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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의 스캔들

1.

그 소식을, 나는 석 달간 부산 출장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들었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선배가 연애를 하다니.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이진호가 난감한 표정으로 다가오더니 이렇게 물었다.
“원경 선배 소식 들으셨어요?”
나는 그의 눈을 마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들었어. 이제 어쩌지?”
“그러게요. 이제 어쩌죠?”
그도 역시 한숨을 쉬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는 유부남이었다. 그것도 결혼한지가 5개월밖에 안 된 신혼이었다. 나는 이진호의 낙담한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아무래도 그는 진심인 것 같았다.
‘나쁜 놈.’
그날 선배는 출장 중이었다. 그리고 오전 10시에 선배의 일에 관한 긴급 대책회의가 소집되었다. 나는 과장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내 마음 같아서는 대책회의가 아니라 계엄령이라도 선포하고 싶었지만, 그런 일로 과장이 대책회의를 열다니 제정신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과장은 선배를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게 다 눈속임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장이 나에게 물었다.
“이원경 팀장 일, 자네도 들었나?”
“예. 어제 들었습니다.”
“잘 됐군.”
과장은 곧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사 사람들이 말하는 선배에 관한 일이란 선배의 연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최근에 어렵게 입수한 군사위성 순환 스케줄이 예상치 못한 곳에 유출되어버린 일에 관한 것이었다. 첩보에 따르면 선배가 내부 스파이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2.

선배는 우리 팀의 에이스였다. 그저 직책상의 팀장이 아니라 진짜 에이스였다. 회사 내에 선배의 비행 실력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실전에서 선배의 전술적 판단을 의심할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에어쇼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비행 실력에, 누구보다도 빠르고 정확한 판단력. 그야말로 최상의 리더였다. 그런 선배가 남자를 사귀다니. 아니, 그런 선배가 회사 정보를 팔아먹다니. 그날 밤에는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했더니 선배가 먼저 나와 있었다. 무려 석 달 만에 만나는 자리였다. 선배는 반가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하얀 피부에 발그레한 볼. 나는 선배의 단발머리를 보고는 흠칫 놀랐다.
“왜? 아, 나 머리 자른 거 처음 봤구나.”
선배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격납고는 못 들어가게 하네. 무슨 보안 강화 조치라면서 조종사들도 들어오지 말래. 어제 무슨 일 있었어?”
나는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격납고 출입 제한은 전날 긴급 대책회의에 따른 후속조치였다. 회사 입장에서는 내부에 스파이가 있다면 기체(機體) 정보를 보호하는 것이 최우선인 것은 당연했다. 나는 전날 하달 받은 지침대로 대답했다.
“원주에서 비행사고가 있었대요. 아마 점검 끝날 때까지 전 지점에 비행 중지 걸렸을 거예요.”
선배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있는 일이기는 했지만 격납고를 격리하는 일은 드물었다. 더구나 그런 일로 회사 최고의 에이스 조종사에게까지 출입을 제한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가 어려운 조치였다.  
“실종이야?”
“예.”
“무슨 기종인데?”
“주력이요. 아이에프(IF) 14. 아이에프 계열은 다 72시간 비행중지래요. 마브(MAV) 계열은 24시간 중지니까 오후 임무는 마브 127로 해야 할 거예요.”
나는 선배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편대원 모두가 그랬듯이, 나는 선배의 말을 의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도 선배는 내 입에서 직접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회사에 아직도 마브 127 조종사가 남아 있다는 게 더 신기해. 아무튼 우리는 내일까지 노는 날이구나.”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긴급 대책회의 시간에 과장이 보여준 사진 하나가 떠올랐다. 요즘 선배가 만난다는 남자였다. 린 타오라는 이름의 중국 쪽 요원이었는데, 선배가 그 남자한테 빠져서 귀중한 회사 정보를 넘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에이. 농담은. 이거 몰래카메라죠. 출장 갔다가 오랜만에 돌아왔다고 그러는 거죠?”
하고 말했다.
“이게 장난으로 보이냐?”
과장이 말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아무래도 장난 같았다. 그렇게 아무렇게나 생긴 사람 때문에 선배가 정보를 팔아먹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선배가.

3.

작전 브리핑 시간이 되자 과장은 선배의 기대와는 달리, 계획대로 선배에게 임무를 맡겼다. 선배는 반쯤 졸고 있다가 고개를 들고 작전과장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프(IF) 14 파일럿인데요.”
작전과장은 자신 있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설마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겠어요? 이 팀장이야 아이에프(IF) 15가 나오면 아이에프 15 파일럿이 될 거고. 16이 나오면 16 파일럿이 되겠죠. 그러니까 이 팀장은 아이에프 14 파일럿이 아니라 우리 회사 기종 중에서 제일 좋은 기종의 파일럿 아닙니까.”
그 말에 선배는 멋쩍게 피식 웃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서 피식 웃었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과장이 내 쪽을 보면서 말했다.
“그럼 이 팀장하고 박 대리가 나가지.”
나는 계획대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예.”
더는 할 이야기가 없었다.

4.

초소형 비행체(MAV, Micro Air Vehicle)들은 전원을 많이 실을 수 없었다. 전원뿐만 아니라 카메라도 최대한 경량화해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 에너지 효율 등급은 조종사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 중 하나였다. 선배는 마브 97부터 112까지 전부, 그리고 마브 118, 120, 125 기종에 대해서 에너지 효율 부문 세계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선배와 내가 원격 조종하는 마브 127 두 기는 맨홀 뚜껑처럼 생긴 지하 격납고를 빠져 나와 연구소 건물 벽에 바짝 붙은 채로 12층까지 수직상승했다. 그 순간 건물 안에 있던 우리 직원 하나가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우리는 재빨리 창문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리고는 편대 대형을 유지한 채 천장에 나란히 붙었다.
거기까지는 건물 맞은편에 설치된 회사 카메라를 통해 현장 화면을 확인한 상태에서 조종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카메라를 이용할 수가 없었다. 마브 127에는 눈이 없었다. 다만 최대 열여덟 장의 사진을 본부로 전송할 수 있을 뿐이었다. 숙련된 조종사가 아니면 관제탑에서 전송해 주는 초록색 화면만 가지고는 3차원 공간의 모습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도 선배는 전혀 망설임 없이 길을 잘 찾아내곤 했다. 내가 내 기체의 카메라를 출입문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더니 선배가 말렸다.
“여기는 괜찮아. 사진 필요 없어. 아껴.”
내 임무는 나에게 주어진 열여덟 장을 적절히 활용해서 선배의 편대장기를 위해 주변 상황을 파악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편대장기는 그 정보를 가지고 목표물을 찾아나가야 했다. 보통 편대장기는 사진을 아꼈다. 선배는 해상도가 높은 대신 사진을 단 네 장만 찍을 수 있는 카메라를 장착했다. 카메라를 오로지 목표물을 찍는 데에만 사용하려는 의도였다.
출입문은 닫혀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잠시 후, 관제탑에서 보내 온 투시 화면에 누군가가 출입문 쪽으로 다가가 차단 장치 쪽으로 손을 뻗는 모습이 비쳤다. 출입증을 차단 장치에 갖다 대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곧 문이 열렸다. 내가 그 틈으로 빠져나가려는 순간,
“기다려. 아직.”
하고 선배가 말했다. 선배는 그 여직원이 출입문을 완전히 빠져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신호를 보냈다. 우리는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에 천장을 따라 날아서 출입문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복도를 날아가 엘리베이터 앞 천장 근처에서 기체를 뒤집었다. 다시 천장에 붙기 위해서였다. 나는 한 번에 내려앉지 못하고 동체를 천장에 살짝 부딪쳤다.
“조심해.”
선배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죄송합니다.”
하고 말했다. 조종실 뒤편에서 지켜보고 있던 작전과장에게 하는 말이었다. 마브 계열의 후반기 모델은 아이에프 계열 초기 모델만큼 성능이 뛰어났지만 조종방식이 좀 복잡했다. 게다가 나는 마지막으로 마브 계열을 조종한지가 거의 2년이 다 돼 가는 바람에 아무래도 기체 조작이 정교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변명거리가 안 됐다. 같은 조건인데도 선배는 보이지도 않는 공간 위에다 흠잡을 데 없는 곡선을 그리며 대단히 효율적인 비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제탑에서 전송해 주는 선배의 이동 궤적에는 언제나 군더더기가 없었다.
선배의 기체가 엘리베이터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번 문이 열렸지만 우리는 한참 동안이나 꼼짝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흐릿한 관제탑 화면만 보고는 그들 중 누가 27층에 가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래쪽을 향해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정보과 직원들이 우리 조종실 뒤편에 앉아서 내 기체가 보내 온 화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조건 소장실로 갈 것 같은 사람을 골라내기 위해서였다.
“아니. 아니야.”
정보 1팀장이 계속해서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천장에 매달려서 사진을 열 세 장이나 더 찍었다. 전송된 사진을 초조한 마음으로 들여다보고 있던 선배가 뒤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저 사람 아니야? 심 과장 같은데. 오늘 화요일이잖아. 보고 들어가는 날 아니야?”
그러자 정보 1팀 박 팀장도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선배는 기체를 움직여 천장을 타고 심 과장의 머리 위까지 기어갔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나 따라해.”
선배는 그렇게 말하면서 기체를 천장에서 떨어뜨렸다. 그러더니 페달을 가볍게 밟아서, 자유낙하하던 기체의 날개를 펼쳤다. 날개가 순간적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선배의 기체는 심 과장의 겉옷 맨 아래쪽으로 날아가 그 안쪽에 갈고리를 걸고 매달렸다. 날갯짓이 겨우 300회 이하였다. 뒤에서 정보과 박 팀장이 탄성을 내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린 타오 드랍(Lin Tao drop)이라는 기술이었다.
‘린 타오? 그런데 이 이름이 왜 이렇게 낯이 익지?’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선배를 그대로 따라했지만, 예상대로 겨우 심 과장의 등에 가서 달라붙는 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심 과장이 내 기체가 내는 날개 소리를 들었는지 갑자기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작전과장이 잔소리를 해 댔다. 사람들의 착각과 달리 마브는 파리 같은 모양이 아니라 누가 봐도 매끈하게 생긴 모양을 한 항공기였기 때문에, 모습을 드러나는 순간 곧바로 정체가 밝혀지게 되어 있었다. 나는 심 과장의 등을 타고 재빨리 아래로 내려가서 양복 아랫단 안쪽에 미리 자리 잡고 있는 선배의 기체 옆으로 내 기체를 숨겼다. 심 과장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다음 문 쪽으로 뒤돌아섰을 때 아무도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화면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전파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곧 관제사가 우리의 이동 상황을 알려주었다. 예상대로 심 과장은 소장실 문 앞에 가서 섰다. 아마도 결재서류를 들고 곧 문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인 모양이었다.
“비서실 지납니다. 이제 진입했습니다.”
관제사가 말했다. 그러나 투시 화면은 아직 복구되지 않고 있었다. 전파 차단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연구소장실 근처는 보안이 더 철저해서, 관제탑에서도 겨우 우리 기체가 내는 신호를 통해 현재 위치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나머지는 내 기체에 달려 있는 사진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심 과장의 옷을 자유낙하로 빠져 나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여기 한 장 찍어 봐.”
선배가 말했다. 나는 남은 네 장 중 한 장을 찍었다. 선배는 전송된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잘 따라와.”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저공비행으로 소장 뒤쪽을 향해 빠르게 돌아 들어갔다. 그런 다음 책장 맨 위 칸까지 모서리를 타고 날아 올라가서 전망이 충분히 확보되는 곳까지 기어서 이동했다. 아니, 그렇게 추정될 뿐이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저는 못 따라가겠는데요.”
뒤에서 누군가가 킥킥거렸다.
“그래? 그럼 사진이나 한 장 더 찍어 봐.”
선배가 말했다. 나는 선배의 기체 쪽을 올려다보며 나머지 세 장 중 한 장의 사진을 더 찍었다. 선배의 위치는 목표 지점에 제대로 도착해 있었다. 선배가 보이지도 않는 기체를 조종하는 모습에, 뒤쪽에서부터 또 한 번 탄성이 들려왔다.
사진에는 소장이 자기 자리에 앉아서 서류를 검토하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물은 그 문건이 아니었다. 소장 개인 컴퓨터 모니터 아래에 붙어있는 메모지를 확인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물론 그 메모지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그 모든 행위가 불법인지 아닌지는 우리 같은 조종사들의 소관 사항이 아니었다.
“목표 확인. 그럼 공격합니다.”
선배가 말했다. 그러자 잠시 후에 관제사가 대답했다.
“승인합니다.”
나는 기체 궤적을 나타내는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화면에는 지난 1.5초 동안의 궤적이 표시되어 있었는데 가까운 과거일수록 더 진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1.5초 이전의 궤적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선배가 페달을 밟자 선배의 기체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붉은색 점이었던 궤적이 짧고 진한 곡선이 되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갑자기 가늘고 긴 곡선으로 변하면서 책상 위를 향해 급강하 폭격기처럼 내리꽂혔다. 린 타오 슈투카(Lin Tao Stuka)라는 기술이었다. 그리고는 모니터 아래쪽에 붙어 있는 메모지 앞 허공에서 멈춰 섰다. 기체의 궤적이 서서히 잔상을 감추며 선배의 기체가 멈춰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발사.”
선배가 버튼을 누르자 사진 한 장이 전송되었다. 초점이 흐리고 화면도 중심에 맞지 않았다. 선배는 재빨리 초점을 조정해 가며 나머지 세 장을 더 찍었다. 그리고는 발각되기 전에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조종실 대형 스크린에 두 번째 사진이 전송되어 화면에 나타나는 순간, 나는 선배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갑자기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전송된 사진에는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이상한 그림 하나와 그 옆에 암호처럼 죽 늘어서 있는 숫자 몇 개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도 선배는 그 그림과 숫자가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는 모양이었다.  
“됐습니까?”
작전과장이 물었다.
“완벽합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사진이 전송되는 동안 정보 1팀장이 그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내 기체에 허용된 마지막 두 장의 사진을 이용해서 심 과장 쪽으로 날아가 그의 바지자락에 달라붙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여유롭게 소장실을 빠져 나갔다.
빠져나오는 내내, 나는 린 타오라는 이름을 최근에 또 어디에서 들었는지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괜히 핀잔만 들을 것 같아서 선배에게는 묻지 않았다.

5.

회사로 복귀해서 그날 선배의 마브가 그린 궤적을 처음부터 복습하고 있는데 작전과장이 나를 따로 불러내더니 이렇게 물었다.
“어때? 이 팀장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지?”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나는 선배만큼 유능하지가 못해서 그런 이상한 그림이며 암호 따위는 당연히 읽을 줄을 몰랐다. 하지만, 선배의 눈 속에 나타난 마음의 동요를 읽어내는 일이라면 절대로 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선배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과장이 대답을 기다리는 듯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렇지? 자, 1단계는 걸려들었고…….”
과장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2단계는 다음날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선배는 출근하자마자 운항관제과에 가서, 전날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는 길에 비둘기 몇 마리가 우리 마브 127을 벌레로 오인하고 공격해 온 것에 대해 항의했다. 결국 배트 팀(BAT, bird alert team, 조류퇴치조) 장유형 팀장이 직접 사과했다. 선배가 얼굴이 벌게져서 조종사 대기실로 돌아오자 작전과장이 선배를 불러서 말했다.
“어제 사진 최고였어. 어제 하필 아이에프 기종이 비행중지 걸렸다고 클라이언트가 불만이었는데 그 사진 보고는 아무 소리도 못했대요. 지점장이 보너스라도 챙겨 주라는데, 그거야 내가 챙겨줄 일은 아니고, 오프나 주지 뭐. 집에 갔다가 내일 오후에 나와요.”
“인심 쓰시네요. 어차피 비행 중지 걸려 있어서 일감도 없으면서.”
그렇게 사양하는 투로 대답하기는 했지만, 선배는 곧 멋쩍은 표정으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뭐, 가라는데 굳이 남아서 벌 설 필요는 없죠. 근데 박 대리는 오프 안 줘요?”
선배가 내 쪽을 보면서 과장에게 물었다. 그 덕에 나도 역시 오프를 허락받았지만 어차피 나는 곧 계획대로 회사에 복귀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퇴근하지 않는 편이 편했다. 그래서 근처에서 점심 약속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회사에 남았다.
함정인 줄도 모르고 기분 좋게 퇴근 준비를 하는 선배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선배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안 좋았다. 그러나 선배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 이상 과장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과장은 회사 안에서 선배를 흠모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선배가 곧 자기 자리를 치고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전날, 과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자, 1단계는 걸려들었고. 그걸 봤으니 이제 최대한 서둘러서 연락책을 만날 거야. 2단계는 내일 아침에 시작하면 되겠는데.”
“거기에 뭐라고 써 있었는데요?”
내가 그렇게 물었지만 과장은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그저 입가에 기분 나쁜 표정을 떠올릴 뿐이었다.
나는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 선배에게 다가갔다. 작전과장이 은근한 눈빛으로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닌지 감시하는 눈초리였다. 나는 그 부담스러운 시선 때문에 온몸이 부자연스러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선배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요즘 만나는 분 있다면서요.”
“응. 들었어?”
“얼마나 됐어요?”
“한 여덟 달쯤.”
“어떻게 저한테 그걸 감쪽같이 속이실 수가 있어요?”
“속인 게 아니라,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하기도 그렇고, 말하려고 했는데 박 대리 출장 가는 바람에. 전화로 할 이야기도 아닌 것 같고.”
선배가 말했다.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럼 오늘도 데이트?”
“응. 점심이나 얻어먹으려고.”
다시 선배가 만난다는 그 남자의 사진이 떠올랐다. 설마. 진짜 사귀는 사이일 리가 없었다. 선배 주위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그런 사람을. 그럴 리가 없었다. 과장이 선배를 꺾어버리기 위해 억지로 꾸며 낸 음해 공작이 분명했다.
선배가 나가고 3분 뒤에 작전 3팀과 정보과가 합동으로 선배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6.

선배를 미행하는 임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브를 이용해서 미행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날개 소리가 조금이라도 들린다면 선배는 금방 미행을 눈치 챌 것이 분명했다. 에이스 조종사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조종사로서 선배는 최고였다. 공군에서 나와 지금 회사로 옮겨 오면서 나는 우선 마브 조종사 면허 시험을 새로 준비해야 했는데, 그때 회사에서 내 아이에프(IF, Insect Flight, 곤충비행) 과목 교관으로 배정해 준 사람이 바로 선배였다.
“플래핑 플라이트(flapping flight, 날개를 붙였다 떼는 순간 일어나는 기류를 이용하는 곤충들의 비행 원리) 같은 건 알아서 뭐에 써요? 정비사 면허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파리를 기체로 보지 말고 조종사로 보란 말이에요. 박영진 씨가 이 공간에 파리만큼 멋진 궤적을 그릴 수 있으려면 몇 년이나 걸릴 것 같아요?”
선배는 그런 식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나는 살면서 그렇게 스트레스가 심했던 적이 또 있었나 싶었다. 우리는 사방이 흰 색으로 된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 나란히 앉아서 오후 내내 파리가 날아가는 궤적을 넋 놓고 바라보곤 했다. 나는 그 넉 달간의 훈련 일정 중에서도 특히 음향 탐색 훈련 과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 방에 모기는 없어요. 대신에 저 구석에 있는 스피커들이 입체 음향으로 가상의 모기 소리를 만들 건데요. 그 가상 모기가 있는 지점은 딱 한 점이에요. 말소리를 내면 모기 소리가 안 들리니까 이렇게 마주보고 앉아서 눈으로만 정답 있는 곳을 가리키는 거예요. 소리는 반복 없이 한 번만 들려요. 자, 그럼 연습문제부터.”
나에게는 연습문제부터가 까다로웠다. 가상 모기 소리는 사실 잘 들리지도 않았다. 선배는 내 눈동자가 향하는 쪽으로는 아예 시선을 옮기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어 댔다. 남들은 다 잘 한다는데, 나는 도저히 정답을 맞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데나 찍어서 쳐다보고 있으면 선배는 내 눈을 콕 찔러버릴 기세로 나를 노려보곤 했다. 나는 사흘간 단 한 번도 정답에 다가가지 못했다.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가끔씩 선배가 고개를 끄덕일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선배가 임무 포기 신청서를 작성하려는 것을 힘들게 뜯어 말려야 했다. 나는 좀 더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날 오후 늦게, 내가 드디어 다섯 문제를 연속으로 맞히는 것을 보고 나서 선배의 얼굴에 서서히 떠오르던 그 희열을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은 볼이 발그레한 게 참 보기 좋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음 문제 역시 정답이었다. 선배는 그동안의 엄격했던 표정을 감추고 원래의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사람은 웃는 모습이 진짜 예쁘구나.’
나는 일곱 번째 문제 역시 놓치지 않았다. 그러자 선배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로 변해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문제 몇 개에 감동하다니, 내가 그렇게 멍청한 학생이었나 싶었다. 그리고 여덟 번째 가상 모기가 날았다. 5초 동안 엥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확실히 귀가 열려 있었다. 이번에도 정답이 어디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곳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선배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가 눈으로 물었다.
‘정답 어디에요?’
나도 눈으로 대답했다.
‘거기요.’
‘어디?’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곳. 선배 그 눈 앞.’
나는 선배와 두 눈이 마주쳤다. 물론 정답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이었다. 그 순간 선배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그 어마어마한 환희를 나는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절대 놓칠 수가 없었다. 눈을 깜빡일 수조차 없었다. 살아있는 동안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선배가 느끼는 그 희열이 나에게도 전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 순간 나는 이성이 마비되어 버렸다. 합리적 행위자고 뭐고 따져 볼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만 이렇게 말해 버리고 말았다.
“사랑합니다.”

7.

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현장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도저히 감이 안 잡혔다. 점점 미쳐가는 과장을 그대로 놔 둘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선배를 미행하는 임무에 자원했다.
우리 작전 트레일러는 선배가 있는 곳으로부터 걸어서 5분쯤 되는 곳에 서 있었다. 과장은 선배가 아무래도 접선 장소를 야외로 정한 모양이라고 말했다. 바람이 꽤 심하게 부는 날이었다. 과장은 아이에프 11과 13을 동시에 대기시켰다.
“미치겠네.”
어느 빌딩 앞에서 펄럭이고 있는 깃발들을 보고 과장이 말했다. 아이에프 11은 시리즈 중에서도 야외 활동 성능이 제일 뛰어난 기종이었지만, 그 대신에 소음이 좀 큰 편이었다. 아이에프 13은 소음을 줄이는 데 특화된 데다 공중에서 멈출 수도 있는 도청 전용기였지만 바람이 심한 날에는 비행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과장은 어느 기종을 택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선배는 예상지점, 그러니까 그 남자의 표면상 근무지인 ○○ 연구소 근처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접촉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작전과장을 돌아보았다.
“뭘로 출동할까요? 이제 스탠바이 해야 되는데요.”
그러나 과장은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자 곧 트레일러에 타고 있던 요원 전부가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이에프…….”
그때 기상팀장이 긴급보고를 해 왔다. 모르긴 해도 일부러 그 순간까지 기다린 눈치였다.
“바람이 잡니다. 약 3분 뒤에.”
그러자 과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다음 지시를 내렸다.
“아이에프 13.”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8.

아이에프 13은 내가 조종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정교한 기체였다. 하지만 선배의 주기종인 아이에프 14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기종이었다. 그래서 선배는 유독 이 기종만을 ‘아이에프’가 아닌 ‘이프’로 불렀다. 이프 14의 테마는 나비였다. 아이에프 3보다 먼저 개발에 착수해서 아이에프 13보다도 늦게 완성된 이 기체는, 나비처럼 생겼고 나비처럼 날았다.
“아니. 0.85초 먼저 조작해야 된다니까. 그러려면 2초 먼저 생각해야지.”
나는 장기 출장 때문에 미처 이프 14를 숙달시킬 기회가 없었다. 이 기체는 커다란 날개 때문에 몸체를 완전히 숨길 수가 없는 대신 완벽하게 나비로 위장했다. 그래서 나비처럼 불규칙하게 날았다. 불규칙하게 날면서 순식간에 목표 가까이에 다가가서 사진을 찍고는 다시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재빨리 그 자리를 이탈했다. 이프 14가 지나간 궤적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인간 조종사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임무 시간 17분 내내 규칙 없이 움직이는 것. 규칙적으로 날아가는 나비는 나비가 아니었다. 그래서 개발자들은 그 복잡한 움직임을 자동 조종장치에 맡겼다. 대신 조종사가 지시하는 방향에다 그 불규칙한 움직임을 적용시키기 위해 0.85초의 준비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어떻게 겨우 2초 앞도 못 내다봐?”
선배는 모퉁이를 돌 때마다 자꾸만 벽에 부딪치는 내 훈련기를 보고 짜증을 냈다. 나는 단 2초 앞도 못 내다보고 그렇게 사랑에 빠져 있었다. 상대는 달랐지만, 선배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9.

선배가 조종하는 이프 14를 맨손으로 잡으려고 해 본 적이 있었다. 선배의 기체는 내가 손을 뻗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아래로 휙 떨어져서 내 손을 빠져나갔다. 무려 2초 전에 판단하고, 0.85초 전에 조작한 그대로였다.
나는 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아이에프 13을 선배에게 접근시켰다. 선배의 단발머리가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내 기체가 심하게 휘청거렸다. 선배는 건물 입구에 멈춰 서 있지 않고 근방을 계속 맴돌았다. 계속 따라다니다가는 들키고 말고 하기 전에 전지가 먼저 소진되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갑자기 전화 통화를 해서 약속 장소를 옮겨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에 현장을 놓치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선배를 따라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전지가 거의 소진되자 이진호가 새 기체를 가지고 접근해 왔다. 나는 그 기체 조종석으로 옮겨 앉았다. 미끼용 마브 세 기가 내 기체를 대신해서 비둘기들의 공격을 받고 사라졌다. 작전과장은 서서히 애가 타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이미 비용 지출이 만만치 않았다. 만약 선배가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산책이나 하다가 그대로 돌아가 버린다면? 과장은 어느새 얼굴 표정이 굳어져 갔다. 아무래도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작전인 듯 했다.
초조한 기다림이 이어졌다. 이진호가 다시 새 기체를 가져올 때까지 마브가 둘이나 더 희생되었다. 이제는 작전을 철회할 수도 없을 만큼 돈이 많이 들어간 상태였다. 마침내 문제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과장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고민에 잠겨 있었다.
“린 타오가 나왔습니다.”
이진호가 말했다. 과장은 목표물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들고 내 쪽으로 바짝 다가왔다. 나도 그 순간 깜짝 놀라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린 타오? 그 린 타오? 린 타오 슈투카를 개발한 그 린 타오? 선배의 우상이라는 바로 그 사람? 나는 아이에프 13으로 선배 뒤편으로 접근해 갔다. 거의 바닥에 붙을 만큼 낮은 고도였다.
남자는 선배를 보고 다소 사무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보팀이 촬영 중인 화면에 두 사람의 모습이 확대되어 나타났다.
‘뭐야 저게?’
나는 그렇게 소리를 지를 뻔 했다. 회사 코앞에서 30분이나 선배를 기다리게 만들고도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인간. 선배가 사랑에 빠져서 정보를 넘기기까지 했다고 의심받게 만든 인간. 나는 그의 몰골을 보고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마음이 놓였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작전과장이 얼마나 어이없는 거짓말을 지어내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땅딸막한 키에 두툼한 볼. 뭘 걸쳐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몸에 씌워져 있는 비싼 정장. 딱 중국 남쪽 지방 사람들처럼 생긴 ‘아저씨’였다. 작전과장도 정보과장도 둘 다 미친 게 분명했다. 어떻게 그런 인물을 선배와 연결시킬 생각을 했을까.
내가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사이 그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잡히지 않았다.
“뭐하는 거야! 박 대리. 안 들리잖아. 더 붙어!”
과장이 소리를 질러댔다.
“이 팀장님이잖아요. 조심해서 붙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둘러댔다. 나 역시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에프 13이 두 사람 쪽으로 바짝 다가가서 공중에 멈춰 섰다. 그러자 먼저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서두르면 안 돼요?”
서두르다니. 나는 선배에게 무슨 딱한 사정이 있었는지 짚어 보았다. 가족 중에 위독한 사람이 있었는지, 혹시 급하게 돈을 구할 일이 있지나 않을지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짚이는 데는 없었다. 다시 한 번 바람이 지나갔다. 아이에프 13이 휘청하면서 아래로 내려갔다가 잠시 후에야 정상 고도를 회복했다. 과장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역시 뭔가 눈치 챘어. 당장 정보 처분하고 사라질 생각이구만.”
나는 숨을 죽이고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과장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입술을 움직이는듯 하다가 이내 말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작전 트레일러에서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두 사람이 갑자기 내 기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과장이 또다시 소리를 질러 댔다. 나는 내 기체를 잠시 뒤로 물렸다가 다시 두 사람을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계속 기다리라고만 하고.”
다시 선배 목소리였다. 선배답지 않게 말끝이 흐려져 있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손끝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옆에서 과장이 흥분한 목소리로 뭐라고 떠들어대는 바람에 대화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조종석 앞쪽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아이에프 13도 귀를 세우고 두 사람 곁으로 바짝 다가갔다. 정보팀 하 대리가 음향 필터로 바람소리를 제거했다. 나는 화면에 비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어울리지가 않는 그림이었다. 선배가 굽 높은 신발을 신고 있는 게 아닌데도 두 사람은 키가 거의 비슷했다.
“하 대리. 발소리도 없애줘.”
나는 그렇게 속삭였다. 그러자 아이에프 시리즈 제작사에서 그렇게도 자랑해마지않던 그 ‘선명한 고요’가 트레일러 안을 감쌌다.
“제가 뭐 못 해 드린 거 있어요? 해 달라는 거 다 해 줬잖아요.”
또 선배 목소리였다. 설마. 그럴 리가 없었다. 해 달라는 걸 다 해 주다니. 이 선배가.
“제가 언제 그런 걸 바랐나요? 원경 씨가 좋아서 한 거잖아요.”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선배는 갑자기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나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야기가 영 이상한 데로 흘러가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이 할 대사를 바꿔서 읽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른 앵글. 다른 앵글.”
내가 그렇게 부탁하자 하 대리가 다른 각도에서 촬영 중인 화면을 보내 왔다.
“좀 더 가까이.”
앞쪽에서 두 사람을 잡은 화면이었다. 남자가 두 걸음쯤 앞서 나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선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내려앉은 것은 가슴이 아니라 아이에프 13이었다.
“우는 거예요? 이러지 말죠. 회사 앞인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배려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선배가 느끼는 모멸감 이상의 모멸감이 내 얼굴에 확 끼얹어진 기분이었다.
“저격수 없어, 저격수?”
흥분이 그대로 묻어나는 내 목소리에, 여기저기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기상팀 송정주나 정보팀 황 팀장 같은, 선배의 추종자 무리들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전혀 웃을 일이 아니었다. 나는 겨우 저런 인간 때문에 선배가 그 긴 머리를 미련 없이 잘랐을 것이라는 생각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가 ‘단발머리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하고 던진 말을 듣고 선배가 며칠을 혼자 고민하는 장면을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림이 그려지지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됐다. 선배가 도대체 왜? 저 눈물은 또 뭐고?
선배는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도로 집어넣으려는 듯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빠른 걸음으로 남자를 뒤따랐다. 아이에프 13이 그 뒤를 따랐다. 선배가 갑자기 남자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저기요. 나 뭐 알아낸 거 있어요.”
나는 아이에프 13을 그 자리에 정지시켰다. 앞서서 걸어가던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선배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남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선배 쪽을 바라보았다.
“왜요? 그 이야기는 회사 앞에서 해도 돼요?”
그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는 바람에 선배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 거잖아요. 그냥 정보만 빼 가면 그만이잖아요.”
남자가 또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그는 돌아서서 다섯 걸음쯤 더 가다가 다시 선배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가 팔을 벌려서 선배를 감싸 안으면서 말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다. 선배를 감싸 안았다기보다는 그가 선배에게 매달려 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러운 그림이었다. 하지만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작전과장은 지상 작전팀에 출동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이제 자백 거의 다 나왔으니까, 전원 대기해. 신호하면 둘 다 체포해. 무기 소지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저격수도 조준하고 대기해.”
나는 저격수라는 말에 깜짝 놀라서, ‘이건 또 뭔가’ 하는 표정으로 과장을 올려다보았다. 과장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무전기에 대고 이렇게 덧붙였다.
“명령이 있을 때까지 절대 쏘지 말 것.”
내 귀에는 그 말이 ‘명령 즉시 사살할 것!’으로 들렸다. 과장은 미친 게 분명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 내가 저격수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낄낄거렸던 사람들도 이번에는 모두가 숨을 죽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했다. 선배는 스파이 용의자였다.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면 이쪽에서도 제압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 일에 개입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1년 반이 넘도록 그렇게 열심히 쫓아다녔건만, 선배는 내가 남자로 보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가보다 했다. 근사한 사람을 많이 만나다 보니 워낙 눈이 높은가보다 했다. 그래도 사람이 진심으로 다가가면 언젠가는 알아주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선배에게 보이려고 조종 실력도 열심히 연마했다. 그런데 그게 다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다니.
‘눈이 높기는, 개뿔!’
나는 조종간에서 손을 떼 버렸다. 그러자 아이에프 13이 허공에 가만히 멈춰 섰다. 과장이 다그쳤다.
“뭐해? 정신 똑바로 차려. 이 일 놓치면 알아서 해.”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과장에게 대들었다.  
“저격수까지 깔아 놓고, 여차하면 진짜로 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미행한 겁니까?”
“자네 팀장이 팔아먹은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기나 해?”
과장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진지하고 살벌한 음모에는 손을 대고 싶지 않았다. 선배에 관한 것이라면 더 그랬다. 게다가 나는 영 상황이 정리가 안 됐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선배가 그 남자에게 말하는 소리가 아이에프 13를 통해 전해져 왔다.
“자. 이거. 한국군 공격위성 스케줄이에요. 변경된 계획인데, 배치 간격 보면 알겠지만 이 궤도에 위성 하나가 더 들어올 것 같아요. 가져가세요. 그리고 이게 마지막이에요. 회사도 그만 둘 거고, 이제는 줄 게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가 버리세요.”
과장이 애타게 기다리던 증거 화면이었다. 선배의 고백에, 아니 자백에, 나는 그만 어이가 없어졌다. 과장이 옆에서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넌 이제 끝장이야.”

10.

나는 곧 트레일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현장으로 달려가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장 선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멀리서 지상 작전팀이 두 사람을 체포하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빌딩을 돌자 조금 전까지 아이에프 13을 몰고 가 있었던 작전 현장이 보였다. 선배는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서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 속으로 얽혀 들어가게 되어 있었지만, 선배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아이에프 13을 아예 꺼버리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그만해요! 도청중이에요! 도망가요!”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가라는 거지? 이제 와서 선배가 어디로 도망칠 수 있지?’ 과장 말처럼 선배의 경력은 이제는 끝장이었다.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가던 지상 작전팀 요원 몇 명이 내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서 속도를 높였다. 곧 숨이 차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소리를 지르면서 선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선배가 내 쪽을 돌아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격수 있어요! 총 꺼내면 안 돼요!”
나는 두 손으로 저격수들이 매복하고 있는 위치를 각각 가리켰다. 아직은 선배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굳어버린 에이스의 표정을 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도망치라고 소리치고 있기는 했지만 도망치는 뒷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달려가서 도대체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선배와 린 타오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선배의 눈이 불안한 궤적을 그리며 주위를 맴돌았다. 이윽고 선배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대충 감을 잡고는 갑자기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허공을 향해 그대로 멈춰 섰다. 사실 선배의 시선은 허공이 아니라 내가 버리고 온 아이에프 13이 소리 없이 날개를 휘젓고 있는 곳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이제 선배의 표정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려 눈으로 들어갔다. 따가웠다. 선배가 당황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연기가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과장이 제대로 짚은 것이다.

11.

“사랑합니다.”
“네? 됐거든요. 면허도 없는 조종사는.”

12.

선배는 그만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이 내 눈에는 따갑게 느껴졌다. 선배가 내 눈을 보면서 손가락으로 아이에프 13을 가리켰다.
‘저거 박 대리 전용기잖아. 저건 왜 혼자 저러고 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미행하는 데 끼여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선배는 절망에 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말없이 선배를 바라보았다. 부디 그 절망이 겨우 저런 남자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기를. 정보를 누설하다가 발각된 것 때문이기를. 그러다 이제는 그 둘 다 아무 의미가 없었다.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었다. 빠져나갈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나는 내가 작전 트레일러를 빠져나와 선배에게로 달려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다만 과장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 대기 전에 내 눈으로 직접 현장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선배. 진짜에요? 과장님이 하는 이야기, 모함이죠?”
그렇게 물었지만 선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선배는 옆에 서 있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그런 눈빛이었다. 비록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그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눈으로 다른 사람들 쳐다보다니. 가슴이 아팠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튼 저 옆에 서 있는 남자는 한때 세계 최고의 마브 조종사였으니까. 그리고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마브 궤적을 남겼던 사람이니까.
“선배님. 기다리고 있을게요.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다 지나가고 나면 우리 독립해서 같이 회사 하나 차려요. 고객관리하고 있을께요.”
내가 그렇게 작별 인사를 건넸지만, 선배는 내 마지막 인사마저 받아주지 않았다. 뽀얀 피부에 발그레한 볼. 선배의 두 눈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만 같았다.
‘됐거든. 2초 앞도 못 내다보면서.’

13.

“선배. 자꾸 농담으로 듣는 것 같은데, 진지하게 말하는 거거든요. 저 선배 좋아해요.”
대답 대신 선배가 조종하는 이프 14가 내 눈앞을 어지럽게 팔락거렸다. 나는 손을 휘휘 젓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내가 손을 뻗는 순간 이프 14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빠져나갔다. 아무런 패턴도 없이 자꾸 손에서 빠져나가기만 하는 흰색 나비 때문에 나는 슬슬 짜증이 났다. 이번에도 선배는 내 말에 아무 대꾸도 해 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어깨에서 힘을 뺐다. 그리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손을 내밀자마자 이프 14가 날아와 내 손바닥 위에 앉았다. 나는 그 흰 날개를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뽀얀 날개에 발그레한 무늬.
아무래도 그대로 놓아 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손바닥 위에 놓인 나비를 잡으려고 손을 오므렸다. 바로 그 순간에 이프 14가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어떻게 알았을까? 그 순간에 내가 손을 오므릴 줄을. 나도 몰랐는데. 이프 14는 내 손을 벗어나더니 내 눈앞에 이때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환상적인 궤적을 그렸다. 그러고 보니 나는 선배가 만들어 내는 그 아름다운 곡선에 단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한참 만에 선배가 내 말에 대꾸했다.
“됐거든. 2초 앞도 못 내다보면서.”

14.

2초 뒤에, 선배는 옆에 서 있던 남자의 품에서 총을 꺼내더니 총구를 자기 옆머리에 갖다 댔다. 바로 내 눈앞에서 영원처럼 긴 2초가 흘렀다. 하지만 아무리 길게 느껴져도 2초는 결국 2초일뿐이었다. 말릴 틈도, 놀랄 틈도 없었다. 심장이 멎어버릴 틈도 없었다. 그 2초가 지나자 선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115.2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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