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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시작과 함께 극소수의 관심을 받는 연례행사로 신춘문예를 들 수 있다. 올해 2019년에는 작은 화젯거리가 생겼는데 천문학을 소재로 한 시가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가 표절 시비가 일어난 후 당선이 취소된 일이 있었다(1). SF시(?)가 화려하게 탄생할 뻔하다가 좌절된 아쉬운 사건이다.

응모자가 출처를 사전에 알리지 않았으므로 심사위원이 표절 여부를 알 리가 없었을 테니 결국 과학적인 소재를 쓴 시를 뽑았던 셈인데, 심사평을 보면 “완성도가 상대적으로 미진한 대신 참신성이나 발전 가능성은 더 높게 보였다”고 이유를 밝혔다(2).

심사평에서 기시감을 느껴서 검색을 해봤다. 201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는 「상식의 속도」라는 단편이 당선되었다. 심사평을 보면 ‘활달한 상상’, ‘누구도 가보지 못한 소설 문학의 땅을 굴착’했다고 극찬을 했다(3). 과학소설 팬덤에서는 참신한 상상도 아니고 새로운 영역을 굴착하지도 않은 글인지라 반응이 썩 좋지 않았고(4) 과학소설 공모전에 응모했다면 광속을 넘은 ‘상식의 속도’로 예심에서 탈락했을 글이기에 적절한 매체를 찾아서 좋은 결과를 얻은 것 같다.

어쨌든 최근 사례를 보면 문단에서 다른 장르에 비해 유독 과학소설을 잘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조사부족으로 처음이라 단정하긴 힘들지만 과학소설이 신춘문예에 당선된 유명한 예로는 2008년 동아일보에서 조현의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이 당선된 바 있다. 심사평을 보면 ‘기발한 발상’, ‘재기있는 구성’ 등 역시 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5). 반면 위의 예와 달리 이 단편은 SF 팬덤에서도 찬사를 받았고 조현은 문단에서 활동하면서 SF 무크지 『미래경』에도 작품을 실은 바 있다.

또한 2010년 1회 젊은작가상에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가 선정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사례다. 수상작품에서 본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역시 참신하고 튄다는 식의 심사평이 있었던 것 같다. 다른 별에서 쓴 것 같다는 표현도 있었고. 이에 대한 배명훈 본인을 비롯한 SF작가의 반응은 거울에 실린 인터뷰에도 있다. 통통 튀면서 살아야 되는 건지(6).

사실 문단에서는 과학소설을 유달리 구분하려고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복거일이 중간과정을 생략하고 장편소설을 출간하여 화제가 되었고, 듀나 역시 등단과정 없이 문지에서 단행본을 출간했다. 돌아보면 문단의 SF 수용 과정에선 〈우주항공 과학소설〉 시리즈 같은 실패 사례도 있고 창비를 위시한 청소년문학 쪽에서 성공 사례가 꽤 있다. 심지어 이젠 청소년 문학작가로 오해받을지도 모르는 듀나의 경우 창비 청소년문학 시리즈도 계속 책을 내는데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면 출판될 수 있어서’라고 밝힌 바 있다(7).


어쨌든 우선 2000년대 이후, 특히 2010년대 이후 과학소설이 문단에 편입되는 징후가 점점 뚜렷해지고 있음은 사실이라서, 대표적인 사례를 정리해봤다. 꼭 들어가야 하는데 빠진 사례가 있으면 댓글로 알려주길 바란다.

  • 과학소설 작가가 문단에 받아들여진 경우 : 복거일, 듀나, 배명훈, 정세랑
  • 문단에 들어간 다음에 과학소설을 씀 : 송경아, 윤이형, 박민규, 조현, 장강명
  • 과학소설을 언급한 문단 인물 : 김성곤, 복거일, 정과리, 박상준(포항공대 교수), 박진, 정재승(문학은 아니지만 저명인사)
  • 수상하거나 후보가 된 경우(신춘문예는 위에 언급했으므로 생략) : 태평양 횡단특급(동인문학상 후보), 안녕 인공존재(젊은작가상 수상),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문학동네 작가상 수상)

사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사건’이라 불릴 복거일의 데뷔 경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문단 출판사는 투고를 받아 소설을 출간하지 않는다. 신춘문예나 거대 출판사의 신인상 등 문단의 심사과정을 뚫고 들어온 작가 및 작품만 출간의 기회를 얻는다. 복거일은 시인으로 등단했다고는 하지만 소설을 한 편도 발표하지 않은 상태임에도 완성한 장편소설 『비명을 찾아서』의 원고를 출판사에서 그대로 출간해주는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진다. 그것도 무명의 중소 출판사가 아니라 문학과지성사다. 해당 출판사의 과학소설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았는지 듀나 역시 등단과정 없이 문지에서 단편집 『태평양 횡단특급』을 내면서 문단에 진입하게 된다.

배명훈은 문단에서 등단과정으로 인정하지 않는 과학창작문예 수상으로 데뷔, 장르소설 잡지 〈판타스틱〉에 단편을 싣거나 단행본 출간을 거치며 일단 독자의 지지를 받은 다음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 기준에서 정식으로 등단한다. 정세랑도 비슷하게 〈판타스틱〉 출신으로 책을 먼저 내어 독자 쪽의 지지를 얻은 다음 적절한 문학상을 통해 일종의 ‘문단의 인정’을 받는 과정을 거쳤다.

송경아, 윤이형, 박민규 등은 등단 과정을 거친 다음 활동하면서 과학소설을 발표했다. 조현은 위에 언급했듯 SF로 신춘문예 당선, 이후에도 과학소설을 썼다. 장강명은 SF웹진을 운영한 팬덤 출신이지만 이 경력을 활용했거나 과학소설로 데뷔하지 않았기에 이쪽으로 분류했다.

김성곤 교수는 이상문학상 심사위원을 맡으면서 아서 C. 클라크를 언급하는 등 장르소설에 대한 조예를 보였는데 사실 국문과가 아니라 영문과 교수라는 점에서 등단 기준에선 외부 피를 수혈한 경우일 수 있다. 영화 비평서를 내거나 스티븐 킹을 높게 평가하는 등 대중문학과의 접점이 깊은 인물이다.

비평가 정과리는 인터뷰에서 “추리나 SF가 한국에서 빨리 정착해서 대중문학이 자기 세계를 만들고, 소위 본격문학과 경쟁하는 관계를 이루어야 해요”라고 발언했다(8). 인터뷰를 읽어보면 자아비판인지 유체이탈 화법인지 정과리 본인도 ‘본격 문학의 틀 안에서 적당히 얘길 할 뿐, 대중적 장르의 문학작품이 어떤 식으로 생존하고, 나아가고, 이것이 본격문학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에 대해선 거의 이해 못하고’ 있지만 어쨌든 언급이라도 해주니 고맙다고 해야 할지 그런 상황.

포항공대 교수 박상준은 SF어카이브 대표와 동명이인인데 웹진 크로스로드의 편집위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해 사실상 과학소설 내부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로스로드 단편집의 해설도 다수 썼다.

비평가 박진은 듀나의 소설에 여러 번 해설을 쓰면서 듀나를 높이 평가했다. 『장르와 탈장르의 네트워크들』이라는 대중문화 비평서를 냈는데 영화, 애니메이션을 포함한 SF에 대해서도 큰 비중으로 다루었다. 원본은 보지 못했지만 alt.SF의 기사에 따르면 「장르문학에 대한 오해와 편견 - 그는 왜 『키메라의 아침』이 SF가 아니라고 주장하는가?」라는 글을 통해 문단소설이라도 SF로 분류되는 것을 거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9).

정재승은 문단 내부인은 아니지만 저명인사로 장르소설을 추천하는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주 언급했고 김탁환과 협업으로 과학소설 『눈먼 시계공』을 썼다. 김탁환도 문단 외부에서 내부로 받아들여진 작가인데 구체적 내용은 후술하겠다.


이런 사례를 보면 현재 한국문단에서 과학소설이 거의 유일하게 문단 내부에 받아들여지는 장르소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문단 내부’라는 표현은 이른바 문단의 거대 출판사에서 내는 문예지, 단편집, 장편 단행본 등을 뜻하며 이른바 저명한 문예평론가가 평론을 하거나 언급해주는 작가 혹은 작품을 의미한다. 장르소설은 편의에 따라 판타지/환상소설, 호러/공포소설, 미스터리/추리소설, 로맨스, 무협, 그리고 SF/과학소설을 가리키도록 한다. 라이트노벨, 웹소설과 같이 내용이 아닌 형식으로 분류하는 장르는 뺀다. 넣는다고 해도 문단에서 무시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겠지만.

어쨌든 나름의 팬덤을 갖추고 성취를 이룬 추리소설, 막대한 독자를 거느린 로맨스와 BL, 20대 남성이 유일하게 돈을 써주는 라노베와 웹소설을 문단에서 열심히 무시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과학소설만 인정하고 있는 상황은 흥미롭다. 위의 심사평에서 보이는 ‘참신하고 활달하고 새롭고 기발한’ 같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판단 말고도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웹진 텍스트릿의 〈지금, 여기, 한국의 SF〉(10)는 SF 장르가 인기를 얻는 이유를 살펴본 글이지만 문단에서 인기가 있는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느꼈다. 결과적으로 이 글은 맨 위의 SF시(?) 수상취소 사건과 함께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고, 그래서 인터뷰나 통계자료 등 근거의 뒷받침이 없는 개인의 추론에 불과하지만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생각해봤다.

1. 중단편 위주라서

문단소설의 중심은 문예지이고 문예지의 중심은 단편소설이다. 근거자료는 없지만 한국은 단편소설이 많이 발표되는 편이라고 한다. 신춘문예도 문학상도 단편이 중심이라 확실히 비중이 크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이유도 있고 분량 문제도 있기에 장르소설이 문단에 소개되려면 단편부터 시작하는 쪽이 적절하다. 지나치게 긴 글은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를 사로잡기 힘들기 때문이다.

과학소설은 중단편의 비중이 매우 높은 장르소설이다. 장편도 단행본 분량 1권이 대부분이고. 판타지, 무협의 경우 많게는 수십 권에 이르는 장편이 주를 이루고 있어 독자의 진입장벽이 높다. 로맨스는 장르의 특성상 중단편이 성립하기 어렵기도 하다. 사람의 감정과 애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야 하는데 짧은 분량으로 독자의 감정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으니까.

웹소설도 마찬가지로 작품의 수도 개별 작품의 분량도 엄청나므로 문단에서 일일이 읽고 비평이나 분석을 하기가 어렵다. 결국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사람이 평을 하는 촌극이 벌어진다(11).

따라서 중단편이 많은 과학소설이 문단에 소개되기 유리하지 않을까 싶다. 다만 중단편 위주라는 기준은 공포소설과 추리소설도 충족하므로 이어지는 이유를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추리소설은 단편이 활성화된 장르이고 장편도 같은 탐정이 등장할 뿐 각자 개별 이야기인 경우가 많아 진입장벽이 낮은 편이다.

2. 클리셰가 비교적 적어서

문단 독자에게 장르소설의 클리셰는 독서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클리셰란 해단 장르의 독자에게는 친숙한 요소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에게는 유치하거나 도식적이거나 구태의연하다고 느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클리셰가 많은 판타지나 미스터리는 읽는 사람만 읽고 안 읽는 사람은 안 읽는 소설이 되기 쉽다. SF는 클리셰가 비교적 적은 작품을 미래소설, 우주소설, 과학스릴러 등으로 이름을 슬쩍 바꾸는 마케팅 전략을 곧잘 쓴다.

여기서 ‘비교적’이라는 수식을 붙인 것을 양해하기 바란다. 과학소설 역시 클리셰의 범벅으로 이어져 온 장르이긴 하다. 애초에 장르소설의 정의 자체가 익숙한 법칙이나 소재, 분위기에 따라 소설을 분류하기에 과학소설 특유의 클리셰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과학소설은 적어도 90년대 이후로는 과거의 클리셰가 많이 사라지고 있다. 초록색 외계인, 광선총, 비행접시 우주선은 물론이고 냉전시대의 산물인 사악한 외계인과의 대립구도 같은 것도 많이 사라졌다. 과학소설은 시대의 변화와 기술의 발전을 민감하게 파악하고 흡수하는 장르이기에 현대 독자에게 호소하는 면이 크다.

반면 미스터리 장르는 여전히 과거의 클리셰가 굳건하다. 에드거 앨런 포가 만든 〈사건 발생 - 탐정과 용의자 등장 - 추리 - 사건 해결〉 전개방식은 오늘날에도 거의 변함이 없다. 때문에 문단에서는 이를 ‘판에 박혔다, 창의성이 없다’고 오해하고 과소평가하기 쉽다.

3. 사회 현실을 반영하기 용이해서

과학소설은 사회 풍자, 비판, 비유와 은유를 하기 좋은 장르이며 그만큼 알레고리 독법으로 읽기 쉬운 장르다. 실제로 문단에서도 이러한 사회 풍자와 비유로 과학소설을 해석하며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렇게 사회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소설을 높이 평가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다. 최근 사례를 보면 제3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자 인터뷰(12)를 봐도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양쪽에게서 그런 인식이 엿보인다. 물론 독자가 과학소설을 선호하는 큰 이유임도 분명하다.

과거 순문학이라고 불렀던 사실이 무색해질 정도로(지금도 일부 불리고는 있지만), 실제로 독자의 지지를 받는 소설은 화제작 『한국이 싫어서』를 비롯하여 첨예한 사회문제를 발 빠르게 소설화한 장강명의 소설이고, 페미니즘 열풍을 몰고 온 100만부 베스트 셀러 『82년생 김지영』 역시 이 흐름에 있다. 평론가 방민호가 한국소설은 사소설만 넘쳐나고 묵직한 사회문제를 다루지 않는다고 비판했는데(13)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장강명 뿐 아니라 인기 작가인 김훈은 기자 출신이고, 조남주는 방송작가 출신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취재를 통해 사회문제를 예리하게 파악해내는 능력이 문단소설 작가에게 부족하다고 추정된다. 이 부분에서 과학소설이 가진 호소력이 생기지 않나 싶다.

역시 치밀한 취재를 바탕으로 소설을 쓰는 대표적인 작가로 들 수 있는 김탁환은 과학소설은 아니지만 문단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온 사례에 포함된다. 처음에는 장르 출판사인 황금가지에서 주로 소설을 내다가 지금은 본가(?)인 민음사를 비롯한 문단 출판사에서 소설을 낸다. 김탁환이 갑작스레 문단풍의 작풍으로 바뀌었다고 보이진 않는다. 높은 판매량과 함께 사회문제를 다루는 그의 작풍이 문단에 받아들여졌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 문단에서는 이를 좋게 말해 ‘동시대성’이라고 말하는 모양인데, 나쁘게 말하면 계몽주의라고 볼 수도 있다.

심지어 한국 사회 및 문화와 동떨어진 독자적인 세계를 보이던 듀나도 『대리전』을 기점으로 점점 한국 동시대의 모습을 두드러지게 그리고 있다. 문단과 독자의 요구에 부응한 것인지 작가 개인의 생각 변화인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덕분에 문단에 받아들여지고 있다(인터뷰를 하려면 이런 걸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형편없는 인터뷰로 물의를 일으킨 『악스트』 사태 때를 보면 적어도 문예지가 왜 듀나를 다루느냐는 의문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만 봐도 듀나가 성공적으로 문단 내부에 안착했음을 알 수 있다.
알기 쉽게 예를 든다면 남희성(『달빛조각사』 작가)을 문예지에서 인터뷰한다고 생각해보라. 문단은 물론 잡지 편집자들 내부에서도 의문과 반발이 터져 나오지 않을까. 참고로 매일경제신문에서 인터뷰한 적은 있는데(14), 제목부터 ‘매출 30억’이 들어간 것을 보면 인터뷰한 이유가 짐작된다. 물론 문예지 『릿터』에서 아이돌인 종현을 인터뷰했을 때 잠깐 반발이 일어나긴 했으나 독자는 엄청난 판매량으로 대답한 적이 있다.

한편 이는 과학소설 팬덤 내부에서도 박상준(SF어카이브 대표)의 서평, 추천사 등에서 곧잘 드러나는 경향으로 계몽주의적, 혹은 실용주의적 관점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알트SF에서는 가장 두드러지게 비판하고 여러 차례 이런 흐름에 반대 의견을 냈으며(15) 온코리안SF에서는 이를 〈참여SF〉라 부르며 김보영을 그 대표적인 작가로 뽑았는데 경향의 차이일 뿐 우열을 논할 문제는 아니라고 밝혔다(16).

여기서는 이런 경향이나 흐름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질 목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으므로 그냥 이런 의견이 있다는 점만 소개하고 넘어간다.

미스터리 장르는 이 부분이 부족하다. 추리와 트릭, 반전이라는 특유의 요소를 추구하는 장르기 때문이다. 미스터리가 문학 전반에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 경우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하드보일드 문체와 사회파 추리소설이다. 헤밍웨이에서 해밋, 챈들러를 거친 하드보일드 문체는 미국만이 아니라 무라카미 하루키 등 외국 문학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마츠모토 세이초로 대표되는 사회파 추리소설은 사회지도층의 부정부패, 법률의 허점 및 그로 인한 피해, 청소년 범죄자에 대한 태도 등 민감한 사회문제를 고발하고 비판하여 언론의 역할 일부를 문학이 더 첨예하고 효과적으로 해내며 일본 추리소설의 한 기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일본 이외의 국가에도 실제 범죄나 역사적인 사건을 소재로 하여 사회문제를 고발하거나 과거의 사건을 통해 현재를 돌아보는 미스터리·스릴러·팩션 작품은 많이 있다. 여기서는 편의상 이들을 뭉뚱그려 ‘사회파’라고 부르니 양해 바란다.

그렇지만 한국문단으로 축소해서 살펴보면 하드보일드와 사회파의 영향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90년대 한국 남자소설가들은 경쟁적으로 신나게 하루키를 모방했으나 하드보일드 문체의 영향을 받은 후계자라 보기는 어렵다. 과거를 세탁(?)할 의도인지 최근엔 하루키를 열심히 비판하고는 있는데 그 와중에 독자를 ‘골빈 대학생’이라고 폄하하거나 장르소설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는 등 문단 특유의 엘리트주의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면모를 보인다(17). 한편 문단에서 사회파의 흐름을 이어받은 작품이 과연 있는지도 모르겠다. 있으면 댓글로 알려주시길.

굳이 찾아보자면 움베르토 에코를 위시한 팩션의 영향을 받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을 들 수 있으나 독자는 외국소설을 주로 선택했기에 문단 전체로 보면 미미하다. 우리나라에서 팩션은 『해를 품은 달』 등을 봐도 알 수 있듯 소설 자체보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대중 미디어 전반의 인기가 높다고 봐야 맞다.


이렇게 세 가지 이유를 들었는데 사실 그 외에도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유독 우리나라에서 인기인 이유에서 추측되는 지식소설 유형(특히 부모가 자식에게 책을 사줄 때 하는 ‘읽고 남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과학소설이 잘 충족해준다는 이유도 있다. 결코 읽기 녹록지 않은 움베르토 에코, 테드 창 등의 소설이 인기 있는 이유도 이와 같다.
다만 문단내외를 떠나 현재 한국작가의 과학소설은 위에서 말했듯 지식유형보다는 사회비판 요소가 더 많으며 공모전 심사평이나 추천사, 서평 등을 봐도 후자를 더 높이 평가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권장하는 경향이 짙기 때문에 네 번째 이유로 넣지 않고 제외했다.


결론을 내리자면 과학소설이 문단에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과학소설이 자발적으로 침투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고, 활력을 잃고 독자수와 책 판매 감소로 위기를 느낀 문단이 외부의 피를 수혈하는 것에 가깝다고 본다. 그렇지만 문단의 ‘가오’가 있지 아무 작가, 아무 소설이나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과학소설을 장르소설 중에서는 가장 낫거나 ‘고급’으로 인식했을 수도 있는데, 앞서 언급했듯 근거자료가 없는 추측의 단계이므로 이유에서 제외했다.

문단의 엘리트주의와 폐쇄주의를 감안하면 앞으로도 당분간은 ‘내가 너를 받아준다’는 식의 시혜적인 태도로 장르소설의 일부를 받아들일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거울의 작가와 독자 중에 문단의 인정을 바라거나 문단에 진입하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짐작된다. 과학소설은 최근 두 개의 협회가 비슷한 시기에 생길 정도로 독자적인 영역에서 독자적인 생존과 번영을 추구하고 있는 장르다. 자신이 과학소설을 쓴다는 자각이 있는 작가라면 문단에 대해서는 듀나와 배명훈처럼 ‘어디든 지면을 주면 좋지, 책을 내주면 좋지’ 같은 ‘쿨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글을 쓴 목적 역시 현상을 분석하기 위함이지 문단의 태도를 비판하거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함은 아님을 밝히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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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No Profile
    pena 19.01.15 13:16 댓글

    김영하 작가도 알쓸신잡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과학소설 이야기를 꽤 했어요.

     

    이런 종류의 기사를 거울에서 접한 게 오랜만이네요.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No Profile
    ㅁㄴㅇ 19.01.16 18:40 댓글

    SF가 문단에 받아들여지는 이유 중에서 3번은 좀 무리수 논리가 많은 거 같습니다.   


    3번을 정리하자면

    1. SF 소설은 사회상을 반영하기 용이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2. 문단 문학은 '순문학'이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게 사회성이 강한 작품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다. 그 작품을 쓴 이들(장강명, 김훈, 조남주)은 기자 혹은 방송 작가 출신이다. 반면에 나머지 한국 작가들은 '현실 반영 능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듣는다. 문학평론가 방민호의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문단 작가들 대부분은 취재를 통해 사회적인 이슈를 파악할 능력이 없다는 걸 추측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사회성을 반영하기 용이한 SF는 문단에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3. 듀나는 <대리전>을 통해서 한국 사회를 두드러지게 그리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문단에 안착하게 되었다('SF의 사회성이 잘 드러난 예').


    4. 미스터리나 추리에서는 사회상을 반영하는 흐름이 SF만큼 두드러지지 않는다. 사회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하드보일드 작가들이나 사회파 추리 소설은 국내에서 그 영향이 확인된 바 없다. 문단 작가들이 하루키의 영향은 많이 받았지만 하루키한테 영향을 준 레이먼드 챈들러의 영향은 받지 않았다. (그리고 하루키한테 받은 영향을 세탁하기 위해서 현재 문단은 하루키의 비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런 내용인데.


    일단 '듀나는 한국 사회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대리전>을 통해 문단에 안착했다'는 문장은 그 자체로 오류입니다. <대리전>은 사회적인 성향이 짙은 소설이 아닙니다. 그냥 무대가 부천인 작품일 뿐입니다. 그리고 듀나가 문단에 안착한 시점이 있다면 차라리 <태평양 횡단 특급>을 출간한 시점으로 보는 게 맞습니다. <태평양 횡단 특급>은 문학상의 후보작으로 언급되었지만 <대리전>에 대한 비평적 피드백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태평양 횡단 특급>은 <대리전>보다 일찍 출간되었으며, 그 수록작들은 이야기의 무대를 당대의 한국으로 삼고 있지도 않습니다. 


    글쓴이는 '문단 작가들 대부분은 사회적인 이슈를 취재할 능력이 안 되지만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문단 작품들은 사회성이 짙은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단은 사회성(그리고 대중성)을 수혈하기 위해서 SF를 끌어들이고 있으며, 듀나의 <대리전>이 그 예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무대를 한국으로 삼고 있다고 해서 당대 사회상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작품이 돼 버린다면, 문단 작품들은 전부 다 사회성이 뛰어난 작품이 돼 버립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본문에서 여러 가지 오류가 드러나 있는 단락이 하나 있는데, 그 단락의 내용을 일단 다음과 같이 요약하겠습니다. '문단 문학은 '순문학'이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게 사회성이 강한 작품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다. 그 작품을 쓴 이들(장강명, 김훈, 조남주)은 기자 혹은 방송 작가 출신이다. 반면에 나머지 한국 작가들은 '현실 반영 능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듣는다. 문학평론가 방민호의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문단 작가들 대부분은 취재를 통해 사회적인 이슈를 파악할 능력이 없다는 걸 추측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사회성을 반영하기 용이한 SF는 문단에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문단 문학은 '순문학'이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게 사회성이 강한 작품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다.' 라는 문장에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1. 사람들이 순문학이라는 표현을 쓸 때, 참여 문학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순수 문학만을 지칭하냐?
    -> 일반적으로 '순문학'이라는 표현을 쓸 때는 순수 문학과 참여 문학을 통틀어서 문단 문학 전체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여문학을 대표해 온 작가로 황석영을 들 수 있는데 보통 황석영도 그냥 순문학 작가로 부릅니다.  


    그리고 장르문학 내부의 관점에서 보자면 '순문학'의 범위는 '문단 문학'보다도 훨씬 커집니다. 이영도나 좌백 같은 작가가 非장르문학을 썼을 때 장르 팬덤에서는 그 작품들을 '순문학'이라고 지칭합니다. 이때 '순문학'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범주는 '문단 문학'보다도 훨씬 커집니다. 장르 팬덤에서 이영도의 <봄이 왔다>나 좌백의 <호랑이들의 밤>을 '순문학'이라고 지칭했을 때, '문단에서 인정받는 작품' 그런 뜻으로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장르문학의 카테고리 바깥에 있으니까 순문학이라는 거죠. 장르문학은 매우 구체적이고 특정한 카테고리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 장르의 색채가 약한 작품들을 가리킬 때도 '순문학'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2. 순수문학은 사회성을 배제하냐?
    -> 시기에 따라 다릅니다. 김동리가 '순수 문학'을 말했을 때는  정치가 완전히 배제된 문학만을 가리켰습니다. 70년대에 문학과 지성에서 '순수 문학'을 말했을 때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작품들도 포함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문학과 지성에서 낸 작품들을 보자면 사회성을 무척이나 중요시합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과거 순문학이라고 불렀던 사실이 무색해질 정도로" 문단 문학에서 독자의 지지를 받는 것은 사회성이 강한 소설이다'라는 본문의 주장은 '순문학'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다소 오해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서 이어지는 '장강명, 김훈, 조남주 같은 기자/방송 작가 출신을 제외한 대부분의 문단 작가들은 당대 사회를 반영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SF는 그런 공백을 채워줄 수 있다.'는 주장은 다소 무리수입니다. 당장 듀나의 <태평양 횡단 특급>이나 김이환의 <너의 변신>처럼 문단에 소개된 작품들을 봐도 당대 사회상의 반영을 크게 강조하지 않는 작품입니다(듀나가 동인문학상 심사회에서 받은 평가는 "'인간 이후'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는 고급한 에세이"입니다). 문단에서 자신들의 사회성에 대한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SF를 편입한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회문제를 예리하게 파악해내는 능력이 문단소설 작가에게 부족하다고 추정된다."는 공격적인 문장은 다소 위험한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이걸 가치중립적인 문장이라고 주장하는 건 기만입니다). 문단 문학이든 SF든 거시적인 사회상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때가 있으면 미시적인 단위에서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개개인의 특성상 미시적인 단위에서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는 데 더 뛰어난 SF 작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작가들한테 '무능'이라는 딱지를 붙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김훈은 기자 출신의 베스트 셀러 작가라는 점인 것하고 별개로 사회성 강한 작품을 쓰는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사회성을 통해서 대중과 소통하는 데 성공한 소수의 문단 작가'의 예로 들기엔 부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키를 비판한 유종호, 현기영 두 사람은 '하루키한테 영향받은 세대'하고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에 '문단이 하루키에 영향을 받아놓고는 그 영향을 세탁하고 있다'는 예로 보긴 힘듭니다.  유종호는 80살이 넘는 나이의 문학 평론가로 하루키에 대해서 20년 정도 일관되게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고, 현기영도 1970년대에 4.3 학살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들을 발표한 작가로 하루키가 한국에 소개되기 전부터 작가 생활을 했으니 시기적으로 영향을 받으려고 해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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