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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의 본질은 ‘공상’에 있지 않을까




  저는 평소에는 그냥 SF를 SF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SF’라는 약자를 순우리말이나 한자어로 풀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역시 ‘공상과학’이 옳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문기자로 일할 때 SF를 그렇게 풀어써야 할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때 몇몇 SF 팬들이 ‘장강명 씨도 공상과학이라고 하는구나’ 하고 서운해 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과학소설’이라는 직역은 저한테는 괴상하게 들립니다. 일단 SF영화, SF만화, SF게임을 과학소설영화, 과학소설만화, 과학소설게임이라고 풀어쓰면 이상해지지 않나요. 게다가 저는 ‘과학소설’이 별로 정확한 번역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휴고 건즈백이 SF라는 단어를 만들 때 ‘과학소설’이라는 의미로 조어(造語)했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언중(言衆)이 원작자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잘된 번역이 원문보다 더 개념을 정확히 가리키기도 하죠.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SF 소설이나 영화를 건즈백과 그의 잡지 《어메이징 스토리스》 독자들이 봤다면 고개를 갸우뚱할 것입니다. ‘이게 SF라고?’ 하면서요. SF의 개념은 1920년대에서 꽤 멀어졌습니다. 건즈백은 작가일 때 《랄프 124C 41+》를 썼습니다. 그에게 SF란 ‘언제나 교육적이고, 알기 쉬운 형태로 지식을 제공하는 소설’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도 SF가 그런가요?


  도대체 ‘과학소설’이라고 할 때 ‘과학’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그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과학과 같은 말일까요?

  우선 ‘과학적 고증에 충실했다’는 뜻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팬들이 좋아하는 SF일수록 과학적 오류가 넘칩니다. 하드 SF도 예외는 아닙니다. 작정하고 덤벼들면 아서 클라크의 작품에서도 과학적 오류를 수십 개는 찾을 수 있습니다. 스타차일드니, 오버마인드니 하는 것들은 도대체 어떤 과학적 근거로 광속을 뛰어넘어 정보를 전송할 수 있는 건가요. 그게 과학적 엄밀성이라는 차원에서, 공포소설에 나오는 유령이나 귀신과 다른 게 있나요.

  《중력의 임무》에는 그런 행성에서 어떻게 생명체가 나오고, 어떻게 지성을 갖추도록 진화한 건지, 그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하나라도 있나요? SF 팬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항변이라 봤자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정도일 겁니다. 그게 과학적 고증인가요?

  우스개 같지만 차라리 과학적 고증에 가장 충실한 소설은 순문학들입니다. 《죄와 벌》이나 《전쟁과 평화》에 과학적 오류는 없으니까요.


  어떤 팬들은 ‘과학소설’에서 과학이 가리키는 말이 고증이 아니라, ‘과학적 상상력’을 뜻하는 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게 좀 비겁한 변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과학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좀 과학적이긴 하지”라는 정도의 말입니다. 여기서 과학은 유사과학, 사이비과학까지 아우릅니다. ‘철학 SF’라는 타이틀을 달고 국내에 소개된 콜린 윌슨의 《정신기생체》 속 과학은, 어떻게 봐도 사이비과학입니다.

  대체 ‘과학적 상상력’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가 뭘까요? 과학적 정합성을 상당히 중시했다는 말일까요?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현실로 이뤄질 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초광속통신이니 아공간도약이니 하는 말을 쓸 때 과연 SF 작가들이 자신들의 세계관이 상대성이론에 부합하는지를 따져볼까요? 타임 패러독스물이나 대체역사물들은 어떻게 봐야 하나요?

  혹시 ‘과학적 상상력’이라는 말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정교한 외삽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외삽이라는 사고 도구와 과학은 서로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겹치지 않는 부분도 많이 있잖습니까? 오히려 검증 불가능한 가설이야말로 과학의 바깥에 있는 것 아닌가요?

  아니면 이 장르의 상상력에 있어서 과학적 방법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뜻일까요? 누군가 앤서블이라는 장치를 처음 도입하면 다음 작가는 이 가설을 검증해서 보완하고, 그런 사고실험을 통해 초광속통신이라는 개념을 점점 정교하게 발전시키는 것이 SF사(史)에서 중요하다는 의미일까요? 동의하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저는 기껏 해봐야 과학적 상상력이라는 말은 ‘과학적인 분위기가 나는 상상력’이라는 정도의 뜻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SF의 본질이라고 믿습니다. ‘과학은 아니지만, 과학적인 분위기가 나는 상상력’이 있는 소설. 그 상상력이 비록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이라도.

  그리고 그 과학적인 분위기란 다분히 인습적이고 피상적인 것입니다. 미스릴 갑옷은 그 분위기가 안 나지만 비브라늄 방패는 분위기가 난다는 식이죠. 따져보면 두 아이템 모두 과학적 근거는 비슷합니다. ‘분위기’가 다른 것뿐입니다.

  여기서 잠깐. 그러면 그게 공상―‘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생각’―과 다른 점이 뭐죠.


  과학적 상상력과 공상의 다른 점은 이런 것입니다. ‘공상’이라는 말에는 멸시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일부 팬들이 분개하는 것.

  몇몇 SF 팬들은 ‘공상과학’이라는 말을 버리고 ‘과학소설’이라고 쓰면 SF라는 장르가 지금보다 더 존중받을 거라고 믿습니다. 즉, 이것은 기실 인정투쟁과 관련된 얘기였던 것입니다. 용어의 정확성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그리고 모든 인정투쟁이 그러하듯이, 이 인정투쟁의 밑바닥에는 열등감과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저는 이런 팬들의 태도가 두 가지 점에서 잘못이라고 봅니다.

  첫째, 위에서 살펴봤듯이 ‘공상과학’이라는 용어가 ‘과학소설’이라는 말보다 더 정확한 개념입니다. 우리는 ‘로맨스소설’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그 소설의 핵심 사건이 로맨스일 거라고 기대하며, ‘역사소설’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역사적 배경이나 사건이 주요하게 나오겠구나 하고 예상합니다. 공포소설, 무협소설, 액션소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과학소설’이라는 말을 들으면 과학을 다룬 소설을 떠올립니다. 찰스 다윈의 비글호 여행을 소재로 한다든가, 유럽입자물리연구소 과학자들의 일상을 소설화했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그런데 SF는 과학을 제대로 다루지 않습니다. SF의 가장 큰 재료는 과학이 아니라 ‘과학적 분위기가 나는, 그러나 현실 세계의 과학과는 큰 관련이 없는 공상’입니다. 그리고 로맨스소설, 역사소설, 공포소설, 무협소설, 액션소설과 달리 ‘과학소설’이라는 용어에는 단어가 가리키는 본질이 빠져 있습니다.

  둘째, ‘과학소설’이라고 불러봤자 다른 사람들의 눈길은 바뀌지 않습니다. 《빅뱅 이론》이나 《갤럭시 퀘스트》를 봤으면 알지 않나요. SF를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부르는 나라에서조차 보통 사람들이 SF 팬에게 어떤 시선을 보내는지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의 제안은 이렇습니다.

  우선 불필요한 열등감을 버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SF 작가나 팬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SF에 관심이 없습니다. 간혹 SF 팬을 그냥 약간 웃긴다고 보는 정도입니다. 자기들이 보기에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SF팬들은 굉장히 진지한 태도로 임하니, 그 간극이 우스워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SF의 주제와 소재들이 ‘우주적으로’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다음으로,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는 게 좋습니다.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면 우리가 어느 바닥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보다 정확히 이해하게 됩니다. 창작과 감상, 비평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려면 장르의 본질적 특성을 파악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SF의 본질은 과학에 있지 않습니다. 좁은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력, 내적 논리 외에 다른 것들로부터는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에 있습니다. SF에서 이 본질은 과학을 훌쩍 넘어서며, 종종 노골적으로 과학을 건너뛰거나 무시하기도 합니다. 이 본질을 인정하지 않을 때 손해 보는 사람은 다름 아닌 SF 작가와 팬입니다.

  SF에 관심을 가져보려는 예비 독자들 역시 피해자입니다. ‘SF는 어렵다’(학교에서 어렵게 공부했던 과학을 다루기 때문에), ‘SF는 황당하다’(과학인 줄 알았는데 유사과학이 나와서)는 오해 중 상당 부분은 오히려 ‘과학소설’이라는 용어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저는 ‘과학소설’보다 ‘공상과학’이라는 번역을 선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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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강명님의 기고 원고입니다. 거울 필진의 글이 아니지만 장르에서 많이 다뤄온 쟁점 중 하나에 관한 글이라 의미가 있다고 판단하여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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