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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a12@naver.com 별책부록: 이야기가 끝나고 난 후
 묘생만경 수록 작가 후기

 2010년 11월 15일,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는 일곱 번째 정기 중단편선 [묘생만경(猫生晩景)]을 출간했다. [묘생만경]은 2009년 7월 73호부터 2010년 6월 84호까지 1년 동안 거울 시간의 잔상에 실린 글과 초청 단편, 그 기간 동안 선정된 독자 우수 단편 중 두 편을 포함하여 총 스물두 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었으며, 표제작인 {묘생만경}은 73호에 실린 계림 님의 단편 {자연은 살아 있다}의 제목을 바꾼 작품이다. 예년과 변함없이 표지 일러스트레이션은 明님이, 표지 디자인은 유서하님이 작업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출간된 거울 한 해 동안의 결산, [2010 환상문학웹진 거울 중단편선: 묘생만경].

 거울의 한 해를 농사에 비유했을 때 정기 중단편선은 추수의 자리이고(오호라), 학교로 치면 기말고사이며(이런!), 회사로 치면 연간 업무 보고서(어이쿠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계나 방송사로 치면 연말대상(오오!)이라는 자리가 어울릴 것이다. [묘생만경]은 지난 한 해 동안 있었던 외부적이고 내부적인 변화와 발전을 모두 아우르는 축제의 장이다.
 외부적으로 [묘생만경]은 처음으로 거울의 편집장이 아니라 정기 중단편선을 전담하는 기획자를 두고 제작된 중단편선으로, 초대 기획자로는 아밀님이 활약했다. 또한 출간 기간 중 거울의 초대 편집장 진아님이 물러나고 2대 편집장으로 유서하님이 취임하였다.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에서는 독자 우수 단편의 작가였던 계림님이 필진으로 정식으로 등장하였으며 판타스틱을 통해 데뷔한 정세랑님이 합류하고 거울 초기 필진이었던 세이지님이 돌아오는 등 내부적으로도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물론 이전에는 작품을 실었으나 이번에는 싣지 못한 작가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필진이 좋은 작품을 싣고, 중단편선이 꾸준히 출간되는 한 거울의 작가들은 계속 자극과 격려를 받을 것이며, 그것이 거울의 발전이자 전진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추수 뒤풀이, 커튼콜, 종방연, DVD 스페셜 피쳐, 시상식 수상 소감이라고 불러도 좋을 자리를 마련했다.
 [묘생만경]에 작품을 수록한 작가들이 직접 쓴 후기와 직접 고른 발췌문을 공개한다. 작품은 지면에 실린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니라지만, 작품의 다양한 해석과 재미를 해칠 수 있는 말은 가급적 피했다. 그보다는 작품을 처음 구상했을 때부터 구체적으로 쓸 때까지 있었던 에피소드나 곁가지 이야기, 감사의 말을 볼 수 있다.
 각각의 작가들이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하고 각자 다른 이에게 감사인사를 전하지만, 이 기사 전체가 이 글을 읽어주고, 묘생만경을 구입하고 읽어주고, 이제까지 거울을 지켜보았던 모든 독자들에 대한 감사인사임을 알아주시라.

천상열차
배명훈


 무식이 탄로났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손에 든 책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틀림없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天象列車分野之圖(천상열차분야지도).’  
 분명히 그렇게 씌어 있었다. 확인하고 말 것도 없었다. 내가 그렇게 썼으니까. 내가 쓴 원고 그대로 인쇄되어 나온 책이니까.
 그런데 그때는 왜 몰랐을까. 교정지를 두 번이나 확인하고 마지막에 PDF 파일까지 받아서 다시 한 번 확인했는데, 왜 그때는 저게 눈에 안 띄었을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列車라니. 왜 列次라고 쓰지 않고 列車라고 썼을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12쪽



 ▼ 후기: 불멸의 오타와 버그에 대하여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이 이야기는 이다님과 쉼표(,)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나온 글이에요.
 그때 이다님이 한창 교정 작업 중이셨거든요. 원고 어디에다 쉼표를 써 놨는데 한 단계 한 단계 교정을 거치면서 이 쉼표가 사라졌다가 다시 생겨났다가 하는 게 마치 스스로 생명을 가진 존재 같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순간에 이야기가 떠올랐던 것 같아요. 정확히 말하면 그 전부터 머릿속을 맴돌던 이야기들이 그 순간에 형태를 갖췄다고 해야겠죠.
 원고에 실린 글자들에게, 특히 장애가 있는 단어들에게, 교정을 거친다는 건 일종의 시련을 거치는 일이잖아요. 멸종의 위기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그런데 어떤 (틀린) 단어들은 대여섯 번의 시련을 거친 뒤에도 버젓이 살아남아서 마치 원래 그렇게 생긴 게 맞는 것처럼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기도 하죠. 어떤 경우에는 후손들을 수도 없이 만들어내기도 하고요. 그걸 보고 있으면 작가가 쓴 글자들이 작가의 손에 완전히 통제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거기서 한 걸음만 더 나가면 그런 글자들에게도 어떤 운명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외계생명체가 지구에 침투한다면 이런 형태로 침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런이런 식으로 구성하면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하고 이다님께 이야기를 한 다음 거의 그때 구상한 그대로 완성이 된 것 같아요. 글자 자체의 존재감은 아무래도 한글보다 한자가 더 강렬하다는 점 등을 고려해서 몇몇 부분은 좀 달라졌지만요. 이다님께 감사.
 그리고 이 글은 작가들에게는 꽤 친숙한 오타벌레를 소재로 쓴 글이어서 고양이 앤솔로지 때보다 저한테는 오히려 더 편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고양이를 전혀 모르고 고양이에 대해 써야 했거든요. 그렇다고 오타벌레를 일부러 키우고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죠.

 (참고) 본문에 나오는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소백산 천문대 SF 작가 워크샵을 갔다가 알게 된 소재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제대로 다뤄볼 만한 소재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그 전에 이 소재로 글을 쓰실 분이 있다면 기꺼이 양보할 용의가 있어요. 어차피 이건 제 게 아니니까요. 본문에도 소재선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는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선점할 생각이 없다는 점, 공식적으로 밝힙니다. 누군가 재미있게 써 주세요.


영원히 66 사이즈
정세랑


 “곶감은 먹으면 안 돼요."
 “잠깐! 햇빛, 은, 십자가, 말뚝 그런 게 아니고?”
 “응. 곶감만.”
 “이해 안 돼요.”
 “그럼 정말로 호랑이들이 곶감을 무서워했겠어요? 곶감은 전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알려진 언데드들의 독약이에요. 한때 교황청이 쓰던 성수는 곶감을 담궈둔 물이었다니까.”
 “하지만 그냥 말린 감이잖아요.”
 “뭐랄까, 죽었는데도 맛있잖아요, 곶감은. 곶감도 언데드니까 언데드가 같은 언데드를 먹으면 안 되는 원리랄까? 광우병 비슷하게요.”
―33쪽



 ▼ 후기: 절망도 잘 말리면 하얗고 달아요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영원히 66 사이즈}는 뱀파이어 이야기인 척하지만, 사실은 곶감에 대한 찬사입니다. 전국 곶감 농가에 바치는 감사의 마음이에요.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언데드가 있다니!
 곶감을 먹다가 곶감에 대한 농담을 생각해냈고, 그러다 우연히 다큐 사진작가들과 치킨을 먹으며 이런저런 멋진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을지로의 버려진 지하도들을 걸었고, 다이어트에 실패했고, 엄청난 실연을 당했고, 회사를 그만두었고…… 여러모로 가장 절망적일 때 썼던 기억이 나네요. 절망도 잘 말리면 하얗고 단 가루가 날립니다. 밤마다 후추통처럼 가루 흔들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누우면서 썼더랬죠. 그렇게 쓴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주 끔찍하고 잔인한 이야기를 썼다는 생각에, 덜덜덜 떨면서 읽어봐 달라고 건네면 가끔 전혀 엉뚱한 평이 돌아옵니다. “이야기가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네.” 같은 거요. 그럼 으잉 이 이야기의 어디가 대체, 하고 의아해하면서도 저는, 더 열심히 쓰면 이야기가 아니라 저를 깨물어주지 않을까, 뱀파이어의 어린 연인처럼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깨물어 주세요, 사랑해 주세요.


묘생만경
계림


 심지어 각자 사용하는 컴퓨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귀여운 키티가 그려진 넷북을 하나 사서는 거실에 방치해 두길래, 가족들이 보지 않을 때 내 전용으로 쓰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바로 그 넷북이다. 키티가 고양이계의 영원한 섹시 아이콘이라는 걸, 인간들은 죽었다 깨도 모를 것이다.
―76쪽



 ▼ 후기: 무척 예외적인 애완동물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묘생만경}은 저의 세 번째 단편입니다. 그 전의 두 편은 떠오를 때 떠오르는 대로 썼지만 이때는 ‘자, 지금부터 책상에 앉아서 한 편을 완성해보자’라는 식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뚝딱 한 편이 나오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더군요. 두 편 만에 소재가 말라버렸다고 넋두리를 하기 시작하자 아내가 제 어렸을 적 시골 얘기들이 재밌었다며 그걸 써보면 어떠냐는 제안을 해줬습니다. 그래서 개한테 물려 죽은 닭들에 대한 얘기를 떠올리게 됐습니다. 임신한 셰퍼드와 도사견이 벌인 반나절의 사투, 돼지 한 마리가 미쳐서 발광하는 바람에 온 집안이 쑥대밭이 된 사건, 새끼를 물어 죽이는 엄마 토끼에게서 아기 토끼들을 구출해 주사기로 우유를 먹여 살려낸 얘기 등도 있었는데, 앞으로 그것들로도 뭘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고양이를 두 번 쯤 길러보려고 했지만 모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가출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엄한 집안도 아닌데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저한테 고양이는 무척 예외적인 애완동물이었고, 이 단편을 쓰면서 관찰자 입장에 있는 화자를 궁리하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캐릭터가 되었습니다.
 {이 단편이 거울에 처음 올라갈 때의 제목은 {자연은 살아 있다}였는데, 단편집으로 나오면서 편집진들께서 {묘생만경}이라는 제목을 붙여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상사곡
amrita


 헤어진다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가벼운 일도 아니지만, C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그가 진짜 팬더일 수 없는 것처럼, 달의 메마른 바다에 진짜 꽃이 피어날 수는 없는 것처럼, 자신이 어린 시절 잠시 보았던 천국 같은 달이 진짜 달은 아니었듯이. 하지만, 그 착각이라 믿는 마음이 다시 착각일 수 있듯이.
―90쪽



 ▼ 후기: 참 오래도 걸렸다. 많은 것이 너그러워지기까지.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달걀 두 개에 물, 우유, 설탕과 계피 가루를 섞어서 체에 내린다. 식빵 두 개를 뜯어서 파이 팬에 골고루 흩뿌려 놓고 달걀물을 골고루 붓는다. 오븐에 넣고 낮은 온도에서 20분 정도 굽는다. 바나나를 잘라서 넣으면 바나나 브레드 푸딩, 사과를 잘라 넣으면 사과 브레드 푸딩, 과일을 넣지 않으면 그냥 브레드 푸딩이 된다. 그리고 마주 보고 앉는다. 그게 언제였나, 저번 주였나 이번 주였나. 참 오래도 걸렸다. 많은 것이 너그러워지기까지. 어쨌거나 푸딩은 맛있었다.
 이제는 지겨워졌겠거나, 이제는 관심이 끊겼겠거니 했는데 그래도 아직도 쓰고 싶다. 좀 징하다. 단편을 쓰는 동안 (어느 정도 본의 아니게) 내게 글을 마무리할 의지를 제공해 준 이가 있다. 이 자리를 빌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나를 여러모로 시험에 들게 해 줘서 고맙슈…….


여우비
진아


 사람들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곳, 일부러 찾아올 일 없는 하수구 아주 깊은 어둡고 축축하고 좁은 곳에서 한 소녀가 태어났다. 세상에 밤이 오고, 아침이 오고, 다시 어두운 밤이 오고, 또 아침이 와도 하수구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소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지 못했고, 그렇게 많은 밤과 낮이 소녀와 아무 상관없이 왔다가 갔다.
―93쪽



 ▼ 후기: 메일을 받는 맛과 기다리는 맛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2010 묘생만경 제작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역시 기획자인 아밀님한테 ‘중단편선 수록 허가 요청 메일’을 받은 일이지 싶어요.
 늘 메일을 보내는 입장이었다가 제가 메일을 받다니, 어쩐지 설레고 기뻤습니다. ^^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아직 [묘생만경]은 나오지 않았기에, 편집장님 서문과 기획자님 후기를 기다리는 맛도 쏠쏠하네요.
 멋진 책, 감사드립니다. ^^


이월, 장미원
crazyjam


 나는 아주 멋지게 살 거요. 우등 졸업해서 큰 은행에 취직하고 돈을 많이 벌 거요. 그래서 우리 엄마랑 순임이 비단옷만 입히고 좋은 것만 먹이며 호강시킬 거요.
―104쪽



 ▼ 후기: 나보다 내 무의식을 믿는다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제가 쓰는 글의 대다수가 그렇지만, {이월, 장미원} 역시 꿈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무려 공포물이었지요. 납량특집 삼아 여름에 거울에 올리려고 생각했던 것이 결국 가을이 다 되어서야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제 글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쓰는 중에 캐릭터가 멋대로 움직여 꿈에서 본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었지요. 원래는 심령복수극이었는데……. 하하.
 언제나 저는 저보다 제 무의식을 믿습니다! 그래요. 무의식이 움직여준 캐릭터들이 제 낡아빠진 의도보다 훨씬 훌륭한 글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답지 않게 감성적인 글을 썼다면서도 과분한 칭찬 해 주신 SAGE님, 고맙습니다. 저도 저답지 않게 감성적인 걸 잘도 써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주는 웹진 거울과 그 거울을 반짝반짝 닦아 주시는 모든 분께도 감사를 올립니다. 스스로의 게으름에 토할 지경인 저이지만 거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이 되어 줍니다.
 또한 이번에도 아름다운 책 [묘생만경]이 출간되어 기쁩니다. 책을 준비해 주신 분들, 수록된 글의 작가님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스물두 마리의 벽장 속 괴물, 감사합니다.


승진과학 혁명
김몽


 이미 당신을 소개한 오 대리에게 들었겠지만, 우리 연구회는 승진과학, 더 정확히 말하면 승진역학(昇進力學)의 이론과 응용을 연구하는 모임이야. 중장그룹은 해마다 수만 명을 해고하고 수천 명의 억대 연봉자를 탄생시키고 있어. 극소수의 오너 가족을 제외하고는 전 직원이 80만 명의 잠재적 경쟁자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하지. 이런 상황에서 남보다 더 빨리 승진할 수 있는 과학적 원리를 발견하는 것은 뭘 의미하겠나? 직장생활에서의 승리를 의미하는 거야. 너는 이미 동기들과의 경쟁에서 반쯤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야.
―115쪽



 ▼ 후기: 도대체 어떻게 저런 인간이 출세하나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이 소설에서 말하는 ‘승진’이란 출세를 상징한다. 그런데 이 출세라는 것이 정형화시키기 어려운 면이 있다. 열심히 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머리가 좋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마냥 정직하고 마음씨가 착하다고 되는 건 더더욱 아니다. 가끔은 '도대체 어떻게 저런 인간이'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의외성이 다분한 것이 출세다. 이 소설은 출세하고픈 인간들의 욕망을 물리학의 발전과정에 빗대어 본 풍자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우주의 심오한 본질에는 다가서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서점에 넘쳐나는 자기계발서와 처세서도 출세의 정석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만화요경
김창규


 우리가 잊고 있을 때에도 그것은 꾸준히 다가온다. 끝.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어떤 이의 말을 우리는 얼마나 비웃었던가. 아니, 비웃지 않을 수 있었다 한들 할 수 있는 일은 또 무엇이었는가. 결국 모든 것은 ‘어떻게’나 ‘왜’가 아니라 ‘누가’의 문제이다. 나 아닌 우리 가운데 누군가는, 우리 아닌 우리 종족 중 누군가는 이 끝을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나로부터 비껴가게 할 수만 있었다면 나는 무슨 짓이든 했을 것이다…….
―125쪽



 ▼ 후기: 인간은 결코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본래 사실보다는 인상을 오래 기억에 남기는 편입니다. 그래서 {만화요경}의 초안을 언제 썼는지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90년대 초반이라는 것뿐입니다. 그 때는 ‘인간이란 개념은 희망사항으로 만들어진 허구’라는 생각에 한창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그 생각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만.
 작중에 등장하는 ‘만화경’이란 말은 처음에 ‘kaleidoscope’ 라는 단어였습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말로 바꾼 셈이죠. 아시다시피 만화경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의 풍경을 보여줍니다. 로르샤흐 테스트와 마찬가지죠. 인간은 결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우연의 산물에 불과하며, 저 바깥에는 그런 일이 얼마든지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고른 단어였습니다. 변신이란 주제는 SF가 아니라 판타지의 영역이지만, 변신이 곧 생존능력인 생물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15년 넘게 시간이 흘러서 초안의 상당 부분을 수정하자니 낯이 간지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나름 성장했다는 자만심 때문에, 지금 같은 주제로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면 완전히 다른 물건을 써내겠죠. 그래도 만든 이에게는 의미가 있는 글인지라 굵은 줄기는 그대로 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지적인 존재들 간의 벽이란 제목 그대로 연약하고 얇은 동시에 깨뜨리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생각은 여전합니다.
 동족 간에도 마찬가지란 사실은 9시 뉴스를 10분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sandmeer


 아마 다시는 생선을 먹을 수 없을 거라고 남훈은 우울하게 생각했다. 특히 동해에서 잡은 생선은 절대로 먹을 수 없을 거라고. 수입산 냉동 연어 같은 거나 먹어야 할까.
―236쪽



 ▼ 후기: 섬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섬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폐쇄된 작은 섬, 그 폐쇄된 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육지에서는 모르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작은 왕국 같은 공간. 사실상 섬이라는 곳이 그런 곳이니까요.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이긴 한데, 정작 완성되고 나니 생각했던 것에서 약간 비뚤어진 이야기가 된 것 같습니다. 조금 더 기괴하고 음울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는데, 좋게 말해 아련한 이야기가 되었달까요. 아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이야기는 이대로 마치고 섬이라는 모티브로 또 다른 이야기를 쓸 기회가 있으려니 생각합니다.
 [묘생만경]으로 거울에서 내는 중단편집에 참여한 횟수가 슬슬 꽤 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꾸준히 단편집을 출간하고 있는 것은 거울 외의 모임에서는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이만큼 훌륭한 작가님들이 꾸준히 활동하고 계신 모임도 없고요. 이런 곳에 함께 필진으로 발을 담그고 있을 수 있다는 게 굉장히 기쁩니다. 늘 거울에 들를 때마다 좀 더 열심히 써야지 생각하게 됩니다.
 거울이 앞으로도 무한히 발전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무대륙의 전설
세이지


 지금은 세상에서 사라져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대륙(大陸)이 있었으니 세간(世間)에서는 그 곳을 무대륙이라 칭하였다. 입과 입을 통해 약간의 이야기는 전해져 오고, 또 오래된 고사본(古史本)에도 언급은 되어있지만 아무도 모르는 그 이야기들. 그 흔적이 우리의 주변에 남아 있지만 이런 전설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생각해 본적 없는, 아니 누구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은 이야기들. 지금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그 무 대륙에서 일어난 전쟁(戰爭)에 관한 전설(傳說)이다.
―238쪽



 ▼ 후기: 아이디어는 우연한 말장난에서부터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우선 2010년 거울 중단편선 [묘생만경]의 출간을 축하합니다. [묘생만경]을 받아봤을 때 처음 느낀 소감은 ‘고급스럽다’였습니다. 잘 제본된 책과 표지, 기성 출간된 책들과 비교하여도 조금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장르문학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대가 없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이런 멋진 책이 나오게 해준 거울 편집진들과 좋은 작품을 써 준 작가분들께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군요.(저같이 묵은 글 우려먹는 사람 빼고 말입니다)
장황하고 거창하게 시작하였지만, 사실 [묘생만경]에 수록된 저의 작품은 {무대륙의 전설}이라는 언어유희 코믹 단편입니다. 후기를 써달라고 했을 때 솔직히 난감하긴 했습니다. ‘이렇게 가벼운 작품에 무슨 후기야아아아~~!’ 라고 절규했을 제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으십니까?
 기억을 떠올려 보니 무대륙이 나오게 된 계기는 역시나 가볍습니다. 간단하게 적어 볼까요?
 한가한 오후였습니다.
 책을 읽고 있던 저에게 지인이 물었습니다.
 “무슨 책 읽어?”
 “응, 뮤대륙의 비밀.”
 “무대륙? 무가 많이 나는 대륙이냐, 무대륙이게.”
 “무대륙이 아니고, 뮤대륙!”
 라고 외치던 저에게 퍼뜩 스쳐가는 아이디어. 지인과 둘이서 더욱 더 개그스럽게 스토리를 짜고, 단어를 가지고 장난을 쳤던. 그래서 탄생했던 작품이 바로 {무대륙의 전설-성전편}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차기작이었던 {무대륙의 전설-외전편}을 중도 포기한 점일까요. 성전편에서 백무와 열무간의 전쟁을 그렸다면, 외전편에서는 하나 된 무왕국을 노리는 외세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했습니다. 말라 비틀어진 무 꼬리를 달고 나타난 무말랭이족과 누렇게 황달이 뜬 얼굴을 한 다꾸앙족과의 전쟁말입니다.
 처음에는 뭘 써야 할지 난감했는데 쓰다 보니 너무 길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네요. 적당히 마무리해야겠습니다.
 [묘생만경] 많이 사랑해 주시고, 앞으로도 환상문학웹진 거울 많이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채
raile


 보이지 않는 장난감을 드디어 손에 쥔 어린아이처럼, 소년은 들떠 책장에서 읽었던 책을 모조리 빼내 주위가 꽉 들어찰 만큼 쌓고 또 쌓았다.
 간신히 몸을 뉘일 수 있을 정도의 공간만 남아 더는 쌓기 어려워질 수위에 이르자 소년은 만족스럽게 손뼉을 쳤고, 실성한 사람처럼 낄낄대며 웃었다.
―248~249쪽



 ▼ 후기: 묘생만경 탄생의 비하인드는 바로 나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2010 거울 중단편선 [묘생만경]의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발간에 부쳐 풍성하고 멋있는 책을 만들어 주신 편집진 여러분, 거울 필진 여러분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부족한 글이나마 [묘생만경]의 한 귀퉁이를 차지할 수 있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단편선에 글을 실으면서 늘 부끄럽습니다. 저는 2004년, 2005년, 2009년 단편선에 글을 실었고, 이번에도 참가하게 되었습니다만, 언제나 이런 글을 실어도 될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저 재미있게 즐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소소하게 자랑하자면, 이번 거울 중단편선의 타이틀 ‘묘생만경(猫生晩景)’은 제가 낸 의견이었습니다! 타이틀 때문에 골치를 앓던 중단편선 기획자님께서 의견을 물어오셨어요. 몇 가지 생각나는 걸 이야기 하다, 문득 서가에 꽂힌 요시다 슈이치의 동경만경이 눈에 들어 왔더랍니다. 그래서 퍼뜩 떠오른 게 묘생만경이었습니다. 다만 동경만경은 東京灣景이라고 쓰기 때문에, 원래는 물굽이 만(灣)자를 써서 猫生灣景이었어야 했습니다. 원제의 한자까지는 몰랐던 터라 해 질 무렵의 경치를 의미하는 만경(晩景)이라고 알려드렸고요. 결과적으로는 더 어울리는 타이틀이 나와서 희희낙락거리고 있습니다. 아주 사소하지만 묘생만경 탄생에 도움이 되어서 무척 기쁩니다! (나도 이야기할 수 있는 비하인드가 있어! 씐나! >ㅁ  수록작 {성채}는 독립된 단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ORPG(TRPG의 온라인화)의 캐릭터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글을 써온 만큼 RPG라는 놀이를 오래 해온 터라, RPG를 하지 않았더라면 쓸 수 있는 글도, 품에 안은 세계도 그만큼 좁아졌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태어날 기반을 함께 만들어 준 플레이어 여러분들에게 가장 고맙습니다. 언제나 언제나 즐겁게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묘생만경] 많이많이 사랑해 주세요! 추운 겨울 감기 조심하세요!


세 가지 소원을 이루는 법
pilza2


 악마는 들고 온 서류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안에서 서류철을 꺼내어 몇 장의 서류를 내 앞에 얹어놓으며 말했다.
 “일단 여기 약관 읽어보시고요, 읽어보실 시간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서명하시면 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보험회사 직원과 똑같다. 하지만 그와 내가 하려는 계약은 일반적인 보험이나 대출 같은 것이 아니다. 그건 꿈과 희망, 영혼을 내건 일생일대의 도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나는 지금 악마와 영혼을 걸고 계약을 하려는 것이다.
―262쪽



 ▼ 후기: 직접 악마와 두뇌 게임을 펼친다는 마음으로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원래는 취미로 만드는 노벨 게임의 시나리오로 쓰기 위해 구상한 이야기였다. 몇 개의 소원을 선택지로 내놓고 하나씩 고르게 하여 좋은 선택을 하면 다음으로 넘어가고, 잘못된 선택을 하면 파멸을 맞는 식으로 해서 세 번의 선택을 성공시키면 클리어, 라는 식의 게임이었다.
 하지만 노벨 게임을 만들지 않게 되면서(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요구하지만 얻거나 돌려받는 것이 거의 없는 씁쓸한 취미였기에 그만두고 말았다) 이 시나리오도 초안 상태로 장기간 방치되어 있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꺼내어 살펴보니 이대로 버리기엔 아깝다 싶은 생각이 들어 소설로 쓰게 되었다. 처음엔 굉장한 반전을 넣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지만, 쓰고 고치는 과정에서 그런 생각을 떨치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중시한 결과 지금과 같이 되었다.
 게임에서 시작된 이야기니만큼 자신이 직접 악마와 두뇌 게임을 펼친다는 마음으로 읽으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피부가 보라색
아이


 “아니야, 그렇지 않아. 엄마 아빠가 너를 지하실에 가둬놓는 건 다른 사람들이 너를 동물원 우리에 가둬놓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야. 그래서 너를 지하실에 가둬놓는 거야. 달라.”
 “그럼 지하실 말고 집 안에서만 지내면 되잖아. 밖에 나가지 말고 집 안에서만 지내면 문제없잖아. 지하실은 너무 좁아. 답답해.”
 “안 돼. 지하실이 제일 안전해. 집 안에도 가끔 사람들이 찾아온단다. 그리고 지하실을 벗어나면 네가 엄마 아빠 몰래 밖으로 나갈 위험도 있잖아. 그러니까 안 돼. 지하실이 제일 안전해.”
 그리고 네가 다른 사람들 눈에 띄는 게 창피해.
 부모는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부모가 나를 창피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 그 이유가 제일 컸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지하실에 가둬 놓았을 것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보라색 아이.
―295쪽



 ▼ 후기: 하필 인생에서 가장 바쁜 때에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하필 인생에서 가장 바쁜 때에 이번 [묘생만경] 교정, 교열을 보게 되었습니다. 원래 그렇게 인생을 바쁘게 살던 놈이 아니었는데, 일을 하나 벌이는 바람에 하필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교정, 교열을 못 보겠다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잠도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못 자고, 소설은커녕 책 읽을 시간도 별로 없고, 당연히 사색할 시간은 아예 없고……. 상태가 이런데 교정, 교열을 어떻게 보려나, 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보더라도 그저 형식적으로 글 한번 쭉 훑어보는 정도밖에 안 될 텐데. 그래서 교정, 교열 못 보겠다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제가 또 그런 말을 잘 못 합니다. 아예 처음부터 안 하겠다고 했으면 상관없을 텐데, 막상 봐야 할 시점에서 못 하겠다고 하면 저 때문에 일이 다 꼬일 것도 같고. 마음이 참 복잡했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보긴 봤는데, 역시 안 보느니만 못했습니다. 아마 편집진들이 [묘생만경]에 수록된 글들을 전체적으로 다시 검토했을 겁니다. 제가 워낙에 형편없이 봤으니까요. 그래도 충혈된 눈을 비벼가며 어떻게든 교정, 교열을 마무리지으려 했다는 점,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워낙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 이참에 핑계 한번 대봤습니다.
 어쨌든 제가 [묘생만경]에 수록된 글들을 다 읽어봤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글 보는 눈이 밝은 건 아닙니다만, 재미있는 소설들이 꽤 많았습니다. 그러니 충혈된 눈 비벼가며 나름대로 교정, 교열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것이고요.
 기회 되시면 [묘생만경]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뭐든 폭이 조금은 넓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원래는 후기 비슷한 글을 써야 하는데요, 자기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리고 쓴 지 좀 돼서 에피소드도 생각이 안 나네요. 게다가 후기 마감 시점에 여자친구랑 좀 다툼도 있었고요. 지금 정신이 산만해요. 아, 이런 개인적인 문제는 말하면 안 되는데. 아무튼 빠른 화해를 위해.


취업 경위서
미로냥


 “소원을 빌어.”
 그 말을 꺼내면서 그는 어떤 미래를 봤을까. 내가 순순히 소원을 비는 미래? 아니면 완고하게 고개 젓는 미래? 어느 쪽이든 나는 고심하여 선택하는 것일 터인데 그는 한 마디 던져 놓고 미리 나도 모르는 답을 안다. 나는 겨우 웃었다.
―334쪽



 ▼ 후기: 좋아하는 걸 좋다고 쓰기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말을 내뱉으면 다음 말이 ‘보이는’ 사람. 그러니까 극장에 가면 언제나 한 두 씬 뒤를 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내 우울한 얼굴로 영화를 보고 있겠죠? 사실, 그렇게 우울할 필요는 없을 텐데. 그리고 소원. ‘꽤 마음에 드는 남자’와 여고생.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덧붙이자면 대개의 경우 그렇듯이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처음부터 정했다, 는 정도.
 몹시 가볍게 써서 급한 김에 원고로 제출했는데 무시무시하게도 이번 단편선 대상 기간 한에 그것 한 편 외엔 원고가 없어서 염치불구 지면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더 무서운 건 지난 번에도 그랬다는 거예요. 면목이 없습니다. 잘못 했어요. 심기일전 해서 다음번에는 적어도 두 편 중 한 편 고른다, 뭐 그런 거라도 가능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입니다.
 그래도 지면에 실릴 거니까 이해는 됐으면 해서 열심히 뜯어 고쳐, 처음보다는 알아듣기 쉬운 이야기가 됐습니다. 그냥 ‘이런 이야기구나’ 이해해 주신다면 그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또, 주제와 구도와 성향이 몹시 비슷한데 제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방식으로 좋아하는 대로만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새삼스럽게 깨달은 건데, 전 초월자가 어떤 불완전하고 덧없는 것에 사로잡히는 이야기가 좋아요. 무서울 정도로 이 주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더군요. 장편이든 단편이든. 사상이든 인물이든.
 좋아하는 걸 좋다! 고 쓰고 있으니까 읽는 사람들이 한 명쯤 더 좋다! 하고 말해 준다면 기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친구들에게도 고생 많이 하신 편집진 여러분께도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아무튼, 모두 살아 있읍시다. 좋아해요.


소년과 소녀가 언덕에서 요정을 만난 이야기
아힌사


 “그런 거, 누가 믿을 줄 알고! 요정이 어디 있다는 거야? 거짓말!”
 순간 불쑥 부풀어 오른 소년이 커다란 개구리로 변했다. 머랫은 기겁을 해서 비명을 지르며 뒤로 엉덩방아를 찌었고, 놀란 부모님이 달려 나와 그런 머랫을 부축했다. 깔깔 웃으며 다시 소년으로 변한 요정은, 얼이 빠져 있는 소년을 향해 모자를 흔들었다.
 “여기, 네 눈앞에 있지, 꼬마야!”

 Blake saw a fairy's funeral; but in Ireland we say they are immortal.
 블레이크는 요정의 장례식을 보았지만, 아일랜드에서는 요정이 죽지 않는다고 말한다.
―357쪽



 ▼ 후기: 단편 못 쓰는 체질을 넘어선 머릿속 이야기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소년과 소녀가 언덕에서 요정을 만난 이야기}는 요정의사 연작 중의 하나입니다.
 요정의사 연작은 오웬이라는 요정의사가 직간접적으로 이야기 속에 나오는 단편들로, 아일랜드의 요정에 관한 책을 읽다가 눈에 띈 ‘요정의사’ 얘기를 보고 아, 이런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해서 쓰게 된 글이에요.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전에 오웬이라는, 눈색이 다르고, 보석으로 된 반지를 끼고, 온통 창문이 난 집에 살고 있는 요정의사가 먼저 만들어졌지요. 그러다 온라인상에서 여러 사이트를 돌며 자료를 수집하며 캐릭터에 살을 붙이고 있노라니 갑자기 이 요정의사가 움직일 만한 스토리가 떠오르고, 그렇게 요정의사가 나오는 단편을 쓰게 됐어요. 이게 고교생 시절이었는데 그렇게 한 편 두 편씩 쓰게 됐는데 정신차리고 보니 어째 여기저기 단편집마다 실리게 된 작품이 전부 요정의사 연작이 되어 있더라고요.
 가장 처음 쓴 것이 {스위티 숍}. 그리고 시간 순서대로 {부디 거기에 서 있기를}-{여인들의 왕}-{오후, 우유, 호수 그림자}-{slan slan cara}-{윌리엄 준 씨의 보고서}-{소년과 소녀가 언덕에서 요정을 만난 이야기}가 됩니다. 이중 세편이 단편집에 실렸죠({스위티 숍}, {윌리엄 준 씨의 보고서}, {소년과 소녀가 언덕에서 요정을 만난 이야기}). 체질적으로 단편을 잘 못 쓰는 편이라 어지간해선 단편에 손을 대지 않는데, 유달리 오웬이라는 요정의사가 나오는 단편들은 어느 순간 아 이제 슬슬 이 이야기를 써야겠군…… 하고 느낌이 올 때가 있어요. 글 쓰는 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 역시 머릿속에서 누가 이야기를 불러주는 것 같은 느낌을 가끔 받을 때가 있는데, 요정의사 연작은 100%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 감각으로 이뤄진 글이에요. 그래서인지 가끔 저도 읽으면서 내가 쓴 글치고는 좀 특이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군…… 하는 느낌을 받곤 하는데 읽으신 독자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이주 사업 횡단 사령부 최후미 민간 선박 DU-1888-0
정대영


 화성에는 없는 넓고 깊은 바다다. 창 위로 손을 뻗어 바다를 어루만져 본다. 몇 천 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아마도 나는 저 바다 속으로 휴가를 왔을지도 모른다.
―368쪽



 ▼ 후기: 고래 울음소리 같은 휘파람을 불 수 있다면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올해도 멋진 단편들 사이에 스리슬쩍 끼어들 수 있었습니다. 남은 건 모르는 척 휘파람이라도 불고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후기 기획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개인적인 고집도 있고 해서 세계적인 이메일 서버가 하필이면 제 계정의 그 메일을 씹어버리는 통에 연락을 받지 못했다는 설정으로 스리슬쩍 넘어가려고 했습니다만, 연락이 한 번 더 오게 되었고 위와 같은 멍청한  설정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해서, 개인적인 고집을 지키는 선에서 후기를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멋진 후기들 사이에 스리슬쩍 끼어든 다음,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휘파람이라도 불고 있으면 되겠죠.
 쓸데없이 긴 제목의 이번 단편은 ‘아, 그러고 보니 고래 다큐멘터리에서 산 고래도 나오고, 죽은 고래도 나오고, 심해 생물들에게 뜯기는 장면도 나오고, 뼈만 남은 고래도 나오는데, 숨을 거두는 장면은 안 나오네.’에서 시작했습니다.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고, 읽은 적도 없다보니 마음 편히 썼던 것 같네요. 고래 이야기에 왜 우주가 나오느냐면, 쓰다 보니 이것도 쓰고 싶고 저것도 쓰고 싶어져서 연작으로 방향을 전환한 탓입니다. 원래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를 등에 태운 큰흰수염 고래가 포경선을 펑펑 날려버리는 이야기였지요. 소녀는 수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고래는 소녀가 익사하기 전에 재빠르게 적을 제압하고 소녀를 다시 등에 태워야 했습니다. 최후의 결전에서 핵잠수함과의 대결은 제가 생각해도 멋진 아이디어였던 것 같은데 쓸 기회를 잃어버려서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엔딩은 고래의 죽음으로 한층 성장한 소녀가 마침내 헤엄을 칠 수 있게 되어 고래의 뒤를 이어 바다를 누비며 포경선을 펑펑 날려버린다는 성장 소설적인 마무리를 하려고 했었죠. 하지만 평소 이런 훈훈한 이야기를 써본 적이 없다보니 결국 이리 되었습니다. 인생이란 게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순 없는 법이니 어쩔 수 없지요. 인연이 닿으면 언젠가 꼭 써보고 싶기는 합니다.
 돌이켜보니 개근은 하지 못했어도 빈번하게 거울 단편집에 단편을 실어왔던 것 같습니다. 멋진 단편들 사이에 제 글이 끼어 있다는 사실이 지금껏 신기하기도 하고, 또 가슴 설레기도 합니다. 부족한 글이기는 합니다만, 몇 분이라도 마음에 들어 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내년에도 한 편 어찌어찌 끼어들 수 있으면 행복할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 이만 고집스런 후기를 줄이고 저쪽에서 휘파람을 불고 있겠습니다. 고래 울음소리 같은 휘파람을 불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요.


소나기
askalai


 “너, 저 산 너머에 가 본 일 있니?”
 “없다.”
 “우리, 가보지 않으련? 시골 오니까 혼자서 심심해 못 견디겠다.”
 소년은 주저했다.
 “저쪽은 위험하다던데. 역귀가…….”
 “위험하면 얼마나 위험하게? 서울 있을 땐 일부러 그런 데 골라서 소풍도 가고 그랬는데.”
 소녀의 눈이 금세 ‘바보, 바보’ 할 것만 같았다.
―390쪽



 ▼ 후기: 황토집에 감사를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소나기}는 한여름의 공포 특집으로 쓴 짧은 글입니다. 당시에 [오만과 편견과 좀비]가 화제가 될 때라서 그런 식으로 고전 작품 다시 쓰기 기획을 해보면 어떠냐는 이야기가 나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쓰겠다는 분은 꽤 있었는데 뚜껑을 열고 보니 정말 써서 업데이트한 필진은 둘밖에 없었죠, 아마(웃음). 패러디를 무척 좋아하는데 정작 써보기는 처음이라 즐거웠습니다.
 시원한 강원도 평창에서 낡은 노트북으로 썼던 기억이 아련하네요. 이 자리를 빌어 새삼 황토집에 감사드립니다.


가족의 집
권정은


 아내는 발자국 소리도 없이 집 안을 돌아다닌다. 식사 준비도, 청소도 하지 않고 다만 집 안을 돌아다닐 뿐이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며칠을 견디다가, 부엌이 엉망이 될 정도로 게걸스럽게 폭식을 하기도 한다. 옷을 갈아입지 않고 씻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았다. 어둠에서 깨져 나온 조각처럼 구석에 조용히 서 있다가 갑자기 웃거나, 갑자기 울었다.
―396쪽



 ▼ 후기: 처음으로 쓴 가족이야기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이번에 [묘생만경]에 부족한 글을 수록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의 집}은 제가 제일 처음으로 쓴 가족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전달하고자 간단하게 쓴 글이죠. 글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독자 분들이 무섭다고 느껴 주신다면 이 글은 제 몫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다시 읽어 보니 부족한 부분도 많고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 하는 부분도 많습니다. 밤에 쓴 편지가 아침에 일어나 읽어 보면 부끄럽듯이 말이에요. 그래도 즐겁게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몽타주
아밀


 당신은 오만하지. 당신은 모든 것에 대해서 말하지. 바다와, 철창과, 병실과, 뜨거움과, 눈물과, 발작하는 어린 시절과, 새벽 세 시의 전화와, 뼈와 꽃에 대해서 말하지. 그들은 거기에서 그들을 보았어. 나 역시 거기에서 나를 보았어. 내가 사랑하고 미워한 사람들 혹은 사랑하거나 미워하기가 귀찮아서 그러기를 그만둔 사람들을, 그리고 나에게 똑같이 한 사람들의 흔적이 점자처럼 손끝에 만져졌어. 숨기고 싶었던 것과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싸우고 섹스하고 신음하며 엉켜 있는 모습이 화석처럼 남아 있었어.
―407쪽



 ▼ 후기: 두 번 다시 못 쓸 것 같은 야한 글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이 글은 말(語)에 대한 소고입니다.
 오랜 공백 끝에 쓰게 된 단편이었습니다. 무척 짧은 시간 안에 쓰고 완성했었는데, 모든 할 말이 안에서 곰삭은 채로 준비되어 있다가 망설임 없이 쏟아져 나왔던 것인지 아니면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고 누군가에게 쫓기는 기분으로 그렇게 빨리 썼던 것인지는 알 수가 없네요. 어쩌면 둘 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묘생만경: 2010 환상문학웹진 거울 중단편선]에는 기획자로도 참여했습니다. 책을 만들면서 그 안에 들어간 제 글을 기분은 또 사뭇 달랐습니다. 조금은 더 뿌듯했고, 조금은 더 부끄러웠던 것 같습니다. 쓰기는 2009년 초에 썼던 글인데 이렇게 늦게야 보내게 되었으니 미안해지기도 하고요. 이렇게 좋은 책에 한 켠을 차지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집필하면서 계속 들었던 에릭 사티와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에게 고맙습니다. 저는 야한 글을 쓰고 싶었고, 제가 쓴 글 중에서 가장 야한 글이 되었다고 생각하기에 뿌듯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대부분의 글이 그렇겠지만, 이 글만은 유독 두 번 다시 이렇게는 못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0년 11월 17일, 아밀


지진기
곽재식


 고구려의 상부(相夫)가 즉위한 지 8년 째 되는 기미년(서기 299년) 음력 겨울 12월, 지진이 일어나자, 달탄(達呑)땅 인근의 일자(日者)들에게 급히 좌영성실(左靈星室)로 들어오라는 전갈이 전해졌다.
―419쪽



 ▼ 후기: 독재자를 쓰려다가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웅진 문학에디션 뿔이라는 곳에서 SF/환상문학 테마 단편선 [독재자]라는 책에 실릴 단편소설을 하나 청탁 받은 것이, 바로 이 {지진기}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발단입니다.
 ‘독재자’라는 소재의 단편소설 청탁을 받고 나서, 저는 단편소설을 새로 하나 쓰려고 했습니다. 잔재주 안 부리고 정석대로 ‘독재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역사소설을 쓰려고 했습니다. 짧게 쓰려고 1주일 정도만 작업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1주일 동안 써놓고 보니 너무 길어져서 거의 장편에 가까운 분량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때 쓴 이야기가 바로 이번 호 거울에 공개된 {모살기}라는 이름의 소설입니다.
 결국 이 원고는 단편 원고로는 도저히 못 쓰겠다 싶어서 다시 한 편 더 쓰기로 했습니다.
 앞에서 쓴 소설의 10년 후 정도를 배경으로 다룬 다른 이야기를 또 썼습니다. 이번에는 길게 되지 않게 하려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딱 하루만 작업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하루 만에 쓰는 이야기가 죽죽 나아가는 통에 역시 중편 이상의 분량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지진기}로 이번에 [묘생만경]에 실린 것입니다.
 결국 두 편이나 ‘독재자’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쓰려고 했지만, 매번 너무 길어져서 결국 포기하고, 예전에 썼던 이야기 중에 하나를 골라서 단편집에 포함시키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골랐던 것이 이미 써서 공개해 두었던, {낙하산}입니다. 이렇게 해서 [독재자]에는 {낙하산}이 포함되었습니다.


마지막 선물
전건우


 “아가야, 이리 온.”
 여자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더 빨라졌다.    
 달릴수록 힘이 빠졌다. 벌판은 끝도 없이 이어졌고, 아무리 달려도 익숙한 풍경은 나오지 않았다. 물에 젖은 몸은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필통이 열려 버렸는지 가방에서는 덜그럭덜그럭 요란한 소리가 났다. 무서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엄마!”
 목이 터져라 엄마를 불러 봐도 돌아오는 건 차갑고 섬뜩한 여자 목소리뿐이었다.  
―506쪽



 ▼ 후기: 에로틱 서스펜스 어둠의 속살이 실체를 갖기까지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2003년이었어요. 아시다시피, 그때는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죠. 어느 날인가는 냉동 탑차를 모는 아는 형을 따라 배달 일을 하게 됐어요. 계란이며 채소 따위의 이른바 신선 식품을 배달하는 일이었는데요, 끝나고는 글쎄 그 형이 냉동 칸에 타라네요. 조수석에는 여자 친구를 태워야 된다나 뭐래나.
 물론 온도를 낮추긴 했지만, 저는 계란이며 채소 따위가 된 심정으로 어둡고 서늘한 냉동 칸에 타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정말이지 한 치 앞도 안 보였어요. 완벽한 어둠이었죠. 그때 생각했어요. 어둠 속에 갇힌 아이의 이야기를 쓰면 어떨까 하고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원래 제목은 ‘어둠의 속살’이었어요. 제목부터 떠올린 거죠. 언젠가 한 번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쓰면 어떨까 하고 물었던 적이 있었죠.
 “잘 들어 봐. 있잖아, 그러니까 어떤 얘가 있는데 완벽한 어둠에 갇히는 거야. 자기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야말로 암흑천지지. 그 암흑 속에서 누군가가 아이를 쫓아오는 거야. ‘아가야 이리 온’ 이러면서. 어때? 죽이지? 제목은 어둠의 속살이야.”
 친구는, 그러니까 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에로 영화 제목 같다야.”
 이것 참, 저는 졸지에 봉만대가 되어 버렸어요. 귀신과 아이의 숨 막히는 에로틱 서스펜스쯤이 되었을 법한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제 머릿속에만 들어있었어요. 에로 영화 제목 같다는 싸구려 비평가의 스무 자 평 때문만은 아니었고요,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이야기를 확장시킬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유령처럼 맴돌던 이야기가 실체를 갖게 된 것은 문득, 어머니 당신을 떠올렸기 때문이에요.
 당신의 두 번째 수술 때 말이에요.
 우리 4형제가 수술실로 들어가는 당신의 뒤를 따랐을 때, 당신은 마냥 기다리지 말고 밥이라도 먹으라고 하셨죠. 소 한 마리를 잡아도 이틀이면 다 먹어치울 정도로 왕성한 식욕의 사내들이었지만, 그때만큼은 밥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죠.
 몇 시간이 지났을까요, 당신이 파리하고 초췌한 얼굴로 수술실에서 나왔어요. 마지막 하나 남은 젖가슴을 절개하고서 말이에요. 그 옛날 우리가 힘차게 빨았던 그 도톰한 젖가슴은 암 덩어리와 함께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갔지요.
 우리는 당신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어요. 또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요, 마취에서 깬 당신이 고통에 못 이겨 얼굴을 찡그리면서 이렇게 말했죠.
 “밥은 먹었니?”
 무엇이 그리도 우리를 염려하게 만들었을까요? 목숨이 위태로운 수술을 받으면서도 아들 넷 식사 한 끼가 더 걱정되었던 당신의 바보스러움을, 아빠가 된 이제는 조금 이해할 것 같아요.
 좌우지간 저는 엄마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도요. 가난이 늘어난 속옷처럼 편하게 느껴지던 어린 시절, 당신이 보여준 그 달달한 사랑을 다시 떠올리고 싶었어요.
 제가 삶의 기로에서 방황할 때, 힘내라고 말해주던 당신.
 그러니까요, 당신. 죽음의 문턱에서 엄마의 도움으로 살아난 이 아이의 이야기는 바로 어머니, 당신 때문에 태어났어요.
 당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어서 다행이에요. 아직 효도할 기회가 있어서. 아직 당신을 미소 짓게 할 수 있어서. 이제는 제가 당신에게 힘내라고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어젯밤, 당신의 손자는 아팠어요. 열이 올라 칭얼대는 그 아이를 안고 밤새 서성거리며 저는 당신이 가르쳐준 그 말을 속삭였어요.
 사랑해.
 사랑해.
 라고.


내 친구 좀비
보라


 선이야, 자니, 하고 불러보려는 순간, 그녀는 침대 위에 사람 크기 정도의 뭔가 거무스름한 덩어리 같은 것이 올라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와 함께, 선이에게 전화가 왔을 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던 무겁고 깊은 숨소리를 다시 들었다. 그리고 그 숨소리가 날 때마다 침대 위의 검은 덩어리는 앞뒤로 조금씩 천천히 흔들렸다.
―525쪽



 ▼ 후기: 뒷담화로 시작한 소설의 추가 뒷담화 (읽으시려면 클릭하세요!)

 내 소설은 독자 반응이 그렇게 뜨거운 편이 못 된다. 거울이 원래 조회수에 비해서 전체적으로 댓글이 그다지 많이 달리지 않는 편이라는 말로 위안을 삼아 보지만, 진짜 이유는 아마 내 소설이 대부분 읽고 나서 기분 좋은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친구 좀비}도 그렇게 읽어서 기분 좋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상당히 열렬한 반응을 보여주셔서 깜짝 놀랐다. 2010 중단편선에 수록작으로 뽑혔을 때는 더욱 놀랐고. 치정 소설만 열심히 쓰다가 오랜만에 좀 성격이 다른 이야기를 썼기 때문인 걸까? (이 참에 치정 소설을 그만두고 별로 길지도 않은 작가 인생에 전기를 마련해야 하는 것일까?)
 읽으신 분들이 공감하고 호응을 해 주신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아마도 주변에서 {내 친구 좀비}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무기력한 인물들을 많이 보셨기 때문, 혹은 주인공이 끝머리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참담함을 한 번쯤은 느껴봤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면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작품 후기를 써야 하는 처지가 된 지금, 솔직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내가 쓰는 소설은 거의 모두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단도직입적으로 털어놓을 수 없을 때 그 답답함을 풀기 위해서 소설을 쓴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그런 이유에서 소설의 첫 구상이 시작되는데, 이렇게 따지면 ‘소설’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일 가치도 없이 거의 모든 이야기들이 다 좀 정교하고 세련된 형태의 뒷담화인 셈이다.
 {내 친구 좀비}는 더더욱 그런 뒷담화의 성격이 강하다.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하다가 돌아왔고, 돌아와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고, 물론 외국 생활을 하는 중간중간에도 일시귀국을 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잠시 다녀가는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지인들을 만나지 못하거나 만나더라도 피상적으로 밥이나 한 번 먹고 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짐 싸서 돌아와서 나도 이 나라에서 같이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고 보니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주변 사람들은 그 사이 굉장히 많이 변해 버렸다는 사실을 조금씩 눈치 채기 시작한 것이다. 혹은, 나 자신이 가장 많이 변했고 몇몇 주변 사람들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응당 변해야 할 만큼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다시 만난 주변 사람들 중에는 인생이 표류하는데 자기 자신은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혹은 예상치 못하게 상당히 불행해진 경우도 있었다. {내 친구 좀비}에 등장하는 두 친구는 여러 사람들의 경우를 조합하여 재창조한 인물이므로 실제로는 훨씬 더 여러 가지 다른 상황들이 있었고.
 {내 친구 좀비}는 소설이지만 주변 사람들의 경우는 현실이므로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그 뒤에 더 숨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뭐가 됐든 내가 왈가왈부하거나 가치 판단을 내릴 자격은 없다. 다만 나는 그 사람들을 친구 혹은 가까운 지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분명하게 잘못된 결정을 내리거나 어쩔 수 없이 불행해진 경우를 곁에서 보면서 마음이 안타깝고 어떻게도 해줄 수 없는 나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지고 화가 났던 것은 사실이다. 그 친구들은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나와는 다른 삶을 경험했으니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든 잘 헤쳐나가겠지만, 그래도 그 ‘어떻게든 잘 헤쳐나가는’ 날이 올 때까지 옆에서 보면서 기다릴 뿐 나서서 해결해줄 수 없다는 건 답답한 노릇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정말로 뒷담화인데, 안타까운 마음과는 별개로, 그런 지인들 중에서 자신은 나보다 불행하기 때문에 나보다 인생에서 배운 것이 더 많으며 그러므로 나보다 우월하다는 기묘한 논리를 만날 때마다 펼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어느 정도는 참아줄 의향이 있었지만,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별 이유 없이 얼굴 마주칠 때마다 ‘네가 뭘 잘 모르는 모양인데….’라는 비하적인 발언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들이대면 상처 입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열 받은 김에 쓴 소설이 {내 친구 좀비}다.
 어쨌든 사람은 시간이 가면 변하는 것이 정상이고,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내 친구 좀비}는 그렇게 변해가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단상이다. 그러므로 세태 비판이라든가 사회 비판 등의 거창한 담론과 연결 지어 읽지는 말아 주셨으면 좋겠…지만, 이미 써서 공개된 지면에 실어 버렸으니 이제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맡길 수밖에 없다. 작가의 본래 의도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읽어 주신다면 쓴 사람 입장에서는 감사할 따름이고.
 다만 한 가지 정말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하는 말에 내가 작가로서 100% 공감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언제나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지만 쓸데없는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도 있듯이, 등장인물의 말이나 행동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는 않지만 성격 표현이나 이야기 전개를 위해서 그대로 진행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겉보기에 의미심장한 대사라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작가의 본래 의도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셨으면 좋겠……으나.
 이 역시 써놓고 보니까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하실 부분이다. 소설도 썼고 작가 후기라는 명목으로 추가 뒷담화까지 풀어놓는 사치를 누렸으면 글 쓴 사람으로서 할 말은 다 했으니 독자에게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달라고 주문하는 것은 월권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읽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과 또 2010년 중단편선에 실리게 되어 기쁘다는 소감뿐이다. 소설은 허구일지 몰라도, 감사하고 기쁘다는 이 부분만은 진심입니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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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랑 10.11.27 14:31 댓글 수정 삭제
    연간업무보고서와 연말대상 사이군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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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스 10.12.14 23:12 댓글 수정 삭제
    이야. 이런 식으로 후기를 모아서 보니 좋네요. 작가분들의 개성도 보이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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