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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정도경 인터뷰

2013.06.30 23:5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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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 : 정도경
진행자 : 라키난, pena
일시 : 2013년 6월 20일 목요일


어둡지만 생명력 있는 글을 쓰는, 혹은 치정 전문 작가 정도경 님의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왕의 창녀]와 [씨앗] 두 권입니다. 지난 달 곽재식 님의 책에 이어, 출판사 온우주에서 두 번째로 기획한 단편선입니다. 온우주에서 간행하는 정기 소식지에는 편집된 요약본이 실렸습니다. 자세한 정보는 온우주 홈페이지(www.onuju.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많으니 아직 책을 읽지 않으신 분은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은 따로 표시했습니다.


1. 단편집 출간에 대해.

책 나오니까 어때요?

두 번째 권 작가 후기를 쓸 때, 앞 권에 다 썼는데 또 뭘 써야 하지 싶더라고요. 단편마다 후기를 써서 나는 할 말 다 했는데, 왜 작가 후기를 두 개나 써야 하는가, 무슨 말을 이렇게 많이 해야 돼. (웃음)

단편 하나하나마다 작가의 말이 달려있는 게 재미있는데요. 두 권 합치면 25편이잖아요. 쓰면서 힘들진 않았어요?

그걸 쓰면서는 되게 재미있었어요. 근데 이거 작가 후기에 다 쓴 이야긴데 인터뷰를 또…

또 해요. (웃음)

소재를 찾을 때 실제 상황에서 찾거든요. 실제 상황이라고 하면 꼭 내가 겪은 이야기 같은데 그런 건 아니고요. 신문에서 볼 수도 있고 지나가다 지하철에서 볼 수도 있고, 남의 일 중 한 장면일 수도 있지만 본 건 내가 본 거니까. 제가 어떤 식으로든 접촉을 한 데서 소재를 찾는데요. 그런 이야기를 쓰면 단편 이야기가 나오죠. 그런 건 구체적이니까.
후기도 저한테는 단편만큼 중요해요.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가 나온 거라서. 근데 아무 상황도 없었는데 나온 것도 있네요. <Nessun Sapra>는 수업 중에 딴 생각을 하다가 나온 거예요. 그 사람은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데.

그건 서술도 간접적이잖아요. 남의 이야기를 남에게 들어서 서술하는 거잖아요. 관련이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설정 자체도 나와 상관없는 설정을 겹겹이 해놨는데. 원래부터 러시아 사람이 러시아어로 쓴 것처럼 해놨고, 시간적 배경도 2002년, 2003년 정도고, 핵심 사건이 일어난 건 1940년대고. 그러니까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멀리 떨어져 있죠.

표지 시안 나온 거 봤어요?

1권만 봤어요. 시안 세 개를 보여주셨는데, 지금 결정된 그 흑백 표지를 제일 먼저 보내주셨어요. 근데 이건 왕의 창녀가 아니라 <게이샤의 추억>이야. 나의 왕의 창녀는 이렇지 않아. (웃음) 나쁜 건 아니고, 제가 생각한 거랑 달랐거든요. 근데 만화로 나온 것도 그렇고, 제 생각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표제작은 어떻게 고른 거예요?

표제작은 편집장님이 하자는 대로 했어요. <씨앗>은 전부터 표제작으로 하자고 그랬고요. 그 분은 전문 편집자고, 저는 이야기를 쓴 사람이잖아요. 관점이 많이 다르더라고요. 저는 내용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제목은 그냥 알맞은 이름을 붙여놓은 거고, 그 이상은 생각을 못 하잖아요. 그런데 편집장님은 책이 잘 팔릴 거다, 독자들이 서점에 와서 봤을 때 이런 제목이면 눈에 띌 거다, 그런 걸 보시더라고요. <씨앗>이 내용 상 표제작이 될만한 엄청난 작품은 아닌데, 제목으로 그럴싸해서 좋겠다 싶었던 거고. <왕의 창녀>는 표제작이 될만한 내용인데, 제목이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하지만 야해 보이니까 팔릴 것 같다, 팔아보자. 그런 생존을 위한 제목이에요. 우리는 팔아서 먹고 살아야 한다고. (웃음)

두 권으로 나눈 기준은 뭐예요?

그것도 이야기 많이 했었는데. 일단 단편선에 넣었으면 하는 글들은 제가 골라서 보냈고요. 편집장님이 그걸 어떻게 나눌지를 고민했어요. 처음에는 빛과 어둠이라는 식으로 긍정적/부정적인 내용으로 나눌까 했었어요. 원래 컨셉은 그런 거였고,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리고 공주-기사 연작은 제가 꼭 넣어달라고 했는데요. 그게 3편이라 분량이 꽤 되잖아요. 그러니 1권이 되든 2권이 되든 얘를 맨 처음에 내세우고 그 분위기를 따라가자고 했어요. 연작이 들어간 [씨앗]은 옛날 이야기 풍이나 환상성이 강한 게 들어갔고, [왕의 창녀]는 더 어두운 이야기가 들어갔어요.

왕의창녀.jpg 씨앗.jpg

2. [왕의 창녀]와 [씨앗]에 대해.

[왕의 창녀]는 언제나 치정, 디폴트는 치정, 그런 게 써있는데, [씨앗]은 펼쳐보니까 갑자기 이야기체로 귀여운 동화가 나오는 거예요.

<왕의 창녀>와 공주-기사 연작은 같은 권에 들어갈 수 없는 것 같아요.

다른 작품들에 비해 공주-기사 연작은 문체도 다르고 분위기도 다르잖아요. 그건 어떻게 쓰게 된 거예요?

어떻게 쓰게 됐더라. “놀고 있네”, “너 죽을래?” 같은 말을 하는 공주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공주들은 가녀리고 연약하고 탑 위에서 “살려주세요” 하면 왕자가 구해주잖아요. 그런 거 안 하고, 칼 들고 건들건들 하는 양아치 공주를 써보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나왔네요.

그럼 처음엔 3부작의 마지막까지 있었던 건 아니네요?

처음에는 단편 하나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공주도 뒤집고, 기사도 그렇고 다 뒤집자. 용이 보통은 나쁘게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좋은 녀석으로 만들고. 기사도 좀 이상한 애로 만들고. 왕자는 보통 나서서 공주를 구해줘야 하는데, 왕자를 어린애로 만들어서 공주가 구해주고.

두 번째부터는 행복한 결말로 갈 거라는 암시가 나오잖아요.

첫 단편을 쓰고 나니 찜찜해서 어떻게든 더 써서 결말을 내야겠다 싶었어요. 두 번째를 쓰다 보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오더라고요. 그 때도 구체적으로 결말이 정해진 건 아니었는데, 대충 얘랑 얘랑 이어주고 쟤랑 쟤랑 이어줘서 해피엔딩 하면 되겠다는 것 정도는 나왔었어요.

정말 드물게 모두가 잘 된 해피엔딩인 거예요. 정말 드물게. 그래서 [씨앗]에서는 다들 잘 되나 싶었는데 뒤를 보니까 그것도 아니고. 그래도 공주-기사 연작은 훈훈해서 좋았어요.

훈훈하게 죽은 남편이 돌아와서 마누라 죽이고. (웃음)

후, 훈훈… (웃음)

네, 훈훈하게 좀비들이 쫓아오고.


<꿈>은 오래 전에 쓴 거라고 그랬잖아요?

대학교 2학년인가 3학년 때 썼어요.

그걸 합평회에서 다뤘던 기억이 나요.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고민했었어요.

난 왜 기억이 안 나지, 꿈인가. (웃음)

다른 건 서사가 있고 결말도 있는데, <꿈>은 이런 꿈을 꿨다는 기록 같은 느낌이에요.

꿈 꾸고 나서 쓴 거라서.

근데 단편집에 들어갈 건 본인이 골랐다고 했잖아요. <꿈>이 그 안에 들어간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는 거 아니에요?

<꿈>을 쓴 게, 제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이야기를 촘촘히 채워 넣는 걸 잘 못하던 때였거든요. 그 때에 쓴 것치고는 괜찮아 보였어요.
그리고 제가 꿨던 꿈이 굉장히 특이한 꿈이었거든요. 소설에 나온 것과 똑같아요. 제가 가게에 들어가서, 저는 마스킹 테이프가 아니라 지우개를 찾았는데요, 거기에 제 중학교 동창이 있는 거예요. 그 동창이 여자애에게 못되게 굴고 공부 안 하는 날라리 같은 애였거든요. 돈 내려고 계산대 갔다가 ‘어, 너 누구 아냐?’ 하고 놀랐어요. 그랬더니 동창이 굉장히 진지하게, 아주 엄숙하게 저를 보면서, “너는 꿈을 꾸고 있지만 나는 현실에서 일하고 있다. 너한테는 꿈이지만 나한테는 현실이다.” 그러면서 여기가 우리 삼촌 가게인데 물려받으려고 일하고 있다며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제가 기억하는 중학생 때와 너무 안 어울렸었거든요. 그리고 그땐 대학생이었으니까 중학생 시절하고 그렇게 멀지 않았던 때였어요. 그러니까 깨고 나서도 그 꿈이 너무 생생한 거예요.
그 다음 날에는 욕조 속에 토끼가 죽어있고 그걸 꺼내는 꿈을 꿨어요. 그것도 너무 생생했거든요. 이건 뭔가 해야지 그냥 두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그렇게 소설 같은 꿈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꿔본 적이 없어요.

그 부분이 핵심인 것 같은데, “너는 꿈을 꾸고 있지만 나에게는 현실이다” 하는 부분이요.

저는 <꿈>의 결말도 마음에 들고. 이 여자가 아직은 결혼을 안 했잖아요. 완전히 남편이랑 결혼생활에 안착한 게 아니잖아요. 빠져나가려면 빠져나갈 수 있거든요. 꿈이 앞날을 보여준다고 생각을 하면, 자기가 그걸 피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 선택의 지점에서 끝내고 싶었어요. 그 점도 마음에 들고. 꿈하고 현실하고 맞물리는 부분도 마음에 들고.

소설에 나오는 아기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편이 그 애가 자기 애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둘이 계속 싸우다가, 남편이 술 먹고 아기를 욕조 속에 집어넣어서 죽이고, 그 여자는 자살 시도를 하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서사가 순서대로 이어지지 않는 게, <꿈> 말고도 [왕의 창녀]에 실린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가 있잖아요. 다른 이야기와는 다르게 소설이 되기 전 단계의 글 같아서 튄다고 생각했었어요.

이것도 어딘가의 작가 후기나 단편 후기에 썼던 것 같은데,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는 블로그에 연재를 했었어요. 원래는 자기 목을 잘라서 들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쓰고 싶었거든요. 자기 목을 들고 있는 동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아더왕 전설에 나오는 녹색의 기사 있잖아요. 싸워서 지면 자기 목 자르라고 해서 목 들고 돌아가는 사람. 제가 목에 좀 집착해서. (웃음) 처음 발단은 그거였고요.
그걸 쓴 게 대학원 때니까 2006년, 2007년 정도인 것 같은데, 그 때 러시아 중세의 원초 연대기에 관심이 있었거든요. 거기에 전투적으로 나오는 여자, 올가 공주 이야기가 있어요. 대공하고 결혼했기 때문에 공주인 건데, 아들, 그러니까 공자가 있어요. 남편이 죽고 나니까 어린 공자하고 여자만 남았는데, 적들이 쳐들어온 거죠. 그리고 올가 공주를 보필하는 호위기사가 있어요. 호위병 혹은 근위병단의 수장 정도 되는 사람인데, 스웨덴 사람이라고 기억해요. 근데 그 사람의 존재가 되게 묘한 거예요. 공주하고는 매우 가까운 사이거든요. 작전도 항상 같이 해요. 그래서 저는 ‘둘이 치정 관계일 거야, 치정 소설을 써야지’ 이랬죠.
원래는 둘이 치정을 하는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그럼 누구의 목을 자를 것인가, 적군의 목을 자를까, 자르는 사람은 누가 되면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죠.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언제나 원래 쓰려고 했던 것과는 방향이 많이 달라졌어요. 블로그에 쓴 거라 생각날 때만 썼고. 내가 무슨 연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기획을 잡은 것도 아니니까. ‘아마 이런 식으로 쓰다간 결말이 안 나고 나는 논문 쓰러 갈 텐데’ 했는데, 진짜로 끊어져서 결말이 안 났었어요. 이야기는 마음에 드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는 모르겠고.
그러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에서 이모들 이야기하는 거 듣고. 그러다 보니까 이것들을 이으면 이야기가 나오겠다 싶었어요. 그러니까 사실 작가들이 인간 말종인 거죠. 자기 할머니 장례식에서 이거 소설로 쓰면 되겠다 이런 생각 하고 있고. (웃음) 그런데 또 어머니가 우리 집안 이야기를 소설로 써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물론 엄마가 생각한 건 장편 대하소설 연작 이런 건데, 나는 그런 건 못 쓰고. (웃음)

네, 다른 건 단편 소설인데 그건 글 모음이라는 느낌이 많이 나요.

글 모음이에요. 이모들의 이야기를 모은 것, 블로그에 썼던 것. 나중에 제가 붙인 건 얼마 안 돼요.


단편들이 다 최근에 쓴 건 아니잖아요. 예전에 썼던 것들을 들춰보면서 고치고 싶다거나 새로 쓰고 싶다거나 하는 것들은 없었는지.

제가 단편을 쓰면 되게 강박적으로 퇴고를 하거든요. 아침에 눈 뜨면 퇴고해야지 하는 생각부터 해요. 계속 그 생각만 하면서 눈에 핏발을 세우다가, 사나흘 지나면 꼴도 보기 싫어져요. 너무 많이 들여다 봐서. 막 ‘-것이었다’를 ‘-것이다’로 고쳤다가 이틀쯤 지나서 다시 ‘-것이었다’로 고치고. 그러니까 퇴고 일주일쯤 하고 나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굳이 고치고 싶다는 생각은. (웃음) 그 때 다 고쳤어요. 시험 치고 나서 시험지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딱 그런 기분이에요. 하얗게 불태워버려서 다시는 손 대고 싶지 않은.

본인의 감정적 체험에서 촉발된 게 많으니까, 마치 일기장을 다시 들여다보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한데요.

그렇지는 않아요. 일기에 적는 건 중요도에 기복이 심하잖아요. 소소할 수도 있고, 지나고 보니 인생의 터닝포인트일 수도 있고. 그냥 내 생활이 흘러가는 가운데서 나오는 거죠. 그런데 소설은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인위적으로 조정을 해야 해요. 소설 안에는 여러 가지 기승전결이 있고 조그만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야 하는데요. 그 중요도를 어떻게 조절할지, 어디서 시작해서 끝날지를 생각해야 해요. 시작과 끝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일기처럼 그 당시의 감정에 매몰되어서 쓰기가 쉽지 않아요. 그러면 소설을 못 써요. 거리가 많이 있어야 앞뒤 연결이 나오고 완급 조절이 되거든요.

애초부터 가공된 거니까? 후기에 개인적인 기억이 많길래, 그럼 생각이 좀 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후기는 일기에 더 가까운데요. 소재로 봐서 이야기로 만들었으면 그건 저하고는 별개의 이야기가 돼요.

정세랑 님이 [텍스툰]에 쓰신 칼럼 중, 작가는 위험한 인종이라고 쓴 게 있잖아요. 지금 이 와중에도 ‘아, 이거 소설로 쓰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그렇죠. 저도 수업 하다 말고 ‘이거 이야기로 써야겠다’ 하고, 저 학생을 외계인으로 설정해서 소설을 써볼까, 이런 생각 하고. 그래요.


단편 중 <사흘>에 학위 논문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작중에도 논문 인용이 여러 번 나오고. 논문 주제가 궁금했었어요.

논문 주제는 사회주의 유토피아 빨갱이 소설인데요. (웃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유토피아는 보통 좋은 나라잖아요. 행복하게 잘 살아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1920~30년대 폴란드나 러시아 유토피아 소설, 동구권 유토피아 소설들을 보면 '공산주의 유토피아'의 생성과 몰락에 대해서 쓴 소설이 있었거든요. 근데 주인공들이 나중에 다 죽어요. 그리고 유토피아는 망해요. 그런데 모든 논문과 모든 학술자료에 그 소설이 다 유토피아 소설로 분류가 되어 있는 거예요. 아니 사람이 다 죽는데 왜 유토피아 소설인지. 그런데 중간에 유토피아가 나오긴 나오거든요. 그럼 이건 어떻게 분류를 해야 하는 건가, 그리고 대체 왜 다 죽는 걸로 끝나는가.
저의 의문은 그거였어요. 대체 왜 다 죽는가. 이 작가는 왜 주인공들을 다 죽였는가. 그게 1번이었고, 주인공이 다 죽었는데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게 2번이었고. 그것이 알고 싶다고 시작해서, 그게 학위논문이 되었어요. 죽음에 대해서도 그렇고, 유토피아가 만들어져야 하는 당위성이나 유토피아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주인공들이 죽도록 고생하거든요. 죽을 고생을 하고 나중에 죽긴 하지만 어쨌건 그러니 고통에 대해서도 학술자료가 필요하고. 죽음과 고통에 대해서요. 저는 이게 학술적인 주제인 줄 몰랐는데 되게 방대한 학술 자료가 있는 거예요. 철학적인 방향에서도 있고 사회학적, 정치학적, 종교적인 방향에서도 있고. 당연히 의학적인 방향에서도 있고. 역사학적인 관점도 있고. 굉장히 방대한 자료가 엄청나게 많은 관점으로 있는데, 다 옳은 말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놀랐어요.
특히 의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시는 분들은 환자들의 고통을 어떻게 줄이고, 어떻게 하면 죽음의 과정을 쉽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쓰니까, 환자 관점에 공감하면서 최선을 다해 따뜻하게 쓴 거예요. 너무 전문적인 논문은 제가 못 읽어봤는데, 그래도 호스피스나 안락사에 대한 것들이요. 죽음의 과정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하려면 의료 정책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의사들의 도덕적, 윤리적 태도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이런 것들을 읽다 보니 되게 감동했어요. 학술 논문을 그렇게 감동적으로 쓸 수 있는 줄 몰랐어요. 감정적으로 쓴 게 아닌데, 건조하게 서술했는데도 태도 자체가 멋있더라고요. 그래서 보면서 맘에 드는 구절들을 잘라놨다가 나중에 소설에 썼어요.

사실 논문이 인용된 부분은 소설 안의 내용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왜 등장인물이 그렇게 행동하는가, 지금 등장인물이 무엇을 고민하는가 그런 걸 대신 보여주더라고요.

나 혼자 이러는 게 아니고, 이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다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또 드는 생각은, 학위논문 주제도 이미 죽음이었구나 하는 거. 애가 죽고 동생이 죽고. (웃음)

제가 학위논문 쓴 그 소설에서 특히 애가 죽는 게 중요하게 나와요. 그 곳은 유토피아잖아요. "여기에 공산주의가 있다", 그 말이 유토피아의 모토거든요. 그런데 거기 어떤 부랑자 여자가 자기 애를 데리고 와요. 험악한 세상에서 시달리다 도피를 온 건데, 애가 아파서 열이 펄펄 나다 죽어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패닉에 빠지는 거예요. 여기는 유토피아인데 어떻게 아이가 죽을 수 있나. 어른도 아니고 어떻게 아이가 죽을 수 있나,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유토피아에 왔으면 살아야 되지 않나. 모든 사람의 마음이 의심과 의혹으로 가득 차게 돼요.
유토피아에도 전통이 있어요. 예를 들면 20세기가 오면 과학기술로 유토피아를 이뤄서 모두가 영생불사하는 세상이 올 거라고. 사회주의가 아니라도요. 고통도 죽음도 없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20세기가 오면 공산혁명이 일어나서 모두가 영생불사할 거라고,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더라고요. 그래서 농촌에 있는 러시아 정교 교회에서, 정교 교리하고 혁명하고 완전히 뒤섞어가지고 혁명을 찬양하라고 가르치고. 딱 찬송가 부르는 그 말투로 하나님이 아닌 혁명을 찬양하라, 레닌을 찬양하라 이런 거 나오고. 여러가지 괴상한 자료들을 보게 되었어요.

결국 그 소설에서는 왜 다 죽였던 거예요?

그건 학위 논문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거라. 제가 소설을 두 개를 봤는데, 러시아 소설과 폴란드 소설이에요. 러시아 사람은 자기가 혁명의 과정을 다 봤기 때문에, 혁명 직전에 꿈꿨던 모두 다 같이 잘 사는 유토피아는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았죠. 혁명이란 게 좋은 일 같지만 사실은 사람이 사람을 굉장히 이유 없이 많이 죽이는 과정이었고. 그래서 이유 없이 사람을 많이 죽이고 나서 그 위에 세운 나라는 유토피아일 수가 없다고. 왜냐면 그 과정 자체가 벌써 잘못되었기 때문에.
게다가 그 소설을 쓴 게 29-30년이었는데요. 그때 이미 스탈린이 집권해서 여러 가지 안 좋은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고, 5개년 계획 같은 거 시작해서 집단 농장 만들고 개인 재산 뺏고 이랬으니까. 이건 내가 꿈꾸던 유토피아가 아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유토피아가 있을 수 없다, 내가 꿈꿨던 유토피아는 있을 수 없구나. 그런 통렬하고 가슴 아픔 깨달음에 대한 책이었어요, 그 책은.
두 번째인 폴란드 사람은 상황이 많이 달라서. 그 사람은 세상이 멸망해야지만 그 위에 유토피아가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는데, 유대교 쪽의 교리가 그렇더라고요. 세상이 커다란 재난을 겪어서 기존의 사회가 모두 다 몰락한 다음 그 위에 새 세상이 펼쳐진다고, 그게 유대교 신비주의 쪽의 유토피아더라고요. 그 사람은 유대교 혈통이긴 해도 그렇게 독실한 유대교 신도는 아니었는데, 어렸을 때 배운 게 그거라 유토피아라고 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거기다 또 옆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대재앙이 왔잖아요. 그래서 유대교 방식의 유토피아가 이루어지려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소설의 구조는 비슷한데 관점은 완전히 반대였어요. 한쪽은 내가 겪어봤더니 유토피아는 없더라, 우린 다 망했다. 다른 쪽은 세상이 망했으니까 유토피아가 올 것이다. 그래서 학위논문을 쓰긴 썼는데, 쓰고 나서 봤더니 결국 둘은 같은 카테고리에 묶을 수 없었던 거죠. 근데 실수로 같은 카테고리에 묶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게 결론이었어요. (웃음)

심사 통과했네요?

네 뭐. 지도교수님은 사퇴할 예정이었고 커미티가 4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2명이 은퇴할 예정이었거든요. 그리고 저는 비자가 만료되고 여권도 만료되어서, 졸업을 하지 않으면 한국에 돌아와서 비자와 여권을 새로 만들어서 커미티를 새로 만들어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논문 빨리 써서 통과하지 않으면 망한다, 너도 유토피아는 못 가, 이런 상황이었거든요. 그래서 모두 합심해서 빨리 졸업시키자는 분위기여서 그렇게 됐어요. 되게 다급하고 스펙타클하게 썼어요.
논문 심사 받으러 가서 파워포인트로 발표했더니, 아무도 내 논문에는 관심이 없고요. "자네 그 선 움직이는 거 어떻게 만들었나? 다시 움직여보게." 논문 심사가, 한국에서는 심사라고 하지만 다른 모든 나라에서는 '방어'거든요. 영어로 defense고 러시아어도 defense에 해당하는 말을 써요. 교수들의 공격에 대해서 내가 나의 논문을 방어하는 거거든요? 나는 "애니메이션 넣어 보게" 그러고 끝났어요.

 논문의 형식으로 방어했다?


아니 근데, 2007년에 허위 학위로 난리난 적 있었잖아요. 그 이후에는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내 학위를 의심할 것 같아서 말을 못 하겠어요. 나 논문 제대로 썼는데.
작년 여름에 김보영 님 작가와의 만남 했을 때, 작가와의 만남 끝나고 그 자리에 온 사람들하고 맥주 마시고 그랬잖아요. 모르는 사람 둘하고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거든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 논문 이야기가 나왔어요. 근데 그 중에 한 분이 영상 관련해서 석사 학위를 받은지 얼마 안 된 분이었는데,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프레지를 써서 발표를 했더니 자기 논문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고 "자네 그거 어떻게 했나?" 이러고. 프레지 사용법에 대해 질의응답을 하다가 끝났다고. 이걸 슬퍼해야 하나 기뻐해야 하나. 논문은 통과가 됐는데. 이상하다. 하지만 프레지는 최신기술이기라도 하지, 저는 평범한 파워포인트였는데.

 은퇴를 앞둔 분들이어서?

게다가 그날 학과장님을 찾아온 외국 손님이 있었어요. 크로아티아 언어학 교수님인가 그랬는데, 학과장님도 언어학 교수님이에요. 커미티 4분 중 한 분은 러시아 가서 못 오셨고 그나마 한 분은 오지도 않았고. 그러니까 지도교수님과 커미티 두 분 해서 세 명만 문학 교수고, 학과장님과 학과장님의 손님은 언어학 교수니까 뭔 소린지 이해가 안 가죠. 그러니까 이 두 분이 적극적으로 "자네 그 선은 어떻게 움직였나?" 그러면서. (웃음)
외부 손님 와서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상한 질문이나 하고. 크로아티아에서는 파워포인트 안 쓰나! 러시아 가서 못 오신 분이 학과장님이었는데 임기가 끝났으니까 옳타구나 하고 러시아로 가버리셨고. 오신 분은 새 학과장님이었어요. 의욕이 넘치시는 분이셔서, 누가 학사도 아니고 석사도 아니고 박사 졸업을 한다니까 이 선생님은 너무 좋으셨던 거예요. 드디어 우리 과에서 내가 졸업을 시킨다, 이게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영문도 모르는 크로아티아 선생님한테 오늘 논문 심사 있다고 꼭 가셔야 한다고 끌고 오시고. 파워포인트 움직이는 거 보면서 막 잘하지 않냐고. (웃음) 너무 괴로웠어요. 눈을 반짝반짝하면서 "쟤가 오늘 졸업한다고!" 관심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좋은데요. 참 그랬어요.

파워포인트 애니메이션을 안 썼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웃음)

제가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에 안 쓸 순 없었을 거예요. 인간이 사는 불안정한 세상과 이상적인 세계를 하나로 합치려는 시도가 혁명이었다고, 그 두 개의 선이 움직이는 과정에서 유토피아가 그려진다는 걸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걸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보여주는 게 쉬울 것 같아서, 시각자료 없이 발표할 순 없었을 것 같아요.

이건 넣어도 되는 이야기에요?

네. 넣어도 되는데, 논문 제대로 쓰고 제대로 심사도 받았다는 이야기를 꼭 넣어주세요. 야매 아니라고. 도서관 출입증으로 박사 학위를 증명하지 않는다고. 나 학위 신고필증도 있어요.


3. 치정과 죽음에 대해.

왜 치정 아니면 죽음인가요. 본인이 치정 전문 작가라는 정체성을 자각한 건 언제인가?

그건 예전에 거울 합평회에서, 어둠의 작가니 뭐니, 우리는 에로를 향해서 일로매진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다음에 깨달은 거고요.

에로인가요. (웃음)

 처음 거울에 합류하셨을 때 독자우수단편에 올라온 건 <아이를 안고 있었다>와 <죽은 팔>이었는데, 둘 다 사실 치정은 아니잖아요. <죽은 팔>은 호러에 가깝고.


그건 옆집에서 인테리어 공사를 한다고 계속 두드려대서요. 하루 종일 두드려대니까 죽을 것 같은 거예요. 제가 특정 종류의 소음과 진동에 되게 민감하거든요. 아무 생각을 할 수 없는 거예요. 가서 이야기를 해도 아직 집주인이 이사오기 전이라서, 공사가 끝나서 들어오기 전까지는 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내가 돈 내는 것도 아닌데 인테리어 하지 말고 그냥 들어와 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너무 화가 나서 썼어요.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아서. 그러니까 좀 미친 것 같은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그때까지는 우리가 치정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지면이 되면 엮은이의 말로 쓸 것 같은데, 도경님 소설이 독자우수단편으로 뽑힌 게 제가 심사를 쉬어서 박애진 님이 혼자 뽑을 때였거든요. 전 되게 나중에 읽었는데, 그땐 그냥, 어두운데 힘이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싶었어요.


힘이 있는 글이 나올 수밖에 없죠. 아침부터 벽 계속 두들기는데.

 원념이 서린 글이군요.


지금도 제2 롯데월드 공사 하는데, 집 밖에서 하는 공사면 창문을 닫으면 어느 정도 소음을 차단할 수 있는데요. 그땐 내 방 내 침실의 벽을 직접 두드리는 것처럼… 진짜 싫었어요. 그리고 그때 제 친구가 집이 과천인데 대학로 쪽에서 취직을 해서 결국 독립을 했거든요. 그래서 걔랑 같이 집을 보러 다녔어요. 벽 두들기는 거하고 집 보는 거하고, 이걸 합쳐서 써보자, 그렇게 해서 나온 글이에요.

네, 그래서 치정은요?

보통 사람이 극단적인 일을 하는 이유가 돈 아니면 치정 때문인 것 같아요. 보통은 돈하고 치정이 얽혀있고. 제가 돈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강력한 이야기가 나오기 가장 쉬운 수단이 치정이라서 쓰는 것 같아요.

그럼 치정관계란 어떤 관계인가요?

잘 모르겠어요. 모든 관계에 다 강자가 있고 약자가 있고, 갑이 있고 을이 있는데요. 갑은 을이 있어야만 갑인 거잖아요. 을은 가만 내버려둬도 을이지만 갑은 을이 있어야지 갑이거든요? 자기보다 약한 사람이 있어야 강자가 되는 거지. 그래서 양쪽의 관계가 일방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일방적이지 않아요. 갑이 을한테서 뭔가 원하는 게 있기 때문에 관계가 유지가 되는 거고요. 사실 어떤 측면에서는 갑이 원하는 걸 주느냐 주지 않느냐는 을이 결정을 하는 거거든요. 그런 관계가 제일 분명한 게 남녀관계 같아요. 비지니스 관계도 이득이 있으니까 생기는 거긴 하지만, 돈이 오가는 관계는 그 돈을 포기하면 그 관계가 끊어지는 거거든요. 내가 쟤랑 같이 사업 안 하면 되는 거거든요. 빚 내가 떠안으면 되고 쟤 다시 안 봐도 상관 없는데, 남녀관계는 감정이 얽혀 있기 때문에. 감정과 욕망이라는 건 내가 감정 안 하고 말지, 욕망 안 하고 말지 이런 게 안 되잖아요. 내가 컨트롤할 수 없으니 되게 끈끈하게 얽힌 관계이고.
그리고 갑을관계를 나누기가 가장 기묘한 게 남녀관계인 것 같아요. 보통은 여성이 약자고, 신체적 정신적으로 여성은 약하고 남성은 강하다고 생각을 하죠. 남성이 주도를 하고 여성이 따라가고, 데이트 관계도 그렇고 성적인 관계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는 그게 일반적으로 설정이 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잘 보면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쥐는 건 아니란 말이에요. 저 관계는 여자가 나서서 주도하는 관계다, 그럼 모든 면에서 100%로 그런가. 이건 정말 뭐라고 말할 수가 없고 당사자 둘만 알 수 있죠. 그런데 정작 그 두 사람도 잘 모르는 부분이 많은 거, 그게 남녀관계인 것 같아요. 치정 관계.

그래서 치정을 쓴다?

네. 변수가 되게 많아서 이야기를 만들 여지가 많아요.


<왕의 창녀> 같은 건 아무래도 예상 독자는 여자잖아요. 굳이 여자냐 남자냐로 나눈다면 여자에게 더 호응이 있을 것 같은데요. 관계를 다루는 소설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여자가 관심이 많은 것 같거든요.

독자 입장에서는 그럴 텐데요. 제가 걱정이 되기도 하고 걱정이 안 되기도 하는 게요. 제 여자 주인공들은 전혀 지고지순하거나 청순가련하거나 하질 않고, 항상 상대방한테서 뭘 얻어낼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항상 꿍꿍이가 따로 있고, 항상 비장의 무기가 따로 있고, 그래서 항상 꼼수가 있는 여자들이라서요. 예전에서 현서님이 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마녀라고 했는데, 그 표현이 마음이 들더라고요. 남자 입장에서 보면 다 마녀들이니까. 그래서 보통의 에로물이나 사랑이라는 관계에 모든 걸 다 바치는 여자를 기대하는 독자들은 불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오히려 그런 걸 기대하는 독자가 덜하지 않나요?

 실제로 남자 독자들 몇 명은 읽기 곤란해하는 걸 봤어요. 뭐랄까, 여성성이 있는 사람이어야지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긴 해요.


여성성이라는 말보다 정확한 말이 있으면 좋겠지만, 네. 여성성이라고 칭하게 되는 그거.

그리고 성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그런 부분만 읽는 분들도 있는 것 같긴 하던데. 그런 분들이 불편할 수 있는게, 제 소설에서는 여자들이 성적인 면을 무기로 남자에게서 얻어내고 싶은 걸 얻어낸다든가, 남자를 가지고 논다든가, 성적인 관계를 맺으면서도 다른 생각을 품고있다든가 하는 면을 항상 가지고 있거든요. <왕의 창녀>도 그렇고요. 얘를 나한테 푹 빠지게 해서 죽여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 면에서 불편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리고 또 어쩌면 불편할 수도 있는 게, 제 소설에 나오는 여자들은 성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몸 쓰는 걸 무서워 하지 않는 여자들인데요. 그런 부분도 불편할 사람은 불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소설이니까 잘 눈치를 못 채고 넘어가는 것 같은데, 몸으로 싸우고 공격하고, 이런 거 전혀 안 무서워하는 여자들이거든요. 안 약해요.

여자들이 대상화가 안 된다는 거?

 제가 도경님 소설을 두고 항상 어두운데 생명력이 넘친다고 했었는데요. 생명력이, 작가 자신의 의지가 느껴져요. 정말 소리 높여서 나는 오롯이 혼자고 자유롭고 싶고 자유로워야 하고 자유로운 게 당연하다고. 이런 명제 같은 게 확 들어올 때가 많단 말이에요.


나를 자유롭게 하지 않으면 죽여버릴 테다. (웃음)

나는 내 삶의 주인, 내 운명의 선장, 이거요?

아니면 죽인다?

 가끔은 김소월의 '나는 복종을 좋아해요' 같은 류의 인물도 나오지만. 그 복종이 절대 단순한 복종은 아니라서, 매우 복합적인 감정이 되게 힘 있게 올라와요.  여성성이 없는 사람은 그런 점을 느낄 수도 있고 못 느낄 수도 있고. 만약 못 느끼면 이게 무슨 의미냐 할 거고, 느낀다면 불편해하겠죠. 그런데 보통 여자들은 좋아하죠.


그리고 그런 쪽이 대상화된 여자 캐릭터보다는 매력적일 수 있잖아요. 다들 좋아한다고는 못 하겠다만.

 뭐 일단은 대상화된 여자 캐릭터가 아니면 사람으로 보는 데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좀 있고.


애초에 가상의 인물이기도 하고요. 본인은 그런 점을 의식하고 쓰거나 인식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별로? 그런데 보고있으면 짜증은 나죠. 내가 보기에는 실제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데. 천상 여자와 상남자의 조합이라고 해도 결국은 둘이 주고 받는 무언가가 있거든요. 하다 못해 동물이나 곤충이라도 상호작용을 하게 되어 있는데, 살아있는 한 관계라는 게 일방적일 수 없거든요. 불가능해요. 그런데 이야기에서는 항상 여자는 탑 위에서 가만히 기다리죠. 가만히 있으면 남자가 와서 구해주고. 쟤는 대체 어떻게 사나, 화장실은 가는 걸까, 그런 생각도 들고.
그리고 대학교 때 교양 수업 중에서 이야기의 도식을 바꿔보는 시간이 있었어요. 관점을 완전히 바꿔서 이야기를 다시 써 보라고. 재미있었어요. 중간고사 보고서인가가 관점을 완전히 바꿔서 이야기를 완전히 다시 써 오는 거였어요. 그래서 전 햇님달님 바꿔서 오누이가 호랑이를 잡아먹는 이야기를 썼었나? 우물에 빠트린 다음에 누이가 가죽을 벗겨서 팔았나.  되게 재미있었어요.

어차피 좋아하는 사람은 읽을 테니까 상관 없지 않나.

안 좋아하는 사람은 안 읽으면 되지. 읽고나서 뭐라 그러면 죽여버려야지. (웃음)


후기 중에, 자기는 치정이 디폴트라고 생각했는데 편집장님이 아이가 기본인 것 같다고 지적하셔서 반성했다는 내용이 있잖아요. 그건 뭐예요?

치정의 결과물이 아이인 것 같은데요. 전 결혼도 안 했고 애도 없는데, 소설에 아이가 등장해서 중요한 사건을 일어나는 이야기가 많더라고요. <아이를 안고 있었다>도 그렇고, <휘파람>도 그렇고. 아이가 죽었기 때문에 중요한 전환점이 생겨나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내가 이렇게까지 애에 집착했었나. (웃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애가 죽는 것 같아요.

그리고 소설 중에 아이가 아니면 가족이 죽어서 충격을 받는 것도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계속 애만 죽일 수 없잖아요. (웃음)

(웃음) 동생이 죽는다든가. 가족이 죽으면 충격을 받는 게 당연하다는 것들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그러네요. 치정이 아니면 애가 죽고, 애가 아니면 동생이 죽고. (웃음)

가족이 죽는 것 중에서도 애가 죽는 것하고 어른이 죽는 것하고 반응이 완전히 다르잖아요. 특히 나이드신 분이 노환으로 자연사하는 것과 애가 죽는 거하고는 느낌이 너무 달라서.

애들은 죽을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죠.

옛날에 어렸을 때 사촌언니가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임신 3개월이었는데 남편이 운전하고 가다가 전봇대에 박았어요. 남편은 멀쩡했는데 언니가 심장마비로 죽었어요. 그 언니는 결혼도 해서 애도 있을 나이었지만 저는 꼬마였기 때문에, 엄마나 친척들을 통해서 이야기만 듣고 부모님만 장례식에 갔다 오고 그랬어요. 저는 그 언니를 예쁘고 좋은 사람이었다고 어렴풋이 기억을 하는데요. 분명 나하고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인데 나는 잘 알지도 못하고 마치 남처럼 장례식도 못 가고. 그런데 언니의 어머니 되시는 분은 한참 지나고 나서도 언니에 대해 현재형으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아직도 살아있는 것처럼. 요즘에도 가끔 그 언니 이야기를 하세요.
그분 입장에서는 딸이 죽은 거고, 또 그 딸이 임신하고 있었으니까 더 그렇겠죠. 저는 그 형부가 어떻게 되었을지 그것도 궁금하거든요. 자기가 사고를 냈는데 자기는 멀쩡하고, 별로 큰 사고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임신한 아내가 죽어버리고. 왜 그렇게 죽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 경우가 가끔 있다고는 하더라고요.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는 경우가 있대요. 하지만 언니가 서른도 안 됐었거든요. 그 사람을 잊어버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그래도 친척인데, '어렸을 때 그런 사람이 있었다' 정도라도 잊어버리면 안 되겠다. 그래서 <아이를 안고 있었다>를 썼어요.

인테리어 공사 때문에 두드릴 때도 그렇고, 친척의 죽음도 그렇고, 마음에 뭔가 맺혔을 때 그걸 글로 승화시킨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승화시키기보다도요. 그렇게 예술적 책임의식이 투철한 사람은 아니고, 그걸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다보면 거리를 두게 되니까 진정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소설로 만들면, 결말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뭔가 해결이 되잖아요. 어떻게든 끝이 나잖아요. 그러니까 좀 진정이 돼요.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을 때 진정이 되어서 좀 견디기가 쉬워져요.

그래요, 작가 후기에 그런 거 있었죠. '결말이 안 좋은 게 많은데, 나한테는 이미 다 해결이 됐기 때문'이라고. 나한테는 해결됐으니까 볼 일 없다고.

나한테는 해결이 됐으니까 충격적인 결말로, 다 죽여 막. (웃음)

그 왜, 책을 읽으면 주인공이 내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느낌이라든가, 아니면 등장인물들이 겪는 일들로 인해 내 감정이 해소가 된다든가, 그런 거 있잖아요. 그 생각이 나네요.

그런데 등장인물이 나인 건 아니거든요. 내가 주인공을 좋아한다고 해도 걔는 내가 아니라서, 그리고 글을 쓸 때는 이야기와 거리를 두고 어떻게 만들면 좋을지 생각을 하고 쓰니까, 걔가 내가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하기도 하고, 나라면 저렇게 안 할만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그렇게 되는 거죠. 걔가 100% 나는 아니고, 내 이야기를 100% 걔가 대신 해주는 것도 아니에요. 주인공이 아닌 이야기 전체가 내가 하고 싶은 거고, 주인공은 중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야기의 한 부분인 거고.


4. 글쓰기에 대해.

아 그래요, 등장인물에 이름이 없는 이유.

못 정하겠어요.

그런데 가끔 이름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게 ‘그’가 두 명 이상인 경우. ‘그녀1’ ‘그녀2’ 이렇게 할 수 없을 때.

이름 어떻게 정해요?

이름은 가장 평범하게 들리는 이름으로 정해요. 되게 흔한 이름. 그리고 예외로 <영생불사 연구소> 같은 경우는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이 있어서 안전한 범위 내에서 가져다 썼고. 어떤 특정한 사람 때문에 이야기가 나오면 그 사람 이름을 가져다 쓰는 경우도 있긴 있는데, 꼭 그런 건 아니고요. 가능하면 흔한 이름을 써요. 아니면 출석부에 많이 등장하는 글자들 있잖아요. 개중 남자 이름 같은 글자와 여자 이름 같은 글자를 적당히 조합해서.
이름을 붙이면 구체적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좀 이상한 일이지만 묘하게 현실감이 떨어져요. 이름이 붙으면 '이 사람은 가짜 사람'이라고 확정되는 것 같아요. 이름을 안 붙이면 어딘가에는 그런 사람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이름이 붙으면 '이런 사람 없는데', '나 이런 사람 모르는데', 그런 기분이 들어서 잘 못 쓰겠어요.

이름이 없으니까 익명의 누구든 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 거구나?

네. 이름을 안 쓰면 세상 어딘가에서 그런 사람이 그런 일을 겪을 것만 같아서 좀 쓰기가 편해요.

이름 하니까 말인데 아까 언급했던 <영생불사 연구소>, '영화배우 ㅂ 씨'가 등장하잖아요? 이름을 지어낸 것도 아니고 그냥 ‘배우’도 아니고, 이 ㅂ 씨는 뭔가.

ㅂ 씨는 실제로 있는 영화배우 박모 씨. 있어요, 지금까지도 감정이 별로 안 좋은 박모 씨.

그거 좀 재미있었어요. 실화라고 쓰여 있어서 더.

네, 실화에요. 걱정하고 있어요. 누가 책 보고 그게 진상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사건의 전말이 알려지지 않은 채로 묻혔거든요.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봐도 돼요? 실화인 부분은 어디까지고 실화는 실제로 어땠는가.

괴한이 난입하기 전까지는 다 실화에요. 끝을 어떻게 낼까 하다가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만들자 싶어서 괴한을 난입시켰는데, 그 전까지는 전부 다 실화에요.


전공 공부랑 관련해서 소설에 영향을 받은 거라던가, 그런 거 있어요?

영향 되게 많이 받았죠. 작가 후기에도 썼던, 말투나 어법 이상한 거. 한국어로 폴란드어를 하려고 한다든가. 러시아어 문법에 따라서 한국어를 하려고 한다든가. 나는 그게 너무 당연한데, 왜 이상하지? 그러고.
그리고 아까 공주 기사 용 이야기였나? 러시아 문학 중에, 화자가 구어체로 이야기하는 스까스(skaz, сказ) 기법이라는 게 있거든요. 화자가 3인칭으로 주인공의 이야기를 서술해요. 화자하고 주인공하고 다르고, 화자하고 작가하고도 달라요. 스까스 기법이 되게 활용도가 넓거든요. 정의도 느슨하고, 작가마다 기법이 많이 다른데, 공통적인 게 있어요. 아주 확실한 구어체여야 하고, 내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하고. 거기에 또 화자가 끼어들기도 하고 그래요.
한국의 판소리하고 되게 비슷한데요. 판소리는 노래잖아요. 그런데 이건 노래가 아니고 구어체로 이야기를 하는 거거든요? 공주 기사 연작에서 그걸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편집장님에게 스까스 기법 이야기를 했더니 편집장님이 막 괴로워하면서...

 편집자가 교정을 하면 "여기 주술관계가 이상해요" 아니면 "이건 우리말에서는 안 쓰는 표현이지 않나요" 하잖아요. 그러면 보통은 "그러네요" 아니면 제가 말하려는 게 이렇게밖에 안 돼요" 하고 말씀하신단 말이에요. 근데 이 분은 매 번 근거가 달라요. "이건 폴란드 문법에서 쓰는 방식이다", 그 다음에는 "러시아 문법에서", "1920년대 소설에서". 계속 달라지니까 신기했어요. 이유가 재미있기도 했고요.


문법적 오류에서 저변이 풍부하네요.

스까스 기법 이야기는 작가 후기에 안 썼으니까 이건 좀 신선한 이야기다.

스까스라고 쓰는 거예요? 무슨 뜻이에요?

이야기라는 뜻이에요. 원래는 전래 민담에서 온 기법인데, 현대물에도 많이 써요. 내 친구가 말이지, 하고 시작하는 이야기도 러시아 자료를 보면 스까스 기법이라고 그래요. 우리 삼촌이 파일럿인데, 뭐 이런 거. 그 기법으로 유명한 작가가 있어요. 그것도 내가 수업을 했구나. (웃음)

아까 <Nessun Sapra>도 수업하다가 이거 써야겠다고.

<Nessun Sapra>는 저도 정말, 이야기가 어떻게 다 맞아떨어졌는지 잘 모르겠어요. 신기해요. 모델이 되었던 작가가 이력이 특이하고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니까, 그 작가를 가지고 뭔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작중에서는 오페라 <투란도트>와도 이어지잖아요. 볼쇼이 극장에서 31년에 공연했다는 것도 사실이거든요. 저는 글을 시작할 땐 그걸 몰랐어요. 정 안 맞으면 <투란도트> 빼고 다른 걸로 바꿔야지, 이러고 있었는데, 찾아 보니까 모든 사항이 다 맞아 떨어지는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면, 글은 보통 어떨 때 써요?

글은, 시간이 날 때 쓰죠.

시간이 언제 나나요?

보통은 주말 중에 하루 날 잡아서 '오늘은 이걸 써야겠다' 생각을 해요. 구상은 아무 데서나 하고. 그러다 날 잡아서 하루 초고 쓰고, 기회가 되면 계속 퇴고를 하고.
그런데 글을 쓰면 기를 빨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중편 이상의 길이가 되면 체력이 딸려서 헐떡헐떡하면서 쓰는데, 그래놓고 퇴고도 강박적으로 해요. 생활을 올스톱 하고 퇴고만 하거든요. 논문 써야 하는데 안 하고. 밥도 안 먹고. 계속 퇴고만 하고 앉으니까 체력이 너무 딸려요.

한 번에 몰아 하니까 그렇죠.

그런데 안 그러면 방학 때밖에 시간이 안 나는데, 계속 써야지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잘 썼든 못 썼든 계속 써야지 뭐든 쓰게 되지, 중간에 멈추면 못 쓰게 될 것 같아서요. 그래서 겁이 나서 계속 쓰는 것도 있어요. 생각이 났을 때 써야 하는 것 같아요. 대학교 3학년 때인가부터 소설 쓰기 시작해서 4학년 때 한 1-2년 쓰다가, 유학 나가서 2년 동안 아무것도 못 했어요. 폴란드 가서 잠깐 뭐 좀 썼었고, 다시 미국 가서는 2004년에 갔는데 2008년까지 아무것도 못 썼거든요? 그러니까 계속 안 쓰면 그렇게 못 쓰게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되게 불안한 것도 있어요.
그리고 또 글을 안 쓰고 아예 다른 걸 하면 모르겠는데, 전 논문도 써야 하고 번역도 해야 하고, 다른 종류의 글을 만드는 작업은 계속 하고 있잖아요. 종류는 다른지만 원고지를 채운다는 점은 똑같은데요. 제 글을 안 쓰면 여기에 들일 에너지를 다른 종류의 글에 다 소진해버리고 창작 쪽은 말라붙을 것 같아요. 사실 창작이 저한테는 다른 쪽보다 더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불안과 공포에 쫓기면서, 안 쓰면 못 쓰게 될 거야, 오늘 써야 해, 이러면서 써요.

글 쓰는 게, 얼마나, 어떻게 중요해요?

제가 가장 저다운 점이 글을 쓰는 거예요. 예를 들면 논문은 형식이 정해져 있고, 주석이 다 있어야 하죠. 의견은 제 의견이지만 마음대로 쓸 순 없고, 근거 자료가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쓴 이야기도 많이 참고해야 하고. 논문은 되게 객관적으로 써야 되고, 번역은 애초에 남이 쓴 거고요. 창작은 가장 저다운 과정이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 내가 내 세상을 만들어서 내 이야기를 하니까.

듣다 보면 글쓰기가 뭔가 살풀이 역할도 하는 것 같아요.

그렇기도… 여러 가지 역할을 하는데, 그래서 저한테는 되게 중요해요. 가장 저다운 과정이라서.

 살풀이도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글로밖에 해소가 안 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 면에서는 천상 소설가.


앞으로는 어떤 글을 쓸 건가요?

이것도 후기에 썼던 느낌이 드는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시기를 지나서 동어반복을 쓰는 시기가 온 것 같아요. 좀 슬럼프가 온 것 같아서, 새로운 걸 찾아내고 싶은데 뭔지 잘 모르겠어요. 최근 1-2년 사이에는 그게 걱정이에요. 과연 내가 새로운 걸 찾아낼 수 있는가, 계속 소설을 쓸 수 있을까. 내가 결혼을 안 하고 애를 안 낳았는데, 중요한 생애 과제를 안 했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어떤 굉장히 큰 부분이 있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못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어쨌든 정체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게 좀 고민이고요. 계속 새로운 걸 써야 한다는 게 되게 절박한 과제인데 해결을 잘 못 하겠고, 누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고민은 아닌 것 같고.
그와는 별개로, 추리소설을 잘 쓰고 싶어요. 앞으로의 희망은 추리소설을 잘 쓰는 거. 범죄 수사물을 되게 좋아하거든요. CSI 이런 거. 그런 이야기로 만드려면 보통의 이야기하고는 전혀 다른 사고 구조가 필요하더라고요. 그걸 좀 배워서 이야기를 잘 만들어보고 싶어요. 생각해 보면 제가 썼던 이야기들 중에 추리소설처럼 이야기의 핵심을 찾아내려는 소설이 없는 건 아니었거든요. 그러니까 배우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과연 할 수 있을 것인가. 대체 누굴 죽이고 범인은 누구로 하나. 이런 거 고민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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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4] Redfish Chronicles 2013.09.30
대담 미로냥 인터뷰 2013.09.30
대담 [특집6] 김주영 인터뷰 2013.09.29
그림이 있는 벽 [특집7] 천사가 거기에 있다1 2013.09.28
기획 [특집5] 우주의 방정식 : 해(解) 2013.09.28
대담 계림 인터뷰 2013.08.31
그림이 있는 벽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연인들1 2013.08.31
기획 아름다운 헬레나 2013.08.31
그림이 있는 벽 이러시면 곤란합니다2 2013.07.31
대담 앤윈 인터뷰 2013.07.31
기획 2. 소설을 쓸 때는 어떤 문장을 써야 하는가?6 2013.07.31
대담 정도경 인터뷰 2013.06.30
거울 거울 10주년 축하 인사 모음 2013.06.30
그림이 있는 벽 열 번 째의 봄에서, 활짝!4 2013.05.31
기획 당신도 '일단은' 소설을 쓸 수 있다21 201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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