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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계림 인터뷰

2013.08.31 22:41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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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 : 계림
진행자 : 라키난 + pena


이번 인터뷰에 모신 분은 계림 님입니다. 거울에는 <그의 지구 정복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시작으로 <묘생만경>, <물구나무서기> 등의 단편을 게재하셨습니다. 9월에는 계림 님의 [마음의 지배자]가 온우주 출판사에서 기획한 단편선 시리즈로 출간됩니다. 이에 관련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여기에는 계림 님과 더불어 편집을 담당하신 pena 님이 참가하셨습니다. 인터뷰 진행은 라키난 님이 수고해주셨습니다. 중요한 스포일러 부분은 드래그를 하셔야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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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 출간에 대해

온우주 출판사에서 단편집이 나오게 되었는데 소감이 어떠신지.

기뻐요.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글이 완성됐을 때만큼 기쁘지는 않아요. 이야기를 워낙 오래 전에 듣고 단편집이 나와서, 아직 만들고 있는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아 실감이 안 나요. 얼마나 기뻐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단편집에 단편이 실리고 그랬으니까 책이 나오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나만의 책이 있다는 건 느낌이 다를 것 같은데. 아직 실감이 안 나는 단계인가요?

전에 다른 작가들과의 단편집이 나왔을 때는 친구들이 사인해달라고 그러면 내 책은 아니니까 내 책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는데, 막상 책이 나오니까 이제 그럼 사인해서 줘야 하나? 이게 정말 내 책인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해서 온우주에서 출간하게 되셨는지.

대표님이 연락을 주셨어요. 출판하지 않겠냐고. 저는 얼른 덥썩 하겠다고 했죠.

여기 들어가 있는 단편은 어떻게 고른 거죠?

사실상 제가 쓴 게 다 여기 들어 있어요. 제가 쓴 것들 중에 여기 안 실린 건 중편들 정도. 거울에 실린 것 중에 안 들어간 게 한 편이 있고, 제가 써 놓고도 마음에 안 들어서 거울에 안 올린 게 두 편 정도 있어요. 지금까지 쓴 건 거의 다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중편은 왜 빠졌나요? 직접 빼고 대신 새 작품을 써 오셨다는데.

쓸 때는 잘 몰랐는데, 저한테는 실험적인 장르인 판타지였어요. 나중에 읽으니까 여러모로 완성도의 문제가 있더라고요.

새로 들어간 <뱀과 소녀>는요?

써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작품인데, 중편 하나를 빼게 되면 분량이 모자랄 것 같아서 새로 쓰게 되었어요.

순서는 어떻게 정하셨나요?

편집장님이 정하셨는데, 제가 보기엔 그게 딱 좋은 것 같아요. 다른 제안을 몇 가지 했는데 처음에 이야기하신 걸로 가게 되었어요.

<뱀과 소녀>도 중편이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해결되지 않는 요소가 너무 많잖아요.

편집장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결국 그걸 쓰려고 했던 게 아니라서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야기가 갈 수 있는 만큼은 들어 있는 것 같아서. 설명을 하자면 은근히 드러난 이야기를 다시 풀어 쓸 수밖에 없는데 그건 했던 말 또 하는 것 같고. 그리고 제대로 된 해결은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거기서 해결되면 뭐가 해결될까 싶기도 하고.
추측이 아예 불가능한 내용은 없잖아요. 대략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은 어느 정도 충족이 되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인터뷰를 하면 안 되지 않나 했었어요. 설명하면 이상해질 것 같아서.

수록작 중에 이미 출간됐었던 단편이 꽤 수록되었는데, 새로 실리면서 바뀐 건 없나요?

내용적으로 바뀌었다고 이야기할 만큼 크게 바뀐 건 없지만 책을 내게 되면서 전반적으로 한 달 정도 처음부터 다시 읽으면서 꼼꼼하게 고치긴 했어요. 그 와중에 <묘생만경>하고 <물구나무서기>는 조금 바뀐 것 같고. 바뀐 것 중에서 제가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 중 하나는 <묘생만경>의 마무리가 좋게 좋게 덮고 넘어가는 느낌이 있었는데, 고친 부분에서는 세민이가 큰 상처를 받아서 후유증이 남고 부모님은 이혼 위기로 가죠.

다시 읽어 보니까 화목한 결말이 안 어울린다고 느껴졌던 거예요?

딱히 그렇다기보다는 흰부리가 더 강력해야 하지 않을까 했어요. 사람들이 흰부리의 저주를 너무 쉽게 푸는 게 아닌가 해서.

<물구나무서기>는 어떻게 바뀌었어요?

<물구나무서기>는 더 좋게 바꾼 것 같은데. 고시원 생활을 하는 주인공을 조금 더 밝게. 아, <물구나무서기> 고치면서 하나 기억나는 게. 제가 두 번 정도 ‘나이키가 토해 놓은 것 같은 사람’이라고 썼는데. 그 표현이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나이키로 도배한 사람이라고 고쳤어요

표제작은 왜 <마음의 지배자>인가요?

제가 골랐어요. 처음에는 <그의 지구 정복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표제작으로 하면 어떻겠냐고 말씀드렸는데, 제목이 기니까 사람들이 기억을 못 하더라고요. 그의 지구정복이 시작됐나? 그의 지구정복은 어떻게 됐나? 사람들 반응이 다 달라서. 문장형 제목이 많아서 다 빼고. <물구나무서기>는 너무 흔한 단어라서 빼고. 이것저것 빼다 보니까 <마음의 지배자>가 남았어요.
 

2. 글쓰기에 대해

책에 실린 작품들은 2000년대 후반에 발표됐잖아요? 쓴 건 더 전인가요?

아뇨. 그때 그때 올렸어요. 제가 글을 쓴 계기가 배명훈 님 글을 보고 좋아서였는데, 거기 거울 웹진이 언급되었거든요. 그래서 봤더니 일반인들이 글을 쓰면 평을 달아주는 게시판이 있더라고요. 나도 써보고 싶다, 올려보고 싶다 생각해서 쓴 게 <그의 지구 정복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였어요. 그때 올렸더니 칭찬을 해주셔서 의욕이 불끈 치솟아서 다음 달에 바로 <부안 왕손이> 써서 올렸죠. 그랬더니 바로 필진 하시겠냐고 해서, 아마 바로 그 다음 달에 <묘생만경>을 써서 올렸을 거예요. 그리고 거의 매달 썼던 것 같아요. 서너 개를 이어서.
그리고 텀을 두고 <마음의 지배자>를 썼고, 또 텀을 두고 <뱀과 소녀>를 쓰고. 그 사이에는 장편을 썼어요. 저는 일로 글을 쓰고 있어서, 일을 하면서 소설 쓰는 게 굉장히 힘들어요. 저는 한번에 하나밖에 못 쓰거든요. 회사에서 써야 하는 글을 빨리 마친 다음에 단편을 쓰고 그랬는데, 장편을 쓰니까 시간이 안 나더라고요.

장편은 출간되나요?

아니요, 장편을 쓰긴 했는데 한 편은 완성을 했고 세 편은 완성을 못 하고 끝났어요. 언젠가는 다시 쓸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접기로 결정했고.

그러면 이제 뭘 쓰시나요?

또 다른 걸 써야죠. 계속 쓰고 있어요. 그런데 단편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면 꼭 장편 아이템이 떠올라요.

단편들도 스케일이 장편에 어울리게 쓰시는 편이긴 해요.

제가 제 걸 객관적으로 보지 못해서.

완성된 장편은 어디 갔나요? 잠자고 있나요?

공모전도 냈었고.

그게 언제에요?

재작년? 3년 정도 된 것 같아요. 그 뒤에 쓴 장편들은 쓰다가 멈췄고. 회사일도 바빴고. 단편을 안 쓰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아이템도 있었는데, 하다 보니까. 중편이 안 들어가게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새로 써야 하는 상황이 되어서 잘 됐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게 이렇게 해서 나오는구나.

장편 쓰다가 오랜만에 단편 쓰니까 어땠나요?

좋았어요. 닷새 정도 걸렸던 것 같은데, 이렇게 닷새만에 끝나는구나. 끝나는 게 있구나 하니까.


거울에 처음 올린 글이 <그의 지구정복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라고 하셨잖아요? 그 전에는 글을 언제부터 쓰셨나요?

소설은 그게 처음이었어요. 그 전에는 영화 시나리오를 썼어요. 2005년부터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정식으로 일을 했는데, 그 전에는 소설이나 시나리오나 따로 창작을 안 한 것 같아요. 굉장히 시작이 늦었죠, 서른 살이 한참 넘어서 시작했으니까.

소설을 써야겠다는 마음은?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고요. 대학 졸업 할 때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쓰고 싶은 게 무슨 문학 작품은 아닌 거예요. 글을 쓰고 싶어하는 친구들하고 이야기도 많이 했는데, 그때는 전업 작가를 하겠다는 꿈이 너무 두렵더라고요. 겁이 나고. 밥 먹고 살겠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창작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버릴 수는 없어서 졸업하고 일반 회사에 2년 정도 다니다가 영화 시나리오 쓰는 쪽으로 갔어요. 영화 시나리오는 어느 정도 먹고 살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된 것 같아요. 그래서 영화 시나리오를 썼고. 제가 쓰려고 하는 이야기가 그나마 영화 시나리오 정도의 장르에서는 통할 수 있는 소재니까. 우리나라는 대중 소설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될 것 같은데 영화 시나리오 쪽은 대중 장르 뿐이니까.
시나리오를 쓰고 한참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했는데 그 때쯤엔 소설 쓰겠다는 생각을 아예 안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배명훈 님의 <우주로 간 마도로스>를 보고 “내가 쓰려고 했던 게 딱 이건데!” 하는 생각이 든 거예요. 나도 그만큼 쓸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웃음) 너무너무 재밌고. 예전에 SF 팬덤에서 국내에서는 SF가 존재할 수 없다, 슈퍼히어로나 최첨단 과학이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논쟁이 있었어요. 그런데 배명훈 님은 그런 거 아랑곳 않고 너무 자유롭게 재미있게 쓰시더라고요. 마침 그 때 시나리오가 뭐 하나 막혔던가 해서, 딴 생각을 하고 싶었기도 때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신나게 했던 것 같아요.

소설을 쓰는 것과 시나리오를 쓰는 거랑은 좀 다르잖아요. 두 개를 같이 하며 힘든 점은 없었어요?

힘들죠 물론. 처음에는 글 쓰고 있었으니까 소설도 잘 쓸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둘이 너무 다르다는 게 느껴지고, 시나리오를 썼던 것 때문에 많은 부분이 발목을 잡히고 있다는 생각을 해요. 지적하신 대로 문장부터 다르고요. 시나리오는 문장을 다루는 글이 아니거든요. 나중에 제 단편을 읽어봤더니 제가 아무리 짧아도 어떤 걸 완결시키려고 하는 욕심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건 제가 상업적인 시나리오 쓰기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뱀과 소녀>는 오랜만에 쓰는 거라서 그런 점을 의식하면서 썼던 측면이 있는데, 그래서 더 보기 이상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좋아해요.
소설 쓰면서 좋았던 게. 시나리오는 많이 두들겨 맞게 되는 분야에요. 어차피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공동작업이고. 수정을 통해서 작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의견을 많이 들어야 하는데. 소설은 제가 쓰고 싶은 대로 쓰고 내면 끝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좋은 점도 있고 마이너스가 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3. 작품에 대해

작 중에 초능력이랑 외계인 좋아한다는 언급이 나오잖아요. 어쩌다 좋아하게 되셨나요?

원래 다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요? (웃음) 너무 옛날부터 좋아했던 것 같아서 언제부터 어떻게 좋아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지금 생각나는 건, 초등학교 1학년 때. 제가 책을 좋아했는데 집안 형편 상 책을 막 살 수는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부모님이 시험을 봐서 평균 90점이 나오면 책을 사주겠다 그러셔서 그 때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서 매달 책을 샀어요. 그 책 몇 권은 지금도 가지고 있거든요. 다 아이작 아시모프나 아이디어 회관에서 나온 책들이더라고요.
이유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후기에도 썼지만 그런 걸 생각하면 더 자유로워지는 것 같고. 사실 어릴 때, 혹은 누구에게나 판타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테면 얼마 후 <관상>이라는 영화가 나오는데요. 관상, 점, 풍수지리, 이런 게 우리나라의 판타지인 거죠. 서양에 마법이나 기사가 있고. 저도 초능력이나 외계인, SF적 요소들을 판타지로 좋아했던 것 같아요.

초능력이랑 외계인을 좋아한다고 나오는 것 치고 별로 없다고 생각하다 보니까, 은근 많은 거예요. 뭐지? 왜 초능력, 외계인이라고 안 느껴지는 거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원래 장르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정확히는 장르 소설을 쓰고 싶지 않았어요. 문학 소설을 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랑 똑같이 장르 소설도 쓰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정해진 틀에 들어간다는 게 제가 소설을 쓰려는 목적과도 반하는 것 같아서. 그냥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소설을 쓰고 싶었던 거거든요. 그런데 쓰다 보니까 그냥 그러고 있더라고요. 아마 저처럼 생각하는 작가들이 거울에도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자기 색깔을 갖고 쓰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장르에 맞추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짜증이 나는 게 십분 이해가 가.
저도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책이 나온다고 하니까 “그것도 SF야?” 하더라고요. 그렇다고 했더니 언제쯤 SF 아닌 이야기를 쓰냐고.
저도 시간적으로는 몇 년 됐지만 작품 쓴 게 많지 않아서. 앞으로는 써야겠다고 생각한 몇몇 이야기들은 초능력 외계인이 안 나오더라고요. 나도 바뀌고 있나, 그런 생각도 있습니다.


초능력이나 외계인 말고도, 섬 출신이라든가 사투리가 많이 등장하던데, 그건 왜 그런가요?

아무래도 제가 시골에서 자라서 그런 것 같은데. 저도 왜일까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다른 분들도 그렇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건 모르겠지’ 싶은 걸 쓰고 싶은 것 같아요. 시골에서 사신 분들은 굉장히 많으실 텐데, 고향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똑같이 시골에서 자라도 인식을 안 하는 것들이 있거든요. 시골이라는 공간 자체가 도시보다는 한 꺼풀 벗겨진 곳이고 미니멀하고. 소설의 사건적인 실험을 하기 좋은 것 상황이 되는 면도 있는 것 같고.

더 적나라해지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묘생만경>만 봐도 엄청 피 튀기는 생태계잖아요. 평화로움, 슬로우, 이런 게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서 뼈빠지게 일해야 하고. 게으름 부리면 망하고. 서열도 있고. 그런 느낌이 다른 작품에도 있는 것 같아요. 서열이나 폭력성, 마초 같은 것들. 여기 나오는 고등학생들은 게임을 하는 대신 패싸움을 하잖아요.
원래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웃음) 제가 경험한 게 아닌 이야기도 많은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흥미로운 곳이에요. 전 주문진이 고향이거든요. 제가 자랄 때만 해도 굉장히 살벌했어요. 중학생인데 교실에서 선생님이 앞에서 수업하는데 뒤의 애들은 본드 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지금 도시의 중학생보다 그 애들이 더 순진했던 것 같아요. 삶의 스펙트럼이 더 넓었던 것 같고. 그때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삶을 살았더라도 지금은 안정되었을 것 같고. 사실 살벌한 걸로 말하면 지금이 더 살벌하죠. PC방 가서 하는 게 결국 바닷가에서 패싸움하는 거랑 다를 바 없는 것 같은데. 그걸 해서 해소되는 것도 없을 것 같고.

사투리를 예로 들면, 이게 어리숙함이나 시골 소년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남자, 거역할 수 없음, 강함, 이런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런 인물도 많이 나오고. <부안 왕손이>는 형님이고.
또 눈에 들어왔던 게. 남자 주인공이 많고 남자들의 세계도 많고. 그러다 보니까 여자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자 인물은 없는 거예요. 여자 이야기는 언급이 되는데 여자랑 관계를 맺는다거나 하는 건 없더라고요. 어디까지나 남자들만 있는 동네라고 할까. 여자는 외부인이랄까. 서열 밖의 대상이랄까.

여자를 잘 몰라요. 근데 저도 몰랐는데. 소설을 쓰고 나중에 보니까 제가 50대 아저씨 이야기를 쓰고 있더라고요. 전혀 의식을 못하고 있다가. 내가 왜 이랬지? 그래서 <우리는 더 영리해지고 있는가>에서는 나이대를 더 낮춰서 써 봤는데.

나이대를 낮춰서 여자도 좋아하고 간질간질한 묘사도 좀 나오는 것 같은데, 결국은 기만적이잖아요?

저도 신기한 게, 시나리오 쓸 때는 그런 캐릭터를 별로 안 좋아하고, 제가 기획한 오리지널 시나리오에는 한 명도 안 나오거든요? 그런데 소설에서는 막 나오길래 저도 참 신기했었어요. 아무리 봐도 제가 마초적이거나 아저씨 지향적인 부분이 없는데. 저는 오히려 그런 마초적인 캐릭터를 싫어하는 편인데.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싫어하고 이해할 수 없는 만큼 열심히 관찰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고.

관찰자 입장에 있는 화자가 많이 있잖아요. 고등학교에서 ‘왜 얘들은 이렇게 무의미한 청춘을 패싸움에 쏟을까’라는 걸 관찰하고 있었을 것 같은 남자애가 떠오르는 느낌이 나요.

그럼 역할이었죠. (웃음)

날개님이 말씀하셨지만, 관찰자 입장이고, 세상에 관여하지 않고, 부조리한 일이 일어나도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듯 넘어가는 인물들이 많아요.

날개님 글은 보면서 저도 뜨끔했달까? 숨기려고 했던 게 아니라. 제가 몰랐던 부분들을 잘 짚어 주셨더라고요. 그런데 왜 그럴까는 깊게 생각을 못 해봤는데. 기본적으로 세상이 그렇게 쉽게 바뀔 것 같지 않아요. 쉽게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기만적으로 보일 때도 많고, 그리고 그 사람들이 틀려고 하는 방향이 그런 각도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변화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저는 데모를 하다 회의를 가졌거든요. 데모를 하는 사람이 가지는 적개심 같은 것들이 싫었어요. 그 차원에서 문제를 풀면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고. 제 소설에도 그런 부분이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세상이 더 나아지기를 원하지만 세상이 나아지도록 개선하는 차원이 다른 레벨이어야 하고, 그 레벨에 대해서는 아직 이야기가 안 되었다는 느낌.

그러면 아예 다른 레벨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더 아래로 가는 느낌? 일개 소시민이랄까. 관찰자라는 느낌이 나요.

이를 테면, 셜록 홈즈에서 왓슨이 아니라 셜록이 주인공이면 재미 없을 것 같지 않아요? 왓슨이 화자니까 재미있는 거잖아요. 제 글에는 초능력을 가진 인물이 많은데, 그런 사람이 실제로 주인공을 하게 되면 관찰자가 되거든요.

<물구나무서기>도 화자가 초능력이 있지만 어쨌거나 그게 주변 인물들의 상황을 관찰해서 서술하고 있어요.

재가 소설 쓸 때 일부러 관찰하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고. 그 정도 레벨에서의 개입이 진짜 개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왓슨의 개입이 진짜 개입이라는 거죠.


그런 것들하고 별개로 <피노키오>는 우화 느낌이 많이 나잖아요. 그건 어떻게 쓰게 되셨나요?

그 때 아마 거울의 다른 분 글을 봤나? 지금까지는 반말로 썼는데 존댓말로 써볼까 하고 쓰게 됐어요. 엉뚱한 자극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아무튼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동화 같은데 실제로는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걸 쓰려고 했어요.

<피노키오>는 다른 것들하고 다르게 마무리도 확실하고 예상할 수 있는 결말이어서 다르다는 느낌이 나요.

<피노키오>는 정말 짧아서 쓸 때도 짧게 걸렸던 것 같고. 저급 로봇은 사람에게 가서 일도 해주고 붙어 사는데, 고급 로봇은 남들이 안 보는 데 가서 스스로를 파괴한다는 설정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그것만 가지고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는데 발전을 못 했고. 뛰어난 로봇은 자살해야 한다는 상황이 저한테는 재미있게 다가왔어요.

 
<묘생만경>의 닭들을 보면 장난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정말 그렇게 사나요?

정말 그렇게 살아요. <묘생만경>은 사실 저희 가족의 역사와 맞닿은 면이 있는데. 저희 식구들이 군산에 살다가 주문진으로 이사를 갔어요. 그 때만 해도 주변 5km 이내에 가게가 하나도 없었는데. 아버지가 소 빼고 다 키워봤어요. 소 밑에 돼지, 염소, 닭, 개. 그런 걸 해보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도 처음이라, 어릴 땐 책이 이만큼 있었어요. 양돈전서나 동물 키우는 법에 대한 책. 물론 하나도 제대로 된 건 없었죠. 하나 하고 엎고 다시 키우고.
닭을 키울 때 한 마리가 계속 머리에 피가 났어요. 걔가 없어지니까 다른 애가 그렇게 피가 나고. 키우는 입장이니까 보다 보면 얘가 대장, 첫째 부인, 둘째 부인, 그런 게 보여요. 그런 옛날 생각이 나서 쓰게 됐어요.

돼지나 염소는 어땠어요?

한번 돼지가 미쳐서 질주를 한 적이 있는데, 저희 집이 옛날식 집이라 마루 있고 대청 있고 기둥 있는 집이었거든요. 암퇘지가 뛰기 시작해서 장난처럼 도망다녔어요. 돼지가 기둥을 몸으로 툭 치면서 제 쪽으로 뛰어오는데, 정말 이만한 기둥이 나무젓가락 부러지듯 뚝 부러지더라고요. 그거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고. 그 뒤는 기억이 잘 안 나요. 내가 받혔나? 돼지를 한 마리 잡은 것 같은데 그 돼지인가?
돼지를 잡으려면 잡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부르면 와요. 서비스 센터처럼. 그 사람이 마당에서 돼지를 해체하고 있으면 의식처럼 사람들이 구경하러 와요. 돼지를 잡으면 생 쓸개를 주인한테 줘요. 몸에 좋은가봐요. 아버지는 경험이 없으니까 질색하고, 동네 할아버지가 드셨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집에서 정말 귀하게 키운 똑똑한 염소가 있었어요. 염소가 임신을 했는데 동네 나무에 메어 놓으면 줄 닿는 범위에서 알아서 풀 뜯어먹고, 그럼 저녁에 데려오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어느날 갔더니, 동네 개랑 싸운 거예요. 동네 개가 와서 괴롭히니까 새끼를 낳을 때가 아니었는데 그 자리에서 유산하고, 개는 그걸 먹으려고 달려들고. 염소는 필사적으로 막고. 제가 갔을 때는 새끼가 나온 상태였는데 어떻게 살렸어요. 개 소리가 일찍 났는데 우리는 그게 염소랑 싸우는 건줄 몰랐고. 저녁 때가 될 때까지 몇 시간을 결사적으로 사투를 벌인 거예요. 새끼를 낳은 몸으로. 그랬던 적도 있고.
토끼도 키웠는데, 모든 집짐승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새끼를 해쳐요. 한번은 새끼를 열댓 마리를 낳았는데 얘가 갑자기 새끼를 물기 시작하는 거예요. 두 마리 물고 세 마리 물고. 안 되겠다 싶어서 나머지를 꺼내서 집으로 왔는데, 정말 토끼 새끼는 낳으면 요만해요. 빨개서는 눈코입 겨우 보일락 말락 하는데 어쩌겠어요, 어미가 물어 죽이는데. 아버지랑 궁리를 해서 주사기를 샀어요. 주사기로 입에 우유 넣어주고, 그렇게 걔네를 다 키워냈어요.

어떻게 됐어요?

다 키우면 잡아먹죠. 도시 사람들은 키워서 먹었다고 하면 잔인하다는 게 일차적인 반응인데. 키우는 입장에서는 키울 때는 정말 내 새끼처럼 키워요. 정말 사랑하면서 키우고 그걸 먹을 때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먹거든요. 내가 쏟은 정성만큼 먹는 것도 평범하지 않죠. 그냥 먹고 버리는 게 아니라, 꼭 필요할 때 먹게 되고.
<묘생만경>에 나오는 아빠처럼, 저희 아버지도 동물 잡는 걸 정말 힘들어 하셨어요. 토끼는 소리를 못 내는 동물이잖아요. 목을 잘못 따니까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그런 일도 있었고.
이런 어릴 적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아내에게 했었거든요. 거울 필진이 되니까 글을 써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갑자기 아무 생각도 안 나는 거예요. 나 뭐 쓰지 하고 있으니까 옛날 시골 이야기 재미있던데 그거 쓰라고.
내가 했던 게 특별한 경험이란 생각을 하나도 안 했었는데, 이게 특별한 경험이구나 싶었어요. 시골에 산다고 다 키워보는 게 아니니까. 저희 아버지처럼 계속 실패를 해야지 여러 동물을 키워보니까. 아버지는 결국 다 실패하고 유치원을 하셨어요. 그 다음에는 실패가 없었고요.

<묘생만경>은 고양이 시점에서 이야기를 하고 <부안 왕손이>는 포클레인 시점에서 이야기를 하잖아요. 어렸을 때 동물들을 들여다보던 거랑 관련이 있는지.

아무래도 관련이 있겠죠. 그리고 의인화된 소설은. 제가 시나리오 작가이고 애니메이션 스토리도 쓰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쓰게 된 것도 있어요.


<마음의 지배자>에서 애들의 폭력적인 장면이 신경쓰였지만 어울리지 않나 해요.

지금 생각하면 참 끔찍한 건 맞는데. 저는 직접적으로 관여한 적은 없지만, 당시 시골 바닷가에서 살며 고등학생이라고 하면 그런 일이 드물지 않게 있었어요. 묘사 중에 ‘아들바위 옆에 동굴’이 있는데 실제로 아들바위도 있고 동굴도 있거든요. <마음의 지배자>는 장편소설을 쓰려고 하다가 장편소설의 프롤로그가 될 부분을 단편으로 써보자는 생각으로 썼어요. 장편은 얘가 커서 마을에 돌아오는 이야기. 그런데 그 이야기는 쓰다가 말고, 단편만 남았어요.

<지구 정복>과 <마음의 지배자> 둘 다 네이버 오늘의 문학에 실린 단편인데, 네이버에 실린다는 건 어떤 느낌인가요?

<마음의 지배자>가 실리고 나서 어떤 분이 ‘요령이 뭔가요?’ 하고 물어봤던 것 같아요. 제가 ‘어떤 요령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하고 답했던 기억이 나요. 저도 의외였었어요. 저는 정말 배명훈 님 단편이 좋아서 쓰기 시작했던 건데. 되게 신기했어요.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그렇게 단편만 쓰다가 김이환님의 <절망의 구>를 보고 너무 좋아서 장편을 쓰기 시작했어요.


4. 마무리

지금까지 중 글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뭔가요?

다음에 쓸 거요.

어디서 많이 듣던 대답인데요.

어디서 누가 했던 대답인데. (웃음)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 모르겠어요. 한동안은 제일 처음 쓴 거라서 <지구 정복>이 제일 좋다고 했는데. <마음의 지배자>를 쓴 다음에는 그게 제일 좋고. <마음의 지배자>가 제가 소설을 쓴다고 자각하고 쓴 첫 소설이었거든요. 이게 내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게 내 대표작이 되는 건가 했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고. 잘 모르겠더라고요. 지금은 <뱀과 소녀>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다른 분들이 자꾸 뭐라고 하시니까 감싸게 되네요.

다음에 쓸 게 제일 좋다면, 다음 글은 어떤 건가요?

우화인데 다 읽고 나면 “아, 이걸 이야기하려는 거였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이야기에요. 제목은 <기차역에서>라는 가제를 지어놨는데. 메리트는 없는 제목이죠. 제목 짓는 게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제목이 작품에 영향을 미치면 안 좋다는 생각이 있어요. ‘무제’ 이런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혹시 더 하고 싶으신 말씀 있으신가요? 광고라도.

아. 내년 초가 될 것 같은데, 2011년 일 년 동안 작업했던 3D 애니메이션이 개봉할 거예요. 가제는 <히어로즈>인데. 서유기 속 캐릭터들이 미래에 나타나는 이야기에요.
그 다음 작품이 사실 전 더 기대하고 있는 건데. <더 슬로우>라는. 회사 홈페이지에 시놉시스가 올라가 있어요. 사막여우가 빠릿빠릿하고 잘 돌아다니는 내용인데. 걔가 거북이, 달팽이, 나무늘보를 데리고 아마존에서 미국으로 가는 이야기에요. 근데 빨리 가야 하거든요. 많이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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