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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가짜뉴스 (2) 값싼 남자

2020.01.23 07:2301.23

​2019년 6월 11일 오후 3시 42분. GMT +9

 

아사히 신문사의 Foreign Affairs 팀에서 근무하는 엔도 유지와의 통화를 마치고 통화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이메일로 송부했다. 이메일로 상세한 내용을 정리해서 보낼 계획이었기에 통화는 1,2분 정도면 충분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정확한 액센트와 인토네이션의 영어를 구사하는 일본인인데다가 담당 부서의 특성상 국경 너머의 사건에도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좀더 많은 대화를 나누어 보고 싶었다. 통화를 마치고 통화기록을 보니 전체 통화 시간이 36분이 넘었다. 조금 지친다. 

 

스티븐슨의 <보물섬> 앞머리에는 베이컨 에그란 단어가 몹시 매력적으로 나온다. 험상궂은 해적이 숙박집 주인에게 하는 대사가 ‘나는 값싼남자야. 럼주와 베이컨 에그만 있으면 충분하지’이다. 세상에, 이 얼마나 해적다운 발언인지! 그의 식탁에 올라간 베이컨 에그는 엄청나게 맛있을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 <사람이 귀엽게 보이는 높이>, p.296. 모리미 도미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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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에서부터 번역이 몹시 거슬린 책이기에 새벽 안개가 가득한 강가를 산책하듯 대략적인 감으로 저자의 오리지널 텍스트를 상상하며 읽어내려가다가 만난 단어 하나에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진다. 값싼 남자? 빌리 본즈가, 보물섬 지도를 거머쥔 터프한 해적이 스스로를 ‘값싼남자’라고 칭했다고? 종이책을 읽는 장점은 텍스트에 대한 화풀이를 그 즉시 할 수 있다는 것. 집어 던질지, 찢어버릴지 잠시 고민하다가 계속 읽어본다.

 

나는 ‘벤보우 제독 여인숙’에 묵는 해적이며, 베이컨 에그와 럼주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는 험상궂고 거친 남자라고 상상해본다. 그리고 ‘나는 값싼 남자야. 럼주와 베이컨 에그만 있으면 충분하지’ 하고 지껄이는 것이다. 이런 상상만으로 베이컨 에그는 세 배쯤 더 맛있어진다.

 

연이은 문단에서 빌리 본즈를 ‘값싼 남자’로 묘사하고 있다. 더구나 두번째 문단에서는 '험상궂고 거친 남자'가 스스로를 '값싼 남자'라고 말한다. 어디가 잘못된 걸까?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자동번역프로그램을 써서 작업한 듯한 오역이 즐비하기에 번역자가 실수했고, 편집자가 번역본을 꼼꼼하게 검토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뭉툭해져버린 기억 탓일 수도 있으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원문을 찾아보는 것.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en)의 <보물섬 Treasure Island> 에서 모리미 도미히코가 언급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I’m a plain man; rum and bacon and eggs is what I want.”

 

역시 내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원문의 plain man은 ‘값싼 남자’가 아니다. 이를테면 '플레인 요구르트'처럼 다른 향과 색상 등을 가미하지 않은 것을 표현할 때 이 'plai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따라서 이 문장은 '나는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라네. 럼과 베이컨에그면 충분하지.’ 정도가 적당하다. 

 

이어서 한국의 번역본을 찾아보니 번역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번역본에는  '난 소박한 사람이오. 럼, 베이컨, 달걀만 있으면 되니까.'라고 되어 있고, 영미문학연구회에서 좋은 번역작으로 선정한 새움클래식의 번역은 '난 그렇게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네. 럼주와 베이컨, 달걀이면 충분해.'이다. 둘다 '소박한', '까다롭지 않은'으로 의미를 정확하게 번역했다. 다만 '럼'을 '럼주'라고 하는 것은 일본식이고, ‘rum and bacon and eggs'는 '베이컨에그'에 럼을 곁들인, 빌리 본즈가 창조해 낸 단일메뉴이다. be 동사의 3인칭 단수인 'is'가 온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쯤 해 두자. 중요한 건 ‘값싼 남자’니까.

 

원문에서 살펴본 것처럼 스티븐슨은 빌리 본즈를 싸구려 남자로 묘사하지 않았다. 자, 이제 답은 자명하다. 역자가 실수했군. 그런데 그렇게 역자 탓만 하기에는 좀 이상하다. 일본어는 ‘평범한(平凡)’과 ‘싼(安)’이라는 표현이 아주 다르고, 이 정도면 자동번역기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틀리기가 불가능한 단어인데 어떻게 이런 번역이 가능한 걸까? <사람이 귀엽게 보이는 높이>의 일본어 원서 <太陽と乙女>에서 해당 구절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다. 

 

小説『宝島』の中で、海賊が宿の亭主に「俺は安上がりな男だ。ラム酒とベーコンエッグさえあればいい」と言う場面があり、「これでこそ海賊だ」さぞかしうまいだろうと思ったからというのが理由です。

 

이런...  모리미 도미히코가 '나는 값싼남자야 俺は安上がりな男だ。'라고 썼다. 번역가를 의심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제 처음의 분노는 점차 호기심으로 변해간다. 대체 어찌하여 이렇게 된 걸까? 여러가지 가능성을 하나씩 검토해 본다. 우선, 모리미 도미히코가 읽은 <Treasure Island>의 일본어 번역본에서 이 구절의 오역이 발생했다는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일본어 번역본에서 해당 구절을 찾아 본다.

 

私は普通の人です。ラム酒とベーコンと卵は私が欲しいものです、

 

일본어 번역본은 ‘나는 보통사람이야 私は普通の人です’라고 되어 있다.

 

이 번역도 틀렸다. 보통사람은 영어로 ‘ordinary man(person)’이고, 여기에서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일본에도 이 책의 다양한 번역서가 존재하지만, 대표적인 번역서를 찾아보니 plain man을 ‘값싼 남자’로 번역한 책은 없다. 최소한 위의 번역처럼 ‘보통사람’ 정도일 거라고 짐작할 수 있고, 모리미 도미히코가 '보통사람'을 '값싼남자'로 기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범인(?)은 모리미 도미히코임이 분명하다.

 

이런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모리미 도미히코는 <보물섬>을 원서로도, 번역서로도 읽지 않았고, 애니메이션으로 본 게 아닐까? 데자키 오사무가 연출한 애니메이션 <보물섬 宝島>이 1978년부터 이듬해까지 니혼 TV에서 28부작으로 방영되었고, 모리미 도미히코가 8살이 되던 해인 1987년에 극장판이 릴리스되었다. 어쩌면 이 애니메이션에서 ‘값싼 남자’라는 표현이 나온 걸 작가가 인상깊게 보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애니메이션이야 나이 들어서도 볼 수 있는 거니까 이러한 가정이 이상할 건 없다. 

 

일본의 TV판과 극장판, DVD를 모두 살펴보았지만 양쪽 모두 이 장면이 생략되었다. 이제 애니메이션 탓을 할 수도 없다. 자, 그럼 분명한 사실은 모리미 도미히코가 일본어 번역본으로 <보물섬>을 읽었으며, 아사히신문에 투고한 원고를 쓸 때 영문판 원서는 물론 일본어 번역본도 찾아보지 않고 대략적인 기억을 더듬어서 이 글을 썼다는 게다. 그렇다면 몇 가지 찜찜한 점이 남는다.

 

우선 이 텍스트는 아사히신문 주말판 <Be on Saturday>의 연재 칼럼 「作家の口福」에 처음 실렸다. (2011년 5월 7일. 「作家の口福 森見登美彦 ベーコンエッグ 仕上げに秘密の調味料を」) 즉, 아사히 신문의 에디터가 이 글을 받아보고 잘못된 점을 발견하지 못한 게다. 참고로, 아사히 신문은 경향신문과 유사한 메이저/진보 언론사이다. 일본의 메이저 신문사에 근무하는 에디터의 수준이 고작 이 정도인가? 

 

한편, 이 칼럼은 유명세를 타서 제법 많은 독자가 이 칼럼을 읽고는 '베이컨에그'라는 요리에 열광하게 되었고, 많은 이들이 SNS에서 베이컨에그와 모리미 도미히코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다만, 그 어느 누구도 이 ‘값싼 남자’의 오류를 지적하지 않은 모양이다. 왜냐면, 아사히신문사에서 운영하는 아사히문고(朝日文庫)가 바로 이 연재 칼럼을 묶어서 <作家の口福 おかわり>라는 책을 출판했고, 이 책에도 신문의 칼럼 그대로 ‘값싼 남자’가 등장한다. 즉, 아하시문고의 에디터와 <作家の口福 おかわり>의 독자가 ‘값싼 남자’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물론, <사람의 귀엽게 보이는 높이>의 원작인 <太陽と乙女>의 출판사(新潮社) 담당 에디터와 독자들 또한 마찬가지.

 

한국의 번역가가, 혹은 에디터가, 혹은 출판사의 관계자 중 누군가가 값싼 남자의 오류를 인지하여 일본의 출판사와 저자에게 어떻게 된 것인지, 한국어판에 어떻게 이 오류를 정정하면 좋을지에 대해 진지한 답변을 바란다고 요청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 값싼 남자 사태에 얽힌 책임공방 때문에 관련된 에디터가 줄줄이 문책을 당하게 될까? 글쎄다…

 

여러 나라의 원서를 찾아 읽고, 애니메이션을 찾아 보고, 아사히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담당자를 찾아 이 내용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고, 그것도모자라 메일을 써서 상세한 내용을 알린 이유는 전문 용어로 ‘국뽕’이라고 하는 그 징그러운 쇼비니즘을 등에 업고 트집을 잡으려는 목적이 아니다. 원저자인 모리미 도미히코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그 후일담을 듣고 싶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억이란 참 이상한 것이라서 저자가 ‘값싼’으로 기억한 텍스트로 인해 오히려 럼과 베이컨에그가 굉장히 근사한 오브제로 가슴과 머리에 꽂혀버릴 수 있다. 핑크빛 장갑을 끼고 재봉틀 앞에 앉은 마동석의 모습이 강렬한 이미지로 남는 것처럼 말이다. 아, 일본인이니 마동석을 모를 수있겠군. 마지막 장면에서 눈을 번쩍 드는 <자토이치>의 검객 기타노 다케시를 예로 들어 주면 좋을까?

 

2019년 6월 11일 오후 7시 정각. GMT +9

아사히 신문사의 엔도 유지로부터 답장이 왔다. 아사히 신문사의 담당자에게 위의 내용을 전달하고, 원저자인 모리미 도미히코에게 이를 알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짤막한 메일이다. 

 

2019년 11월 21일 오후 3시 56. GMT +9

<사람이 귀엽게 보이는 높이>의 출판사인 아르테 문학기획팀에서 답장이 왔다. '말씀해주신 오자는 재쇄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한다. 쇄를 달리한 책이 어떻게 나올지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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