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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중 고고학… 해양 고고학…. 제가 하는 일은 어떻게 불러도 사실 별 상관없어요. 그 때 하던 일은 해상 고고학이나 선박 고고학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겠죠. 16세기의 난파선을 찾아 갈라파고스 제도 근처를 돌아나니고 있었으니까. 전 그 일에 왜 당신이 함께 했는지 알 수 없었죠. 그래요, 사실 탐사에 나서고부터 저는 당신을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건 함께하던 '우리 팀원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심리학자가 16세기 해적과 연관되어있다고는 도무지 생각들지 않았거든요. 우린 당신과 '저쪽 팀'을 우리 탐사에 동행하게한 그 영감탱이에게 뭔가 꿍꿍이 속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별 수 없었어요. 어쨌거나 우리에게 돈을 대 주는 건 그 사람이었으니까.
 대체 무슨 목적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우리에 대한 감시역으로 영감이 붙인 거란 얘기도 있었고, 어쩌면 경쟁팀의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있었죠. 그 영감은 수중 고고학을 그저 돈벌이용 보물찾기 정도로 생각했고 여러팀을 굴리는 건 그 양반에게는 이득이었을테니까요. 그 얘기를 꺼낸건 프랑코였어요. 기억나죠? 그 왜, 좀 마르고 콧수염을 기른 녀석. 말하고 나니 그립네요. 그 녀석은 이 바닥에 발을 들여놓고서 처음 정을 붙인 녀석이에요. 뭣모르고 거친 세상에 들어온 동양인 여자에게 친절한 버팀목이 되어준 녀석이죠.
 그 녀석이 절 찾아 이물로 온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죠. 전 무지개를 보고 있었어요. 수평선 위로 뜬 무지개는 정말 멋졌어요. 나처럼 감상주의랑 거리가 먼 사람도 반하게 할 정도로. 갈라파고스를 처음 발견한 사람들이 라스엔칸타다스였나, 아무튼 황홀한 곳이란 이름으로 불렀다고 하죠? 저도 어느 정도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어요. 프랑코는 언제나처럼 그런 내게 짓궂은 농담을 건네며 식당으로 이끌었죠. 점심시간이었어요.
 그 날 식당에서 일어난 일은 당신도 알 거에요. 처음엔 선장과 우리 팀의 리더였던 모레노 교수의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졌지요. 당신도 기억하겠지만 우린 1587년에 사라진 해적선 스텔라 호를 찾고 있었어요. 단서는 스페인 해군 재판소에 남아있는 포병수 알바로 바라하의 증언이었죠. 1587년 7월 25일, 추격 중이던 스텔라 호가 시야에서 사라졌음. 잔해는 발견되지 않음. 그 짧은 문장에서 우린 스텔라 호의 경로를 재구성해야했죠. 우린 10년 오차의 범위에서 같은 시기의 기록이라고 할만한 기록들을 모아 나갔아어요. 스페인의 식민지 교역 기록, 체포된 해적들의 증언, 식민지 총독의 일지, 원주민들의 전승까지. 우린 어렵사리 스텔라 호와 그 배의 선장이던 카탈리나 베리오의 경로를 따라갈 수 있었어요. 앤 보니에 버금갈만큼 엄청났던 여해적의 길을.
 그들은 본국으로 향하던 스페인 황금수송선을 상대로 한탕 해치운 뒤 코코 섬으로 향하던 길이었죠. 코코 섬에 그들의 요새가 있었을까요? 모르겠어요. 그 곳에선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때마침 상선대의 호위를 맡던 스페인 해군과 마주치고 한바탕 추격전을 벌이게되죠. 그리고 뿅!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에요. 우리에겐 더할나위없이 고마운 일감이죠. 아직 다른 팀들이 관심을 가질만큼 알려지지 않은 존재니까. 미지의 영역에 남아있는만큼 우리가 찾아야할 것도 많죠.
 선장과 모레노 교수는 탐사를 시작한 뒤에 계속 그랬던 것처럼 항로에 대한 의견을 조율했어요. 그 때 우린 핀타 섬 북동쪽에 있었죠, 아마? 탐사 예정지는 핀타 섬에서 코코 섬 사이에 위치한 사방 50킬로미터 정도의 구역이었어요. 남은 기록들을 통해 우선적으로 선정한 구역이었죠. 물론 그 안에서 의미있는 발견이 없다면 다른 곳으로 방향을 수정해야했고요. 선장과 모레노 교수는 그 날 주변 3킬로미터 정도를 돌며 자력계와 측면 음파탐지기를 살필 작정이었습니다. 물론 그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죠.
 제가 생각하는 발단은 저쪽 팀의 페드로였어요. 뭐 하나 이쁜 말을 한 적이 없죠.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그 때 그 사람은 탐사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탐사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온 거에요. 아니 말하려면 진작 말하든가, 애초에 출발 전에 모두 동의한 내용을 그제야 왈가왈부해서 얻을 게 뭐죠? 우리 쪽에서 부아가 치민 것은 당연해요. 그저 빈정대려는 말로 밖에 안 들렸으니까. 프랑코가 앞장서서 페드로와 설전을 시작했고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며 이거 주먹다짐으로까지 가는 건 아닌가 싶었어요. 결국 잠수부들이 나서면서 그렇게 됐죠. 우린 그들을 그동안 한솥밥 먹어온 식구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에게서까지 불만을 들으니 다들 허탈해진 거에요. 프랑코는 페드로가 탐사팀 사이를 이간질시키고 있다고 생각했고 결국 그 자리에서 페드로의 멱살을 잡았죠. 그 뒤로는 당신도 본 것 같은 아수라장이죠, 뭐.
 그 날은 결국 아무런 작업도 이뤄지지 못했어요. 각자 삼삼오오 모여 씩씩대기에 바빴죠. 나는 교수와 프랑코와 함께 주방에 있었어요. 교수는 어떻게든 작업을 진행시키려고 해봤지만 무리였어요. 그저 제일 가까운 우리라도 진정시켜야했죠. 몇시간이 지나도록 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프랑코는 요리사의 합석을 조건으로 술을 가져오는 데에 성공했고, 우리는 술판을 벌였죠.
 네, 진탕 취했어요. 갑판에서 당신을 만난 게 몇시쯤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요. 한밤 중이었죠? 술기운에 몸이 달아올라 바람을 쐬려했던듯 싶어요. 취하면 언제나 그렇듯 난 갑판 난간에 홀로 서있는 당신을 보고 이유 모를 객기를 부리며 휘적휘적 걸어갔죠. 그 때 제가 무슨 말을 했나요? 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당신은 끝내 그 날 했던 말을 가르쳐 주지 않더군요. 그저 횡설수설 주정이었겠죠. 아무튼 그렇게 뭐라고 열변을 토하고 있을 때 당신이 뭐라 말을 했죠. 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살짝 정신을 다잡고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았어요. 글쎄, 당신이 울고 있던 것도 같군요. 어쨌거나 당신을 떠나기 전 희미한 기억 속에서 당신이 했던 말 한 마디는 생각나요.
 "죽음의 냄새가 들려요."

 탐사는 열흘이 지나도록 지지부진했어요. 평소라면 충분히 느긋했겠지만 그 때는 이상하게 다들 초조해했어요. 팀원들의 반목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요. 달리 초조해할 이유가 없었어요. 단서는 별로 없었지만 우리가 했던 탐사는 다 그랬어요. 언제나 실증 유물이 발견된 지역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기록을 따라 역추적했거든요. 어차피 완전발굴과 보존처리까지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해저유적을 발견하고 그것이 16세기 침몰선이란 것만 밝혀도 한 고비는 넘기죠. 전 스텔라 호에대한 탐사가 성공적으로 끝날 것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당시엔 배 분위기가 그래서인지 이상하게 이거 다 가망없는 일 아닌가 싶은 기분이 들더군요. 차라리 그 때 다들 그만뒀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어쩌면 그게 나았을 지도 모르겠군요.
 일이 벌어진 건 그 때쯤이었죠. 폭풍이 밀려온 거에요. 그 곳의 날씨가 험악해지는 건 드문 일이니 우린 수평선 너머 멀리 보이는 먹구름들을 보고서도 별로 개의치 않았어요. 아니, 사실 보지도 못했죠. 발전기가 갑자기 오작동을 일으켜서 다들 그 근처에 있었거든요. 별 도움도 안되면서. 그 때 당신은 당신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고 했었죠? 아무튼 폭풍을 알아차렸을 땐 이미 너무 가까워져 있었죠.
 정신 없었어요. 여기저기 기기들을 고정시키고 배가 뒤집어지지 않게 파도의 방향을 읽느라 바빴거든요. 여기저기 바닷물이 새어들어오고 바람에 창문이 부서지고… 난리도 아니었죠. 그 아비규환 속에서 전 그저 여기저기 정신없이 움직여댔어요. 아무 생각도 없었어요. 그렇게 죽음을 가까이 마주한 건 그 때가 처음이었거든요. 그러다 꽝! 그게 제 기억의 전부에요.
 정신을 차렸을 때는 좁은 의무실이었죠. 침상 한 구석에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보였어요.옆구리가 끔찍스럽게 아프더군요. 사람들은 강한 파도의 충격에 천장의 녹슨 파이프가 떨어져 나가 저를 덮치려 했다고 알려줬어요. 그리고 통속적이게도 어디선가 나타난 당신이 몸을 날려 절 구한 거죠. 바닥에 세게 내동댕이쳐진 덕분에 정신도 잃고 허리에 멍도 들었지만 그렇지 않았으면 머리통이 날아갔을 거라고 친절한 설명도 덧붙여주더군요.
 다행히 폭풍은 금새 지나갔죠. 하지만 배가 입은 피해는 가볍지 않았어요. 갑판에 매어놓은 발굴용 체인과 도르레는 모두 쓸려가 버렸고 산소통들은 물이 새어들어가버렸죠. 무엇보다 소형 잠수정이 망가진 게 제일 문제였죠. 전 잘 모르지만 배 운항 기기 쪽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았죠. 탐사는 잠시 멈출 수 밖에 없었어요. 저도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했고요.
 그 날 당신은 늦게까지 제 곁에 남았죠. 이제야 밝히는 거지만 짐짓 명랑한 척 하는 게 눈에 보였어요. 그래도 나쁘지 않았어요. 그 때까지 제가 당신에 대해 아는 거라곤 라이프치히 대학 심리연구소 소속의 도로시아 쉬프바우어 박사라는 것 뿐이었죠. 당신은 많은 이야기들을 했어요. 가벼운 화제부터 어린시절, 그리고 주변의 무거운 공기까지. 승선이유에 대해 당신은 잠수부들의 심리상태에 대한 연구를 위해 동행을 허락받았다고 둘러댔죠. 전 믿지 않았어요. 당신도 별로 믿을 거라 생각했을 거 같진 않군요. 하지만 나는 당신을 믿기로 했어요. 날 구해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당신에게서 몇년전 나처럼 조심스럽고 다가서기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여 다소 안쓰러웠던 거죠.
 이후로 과야낄에서 지루한 한달을 보내야 했습니다. 상처는 깊지 않아서 저도 며칠만에 퇴원하고 일행이 있는 숙소로 왔죠. 그 때 당신은 언제나 제 주변에 머물러 있었어요. 사실 저도 그런 당신을 괜히 더 챙겨주려 했었고요.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코도 당신에게 만큼은 편하게 대하더군요. 그 녀석은 그런 녀석이에요. 지금도 곁에 있다면 그 때 일어난 그나마 재밌는 일화를 떠올리게 해줄텐데.
 우린 예상보다 빨리 탐사에 재개할 수 있었죠. 영감탱이가 그 때만큼은 대처가 빨랐어요. 에콰도르 정부에 손을 쓴건지 우린 금새 처음보다 더 좋은 배와 장비들을 얻을 수 있었죠. 게다가 다른 낭보도 있었어요. 폭풍 때문에 과야낄 근처 해변에 금속 조각과 나무토막들이 쓸려온 거에요. 답답해하며 산책 중이던 모레노 교수가 발견했죠.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그 것들이 난파선의 잔해임을 직감적으로 알았답니다. 폭풍의 이동 경로와 우리의 탐색 예정지 사이의 접점은 사방 5킬로미터로 좁혀졌어요. 우린 신나하며 2차 탐사길에 올랐죠.
 이제야 기억이 나는군요. 당신이 그 폭풍에 키르케라는 이름을 붙였죠. 아, 물론 아무 생각없이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그럴 듯하긴 하네요.

 다시 항해에 나선지 이틀째였지요? 우린 측면수중 전파탐지기가 그려내는 3차원 영상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어요. 새로 지원된 공명자력계는 지금까지 써본 것 중 가장 성능이 좋았고, 우린 지금까지 중 최고로 의욕이 불타올라 있었죠. 그 때 갑자기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길래 우린 너나할 것 없이 갑판으로 뛰어 올라갔어요. 무인 잠수정을 조종하는 쪽에서 뭔가 발견했을 거라 생각했죠.
 그리고 우린 난파선과 조우하게 되죠. 21세기의 난파선과. 망원경을 쓰지 않아도 충분히 모습을 알아볼 거리였어요. 선장은 무선 교신이 통하지 않는다면서 수기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죠. 하지만 역시 아무런 응답이 없는 듯 했어요. 전 슬슬 해적선이면 어쩌나 걱정이 되더라고요. 우습죠. 그토록 애타게 해적선을 찾고 있었으면서.
 논의 끝에 우리는 배에 가까이 다가가기로 했죠.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배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뱃전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슬슬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배의 세세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올만큼 가까워졌을 때, 프랑코가 그 배의 옆부분을 가리켰어요. 배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죠. 샤이닝 허그 호.
 우리 팀은 다들 순간적으로 긴장했어요. 설명했었나요? 샤이닝 허그 호는 제노바에 기반을 둔 수중 고고학팀의 소유 선박이에요. 우리 팀과는 미묘하게 라이벌 관계에 있지요. 그게 리더들끼리 예전부터 앙숙이었다나, 뭐 그런데서부터 시작했죠. 아무튼 샤이닝 허그 호라면 에게 해에서 그리스 교역선 발굴에 동원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우리 탐사 지역에 나타난 거에요. 유령선인가 싶은 기분도 들었지만 우린 곧 그들이 여기에서 별도의 발굴을 준비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고 조바심이 났죠. 기껏잡은 단서를 허망하게 놓칠 수는 없으니까요. 우린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상대팀과 눈싸움을 할 준비를 했죠.
 하지만… 샤이닝 허그 호엔 아무도 없었죠. 그렇게 가까이 다가갔으면 누구라도 관심을 가져볼 법도 한데 말이에요. 논의 끝에 선장의 제안에 따라 샤이닝 허그 호로 올라가자는 결론이 났어요. 어쨌거나 배 안에 문제가 생긴 거라면 해결해야할테니까요. 저도 호기심이 발동해 합류했죠.
 배는 침묵 뿐이었습니다. 갑판 위에 어지럽게 뒤엉켜 나뒹구는 잡동사니들을 보면서 샤이닝 허그 호가 폭풍에 휘말린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어요. 그러던 중 느닷없이 따라온 선원 중 하나가 비명을 질렀죠. 갑판 한 구석에 핏자국이 길게 늘어서 있었어요. 우린 당황하며 선체 내부를 구석구석 뒤져 나갔죠.
 아무래도 폭풍에 휘말린 것은 아닌 모양이었어요. 어디에도 침수의 흔적도 강풍에 의한 파괴의 흔적도 없다는 거에요. 벽면이나 바닥에 이따금씩 뭔가가 훑고 지나간 듯한 흔적들이 남아있긴 했지만 분명 바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상처는 아니었고요. 그렇다면 해적이 습격한 것이었을까요? 우린 그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어요. 선박의 어디에도 강탈의 흔적은 없었어요. 값나가는 기기들도 선원들의 소지품도 그대로였죠. 돈이나 신용카드 같은 것들조차도요. 정말 이상한 건 어디에도 남아있는 사람이 없다는 거에요. 시체조차도. 배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사람들만 뿅하고 사라진 거죠.
 우리가 더 이상의 탐색해봐야 알아낼 게 없겠다고 생각하고 대책을 마련하러 모였을 때, 주방장이 다급한 목소리를 외치며 다가왔어요. 그의 곁에는 조그만 꼬마애 하나가 머뭇거리며 서있었죠. 갈색 머리에 연초록빛 눈. 그래요, 그 애였어요. 주방장은 호들갑을 떨며 기관실에서 아이가 혼자 앉아있더라 말했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는데도 아이는 너무나도 침착했죠. 우린 이내 이것저것 물었지만 그 애는 그저 그 깊고 푸른 눈으로 우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어요. 별 수 없었죠. 일단 아이를 데리고 우리 배로 돌아가 생각해보기로 했어요.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지만 우린 결국 해양 경비대에 신고하기로 했죠. 께름칙한 일이 생기고 더군다나 경비대가 오면 귀찮아질 것을 생각하니 다들 의기소침해졌어요. 경비대가 오는 동안 사람들은 그 애를 붙잡고 늘어졌어요. 당연하죠. 그 곳에 남은 유일한 생존자니까. 하지만 계속 아이가 묵묵부답이자 사람들은 포기하고 그 애에게 쉴 곳을 마련해주기로 했죠. 그 애를 이끈 것은 당신이었죠. 아이가 잘 따르는 것을 보고 그 땐 꽤나 놀랐어요. 둘이 처음부터 통하는 게 있었나 보죠?
 그 때 우리팀 한 쪽에서는 샤이닝 허그 호의 자료를 보자는 의견을 내놓았죠. 혹시라도 이번 탐사의 어떤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니까요. 대부분은 꺼림칙해했어요. 뭣보다 경비대 쪽에서 증거를 가져갔다고 뭐라고 할 지도 모르잖아요.
 하지만 일은 쉽게 풀려나갔죠. 우리의 신원을 확인하자 경비대원들은 몇가지 기본적인 질문들만 던지고선 이내 샤이닝 허그 호의 인양 준비를 시작했어요. 탐사팀이 활동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영감에게 감사해할 순간이 온 거죠. 그의 넓은 오지랖과 재력은 우리가 샤이닝 허그 호의 자료를 보는 것까지 허락하게 해줬어요. 감시 아래 잠깐동안의 열람이라는 조건이었지만 그게 어디에요.
 컴퓨터 파일을 뒤적거려보니 역시나, 그들도 스텔라 호를 찾고 있었어요. 아니, 이미 찾았죠. 그 곳에서 빨리 움직이면 이틀이면 닿을 거리였어요. 그들이 왜 본격적인 탐사를 시작하지 않았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우린 장비나 잠수부가 부족했나보다고 쉽게 생각하고 자료들을 기록하기에 바빴죠. 사실 우리의 예측 지점에서도 그리 벗어나지 않았어요. 다만 그들은 침몰선과 그 주변의 지형을 그래픽화해두었기에 앞으로의 발굴이 더 수월해질 터였죠.
 그 날 밤은 여전히 뒤숭숭한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일이 쉽게 풀린다는 생각에 신나있었죠. 그래요, 달리 무슨 생각이 들었겠어요 그 때.

 바닷 속 유적을 처음 마주할 때만큼 짜릿한 건 없어요. 잠수 로봇이 보내오는 영상에 드러난 함선의 당찬 자태를 보고 우리는 하나같이 탄성을 질러댔죠. 선체는 정말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었어요. 부식이 그리 심해 보이지도 않았죠. 과장 좀 보태자면 당장이라도 다시 항해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더군다나 배의 앞머리에 있는 선수상의 모습은 우리를 흥분하게 만들었죠. 부식으로 인해 정확한 모습은 식별할 수 없었지만 세가닥으로 뻗은 큼직한 인간형의 선수상이었요. 스텔라 호에 대한 기록들에서는 어디에서나 그 독특한 선수상의 이야기가 남아 있었어요. 세명의 은빛 세이렌 상이었죠. 우린 점점 이 배가 스텔라 호라는 확신을 다져갔어요.
 잠수부들은 더 희망적인 이야기를 가져왔습니다. 선체는 붕괴의 위험이 없었고, 토양에 깊숙히 박혀있지도 않았어요. 그 안에 가득한 항아리와 동전 같은 유물들도 말이에요. 발굴이 쉬워진대다가, 동전! 동전은 침몰선의 신분증과도 같은 거에요. 잠수부 한명이 물 밖으로 가져온 첫 유물인 금화를 보고 우리는 모두 환호를 지르며 부둥켜 안았어요. 스페인 금화였죠!
 전 발굴 경험이 많은 다른 팀원들처럼 마냥 침착하진 못했어요. 여기저기 움직이며 뭔가 더 도울 구석이 없나 살폈죠. 우린 스텔라 호 전체를 인양해서 보존해 어디 박물관에 놓거나 할 생각은 없었어요. 요샌 다들 그렇지 싶은데, 우린 우리의 연구 방향에 필요한 만큼의 정보만을 얻을 생각이었죠. 사실상 침몰선은 물 밑에서 오랫동안을 지내왔기 때문에 가장 안전한 보관고는 바다 밑이거든요.
 이 유적은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었어요. 우선은 거의 전설시 되는 카탈리나 베리오의 행적에 대해서에요. 몇몇 문서에 기록이 남아있지만 그것만으로 입증하기엔 부족한 감이 있고 구멍도 많아서 완벽한 재현에는 무리가 있죠. 한편으로 스텔라 호에는 스페인 보물선에서 약탈한 물건들이 있을테니 스페인의 식민지 경제 구조와 당시 해적들의 생활상을 그려보는 데에도 도움이 되죠. 또 당시 굳이 카리브 해의 반대편까지 와야했던 스페인 약탈선과 스텔라 호에 대해 한가지 가설을 세웠는데 그걸 입증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지금의 부에나벤투라 부근에서 원주민들의 부흥 운동이 있었고, 그걸 이용한 스페인 식민지 총독의 독립음모가 있었다는 거죠.
 사실 이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어떤 해저 유적이든 발견만 하면, 그것 자체로 의미가 생기는 거죠. 유물은 수많은 말을 해요. 사실 발굴자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발굴을 하는 게 아니라 유물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발굴을 하는 거죠. 그를 통해 무언가를 입증하는 거고. 더군다나 우린 스텔라 호의 사실상의 첫 발견자이니 찾아낼 의미는 무궁무진했어요. 우린 잠수부들에게 우선적으로 찾아볼 유물들을 이것저것 주문했어요.
 아, 이거 수다가 길어졌네요. 미안, 너무 흥분했나봐요. 지금에 와서도 그 때만 생각하면 흥분이 되는 건 별 수 없네요. 그 때 당신도 우리의 분주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죠. 얼마안가 곧 선실로 들어가버렸지만요. 아마 그 애를 돌볼 생각이었겠죠? 그 땐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오후에 있던 회의에서 조금 더 체계적인 발굴 계획을 잡았어요. 일단 전체적인 발굴지의 특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금화와 총, 항아리들와 드럼들, 가능하면 대포와 선체의 일부분을 인양한 뒤 연구소로 돌아가 보존처리를 시작하는 거죠. 그리고 2차 탐사에 나서는 거에요. 그 애가 난동을 시작한 건 페드로가 난데없이 제노바 고고학팀에게 연락을 취한 사실을 언급하며 언쟁이 시작되었을 즈음이에요. 우린 당신에게 그 애의 이름이 나타샤 미야토비치라는 사실만 간신히 들은 상태였기에 꽤나 당황스러웠죠. 뭔가가 무너져내리는 소리에 놀라서 나가보니 그 애가 그 조그만 몸으로 주방 한 구석에 쌓인 통조림들을 밀어 넘어뜨리고 있었죠. 간신히 프랑코에게 붙잡힌 아이는 비명을 질러댔어요. 끔찍한 비명이었어죠. 소동이 벌어질 때쯤 당신도 주방으로 나와있었죠. 당신은 조용히 손을 내밀어 아이를 끌어당겼어요. 아이는 가만히 당신을 따라갔죠.
 나타샤를 간신히 진정시키고 나서 당신은 그 애의 방 문을 조용히 닫고 나와 우릴 보고 미묘한 표정을 지어보였죠.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감싸는 어머니 같았어요. 우린 그 애가 샤이닝 허그 호에서 뭔가 끔찍한 것을 보고 정신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가하는 얘기를 했죠.
 밤 늦게 당신은 절 당신의 방으로 불러냈어요. 방 안에 들어서니 당신은 여전히 그 미묘한 표정으로 절 바라보았죠. 한참 허공을 바라보던 당신은 이런 말을 꺼냈어요.
 "공감각에 대해서 들어보았나요?"
 공감각이라. 한국의 국어 교육의 한심함에 대해 얘기한 적 없죠? 아무튼 그 단어는 제겐 그 지루한 국어 시간에나 들어봤던 말이었어요. 당신은 머뭇거리며 심리학자가 되기까지의 일을 얘기했어요. 당신은 인류의 일부가 그런 것처럼 공감각자로 태어났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못할 어려움들을 이겨내야 했죠. 숫자들은 끝없는 색들의 나열로 보였고 음식을 먹을 때면 쏟아지는 소리들에 괴로워해야했어요. 당신을 보는 시선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당신은 자신의 운명에 괴로워하며 싸우기보다 그에 순응하고, 그에대해 더 잘 알아가고 적극적으로 맞설 방법으로 심리학을 선택했어요. 정공법이죠. 당신에게 그런 얘기를 듣는 동안 전 당신의 과장된 쾌활함과 그 뒤에 감춰진 주저함을 이해할 것만 같더군요.
 그리고 이야기는 나타샤 쪽으로 이어졌죠. 당신은 그 아이의 방을 마련해준 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며 그 아이의 곁을 지켰어요. 그 아이는 처음엔 경계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만 곧 이것저것 관심을 드러내보이기 시작했죠. 어쨌거나 어린 아이였으니까요. 심리 상담가의 인내심이 결국 그 애를 이겼죠. 나타샤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당신은 친숙함을 느끼고 그 애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찾아냈어요. 그 애도 공감각자였던 거죠.
 당신은 공감각자라고해서 발작을 일으키는 건 아니라고 했어요. 단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 당신과 같은 사람들에겐 엄청난 것으로 보였을 수 있죠. 나타샤의 경우에는 당신이 본 누구보다 더 민감했는데 알파벳 하나하나가 그 애에겐 각기 다른 부위의 통증으로 느껴진 거고요. 통조림의 글자들이 전해오는 고통과 표지에 그려져있는 녹색 거인이 전해오는 지독한 악취가 겹쳐 견딜 수 없게 된 나타샤는 결국 난동을 부렸다는 게 당신의 설명이었죠.
 전 왜 그 동안 나타샤가 당신과 함께 따로 식사시간을 가져야했는지 이해했어요. 먹는 것 하나도 그 애에겐 고통이었겠죠. 물론 그로 인해 제가 더 나타샤에게 친절하게 대한다거나 하진 않았어요. 그저 당신과 나와 그 애 사이에 비밀이 하나 더 늘었을 뿐이죠. 다만 조금 더 그 애에 대해 알고 싶다는 기분은 들더군요.
 기회는 늦지 않게 찾아왔습니다. 그 밤 당신의 방에서 나와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이었죠. 나타샤가 선실 복도에 쭈그려 앉아있더군요. 전 놀란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멈춰섰죠. 인기척을 느낀 그 애는 잠시 저를 돌아보다 다시 보고 있던 쪽으로 시선을 돌렸어요. 그 애가 다른 곳으로 가버리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전 조용히 그 애의 곁에 함께 앉아 그 애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어요. 적어도 제가 무언가 특이한 게 있다고 생각할만한 건 없었죠. 그 애는 보는 게 아니라 냄새를 맡고 있었어요. 발치에서 나는 콩냄새를. 벽에는 주방에 연결된 작은 환풍구가 있었고, 그 날 저녁 메뉴는 콩 스튜였죠. 한참을 가만히 냄새를 맡던 나타샤는 이렇게 말했어요.
 "반짝이는 차가움이 들려요."
 전 이게 대체 뭔소린가 싶어서 잠시 그 애를 바라보다 이내 마음을 다잡으며 살짝 끄덕였죠. 당연히 이해할리 없지만. 그 애도 그걸 알아차렸는지 날 보며 살짝 미소지었어요. 어떻게했겠어요? 저도 그저 웃었죠. 전 그저 그 때 느낀데로 나도 그런 능력이 있으면 세상이 더 멋져보이겠다는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어요. 그 맛없던 콩 스튜에서 반짝이는 차가움을 느낀다면 배 위에서의 식사시간이 괴롭지는 않겠다고. 그 애는 그저 계속 웃기만 했죠. 그 때는 그 애가 귀엽기까지했어요.
 어린 아이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그 땐 늦게까지 잠들지 않은 아이를 재우러 보내지 않고 갑판 위로 바람을 쐬러 나갔어요. 하루의 대부분을 자신의 방 안에서 보내서인지 아이는 꽤나 신나했죠. 저는 어떤 경계심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는 그 때 느낀 것을 그대로 이야기했어요. 정말 모르는 사람이 보면 환각을 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더군요. 그 애는 모든 외부 자극에 대해 자신만의 오감의 교향곡을 발견해냈어요. 발견했다기보다 자연스레 다가왔다는 쪽이 맞겠죠?
 이후는 당신이 아는 것과 같아요. 나타샤는 절 그나마 편하게 생각하게 된듯해요. 밖에 나오는 시간도 많아졌고요. 당신과 나와 그 아이 셋이서 있는 시간이 늘어나자 프랑코는 언제나처럼 농담을 던져댔죠. 그 녀석도 우리와 함께 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어요. 뭐 어차피 우리에게 그런게 중요한 건 아니었죠. 당장 사랑스러운 스텔라 호가 물밑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으니까. 모두가 기대에 찬 가벼운 흥분과 즐거움을 느낄 뿐 그게 비극의 전주곡이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죠.

 전 그 때 그 애가 보는 세상에 대해 물론 알 수 없었어요. 그 애의 말을 들으며 어렴풋이 상상해볼 수 있을 뿐이었죠. 그렇지만 아무리 무감각한 사람이 봐도 바다는 아름다워요. 물만 가득한 곳이 뭐가 멋지냐하겠지만 그게 그래서 멋진 거에요. 물이기에 마음껏 변하거든요. 바다는 천가지 얼굴을 숨긴 비밀의 여신이에요. 그 비밀은 다가서는 자에게만 살짝 모습을 보여주죠. 뱃사람 중에는 하도 많이 봐서 지겹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볼 때마다 새로워요. 어느 때는 미친 바람을 불고 와 광포를 부리다 언제 그랬냐는듯 안식의 소곤거림으로 우릴 달래죠. 달이 없는 밤이 되면 수평선들은 사라지고 머리 위로 별들이 가득한 무중력 공간이 되어버려요. 가장 멋진 순간은 망망대해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지는 때죠.
 그 날 아침 프랑코와 저는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있었어요. 밤새 건져올린 유물들을 분류하느라 제대로 잠도 못잤지만 피곤한 줄도 몰랐죠. 연구소로 가 할 일들에 대해 잡담을 나누던 우리는 조금 눈을 붙일까하다 기왕 늦은 거 일출을 보기로 결정했죠.
 지금와서는 별 감흥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 때는 정말 대단했어요. 자신을 잊을 정도로. 당신도 한번 보았으면 좋았을텐데. 시작은 작은 한 점이죠. 그 조그만 점으로부터 쏟아지는 빛이 보랏빛 하늘과 바다를 가르며 퍼져나가요. 곧 혼돈의 어둠이 걷히고 세상은 주홍빛 광선이 삼켜버리죠. 우주의 시작을 보는 기분이랄까요.
 네, 그 몇시간 뒤에 잠수부가 미쳤죠. 아침식사를 마치고 모두들 다시 작업에 달라붙었어요. 그 날의 목표는 선저(bilge)였죠. 음, 스텔라 호의 구조에 대해 잘 모르려나요? 배는 전형적인 3단 갤리온 선이에요. 드러난 갑판, 즉 첫번째 갑판 앞엔 선수루가 있어요. 그 안엔 선원실이 있고요. 첫번째 갑판 위로 대포가 한 열, 그리고 그 밑 두번째 갑판으로 또 한 열이 늘어서있죠. 마지막 갑판엔 닻줄과 탄환들이 있고, 조리실과 선원들의 물품보관소가 있어요. 약탈한 재화들도 이곳에서 발견되었죠. 가장 아랫층은 선창이에요. 남은 닻줄과 식료품과 같은 것들이 놓여요.  
 이 선창 밑이 선저인데, 보통 이 곳에는 배의 평형력을 위해 무거운 것들로 채우죠. 그런데 해저로봇에 찍힌 화면을 통해 가운데 돛대가 서있는 위치 조금 앞쪽에 균열이 발견된 거에요. 정확한 상태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게 스텔라 호의 침몰 원인을 알려주는 데에 도움이 될 건 분명했죠. 모래에 파뭍혀 잘 보이지 않았기에 선체 밖에서 접근해 조사하긴 어려웠고, 잠수부들을 통해 선체 내부로 들어가 접근하기로 했던 거에요.
 시작은 순조로웠어요. 잠수부들은 우리와 무선으로 교신을 나누며 균열 근처의 정황을 전했어요. 이상했어요. 그들은 선저의 파손 부분이 정확한 원형이라고 묘사했죠. 나중에 우리도 잠수부들이 찍은 비디오 기록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분명 세월에 닳고 부식된 흔적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깨끗하게 파인 구멍이었죠. 타원도 아니고 완전한 원형에 가까웠어요. 어떤 암초가 그런 상처를 낼 수 있겠어요? 우린 스텔라 호의 승무원들이 스스로 배에 구멍을 내 침몰시켰다는 건가 싶어 의아해하고 있었죠.
 복잡한 머리를 다잡으며 이런저런 가설을 세워보는 사이, 무선으로 당황스러워하는 잠수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우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지만, 어렵사리 로이드가 발작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죠. 배 위의 사람들도 모두 당황했어요. 우린 물밑의 상황을 잘 알지 못했을 뿐더러, 로이드는 잠수만 몇십년을 해온 베테랑이라고요. 잠수팀의 리더이기도 했고요.
 그들도 우리만큼이나 당황한 게 분명하죠. 곧 다른 사람들까지도 그 영향을 받은 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죠. 계속해서 들려오는 잡음과 공황의 외침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말은 상승, 상승 뿐이었어요.
 모두가 갑판으로 나가 잠수부들을 맞았어요.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잠수부들은 배에 연결된 체인도 제대로 붙잡지 못한채 헤매고 있었죠. 결국 우린 구명 보트를 타고 내려가 그들을 구해야했죠. 배 위에 발을 딛은 잠수부들은 모두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어요. 마치 막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아이들 같았어요. 우린 간신히 그들을 추스려 선실로 데리고 갈 수 있었죠.
 도무지 뭔가 물어보거나 할 상태가 아니었어요. 심하게 발작을 일으키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다들 감각이 마비된 거 같았죠. 제대로 보지도 못한채 서로 부딪혀 넘어지고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손과 발은 잠수복을 벗기지도, 침상으로 다가가지도 못했어요. 그저 다들 뭐라 중얼거려대며 혼란스러워할 뿐이었죠. 당신도 함께 보았으니 잘 알겠죠? 우린 힘겹게 그들의 잠수복을 벗기고 진정제를 놓았죠.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저까지 공포스러운 광경을 본듯한 기분이 들어 찜찜해졌죠.
 잠수부들이 다소 진정된 기미가 보이자 응급의료를 겸하고 있는 호아킨과 당신을 남겨두고 우린 밖으로 나왔어요. 좁은 복도에 모여서서 서로의 심각한 얼굴을 마주했죠.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당장 잠수부가 없다면 탐사가 힘들어지니까요. 일단 탐사를 그만두고 연구소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나왔죠. 하지만 다시 탐사에 나서기 쉬워질지는 알 수 없었어요.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지만 잠수팀이 이번 탐사에 동참하지 않으려 할 수도 있고, 이상한 소문이 나버리면 다른 잠수팀도 구하기 어려워질테니까요. 직접적인 연관을 찾을 수 없었지만 샤이닝 허그 호의 기이한 난파도 모두의 머릿 속에서 맴돌고 있었죠. 어쩌면 샤이닝 허그 호와 연관해서 언론들이 괴롭혀댈 수도 있어요. 페드로가 제노바 쪽에 연락을 취했으니 그 쪽에서 골치 아프게 나올 수 있죠. 그래도 별 다른 수가 없는 건 사실이었는 걸요.
 아마도 바닷속 환경이 불러오는 폐소 공포증이 일어난 게 아닐까하는 얘기가 나왔어요. 베테랑 잠수부들이 그랬다는 건 납득이 안 가지만, 우리가 뭐라 결론을 내릴 부분이 아니었죠. 당신의 얘기를 듣고 잠수팀에 대한 대책을 마련한 뒤에 귀환하는 걸로 얘기가 됐어요. 그 때 우리에겐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죠. 그랬다면 잠수부들은 과야낄의 병원에서 안정을 취하고, 수중탐사가 불러올 수 있는 이상 징후의 사례가 될 수 있었을테죠. 대충 이런 얘기가 나올 때쯤 페드로가 뭔가 딴지를 걸려는 것 같길래, 우린 서로의 자리로 흩어져 잠수부들의 상태가 나아지길 기다리기로 했어요.
 전 좁은 연구실에서 일에 몰두하는 쪽을 택했어요. 일이 어떻게 결론이 나든,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잖아요. 1차적으로 모인 유물들의 분류작업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어요. 샌디에이고에 있는 연구소로 가는 동안 일어날 부식을 막기 위해 가벼운 보존처리를 하고 촬영된 비디오 자료를 보기 위해 영상장비가 있는 옆 방으로 향했어요.
 어느새 탐사팀이 모여 영상을 돌려보고 있더군요. 잠수팀이 마지막으로 찍어온 비디오 였어요. 잠수로봇의 영상과 비교해보았지만 특별할 건 아무 것도 없었어요. 늘상 보아온 대로 스텔라 호가 잠긴 바다밑 뿐이었죠. 잠수로봇이 찍은 영상에는 잠수부들이 선체로 들어가고 발작을 일으키며 밖으로 끌려나오는 게 전부였어요. 잠수부들의 영상은 선체 내부를 비추며 선저를 향해갔죠. 선저의 구멍을 이리저리 촬영하고 올라오는 길에 발작이 시작된 모양이에요. 카메라는 미친듯이 요동쳤고 당황하는 잠수부들의 모습이 비쳤죠. 분명 로이드가 먼저 시작했지만, 다른 잠수부들이 단지 그에 대한 영향으로 함께 발작을 일으켰다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어요. 거의 동시에 발작이 일어났거든요. 마치 무언가를 보고 놀란 것 같았죠. 하지만 요동치는 카메라를 저속으로 돌려봐도 정말 특이할 건 아무 것도 없었어요. 우린 너나할 것 없이 고개를 저었죠. 환각을 봤을까? 하지만 왜 모두가 동시에?

 그 날 밤은 꽤나 피곤한 밤이었죠. 쏟아지는 정보들에 정신이 없었으니까.
 늦은 오후에야 당신과 호아킨은 피곤한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났죠. 당신들은 잠수부들이 모두 안정을 취했다고 말하며 빨리 도시로 돌아가 정밀 치료를 받아야한다고 말했어요. 아마도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한 발작인 것 같은데 정확한 원인은 잘 모르겠다는 말을 덧붙이고요. 그리고나서 당신은 잠시 날 바라보다 이내 눈을 돌려버렸어요. 기억나요? 당신은 좀 쉬고 싶다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죠.
 남은 사람들은 다시 토론을 했지만 결론은 뻔했어요. 우린 탐사장비를 챙기고 떠날 준비를 했어요. 일단 잠수부들의 상태를 생각해서 과야낄에 그들을 내려 입원시키고 샌디에이고로 가 상황을 지켜볼 모양인 듯 했어요. 전 스텔라 호와 잠깐의 이별을 고하기 위해 난간으로 다가갔죠. 푸른 바닷물을 바라보며 실제로 보지 못한 스텔라 호의 모습을 그려볼 때 쯤이었어요. 등 뒤에서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프랑코였죠. 녀석은 성급하게 내 팔을 끌어당기며 선실로 이끌었어요. 끌려가는 동안 주변을 보니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고 출항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어요.
 프랑코가 데려간 곳은 유물 보관실이었어요. 프랑코는 가지런히 정리된 유물들 사이를 지나 한 유물을 보심스레 내게 가리켰어요. 분명 이곳에서 마지막 정리를 하다 무언가 발견한 모양이었죠. 녀석이 가리킨 것은 잠수부들이 선장실에서 주워올린 선체 조각이었어요.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적어도 그게 뭔지는 알 수 있었어요. 낙서였죠. 칼로 새긴 거에요. 우린 모두 잠수부들의 말을 통해 선체 곳곳에 새겨진 낙서의 존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죠. 선저의 구멍이 아니었다면 그 낙서들에 대해 조사를 할 참이었어요. 스텔라 호의 선원들이 남긴 기록이라고는 어렴풋이 남아있는 이 칼자국들 뿐이니까요. 마침 아쉽던 참에 잘되었다싶어 전 한참을 그 유물에 붙어있었어요. 프랑코가 날 부른 건 달리 부를 사람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부식이 시작된 유물의 원래 모양을 가늠하는 데 재능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죠. 다행히 어렵지는 않았어요. 분명 그건 몇음절의 알파벳들이었죠. 배가 출발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전 그 낙서에 대해 어느 정도 추측을 내려볼 수 있었어요. 세이렌. 네, 세이렌이죠.
 저와 프랑코는 얼마간 그 작은 발견에 기뻐하며 카탈리나 베리오가 왜 그런 글자를 새겼을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죠. 뭐, 그리 대단한 얘기는 안 했어요. 뱃사람들이야 언제나 수많은 전설들을 안고 다니니까. 베리오가 이 매혹적인 바다여인들에 심취해있었을 거라 생각했죠. 아마 독특한 선수상을 달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겠죠. 전 잠시 활기에 찬 프랑코를 보며 녀석의 순진한 호기심을 즐겁게 바라봤어요.
 우리 얘긴 선저의 구멍으로 옮겨갔어요. 분명 그 구멍은 칼로 새긴 낙서라기엔 무리가 있었죠. 인간의 힘으로 단단한 선저에 구멍을 낼 수도 없고요. 포탄이 폭발했다고 하기엔 너무 깨끗했어요. 분명 외부의 힘이 가해진 것일텐데 그렇다면 암초 밖에 가능성이 없죠.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우린 어떤 암초가 그렇게 깨끗한 구멍을 낼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어요.
 연구실로 자리를 옮겨 얘기를 계속했어요. 얼마간의 우울한 분위기를 지워버리는 의미도 있었죠. 프랑코가 어쨌거나 1차 탐사가 끝나는 마당에 맥주라도 한잔하자고 했어요. 제가 가져오겠다고 말하며 주방으로 향했죠. 그리고 주방으로 향하던 길에 당신의 방 근처에서 분주하게 움직여대는 당신을 만난 거에요. 프랑코와 다시는 함께 맥주를 마시지 못했죠.
 당신은 초조하게 방 근처를 서성거리다 저를 발견하더니 짐짓 놀라며 절 당신의 방 안으로 이끌었어요. 전 프랑코와 얘기하던 중이라고 말하려했지만 당신의 태도가 평소같지 않아서 말을 꺼내지 못한 채 함께 방으로 들어섰어요.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건가 싶었죠.
 그 때 당신의 방에는 나타샤도 있었죠. 나타샤는 멍하니 한쪽 벽을 바라볼 뿐 제가 들어서는 것에 신경도 쓰지 않았어요. 전 정신을 놓아버린 것 같은 그 애의 행동에 잠시 신경이 쓰였지만 당신이 재빠르게 말을 이어대는 통에 그에 집중했죠.
 당신은 잠수부들이 당신과 동류가 되었다고 말했어요. 전 그저 묻는 눈으로 바라봤죠. 그 때 전 당신의 말에 계속 그렇게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었어요. 분명 바보 같았을 거에요. 당신은 설명을 계속했어요. 잠수부들을 간호하며 살펴본 결과 그들이 공감각의 양태를 드러낸다는 거죠. 어느 정도 진정되고 의사 소통이 가능해진 잠수부들에게 숫자, 문자, 소리, 색깔, 피부자극 등의 외부 자극을 주자 두가지 이상의 감각을 동시에 느끼는 것을 전해왔다는 거에요. 전 잠시 그럼 잠수를 하면 공감각증이 생기나요? 같은 멍청한 질문을 던졌죠. 당신은 주저했고 전 처음부터 느낀 것처럼 당신이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죠.
 솔직히 말도 안되는 얘기였죠. 발작을 일으켜 올려진 잠수부들에게 공감각 여부부터 살핀다는 게요. 그건 애초부터 어느 정도 가정을 내리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왔다는 얘기에요. 당신의 공감각자로서의 경험같은 걸로 비롯된 문제가 아니에요. 공감각에 대해 당신이 이번 탐사에서 찾아야할 무언가가 있다는 얘기였죠.
 당신은 제 말을 듣다 어느 정도 포기한 듯이 털어놓았죠.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는 평범한 사람도 공감각자에 가까운 인지 형태를 보인다는 게 최근 당신이 연구하고 있는 가설이라고요. 전 당신이 제 일에 대해 모르는 만큼이나 당신의 일에 대해 몰랐지만 선뜻 거부감이 들더군요. 인간의 감각인지 과정이라는 건 수많은 세월에 걸친 진화의 산물이잖아요. 간혹 대다수의 인간과 다소 다른 인지 과정을 가진 사람이 태어날 수도 있고, 언젠가 인간이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볼지도 모르지만 그런 변화가 순식간에 일어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었어요.
 더군다나 당신과 나타샤를 만난 뒤 전 공감각에 대해 틈날 때마다 생각해보고 있었다고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인간은 공감각적인 감각을 느낄 때가 있어요. 저만해도 의식못하고 지나칠 때가 많지만 음악마다 고유의 색감을 느껴요. 전 에둘러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 그에 결과를 맞춰가는 것은 학자답지 못하다고 말했죠. 흥분했었나봐요. 역사학이 어느 정도 상상력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유물이 말해주는 것 그 이상을 말하진 않는다, 인간을 통해 연구하는 당신의 분야에서는 더더욱 그런 것 아니냐, 뭐 그런 얘기를 이어갔던 것 같네요.
 그리고 당신은 제가 걱정하던 태도를 보였죠. 비전문가에게 뭔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지 않는 거죠. 말해줘도 잘 몰라, 이런 거 말이에요. 당신은 그저, 서씨가 걱정되서 그래요, 하고 중얼거렸을 뿐이죠. 전 대체 뭘 걱정해야하는지 걱정하며 수진이라고 부르세요, 라고 대답했고요.
 잠시 고민하던 당신은 제게 선택을 할 것을 부탁할 뿐이었죠. 제 제안에 대한 대답이 없어 실망했다기보다, 대체 뭘 선택해야하는지 감이 안 잡혔어요. 다만 당신이 이렇게 촉박하게 구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당신은 나중에 설명을 하겠다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제가 조금 더 수긍을 하게 만들었죠. 사실 제가 당신에게 뭘 강요할 수 있었겠어요. 그저 설명을 할 때쯤엔 이름으로 날 부르겠지, 할 뿐이었죠. 그런데 당신은 여전히 절 서씨라고 부르더군요. 편하게 대해요. 전 언제고 당신을 도로시아라고 부를 준비가 되어있어요.
 아무튼 제가 이해할 기색이 안 보이자 당신은 옛날 얘기를 꺼냈어요. 오디세우스의 얘기였죠. 글쎄, 저랑 그렇게 친한 친구는 아니에요. 트로이야 땅 속에 있는 걸 발굴하면 된다지만 오디세우스의 배는 가라앉지 않았잖아요. 어쨌거나 당신은 비유로 당신이 하려는 걸 설명했죠.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을 만난 얘기었어요. 결국 요지는 이거죠. 밀랍으로 귀를 막은 선원들을 택할 것이냐, 기둥에 몸을 묶은 오디세우스를 택할 것이냐. 전 사실 그보다 베리오가 세이렌이란 낙서를 남겼는데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가 듣고 싶었어요. 그 땐 당신에게도 세이렌 얘기를 듣게 된 게 재미있는 우연이라고만 생각했죠.
 전 이게 당신의 유머 방식인지 궁금해하며 어쨌거나 선택을 했어요. 기둥에 묶이는 쪽이었죠. 당신은 그럴 줄 알았어요, 하고 살짝 한숨을 쉬었어요. 그리고 배에 탑승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 선택을 해야할 거라며 시간이 많지 않을 거라 얘기했죠. 전 당신은 어느 쪽인지 물었어요. 아무 말도 없었어요. 대신 방 밖이 시끄러워졌죠. 전 잠시 고민에 빠진 당신에게 양해를 구하고 복도로 나왔어요.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죠. 그 사람들 사이에서 걱정스런 얼굴을 한 프랑코가 제 쪽으로 걸어왔어요. 전 맥주를 가져오려다 잠시 일이 있어 이리로 온 거지 실종된 게 아니니 이렇게 사람들을 풀어 날 찾을 필요는 없다고 했죠. 프랑코는 제가 아니라 맥주를 찾는 거라고 대꾸하며 배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말했어요. 그건 저도 충분히 알 수 있었죠. 프랑코는 배의 운항 기기 쪽에 이상이 생겨 배가 제대로 방향을 못 잡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을 이었죠.
 전 조용히 당신의 방 문을 닫고 배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상태를 살폈어요. 물론 이런 경우에 제가 도움이 될만한 건 없었죠. 선장과 항해사들은 동요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겠지만 사람들은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쓸리고 있었어요. 그 중심엔 페드로의 참견이 있었고요. 어쨌거나 걱정할 건 없었어요. 만약 기기가 계속 말썽이더라도 육지에서 먼 곳도 아니고, 최악의 경우엔 위성전화로 도움을 청할 수라도 있을테니까요.
 하지만 어느새 복도로 나온 잠수부들이 난동을 부려대는 통에 상황은 나빠지기만 했어요. 그들은 이제 제대로 걷고 말도 했지만, 그렇다고해서 멀쩡해 보이진 않았죠. 뭐가 그리 두려운 건지 얼른 이곳에서 벗어나야한다고 얼른 기계를 고치라고 아우성이었죠. 그 중에 로이드는 저랑 눈이 마주치고서 그 날 들어 세번째로 그 단어를 내뱉었죠. 세이렌, 세이렌! 그녀들이 우리를 모두 죽일 거야. 넌덜머리가 났죠. 21세기의 어느 하룻밤에 왜 갑작스레 세이렌들이 쏟아져 나오는 건지.
 사람들은 금새 기계에 관심을 접고 잠수부들을 진정시켜 선실로 돌려보냈지만 편안한 밤을 보내기엔 이미 늦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죠. 흥도 깨지고 피곤해져버려서 전 어느 쪽에도 관심을 주지 않고 제 방으로 돌아왔어요. 그 날은 별로 깊게 잠들지 못했는데, 꿈에서까지 세이렌들이 나와 노래를 불러대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죠. 세이렌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세명의 세이렌들이 각각 카탈리나 베리오와 나타샤, 그리고 당신이란 건 알아요.
 그나마 얕은 잠도 설쳐서인지 다음날은 늦게까지 침대에서 뒹굴었어요. 배의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어요. 운항기기들은 전부 제멋대로 데이터를 표시했고, 나침반도 먹통이 된데다가, 통신장비까지 나가버렸죠. 더군다나 그 날은 잔뜩 찌푸리고 안개까지 껴서 태양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어요. 페드로의 짜증스런 트집은 쉬지않고 계속되었고, 잠수부들은 잠수복을 입고 헤엄쳐가겠다고 난동을 부려대고, 당신은 어디서 뭘하는 지 보이지도 않았죠. 전 프랑코와 하루종일 시덥잖은 말이나 주고 받았죠. 다큐멘터리 채널이 아니라 미스테리 쇼에 나올 우리 이야기에 대해 이죽거리면서.
 시계가 먹통이 되서 자세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해질 무렵이 거의 다 되어서, 그러니까 항해의 끝 이 가까워올 때 전 혼자 갑판 난간에 매달려 있었죠. 복잡한 머릿 속을 바람에 털어버리려고 애쓰며.

 그리고 그 때 일어난 일을 얘기해야할 차례군요. 지금 와서는 어느 정도 건조하고 논리적으로 얘기해볼 수도 있을 거에요.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일단 그 때 느낀 그대로 이야기해보죠.
 멍하니 안개 낀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이상 징후가 찾아왔어요. 흐릿한 회색빛을 통해 소리가 들려온 거죠. 전 스스로의 감각의 순간적인 비논리성에 놀라 소리가 날만한 곳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 거렸어요. 언제나처럼 기묘한 빛의 바다와 이물의 난간, 갑판 위에 놓인 탐사 장비들이 보였죠. 그리고 모든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어요. 조금씩 음조가 다른. 시선을 돌릴 때마다 각각의 음조들은 음악의 형태가 되어 제 귀에 들려왔죠. 전 살짝 입술을 깨물며 스스로를 다잡았지만 갑작스레 나타난 당신의 얼굴에 놀라버릴 수 밖에 없었어요.
 당신은 뭘하고 왔는지 지쳐보였어요. 당신의 조금 빨라진 숨소리는 각진 도형이 되어 제 피부 위로 옮겨 다녔어요. 전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죠. 그제야 당신 옆에 있는 나타샤를 발견했어요. 그 애는 놀랄만큼 차분했죠. 전 이상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 애쓰느라 당신의 말을 미처 듣지 못했어요.
 "…은 어딨죠? 네?"
 전 여기 있어요, 하고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죠. 당신은 다시 한번 절 흔들어댔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느냐고. 전 정신을 다잡으며 선실 어딘가에 다들 흩어져있지 않겠느냐고 말했어요. 당신은 꽤나 힘들어 보였죠. 당신은 그대로 주저 앉아 시큼한 눈물을 한방울 흘렸어요. 나타샤가 주저앉은 당신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렸고요. 당신은 갑자기 저와 눈을 마주치더니 당신이 들고 있던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챙겨들었어요. 당신의 입은 바쁘게 움직여댔지만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죠. 난간이 시끄럽고 파도소리가 시뻘겋게 간지럽혔거든요. 당신이 내민 도구가 제 머리를 감싸는 동안에도 전 귓 속에 울리는 음악 소리에 정신이 팔려있었죠.
 지금와서 생각하면 타이밍이 좋았죠. 바로 그 순간이었잖아요. 폭발이. 비라타를 했지만 저의 뇌는 폭발을 그대로 감당해야했죠. 배를 감싼 안개들이 짭짤하게 제 귀에서 톡톡거렸죠. 당신의 음성이 서늘하게 제 허벅지를 짓눌렀어요. 난간과 바다와 안개 낀 하늘과 체인들과 운항실과 한구석에 매인 구명도구들과 잠수로봇이 서로 다른 온도로 음악을 울려대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어요. 세계는 혼란스러운 소용돌이였어요. 제멋대로 뒤섞인 세계 속에서 달콤한 진홍빛 뜨거움이 제 왼쪽 어깨를 통과했고 비릿한 오각형의 라 단조가 제 복부에서 출렁거렸어요. 발을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하자 세계가 거품을 뱉으며 제 눈을 귀에서 어디로든 상큼한 나선형을 했어요. 녹색 입술이 후추빛 아르헨티나와 마음대로 혼자였죠. 눈은 어디로든 지쳐가도 달은 내 머릿 속을 지나가며 살뜨게 웃었어요. 달을, 나는 느낄 수 있었어요. 달은 절 짓누르는 거대한 오각형이었죠. 당신은 계속 내게 말을 걸었어요. 당신의 말은 달콤한 더움으로 저에게 풍겨왔죠. 진회빛 구름이 입안을 가득채우고 그 사이로 햇빛이 매운 냄새를 풍기며 귀로 빠져나올 동안에도 전 당신의 말을 깨닫지 못했어요.
 돌아보지 않을 파란색 진실은 돌아가지 않으며 제게 은색 총렬감을 안겨주었죠. 혹시 투명하게 적회빛으로 빛나며 노랗게 제 몸을 태우던 싱거운 손가락의 도둑이 저의 회색빛 진실을 투명하게 질린 부리의 질감으로 짓이겨 버렸을지도 모르겠어요. 옛세계의 잊고 싶던 기억이 우주의 영원한 평화로 저의 찢어진 마음 안에 자리 잡으며 첫사랑이 담뱃재만큼이나 65스럽게 제게 달려들었어요.
 전 당신을 돌아보며 반으로 잘린 사과가 어떻게 8월의 37스러운 미지근함의 제곱이 될 수 있는지, 사탕무의 놀라운 뜨거움이 어떻게 외로운 발의 흥겨운 사 장조에서 맛이가고 빨갛게 깨물어버린 motar이 되버릴 수 있는지 물었죠. 적어도 그렇게 물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랬더니 회색 먼지들은 50으로 부르짖으며 저의 젖빛 바람을 잊혀진 칠각형의 유선형으로 바꾸고 일곱시 오십칠분의 아이보리빛으로 짖찢어진 감각들을 회전하며 매콤한 이십각형으로 바꿔놓더군요.
 지금이니까 이렇게 말하지 그 땐 정말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어요. 모든 감각이 뒤섞여버리고 순식간에 전 이미 예전엔 어떤 식으로 감각을 받아들였는지 기억할 수 없었죠. 각각의 감각에 혼란이 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어요. 감각의 통합은 제가 아는 세계의 모습을 바꿔놓고 있었으니까요. 세계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되어버렸을 뿐 아니라, 제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세계가 되어버렸죠. 선천적인 맹인이 막 개안 수술을 받은 것처럼, 신생아가 양수 밖으로 나와 쏟아지는 감각에 몸서리칠 때처럼 전 제 앞에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세계에 대해 한없는 절망 뿐이었어요. 손가락 하나 맘대로 움직여볼 수 없는 거친 신세계와 그 앞에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시간이 지나면서 감각의 혼란은 더 심해져만 갔고 절망감도 그에 함께 했죠.
 일순간의 폭발이 지나고 나서 속도는 더뎌지고 있었지만 감각의 혼란이 심화되고 있는 건 분명했어요. 처음엔 난간의 막대들이 하나의 음을 냈죠. 식초를 뿌린 레몬만큼 강렬한 음이었죠. 그러다 두 개의 음, 세 개의 음, 네 개, 다섯 개… 나중엔 각각의 막대들이 모든 다른 음을 냈어요. 강렬한 맛과 촉각이 섞인 화음이었기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죠. 그러다 음들이 재배치되면서 멜로디를 만들더군요. 각각의 막대가 같은 멜로디를 시간차를 두고 반복하더니 점차 멜로디도 분화되기 시작했어요. 결국 모든 막대가 서로 다른 멜로디를 전해왔죠. 분명 전 못 견딜만큼 힘들었지만 그것들이 소음으로 인식되어서가 아니에요. 수십개의 멜로디가 뒤섞여있었지만 하나의 음처럼 인지되서 들려왔어요. 그건 귀 뒤를 찌르는 새콤함과 비슷했죠. 마치 단순한 카논에서 복잡한 푸가로 음악이 변하는 것 같았어요. 물론 그 푸가가 짙은 냄새와 따가운 질감과 시큼한 맛과 밝은 오렌지빛의 색감과 끝없이 각진 구의 형질감을 지니고 있었지만요.
 그런 변화는 난간에만 고정된 게 아니죠. 제 몸의 감각기관이 열려있는 온 세계에서 그런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어요. 이제 세계는 미친듯이 터지는 빅뱅들의 연속이라기 보단 불분명하게 부유하는 입자들의 흐름에 가까웠어요. 아마 그건 저의 감각기관들이 새로운 상황에 조금이나마 적응을 했기 때문이겠죠. 그렇다고해서 제가 편해진 건 아니에요. 전 여전히 귀로 쏟아지는 맛과 눈으로 스며드는 냄새들 때문에 정신 없었어요. 감각의 혼란이 극한까지 심화되서 세계에서 어떤 의미와 구분도 발견하지 못하고 총체적인 감각의 자극 속에 놓여져 있었을 뿐이었죠.
 시간의 경과도 알 수 없었어요. 제가 익히 알던 시간의 경과는 익숙한 감각의 양태를 통해 아는 거니까요. 시계를 제대로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쨌거나 제겐 영겁같기도 찰나같기도 한 시간이 지나자 이제 예전처럼 분명한 선과 면으로 구분된 배와 바다도 파도소리나 얼굴을 때리는 바람의 느낌도 흐릿해졌어요.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선과 음과 향이 떠다녔죠. 눈을 감으면 안내섬광이 보이죠. 세계는 안내섬광과 이내균음과 비내포후 같은 것들로 가득 찼어요. 아니, 그런 구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어요. 감각은 단 하나의 뒤섞인 감각이었고 모든 감각기관으로 그것이 동시에 느껴졌으니까.
 아아, 당신과 나타샤는 이런 모습을 보며 살아왔을까요. 물론 그렇진 않았을테죠. 하지만 조금이나마 이와 비슷한 것을 인지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이 세계에 더 가까운 곳에서 살아왔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에요. 전 새로운 감각이 불러온 복잡한 선들을 바라보았죠. 제멋대로 휘감기고 찰랑거리며 뒤섞이는 선들 속의 전 여전히 아무 것도 해볼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였지만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새로운 감각이 만난 새로운 세계는 제게 비루한 인간사에서 한껏 도약한 듯한, 그리고 오랫동안 낯선 세계를 돌다 익숙한 곳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주었어요. 그 곳의 기억이 남아있지는 않았지만. 세계의 선들은 한순간도 분명한 양태를 갖추지 않은채 휘감겼어요. 그리고 그 속에서, 그 속에서, 의미있고 익숙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죠. 처음 만났고 마침내 만났고 그제야 만난 그들 ― 세이렌.
 네, 그 사이로 전 세이렌을 보았죠. 그건 분명히 세이렌이었어요. 전 그들이 고물 쪽에 앉아서 제게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어요. 그것은 분명한 모양을 가진 유혹이었어요.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제가 익히 알고 있는 세이렌들의 모습과는 분명히 달랐죠. 그들은 새의 날개를 가지고 있지도, 인어의 물고기 다리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어요. 딱히 무엇과 비슷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들이 가진 갸름한 눈매와 매끄러운 선 같은 것들은 언제나 절 매혹시키던 것들이었죠. 전 고물에 앉아있는 그녀들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어요. 세계가 침잠하고 그 속에서 진녹빛 찰랑거리는 서랍은 날 향해 짖어댔어요.  
 이등변 삼각형으로 나무라던 흰색 촉감이 되어버린 세이렌은 제게 영원한 기억을 약속했어요. 제가 그에 대해 구토감이 몰려오는 갈색 흙의 41로 맞서자 세이렌은 붉은 반점처럼 피부를 꿰뚫는 포이에르 바하의 새빨간 이물감으로 제게 은빛으로 향기로우며 뇌를 꿰뚫고 AH스러운, 환유를 삼키며 어디로 나갈지 모르고 검은 맛에서 부드러운 소음을 토해내는 하얗게 시든 벽으로 변했어요,
 세이렌들은 다시 한번 부르짖었어요. 그 외침은 어떤 감각으로도 분명하게 느낄 수 있고 어떤 그림자로도 느낄 수 없는 나뉘어진 후각의 불분명한 리듬감이었죠. 전 이미 그들의 존재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 상태가 아니었어요. 그저 느낄 뿐이었죠. 감각이 뒤섞인 세계에서 제가 분명히 인지할 수 있는 존재는 세이렌들뿐이었지만 그들이 예전의 감각영역에 속해있기 때문이 아니었어요. 전 그들의 미소를 보고, 노래를 듣고, 체취를 맡고, 입술을 맛보고, 피부를 어루만졌지만 그건 지금와서야 그렇게 나눌 수 있는 거지, 당시에는 그들이 세이렌이라는 깨달음과 동시에 즉각적으로 분별없이 체화된 것들이죠.
 그리고 전 그제서야 제게 일어난 일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깨달았어요. 폭발 후 한참동안 전 새로운 감각인지방식에 적응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할 뿐이었죠. 그리고 세이렌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감각은 어느 정도 정리된 형태로 제게 머물렀어요. 물론 전 완벽하게 제어할 수는 없었죠. 아무튼 그 때 어렴풋이 제가 예전 상태를 넘어선 그 무엇이 되어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젠 더이상 주변 세계가 특정한 성향을 가진채 고정되어있지 않았죠. 하나의 사물도 수십, 수백개의 이미지가 겹쳐져있어요. 제가 하기에 따라 특정한 청각 이미지나 시각 이미지를 불러낼 수 있었죠. 전 한참을 신기해하며 겹겹이 쌓인 세계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느꼈어요. 한가지씩의 오감으로만 규정된 사물들을 한번에 하나씩만 느끼며 살아온 제게 무엇이든 원하는데로 느낄 수 있는 세계가 어떤 것이었겠어요? 모든 세계는 비정형의 혼합젤리였죠. 무한히 분류되고 정의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어요. 저에게만 적용되는 세계이긴하지만 그 순간 전 새로운 세계의 창조주였죠.
 그리고 새로운 능력의 가능성에 대한 환희와 함께 불확실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함께 찾아왔어요. 예전 감각으로 느꼈던 짜릿한 순간들이 생각났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하는 것이 어렵고 힘든 길로 느껴졌죠.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세이렌들의 존재는 모든 걸 잊게 만들었어요. 그들의 충만한 존재감은 저의 시공간을 휘게 만들었고 모든 감각과 욕망은 그들을 향해 있었죠. 제 짧은 생에 그들의 존재만큼 절 미치게 만든 건 없었답니다. 모든 질문의 해답은 세이렌들의 존재였어요. 그들의 노랫소리는 절 둘러싼 채 혼연히 빛났고 그들의 눈길은 피부를 찌르며 따스하게 박혀들었습니다. 아직 미숙하긴했지만 지금의 감각에 더 익숙해진다면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열리고 그건 저와 이 세계를 조금 더 나은 무엇으로 이끌었을 거에요. 그리고 그 동안 세이렌들은 언제나 함께할 거라 믿어 의심치않았죠. 해방감,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동시에 충족되는 충만감. 저의 정신이 새로운 약속에 기뻐하며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다른 육체 곳곳도 그만큼이나 정직하게 반응하며 흥분했죠. 처음으로 완벽하게 만족한 희망감, 혈관을 타고 흐르며 진동하는 기대감. 세포 하나하나가 환성을 지르는 것만 같았죠. 그 전의 모든 첫경험보다도 강렬한 첫경험은 이러다 폭발하는 게 아닌가 싶을만큼 화려하게 절 뒤흔들었어요. 그리고 그제서야 찾아온 무엇보다 익숙한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 그제서야 전 무엇도 두렵지 않았어요.
 제가 해야할 것, 그리고 제가 원하는 유일한 것이 무엇인지 이미 깨닫고 있었죠. 세이렌들과의 완전한 합일. 이미 가까이 다가서지 않아도 세이렌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있었어요. 그들은 감각이 향하는 모든 곳에 있었으니까. 그들의 합쳐진 오감과 저의 합쳐진 오감은 오롯이 맞닿아있었죠.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지 않았어요. 세이렌들과 하나가 되어 같은 것을 느끼고 과거의 자신에서 완전히 벗어나야했죠. 그러고나면 새로운 존재로의 비상이 시작되는 거에요.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세이렌들과 저 사이엔 이미 물리적인 거리는 의미가 없었지만, 마치 무언가 불분명한 장벽이 서로를 가로막고 있는 것만 같았죠. 세이렌들의 세계와 겹쳐지려할 때마다 저의 세계는 고무벽에 부딪힌 것처럼 튕겨나왔어요. 서로를 애무하며 탐색하던 세이렌들의 감각과 저의 감각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엇갈려나갔죠. 세이렌들은 한결같이 매혹적인 미소와 노래로 저를 부르고 있었지만 저는 점점 초조해졌어요. 감각의 중첩과 함께 찾아온 세이렌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새로운 세계의 유혹은 여전히 제 주위에서 넘실거렸지만 세이렌들과 하나가 되려하면 할 수록 저를 둘러싼 결박은 심해지는 것만 같았죠. 그래요, 그건 결박이었어요. 환희에 무감각해진 저의 인식은 세이렌들과 하나가 되려할 수록 강하게 제 주변에 묶였죠. 답답했어요. 이제 새로운 세계를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데. 새로운 감각세계의 즐거움은 여전히 주변에 흩뿌렸고 전 더 괴로워졌어요. 완벽하게 그 속으로 동화되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이었죠.
 속절없는 시간들이 흐르고, 점차 주변의 세계들이 흐릿해지는 걸 느꼈어요. 당황스러웠죠. 전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어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세계는 급격하게 무너져내리기 시작했죠. 주위를 흐르는 주홍빛들에서 촉감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수많은 소리와 냄새와 모양들에서도 두번째, 세번째 감각자극들이 사라져갔죠. 가득찬 가능성들과 중첩된 질감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구체적인 사물의 윤곽들이 메워나갔어요.
 덜컥 겁이 났어요. 이대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전 세계를 향해 있는대로 감각을 열고 다중의 감각들을 받아들이려 애썼어요. 하지만 제가 막아볼 수 있는 게 아니었죠. 거대한 힘이 몰아치며 저를 그 곳에서, 그 곳을 제게서 떨어뜨려 놓았어요. 급작스럽게 다가온 만큼이나 급작스럽게 새로운 감각들은 스르르 썰물처럼 떠나갔어요. 온 몸에 힘이 빠졌죠. 마지막까지 세이렌들의 노랫소리는 제 귀를 때려대더군요.
 그리고 일순간 눈 앞의 난간이 제 시각을 강하게 때렸어요. 예전에 본 것처럼 난간은 꽉 들어찬 시각적 감흥만을 가지고 그 자리에 서 있었죠. 곧 이어 익숙한 이물의 잡동사니들과 운항실이 제 신경을 향해 달려왔고, 조용히 찰싹거리는 파도 소리와 비릿한 물 내음이 뒤이었죠. 땀에 젖은 제 몸을 분명하게 느끼며 전 그대로 주저 앉았어요. 절 향한 이전의 세계는 너무도 오래전에 겪은 것만 같았고 전 그에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야할 지를 잊어버린 것만 같았죠. 한참을 얼룩진 갑판 바닥을 내려다보며 숨을 골랐어요. 너무나 어색했죠. 아직도 폭발 뒤의 세계는 긴 여운으로 제 몸을 어루만지고 있었고 이전 세계는 제가 몸을 움직여보기엔 너무 거칠었어요. 그저 숨고만 싶었어요. 다시, 이 구태의연하고 적응안되는 감각들이 없는 세계로. 그에 상관없이 제 몸은 제 상태를 회복하려고 재빨리 움직여댔죠. 욕지기가 치밀어올랐고 전 그대로 토하고 말았어요.
 미친듯이 몸이 떨려왔고 머리는 한없이 어지러웠죠. 전 어디에도 초점을 맞추지 못한채 마구 몸을 뒤틀었어요. 틀림없이 볼썽 사나웠겠죠. 수없는 몸부림 끝에 가까스로 당신과 나타샤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 있었어요. 당신은 여전히 갑판에 주저 앉아있었고 나타샤는 그런 당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죠. 그 애는 너무나 평온해 보였어요.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더 침착해지는 것처럼 보였죠. 그 애의 얼굴에서 미약하게나마 세이렌의 잔영을 느끼고 다시 한번 몸서리쳐야했어요.
 전 여전히 다시 찾아온 이전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채 바닥에 누워 꿈틀거렸죠. 제 주변 토사물의 냄새도, 갑판의 차가운 질감도, 어느 정도 구름이 걷힌 하늘도, 그 모든 것을 느끼는 제 몸도 너무나 싫었어요. 끝없는 자괴감과 실망감 뿐이었죠. 나타샤는 그런 저를 차분히 바라보았고, 당신은 입술을 살짝 핥았죠. 마침내 당신이 나지막히 입을 열어 목소리를 제 귀에 꽂았어요.
 "끝났어요."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전 정신을 잃었어요. 아무런 감각도 없는 혼절의 세계는 되려 편안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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