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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의 현주소와 미래


1. 전자책이란 무엇인가?

 ‘오호라, 여기에 글씨를 써보면 괜찮겠는데?’
 동한(東漢) 화제(和帝) 연간의 수도 낙양(洛陽), 궁정기물의 제조를 관장하는 상방령(尙方令)의 책임자 채륜(蔡倫)은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에 흥분해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물속에 한참 잠겨 불어 부드러워진 상태로 엉켜 있다가 꺼낸 나무껍질, 밧줄, 헝겊, 어망 등의 찌꺼기가 아주 가볍고 질감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동양문명 4대 발명품의 하나라는 종이가 탄생하는 순간, 기록미디어의 혁명이 일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1)
 그로부터 2천 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 문명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종이와 종이책은 또다른 도전자를 만나게 됩니다. ‘전자책’ 혹은 ‘ebook’이라 불리는, 은형신공(隱形神功)을 구사하는 강적이었죠.
 전자책이란, 글 혹은 이미지를 포함하는 콘텐츠를 종이 위에 잉크로 인쇄한 후 제본하는 형태가 아니라 디지털 파일의 형태로 가공한(종이로는 불가능한 음성파일, 음악, 플래시, 동영상 등까지 포함) 것을 의미합니다. 좀더 본질적 관점에서 넓게 정의하자면 ‘일정한 단위로 서비스하는 디지털기록물’이라 부를 수도 있겠군요.
 전자책은 부피를 거의 차지하지 않는데다 사는 즉시 읽을 수 있고 배송비가 없으며 종이책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이라는 장점이 부각되며 1999년(한국의 경우) 처음 시장에 나온 이래 빠른 속도로 보급되어왔습니다. 2000년에 30억 원에 불과했던 전자책 시장 규모는 2007년 1235억까지 확대되기에 이르렀고, 최대 전자책 서점인 (주)북토피아는 10년간 12만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전자책 DB를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IT버블 당시 전자책 예찬론자들이 입을 모아 떠들어대던 것처럼 폭발적인 기록미디어 교체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2000년 초, 일부 ‘전문가’는 전자책 시장의 규모가 2005년에는 단행본 시장의 50%인 1조 5천억 원까지 커질 것이라는 예측을 버젓이 내놓기도 했는데, 그 전문가를 지금 인터뷰한다면 뭐라고 할지 궁금합니다.
 이처럼 생각보다 전자책 시장의 개화가 늦어지는 원인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소비자(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무엇보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꽤 값이 비싼 도구(PC, 휴대폰, 전자사전, PDA, 기타 모바일기기)를 갖추고 안경을 끼어야 한다는(리더 프로그램 설치) 불편함이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언젠가 지하철에서 엿들은 대화 중 전자책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젊은 남성의 반응이 인상적이더군요.
 “누워서 못 보잖아.”




2. 전자책의 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책의 보급은 빠른 속도로 늘어날 것이 확실하며 특히 범용 도서의 경우 전자책으로의 교체는 피할 수 없는 대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승하는 원자재 가격과 물류비로 인해 종이책과 전자책의 가격경쟁력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아래 세계 전자책시장 전망 참조)


 또한 전자책의 보급은 종이의 소비를 줄여 삼림자원의 훼손을 막고 생태계를 보존하는 데 기여하기도 합니다. 최근 열성적인 전자책 전도사가 된 오프라 윈프리의 경우 이 점을 가장 강하게 언급하기도 하지요.
 관련기술의 진보도 전자책의 밝은 전망에 힘을 실어주는 요소입니다. 2007년에는 백라이트가 없는(시각적 피로를 유발하는 눈부심 현상 없어짐) 전자종이가 개발되었고, 세계 최대 온라인서점인 아마존이 자체 개발한 전자책 전용단말기 킨들(Kindle)은 360달러라는 고가에도 불구하고 2008년 한 해 동안 50만 대가 팔리며 주문이 3개월 이상 밀리는 초인기상품으로 등극할 정도입니다. 2009년 IT산업계의 화두인 스마트폰 역시 전자책 서비스 기능이 제공되면서 디지털기기 소비자들을 독자로 편입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외부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아직 국내의 전자책 서비스는 종이책을 원형 그대로 디지털화하는 선에 그치고 있습니다. 이건 기술의 부족이라기보다는 디지털콘텐츠에 대한 마인드의 결여에 기인하는 바가 더 큽니다.
 이런 질문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남도의 판소리>라는 제목의 상품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앞부분은 100쪽 분량으로 판소리의 기원과 종류, 명창들의 생애와 용어 설명에 대한 글이고, 뒷부분은 60분 분량으로 <춘향가>의 공연 실황이 붙어 있습니다. 이게 과연 책일까요, 아닐까요?
 제 생각은 그게 (형태상 전통적 의미의) 책이냐 아니냐를 굳이 가르는 것은 이제 무의미해졌다는 쪽입니다. 로맨스소설을 읽으면서 첨부된 감미로운 배경음악을 들을 수도 있고, 학술서를 읽다가 모르는 용어를 클릭하여 전자사전을 끌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게 다 한 마당에 녹아들어간다고 상상해보세요. IT산업계 사람들이 ‘전자책’이라는 표현 대신 ‘콘텐츠’라는 표현을 더 즐겨 사용하는 것도 사실 그런 고민의 산물인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앞으로 출현할 전자책은 더이상 과거의 책 형태가 아니라, 이미지, 동영상, 음악 등의 다른 문화요소와 자유롭게 결합하는 종합콘텐츠가 되어갈 것입니다.

 북토피아(와키)에서는 최근 환상문학웹진 거울 작가님들의 콘텐츠를 대상으로 흥미로운 시도를 시작했습니다. 300페이지 전후라는, 인쇄업자의 요구에 최적화된 틀을 벗어나 콘텐츠를 자유롭게 분리 가공해서 판매함으로써 독자들의 다양한 소비 취향에 맞춤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전자책이 꼭 종이책 한 권 분량을 따라가야만 할 이유는 없지요.
 이건 사실 새로운 발상이라고 말하기조차 민망합니다. 이미 음악업계에서는 이런 변화가 완전히 정착했으니까요. 10곡이 수록된 CD를 통째로 살 수도 있고, 한 곡 한 곡씩 골라서 살 수도 있잖습니까?
 날개 님의 <환상결핍증>을 시작으로 추선비 님의 <50년 전의 연인>, 임태운 님의 <황제를 암살하는 101번째 방법> 등의 단편선은 호흡이 긴 독자를 위한 통권 서비스 외에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골라 맛보기 위한 낱편 구매 서비스를 동시에 제공합니다. 더 멀찌감치서 시음하고 싶은 독자들은 정액 회원제(와키의 경우)의 형태로 읽어볼 수도 있겠지요.
 음악이나 미술에 조예가 깊은 작가분들께서는 작품과 어울리는 음악이나 이미지를 점찍어두시기 바랍니다.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작가 추천 컴필레이션 배경음악과 작가 추천 그림으로 슬라이딩 이미지 배경을 깐 복합미디어콘텐츠(더이상 ‘책’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의 서비스가 시작될지도 모르니까요.




2009. 3. 17.                    
(주)북토피아                    
마케팅 Unit 차장                    
이  주  엽                    




*1)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최근 전한 문제(文帝)~경제(景帝) 연간(BC 180~142)에 제작된 종이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종이의 발명 연대는 2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채륜이 만들어낸 채후지(蔡侯紙)가 유통됨으로써 종이에 기록하는 문화가 정착했으므로 이 사건은 정확히 말하자면 종이의 발명이라기보다는 실용화의 계기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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