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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배명훈 세계를 읽기 (1)

2019.12.15 00:0012.15

배명훈 세계를 읽기 (1)

pena

그때그때 따라가지 않으면 곧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성큼성큼 길을 가는 작가가 있다. 그중 한 명이 배명훈이다. 꾸준히 여러 지면에서 고른 완성도의 작품을 발표하여 차곡차곡 쌓고 출간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때그때 따라갔다면, 워낙 광범위하고 많은 작품들이 줄지어 서 있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작품에 감탄하기 바빴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배명훈 작가의 (거의) 전작을 읽을 기회(또는 읽어야만 하는 의무)가 생겨, 한 작가의 궤적을 기억이 바래기 전에 밟아나가는 영광을 누렸다. 이렇게 읽었을 때에만 보이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작품 한 작품을 깊게가 아니라, 모든 작품을 얕고 넓게 조망했을 때에 보이는 것. 그렇게 내가 본 것, 작품들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생각한 배명훈 작가의 세계에 대해 풀어놓고자 한다. 비평과 이론적 기반이 탄탄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드넓은 배명훈 세계(또는 우주)에 점점이 흩어진 듯 보이는 별들 사이를 잇는 길을 제시하는 역할이 되는 글일 것이다. 이렇게 선을 이어놓고 보니 더 재미있다면, 그리고 다른 길을 제시하는 시작점이 된다면 좋겠다.

배명훈 세계의 큰 줄기를 읽기

배명훈 작가의 특징 중 하나는 한 주제나 한 소재를 잡아서 여러 작품에 걸쳐 다듬고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작가 본인은 B컷이어도 작품을 완성하고, 그 작품에서 미진하거나 더하고 싶었던 것은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는 식으로 작업을 한다고 밝힌 바가 있다. 물론 각각의 작품은 그 작품 하나로서 완결성을 가지고, 작품들 각각이 다른 매력을 갖고 다른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또한 뚜렷하게 몇 가지 주제와 소재가 공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김은경만 배명훈의 주인공이 아니라, 그 주제와 소재들이 배명훈 세계의 주인공이자 별자리를 잇는 선이다.

공통적인 주제와 중심 소재를 따라 배명훈 작가의 작품들을 분류하면, 대략 다섯 가지 계열로 나눌 수가 있다. 물론 각 계열에 속하는 작품이 깔끔하게 딱 떨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몇 계열에 걸쳐 있거나 그 다섯 가지 계열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작품들도 있다는 것은 미리 밝혀야 할 것이다.

첫 번째, 도시와 정치 계열이다. 배명훈 작가를 말할 때 가장 초기의 대표작들, 가장 유명한 작품들이 이 분류에 속한다. 『타워』, 『총통 각하』에 실린 단편들, 그 외에도 「외합절 휴가」, 「예비군 로봇」, 「두 도시 이야기」, 『맛집 폭격』, 『은닉』『첫숨』까지도 이 계열에 넣을 수 있다. 『첫숨』은 도시와 정치보다는 다른 특성이 더 강해서 다시 한 번 나올 예정이다. 이 계열 작품을 읽은 사람들은 배명훈 작가가 외교학과를 나왔고 국제정치학을 전공했고 미래전략연구소 같은 직장에 다녔으며 뉴욕에 몇 개월 살아보았다는 말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인다. 현실과 닮았지만 외교적이거나 국제적이거나 정치적인 방면으로 새로운 시야를 선사하며 많은 경우 그래서 풍자적인 느낌을 주는 계열의 작품들이라는 뜻이다.

두 번째는 중력 계열이다. 대표적으로 『청혼』, 『첫숨』, 「예술과 중력 가속도」가 속해 있다. 우주 공간을 배경으로 하거나, 우주 공간이나 지구가 아닌 별에 살았던 생명체들이 주요하게 등장하며, 중력이 그 안에서 아주 중요한 팩터로 작용하는 이야기들이다.

세 번째 계열은 고고심령학 계열이다. 「누군가를 만났어」에서 처음 등장했고, 장편소설로 『고고심령학자』가 있다. 고고학은 고고학인데 옛 유령이나 존재의 흔적을 통해 과거를 발굴하는, 배명훈 작가가 창안한 학문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 역사심리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낸 아이작 아시모프가 바로 떠오른다. 아직 책으로는 묶이지 않았지만, 「원본증명」도 고고심령학 계열이다.

네 번째는 서술자 계열이다. 아직 장편이나 단편집으로 묶인 것이 없지만, 「수이」, 「고양이 플롯」, 「서술의 임무」(이전 버전 「스윙바이」) 등의 단편이 속해 있다. 이 작품들은 작품 안의 세상을 규정하고 서술하는 서술자의 존재 자체를 걸고 넘어진다. 작품 속 세계를 만드는 것은 작가이고, 작품 속 세계를 살아가는 것은 인물이며, 작품 속 세계와 인물들을 통합한 작품을 받아들이는 독자라고 나눌 때, 이 세 가지 모두에 걸친 ‘작품 속 세계’가 작가와는 분리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이야기들이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문학의 시점이나 화자에 관한 이야기와도 연결되고, 세상을 받아들이는 철학하고도 연관되며, 뭐라 이해시키기 어렵다. 그래픽노블이나 영화나 연극에서는 제4의 벽을 넘는 인물이나 이야기로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겠으나 그것하고도 또 다르다.

다섯 번째는 예언자 계열이다. 배명훈 작가의 작품 중 SF보다는 판타지에 가까운 작품들이나, 예언자나 멸망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여기 속하는데, 장편으로는 『신의 궤도』, 단편으로는 『총통 각하』에 실린 「Charge!」나 「위대한 수습」, 『안녕! 인공 존재』에 실린 「매뉴얼」 같은 작품을 들 수 있겠다. 「예언자의 겨울」「조개를 읽어요」도 넣을 수도 있겠다. 예언자 계열은 중력, 고고심령학, 서술자보다는 좀 더 느슨하게 모은, 좀 더 피상적인 유사점을 좇아 모은 작품군이다. 이는 작가 본인의 말이나 작품 후기 등으로 이 작품들이 멸망이나 예언자가 등장하긴 해도 그 뿌리나 지향점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어서 덧붙이는 사족이다.

이 다섯 계열에 속하지 않는 작품들은 큰 주제를 다루기 전에 좀 더 작은 주제를 건드려보는 와중에 쓴 작품이거나(장편들의 프로토 타입이 되는 무수한 단편들과 새로이 다루어보는 주제들을 다룬 최근 단편이 여기 속한다), 거의 모든 것에 걸쳐 있는 작품(『신의 궤도』라든가, 이미 도시 정치 계열에 넣었지만 사실상 배명훈 월드의 원형들이 빼곡히 모인 『타워』가 여기 속한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큰 줄기들을 분류하면서 배명훈 작가의 작품들을 읽으면 이런 즐거움이 있다.

일단, 한 주제를 한 뛰어난 작가가 이렇게 저렇게 파고들어서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보는 식으로 즐길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세계를 움직이는 힘과 원리에 대해 다루는 작품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배명훈 작가가 서술자 계열의 다음 작품에서 어디까지 그것을 다룰지, 그 어려울 수 있는 작업을 어디까지 소설적으로 재미있게 풀어내줄지를 기대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이 큰 줄기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주제와 소재를 다룬 작품을 만났을 때, 배명훈 작가가 그 작품만으로 끝내지 않을 거라는 것을 믿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했던 이야기는, 이 작품에서 만난 세계는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변해서, 커져서, 정교해져서. 예상하는 즐거움도 있겠지만, 예상을 훨씬 넘어서는 완성형에 기분 좋게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즐거움 또한 필연적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공통 요소를 따라 읽기

아래 단어들은 배명훈 작가의 (거의) 전작을 읽으면서 서너 작품 이상 반복되며 나타난 요소를 적어둔 것이다. 공통 재료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삶의 모습이 어디나 비슷하고, 삶을 재현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습도 비슷할 수밖에 없으나, 그걸 넘어서 자주 등장하면서도 배명훈 작가만의 변형을 가한 것들만 썼다.

  • 종교
  • 코스모마피아 - 혁명
  • 권력장
  • 고고심령학
  • 전쟁
  • 인도India
  • 인공위성
  • 전파망원경
  • 우주로 돌아가는 사람
  • 멸망을 전하는 사람. 예언자
  • 우주 또는 다른 세계에서 날아오는 멸망
  • 서술자
  • 다섯 개의 이름을 가진 악마
  • 배우들: 김은경 외에도 은수, 미성이, 최신학
  • 선 - 경계선, 전선, 춤선
  • 음식
  • 매뉴얼
  • 디코이

모든 작가에게는 선호하는 소재가 있고, 잘 안 풀린다 싶으면 자기도 모르게 따라가는 전개가 있다. 특히나 배명훈 작가는 같은 주제를 여러 이야기에 걸쳐 탐구하고 발전시킨다는 이야기를 이미 했으니, 공통요소가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바꿔 말하면, 배명훈 작가의 이야기는 계속 나아가고 있으므로, 똑같은 사물이나 똑같은 이름의 사람이 등장했다고 해서 똑같이 쓰였을 리가 없다. 그 변화를 따라가는 것이 재미있다.

예를 들어 가장 널리 알려진 공통요소인 인물을 보자. 잘 알려진 김은경 이외에도 배명훈 작가의 작품에는 자주 등장하는 이름들이 있는데, 조은수, 미성이, 최신학 등이다. 이들은 이름이 같지만 같은 사람이 아니다. 보통은 한 작가의 작품 안에서 이름이 같은 인물이 나온다면 동일인물일 텐데, 그렇지 않다. 그렇게 이름이 같지만 다른 사람인 인물들을 연달아 보다 보면 이들이 배명훈 세계에서 역할을 부여받은 배우라는 느낌이 든다. (이는 사실 작가 본인이 배우 김은경의 인터뷰를 쓴다든지 하며 승인하고 조장한(!) 해석이다.) 배우는 맡은 역할에 따라 무한히 변신하는 직업이라 이 작품의 이 배우와 저 작품의 이 배우가 완연히 다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기본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유사성은 있어 그 법칙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다. 나는 간단한 꼬리표를 배우마다 달아두었는데, 이 꼬리표가 스포일러나 함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을 생각이다.

인물이 배우라는 느낌이 든다는 것은, 고유하고 독특한 한 인간의 내면을 통해 세상을 보여주고 독자와 교감하는 식의 접근방법과는 정반대 효과를 일으킨다. 이 인물들의 내면이 아니라 이 인물들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게 만드는 외부, 판, 세계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인공이고 진짜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한다. 거기가 아니라 여기를 보라고 가리키는 지표다. 이 인물들은 어쩌면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일 수 있었는데, 이런 세계에 던져져서 이런 일을 직면하면 다르게 반응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등장인물- 배우 말고 다른 공통요소들도 이런 식으로 각 작품마다 어떻게 다른 식으로 해석되거나 등장하는지 좇아가면 재미있다. 이 또한 앞의 큰 계열 따라 읽기와 비슷한 즐거움이다. 같은 것이 왜 다른 세상에서 이렇게 달라지는가, 어디까지 달라질 수 있는가. 그리고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다면, 우리가 원래 생각하던 그것의 관념은 얼마나 편협하고 좁은 것이었나.

배명훈 작가는 누구나 다 아는 것, 보통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쉬운 식재료로 완전히 다른 음식을 내놓고, 아주 짧은 거리밖에 못 갈 것 같은 탈것으로 우주 건너편까지 간다. 그 변환이 참으로 능청맞고 스무스하기 때문에 잘 따라가야 한다. 놓쳐도 놀라고 경탄스럽겠지만, 찬찬히 따라가면 지적 즐거움도 얻을 수 있다.

특징과 매력을 따라 읽기

배명훈 작가가 누구나 아는 재료로 모르는 요리를 내놓는 것은 그의 작품들이 지닌 몇 가지 매력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나는 이것을 포함하여 아래와 같은 요소들을 배명훈 세계가 아닌 배명훈 소설의 매력으로 꼽는다.

  •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전하기
  • 방향을 바꾸어 보기
  • 세상으로 인간을 그리기
  • 무력이 아닌 것으로 활극하기
  • 우주에 대한 오해 풀기
  • 고결함과 미덕을 잃지 않기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무슨 이야기인지 쉽게 알 수 있는 것들이고, 해당하는 예를 들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공허하고 의미 없는 것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음에는 개별 작품들 안에서 나타나는 배명훈 작가 소설의 매력을, 위의 공통요소와 더불어 짚어보도록 하겠다.

댓글 6
  • 경희 19.12.14 23:56 댓글

    으아아, 너무 멋진 심층 리뷰네요. 한 작가의 작품을 쭉 늘어놓은 다음 공통점을 뽑으면 그게 삶의 철학이고, 차이점을 뽑으면 그게 성장해온 경로라고 생각하는데, 마치 그걸 완벽히 정리해주시는 듯한... 0_0

  • 경희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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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pena 19.12.15 06:31 댓글

    와, 이 글이야말로 제 작업을 완벽히 정리한 한 줄이네요.

  • No Profile
    바람별빛 19.12.15 00:02 댓글

    와~! 너무 좋아요. 다음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 바람별빛님께
    No Profile
    글쓴이 pena 19.12.15 06:31 댓글

    감사합니다!

  • 경희 19.12.15 22:50 댓글

    서술의 임무는 읽어보지 못했는데 스윙바이와 많이 달라졌나요?

  • 경희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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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pena 19.12.16 16:09 댓글

    스윙바이를 얼핏 기억하기 때문에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