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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tique 판타스틱 2009. 여름
판타스틱 편집부, 페이퍼하우스, 2009년 6월



 편집자 주 환상문학웹진 거울 74호는, [판타스틱 2009년 여름호]에 실린 조영일 씨의 장르문학 칼럼 {한국에서 장르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을 엿볼 수 있는 두 편의 기획 기사를 게재합니다. 논의는 박가분님께서 거울 감상/비평 게시판에 세 편으로 나누어 업로드하신 게시물에서 촉발되었습니다. 그 전에, 먼저 조영일 씨의 칼럼이 게재된 [판타스틱 2009년 여름호]를 언급한 두 개의 기사가 있었습니다.

 판타스틱 2009년 여름호
 ―――환상문학웹진 거울 73호, 국내소설, 유로스

 [칼럼] 작가지망생들이여 홍대 앞을 보라
 ―――환상문학웹진 거울 73호, 기획, SeeReal

 이에 대한 반론을, 박가분님께서 감상/비평 게시판에 업로드하셨습니다. 다음의 링크에서 박가분님의 게시물과 함께, 유로스님의 반론이 덧글로 짧게 업로드되어 있는 것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환상문학의 이퀼리브리엄, 조영일과 환상문학
 환상문학의 이퀼리브리엄, 조영일과 환상문학 2.
 환상문학의 이퀼리브리엄, 조영일과 환상문학 3.
 ―――환상문학웹진 거울, 감상/비평, 박가분

 거울은 박가분님께서 초고를 일부 수정하신 {환상문학의 이퀼리브리엄}, 그리고 이에 대한 유로스님의 재반론인 {장르문학 평론의 허와 실: 허구적 프레임과 결핍에 대하여}를 기획 꼭지에 동시에 게재합니다. 이와 함께, 독자 여러분의 다양한 의견 역시 기다리고 있습니다.




 0. 나는 이번 원고를 ‘비평고원’(cafe.daum.net/9876)과 본인의 블로그 ‘붉은서재’(blog.naver.com/paxwonik) 양쪽에 올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조영일 씨에 대한 어떤 비판을 겨냥하고서 작성된 것이다. 그러나 어느정도 장르문학이나 환상문학의 감수성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거울’에 있었던 조영일 씨의 글(한국에서 장르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일련의 반응들을 참조하면서 조영일 씨를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이번 졸고는 동시에, ‘거울’ 독자들의 반응에 대한 비판적 언급을 포함하고 있는 바이다. 그래서, 이번 ‘거울’에 올리는 비문학 리뷰에서는 조영일 씨 자신에 대한 비판보다는 거울에 대한 혹은 환상문학 작가-독자 공동체에 대한 비판적 언급을 위주로 논조를 바꾸어 올리는 바이다. 마지막 3절은 조영일 씨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조영일 씨의 글이 오독되는 지점들을 언급할 것이다.


 1. 한국문학의 이퀼리브리엄?

 통상 [매트릭스](The Matrix, 1999)의 아류로 평가되는 영화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 2002)의 배경은 매우 극단적인데, 가령 어떤 미래 도시에서는 정부가 인간의 감정을 약물을 통해 강제적으로 통제하며, 감정을 촉발하는 모든 것들을 전적으로 금지하는 것으로 나온다. 시, 회화, 음악과 같은 예술작품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애완용 강아지마저도 이와 같은 금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몰래 향유하거나 약을 투여받지 않는 사람들을 단속하기 위한, 테트라그라마톤이라는 조직이 있으며 그것은 심지어 이런 정부의 단속에 무장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을 진압하기 위한 특수한 기술(‘건카타Gunkata’라는, 권총으로 수행하는, 뉴에이지 느낌마저 드는 매혹적인 무술 ‘권법’)과 무기들을 보유하기까지 한다. 영화 초반에 이들 저항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이들이 진행하는 작전을 보다 보면, 그것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잔인하게 진행되서 비록 작위적인 설정이지만 이들 저항세력이 지키고자 하는 대의를 옹호하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여기서 통상적인 영화의 서사의 흐름을 잠식하는 결정적인 반전이 등장하는데, 무장세력을 잔인하게 진압하고서, 군인들의 손에 의해 은신처에서 저항군이 매우 소중하게 숨겨놓고 있던 ‘사물’들이 쏟아져나오는 순간, 그것들은 곧 이발소에 걸릴 법한 짝퉁 ‘모나리자’ 그림과, 베토벤의 음반들, 시시한 시집 같은 키취한 잡동사니였음이 밝혀진다. 더군다나 그 진압과정에서 예이츠 시집을 빼돌린 한 요원은 주인공 크리스천 베일에 의해 즉결처형되는데, 죽기 전에 그는 ‘나는 가난하여 꿈 밖에 가진 것 없네’라는 유명한 구절을 읊는 식이다.  



▲ [매트릭스](위), 그리고 “매트릭스는 잊어라!”라는 카피를 내세웠던 [이퀼리브리엄].

 나는 조영일 씨가 이번 [판타스틱] 여름호에 기고한 글 {한국에서 장르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cafe.daum.net/9876/ExU/9765)를 읽고서 위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과 같은 재앙적이다 싶을만한 느낌을 받았다. 왜냐하면 독자 입장에서 그가 문단권력에 맞서 지키고자 하는 게, 혹은 문단권력을 비판하면서 실제로 겨냥하는 게 정작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평소에 가지고 있었지만, 막상 그것에 대한 답이 주어질 때 뭔가 허탈한 반전을 목도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어떤 기대와 실망이 ‘상상적’이라는 반론이 주어질 수 있겠지만, 단순히 조영일 씨가 쓴 글의 차원을 넘어서, 정작 조영일 씨의 수신인이 될 사람들, 문단 바깥에서 나름의 문학장르를 추구하고 있는 독자-작가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표준적 반응을 참조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내 인상으로는, 그는 수신인을 잘못 선택하고 있었고, 따라서 나아가 그가 지금까지 해왔던 비판의 요지가 뭔지 더욱 알 수 없게 되는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우선 ‘그들’이 문단과 어떤 긴장관계를 형성할 것이라는 기대 자체가 근거 없는 것이다. ‘거울’의 독자리뷰에 실린 같은 반응을 보자:

 “조영일 씨의 ‘평론’ {한국에서 장르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는 문단문학 쪽에서 그가 이야기해 왔던 것의 답습이었다. 혹자는 그게 뭐가 문제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바로 그 점이 문제다. 21세기 장르 잡지에 프로 문학을 이야기하는 대범한 시대착오는 차지하더라도, 애초에 장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한국에서 장르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평론’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다.
 (중략)
 (조영일 씨의) 평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중문학’을 놓고 문단문학과 대중문학의 관계에 대해 역사적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한국의 장르문학이 대중문학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둘의 차이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과거의 장르문학과 현재의 장르문학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니,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과거 대중문화의 특징과 상황 = 현재 장르문학의 특징과 상황”이라는 공식이 성립될 때에만 타당하다. 하지만 과연 이 공식이 성립하는가? ‘한국에서 장르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이야기하려면 바로 이 ‘장르문학 = 대중문학?’의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해답이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실제 문단 작품과 대중문학 작품과 장르작품에 대한 비교평가(실제비평)와 함께 다양한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이론적 틀에 입각하여 현 상황을 분석하고 논평(이론비평)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둘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실제비평은 아예 할 능력이 안된다는 것을 밝혔으며, 이론비평의 실제적 예시는 장르문학이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해외문학계도, ‘현대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8~90년대도 아닌, 광복 이전의 한국 ‘근대문학계’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근대의 한국 대중문학이 21세기의 장르문학과 같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반응이 어느 정도는 예견된 성격이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본다면 조영일 씨의 글은 마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자신의 지도를 따르지 않는 노동자들에 대한 실패한 동일시의 사례와 유사하지 않은가? 여기서 문제는, 독자가 조영일 씨의 글의 문제의식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영일씨의 그것과 전혀 다른 (라클라우의 표현을 빌자면) ‘상상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독자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한국 장르문학 평론계의 부재를 겸허히 인정하고 장르문학 평론가를 키워내거나, 해외 평론계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해외의 웹진에 접촉하여 청탁한다면 원고료와 번역료를 두 번 지출하는 부담이 있겠지만, 적어도 한국 평론가들보다 훨씬 실제적이고 내실 있는 평론을 기대할 수 있으 것이다. 그리고 이번의 경우처럼 한국의 장르문학에 대해 모르면서 자신이 배운 그대로 이론적인 비평을 기계적으로 쓰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평론은 엄연히 문학의 한 갈래이고, 또한 문학지가 추구하는 미학적 가치와 방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다. 또한 장르문학에 대한 평론이 부재하고, 장르문학의 장르비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 하에서 장르문학지를 표방하는 [판타스틱]의 역할은 장르문학이 지닌 가치가 합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비평과 평론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아마도 독자 입장에서, 조영일 씨처럼 장르문학을 문단문학에 경쟁적 관계에 있는 구도를 설정하는 것은 ‘장르문학이 지닌 가치’를 ‘합당하게’ 평가한다고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조영일 씨가 문단문학의 폐해로 든 사례들을 반박하면서, 드러나는 바이다. “또한 최근 재조명되고 있는 박상륭, 서정인, 오정의, 이외수 등과 같은 작가들이 주목 받는 이유나, 조세희, 최인훈 같은 작가의 작품들이 정말 문학적 가치가 없거나 독자의 자발적 선택을 받지 못할 만큼 떨어지는 작품인지에 대해서 실제적인 비평을 통해 이야기하지도 못했다. 최인훈은 벌써 예전에 외국으로 번역 소개되어 호평 받았고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서 그 가치를 몇 마디 말로 무시한다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검증이 된 상태이며, 조세희는 단지 문학교과서에 실렸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수능 특수와 엄청난 광고세례에 힘입어 그야말로 ‘학생들의 교과서’가 된 이문열 평역 [삼국지]가 최근에 145쇄를 돌파했는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이미 200쇄를 돌파한지 한참 지났다. 비슷한 시기에 집필된 이문구의 [관촌수필]이 30쇄 정도인 것과 비교해보면, 단순히 교과서 때문이라고 치부할 만한 일은 아니다.)” 조영일 씨 말대로라면 필시 이미 문단 이데올로기에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한 ‘독자’가 갖고 있는 일부 문단 작가들에 대한 대한 연대감은, 그것이 ‘상상적인’ 것에 불과하다손 치더라도 분명 우연한 것도, 일탈적인 것도 아니다.


 2. 환상문학의 정치적 상상력

 하나의 표본을 확대해석하지 않기 위해서, 이번에는 같은 웹진에 올라온, 분명 기성문단에 대한 명백한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는, 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칼럼을 살펴보자. 그것의 결론부는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분명 문학판에는 한때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사들의 집단이라는 월계관이 존재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아직도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그 옛날의 이야기를 발굴하려 애쓰고 있다. 하지만 모든 문화적 생산물이 그렇듯이, 캐스팅보트를 쥔 것은 결국 소비자들이다. (중략) 그리고 문학의 소비자, 즉 독자들이 조금 더 목마르고 조금 더 갈급하고 조금 더 부지런해질 때, 반드시 그들은 새로운 시대의 문학을 간택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가 왔을 때 천하의 대권을 거머쥘 이들은 환상문학의 자유 안에서 작가적 진지함을 고민하는 이들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각종 영화와 만화와 게임을 통해 이미 넓어질 대로 넓어진 소비자들의 취향을 충족시키면서도 10대를 타깃으로 쓰인 대여점용 소설로는 만족할 수 없을만큼 어른이 되어버린 이들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작가주의 환상문학 뿐이다.” 여기까지는 조영일 씨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금 만 더 들어보자. “고단하고 피곤하고 힘겨워도 그렇게 대장정의 길을 가다보면 어느새 중원에 다다라 있을 것이다. 홍대앞 인디씬과 만화판의 사례를 보건데, 그 시기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온다. 그때가 되면 여유롭게 돌아보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엔 참 막막하고 캄캄했다고. 내 이야기를 과연 누가 읽어주기나 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고. 이렇게 쓰는 것들이 단돈 몇만원이라도 될지 의구심이 들었다고. 그저 내 이름이 찍힌 책을 한번 보기나 하는 게 꿈이었다고. 그렇게 말할 때가 곧, 곧 올 것이다. 혹시 아는가.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한국영화처럼 한국 장르문학도 한반도를 제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 문학판으로 퍼져나가 일찍이 본 적 없었던 뉴웨이브를 일으킬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이지 않은가? 가령, ‘작가주의 환상소설’을 쓰는 주체가 현재의 빈약한 독자층을 상대하는 막막한 현실은, 다가올 미래 속에서 독자들을 향해 글을 쓰고 있었다는 방식으로 소급적으로, 재의미화되며 자신들의 현재 하고 있는 행위는 바로 그런 식으로 ‘사후적으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전형적인 상상적 이데올로기의 좌표가 여기서도 식별되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인디음악’이 BGM 음악화되면서, 혹은 대형 엔터테인먼트 자본의 손쉬운 ‘비정규직 노동자화’ 대상이 되면서, 벌어지는 폐해에 침묵한다(관련 논의 출처 URL)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어쩌면 더 큰 문제는 ‘작가주의 환상문학’으로 스스로를 호명하는 이러한 일군의 정치적/인문학적 ‘상상력’이 과연 문단문학의 그것과 얼마나 다르냐는 것이다.



▲ 허밍 어반 스테레오(Humming Urban Stereo)의 [Purple Drop](2006년 3월, 파스텔뮤직), 그리고 캐스커(Casker)의 [Polyester Heart](2008년 12월, 파스텔뮤직). 같은 음반사에서 출시된 이 두 장의 인디앨범의 차이는 무엇인가?

 필자가 보건대, 환상문학이라는 것이 어떤 근본적인 ‘상상력’을 통해 그것의 가치를 드높이는 것이라면, 아직도 이런 영화계나 스포츠계나 연예계에 만연해 있는 이러한 ’네이션-스테이트 내부의 상상계’에 머물러 있을 때, 거기에는 그다지 큰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저들이 조영일 씨의 문단문학 비판을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환상문학이라는 것에는,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는 ‘대여용 판타지 소설’과 변별되는 ‘작가주의 환상문학’에는,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볼 때, 표면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칼럼을 쓴 필자의 세계관이나 인식론적 전제는 대동소이하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외국 환상문학의 고급 이론과 비평 스킬을 통한 ‘훈련’이 필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들 자신의, ‘시체로 강을 메우는’(이 섬뜩한 비유는 한국 애니메이션계에서 착상을 얻은 것이다.) 치열한 노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결국 귀결점은 비슷한데, 그것은 ‘한국’ 환상문학의 르네상스를 열기 위한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작가들이 문단문학과 어떤 (정치적) 관계를 맺든 그것은 순전히 부차적인 혹은 비결정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미결정적’이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 조영일 씨가 개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고려대학교가 낳은 세계의 리더, 김연아.


 3. 조영일 씨에 대한 오독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긋남’이 발생한 것인가? 조영일 씨는 단순히 번지수를 잘못 짚고, ‘헛발질’을 한 것에 불과한가? 그게 아니라면 대체 문제는 어디에 걸려 있는가. 앞서 필자는 조영일 씨의 제스처가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노동자에 대한 실패한 동일시’에 한 없이 가깝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의 사례는, 나중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으로 보충되어야 하는데, 가령 레닌이 러시아 혁명에 개입한 행위는, 이러한 동일시 자체를 ‘재발명’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론적 개입’이란 항상 실패한 동일시를 경유해서, 그러한 동일시 틀 자체를 다시 짜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만약에, 앞으로 문단권력에 맞서 새로운 문학적 지평을 열어가야 할 ‘프롤레타리아’가 없다면, 그것을 만들어내기라도 해야하지 않겠는가? 나는 조영일 씨의 작업에 걸려 있는 내기를 그렇게 파악한다.

 그렇다면 조영일 씨의 글은 ‘실제비평’도 아니고 심지어 ‘이론비평’도 아니라는 유로스 님의 반론에 맞서, 나는 유로스님이 이론적 차원 자체의 위상을 오해하고 있다고 응수하고만 싶다. 우선 유로스 님은 리뷰 {판타스틱 2009년 여름호}에서 조영일 씨 자신이 장르적 세계에 완전히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장르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글을 기고한 것 자체가 넌센스라고 이야기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어보는 건 어떨까. 그 자체로 ‘이론적 비평’이자 ‘비평 이론’으로서 인간 주관의 취미원리의 근거를 탐색했던 ‘판단력 비판’ 자체는, 사실 저자 자신의 실제 예술작품에 대한 심미안이나 미의식에 관해서는 수준 미달이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형편 없는 시를 인용하고서는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칸트를 보라! 그러나 칸트의 글은 결코 넌센스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칸트 자신의 주관적 미감과 실제비평적 지식과 무관하게, 그의 시도는 그러한 미감과 비평이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그것의 가능조건이란 무엇인가를 음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양질의 이론비평을 “80~90년대 이후”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외국의 최신 이론경향”에 대한 습득과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부터가 필자에게는 ‘넌센스’로 느껴진다. 장르비평을 수행할 수 있는 필자를 ‘양성’해야 하며, 그것은 패션 잡지나 영화 잡지와 별도의 자족적인 영역을 형성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반이론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비평을 ‘기계적으로 찍어내려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조영일 씨의 비평이 아니라, 외국의 비평을 수입하거나, 전문 비평가를 양성하자는 바로 그러한 제안이 아닐까? 이것은 seereal님이 {[칼럼] 작가지망생들이여 홍대 앞을 보라}라는 글에서, “대장정의 길을 걷자”고 선언한 것과 유사한 감수성을 공유한다. 물론 작가가 열심히 쓰겠다는 결의를 나무랄 사람은 없지만, 필자가 보았을 때 이러한 감수성은, 마치 환상(-장르)문학계의 ‘태릉 선수촌’을 만들어서 ‘빡세게’ ‘피나는’ 노력을 하면 세계에서 장르문학 시장의 금메달을 타올 수 있지 않겠냐는 상상력에 한없이 가까워보인다. 물론 거듭 강조하지만 이러한 ‘결의’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러한 ‘스포츠적’ 상상력에서 놓치는 무언가가 ‘이론이란 무엇인가’ 혹은 ‘이론비평은 무엇인가’라는 다소 추상적인 문제와 이어져 있는 것이다!



▲ 스포츠적 상상력의 최근의 예.

 그렇다면 조영일 씨가 ‘한국에서 장르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를 제기했을 때, “왜 이 글에 정작 장르문학이 빠져 있는 거죠?”라는 질문을 던지기 전에, 그러한 제목에서 “장르문학”이 들어갈 그 부분에 보이지 않는 ‘괄호’가 쳐져 있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한국에서 (장르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혹은 ‘한국에서 (비-문단 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괄호 안에서, 물론 장르문학은 문단문학에 맞지 않는, 문단의 문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에 어긋나는 다른 문학장르들로 대체되어도 상관 없다. 이렇게 본다면 조영일 씨가 장르문학에 대해 정작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며 그것의 독자적 위상을 폄훼한다는 비난 자체는 옳은 게 되지만, 그가 정확히 그런 방식으로 장르문학의 가능조건에 대해 이론적으로 논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가 언뜻 보기에 다소 뜬금 없이 광복 이전의 근대문학계의 지평으로 소행해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을 해명해 보자. 여기서 관건은 조영일 씨가 “21세기 장르문학 = 20세기 초중반의 대중문학”이라는 등식을 애써 고안하려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들 사이에 유의미한 등식이 성립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등식’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장르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 더더욱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영일 씨의 비평은 이러한 ‘프레임’ 혹은 ‘등식’ 자체가 한국 문학사를 걸쳐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장르문학 독자들이 봤을 때 부당하기까지 한 그러한 등식은 바로 그러한 역사적 반복에 의해 초래되고 있음을 보여주지 않는가? 오히려 이러한 프레임은 문외한에게만 해당된다는 호언장담을 하더라도, 정확히 그렇게 호언장담하는만큼 그러한 프레임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가령 [자본론]에서 어떤 상품 간의 가치가 ‘등가’를 이룰 때, 마르크스의 관심사는 그러한 등가형태가 정당하냐 부당하냐, 혹은 그러한 ‘등가’가 관념적인 것이냐 실제적인 것이냐의 여부가 아니라, 정확히 그러한 등가를 성립시키는 가치형태가 어떤 사회적 배치나 시스템 속에서 출현했는지, 혹은 그러한 가치형태 자체가 관념에 불과하더라도 여전히 특정 역사적 국면에서 ‘필연적 객관성’을 지닐 수 밖에 없는지를 따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일제시대 비평가 ‘임화’가 ‘대중문학’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것을 문단문학에 대해 ‘과도기적인’, ‘보충적인’ 위치로 격하하는 양가적인 태도를 보일 때, 요점은 그러한 동일한 태도가 (특히나 장르문학에 대해) 오늘날 문단문학인들 사이에서 만연해 있으며 그러한 희극적 ‘반복’으로 존속된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장르문학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실제적인 자족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장르문학은 그러한 ‘보충적인’ 위치로서, 마치 과거 ‘일제시대 대중문학’과 동일하다는 양 그렇게 문학적 지평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상품의 등가형태는 정확히 그것이 가지고 있는 실제적 속성과 무관하듯이, 오늘날 한국의 문학세계에서 장르문학의 문학적 가치형태는 바로 그러한 과거의 ‘대중문학’ 혹은 ‘패관잡기’의 바로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프레임’이 아무리 그 자체로 관념적이고 허위의식에 불과한 거짓이라 해도, 정확히 그러한 거짓 자체가 어떤 ‘시스템’ 내부에서 ‘필연적 객관성’을 지니는지의 여부를 따지는 게, “이론비평”이 할 게 아니면 도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조영일 씨가 행하고 있는 문단문학 비판이 도대체 왜 ‘장르문학’과 무관하다고 단언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조영일 씨라는 한 비평가 개인이 장르문학의 실제적 속성을 도외시했다는 것에 불만을 가질 게 아니라, 그러한 속성을 사상해 버리는 현실적 ‘시스템’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그의 논지를 온전히 승인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허위의식은 온전히 기득권을 독점한 문인들의 몫에 불과하며, 문단문학으로 표상되는 그러한 시스템은 장르문학과 전혀 무관한 데다가, 우리 젊고 패기발랄한 장르문학인들은 남들이 오해하든 말든 자기만의 독자적 세계를 확실하게 만들어가고 있다는 그러한 의식이야말로 ‘허위의식’이라면 어쩔 텐가? 이와 유사한 궁극의 허위의식은, ‘아즈마 히로키’가 묘사한 바 있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아즈마 히로키,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문학동네, 2007년 6월)라는 정식에서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장르적 규칙들을 제 아무리 자유자재로 향유하는 오타쿠 공동체라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유의미한 소통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나름의 폐색에 빠져버리고 만다. 이것은 실상 새로운 ‘해방’이기는커녕 그 자체의 폐쇄적인 향유의 울타리 안에서 자족한 채 시장의 지분을 분배받는 것에 안주하는 극단적인 순응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이라면, (오타쿠의 세계에 명백한 공감을 표하는 히로키와 달리) 이것이야말로 문학적-인문학적 상상력의 극단적인 결핍이라면 어쩔 텐가?

 알랭 바디우가 지적했듯이,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에서 식별되는 허위의식이란, “게이의 권리는 게이만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명제에서도 발견된다. 물론 히로키라면 “오타쿠의 감수성은 오타쿠만이 안다, 자네와 같은 근대인이 이 심오한 세계를 어찌 알겠는가?”라는 식으로 자신의 명제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나라의 장르문학 작가들 역시 “장르문학은 장르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만이 논할 수 있다.”는 사고로 빠져들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이러한 허위의식에서 오늘날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만연해 있는 ‘반지성주의적’ 경향을 여기서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이 장르적 영역에 대한 ‘이론적 비평’이라는 게 심각하게 오해(오독)되고 있는 바로 그 심급에서 목격할 수 있다. 오히려 장르문학이 ‘오타쿠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한국문학에서의 나아가 세계문학에서의 온전한 ‘문학적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라면, 훈련된 장르적 스킬과 비평스킬을 기계적으로 적용할 사고방식을 버리고, 혹은 자신의 장르적 미의식에 대한 나르시즘적 상상계를 버리고, ‘문외한’의 비평과 이론에도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오히려 더 이치에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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