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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렇다면 내가 만들어갈 ‘길’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문단을 거부하거나 포기한다고 할 때―――혹은, 애초에 문단문학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장르문학을 지향한다고 할 때―――많은 글쟁이들이 준거삼는 것은, 독자다. 오늘날 독자들이 한국(문단)문학을 거의 읽지 않고 외국문학(특히 일본문학)에 탐닉하는 것은 기존의 문단문학이 현대 독자의 취향과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못하기 때문이라는 논리. 그러나 문단문학은 독자가 관심을 가져주든 안 가져주든 문예지들끼리의 지원사격과 국가 지원금 제도에 의존하여 자체적인 이윤 추구가 가능하므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독자에게 관심이 없을 테고, 따라서 새롭고 바람직한 한국문학은 문단문학과는 달리 독자에게 관심을 갖고 독자와 소통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조영일 역시 <한국문학과 그 적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대책은) 문학편집과 문학비평의 분리이다. 비평권력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잡지편집권을 회수하여 출판사의 전문편집자에게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출판계의 전문편집자에 과감한(그리고 정당한) 투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 축적된다면, 한국 문학판은 아마 훨씬 효율적으로 재편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문예지와 그 문예지가 주관하는 문학상으로 획일화된 문학출판의 경로가 확대될 것이고, 작가들은 ‘권위적인’ 비평가들이 아닌 '협력적인' 편집자들과 함께 일하게 될 뿐만 아니라, 신인 발굴 등에 더욱 적극적이고 공정한 시스템이 구축될 것이다. 예컨대, 그동안 시간을 핑계로 대충대충 해온 투고작품(또는 신인작품)에 대한 검토가 제대로 진행될 것이고, 비평가들은 ‘비평 이외의 것’에 더이상 신경을 쓰지 않고 비평작업에만 매진할 수 있을 것이다. (……) 즉 문학제도를 의식하는 비평이 아니라 독자를 의식하는 비평이 되는 길이 열릴 것이다.*3

 위와 같은 논의를 보면, 그 어떤 권력의 횡포도 없이 철저히 시장논리에 의존하는 문학산업 시스템이 구축된다면 모든 문학의 위기가 끝나고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처럼 보인다. 정치적 차원에서는 왕정이나 독재정이 사라지고 진정한 자유 자본주의가 도입된다면 모든 억압이 사라지리라는 전근대적 낙관과 동일한 맥락이다.



▲ 그래서, 당신은 여기가 유토피아로 보이는가?

 물론,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자본이 언제 인간 실존의 해방에 ‘협력적’이거나 ‘공정한’ 적이 있었던가? 바꿔 말하면, 독자 시장에 편승하는 편집자들이 언제 문학 발전에 ‘협력적’이거나 신인 발굴에 ‘공정’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럴 수가 있나?

 이 점을 분석하기 위해, 철저히 시장 자유에 의해 돌아가는 한 문학적 사례를 살펴보자. 바로 한국 장르문학이다. 이쯤에서 자기 소개를 다시 쓰자면, 나는 VT PC통신이 유행하던 시절 하이텔 환타지동호회에서 활동하면서 습작을 했고, 환상문학웹진 거울(mirror.pe.kr)에서 필진으로 작품활동을 해왔으며, 시작(詩作) 출판사의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 2]에 단편을 수록했고 네이버 ‘오늘의 문학’ 장르문학 코너에 단편을 게재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나는 문단을 지향하는 등단 지망생이었으되, 동시에 어릴 때부터 만화를 좋아하다가 곧 <드래곤 라자>와 <로도스도 전기>와 <반지의 제왕>이라는 그랜드 크로스에 격침당하여 판타지의 세계로 몸을 던진 장르문학 글쟁이 및 독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장르 문학의 판도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얼추 체감해왔다. 장르문학계에는 출판과 비평의 야합 권력도, 국가의 지원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철저히 시장 논리로 구성된 영역이다. 이들이 겨냥하는 소비자는 장르문학 팬덤들, 그리고 적절한 마케팅으로 팬덤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을 잠재적인 독자 시장이다. 작가들도 편집자들도 정말 진심으로 독자를 의식하고 독자를 존중하고 독자와 소통하려 한다. 조영일의 프레임으로 보자면 이곳은 매우 발전적인 토양인 셈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90년대 <드래곤 라자>의 비약적인 성공 이후로 한국 장르문학은 발전하기는커녕 오히려 묻혀버렸다. 왜 그런가?
 왜 팔리지 않는가 하는 문제는, 문단 지망생들의 술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장르문학가들의 술자리에서 나오는 ‘뒷담’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 뒷담을 되새겨보면 사태 판단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우리는 장르 시장 정세를 욕한다. 장르 전문 출판사나 편집자들은 외국 장르문학만 찾고 국내 작가를 발굴하는 데에 등한시하며, 찾아보고 양성해보려는 시도도 않으면서 한국 장르문학이 재미가 없고 질이 낮아서 팔리지 않는다고 고개부터 일단 젓고 보고, 출판 계약을 한다고 하더라도 터무니없이 낮은 고료(출판사가 한국 장르문학을 발굴할 경우, 이는 외국 장르 작품의 판권 구매료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한국 장르 작품을 살 수가 있기 때문이다)나 어중간한 일처리나 폭력적인 교정 교열에 시달리기 일쑤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장르 작가들이 데뷔하거나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토대가 조성되지 않고, 장르 작가들은 따로 생업을 갖고 장르문학을 쓰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보면 또 자연히 작품에 전념할 수가 없어 퀄리티가 낮아진다. 공급측인 출판사의 사정이 이렇다면, 유통측의 경우에는 총판과 대여점이라는 적도 존재한다. 대여점들은 독자들이 만화 및 장르문학 서적을 서점에서 사보지 않고 대여점에서 빌려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장르문학의 전체적인 판매고가 하락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사정에는, 만화와 장르문학은 돈 주고 사서 보기 아깝고 원래 빌려 보는 것이라는 대중적 인식이 깔려있다. 그리고 대여점들이 이러한 인식을 더욱 부추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 때문에 돈을 벌지 못한 작가들의 작품에 전반적인 질적 저하가 일어난다. 그리고 작품의 질적 저하는 독자들의 ‘돈 주고 사서 볼 것이 아니’라는 인식에 다시 한몫 한다. 작가들이 간혹 재미있는 작품을 써낸다고 하더라도, 저작권 개념은 안중에도 없고 돈 주고 사서 보는 태도가 없는 독자들이 웹상에서 스캔본이나 타이핑본을 돌려보는 파렴치한 짓을 하여 작가는 결국 돈을 벌 수가 없다. 따라서 작가들은 펜을 꺾고 출판사들은 간판을 내리고 잡지들은 폐간한다. <드래곤 라자>로 생성되었던 젊은 장르문학 독자층의 규모 자체도 자연히 줄어든다. 라이트노벨(일본에서 시작되어, 만화와 유사한 빠른 속도감과 가벼운 문체에 삽화가 결합된 장르문학)이나 양판소(양산형 판타지 소설)이 특히 그 피해를 입는다.
 위의 상황을 보면 출판사, 편집자, 독자들로 구성된 권력에 작가와 문학이 의존할 때 어떤 현상이 초래되는지 알 수 있다. 출판사와 편집자는 결코 작가들에게 협력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출판사가 외국 장르문학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그들 입장에서 매우 온당한 처사다. 독자들이 한국 장르문학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의 수익을 희생해가며 한국 장르문학을 발굴할 지사들이 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총판과 대여점이라는 유통 시스템 역시 그들 입장에서 매우 온당한 처사다. 장르문학을 헐값에 빌려보거나 심지어는 ‘무전취식’하기를 원하는 독자들이 서점이라는 판로를 전혀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작가에게 협조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단순히 장르문학이라는 하나의 특수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장르문학이든 본격문학이든 간에, 독자와 출판사는 우리에게 결코 협조적이지 않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만약 이상李箱의 수필 <권태>가 편집자의 손에 맡겨졌다면, “그러나, 지금 이 개울가에 앉은 나에게는 자의식 과잉조차가 폐쇄되었다.”와 같은 명문장은 말도 안 되는 교정(가령, “그러나 나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고 개울가에 앉아있다”와 같은 쓰나 마나한 문장으로)을 당하거나 아예 문장 자체가 삭제되었을 것이며, 애초에 출판을 거부당하지나 않았으면 다행이란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편집자가 신경쓰는 것은 독자에게 쉽고 재미있게 보여야 한다는, 즉 많이 팔려야만 한다는 전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소비자의 욕구에 충실하려는 기업의 논리에서 옳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대중영합적인 상업소설가라면―――나는 결코 당신을 폄하하지 않는다―――당신은 이러한 편집자들의 소견에 전적으로 귀를 기울여야만 하며 이상처럼 난해하거나 꼬인 문장을 쓰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프로’ 작가가 될 것이다. 프로 작가라 함은 본질적으로 프로 외환 딜러나 프로 영업 사원이랑 똑같은 뜻이다. 이 전제에서 글쓰기 기술, 외환에 대한 경제적 지식 및 감각, 영업적 마인드와 대인 기술이 같은 층위에 놓인다. 이때 편집자와 출판사는 분명히 신뢰할 만한 사업 파트너가 되며, 당신에게 진실로 ‘협력적’이고 ‘공정’하다.
 그리고 장르문학의 사례에서, 우리는 이렇게 상업소설에 협력적인 출판 시장의 극단적인 판본을 가정할 수 있다―――만약 한국 장르문학을 소비하는 독자층 자체가 무시해도 좋을 만큼 적어진다면, 출판사들은 외국 장르문학만을 내거나 혹은 아예 장르문학을 포기할 것이다. 이 경우 편집자/출판사는 협력적이거나 공정한 걸 떠나서, 아예 당신의 사업 파트너조차도 아니다. 그리고 당신 역시 편집자와 협업하여 독자라는 소비자층에게 최대의 이익을 노리는 공급자일 것이므로, 안 팔리는 시장은 떠나고 잘 팔리는 시장에 새로운 사업을 꾸려야 마땅할 것이다. 기본적 경제 논리에 따라, 시장이 튼튼하고 지속 가능성도 있고 수익도 높은 곳을 찾아라. 어디인가? 물론 문단문학이다. 한국문학의 총체적 위기 속에서 현재 한국문학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문학은 단연 문단문학이다. 장르문학 팬덤 소비자층에 비한다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하고 다양하고 폭넓은 소비자층을 보유하고 있고, 대기업들처럼 정부에서 독려와 지원금까지 받을 수 있고, 근속 년수도 제한이 없을 뿐더러, 문학상을 탄다면 인센티브까지 두둑히 챙길 수 있다. 당신이 정말로 독자라는 소비자에게 충실하고 열려있는 작가가 되고자 한다면 당장 등단을 해서 문단 작가로 이름을 날려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자영업자들이 가장 돈이 되는 시장에 편승하지 않고 다른 길을 택한다면, 그건 초기 자본금이나 여건이 마땅치 않은 관계로 적은 돈만 가지고 ‘블루 오션’을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르문학 작가들이 주류 문단에 들어갈 실력(=초기 자본금)이 마땅치 않아서 주류 문단 외부의 독자층(=블루 오션)을 찾고 싶기 때문에 장르문학을 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리는 없어보인다. (그렇게 대답할 수 있는 프로 작가가 있다면 나는 존경하겠다. 그러나 대부분은,) 누가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치욕을 느낄 것이다. 치욕이라니? 이런 감정은 당신이 당신의 글쓰기에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 지점에서 글쓰기는 외환이나 영업과는 사뭇 다른 층위에 놓인다. 당신은 개성과 상상력과 창의력을 존중받는 글쓰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당신이 문단문학을 택하지 않은 이유는, 등단할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고 다만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이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이 장르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더럽고 치사한’ 장르문학 시장에 굳이 들어와서 장르문학을 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당신은 최소한의, 그러나 핵심적인, ‘작가정신’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작가 정신은 분명히 독자의 요구와 부딪칠 수밖에 없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 1929~). “SF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그 첫 번째는 르 귄일 것이다”라는 말을, ‘더럽고 치사한’ 장르문학을 읽는 독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소비하는 것일까? (Copyright © by Marian Wood Kolisch)

 나는 저러한 사정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독자층은 협소하고 유통 과정은 불합리하고 출판사는 돌아보지 않겠지만, 그런 난점들을 내가 나서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독자의 성향이나 출판사의 방향성을 내가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세태를 비판해봤자 어차피 소득 없는 불평으로 끝날 테니, 그럴 시간에 한 줄이라도 더 쓰는 것이 유익하다. 비록 내가 정말로 쓰고 싶은 글은 따로 있겠지만, 지면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독자와 출판사의 입맛에 일단 맞추고 볼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딜레마 사이에서 계속 고민하고 열심히 쓰고 투고하고 출품하고 출간하다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궁극적으로 내가 장르 작가로 성공하지 못한 건 결국 내가 좋은 글을 아직 못 써서 그런 거니까.”
 이건 비단 나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많은 장르 작가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문단의 뒷담을 하거나 들으면서도 ‘그래도 어쩌겠어, 그게 주어진 현실인걸. 그런 얘기 노상 해봤자 등단 못한 루저들의 자위일 뿐이잖아.’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에 휩쓸리기보다는 큰 문학상을 휩쓸어 시상식에 영광스레 서 있는 나 자신의 모습으로 (자기계발서에 흔히 나오는) 자기암시를 해가면서 열심히 글을 썼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가?” 앞서 나온 이 문장에서 ‘문단’을 ‘장르 시장’으로, ‘등단 못한’을 ‘인기를 못 얻은’으로 바꾸기만 하면 똑같은 이야기가 된다. 사실 문단문학과 장르문학(특히, 작가주의 장르문학)의 세계는 여러 모로 놀라울 정도로 똑같다. 둘 다 공모전/신춘문예에 목을 멘다. 둘 다 자신이 쓰고 싶어하는 글과 출판사/문단에서 요구하는 형식 사이에서 타협하려고 노력한다. 둘 다 시장/문단 내부라는 한계를 고스란히 둔 채로 새로운 상상력을 부르짖는다. 둘 다 장르문학/문단문학의 ‘뉴 웨이브’를 꿈꾼다. 둘 다 등단/투고에서 낙오되면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고만 생각한다. 둘 다 문단/출판시장의 문제점에 대해 비판하는 걸 불평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 문단/출판시장의 틀을 벗어나거나 그 틀을 개혁하는 것을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몫은 그저 개인의 천재성을 함양하여 열심히 쓰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문학적 조류와 시스템은 출판사/문단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 문예지/웹진이 결탁하여 작품이나 작가를 띄워주고 그 광고를 본격문학/장르문학에 대한 진지한 담론이나 비평으로 포장하며, 진지하고 솔직한 비평은 “우리 업계가 잘 되려고 하는 건데 분위기 흐리는 악평을 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분위기 하에 불가능해진다. 도대체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무엇인가? 앞서서 문단 내부의 시스템의 특성 상 좋은 글이 나올 수가 없다는 전제에 동의했다면, 이번에는 ‘시장’ 내부의 시스템에서도 좋은 글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지점에서는 시장(편집자 + 독자)이 작가나 비평가에게 ‘협력적’이고 ‘공정’하리라는 말은 명백히 부정변증법적 차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즉 기형적인 문단제도가 없는 진짜 문학산업적 토양 형성은 중요하지만, 그러한 토양이 중요한 까닭은 그 자체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비로소 문제를 직시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발판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부터 진짜 문제가 시작된다. 문단을 걷어내면 그 자리에는 대중(독자권력)이라는 ‘최종 보스’가 있다. 그런데, 우리 장르문학가들은 이 보스에게 어떻게 대처해왔던가?
 문단 지망생들이 문단권력을 욕하면서도 참는다면, 장르문학 지망생들(혹은 장르문학의 아마추어 작가들*4)은 오히려 독자권력을 물신화한다. 진정성 있고 재미있는 글을 열심히 쓰기만 하면 언젠가 독자가 돌아봐주리라는 열망 말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장르문학 작가들은 이런 점에서 마치 스포츠 만화에 나오는 소년 소녀들 같았다. 열심히 끝없이 연습하면 언젠가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올 수 있을 것이고, 장르 작가와 비평가들이 ‘시체로 강을 메우’고 ‘대장정의 길을 걷’는 자세로 임하면 그 중에 한 명은 김연아 같은 천재가 등장하지 않겠느냐는 것.*5



▲ (벌써 철 지난 우스갯소리가 되었지만,) 고려대학교가 낳은 세계의 리더, 김연아.

 사실 문학과 스포츠는 거리가 매우 멀다. 스포츠의 금메달은 운동가가 정해진 시간과 조건 내에서 체력적 극복을 보여주는 정도에 따라 점수화된, 절대적 평가 기준에 따라 주어진다. 이 기준 자체에 이론의 여지는 없으며, 이론을 제기한다면 그러한 기준을 잘못 적용하는 심판들에게 있다. 문학의 심판을 독자로 여긴다면, 독자라는 심판들이 의존할 점수화된 평가 기준이라는 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모든 독자들은 신뢰할 만한 심판이 아니게 된다. 본질적으로, 문학에서의 심판은 궁극적으로 작가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나는 독자라는 심판들에게 무책임하게 판단을 위임한 채 스포츠 선수처럼 돌입하고 있었으니, 이런 태도를 견지하는 한 나는 내 작품에 대한 주체적인 판단도, 쓰고자 하는 글의 진정한 목적의식도, 문학적 신념도 갖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영원히 좋은 글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앞 장에서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자면, 독자가 인정해주는 한에서 좋은 소설을 쓰겠다는 것은 나의 문학적 신념을 포기하는 행위이며, 데뷔를 했든 안했든 간에 나는 독자를 거부해야 한다. 편집자와 독자의 기준을 ‘건강에 해롭다’고 여기고 경계해야만 한다.
 여기서 오스카 와일드의 악담에 가까운 조언은 유용한 지침이 된다.*6

 “개인주의가 강렬하게 표현된 양식인 예술에 대중이 우스꽝스러울 만큼 부도덕하기도 하고 경멸스러울 만큼 부패한 권위를 행사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딱히 그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대중은 어느 시대고 간에 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대중은 끊임없이 예술이 대중적일 것을 요구하며, 그들의 부족한 취향을 충족시키고 그들의 부조리한 허영심에 영합할 것을 요구하며, 그들이 전에 들은 적이 있는 얘기를 또 해달라고 하며, 하도 많이 봐서 질렸을 것들을 또 보여달라고 요구하며, 과식으로 답답할 때 즐겁게 해달라고 하고,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에 지쳤을 때 기분전환을 해달라고 요구한다. 이제 예술은 결코 대중적인 것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대중이 예술적인 존재가 되려고 해야 한다.”

 분명히 많은 장르문학 작가들이 위의 말에 대해서 위악적이라거나 엘리트적이라고 거부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현실을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독자에게 읽히지 않는다면 그 글은 일기나 독백 이상이 되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독자는 분명히 ‘거기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 나중에 그들이 나를 댄스홀로 데리고 갔을 때, 나는 거기서 이때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예술비평 방법을 보았다. 피아노 위에는 이런 게시문이 붙어 있었다. “피아노 연주자를 쏘지 마십시오. 그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

 그러나 와일드는 독자가 ‘거기에 있음’을 사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독자를 무식하다고 무시하며 ‘없는 셈’치지 않았다. 이어지는 그의 논의를 보자.

 “대체로 영국의 예술가는 공격받는 데서 뭔가 이득을 보게 된다. 그의 개성이 강화되는 것이다. 그는 더욱 완전하게 자신이 된다. ……사실상 대중이 건전하다고 말하는 대중소설은 늘 전적으로 불건전한 생산물이며, 대중이 불건전한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은 늘 아름답고 건전한 예술작품이다.”

 와일드는 좋은 글을 쓰려면 대중에게 공격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즉 좋은 작품은 대중을 화나게 하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김예슬의 선언문이 많은 대학생들을 화나게 했으며, 공격받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훌륭한 선언문이었던 것과 같은 이치다. 와일드도 김예슬도 대중이 ‘거기에 있음’을, 그리고 거기에 ‘꼼짝없이 연루되어 있음’을 철저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한다. 거기에 비해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은 독자를 ‘있는 셈’ 친 것에 불과했다.


 4.

 김예슬 선언에 뒤이어 내 창작관에 큰 격변을 불러온 것은, 한 지인 작가와의 (역시나) 술자리였다. 그때 지인은 내게 모 지면에 꼭 투고해보라는 권유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지면에 투고할 만한 글도 써놓지 않았고, 쓸 시간도 없었고, 애초에 쓸 마음도 별로 없었다. 속된 말로 하자면, 나는 거기에 투고하는 것이 ‘땡기지 않았다’. 비단 그 출판사 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출판사나 공모전이나 문학상에도 투고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안 들었다. 그렇다고 소위 문학적 열정이 식었냐 하면 그건 아니고, 나는 진행중인 장편소설 구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냥 그 장편을 쓰는 것, 그리고 기존에 모아놓은 글감으로 내 단편을 쓰는 것이 내가 당장 해야 할 일일 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자, 그 지인은 내게 말했다. “그런 장인정신만 지키는 게 과연 답일까? 기회는 결코 자주 오지 않아. 기회가 있을 때 최대한 잘 잡아야 한다고. 열심히 투고를 해야 돼.” 나는 그 말에 반쯤 찌푸리며 웃었다. 그 작가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그 순간 나는 글쓰기를 단순한 취미생활로 하는, 아무도 봐주지 않는 자기만족적인 글을 쓰는 딜레땅뜨가 된 셈이었다. 혹은, 출판사와 편집자와 상생하는 실리적인 자기경영의 지혜 없이 무식하고 우직하게 글만 쓰고 있는, ‘방망이 깎는 노인’같은 유형이 되었다. 내가 고기만 깨작거리자, 그 지인은 다시 말했다. “내 말, 한번 잘 생각해봐.” 그리고 우리의 화제는 다른 데로 옮겨갔다. 그러나 지인의 그 말은 술자리가 파한 뒤로도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과연 나는 그의 말을 ‘잘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생각은 대충 다음과 같은 단계로 진행되었다.
 그래, 예전의 나는 분명 등단이나 데뷔나 출간이나 문학상 등을 욕망했다. 그런 데에서 주어지는 작가로서의 승인을 탐냈었다. 하지만 그런 욕망은 이제 사라졌다. 통장으로 들어온 고료가 딱히 뿌듯하지 않다. 온라인에서든 종이책에서든 내 작품이 수록되고 신문에 보도자료로 내 이름이 나간다는 것이 전혀 기쁘지 않다. 독자나 편집자가 내 글에 대해서 좋다고 해주는 칭찬이나 감상이 아무런 의미로도 와닿지 않았다. 그런 것에 왜 일희일비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보람도 없는데 왜 굳이 투고를 해야 한단 말인가? 어쨌든 기회니까? 작가로서의 커리어의 전략이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 기회를 잡고 그런 전략을 구가해서 결국 이룰 목적이 무엇이란 말인가? 유명한 작가가 되는 것?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데? 유명한 작가가 왜 되고 싶은데?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어서 글을 쓴다는 건 허무한 순환논리가 아닌가? 글을 쓰기 위해 유명한 작가가 되어야 하고, 유명한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써야 한다니, 어불성설이 아닌가?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랐을 때 일순간 깨달음이 왔다. 답은 간단했다. 중요한 건 대의大儀였다. 작가에게는 사소하든 거창하든 간에 자신의 신념이, 대의가 있어야 한다. 그 대의를 이루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있어야 한다. 작가에게는 반드시 말해야만 하는 중요한 것이 있어야 하고, 반드시 써야만(I must) 하는 글이 있어야 한다. 유명한 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러한 신념을 충실히 그리고 성공적으로 밀어붙였을 때 나오는 효과 내지는 성과의 일부분이거나, 그러한 신념을 완수하기 위한 전략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내게는 그동안 문학적 대의니 신념이니 하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 대신, 내가 어릴 때부터 글을 잘 쓴다고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칭찬받았던 청소년적인 자아 인정 욕구, 나 자신의 내밀한 상처를 폭로하고 인정받고 싶은 우울증적 욕망, 내 인물들과 이야기와 내적 형식의 완결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향락, 그러한 향락으로 돈을 벌어 정당한 자격을 부여받고 싶은 욕구, 그러한 욕구를 ‘적성과 소질에 맞는 일로 돈을 벌기’라는 소시민적 삶으로 정당화하기, 반면 전혀 소시민답지 않은 예술적 기질이나 자의식이라는 모순에 시달리며 겪는 우울증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우울증 자체를 내가 쓰는 문학 그 자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영일은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와 같은 자기징벌(자기투명화)은 어디까지나 양가감정을 묘사하는 수준에서 마무리되는데, 이는 곧 문학의 본질을 우울증을 계속해서 앓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 그럼 한국문학이 집요하게 숨기려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혹시 한국문학이 '유토피아에의 의지'를 상실했다는 사실이 아닐까? 다시 말해, 유토피아가 부재하는 우울증을 문학의 본질로 승인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7

 이것은 정확한 진단이다. 내겐 유토피아가 있어야 했다. 사회적 정치적 유토피아라는 주제의식이 글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이상적 지향점으로 삼는 문학적 속성, 내가 완성하고자 하는 문학적 형식, 내가 말하고자 하는 문학의 진리라는 것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내가 가져야 하는 것은 문단의 승인도 아니고 독자의 인기도 아니고, 대의다. 그것이 작가가 응당 가져야 할 책임이다.
 작가로 ‘간택’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작가를 ‘선택’해야만 한다. 독자에게 발견되지 말고, 독자를 발견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대의란 누가 일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만들어야만 한다. 다만, 이러한 대의는 파편화된 작가들 개인의 취향과 감수성에 의거한 욕망에 만족하는 것으로 그쳐셔는 안 된다.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공격적이어야 한다. 문단이라는 적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생에게는 대학이라는 적이, 노동자에게는 기업이라는 적이 명확하게 존재하듯이, 우리 역시 문단이라는 적에 맞서서 연대해야 한다. 글쓰기가 더이상 ‘외로운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외로워지지 않을 때란, 연대하고 화합할 수 있을 때란, 싸움 없고 악역 없고 적대 없는 천국 같은 세상에서가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공공의 적이 있을 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우리는 더이상 문단이나 출판 시스템이나 이러한 근대문학이 형성된 역사적 전제에 대해 말하는 것을 속절없는 불평이라고 여기고 피하지 말아야 한다. 술자리의 뒷담으로만 그쳐서도 안 된다. 오히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우리가 그 말을 소리 높여 말해야만 한다. 모든 예술적 혁명은 예술과 대중문화 사이에서, 예술과 프로파간다 사이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과 참여예술 사이에서, 리얼리즘과 낭만주의 사이에서, 예술 생산과 소비의 자본 운동 사이에서, 그 모든 체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비판을 제기하고 기존의 경계를 무너뜨리거나 뒤바꾸는 데에서 일어났다. 시스템에 초연한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 모든 사회적 맥락과 시스템에 무관심한 순수히 미적인 문학 사조라면 오로지 단 하나, 탐미주의였는데, 가장 저명한 탐미주의자인 와일드가 오히려 사회주의자로서 부르주아(대중)을 화나게 하라는 언명을 내세웠다는 사실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플로베르도 마찬가지로, 탐미주의가 훌륭한 문학적 조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사회적 무관심 자체가 당시 사태 속에서 사회에 대한 전복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8
 둘째, 우리는 문단의 외부에 머물지 말고, 문단의 권위를 빼앗아야 한다. 우리가 문학적 ‘대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문학의 대의란 문단문학이 하는 것이고 상업소설이란 장르문학이 하는 것이라는 구도 자체를 파괴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논의는 박가분이 <근대문학의 종언과 학생운동의 종언>에서 다음과 같이 진행한 바 있다*9(다시 말하지만, 이런 논의를 작가가 아니라 비평가가 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문학이라는 장을 지탱했던 것은 순문학만의 어떤 문학적 대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문학의 종언’이 함축하는 건 그러한 문학적 대의가 소멸하고 대중들에게 무관심 말고는 아무런 반응을 끌어내지 않는다는 게 결코 아니다. 사태를 그런 식으로 본다면 오히려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아직도 근대적 형태의 문학(문단문학)만이 여전히 한국 문학의 특권적 심급으로 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근대 문학에서 가능했던 급진적 형태의 문학적 이념이 상실되었다면 오히려 그것은 문단 문학을 경영하는 자본과 문화관료들에게는 좋은 일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라도 근대문학의 종언은 근대문학의 대의에 대한 고전적 충실성을 새롭게 발명해야 한다는 노선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예컨대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태제에 충실하기 위해 우리는 문단의 권위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문단보다 더 내실있는 ‘문학적 권위’를 재창안하기 위해 작가들의 대안적 어소시에이션을 문단 외부에서 만들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것은 그저 감상적인 구호 아래 모인 젊은 작가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실천만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들이 모든 걸 포기하는 한에서라도 기존의 근대적 문학 시스템을 완전히 보이콧하는 충실성 속에서야 비로소 조영일이 염두에 두었던 문단문학의 종언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다. 역으로 이것은 상실된 문학적 대의를 회복하는 투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장르문학가들이 술자리에 모여서 하는 뒷담 중에, 출판사와 편집자 뒷담을 제외하면 그 다음으로 가장 많이 하는 것은 단연 문단에 대한 뒷담이다. 문단문학 즉 순수문학은 배타적이고 편협하고 권위적이고 보수적이며, 장르문학이 ‘비순수’하다는 혐의로 배척당하고 있다고 불평한다. 그런데 정작 순문학은 장르문학을 딱히 배척한 적이 없다. 애초에 장르문학이 뭔지도 잘 모르거나, 혹은 장르문학을 어떤 흥미로운 신세계쯤으로 여기고 눈을 빛내는 정도일 뿐이다. 문단문학에서 장르문학에 대해 이런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그들이 오만해서 장르문학을 무시하거나 냉소하기 때문이 아니라, 장르문학이 그들의 적수가 못 되고 그들을 ‘화나게’ 하지도 못하고 공격다운 공격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문단에 의해서 형성된 문학산업 시스템과 문단문학과 장르문학으로 양분된 현실적 사태를 장르문학 자체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보고, ‘남들이 오해하든 말든 자기만의 독자적 세계를 만들어가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다면, 문단 기득권의 허위의식보다 훨씬 더 심각한 허위의식이며 상상력의 빈곤이다.*10 이런 상황에서 장르문학이 아무리 문단을 비난해보았자 과민반응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진실로 새로운 한국문학 내지는 새로운 문학적 상상력이란, 실체 없는 독자라는 상상적 존재에게 열려있는 문학이 아니라, 문단이 독점한 문학적 권위를 무너뜨리고 빼앗는 것이어야 한다. ‘경계문학’이라는 용어도 그 의미 자체가 부당하다. 이쪽도 저쪽도 아니라는 뜻의 ‘경계’에 자신을 귀속시킬 것이 아니라, 경계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 2009, 2010 경계문학 베스트 컬렉션 [꿈을 걷다]. 우리는 스스로 금을 밟은 채 서 있다,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가지 못한 채.

 셋째, 상기한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당파성을 구축해야 한다. 단순히 문단과 비문단으로 구도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각자 믿고 있는 문학적 진리가 무엇인가에 따라, 동인이나 조류를 결성하고 서로 타협 없이 싸워야 한다. 문단의 본격문학으로서의 대의가 유명무실해진 것은, 문학산업 시스템으로서의 자본 권력을 공유하기 위해 서로 본질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대의의 당파성을 포기하고 화합하기 때문이다. <문학동네>와 <창작과 비평>이 각자 표명하는 문학적 대의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야합하는 현상이 바로 문단의 병폐다. 이러한 타협을 우리가 그대로 답습한다면, 그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문단문학을 하나의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5.

 김예슬은 자기 자신을 학내 전체에, 대학 사회 전체에, 그리고 나라 전체에 폭로함으로써 선언했다. 묻건대, 글줄 끼적이는 문학청년으로서 김예슬의 선언에 일말의 패배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 김예슬의 선언은 징글맞게 잘 쓴 글이다. 화려한 수사와 비유와 서사가 없는 그 짧은 선언문은 오늘날 나오는 그 어떤 한국 문학 작품보다도 강렬하게 뇌리에 남을 뿐더러 실제로 독자의 마음과 세계관과 행동을 전도시키는 힘이 있다. 나는 타인을 죽이거나 살릴 수 있는 펜의 힘이라는 것이 불가능해진 지 오래라고 생각해왔고, 그러면서도 나 자신만은 그런 펜으로 휘갈기고 싶고 또한 휘갈겨야만 한다고 다소 절박하게 자기 최면을 걸어왔다. 실은 믿지 않으면서도 믿으려고 노력했다. 그런 나에게 김예슬은 바로 그런 펜을 던졌다. 그 던져진 펜은 나를 아프게 찔렀으되 나는 그 펜을 살점에서 뽑아내서 손에 들고 써야만 했다.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내 대의를 추구하기 위해 본업으로 돌아가야겠다. 소설. 이제 진정한 作家의 첫 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두고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 두고 볼 일이다.”




*3. 조영일, 같은 책, pp. 190~191.

*4. 사실 이 구분은 애매하다. 등단이라는 제도가 없는 장르문학계에서, 작가라는 호칭이 주어질 수 있는 자격 여부는 매우 자의적이다. 일반적으로 출판사나 공모전을 통해 데뷔를 하면 작가라고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으나, 그렇게 데뷔한 장르문학 작가들도 스스로가 정말 작가가 맞는지 의문스러워한다. 또한 데뷔하지 못한 작가들도 스스로를 딱히 ‘지망생’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5. 여기에 대한 논의는 박가분이 환상문학웹진 거울 74호에 게재한 평론 {환상문학의 이퀼리브리엄}을 참조.

*6. 오스카 와일드, 원유경 최경도 역, [일탈의 미학: 오스카 와일드 문학예술 비평선],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 2008. 한길사, p. 233.

*7. 조영일, 같은 책, pp. 228~229.

*8. “바로 이런 무관심 때문에 19세기 중반에 탐미주의자 플로베르의 어떤 것에도 기반하지 않는 작품, '자기 자신에게 기대는' 작품은 위계질서의 당시 옹호자들에 의해 '민주주의'의 표명으로 즉각적으로 지각됐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작품, 관점이 없는 작품, 어떤 메시지도 전달하지 않고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반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신경쓰지 않는 작품은 모든 선호와 모든 위계를 중지하는 이 무관심 자체에 의해 '평등주의적'이다. 후속 세대들은 그것이 예술의 감각중추를 미화된 일상생활의 감각중추로부터 완전히 분리했다는 사실 자체에 의해 전복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자크 랑시에르, 주형일 역,
[미학 안의 불편함], {정치로서의 미학}, p. 75.

*9. 박가분,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 {근대문학의 종언과 학생운동의 종언: 종언의 정치적 귀결}, 인간사랑, 2010. pp. 356~357.

*10. 박가분,
{환상문학의 이퀼리브리엄}, 환상문학웹진 거울 74호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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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득별 11.02.26 20:06 댓글 수정 삭제
    저는 다른 방향으로 선언했어요. http://blog.naver.com/padeuk/80124870552 우리 친구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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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윈 11.02.26 21:45 댓글 수정 삭제
    그 '싸움'의 한 출발이 이 글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러나 1의 수많은 논의들이 전부 진실이기에, "자,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숙제로 던져지네요. 슬프고 두근거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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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 11.02.28 13:12 댓글 수정 삭제
    두서가 없고 문단문학을 비판하다가 갑자기 장르문학 문제로 넘어가고... 중구난방이네요. 예슬이는 왜 또 엮어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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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2.28 15:58 댓글 수정 삭제
    -_-/ 두서가 없다기 보다는 글의 주제와 논리 전개를 따라가 볼 때, 문단문학의 문제점을 먼저 거론한 다음에 장르문학 문제를 언급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볼 때는 굉장히 체계적으로 쓰인 글인데 이상하군요. 이 사이트가 환상문학 웹진인 만큼 당연히 문단문학의 문제점과 연계해서 장르문학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게다가, '이 글은 본래 김예슬 선언 출판 기획의 일부로 작성한 원고입니다.'라고 원고의 첫 문장이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예슬을 왜 언급하냐는 물음은, 글을 제대로 안 읽고 리플을 다는 것을 증명하네요. 글의 의도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고 건성으로 읽고 리플을 단 것으로 오인할 수 있으니 좀 더 정독을 하셔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글을 보는 개인의 차이가 있다지만, 글에 처음부터 명확히 언급한 내용조차 문제 삼는 것은 오직 까기 위해서 썼다고 밖에 보이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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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ute 11.02.28 19:53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다만 개인 한 사람의 긍지가 여럿 되고 그것이 힘을 갖게 되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소망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보다 많은 문제점들을 알아야 하고, 알려야하겠지요. 보다 실질적인 대안 또한 필요하겠고요. 네, 실제적이고 실질적인 대안 말입니다.
    현실의 폭력 알고리즘이 종국에 상대를 죽이는 것으로 승패가 결정된다면, 펜과 언어의 폭력 알고리즘은 내가 끝까지 살아야만 승패가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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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 11.06.09 01:19 댓글 수정 삭제
    무척이나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기존 문단의 권위를 빼앗하야 한다. 는 문장이 아주 인상깊었습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절을 떠나 새 절을 지으면 되지않을까. 아니면 이참에 개종을 하던지요 ㅎㅎ 고마운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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