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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본래 김예슬 선언 출판 기획의 일부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기획은 무산되었고, 김예슬 선언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지도 시간이 어느덧 많이 흘렀습니다. 이제 와서는 다소 새삼스러운 화두로 여겨질 수 있음을 잘 알지만, 바로 지금이기에 더더욱 다시 꺼내지 않으면 안 될 화두임을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고 최고은 작가님의 명복을 빕니다.


 0.

 내 소개부터 해야겠다. 나는 올해 스물여섯이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한국국제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고려대학교 04학번으로 입학해 국어국문과를 2009년 2월에 졸업했으며, 현재 영미문학 번역가와 언더그라운드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여느 책 책날개에나 실릴 소개를 굳이 되풀이하는 의도는, 사회적으로 합의한 내 정체성을 처음부터 못박아둠으로써 내가 물러설 곳이 없게 만들기 위함이다. 가령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서는 모든 친구들에게 나라는 인간은 이제부터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선언해두어야 하듯이. 그리고 한 사람이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단호한 결의가 주변 친구들에게 모두 전파되기 쉽듯이. 김예슬이 그렇게 했듯이.
 내가 이미 학교를 떠난 졸업생의 신분이었음에도 그 자퇴 선언문을 보고 참람한 충격을 맛보았던 것은 단순히 내 학창 시절의 우울과 실패에 대한 멜랑콜리한 회상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대학교에만 소급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고등학교에서든, 대학교에서든, 대학원에서든, 회사에서든, 자영업자든, 프리랜서든, 전업주부든, 심지어 나같은 ‘글쟁이’라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위기감과 분열감을 경험한다.―――자우림의 <나사>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쓰다가 버리는 작은 기계’같고 ‘내가 아니어도 세상은 돌아간다’는 자괴감을. 그리고 ‘어머니, 당신은 만족하시나요, 내가 왜 살아있는 건지 말해줘요’라고 묻는다. 그리고 김예슬은 우리에게 말한다. “내가 왜 살아있는 건지 이제부터 직접 말해보겠어. 나는 길을 잃고 상처받겠지만, 그러나 그것만이 삶일 것이기에 용기를 내보려고 해. 자, 당신이 왜 살아있는 건지, 내게 직접 말해줘. 듣고 싶어.”



▲ “나는 이미 네게 말했어. 이제 네가 내게 말할 차례야.”

 이 질문에 답할 의무가 있는 것은 글쟁이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하니 묻건대, 당신은 왜 글을 쓰려 하는가? 왜 글을 쓰고 있는가? 당신은 왜 당신의 적을 거부하지 못하고 있나?


 1.

 글쟁이인 나의 적을 말하기 전에, 우선 한 가지 제기 가능한 의문을 해소하고자 한다. 김예슬의 질문이 나와 내 ‘문우’들에게도 소급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생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대학에 가라고 말했기에 대학에 갔다. 노동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하라고 했기에 일터로 들어갔다. 자유의지로 선택한 길이 아니기에 ‘왜 살아있는/공부하는 건지’ 모를 수밖에 없고, 명확히 그러한 삶을 강요한 ‘적’이 대학이라는 실체로 존재하기에 거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글쟁이는 이와 다른 경우처럼 보인다. (예외는 있겠으나) 아무도 우리에게 창작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창작을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충고를 물리치고 굳이 글을 쓰겠다고 나섰다. 어렵고 힘들 줄 알면서도 내가 하고싶다고 고집부려서 선택한 길이었다. 그랬으면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사회가 내 글을 알아주지 않는다느니 글쓰기는 돈이 안 벌린다느니 출판사가 편협하다느니 불평할 게 아니라, 그럴 시간에 묵묵히 한 줄이라도 더 써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모든 문제의 근원은 내게 재능이나 돈이나 인맥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정 힘들면 술이나 마시고, 술 깨고 나면 닥치고 열심히 쓰는 것만이 답 아닌가.
 그러나 나는 이것을 함정이라고 말하겠다. 대학이든 노동이든 문학이든 사정은 매한가지다. 대학생들도 똑같이, 자신이 낙오되는 것이 재능이나 돈이나 인맥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학생들도 똑같이, 이 대학에 입학 지원을 한 순간부터 자유의지로 무언가를 선택했으므로 내가 글쟁이가 되기로 선택한 것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대학에 들어간다는 선택을 한 주체가 청소년이라고 해서 자기 결정권이 없다고 치부하는 건 모독이다). ‘닥치고 열심히 글을 쓰는 것’과 ‘닥치고 열심히 자격증과 졸업증이나 따서 취직하는 것’ 역시 똑같은 말이다. 종합하자면, 대학생이든 노동자든, 문단 작가든 언더그라운드 작가든 작가 지망생이든 간에, 사태事態의 제반 조건들에 연루engagement되어있다는 전제는 동일하다. 이쯤에서 (유행이 한참 지난,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읽어야만 하는) 사르트르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사태에) 모든 사람이 꼼짝없이 연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그 사실을 철저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묶여있다는 것을 스스로 은폐하기에 여념이 없다. ……억압 계급에 속하는 사람은 고상한 감정을 통해서 자신의 계급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고, 다른 한편으로 피억압 계급에 속하는 사람은 내면적 생활을 함양하기만 하면 쇠사슬에 묶여도 여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억압자와의 공범 관계를 은폐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작가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모든 술책에 의지할 수도 있다. 사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조용히 잠자기를 바라는 독자에게 숱한 잔꾀를 제공해주려고 한다. (그러나) 한 작가가 진실로 참여하는 것은 꼼짝없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가장 투철하게 그리고 가장 철저하게 의식하려고 애쓸 때, 다시 말해서 자신을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 무매개적이며 자연적인 연루를 반성적인 연루로 전환할 때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1

 대학생인 김예슬은 자신이 ‘꼼짝없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가장 투철하게 의식했고, 자퇴를 선언함으로써 ‘자연적인 연루를 반성적인 연루로 전환’했다. 그녀의 선언서는 사르트르의 말마따나 ‘총을 쏘는 것과 같은 글쓰기’였으며 그 어떤 작가보다 작가적인 행위였다. 그렇다면 우리도, 나도,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


 2.

 그러므로 나는 나의 첫 번째 적, 문단을 거부한다.

 새삼스러울 것도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문단문학이 ‘위기’에 몰렸다는 말을 이미 숱하게 들었다. 서점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문학 작품은 대부분 외국의 번역서고, 한국 문단문학을 가장 열심히 탐독하고 향락하는 계층은 문창과 학생들과 문단 비평가들로 이루어진 우리만의 리그이지 엄밀한 의미의 독자가 아니다. 엄청난 상금의 문학상을 탔다는 기성 작가의 작품이라든지 신인상을 거머쥔 신인 작가의 작품을 읽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좋은 글은 아닌 것 같은데.” “별로 재미없는데.”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한 마디로, 한국문학은 잘 팔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문학을 경시하고 온라인 게임과 TV를 즐기는 시대적 조류 속에서 실력을 갖춘 개인들이 나오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기성 작가들 개인의 수준이 낮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해서도 안 된다. 궁극적으로, 나 한 사람이 좋은 글을 쓰기만 하면 문단문학의 위기를 모면하고 독보적인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위기가 개인의 재능이나 역량으로 극복될 수 없는 물질적 환경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지’해야 한다. 이 점은 비평가 조영일이 <한국문학과 그 적들>에서 탁월하게 진단한 바 있다.*2


▲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너는 한국문학이 완전히 끝장났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너부터 이 바닥을 떠나라.” (중략) 그러나 나로서는 이런 추궁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겨운 오해를 위해 확실히 말하지만, 나는 한국문학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끝났다고 보는 것은 ‘한국의 문단문학’이다. ―――조영일

 조영일의 비평을 참고하자면, 현재 문단문학은 명백히 문단‘권력’이다. 문학비평이 문학편집과 결합되어있기 때문이다. 문단 비평가들은 출판사나 문예지에서 비평을 청탁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류 문예지의 출판위원을 겸하고 있다. 문예지에 실을 작품을 선정하고 청탁하는 것, 그러한 원고를 출판할 권리, 작가들에게 명예와 돈을 쥐어줄 문학상의 심사권을 모두 거머쥐고 있으며, 동시에 그렇게 나온 일련의 작품들을 평가하고 비평하고 광고하는 역할까지 점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 문단 비평가들은 순수한 비평가가 아니라 권력체제의 일원들이고, 주류 문예지들은 문단의 조중동에 다름아니다. 이들은 또한 대학에서 교수나 강사도 겸하면서, 문창과라는 문학 교육 제도까지 점하여 신인 작가들을 ‘간택’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단권력이 자신의 (어쩌면 근엄하고 고루한) 입맛과 취향에 따라 작가나 작품들을 평가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따라서 한국 문단문학에 ‘새로운 상상력’이 끊긴 것은 그들의 입맛과 취향이 새로운 시대적 조류에 따라가지 못하는지라 숨어있는 보석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고, 작가 지망생들이 그러한 입맛과 취향에 순응하느라고 자신의 상상력을 꺾어버리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어르신’들은 우리의 작품을 심지어 제대로 보지조차도 않고 몇백 편의 응모작 심사를 하루 만에 끝내는데다가, 우리의 개성을 통제하려고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핵심적인 문제는 그렇게 정신적인 지점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즉, 문단권력이 문학의 ‘생산수단’을 장악한다는 물질적 환경에 있다는 것이다. 문예지들이 독자에게 팔림으로써 얻어지는 순수 이익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존속하는 것은, 그 편집위원(비평가)들이 문학의 부흥에 한 몸 기꺼이 던지는 (그러나 입맛과 취향은 고루한) 유별난 지사(志士)라서가 아니다. 국가의 지원금과 소속 출판사의 재정을 기반으로, 문예지들끼리 담합하여 서로 작가들을 실어주고 자사 출판사의 책들을 광고해줌으로써 그 광고 마케팅 효과에서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일 뿐이다. 이로써 비평가들은 문학‘산업’을 주도하지만 동시에 문학산업에 종속되기도 한다. 당연하게도, 문예지들이 만들어내는 일련의 문학적 담론과 비평들은 문단문학이 표방하는 (시장논리에서 자유로운) ‘순수’ 혹은 ‘본격’ 문학 정신에 의거한 논의들이라기보다는 모조리 문단문학의 산업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광고’에 다름아니다. 문예지들은 그 자신이 표방하는 본격문학으로서의 대의나 당파적 방향성과 관련 없이 같은 산업에 처한 식구들이라는 전제 하에 담합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이러한 문예지들에서 어떤 소설에 문학성이나 사회성이 있다고 도장 찍어준 승인은 아무런 신뢰성이 없다. 이들은 기존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변화를 거부하고, 이러한 조건 하에 어떤 생산적인 발전도 ‘새로운 상상력’도 불가능하다. 문단에서 가능한 상상력은 모두 국가 지원금과 문학 산업의 담합구조 안에서만 동어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것은 상상력이 아니다.
 나와 같은 문학청년들이 등단을 하고 문단작가가 되기를 꿈꿔온 것은 무엇 때문이었던가. 기본적으로, 자신이 ‘잘’ 쓴 글을 승인해주기로 가정된 주체가 문단이었기 때문이다. 대중의 취향과 시장에 좌우되지 않고 문학성 그 자체를 가장 본격적으로 평가하여, 유망한 작가를 인정해주고 그의 책에 ‘문학적으로 탁월함’이라는 표딱지를 붙여 권위를 주는 이들이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바꿔서 말하면, 대개 나/우리가 쓰고자 하는 소설이 ‘문학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칙릿이나 ‘귀여니’류 인터넷 소설을 쓰고싶은 것이 아니고, 그런 것에 관심도 없으며, 아니 오히려 그런 소설들의 천박한 문체에 얼굴을 찌푸리며, 시장 논리를 초월한 본격문학을 쓰고 싶어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단은 전혀 ‘본격’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문단이 주는 월계관은 거짓 영광이고 그러할 자격도 사실상 없다. 등단하고 문단의 인정을 받는 것과 뛰어난 소설가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되었다. 이 시점부터 문단은 옛날 우리에게 그토록 열병을 앓게 했던 집단으로서의 매력을 일체 상실한다.
 그런데, 이러한 문단의 병폐는 사실 우리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조영일과 같은 비평가가 그것을 이론적으로 정리해서 고발했을 뿐, 거기에 대한 ‘뒷담’은 무성했으므로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창과에서 구태의연한 창작론을 배우면서, 토익 만점 전략과 다를 바 없는 등단 전략을 배우면서, ‘젊고 재능있는 작가’라는 찬사를 받으며 등단한 뒤에 문단 ‘어르신’들에게 한계를 느끼면서, 내가 꿈꾼 문단작가라는 것이 이런 것이었나 하는 환멸을 느끼면서,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문제였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뿐이다. 입 밖으로 꺼낼 때는 흔히 술자리에서인데, 술자리에서 하는 말이란 선언이 아니라 뒷담이고 술잔이 비면서 사라져갈 소문이다. 뒷담과 소문은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는 뜻이고,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겠다는 것은 해당 문제에 그냥 순응하겠다는 뜻이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문단의 뒷담을 하거나 들으면서도 “그래도 어쩌겠어, 그게 주어진 현실인걸. 그런 얘기 노상 해봤자 등단 못한 루저들의 자위일 뿐이잖아.”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에 휩쓸리기보다는 큰 문학상을 휩쓸어 시상식에 영광스레 서 있는 나 자신의 모습으로 (자기계발서에 흔히 나오는) 자기암시를 해가면서 열심히 글을 썼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가? 그렇게 욕을 하면서, 그렇게 치를 떨면서, 왜 아직까지 문단을 지향한단 말인가?

 가장 많이 할 수 있는 대답은, ‘그 외에 다른 길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문단은 흡사 국교國敎에 가깝다. 문단의 세례를 받지 않으면 문학을 할 수 없으며, 문단의 낙인이 없는 문학은 이단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수능을 봐서 당연히 대학교에 들어가야만 하고 그 외의 다른 길은 생각하지 못하듯이, 문학을 하려면 신인상이나 신춘문예로 등단해야만 하고 그 외의 다른 길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문단이라는 길이 좋은 작가의 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말로末路라는 비판적 입장을―――곧이곧대로든 찜찜하게든―――일단 한 번 수렴한다고 해도, 문단 외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여전하므로 여전히 문단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입장일 것이다. ‘일단은 등단을 하자. 등단하고 나서 생각하자. 진짜 쓰고 싶은 좋은 글은 그때 가서 써도 늦지 않다’는 생각(종교를 덮어씌워보면, ‘일단은 국교의 세례를 받자. 받고 나서 생각하자. 내 진짜 종교를 지금은 부인否認하지만 나중 가서 폭로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 그리고 이런 부인을 세 번 하고 무참한 자괴감에 빠졌던 자가 바로 성서의 베드로다). 일견 타당해보인다. 입시미술이 따로 있듯 ‘등단용 작품 공식’도 따로 정해져있고, 어차피 등단 뒤에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만의 스타일이라는 게 무엇인가? 진짜 쓰고 싶은 좋은 글이라는 게 무엇인가?



 등단용 작품이 그 자체로 좋은 소설도 진정성 있는 소설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단지 문단 제도에 입문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취하는 선택일 뿐이다. 그런데 그 ‘전략적 선택’을 문단에 편입된 뒤라고 해서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위에서 나는 문단 내부에 얼마나 큰 자체적 모순이 있는지 논의를 했다. 문단을 움직이는 것은 ‘진짜 좋은 글’에 대한 판단기준이 아니라, 우습게도 문단이 가장 배척하는 것으로 보이는 시장논리이며(그들이 책 뒤에 연예인의 추천사를 싣는 것을 보라) 혹은 문학산업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공모 관계 내부에서의 각자의 역할들이다. 결국 우리가 문단에 들어간 뒤라고 해도, 정말 ‘진짜 쓰고 싶은 좋은 글’을 쓰려면 문단을 파괴하거나 혹은 적어도 문단 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 된다. 결국 사정은 등단 지망생들이나 등단한 젊은 작가들이나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문단이 인정해주는 한에서 좋은 소설을 쓰겠다는 것은 나의 문학적 신념을 포기하는 행위이며, 등단을 했든 안했든 간에 나는 문단을 거부해야 한다.

 김예슬의 독보적인 지점은 그가 자신의 자퇴를 사건화했다는 데에 있다. 김예슬 말고도 대학을 자퇴하는 학생들은 많다. 그들은 자본과 기업과 결탁한 장사 브로커 대학이 ‘이름만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허울 뿐인 이름이 진짜 大學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비싼 등록금을 바쳐가면서까지 다닐 필요가 없다고 보이므로, 떠난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히 ‘대학을 다닐 필요가 없다(I don't have to)’에서 끝나지 않으며 ‘대학을 거부해야만 한다(I must)’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김예슬은 보여주었다. 그는 대학을 떠난다는 것―――탑에서 돌멩이 하나가 빠져나간다는 것―――을 전술적 퇴각이 아니라 전면적인 공격으로서 보여주었다. 나 역시 그렇게 하고자 한다. 단순히 문단에서 물러서서 등단하지 못한 문학청년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문단을 거부해야만 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다. 여기서 전술했던 사르트르의 말을 다시 인용할 필요가 있다.

 억압 계급에 속하는 사람은 고상한 감정을 통해서 자신의 계급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고,다른 한편으로 피억압 계급에 속하는 사람은 내면적 생활을 함양하기만 하면 쇠사슬에 묶여도 여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억압자와의 공범 관계를 은폐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 말은 문단문학에 대한 논의로 그대로 치환할 수 있다.

 문단 시스템에 속하는 권위자들은 고상한 문학정신을 통해 자신의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고, 다른 한편으로 문단 지망생이나 문단 내 젊은 작가들은 내면적 천재성을 함양하기만 하면 문단의 쇠사슬에 묶여도 여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억압자와의 공범 관계를 은폐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작가로서 실패한 것은 물론 일차적으로 더 많이 읽고 더 열심히 쓰고 더 잘 쓰지 못한 나의 탓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탓은, 더 많이 읽고 더 열심히 쓰고 더 잘 쓰기만 하면 잘 될 거라고만 믿은 내 몽매한 착각 때문이라고 하겠다. 문단에서 물러서든 문단으로 들어가든, 그 문단 시스템이 부여한 조건과 역할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내면적 천재성을 함양’하는 데에만 집중한다면 나는 좋든 싫든 문단과 ‘공범’이 되기 때문이다. 즉 나는 문단이 더욱 튼튼해지는 데에 일조하게 되고, 더욱이 문단이 한국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비나리 굿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조영일의 비판을 받아들인다면, 나 역시 한국문학의 종말을 재촉하는 데에 일조한다는 뜻이 된다. 사실 이런 비판을 문단 비평가인 조영일이 제기하는 동안 내가 침묵했다는 것은 부끄럽다. 유럽에서 폐쇄적인 관전미술을 벗어나 독자적인 조류를 세우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관전 회원 집단 외부의 독립적인 젊은 예술가들이었다. 오늘날의 한국 문단 역시, 과거 한문학 중심의 문학 시스템을 벗어나 서구의 신진 문학이론을 수용하고 실험하고자 한 도전적인 젊은 작가들을 시초로 만들어졌다. ‘젊은 작가의 패기’란 바로 그런 전면적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지, 기존 문단의 비평가들에게서 ‘젊고 패기롭다’는 칭찬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를 위시한 문학청년들이 할 일은 기존의 문단 문학가들이 문단 시스템을 발전적으로 개량하기를 기다리며 거기에 우리를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운 한국문학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내 능력의 한계를 과시하고 허장성세를 늘어놓고 있다고 비웃음을 사도 어쩔 수 없다. 나 역시 김예슬처럼 ‘길을 잃고 상처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앞으로 받을 그 상처는 내가 지금까지 받았던 상처에 비하면 훨씬 떳떳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나는 더 이상 한국에 문단문학이라는 길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내가 그 길로 들어갈 수 없었다는 사실에, 그 외의 다른 길들을 모색하는 것이 내 패배를 인정하는 것만 같다는 느낌에, 내가 설사 다른 길로 간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문단문학의 길은 내가 영원히 가보지 못한 찬란한 왕도로 보이리라는 두려움에, 우울해하고 절망하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길을 직접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1. 장폴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명환 역, 민음사, 1998. pp.109~110.

*2. 앞으로 나올 논의들은 조영일,
[한국문학과 그 적들], 도서출판b, 2009. {문학을 보호해야 한다} 챕터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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