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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하지만 솔직히 딱 깨 놓고 말해서 소설 쓰기는 모멸이다. 뭔가 글을 써 내야 하는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글을 써 낸 사람에게 우리 모국어는 뭐라고 말해 주는가. 이런 말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발로 썼냐?”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것과 완전히 같은 의미로 쓰이는 말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소설 쓰냐?”
 어떤 사람은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런 말을 입에 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물론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지금 어떤 특정인의 언어 습관, 파롤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랑그, 우리 모국어가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 모국어는 확실히 소설 쓰기라는 행위에 모멸을 담아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개개인은 어떤 특정인의 입에서 “소설 쓰냐?”라는 말이 나왔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고 있다.
 내 말이 너무 노골적이었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다시 한 번 대단히 미안한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심한 말도 있다. 대단히 대단히 상황에 맞지 않는 글을 써 낸 사람에게 하는 말.
 “SF 쓰냐?”
 말장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가 그냥 말장난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나는 몇 해 전부터 신상명세서 취미 혹은 특기란에 글쓰기, 작문 같은 말들을 적어 넣기 시작했다. 내가 써 놓고 독자보다 내가 더 재미있으면 취미고, 나보다 남들이 더 재미있으면 특기라고 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칸에 “글쓰기”라고 적을지는 시간에 따라 변했다. 물론 별로 읽어보는 사람은 없겠지만, 어쩌다 그것을 읽어 본 사람들의 반응은,
 “아니 누가 이런 데다 글쓰기 같은 걸 적어요?”
 하는 식이다. 차라리 영화 감상을 적지. 차라리 독서를 적지. 그러니까 그 사람이 진짜로 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웃기시네.”
 대단히 높은 수준의 글을 읽게 만들어서 한 번에 제압해 내지 못하는 한 나는 그를 웃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얼마나 높은 수준이어야 하는가? 딱 깨 놓고 말해서 유명작가 정도는 아니더라도 기성작가에 맞먹는 수준은 돼야 처음 내 글을 읽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 상대는 손쉽게 세계 명작을 구해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문제, 그런 훌륭한 글을 써 내는 데 성공했다 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그에게 읽힐 것인가? 솔직히 내 글을 읽지 않은 낯선 사람이 내 글을 읽도록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작가”라는 꼬리표를 다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말로는 글 쓰는 사람이 다 작가라지만, 작가라는 이름은 정말 아무에게나 안 붙여준다. 인터넷에서 검색만 해도 금방 정답이 나온다. ‘등단’을 해야 작가라고. 어느날 떡하니 등단을 했다고 치자. 그러면 발표할 지면이 저절로 생겨날까? 상당수가 그대로 잊혀진다고 한다. SF를 쓰는 입장에서 문제는 더 혼란스럽다. 공모전에서 상을 받아 놓고도 가끔씩 자다 말고 천장을 보고 중얼거려도 본다.
 “나는 작가일까, 아닐까?”
 누군가는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열정만 있으면 되지 그게 뭐 그렇게 모멸감 느껴지는 일이냐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또 틀린 말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열정이다. 열정을 담은만큼 우리가 써낸 글에 대한 혹평은 아프고 무관심은 뼈에 사무친다. 열정을 가득 담은 글을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프린트해서 정성스럽게 건네 보지만, 그들은 내가 써 내는 속도만큼도 내 글을 읽어주지 못한다. 딱 하루면 다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인데 진도가 잔뜩 밀려서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글을 내미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SF는 좀 어렵더라고.”
 “판타지는 잘 안 읽어.”
 좋다. 취향이 다르다 치자. 그럼 SF도 아니고 판타지도 아닌 건 왜 안 읽었을까.
 독자를 더 찾아 나설 수도 있다. “거울” 같은 데다 올리면 “장르문학”이라는 꼬리표 같은 것은 안 달아도 된다. 여기에서는 주류가 될 수 있다. 다들 취향은 이쪽이 분명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올려놓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기다려 본 결과가 얼마나 만족스러울지. 아니 질문을 바꿔서 나는 도대체 어떤 반응이 보이면 흡족해할 것인지. 다섯 자리 조회수? 두 자리 이상의 리플? 아니면 짧아도 확실한 호평?
 그런 것들은 어디를 가도 어지간해서는 기대하기 힘들다.
 물론. 쓰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게 없어도 쓸 수 있다는 것을. 그냥 어깨에 힘 빼고 저쪽에서 뭐라고 하든 허허허 하고 넘길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글을 쓴 다음에 마음을 비우고 원고를 넘기면 된다. 그러면 무슨 소리를 들어도 어지간해서는 안 아프다. 그리고 이 방법은 나이가 들수록 몸에 익는 것 같다. 이렇게 하면 계속 글을 쓸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여기에서 굳이 절필을 권해보는 것은 열정 때문이다. 모멸은 열정에 비례한다. 어떤 식의 반응을 바라든 열정을 담으면 담을수록 더 많은 것을 자주 바라게 된다. 그 바람이 클수록 냉담함에 대한 실망도 크다. 실망이 클수록 그것을 모멸로 느낄 가능성도 크다. 열정은 아마추어의 티. 좀 더 능숙한 작가라면 어깨에 힘을 빼고 슬슬슬 적어 내려갈 수 있어야 한다. 말재주 좋은 사기꾼이 설렁설렁 넘어가듯 독자를 구워삶는 문체와 플롯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면 결국은 좋은 평가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열정이란, 진짜 무언가를 만들어내게 하는 힘이다. 듣기 좋은 허풍이 아니라 진짜 무언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거울에 열정이 넘치지만 매끄럽지는 못한 글이 뜬다면 나는 좋은 평을 할 것 같지는 않다. 열정은 타인이 책임져 줄 것이 아니니까. 왜냐고? 영혼(soul)의 문제니까. 자아의 문제고.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이 내 글에 담긴 열정을 읽어 주기를 바라지도 못하겠다. 다만 열정을 많이 담을수록 더 많은 관심을 기대하게 되고 결국 모멸감만 커질 뿐이다. 그러니 절필할 수밖에.
 절필하자.


 2.

 본론은 위에 다 이야기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그냥 덧붙임이다. 참고삼아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려는 것뿐이다. 나는 뭐가 충족되면 열정을 유지하면서 글을 쓸 수 있을까?
 잃어버린 천재의 영감이 돌아오면? 내면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창작에 대한 열정? 시대정신을 읽어내고 표현하고야 말겠다는 사명감? 그런 건 여기에서 이야기할 문제는 아니다. 영혼의 문제, 자아의 문제니까 대소변을 가리듯 성인이라면 알아서 해결하고 와야 한다.
 외면의 관점에서, 나는 어떤 점이 충족되면 모멸감에도 불구하고 글을 쓸 수 있을까?
 여섯 자리 숫자 이상의 금전적 보상.
 다섯 자리 숫자 이상의 조회수.
 네 자리 숫자 이상의 고정 독자.
 세 자리 이상의 리플.
 두 자리 이상의 호평.
 대단히 미안한 이야기지만 아직 거울에서는 위에 쓴 것 중 그 어느 것도 기대할 수 없으리라고 본다. 거울은 독자 집단이 아니라 작가 집단이니까. 독자로 분류되는 사람들도 사실은 작가인 집단이니까. 정체불명의 비평 집단이나 독자 집단도 아니고 잠재적 시장이라고 할만한 규모는 더더욱 아니니 조회수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두 자리 이상의 숫자로 표현될 수 있는 무엇인가는 생각하지 않는 게 낫겠다.
 거기까지 마음의 준비를 한 다음 다시 물어보자. 나는 외적으로 어떤 여건이 충족되면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을까? 거울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열 명 안쪽의 사람들.
 내 글을 종이 위에 앉혀주느라 서로 머리를 맞대는 몇 명의 사람들.
 ‘여기는 폐허가 아니라 공간입니다.’ 하고 메아리도 별로 없는 외침을 던져대는 한 명의 편집자.
 그리고 단 한 사람의 지음(知音).

 3.

 아,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글을 얼마나 잘 읽어주고 있었던가.





배명훈님은 제2회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전에서 "스마트 D"로 단편 부문을 수상하셨습니다. 거울 30호부터 시간의 잔상 필자로 합류하신 후 꾸준히 뛰어난 SF 단편들을 발표해오고 계십니다.
댓글 10
  • No Profile
    yunn 06.06.04 09:15 댓글 수정 삭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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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a 06.06.04 11:48 댓글 수정 삭제
    읽으면서 구구절절히 공감했습니다. 워낙 구구절절히 공감해서 지금 생각나는 것들을 다 풀어쓰려면 아주 길어질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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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6.04 15:35 댓글 수정 삭제
    많은 생각들을 들려 주세요. 지금 바로가 아니라도 언젠가 기회가 될 때.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을 울리는 작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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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진 06.06.04 20:58 댓글 수정 삭제
    평소 배명훈 님이 소설들에 덧글을 다는 것에 대해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글쓰기에 대한 웬만한 애정이 아니면 힘든 것 같아요. 늘 노력하고, 늘 고민하시는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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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약간 어렵네요. 하지만 배명훈님같은 분이나 우수단편선정단분들이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뭐 그러기 전에 저도 다른 사람 글을 좀 읽고 감상을 달아야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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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선비 06.06.04 23:57 댓글 수정 삭제
    생각할 거리가 여러가지, 계속 곱씹어서 생각할 것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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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영 06.06.05 14:45 댓글 수정 삭제
    아, 글 쓰는 사람들은 다 비슷한 생각 하는 모양이네, 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절필 선언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지경에 이르르면....후후.. 어쨌든 상관없어, 라는 단계에 이르르게 될지도.(어쩐지 암울모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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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ndmeer 06.06.05 16:56 댓글 수정 삭제
    확실히 내 글은 누가 읽고 비평해주길 바라면서 남의 글 읽는 데에는 너무 게으릅니다. 반성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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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완 06.06.06 00:24 댓글 수정 삭제
    흐흐.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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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니 06.06.22 05:20 댓글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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