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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페가나 북스

2012.05.25 23:5805.25



pilza2.compilza2@gmail.com
세상이 아직 세상이기 이전, 귀차니즘과 먹고사니즘이 모든 영혼을 지배하던 시절 신들은 커다란 거울 앞에 모여서 잠에 빠져 있었다.
신들의 예언자가 있어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는 예언자가 한 말이다.



출판계의 신들께서 말씀하셨도다.
매년 책이 점점 안 팔려 동네서점은 문을 닫고 굶주린 거대한 용 인터넷 서점은 할인율과 마일리지 경쟁에 자기 살을 이빨로 갉아서 뜯어먹고 있느니라. 이에 문을 닫은 서점 주인의 눈물이 대지를 적셔 강을 이뤘느니라.
저 하늘에서 전자책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내려와 한때 그곳에 수많은 이들이 번성하였으니 그 이름을 북토피아라고 했도다.
허나 북토피아 군주의 착취와 궂은 날씨로 땅은 저주받아 꽃은 시들고 곡식은 영글지 못하고 짐승들은 말라갔느니라. 출판사들은 도망치듯 짐을 싸서 달아났느니라.
그 일 이후 출판사들은 전자책 세상을 불신하고 두려워하여 다시 접근하려 하지 않고 세월이 흘렀느니라. 종이책과 전자책 사이에는 세 개의 사막이 생겨 왕래가 없었도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에서 홀로 떨어진 한국 출판계는 사막인 줄 알았던 곳에 거대한 나라가 생겨난 줄 몰랐으니.
그 나라의 이름은 아마존 킨들, 애플 아이북스, 구글 북스토어라고 하느니라. 그들 나라가 번영을 누리며 외모와 언어가 다른 종족들이 그곳에서 번성하여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도다.
그걸 모르고 살아온 한국 출판계는 이제 물러설 수 없는 때가 되었도다.


내가 예언자가 되기 전, 한낱 양치기였던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산비탈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 꿈에 신들이 내게로 찾아왔느니라.
아이폰과 아이패드, 안드로이드라는 이름의 신들이 여기까지 찾아와 이렇게 말하였도다.
인생은 짧고, 책은 기니라.
종이책은 언젠가 썩어서 없어지지만, 전자책은 저 구름 위에서 영원히 존재하리라.
나는 이렇게 대답했도다.
신들이시여, 저는 재산이 없고 따르는 무리도 없으며 기거할 사원도 없습니다. 어찌하여 전자책을 만들어 신을 모실 수 있단 말입니까?
이에 신들은 이렇게 대답하셨도다.
네 인생은 짧으나, 네가 만든 책은 길 것이니라.
깨달음을 얻은 나는 잠에서 깨어난 즉시 대상(隊商)을 따라 사막으로 향했도다.
사막 가운데에 커다란 산이 있어 그 산의 눈 덮인 봉우리에는 신들이 만든 구름다리가 거미줄처럼 무수히 이어져 있었느니라.
나는 눈으로 뒤덮인 하얀 봉우리 위에서 별이 하나 반짝이는 것을 보았도다.
이곳에 터를 잡고 전자책을 만들려 결심했도다.
이곳의 이름을 페가나라고 하느니라.




페가나 북스(Pegana eBooks)는 1인 출판사 페가나에서 선보이는 전자책 브랜드입니다.
작고, 읽기 편하고, 저렴한 전자책 문고본을 목표로 고전 번역에서 창작까지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자 합니다.
환상/SF/추리 장르를 중심으로 다루며 영미권과 일본의 고전 명작 중에서 우리나라에 번역되지 않은 작품 위주로 출간할 계획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엔 미국의 페이퍼백, 일본의 문고본과 같은 형식의 출판물이 거의 없습니다. 과거 있었던 사르비아 문고 등도 거의 명맥을 잃었고 소수의 문고본도 과거 판형과 내용 그대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가장 최근에는 열린책들에서 비교적 문고판에 가까운 Mr.know 시리즈를 선보였으나 얼마 가지 않아 고급 양장본으로 외형을 바꾼 세계문학 시리즈로 바뀐 바 있습니다. 아마도 판매부진 및 라이벌 출판사들의 세계문학 전집 출간 러시 때문인 듯 하지만 아쉬운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펭귄 클래식 시리즈도 페이퍼백에 가까운 컨셉인 미국 원판과 달리 우리나라에선 고급화되어 높은 가격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번역과 해설에 신경을 썼다고는 하지만 이래서야 펭귄 클래식이라는 이름을 굳이 가져올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지요.

한국 독자들이 외형의 고급화를 원한다는 점, 출판시장이 작아서 이윤을 얻으려면 책값을 높여야 한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긴 하지만 페이퍼백/문고판의 장점을 누리지 못하는 건 아쉽습니다. 독자에겐 저렴하게 책을 구입할 수 있고 작가에겐 옛날 글을 다시 출판하여 홍보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윈윈 구조인데 말이죠. 여기에 작고 휴대가 편하다는 점도 보너스로 붙습니다.
그런데, 전자책의 시대가 오면서 페이퍼백/문고본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컴퓨터, 전자책 리더, 스마트폰 등 다양한 매체에서 읽을 수 있는 표준 포맷에 대응하여 휴대성을 높이고 제작, 유통비 및 재고부담이 없어 가격을 낮출 수 있는 전자책이 페이퍼백의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페가나 북스는 디지털 페이퍼백/전자 문고본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적은 분량과 낮은 가격을 특징으로, 상업적 이유로 종이책 출간이 되지 않았던 고전 명작 및 창작 소설을 판타지/SF/추리 장르를 중심으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페가나 북스 공식 홈페이지(pegana.kr)에서 발췌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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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lza2 12.05.26 20:20 댓글 수정 삭제
    페가나 북스로 나온 소설 『페가나의 신들』을 패러디한 글입니다. 딱히 한 작품을 골라서 바꾼 건 아니고 전체적인 분위기(이른바 '던세이니풍')를 흉내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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