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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가짜뉴스 (3) 아보카도

2020.01.26 14:3301.26

1995년 12월 24일. 오후 3시 22분. New York. Waldorf Astoria Hotel.

평생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 저자가 서명한 초판본. 그것도 저자로부터. 직접. :) 1932년생은 모두 축복받아 마땅하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존 윌리암스, 블라디미르 보이노비치, 피터 오툴, 글렌 굴드, 로이 샤이더, 법정 스님, 보데가스 무가, (노태우 빼고)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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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2월 2일. 오후 3시 22분. 서울. 태평서적

 

변호사를 불러 달라고 말하자 아보카도(열대 아메리카 산 녹나무과 과일)를 한 알 가져다 주었다. -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 p.20. 움베르토 에코

 

1995년 8월 25일 초판 3쇄에서 발견한 대목이다. 물론, 움베르토 에코가 아보카도에 주석을 넣어서 글을 썼을 리는 없다. 번역가가 번역 대본으로 사용했다고 밝힌 <How to Travel with a Salmon & Other Essays>의 해당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I asked for a lawyer, and they brought me an avocado.

 

영어 번역본에는 아보카도에 주석이 달리지 않았다.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아보카도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괄호 안에 주석을 넣은 것이다. 한편, 영어 번역본은 윌리엄 위버(William Weaver)가 작업했고, 원저자인 움베르토 에코가 빼어난 번역가로 칭찬한 사람인데다가 영어 번역본은 항상 움베르토 에코와의 공동작업으로 진행하기에 한국어 번역본보다 신뢰가 갈 수밖에 없다. 움베르토 에코가 쓴 이탈리아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Ho chiesto un avvocato e mi hanno portato un mango.

 

보다시피 원문은 '아보카도'가 아니라 '망고'로 되어 있다. 한국어 번역본의 '변호사', 영어 번역본의 'lawyer'는 이탈리아어 원본에는 'avvocato'이다.  즉, 이탈리아어에서는 '아보카토'라는 발음으로 말장난을 했는데, 영어 번역에서는 이 말장난의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망고를 아보카도로 바꾸었지만, 한국어 번역본만 보아서는 이게 어떤 종류의 언어의 유희인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1998년 12월 2일. 오후 3시 22분. 베를린, Dussmann das KulturKaufhaus.

베를린에서 가장 좋아하는 서점, 운터 덴 린덴 슈트라세에서 모퉁이를 돌아 프리드리히 슈트라세 90번가에 있는 두스만에서 이 책의 프랑스어와 독일어 번역본을 찾아 해당 문장을 비교해 본다. 

 

J’ai demandé un avocat, on m’a apporté une mangue.

Ich verlangte nach einem Advokaten, und man brachte mir eine Avocado.

 

프랑스어 번역본의 '망고(mangue)'는 이탈리아어 원본, 독일어 번역본의 '아보카도(Avocado)'는 영어 번역본을 참고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독일어로 변호사는 Rechtsanwalt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지만 역자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Advokat라는 단어를 사용한 듯하다. 흠...

 

2002년 2월 25일. 오후 3시 22분.  GMT 9+

2000년 6월 20일 열린책들에서 개역증보판 12쇄로 출간한 움베르토 에코의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는 방법>은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의 개정증보판이다. 옮긴이는 역자후기에서 영어 번역본에 대한 문제점을 짚었고, 프랑스어 번역본을 토대로 번역을 했음을 밝혔는데, 기존에 출판된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과는 여러 모로 다른 번역이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내가 변호사를 불러 달라고 하자, 한 종업원이 망고 한 개를 가져다 주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프랑스어 번역본을 토대로 했기에 '아보카도'가 아닌 '망고'로 번역되어 있다. 한편, 이 문장에는 다음과 같은 긴 각주가 붙어 있다. 

 

이탈리아 어에서 변호사를 뜻하는 <아보카토 avvocato>와 열대 아메리카 산 열매의 하나인 <아보카도 avocado>의 소리가 비슷하다는 점을 이용한 일종의 언어 유희. 즉, 종업원에게 <아보카토>를 요구했더니, 그것을 <아보카도>로 알아듣고, 그 열매 대신 망고를 가져왔다는 것. 프랑스 어에서는 둘 다 <아보카>라고 하기 때문에 이 언어 유희가 더욱 잘 통한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변호사를 보통 lawyer(물론 advocate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는 변호사라는 뜻보다는 대변자나 주창자의 뜻으로 쓰인다)라고 하기 때문에 이 대목의 묘미가 사라진다. 아마도 그 때문에 영어판 번역자는 <변호사-아보카도-망고>의 연상 사슬에서 망고를 빼버리고, 그냥 <변호사를 요구했더니 아보카도를 가져왔더라>하는 식으로 처리했을 것이다. 이해할 사람은 이해하고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웃지 말고 그냥 넘어가라고 말이다. 

 

매우 상세한 주석이다. 이 주석 덕분에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보다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는 방법>의 한국어 번역본을 읽은 독자들이 이 말장난을 좀더 쉽게 이해하게 되었을 게다. 심지어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저서를 읽은 전세계의 여러 독자들 가운데 유독 한국인 독자만 이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을 테고. 역자에게 고맙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역자가 독자의 지적 수준을 사전에 규정하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독자가 이해하지 못할 만한 대목에는 즉시 개입해서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보카도'조차도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의 역자는 '열대 아메리카 산 녹나무과 과일'로,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의 역자는 '열대 아메리카 산 열매의 하나'라고 설명하고 있다. 움베르토 에코가 이 글을 쓴 1986년, 이탈리아에서 아보카도는 흔한 과일이 아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인 움베르토 에코는 주석을 달지 않았다. 왜일까? 독자의 지적 수준을 존중했기 때문이며, '그냥 쓰면 독자가 이해하지 못할 텐데, 여기서 웃어주지 않으면 어쩌지?'하는 우려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어 원문에서 주석이 아닌 본문의 문장 하나를 살펴본다. 

 

È vero e io lo so.

 

'그건 사실이고 나는 안다.'라는 매우 간단한 문장이다.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에는 '옳은 얘기다'로,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는 '맞는 말이다. 나는 경험을 통해 그것이 사실임을 알고 있다.'로 번역되어 있다. 영어 번역본에는 'The newspapers are right, and I know it'으로 옮겨져 있다. 

 

역주, 그러니까 원저자가 붙이는 주석이 아닌 역자가 붙이는 주석이 페이지나 장의 말미에 주렁주렁 달려 있거나, 본문에 길게 해설하는 식으로 되어 있는 번역본은 양말을 네댓 켤레 겹쳐 신고 산책을 하는 것처럼 사고의 경쾌한 발걸음을 붙잡는다. - 이 문장도 그러하다. '그러니까 원저자가 붙이는 주석이 아닌 역자가 붙이는 주석'이라는 걸 넣은 건 역주라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독자를 위해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 이 문장도 그러하다. 내가 쓴 문장을 본문에서 길게 해설하고 있다. - 이 문장도 - 이 문장도... (중략/후략)

 

원저자가, 혹은 역자가 주석을 동원해서 상세하게 해설하는 가이드라인을 통해 독자는 독서라는 제2의 창조적 행위를 사전에 차단당한 채 단 하나의 길로만 터벅터벅 걸어가게 된다. 20세기 말엽에 시작되어 21세기에는 전세계에 걸쳐 만연하고 있는 바로 이러한 점이 인간의 사고능력을 심각하게 저하시키고 있다. 비단 번역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직장에서, 개인적인 삶의 모든 부분에서 인간은 점점 더 생각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고, 이로 인해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특성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2017년 12월 18일 오후 8시 22분. 롯데월드몰. 롯데씨네마. 

<스타 워즈 - 라스트 제다이>를 보고 있다. 캐릭터가 등장할 때마다 자막으로 그 캐릭터에 대해 설명을 해 준다. 마스터 요다가 누구인지 모르는 이들을 위한 섬세한 배려인 듯 하다. 그런데 X-Wing과 라이트 세이버, 밀레니엄 팔콘은 그렇다 치고, 추바카의 비명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R2D2와 C-3PO가 열심히 일하지 않은 탓이다. 영화는 망작으로 기억될 듯하다.

'우우우어어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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