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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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정도경


환상문학웹진 거울 창간 1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10주년 기념으로 언제나 그렇듯이 내가 쓰고 싶은 거 쓸란다. 


1. 

작년쯤부터 학생들이 점수와 함께 “반평균”과 “석차”를 묻는다. 여기서 학생이란 대학생들이다. 

대학생 입에서 “반평균”과 “석차”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상황을 맞닥뜨린 것이 평생 처음이라 나는 시쳇말로 멘붕했다. 그런데 학생들을 탓할 수가 없는 것이, 성적평가의 원칙이 상대평가이기 때문이다. 상대평가의 구체적인 방법은 학교마다 조금씩 다른데, A가 30%, B가 30%, 이런 식으로 퍼센트를 지정하는 학교도 있고, 더 잔인하게는 수강생 전체 성적 평균이 3.2를 넘어가면 안 된다는 식으로 상한선을 지정하는 학교도 있다. 

어느 쪽이 됐든 학생들은 제한된 점수를 두고 자기들끼리 경쟁을 해야 한다. 소위 말하는 “학점관리”를 하려면 반평균과 석차를 물어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백년지대계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느낌이다. 물론 방관자로서 나 자신의 책임도 피할 수 없다.


2. 

작년 여름쯤에 어떤 모임에 불려간 적이 있다. (쓰다 보니까 2012년은 참 여러 모로 스펙타클한 한 해였던 것 같다. 살아남아서 다행이야.) SF에 관련된 모임이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SF는 상당히 전문적인 분야이고 그에 비해 나는 SF 전문 작가나 번역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 불려갔다는 것 자체가 좀 어색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모임의 취지를 들어보니까 SF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 취지라는 것이 SF 작가와 공학자들을 모아놓고 요즘 유행하는 “기술과 인문의 융합”을 하자는 얘기였는데, 이렇게 말하면 뭐 하자는 건지 점점 더 알 수 없어지지만 소장님의 연설을 가만히 해석해보니 “너네는 상상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니까 열심히 즐겁게 상상해서 아이폰보다 기깔난 걸 만들어 내라”라는 것이 요점이었다.

SF 작가, 아니 어떤 종류의 작가든지간에 창작하는 사람에게 “즐겁게 상상해서” 특정한 종류의 실용적인 (=판매 가능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라”라고 명령만 하면 당연히 그대로 실시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저 소장님은 한국의 흔한 권위주의자 꼰대로구나, 라는 결론에 도달하여 나는 즉각 흥미를 잃었다. 그리고 그런 쓸데없는 명령에 따라 상상을 주문생산하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공사다망하신 관계로 그 모임에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더불어 두 시간 가까이 모임을 하는 내내 그 소장님이라는 분이 입만 열면 문장의 조사와 동사어미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의미있는 단어를 영어로 말했기 때문에 들으면서 참아주기가 너무나 짜증이 났다.) 대체 저 정체불명의 연구소가 얼마나 버티는지 한번 보자, 싶었는데 웬걸, 근 일년이 지난 이제까지 잘 버티는 모양이다. 

그 뒤로 더 놀라운 (그러나 반갑지 않은) 사건들이 연달아 벌어지는 가운데 한국 최고라는 국립 모 대학교에서는 “창조경제학과”라는 정체불명의 학과를 신설할 모양이다. 정체불명의 연구소와 정체불명의 학과 모두 근본적인 기조는 같다. “아이폰보다 기깔난 물건” “페이스북보다 기깔난 서비스”를 만들어서 “양인들보다 기깔나게” 떼돈을 벌어보자는 것이다.

여기서 “—보다 기깔난”이라는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관계자 중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는 게 내가 관찰하는 이 시대의 비극이다.


3.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좋은 곳”(eu-topia)과 “없는 곳”(u-topia)이라는 상반되는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 이 단어를 만들어낸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 문학의 원조 격인 그 유명한 작품에서 유토푸스 왕이 지배하는 유토피아 섬의 생활상과 사회체제를 실컷 설명한 뒤에 “그러나 이러한 사회가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라는 모호한 의견으로 다분히 비겁하게 끝을 맺었다.

잘 생각해보면 모어가 묘사한 유토피아는 그다지 이상적이지 않다. (모어 자신도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으나 작품 전체를 뜯어고치기에는 마감이 너무 급했던 모양이다.)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거주자가 똑같은 옷을 입고 (모어는 주인공 히슬로데이의 입을 통해 ‘유토피아 제복’의 옷감과 모양새까지 자세히 설명을 하는데, 확실히 말하지만 절대로 예쁜 옷은 아니다) 공동 식당에서 똑같은 음식을 먹고 정해진 일과에 따라 정해진 노동을 하고 일종의 기숙사에서 공동생활을 한다. (결혼한 부부는 집을 “배급”받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똑같은 숟가락의 모양새까지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사회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밥을 먹고 똑같은 일과에 따라 공동 생활을 하는 시설이나 기관이 현실에도 실제로 존재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군대와 감옥이다. 바꿔 말하면 이렇게 집의 모양새와 제복의 옷감과 분 단위로 나누어진 공동 일과시간까지 세세히 계획된 “청사진”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구현하려는 유토피아는 사실 유토피아가 아니라 억압적 전체주의의 표상이며 “작가 자신의 독재적인 사상을 독자에게 주입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고 미국의 역사학자 러셀 재코비 (Russell Jacoby)라는 사람이 [그림같이 불완전한 (Picture Imperfect)]라는 (꽤 재미있는) 책에서 한 말이다. 

재코비는 [그림같이 불완전한]에서 “청사진”을 제공하는 시각적 유토피아 대신에 유대교의 예를 들어 “우상파괴적 (iconoclastic) 유토피아”, 쉽게 말해 청각적 유토피아를 주장한다. 근본적으로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이상적” “절대적” 어쩌고는 모두 유대교-그리스도교를 잇는 유일신 사상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양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계통의 종교에서 이상향을 찾는 것이 문화적 전통적으로 당연한 일인데 우리는 동양 사람이므로 그쪽 사고방식을 꼭 따라줄 이유는 없지만 하여간 재코비가 하려는 말이 뭔 소리냐 하면 유대교에서는 신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이상사회를 지향할 때 언제나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경로에는 무료통화 200분 이런 거 없고 종교 문헌 등에 기록된 예언자들의 사례를 보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짧고도 강렬하게 체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유대교 전통에서 유대민족을 이상사회로 이끄는 신의 말씀은 “아름다운 곳” “행복한 곳” 등으로 간단하고 모호하게 묘사될 뿐이다. 더불어 유대전통에서는 앞서 말했듯이 신에 관련된 시각적 묘사가 금기이기 때문에 [유토피아]에서 작가가 하듯이 제복의 원단이나 공동식당의 숟가락 모양새 등을 일일이 지정할 수가 없게 되므로 “작가의 독재적 사상”을 일방적으로 독자에게 주입할 여지가 적어진다는 것이다. 대신에 “아름다운 곳” “행복한 곳” 등속의 모호한 표현에서 각자 자신이 상상하는 이상 사회를 그려볼 여지가 생긴다.

책을 읽을 때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뭐 지금도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애초에 죽지 않은 경제를 이유없이 살려야 한다는 구호에 이어서 아무도 정확한 의미를 규정하지 못하는 “창조경제”라는 모호한 복음에 이끌려 온 나라가 자의인지 타의인지도 모르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향해 질주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 “청각적 유토피아”에서 들려오는 이상사회의 부르심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뭔가 최소한의 철학에 기반을 둔 사회적 합의가 좀 필요하지 않나 싶다.


4.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대한민국 헌법 제 1장 1조이다. 또한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이것이 대한민국 헌법 제 2장 10조이다. 이 얘기를 왜 하냐 하면 “이상사회”라는 개념이 꼭 우리의 현실과 상관없는 서양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가 됐든 기본적인 이념은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을 만들자는 것이다. 헌법이라는 건 서양적 근대 국가 체제의 산물이지만 “사람 살기 좋은 나라”라는 개념 자체는 쭉쭉 거슬러 올라가면 홍익인간까지 올라갈 수 있는 아주 오래되고 보편적이며 근원적인 개념이다. 공동체 수준에서, 그리고 개인 수준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의지 혹은 만들고 싶다는 바람은 모든 민족, 국가, 사회의 원천적인 지향점이라는 얘기다.

그러면 여기서 궁극의 질문은 어떤 곳이 “살기 좋은 곳”이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가 있어야 한다. 특히나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면 뭐가 “행복”이냐는 질문에 대해 개개 국민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답변이 있는 것이 정상이다. 학교에서 백점 맞고 일등하고 졸업해서 삼S이나 현D에 취직해서 연봉을 x천만원 이상 받고 xx평 이상 되는 아파트(주택 아니고 반드시 아파트여야 함)에서 살며 아이들은 걸음마 시작할 때부터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학교 들어가면 방학 때마다 미국에 보내서 학교에서 백점 맞고 일등하고 (무한루프) 하면 그것이 행복이다 - 라는 단 하나의 정답만이 정해져 있는 사회는 이상 사회가 아니라 감옥이다. 

사실은 감옥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감옥에선 최소한 때 되면 밥 주고 시간 되면 잠도 재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삶을 살고 똑같은 꿈을 꾸어야만 하며 거기서 뒤떨어질 시에는 최소한의 인권이고 나발이고 길거리에서 굶어죽어도 네가 덜떨어진 탓이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잠도 못 자고 숨 돌릴 새도 없이 동동거리며 뛰어다녀야 하는 사회는 근대적인 개념에서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라 정글이다. 이미 잘 살고 있는데, 가만 냅두면 더 잘 살 수 있는데 “잘 살아 보세”라는 유신시대스러운 복음을 무비판적으로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 복음 잘못 따라가면 우리는 정글 속에서 서로 물고 뜯는 야생동물이 된다.

혹은 이미 오래 전에 그렇게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익숙한 구호가 들려오자마자 조건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무작정 따라가는 모양이다.


5.

사실 이 글을 처음 구상할 때 생각한 것은 유토피아 문학과 SF 장르의 관계 규정이었다. 물론 한국에서 SF 문학은 (문학이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SF 영화 이런 건 상황이 몹시 다르니까) 읽는 사람만 읽고 안 읽는 사람은 전혀 관심이 없는 마이너한 장르이며 유토피아 문학은 그보다 더 마이너한, 혹은 한국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장르이기 때문에 졸라 마이너한 두 장르 사이의 관계를 학문적으로 규명해봤자 나 빼고 아무도 관심 없을 게 분명하니까 나 하고 싶은 얘기 아무 거나 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쓸데없는 시도를 왜 하고 싶었냐 하면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영어문화권에서는 SF라고 하면 주로 우주선에 로봇 태우고 다른 행성 찾아가는 장면을 떠올리는데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문화권에서는 유토피아 문학과 SF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동유럽식 사고방식으로는 SF나 유토피아 문학이나 모두 “환상문학” (fantastika)에 속하는데 이 환상문학의 하위 장르인 과학소설, 유토피아 소설, 경계소설이나 중간문학 기타등등 중에서 굳이 또 구분을 하자면 유토피아보다는 SF가 약간 더 넓은 개념이라서 모든 유토피아 문학은 SF라고 아주 당연하게 분류를 해 버린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같은 걸 보면 과학기술에 대한 얘기는 한 마디도 안 나오는데 SF로 치부하기에는 좀 문제가 있지 않나, 라고 생각했지만 순수문학 하는 사람일수록 SF에는 관심이 없고 SF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러시아 문학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질문은 허공에서 혼자 메아리칠 뿐 아무도 대답을 해 주지 않은 채로 오날날에 이르렀다. 그래서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으면 나 혼자 대답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지루해도 조금만 참아 주시기 바란다.

러시아어와 폴란드어에서 과학소설, 즉 Science Fiction에 해당하는 단어는 “과학적 판타지”이다. (러시아어로 научная фантастика, 폴란드어로 fantastyka naukowa인데 러시아어나 폴란드어 모두 무척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언어이므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시는 쪽이 삶에 이롭다.) 그런데 영어에서 science라는 단어가 자연과학 (natural science)과 사회과학 (social science) 양쪽에서 “학문”이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동유럽 언어들에 존재하는 “과학적 판타지”라는 분류는 “학문적 판타지”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건 다른 고명한 학자들이 논문 써서 정립한 이론이 아니고 그냥 내가 하는 주장인데 유토피아 소설, 그러니까 사회정치적 체제를 주로 다루는 소설도 당연하게 SF로 분류하는 동유럽적 사고방식은 이렇게 폭넓게 설명하지 않으면 달리 이해할 방법이 없다. 젠장구리.

그럼 여기서 “학문”을 정의해 보자면 내 생각에는 사실에서 근거를 찾아 이론을 만들고 체계화해서 다시 그 이론과 체계를 통해 현실을 깊이 있게 이해하려는 지적(知的)이고 이성적인 시도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의를 내린 뒤에 “학문적 판타지”와 연결시켜서 생각하면 과학소설과 유토피아 소설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과학소설은 수많은 사실 중에서도 과학기술과 기계문명이라는 부분에 주목한다. 과학적 이론이나 기술은 그냥 존재하는 사실일 뿐이고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수소나 산소의 본성이 선하다거나 미토콘드리아의 본성이 악하다고 할 수 없다는 얘기다. SF 작가는 이처럼 가치중립적인 과학적 사실을 가져다가 이야기를 만든다. 그 안에서 과학적 사실들은 작가가 속하는 시대의 여러 가치를 대표하는 등장인물들과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그 사실 자체를 넘어서는 문화적 함의를 갖게 된다. (이런 멋있는 말은 다 나보다 훨씬 고명하신 학자들의 말씀이다. Istvan Csicsery-Ronay, “The Book Is the Alien: On Certain and Uncertain Readings of Lem's ‘Solaris’”) 그리하여 아이작 아시모프는 “과학소설이란 과학기술과 기계문명의 발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라고 정의했다. “A Conversation with Isaac Asimov,” 1976년도 인터뷰) 사실 내가 생각하는 과학소설의 정의는 따로 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할 것 같으니까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은 넘어갈란다.

유토피아 소설은 같은 사실 중에서도 사회정치적 체제라는 부분에 주목한다. 사회나 정치나 공동체의 체제나 규범 또한 과학적 사실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현실일 뿐이며 여러가지 각도에서 고찰할 수 있는데, 유토피아 소설에서는 이런 체제나 규범을 가져다가 이야기 속에 집어넣어서 “좋은 사회” 혹은 “나쁜 사회”에 대한 판단, 즉 사회정치적,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덧입히는 것이다. (“사회”라는 단어가 너무 많이 반복되어서 몹시 거슬리는데 적절한 다른 단어를 찾아내기에는 마감이 급하므로 일단은 이대로 둬야겠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과학소설과 유토피아 소설은 양쪽 다 사실 혹은 이론에 근거를 두는 다분히 학제적인 문학 장르이다. 과학소설은 자연과학적 사실과 이론, 유토피아소설은 사회과학적 사실이나 이론에 근거를 두고 개연성 있는 허구의 세계에서 그러한 사실들을 현실에서 벗어난,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여준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니까 과학소설이나 유토피아 소설이나, 지금과는 다른 존재 방식 혹은 더 나은 삶의 방식을 제시하거나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문학 장르라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정의이다.

그리고 허구의 세계에서 그 “다른 방식”에 대한 탐색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fantastika – 환상의 체계, 상상력의 문학이다. 궁극적으로는 이 얘기를 하고 싶었다.


6.

19세기 초에 러시아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오렌부르그라는 지방의 지역 경계선 밖으로 얼마쯤 가면 치즈로 된 땅이 있고 그곳에는 우유로 된 강이 흐른다는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떠돌았다. 이 “치즈로 된 땅과 우유로 된 강”은 사실 러시아 민담에 나오는 오래된 이상향으로 말하자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꿀 빼고 젖만 강조한 버전이다. (러시아는 나라가 추워서 바쁜 벌꿀도 살아남기 쉽지 않기 때문에 그런가보다.) 그런데 여기에 “오렌부르그 지역”이라는 구체적인 지명이 들어가자 민담은 갑자기 굉장히 현실적인 설득력을 띠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오렌부르그 주민들은 물론 인접지역에 살던 사람들까지 이 치즈로 된 땅과 우유가 흐르는 강을 보기 위해서 한두 명이 아니고 마을 단위로 단체로 짐 싸서 떠나는 바람에 지역 정부에서 노동력 유출을 막기 위해서 강력한 이주 금지령까지 내려야만 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러시아에서 농노제가 폐지되고 일반 시민이 법적으로 거주이전의 자유를 획득한 것이 1863년이다. 이 사건은 1822년으로 그보다 약 40년 전이다.) 내가 사랑하는 환상문학 연구가 브세볼로드 레비치 (Всеволод Ревич) 선생의 [유토피아의 교차로 (Перекресток утопии)]라는 (무척 재미있는) SF 연구서에 나오는 일화다.

이야기의 교훈은 명료하다. 인간의 상상력은 그 어떤 현실 논리보다 강력하다는 것이다. 레비치 선생은 이 일화를 통해 사람들이 환상문학에 끌리는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여기에 덧붙여 환상과 현실이 접목되었을 때의 영향력에 좀 더 주목하고 싶다. 위에서 말했듯이 치즈로 된 땅과 우유로 된 강은 러시아 민담이다. 주로 먹을 것이 풍부한 이상향을 묘사하는 이런 민담은 신화적 혹은 설화적 유토피아의 일종으로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나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냥 “어딘가에” 그런 땅이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다면 아무리 배고프고 힘들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19세기 러시아의 농노라 하더라도 떠도는 이야기와 현실을 구분할 정도의 분별력은 있었을 테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오렌부르그”라는 구체적인 지명이 들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상상에 현실이 접목되면서 실제적인 목적지가 제시되자 사람들이 마을 단위로 짐을 싸서 떠나간 것이다. 누군가는 정말로 배가 고파서, 치즈로 된 땅과 우유가 흐르는 강이 너무나 절실했기 때문에 떠났을 수도 있다. 혹은 그냥 그 광경을 살아 생전에 자기 눈으로 한 번 보고 싶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 쪽이 됐든, 현실에 접목된 상상은 이 사람들 모두 짐 싸서 떠나게 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가장 강력한 문학 장르는 사실에 바탕을 둔 “학문적 상상” – 그러니까 SF와 유토피아 문학일 것이다. 실제로 SF의 경우 우리는 대부분 상상 속에 약간의 과학적 사실이나 기술이 접목되는 시대를 오래 전에 지나서 이제 상상이 현실 속에 대부분 구현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인간은 달에 갔고, 큐리어시티는 화성에 갔고, 이 글의 도입부에 썼던 “아이폰보다 훨씬 기깔난 물건”인 구글 안경이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모 연구소가 아니라 양인들에 의해) 상용화되어, 인간은 이제 현실에서 가상현실을 넘어 증강현실이 일상화되는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그러면 유토피아는?

미안하지만 유토피아는 없다. 적어도 현실에서는 없을 것이다. 사람은 원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능한 것은 유토피아를 향한 꿈과 이상뿐이다.


7.

독일의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Karl Mannheim)이라는 사람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Ideology and Utopia)]라는 (재미없는) 책에서 유토피아를 대하는 태도를 세 가지 시점으로 구분했다. 첫번째는 유토피아가 이미 과거에 이루어졌으며 그러므로 현재 우리는 유토피아에서 살고 있다는 태도이다. 만하임의 분류에 따르면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을 “보수적 유토피아주의자”라고 한다. 보수적 유토피아주의자의 경우 유토피아는 이미 과거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이룰 것이 없다고 믿고 현 상황을 유지하는 데에만 신경을 쓴다. 이러시면 마음은 편할지 몰라도 발전이 없다.

유토피아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현재 시점에서 유토피아를 당장 이루어야 한다고 믿는 태도도 있다. 만하임은 이런 태도를 “천년왕국 (Chiliastic) 유토피아주의자”라고 명명했다. 이 용어 자체가 그리스도교적 전통에 입각한 것인데 천년왕국이나 이상사회나 유토피아나 다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이 “천년왕국적 유토피아주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만하임이 드는 예가 재침례교도(Anabaptist)이다. 재침례교도가 뭐하는 교도냐 하면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났던 일종의 극단주의적 이단 교파였는데 이단교파들이 모두 그렇듯이 천년왕국이 도래하여 세상이 쫌 있으면 곧 멸망할 거라고 주장하면서 교주를 신격화하고 주색잡기를 시전하다가 결국 모두 잡혀서 죽었다. (사이비종교에서 하는 짓은 대체로 전부 똑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름만 바꿔 가면서 계속 새로운 단체가 생겨나는 걸 보면 참 경이롭다는 생각까지 든다.) 만하임이 이런 예를 왜 들었냐 하면 이상사회를 당장 실현하겠다고 현실에 무작정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면 결국 혁명이나 전쟁이나 방금 예로 들었던 사이비 종교의 혹세무민 등등 무척 안 좋은 일만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하임이 가장 바람직하게 여기는 유토피아적 태도는 “진보적-인본주의적 유토피아주의” (liberal-humanitarian utopianism)이다. 이는 이상 사회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마 현실화되기 힘들겠지만 먼 훗날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 믿고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천천히 조금씩 변화를 모색하는 태도이다.

가장 바람직한 태도이기는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실제로 실천하기는 가장 어려운 태도이기도 하다. 이상사회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내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는 현실적 분별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낙관주의를 양립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유용한 것이 fantastika이다.


8.

“환상문학”이라고 쓰지 않고 굳이 fantastika 라는 외래어를 사용한 것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잘난 체를 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동유럽 문화권에서 “fantastika”라는 용어의 사용법이 좀 특이하기 때문이다. Fantastika는 환상문학이라는 장르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환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요소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으면 아무 데나 쓰이는 아주 폭넓은 용어이다. 덧붙이자면 “몹시 훌륭한 것”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여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동유럽권의 문학 전통은 이 fantastika에 몹시 관대하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시간을 되돌리는 요양원의 가상현실 속에 아직 살아 있다거나 (폴란드 작가 브루노 슐츠 중편 “모래시계 요양원”) 주인공이 꿈속에서 다른 행성으로 날아가서 이상사회를 발견했지만 망한다거나 (도스토옙스키 단편 “우스운 자의 꿈”, 이상사회가 망하는 데에는 심오한 의미가 있지만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혹은 1930년대 현재 모스크바 한가운데에 악마가 나타난다거나 (미하일 불가코프 [거장과 마르가리타]) 해도 아무도 탓하지 않으며 작가나 독자나 모두 소설이니까 그러려니 혹은 재미있으면 장땡이지 하고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느끼기에 동유럽권 문학작품들은 현실을 다루는 태도 자체가 전반적으로 독특하다. 문학 속에서라면 환상과 현실을 굳이 구분하려고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어찌 보면 허구의 세계에서는 환상을 현실보다 더 우위에 두는 것 같다. 어차피 허구이고, 환상은 현실보다 색다르고 재미있고 여러 모로 더 매혹적이니까.

그래서 나는 러시아와 폴란드 소설이 좋다. 현실은 항상 불완전하고, 그에 비해 환상은 언제나 현실보다 훨씬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현실보다 흥미롭고 매혹적인 환상, 별다른 목적 없이 그냥 재미있으니까 하는 상상이야말로 유토피아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9.

학기 초에 SF와 관련된 수업에서 수강생들에게 삶에 의미가 있다, 삶이 행복하다라고 느끼는 순간이 언제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여러 가지 답이 나왔는데 다들 단순하면서도 뜻깊은 대답들이었다. 가족이나 친구 등 가까운 사람들과 재미있게 이야기하거나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바쁜 와중에 틈이 나서 쉴 때. 맛있는 걸 먹을 때. 잘 때. 아무 것도 안 하고 빈둥거릴 때. 백일몽을 꿀 때.

A학점 받았을 때 혹은 토익점수 ---점 받았을 때 뭐 이런 대답을 내놓은 사람은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사회 체제 혹은 학교 체제가 못살게 굴지만 않으면 학생들은 가만 내버려둬도 전반적으로 인생을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은 적당히 먹고 자고 놀고 꿈꿀 수 있어야 한다. 그게 행복한 인생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다. 유토피아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삶의 매 순간을 “열심히” 활용하여 1초 1초를 “쓸모 있는” 활동으로 채우는 것도 그 자체로 나쁜 일은 아니지만 여기서 의문을 던져야 할 점은 무엇을 위한 “열심히”이며 어떤 것이 “쓸모 있는” 일이냐는 것이다. 점수로 환산되고 돈으로 환산되지 않으면 “쓸모 없는” 활동인가? 

인간의 삶을 숫자로 환산하려는 사고방식의 천박함은 둘째치더라도 그러면 어떤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쓸모있는” 활동인지 한 가지로 규정하기에는 세상에 너무 빨리 변하고 있다. 작년 여름에 SF 작가들을 불러모아 아이폰보다 기깔난 걸 만들라고 주문했던 모 연구소의 소장님은 무려 나랏돈으로 세운 연구소의 소장님이 돼가지고 설마하니 “공상과학” 따위 “쓸데없는” 소설을 쓰는 사람들, 혹은 심지어 그보다 더 “쓸데없는” 만화 따위를 그리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다른 것도 아닌 “상상”을 좀 해 달라고 주문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차피 앞날을 알 수 없다면 그냥 내가 좋아하는, 즐거운 일을 하는 게 나한테는 정답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내 인생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다.

그리고 상상력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하고 싶은 말은 꽉꽉 차 있는 곳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비집고 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문학을 전공했고 지금도 창작을 업으로 하는 사람으로서 경험상 나의 상상력이 가장 신선할 때는 몸과 마음에 여유가 있고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없을 때이다. 뭔가 창작해본 사람이라면 다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꼰대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보다 기깔난” 걸 만들기 위해서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릴 수 있는 여유와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진 텅 빈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10.

거울 10주년이니까 10번 지점에서 거울 얘기를 좀 하자면 환상문학웹진 거울은 나에게 그렇게 즐겁게 상상할 수 있는 빈 공간을 제공해준다. 지면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빈 공간이라고 볼 수도 있고 아무 생각이나 해서 아무 얘기나 쓰고 싶은 대로 쓰게 해 준다는 더 넓은 차원에서 빈 공간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마감을 못 지켜도 아무도 구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참으로 훌륭한 빈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거울 필진이 된 것이 2008년이었으니까, 거울 10년 중에서 앞의 5년은 놓쳤지만 대충 뒤의 5년은 함께한 셈이다. 어째 중요한 건 다 놓쳤다는 기분도 들지만 뭐 어쩔 수 없고 앞으로 잘 하면 되겠지.

거울이 앞으로도 잘 살아남았으면 좋겠고, 사람들이 환상문학을 좀 더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좀더 상상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


11.

우리한테도 단군신화가 있고 삼국유사가 있고 전설의 고향이 있고 홍길동전과 전우치전과 수많은이야기들이 남아 있는데 이 나라에서 언제부터 환상이 사라졌는지, 그리고 언제부터 천부의 인권이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처럼 헌법에도 나와 있는 보편적 가치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돈으로 환산한 가격만 남았는지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고 깝깝하기만 하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성공해서 벌어들인 돈이 현대차 몇 대를 수출해서 얻은 수익을 웃돌았네 이런 비교는 대체 누가 생각해낸 건지 알 수 없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을 그런 기준으로 환산한다면 인생의 가격이 대체 몇 푼이나 나올지 무서워지기도 한다. 

내가 원하는 유토피아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이루어지기는커녕 내 나라는 지금 내가 원하는 유토피아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방향으로 열심히 질주하고 있다. 

그럴수록 나는 백일몽을 꾸고 상상을 하고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불가능한 일들에 대한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이상사회는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유토피아를 현실에서 이루려고 하는 순간 수많은 문제에 부딪쳐 좌초되는 게 일반적이다. 아니면 더 나쁜 경우 거짓말이 된다. 앞서 언급했던 “치즈의 땅, 우유의 강”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그냥 민담으로 내버려뒀을 때는 재미있는 이야기였지만 “오렌부르그”라는 현실의 지명과 연결시키는 순간 거짓말이 되어버렸다. 마을 단위로 짐 싸서 떠난 사람들은 고생만 진탕 하고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 농노제가 엄연히 존재했던 시절이니 처벌이나 안 받았으면 다행이고.

이런 거짓말은 유토피아적 비전과 혼동하기가 무척 쉽다. 게다가 현실적인 것 같아 보이는 요소들이 곳곳에 접목되어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매우 강하다. 상상은 좋은 것이지만 현실 논리를 교묘하게 덧붙여서 아파트값을 얼마나 올리고 주가를 얼마나 올리고 - 돈을 얼마 벌 수 있고 이익을 얼마나 낼 수 있다고 구체적인 숫자를 말하는 순간, 혹은 몇 월 며칠에 세상이 멸망하니까 남들은 다 죽고 너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구체적인 날짜를 박는 순간, 그 발언은 유토피아의 비전이나 천년왕국의 이상이 아니라 사기가 된다.

유토피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원래 좋았다 나빴다 하는 것이라서 영원히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현실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힘들여 애써서 이상사회를 현실에 구축한다 하더라도 사람은 제각각 다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는 사소한 일에 불만을 품을 것이고 누군가는 불행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행복이나 불행은 감정이며 감정도 또한 좋았다 나빴다 하면서 흐르는 게 정상이라서, 사람한테 너는 유토피아에 살고 있으니까 불행하지 말고 항상 행복하라고 강요하면 정신병 걸린다. 그따위 유토피아는 없는 게 낫다.

그러므로 진정한 유토피아를 존속시키는 유일한 길은 그냥 계속 상상하고 꿈꾸는 것이다. 막연하고 모호하지만 즐겁고 재미있고 행복한 어떤 것 혹은 어떤 곳을, 즐겁고 재미있기 때문에 그냥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지향하는 것이다. 그것뿐이다. 쓸모가 있고 없고의 결과가 아니라 즐겁고 재미있다는 그 과정이 목적인 것이다. 그 과정이 바로 유토피아다.


- 그리고 덧붙이자면 작가로서 환상문학의 유토피아를 지탱한다는 원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열심히 써서 마감을 잘 지켜야겠다. … 라고 써놓고 보니까 꿈꾸고 상상하며 빈둥거리는 게 유토피아라는 논지에 모순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뭐 어쨌든 상황 봐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대충 화이팅.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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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uedot 13.06.19 03:29 댓글

    환상문학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관심을 가져보고자 얼마 전 웹진에 가입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컨텐츠들을 접할 수 있게 되어 기분이 좋습니다.

     

    유토피아와 환상문학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글 감사합니다.

  • No Profile
    정도경 13.06.26 14:06 댓글 수정 삭제

    저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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