 그렇게 직접적으로 인물에 대입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남자애가 하나 나오고 걔가 죽는다는 거고, 그 캐릭터는 계속 바꿀 수 있는 거죠. 저는 제일 아팠던 게, “붉은 도자기들이 모두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는데, 그 모든 희망과 꿈이 와르르 무너지고, 정말 희망이 없고, 일종의 자살이잖아요? 얘는 진짜 아무 것도 없구나, 얘는 이렇게는 못 사는 구나, 그게 확 와 닿아서. 그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놀라운 단편인 것 같아요.

 앤윈 그 부분 정말 좋았어요. “마지막 오아시스를 토할 수는 없었다.”

 라키난 앞에 나왔던 <시공의 용>이라든가 <늑대 숲>의 경우에는 남자애가 어리석어서 잘못이 일어나잖아요. <물고기 왕자> 같은 경우에는 똑같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고집이 절대로 어리석은 게 아니잖아요. 오아시스에 대한 진심 같은 거. 그런 면에서 저는 용기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났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또 한편으로는 당연히 이 소년이 용기가 대입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반대의 반응들을 하시니 흥미롭네요.

 진아 여자애가 소년을 소년이 살던 세계에서 강제로 끌고 가잖아요. 그런데 소년은 그 세계가 아니면 살 수 없던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연인관계가 깨졌을 때 서로 잘못을 한 게 있었을 수도 있고, 그런 걸 바라보려고 한 것 같아요. 여기서 처음으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잖아요. 사과하고. 화해를 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보여준 것 같아요.

 배명훈 그리고 이 소년의 죽음에 대해서, 마지막에 해일이 몰려오는 게 세레머니를 하는 것 같아요. 죽고 나서 소년의 세계가 역으로 확 밀려오는 이미지가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죽였어 후련해, 그게 아닌 것 같아요.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pena 이야기 가지고 작가 정신분석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웃음)


 ―. 전복하는 플롯

 배명훈 작가가 생각 안 하고 쓴 부분인데 우리가 이야기하는 부분이 많을 거예요.

 한별 다음은 <항해사>.

 앤윈 <항해사>의 선장은 굉장히 훌륭한 사람이에요. <물고기 왕자>의 소년은 뭔가 천진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다면, 이 선장은 다 알고 있는 어른스러운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잖아요. “위험을 감수해야 해. 돌아가야지.” 하면서.

 진아 이야기를 들으면서 안 건데, <물고기 왕자>의 소년이나 <항해사>의 선장이나 둘 다 집을 떠나서는 못 사는 인물들이에요. 자기 세계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네요.

 toonism 그러네? 앞에서부터 그러네요?

 배명훈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제가 보기엔 그런 것 같아요. 신념이라기보다는.

 pena 재화가 ‘사람들이 그렇게 생겼구나’ 하는 이해가 높아져 가는 것 같기도 해요.

 앤윈 <시합을 할래>에서는 남자가 자기의 세계가 더 이상 복구될 수 없을 거라고 판단을 하니까 같이 다른 세계로 떠나버리잖아요. 그건 자기 세계가 완전히 황폐화됐을 때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 같은 느낌도 나네요.

 진아 <시합을 할래>가 의미가 있는 게, 이번에는 이 남자도 원래 살던 곳과 다른 곳에선 살 수가 없으니까 나가야겠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여자애랑 같이 가죠.

 배명훈 <시합을 할래>는 [덧니]의 주제로 끌고 가려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결말이랑 약간 달라요.

 진아 마침내 두 남녀가 이야기를 나와서 현실에서 결국 만날 거라는 암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남자친구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와서 공주를 데려갔고, 그렇지만 이야기가 무너지는 건 아니죠. 더 좋아질 수도 있고. 꼭 그 남자애를 죽이지 않아도 더 아름다운 이야기로 갈 수 있는 것처럼.

 라키난 전체적으로 용기, 혹은 용기가 대입된 인물들은 자기 집을 떠나서 살지 못하는, 또는 신념이 있거나 고집이 있거나, 아니면 어리석을지라도 나는 여길 떠날 수 없다고 말하는 인물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 같은데, 마지막 이야기에서 그게 조금 변화하는 거죠. 그런 점에서는 용기의 캐릭터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고. 그 저변에 계속 나오는 재화가 있잖아요? 재화의 변화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배명훈 그런데 용기의 캐릭터가 그렇게 정리가 되는 게 맞나요?

 라키난 재화 이야기를 하면서 용기 이야기도 계속 나올 것 같은데. 물론 용기에 대해서 생각할 거리가 더 많기는 하죠. 하지만 재화와 함께 생각합시다. 재화가 너무 안 나오는 것 같아서. (웃음)

 배명훈 제가 추천사에 원래 쓰고 싶었던 이야기인데, 재화라는 캐릭터가 여기 나와 있는 플롯으로 지탱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상투적인 이야기도 심란한 상태의 재화한테 넣어버리면 죽어버리는 이야기가 산출되고. 그런 식으로 재화가 투입-산출 가운데에 들어있는 플롯 형태가 되어 있는데, 변하고 있잖아요? 마지막 이야기에서는 플롯 자체가 등장인물로 나와 버려요. 그래서 그 안의 세계에 대해서 ‘이렇게 구체적이 되면 안 돼’라고 이야기해요. 이야기 자체가 재화의 내면인데, 이야기 안에 다시 플롯이 등장인물로 등장해서 이 이야기를 밖으로 끌고 나가 버린다는 게 가벼운 주제가 절대 아니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쉽다는 게, 왜 이것보다 더 가벼운 주제인 스릴러로 끝을 내셨는지……. 굉장히 중요한 지점을 짚었어요.

 pena 현실의 재화와 용기를 만나게 하는 계기가 필요했고, 거기서 작가의 의도가 다 실현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거 있잖아요, 작가는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그 뒤가 필요하긴 할 것 같은 상황. 필요에 의한 선택?

 배명훈 그래서 그런 느낌이 들어요. 앞에 치위생사에 대한 플롯이 깔려 있는데 그게 앞에부터 플롯이 심어져 있다가 자란 게 아니라 치위생사 플롯을 넣고 앞의 플롯을 다시 깐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앞에 플롯이 깔려 있으니까 튄다고 말은 할 수 없는데, 분명히 다른 색깔의 뭔가가 들어와 있어요. 아까 제가 말한 그 지점이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쓰면 제 이야기가 되겠죠? (웃음)

 진아 설득력 있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어쨌든 재화와 용기는 다시 만날 수밖에 없긴 해요. 왜냐면 그 여자 친구는 이름조차 나온 적이 없어요, 이름조차 ‘어린 여자 친구’지. 두 사람을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가? 뭔가 커다란 사건이 하나, 이 동네를 그토록 안 온 용기가 달려올 만한 사건이 필요해서 치위생사가 재화를 납치해버렸죠. 그런데 그 방식이 아니라 이 이야기가 지금까지 온 방식대로 결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있었다면…… 저도 동의하게 되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어떤 의미로는 치위생사가 등장할 이유조차 없었던 거죠.

 라키난 ‘엑스트라가 왜 이렇게 컸지?’ 같은 느낌인가요?

 배명훈 커져야 하니까, 앞에 플롯을 넣고, 복선을 넣고, 나중에 생각해보면 앞에 이게 있었지…… 하고 납득은 하는데……! 네. 좀 아쉽기는 해요.


 ―. 덧니의 정체성

 라키난 제목이 [덧니]잖아요. 주인공의 특징도 덧니고. 그리고 이 덧니라는 특징이 재화의 장르소설가, 마이너함, 특이함과 연관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주위에서 계속 말하는 게 ‘너 좀 더 쉽게 살아라’ ‘너 좀 더 무난하게 써봐라’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재화는 ‘아 그렇구나, 나는 더 모나고 날카롭게 가야지’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덧니의, 혼자 툭 튀어나온 덧니의 특징과 연관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진아 굉장히 상징적인 제목을 잘 지으셨다는 거죠?

 라키난 네, 그런데 지금까지 덧니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안 나와서. 덧니에 대한 다른 분들의 생각도 들어보고 싶거든요.

 진아 저는…… 동의할래요.

 pena 저도요. (웃음) 그런데 재화의 캐릭터를 생각해 봤을 때 그 반대의 느낌도 있을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재화의 성격을 덧니처럼 한 가지 길이 아니면 좀처럼 자기를 드러내거나 자기를 표현할 줄 모르는 그런 성격이라고 보면 반대 의미가 되잖아요. 어쨌든 그런 것도 어울리긴 할 것 같아요. 다들 덧니만 본다잖아요. 여기에 자기 모든 표현이 들어있는 거예요.

 앤윈 저는 약간 덧니에요. 처음 덧니가 생긴다고 들었을 때 엄청 울었거든요? 이게 덧니가 될 거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이 청천벽력이었어요. 막 울었는데, 중요한 건 자라면서 덧니가 됐잖아요? 어머니가 고쳐줄까 물어봤을 때 절대 싫다고 그랬거든요. 덧니가 작은 틈에서 크게 자라는 거기 때문에, 그냥 정체성이 아니에요. 한 번에 되는 게 아니라 천천히 되는 거죠. 그래서 바꿀 수 없는 거라는 느낌이 있어요.

 라키난 그리고 다른 걸 밀어내면서까지 차지한 자리이기도 하고요?

 앤윈 그렇죠.

 라키난 이 이야기의 큰 틀은 로맨스이고, 용기와 재화가 다시 만나서 사랑하는 것이 큰 과정이잖아요? 그래서 그토록 용기를 죽여왔던거고. 재화가 용기를 죽여가면서 용기를 조금씩 이해하고, 한편으로는 ‘나에게도 뭔가 잘못이 있지 않았을까’, 혹은 ‘이렇게 달랐다면 뭐가 문제였을까’ 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그러면서 재화도 변화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용기가 굉장히 뚝심 있고 신념 있고 고집 있는 인물로 나오지만, 재화도 그렇게 돌려 말해서밖에 표현을 못하고 덧니 있는 모난 인물이에요. [덧니]에 실린 삽화들이 재화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하면서 두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진아 아, 일단 이 정도로 하고 아쉬운 부분은 작가의 변 시간에 조금 더 주고받기로 해요.  시작하기 전에 일단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분명 세랑님은 ‘난 이런 생각까지 하고 쓴 건 아닌데!’ 싶은 지점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창작품은 창작자 그 이상의 존재이고 때로는 별개의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비평들이 작품의 새로운 해석을 낳아서 작품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당황하지 마시고!


 3. 작가의 변



 ―. 경장편과 전집

 정세랑 들어보니까 제가 진짜로 생각을 열심히 하고 글 쓰는 타입이 아닌 것 같아요. 상징이라든가 구조 같은 걸 생각하고 쓴 것 같지 않아요, 깨달음이 많았어요. 아, 이렇게 읽힐 수도 있구나, 무의식적으로 저렇게 하고 있었구나, 느껴져서 재미있었어요.

 진아 어쩌면 굉장히 좋은 감을 가지고 계신 거예요. 본인의 느낌대로 확 썼는데 이 많은 사람들이 그 많은 걸 읽어낼 수 있었던 건 굉장히…….

 앤윈 촉이 좋으신 거죠. (웃음)

 정세랑 머리가 좋거나 감이 좋거나, 둘 중 하나는 돼야 하는데 머리는 안 좋은 것 같고…… 다행이네요, 감이 좋다고 해주시니까. (웃음) 어, 그냥 쭉 필기해 놓은 거 보면서 이야기할게요. pena님이 ‘작가가 이별을 소화하는 방법’이라고 말씀해주신 것 같은데, 정말 소화하는 과정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굉장히 중요한 지점을 짚어주신 것 같아요.
 그리고 이게 장편이 아니라 단편 형식이라는 말 많이 들었는데, 제가 되게 호흡이 짧은 것 같아요. 30~40매가 저한테 딱 편한 길이고. (명훈 보면서) 3,000매 쓰시는 분도 있고. 제가 장편을 세 편 써봤는데 다 귀신같이 860매에서 끝나는 거예요.

 (감탄)

 정세랑 이상하죠?

 배명훈 역시 편집자다. (웃음)

 정세랑 그런데 그 분량으로 책을 만들면 두께가 볼품없어질 수 있어요. 사실 저도 약간, 두꺼운 양장본에 대한 환상이 있거든요. 박스 세트 이런 거.

 진아 사람들이 책이 있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이런 경장편이 많이 나오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해요.

 앤윈 제가 생각했을 때 [덧니]가 이상적인 출판이에요. 가볍고, 들고 다니기 쉽고.

 라키난 그러니까 역시 엽편을 쓰셔서 엽편집을…….

 정세랑 두껍게! 크게!

 (웃음)

 정세랑 항상 그래서 분량이 스트레스였어요, 호흡이 짧은 편이니까. 삽입된 소설들이 이 소설을 위해 쓰인 거냐 아니면 전에 있던 것도 끼워 넣은 거냐 물어봐 주셨는데, 몇 개는 전에 있던 걸 끼워 넣은 것 같아요. 마릴린과 오빠 이야기는 예전부터 있었거든요. 마릴린 이야기는 중학생 때부터 어떻게 하고 싶었는데 어디다 끼워 넣지? 하고 고민하고 있던 걸, 아싸, 분량을 늘릴 수 있겠다, 하고……. (웃음) 오래된 이야기를 몇 개 재활용 했어요. 그래서 ‘용기가 어디 있어?’ 라고 물어보시면…… 원래 있던 이야기인데 끼워 넣었기 때문에…… (웃음) 제가 ‘이게 용기야’ 하고 짚어주지 않으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어요. 새로 쓴 게 더 많은 것 같아요.
 아, 그리고 친구들 말장난이 계속 나오는 문제에 대해서는, 제 친구들이 되게 웃겨서 실제로 한 대화들을 메모했다가 끼워 넣어요. 문제는 친구들이 몇 시간 얘기할 때 한 다섯 번 재미있었으면 소설에는 다섯 번 재미있는 것만 가져다 쓰잖아요. 그 부분만 편집해 넣었기 때문에 빈도수의 문제가 있는 것 같긴 해요.


 ―. 표현과 어휘에 관해

 정세랑 ‘젠틀’ 같은 영어식 표현은, 모르겠어요. 남미 작가들은 스페인어도 쓰고 영어도 쓰고 프랑스어도 쓰고, 섞어 쓰잖아요. 특정 언어로 해야 재미있는 농담이 있는 것 같아요. 언어의 혈통을 순수하게만 지키고 그런 걸 생각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그것보다는 언어 하나를 배울수록 더 좋은 표현들이 늘어나고, 쓰면 좋고. 그런 타입인 것 같아요.

 진아 저는 반대로 생각하는 게, 외래어나 외국어가 들어와서 어휘가 풍부해지는 게 아니라 좋은 어휘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정세랑 작가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우리말도 재미있는 게 있으면 옛말이나 방언도 많이 쓰거든요. 근데 그게 외국어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진아 이 이야기를 굳이 꺼낸 이유가 뭐냐면, 작가들이 이런 이야기에 대해서 한 번 이야기를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거든요. 이런 자리가 아니면 하기 힘드니까. 주변에 친구들 붙잡고 이야기할 수도 없고.

 앤윈 저는 제가 열 번 이상 제 입으로 말하지 않은 단어는 서술에 안 써요. 그런 단어를 쓰면 제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못 견디는 편이에요. 그리고 어색할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젠틀’이란 표현이 괜찮았던 것은 세랑님이 많이 쓰는 단어라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정세랑 그런 느낌인 것 같아요.

 라키난 세랑님 소설에 한해서는 입말 중심이었으니까, 그렇게 익숙하게 넘어갈 수 있는 단어를 쓰는 게 어울리기도 하겠다 싶어요.

 배명훈 일단 우리말로 표현할 줄 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선택의 문제면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라키난 예를 들어 <닭 발> 같은 경우에는 선비투가 잘 살아나잖아요. 그런 점에서는,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다면.

 배명훈 바른말로 고치라고 했을 때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해질 수도 있다는 거죠.

 진아 제가 시를 읽을 때 되게 좋은 게, 시어에는 예쁜 표현들이 되게 많아요. 가끔 어떤 단어를 만나면 내가 이 단어 하나를 몰라서 되게 늘여 쓰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도 들어요. 말 자체도 너무 예쁘고. 가끔은 옛날에 쓴 원고를 찾아가지고 문장을 바꿀 때도 있어요.

 앤윈 저는 그걸 작가가 자연스럽게 녹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떤 단어가 매력적이라면 그 단어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배명훈 그런 거 있잖아요, ‘시나브로’를 써먹기 위해 쓴 문장.

 (다들 절규)

 toonism 생각만 해도 오글오글…….

 진아 그런 거 이상하게 읽으면 티 나요.

 앤윈 시나브로, 하릴없이, 이런 거.

 배명훈 그런 경우가 있어요. ‘젠틀’이라는 말이 우리말의 개념이 아니고 ‘젠틀’이라는 느낌이 우리 개념이 아니어서 ‘젠틀’이 더 어울리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정세랑 그런 경우에 한해서는 그냥 쓰려고요.


 ―. 현실성의 뿌리

 정세랑 아, 용기 캐릭터 말인데요, 제가 되게 뜨끔했던 게, 사촌같이 함께 자란 아빠 친구 아들이 있어요. 이 친구가 사설 경비업체 인사부로 들어갔는데, 몇 년 동안 출동 실습을 뛰더라고요. 눈물콧물 짜면서 일을 하고 있는데, 하필이면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을 그 친구가 할당받은 거예요. 그 친구가 출동이 없을 때 와가지고 밑에서 울면서 ‘나 너무 배고파 뭐 좀 사줘’ 그러면 편의점에서 사 먹이면서 이야기를 들었어요. ‘오늘 출동했는데 어떤 미친놈이 나를 때리더라’부터 시작해서 ‘7분 만에 갔더니 소주병이 날아오더라,’ 그런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직업적 부분에 있어서는 그 친구의 진짜 이야기를 잘 모아 담아서 진짜 남자애 같았을 거고. 하지만 연애감정에 대해서는 제가 남자인 척하고 쓰니까, 그런 부분에서는 진짜 같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그 진짜 같은 면에 숨어서 가려고 했는데, 그래도 안 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반대 성(性)에 대해서 쓸 때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안 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진아 가끔은 고민하지 말고 그냥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요. 아, “용기 있는 자가 재화를 얻는다”에서, 재화가 보화라는 의미도 있지 않나요?

 toonism 혹시 그 챕터 제목을 위해서 주인공 이름을 재화라고 하신 거예요?

 정세랑 회사 선배 이름인데, 책을 줬더니 원래 고등학교까지는 주변에서 ‘용역이는 어딨니’ 그러더니 요즘에는 ‘용기는 어디갔니’ 그런다면서 조금은 업그레이드 된 기분이래요. 원래 있는 사람이에요.

 진아 되게 재미있어요.

 정세랑 “용기 있는 자가 재화를 얻는다”는 제가 써놓고도 아싸! 했어요. (웃음) 아 그리고 참, “재화가 용기를 아홉 번 죽였다” 그 문장 언급해 주셨는데, 사실 그 문장 하나 때문에 뒤의 이야기들이 다 생긴 거였거든요. 그게 너무 쓰고 싶은 거예요. ‘아홉 번 죽였다’가 너무 쓰고 싶어서. 뒤에는 다 따라온 거예요.

 진아 부럽다……. 첫 문장을 쓰니까 나머지 문장들이 따라왔데. 궁극의 경지 같은 느낌이…….

 배명훈 따라온 게 아니라, 연결고리가 될 문장들을 찾은 거죠.

 정세랑 열심히, 점 긋기처럼. 이것도 꼭 쓰고 싶고 저것도 꼭 쓰고 싶은데, 중간에 이어야 되네, 짜증나네. (웃음) 제가 구조적인 사람은 아니더라고요.

아, 치위생사 말인데요, 이 캐릭터는 이야기 구조 때문에 불려온 캐릭터기는 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윌리 웡카만큼 교정을 받았거든요. 진짜 입 밖으로 나오는, 목에 거는 교정기를 했어야 했어요. 그런 경험 때문에 불려나온 것 같아요. 덧니는 좋아해요. 덧니 있는 사람만 보면 너무 좋아요, 제가 사실 변태거든요. 하여튼 그래서 장르문학 상징이고 뭐고 아무것도 생각 안 하고 덧니 있는 사람을 좋아하니까 덧니 나온 애를 쓰자, 하고 썼는데 어쨌든 그렇게 잘 꿰서 읽어주시니까 그럴듯하네요. (웃음)

 라키난 진짜 감이군요. (감탄)

 pena 작가마다 저런 거 있더라고요.

 정세랑 그래서 치과 이야기가 들어간 건 구조상으로 그렇게 매력적이진 않았지만 치과에서는 낯선 사람들이 아주 가까이 침범해오잖아요. 그 이상한 가까움에 대해서 쓰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시합을 할래>도 구조적으로 멋지게 읽어주셨는데, 생각하고 쓴 것 같지 않아가요. 다음부터는 그런 식으로 결말을 내볼게요. (웃음) 정확하게 생각하고 쓴 게 아니라서 뒤의 결말이 그만큼 못했던 거고요.
 자기 세계가 아니면 못 사는 남자 이야기 듣고 아까 빵 터졌는데, 제가 좀 광장공포증이 있어서 낯선 동네를 잘 못 가거든요. 여행 같은 거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낯선 교통수단에 거부감이 있어가지고. 그래서 남자 주인공들이 용기가 없구나. 나의 병이 주인공을 망가트렸네.

 라키난 용기가 그런 인물인데, 재화도 딱히 안 그런 건 아니잖아요?

 정세랑 그렇죠, 다 별로 돌아다니지 않고, 집에 안주하고. 다음부터는 조금 진취적인 인물을!
 편집자의 담배 냄새는 저도 봉투 열자마자 헉! 했어요. 이게 담배 피울 때는 괜찮은데 냄새가 찌들면 장난 아닌 것 같아요.
 고양이 남자는 여기저기 다 나와요. 단편에도 나오고, 워낙 좋아하는 캐릭터라 여기저기 다 나와요. 작가마다 그런 거 있잖아요. 작품마다 한 번씩 꼭 넣는 것. 꼬리도 없고 귀도 없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수만 있어요.


 ―. 독법 차이

 정세랑 하여튼 책을 내고 온갖 파워블로거들한테 가볍다고 가치 없다고 장르문학 다 싫다고 엄청 폭언들을 많이 들었어요. 근데 작가가 ‘니들이 취향이 나빠!’하고 항변할 수 없잖아요. 오늘의 책 선정 블로그같이 되게 큰 블로그에서 그렇게 무책임하게 악의적으로 까다니, ‘두고 보자 이 XX들’ 그랬거든요. 그대로 내보내셔도 돼요. 아니, 건설적인 비판은 괜찮은데, 사실 그런 비판을 해주시는 분들은 저도 뜨끔해하면서 생각했던 걸 콕 짚어주시는데 이건 그 수준이 아닌 거예요.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하면 되지, 그렇게 악의적으로 막, ‘싫어! 네가 싫어서 죽을 것 같아! 무조건 싫어!’ 그렇게 말하는 것도 예의 아니에요. 정상범위를 벗어났어요. 그거 분명히 자기가 창작하고 싶은데 못 하니까 마음이 뒤틀려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영원히 데뷔 못해라. 저주저주저주.

 진아 판타스틱 인터뷰에도 그런 말 하신 걸 봤어요.

 정세랑 사방팔방에 그러고 다닐 거예요. 와 진짜 까이는데 정신없이 까이더라고요. 저 매일 아침에 검색해보거든요.

 앤윈 검색해보면 멘탈에 기스가 심하게 날 것 같아요.

 정세랑 일부러 블로그 방문한 사람 목록에 제 이름 남기고 나와요. 내가 보고 갔다, 넌 이제 죽었다. 저 뒤끝 장난 아니에요. (웃음) 웃지만 진심.

 라키난 그런 생각이 드는데, 여기 오신 분들은 삽화에 몰입을 하고 거기 감정 이입을 해서 그 내면의 슬픔이라든가, 상상할 수 있는 여지에 대해 이입할 수 있었던 것 같거든요. 그게 아니라 책을 그냥 쭉 보면 재미있는 대화 같은 면에 눈이 가기 때문에 더 가벼운 책으로 읽히는 것 같아요.

 정세랑 그렇게까지만 하셔도 그건 정상인 범주인데, 한참 벗어났다니까요. 뭔가 되게 가오 잡는 걸 원하는 것 같아요. 거대하고 무거운 걸 말해야지 문학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제가 추구하는 엔터테인먼트로서의 문학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까진 괜찮은데, 그렇게 인신공격적으로 나오면…….

 진아 괜찮다고 생각해요. 좋은 글일수록 격렬한 반대를 받아보기도 하거든요.

 앤윈 제가 살아온 바에 의하면 격렬하게 싫어하는 사람이 없으면 격렬하게 좋아하는 사람도 없는 거예요.

 진아 누군가가 이렇게 격렬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글인 거예요. 그 반대로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도 생길 수 있는 거죠.

 배명훈 그냥 그런 정도가 아니라, 정말 나쁜 의도를 가지고 쓰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앤윈 전 적한테 듣는 모욕은 명예라고 생각했어요.

 정세랑 멋있다, 전사다. (감탄)

 배명훈 아쉬움이 있는 게, 장르소설이 나오면 항상 반응 중에 그런 부분들이 있는데, 그 소설의 핵심 부분들을 못 읽고 나머지만 읽고 자기네 방식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어요. 장르소설이라는 건 이렇다, 특이한 세계가 나온다 해놓고 어떤 세계가 나오는지 이야기하지 않고 인물분석으로 들어가고. 글을 읽는 그대로 실제로 본 게 아니라 어떤 걸 입증하려는 반례 같은 걸로 열심히 읽고 까는 것 같은 느낌도 있어요.

 진아 너무 상처받지 마세요. 거울에 이런 아름다운 대담이 올라갈 거예요. 합평회 진행하면서 이렇게 칭찬 일색이었던 글이 많지 않았어요. 좋은 이야기가 많이 나왔어요.

 정세랑 치유의 과정이었어요. 여기저기서 많이 까이고 돌아와서 치유를 받았어요. (웃음)

 배명훈 그런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우리 쪽의 분석 방식을 모르고 자기들 것만 표준이라고 이야기하니까, 엉뚱하게 읽잖아요. [지우전]을 읽는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읽고 정답인 것처럼 기술 점수를 매기고. 재미있었다, 아니다가 아니라 기술점수를 매기잖아요. 그런 게 화가 나는 순간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건 우리가 받아들일 지점이 아니라 싸울 지점이 맞는 것 같아요.

 진아 세랑님 혹시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 있으신가요?

 정세랑 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다정하고 정확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수)


 終. 길었습니다


 두 시간 가량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합평회였습니다. 참가자들에게는 아직도 못한 말이 남을 정도였는데, 녹취록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께는 어땠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데요. 여러분의 생각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

 본 합평회 이후에 아프락사스님의 글 {한국 장르문학을 둘러싼 정황} 합평이 있었는데요, 죄송하지만 사정상 위 합평회 녹취록은 다음 호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아프락사스님께는 이해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보다 정갈하고 보기 좋게 정리해서 다음 달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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