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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문학을 넘어, 독자 여러분께 더 스펙터클한 감동을 드리기 위해 영화를 준비했습니다.
올여름 최대 블록버스터, [다크 나이트]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최신작 [인셉션] 패러디!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산이 부족해, 영화를 정말 찍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콘티라도 보여드리기로 했습니다.
그 동안 거울에서 출간한 중단편선들이 배우로 총동원된 거울 스케일 블록버스터, [거울책 인셉션]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모에는 시대정신! 의인화된 거울 중단편선들이 펼치는 꿈 속 모험을 함께 떠나보세요.

주의 가정에서 어린이들이 따라하면 림보에 빠질 수 있어 매우 위험합니다.





 

 안락의자에 무릎담요를 하고 앉아 있는 노파. 옆에 책이 쌓여 있고 (거울 종이책들) 노파가 바라보는 방향으로는 해변이 있다. 해변에서부터 붉은 옷을 입은 남자가 걸어온다. 노파는 옆에 놓인 붉은 책을 바라보고, 남자를 보고 어렵게 입을 떼어 말한다.

 ― 나를 죽이려고 왔나?

 남자는 침묵.


 ― 오래전에 꿈에서 당신을 본 적 있어. 이 책들이 사실 책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꿈이었지. 그것도 걸그룹... 아니,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였나?

 남자는 침묵을 더 지키다가 드디어 입을 뗀다.





 

 타로는 콤비인 달냥과 헬리콥터에 앉아 있다. 건너편에는 가면을 쓰고 로브를 입은 묘한 분위기의 사람이 있다.

 의뢰인 미러지라고 아나? 요즘 가장 핫한 장르 걸그룹이랄까.
 타로 딱히 장르를 붙일 필요가 있나 싶지만... 걸그룹이 걸그룹이지요.
 의뢰인 중요한 게 그게 아니잖아.
 타로 듣는 걸그룹에게는 중요할 겁니다.
 의뢰인 됐고. 알아, 몰라?
 타로 압니다. 미러지에게서 빼야 할 정보가 있나요?
 의뢰인 아니. 누구한테 생각을 심었으면 해. 인셉션 말이야. 가능한가?
 달냥 불가능하다냥.
 타로 아니, 가능해. 하지만 어렵고, 위험합니다. 무의식 깊은 곳에 씨앗을 심으면 그것이 의식에서 꽃을 피우고 사람이 바뀔 수 있어요. 왜, 무엇을 심으려는 겁니까?
 의뢰인 (사진을 주면서) 시연이라고, 미러지에 새로 들어온 멤버야. 미러지는 매년 한 명씩 엄청난 오디션을 열어서 새 멤버를 뽑지.
 타로 (사진을 보고) 새 멤버인데 상당히...
 달냥 늙었다냥.
 타로 원숙하네. (달냥 찌릿)
 의뢰인 미러지가 인기가 점점 올라가다 보니 오디션도 점점 규모가 커져. 그만큼 처음부터 상당히 완성된 기교를 가진 멤버가 뽑힌 거지. 모든 걸 갖췄어. 볼륨, 성량, 감각, 미모, 감성...

 타로는 감흥없이, 달냥은 삐친 듯이 듣는다.




 의뢰인 그런데 미러지의 인기가 이제 좀 사그러들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시연이 첫눈에 보기에 좀 매니악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 새 멤버가 인기가 없어. 바로 작년에 들어온 설랑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하고 반대로 말이야. 시연 본인은 매우 우울한 상황이지.
 달냥 (‘설랑이 진리다’라는 플래카드를 든다)
 타로 그래서 이 시연이란 아가씨한테 격려라도 해주시려는 겁니까? 그런 거라면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고 비싼 격려로군요. 물론 무의식 속에서 자기 스스로 부여받은 거라고 착각하는 것만큼 강한 동기는 없겠지만.
 의뢰인 아니. 격려가 아냐.
 달냥 (번뜩)
 의뢰인 (몸을 앞으로 숙이고) 나는 이 아가씨가 미러지를 탈퇴하고 독립했으면 해. 그렇게 만들어. 이게 내 의뢰다.
 타로 의뢰 내용이 다르더라도 감상은 그대로입니다. 왜 굳이 이렇게까지?
 의뢰인 시연은 이제까지의 멤버 중 미러지가 가장 야심차게 큰 돈을 들인 멤버야. 그녀가 나온다면 미러엔터테인먼트는 무너지고 장르 걸그룹계를 초토화시키는 공룡도 퇴치되겠지.
 달냥 웃긴다냥. 장르 걸그룹계가 우리랑 무슨 상관이라고냥. 다른 데 알아봐라냥.
 타로 아니. 하겠습니다. 전폭적인 지원해주십시오.
 의뢰인 팀을 꾸리게, 미스터 타로,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달냥 이 의뢰 왜 받은 거냥. 인셉션 진짜로 가능한 거긴 한 거냥?
 타로 가능해. 예전에 한 번 해봤어.
 달냥 누구한테냥?
 타로 (묵묵)
 달냥 (삐친 듯 다시 하악 하고 고개를 튼다) 어디로 가는 거냥?
 타로 서울. 꿈에서 연기할 위조사랑 꿈에 침투할 때 쓸 약 만들 약제사를 찾아야지.
 달냥 난 조우 싫다냥.
 타로 그래도 그만한 실력자 없잖아. 15종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자인데.
 달냥 꼭 해야 한다면 내 일은 하겠지만 좋은 꼴은 못 볼 거다냥. (흥 하고 팔짱을 낀다)
 타로 네 안에 있는 아홉 냥 중 몇몇은 조우랑 사이좋게 지낼 수 있잖아? 그 녀석이 변신하는 15종 중에 고양이도 둘이나 있으니까.
 달냥 그게 더 기분 나쁘다냥.(흥흥흥)
 타로 일 엎지만 마. (한숨)





 

 타로는 바에서 조우와 조우한다. 주위에는 몸무게 120킬로그램쯤 나가 보이는 남자, 술에 손을 안 대고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중년 남자, 소리 높여서 헤어진 남자 연인의 이야기를 하는 남자, 자전거를 옆에 놓고 팔에 붕대를 감고 있는 여자가 테이블을 하나 차지하고 있다.  



 타로 아직 이 사람들과 어울리는군.
 조우 편하잖아. 이 사람들은 내가 진짜라는 건 모르지만 다들 외계인이라고 잘 맞춰준다고. 웬일이야?
 타로 인셉션을 할 거야.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조우 불가능하진 않아. 열라, 졸라, 더럽게 어려울 뿐이지.
 타로 지구 말 많이 늘었다?
 조우 (흐뭇)
 타로 해봤어? 성공한 거야?
 조우 납치해서 기억조작하는 거야 내 전문이지!
 타로 ...지금 원하는 건 그게 아니라...
 조우 기억은 나는데 자기가 스스로 한 생각으로 알게 만드는 건 더 힘들지. 성공한 적 없어. 웬일로 그런 어려운 걸 해? 뭐 할 건데?
 타로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걸그룹을 분열시키려고 해. 새 멤버가 탈퇴하게 해서.
 조우 오호, 그럼 예쁜 아가씨들 볼 수 있는 건가? 내 취향이었으면 좋겠지만 그럴 리 없겠지, 지구인들 취향은 이상하니까.
 타로 글쎄, 이상하게 인기가 없다고 하니 너하고는 잘 어울릴지도 모르지만...
 조우 무슨 소리야, 인기 없는 거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버럭)
 타로 어느 부분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무시)
 조우 흔들림 없는 넘... 어쨌든 인셉션은 아주 기본적이고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게 관건이야. 그 아가씨가 가장 원하는 거, 가장 감추고 싶은 트라우마, 그런 거 말이지.
 타로 잘 설계해보도록 하지. 충분히 깊이 내려가기만 한다면 스스로 자신을 볼 수 있게 될 거야.
 조우 약제사 구했어? 내가 추천할게. 인간이 아니라서 노하우가 짱이야. 대~박.
 타로 그래. 만나보지. ...근데 정말 지구 말 늘었다.
 조우 (흐뭇)

 창백한 얼굴에 입술이 유난히 빨간 것 같은 중성적인 사람의 실험실. 약들은 모두 붉다.



 조우 이쪽은 혈도야.
 혈도 (아무 말 없이 이빨을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짓는다. 송곳니 하나가 입술 밖으로 약간 삐쳐나온다.)
 타로 좀 특별한 약물이 필요해. 꿈이 한 겹이 아니거든.
 혈도 2단계로 내려가나?
 타로 3단계.
 혈도 보통 약으로는 그만큼 내려가는 동안 안정을 취할 수 없지만... 내 피를 희석해서 넣으면 가능하지. 정확히 13%.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고 딱 그 농도면 돼. (표정 변화는 별로 없지만 왠지 자랑스러워하는 오라가 뿜어져 나온다.)
 타로 ...안 물어봤는데... 그런 영업 비밀 막 말해도 되나?
 혈도 ...아무튼. 시험해보겠나? 직접 보여주지.

 타로는 자신의 옷과 똑같은 표지를 아로새긴 책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난다.

 혈도 생생하지?
 타로 (떨면서) 좋...아. 우리와 가지. 자세한 건 달냥과 이야기해.

 타로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간다. 조우가 부축하려고 하지만 사양한다.





 

 타로, 달냥, 조우, 혈도, 그리고 의뢰인이 모여 있다. 배경은 사막 초입에 있는 오아시스다. 말라붙은 지 오래인 우물을 지나 숲이 우거진 언덕을 넘어서면 지형이 급경사를 그리며 내려앉고 공기가 난폭해진다. 우물 옆에는 야탄고무나무가 있고, 나무 아래에는 대자리가 세워져 있으며 우물가에는 선향 묶음이 붙었다. 깃발처럼 장대에 묶어놓은 황금비단이 펄럭인다.

 타로 미러지와 시연에 관한 모든 걸 알아와. 주변인물, 가족사항, 현재 상황.
 달냥 미러지는 2006년에 결성됐다냥. 2004년에 엔젤, 2005년에 순백이 그 회사에 있긴 했지만 이름이 없고 따로 놀았다냥. 2006년에 신!이 들어오면서 트리오 걸그룹으로 재탄생하고 2007년에 몽몽, 2008년에 설랑, 그리고 2009년에 우리 목표물인 시연이 들어오면서 점점 커졌다냥.
 조우 오오, 좀 더 자세히 좀 이야기해봐. 사진은? 사진 없어?
 달냥 침이나 닦아라냥.
 조우 무슨 침! 입에서 흐른다고 다 침이 아냐. 내가 지구인인가? 자기 잣대로만 남을 판단하는 하급생물 같으니.
 달냥 알고 싶은 거냥, 알고 싶지 않은 거냥?
 조우 알려주세요, 달냥님. (비굴) 젭~알~
 타로 (절레절레)
 달냥 조심해라냥. 이번만은 봐주겠다냥. 나는 관대하니까냥.
 조우 예예.
 달냥 일단 미러지의 일원부터 보겠다냥.
첫 멤버인 엔젤은 제일 나이 많지만 보이시하고 동안이라서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냥. 연습생 기간이 길어서 잠재력이 많은데 좀 촌스럽다는 평이 있다냥. 노래도 하지만 주로 랩을 한다냥.
두 번째 멤버인 순백은 호리호리한 엔젤하고 비교되게 덩치가 있다냥. 특히 탄탄한 말벅지에서 나오는 춤이 압권이라고 누구처럼 침 흘리는 팬들은 말한다냥. 역시 노래보단 랩을 더 하고, 말했듯이 볼륨감 넘치는 춤을 전면으로 내세운 멤버다냥.
다음으로 처음 미러지를 무명에서 구한 신! 얘는 느낌표까지 다 이름이다냥. 엔젤보다 더 호리호리하고, 보이시하다기보단 롤리타적인 매력을 가진 멤버다냥. 4차원 소녀로 예능에 나가서 미러지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공신이라고 한다냥.
그 다음으로 들어온 게 몽몽이다냥. 대체로 노래보단 랩하고 춤이 강세였던 미러지에서 메인보컬로 들어온 멤버다냥. 그런데 어느 그룹이나 이런 애들이 인기가 상대적으로 없다냥. 희끗해서 존재감이 좀 없는 것 같기도 하고냥. 좀 늙어...
 타로 원숙.
 달냥 원숙하다냥. (시치미)
그 다음은 설랑인데 얘가 시연 직속 선배에다가 미러지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애다냥. 소위 비주얼 담당이라고 하는데, 실력도 알토란 같고, 진리다냥.



 조우 객관적인 정보 맞아? (의심의 눈)
 달냥 그렇다냥! (캬오!)
 조우 어, 그렇구나. 그럼, 그럼, 달냥이가 자기 글래머라고 하는 것만큼 객관적이겠지.
 달냥 글래머는 볼륨이 문제가 아니라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간 비율이다냥! 난 있을 거 다 있다냥!
 조우 아, 그래, 알았어요, 진행하세요.
 달냥 한번만 더 건드리면 가릉이를 불러내겠다냥.
 조우 말만 하십시오, 주인님! 뭐든지 하겠습니다! (경례)
 타로 지구에서 많이 부대꼈구나. 비굴해졌어, 조우. (한숨)
 조우 너도 이걸 ‘어떻게 해야 잘 처리했다고 소문이 날까’ 같은 취급을 한번 받아보면 세상이 무서워질 거야. (벌벌 떨며 소근) 그렇다고 아예 안 까불 내가 아니지만.
 달냥 하던 이야기 마저 하겠다냥. 시연 차례지냥? 의뢰인이 했던 평가가 맞다냥. 어둡고 늙어 보이고 덩치가 커서 그렇지. (타로 원숙하고 볼륨 있다고 해.) 실력이나 외모나 다른 멤버들보다도 오히려 프로답다냥. 그런데 인기가 없어서 우울증 불면증에 시달리는데다 자신감이 점점 없어져서 무대 공포증, 악플 공포증, 악플보다 무서운 무플 공포증에 시달린다고 한다냥.
 조우 근데 이 사람들은 누구야? (사진을 보이며 말한다.)
 달냥 아, 그건 미러지 매니지먼트 팀이다냥. 다들 각자 가수이기도 한데 미러지 일에는 발벗고 뒷바라지한다고 그런다냥.
 조우 다들 한 성깔 하겠는데? 이 사람들은 몰라도 되나?
 타로 아니,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 말이 더 권위가 있을 거야. 그중에서 네가 변장할 사람을 정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어. 달냥, 그쪽도 자료 있어?
 달냥 날 뭘로 보냥. 당연히 있다냥.
제일 오래된 게 이 노출증 있는 신조다냥. 겉보기하고는 다른 면이 많은데, 어쨌든 미러지를 기획하고 노래도 주고 총괄하고 있다고 한다냥. 자기 음악 색깔이 무지하게 강하고, 막 어둡고 침울하다가도 8차원적으로 발랄해서 그게 나름 카리스마라고들 평한다는데... 이게 무슨 소리냥?
 타로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몰라서 긴장된다는 뜻 같네.
 조우 과연 타로! 그걸 이해하다니!
 타로 (계속하라는 듯 손짓한다.)
 달냥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냥? 신조는 있을 수 없는 일만 가사로 쓴다는데 너무 현실성 있게 써서 자기 이야기라고 오해받는다고 한다냥.
 혈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달냥 다음은 할티다냥. 밝고 화려하게 활동적이지만 가까이 지내면 어둡고 무겁고 암울한 면도 있다고 한다냥. 코디나 스타일리스트도 하고, 특히 로드 매니저 역할을 도맡아하면서 미러지를 여기저기 행사에 데려갔는데, 최근에 개인사정으로 뜸하다냥. 미러지 애들이 큰언니처럼 따른다는데 유독 시연하고는 서먹서먹하다냥. 낯을 좀 가리는 시연 성격도 있지만 역시 별로 접하질 못한 것 같다냥.
다음은 우리부, 딱 보기에 기괴하고 낯 가리고 까칠하게 생겼고, 실제로 입을 열면 애들이 점점 우울해지기 때문에 한번에 45어절 이상 말을 안 하기로 했다는 기인이다냥. 그렇지만 알게 모르게 뒤에서 미러지 일을 많이 도와준다고 한다냥. 내성이 생기다 못해 중독되어서 45어절 이상 말해달라고 매달리는 사람들도 있단다냥.
가이야라는 사람은 미러지 결성할 때쯤에 합류했는데, 본인이 미러지만큼 인기 있는 가수라서 잘 안 알려져 있지만 사실 미러지 스타일리스트나 프로듀싱에 많이 참여했다냥. 그런데 역시 개인작업으로 바쁜 데다 다른 데하고도 계약을 해서 예전만큼 미러지랑 직접 얼굴 맞대지는 못하는 것 같다냥.
너머는, 이쪽도 참 특이한 캐릭터인데냥. (조우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더 그럴 것 같다. / 달냥 캬앙! / 조우 그렇게까지 긍정할 필요는 없었는데...) 참하고 얌전할 것 같은 외양과 이력을 가지고 있지만 작업하는 곡들은 독특하고 난해하다 못해 논란까지 되고 은근히 평소에 말도 거침없단다냥. 미러지 곡 중에 보니까 길고 뭔가 패턴을 알 수 없는 노래가 이 사람 거였다냥. 이 사람 팬은 팬이라고 안 하고 마니아나 논객이라고 한단다냥.

 조우 그 너머란 사람이 좋겠어. 패턴도 잘 읽히지 않고 비교적 친분이 적고 노출된 게 적으면서도 편하게 기댈 수 있을 만한 위치라서는 아니야.
 타로 그럼?
 조우 나랑 비슷할 것 같아서!

 타로가 조우를 밟고 달냥이 문다. 뒤에서 혈도가 주사기를 꺼내들고 있다.

 이후 마라톤 회의를 통해 시연의 마음속에 심을 메시지와 구체적인 작전 단계를 결정한다. 타로가 설계하고 혈도가 약물을 조제하고 조우는 너머의 특징을 복사하며 달냥이 이 모두를 감시하며 논다.

 달냥 그런데 왜 하필 이런 데서 회의한 거냥? 물이 있긴 하지만 황량하다냥.
 타로 내 22개의 영혼 중 첫째라서.
 달냥 꿈 설계할 땐 네 거 쓰지 마라냥.
 타로 어차피 채우는 건 꿈 꾸는 사람이야.
 달냥 시연은 꿈 많은 걸그룹 막내잖냥. 너처럼 복잡할 리가 없다냥.
 타로 그거야 보면 알 노릇이지.
 달냥 무슨 소리냥? 원래 알던 거라도 있는 거냥? 조사는 나한테 다 맡겨놓더니냥!
 타로 딱히 그런 건 아냐.

 타로는 별 해명 없이 자리를 뜬다. 달냥은 계속 삐친 채로 앉아 있다가 휙 나무 위로 올라간다.





 

 타로 시연 양이 방해받지 않고 오랫동안 혼자인 때가 있을까? 인기 절정의 걸그룹인데.
 달냥 미국 프로듀서가 관심을 보여서 미팅을 잡기로 했단다냥.
 타로 그럼 최소 10시간은 비행하겠군. 어느 항공사를 이용한대?
 달냥 워낙 없이 살아서 칼 이코노미로 간다는 것 같다냥. 그런데 우리가 다같이 타서 꿈에 진입하는 작업을 하려면 적어도 747 항공기 퍼스트클래스는 되어야 한다냥. 기장석이 위에 있고 퍼스트클래스는 앞쪽이라서 사람이 왔다 갔다 하지 않는다냥. 스튜어디스도 물론 눈감아줘야 하고냥.
 타로 의뢰인 씨께서 통 크게 그 항공사 인수하는 건 어때요?
 의뢰인 그럴 돈 있으면 미러 엔터테인먼트를 다 이수하지 뭐하러 당신들에게 의뢰를 하겠나. (정색)
 타로 ...농담이에요...
 달냥 ...실망이다냥...
 의뢰인 (달냥을 노려보고) 꼭 필요하면 내가 아는 스튜어디스 넣고 시연양 좌석만 마일리지 업글해서 퍼스트클래스로 선물하지.
 달냥 그런데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기로 하고 이 일 맡긴 거 아니었냥? 우리 보수는 어떻게 받는 거냥?
 의뢰인 alt + enter

 장면이 전환된다.

 공항에서 시연이 선글라스를 끼고 걸어서 비행기를 타고, 그 뒤로 타로, 혈도, 달냥, 조우가 함께 탄다. 퍼스트클래스에 처음 타보는 시연과 조우는 마치 쌍둥이처럼 의자를 뒤로 눕혔다 다시 바로 앉았다 테이블을 꺼냈다 모니터를 켰다 하며 부산스럽다.
 비행이 시작된 후 얼마 지나서 스튜어디스가 음료카트를 밀며 들어온다. 시연은 주스를 택하고, 스튜어디스는 컵에 주스를 따라준다. 그리고 캡슐을 하나 넣는다. 시연은 헤드폰을 끼고 열심히 카탈로그를 뒤적거리다가 문득 그대로 자세가 무너지며 잠든다. 타로가 그녀의 의자를 뒤로 눕히고 담요를 덮는다.
 타로, 혈도, 달냥, 조우는 팔을 걷어 기계에 모두 연결하고 눈을 감는다.





 

 거대한 도시가 보인다. 집들은 교외 변에 흩어져 있고 시내 중앙으로 건물들이 점증하며 서 있다. 건물들 사이로 곧고 넓은 수로가 흘러가고 수로 위에 폭이 넓은 다리 몇 개가 놓여 있다. 수로에는 화물선도 다니고 작은 배도 다닌다. 작은 배에 사람 둘이 타고 있고, 다리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사람도 둘이다.
 시연은 작은 배에 타고 있는 사람 둘이 처음에는 서로를 수줍게 돌아봤다가 서로에게서 눈을 못 떼고 손을 내밀더니 웃음을 터뜨리면서 왁살스럽게 서로를 더듬는 것을 본다. 웃으며 놀듯이 팔을 놀리던 두 사람은 웃음이 잦아들면서 하늘을 본다. 두 사람은 서로 어깨에 기댄다. 두 사람이 탄 작은 배가 점점 멀어진다.
 시연은 옆을 흘깃 본다. 너머가 서 있다.

 너머 저 사람들은 방금 어른이 되어서 처음으로 도시에 들어왔어.
 시연 ‘방금’ 어른이 돼요?
 너머 이 세상은 시간만 지나면 누구나 어린애에서 어른이 될 수 있는 게 아니고, 어린애와 어른은 완전히 다른 종족이야. 어린애들은 완전한 육체가 없어서 빛에도 잘 바스라지고 잠도 잘 수 없지만 공장에서 어른이 쓸 물건들을 만들면서 시간을 보내고 무사히 ‘관’을 받으면 어른이 되지. 관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육체를 비춰주는 링카로 만들어져 있고, 관을 받아서 링카에 비친 자신의 육체를 본 이후로만 사람은 잘 수 있어. 죽음 또한 그저 시간이 지나면서 늙고 병들어 시체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링카에 비친 육체가 흐리게 보이기 시작한 후 시간이 흘러서 재가 되어버려. 관의 수명이 곧 육신의 수명인 거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수백 년은 걸리고, 그 기간 동안 ‘어른’은 아무것에도 해를 입지 않아.
 시연 언니가 쓴 곡이에요?
 너머 응. 맘에 들어?
 시연 지금 이야기해주신 부분까지라면요. 너머 언니 곡은 참 느낌이 독특해요.
 너머 너한테 주고 싶은데 기회가 없었어. 사실 난 정말 주고 싶었지만...
 시연 (다 듣지 않고) 알아요, 가뜩이나 감수성이 이상하고 흥행성 없는 저한테 곡 안 주려고 하셨다는 거. 다른 매니저 언니들도 다 말리셨죠?
 너머 아니, 그런 적은 없어. 네게 내 곡을 주지 못한 건 내 문제야.
 시연 ...정말요? (그다지 믿는 표정은 아니다. 애써 웃는다.)
 너머 네가 알았으면 좋겠다. 넌 큰 잠재력을 가진 아이야. 걸그룹 안에서 묻혀 있기엔 아까워.
 시연 그렇게 위로해주지 않으셔도 돼요.
 너머 위로 같은 걸 왜 해?
 시연 (화난 얼굴로) 위로가 아니면 왜 전에 썼던 곡을 저 주려고 하시는데요? 위로가 아니라 놀리시는 거예요?
 너머 (당황한다) 어? 전에 썼던 곡이라니?
 시연 (같이 놀란다) 어? 제가 그랬어요?
 너머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아냐, 내가 잘못 들었나 보지.
 시연 아무튼 제가 미러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언니가 말씀 안 해주셔도 알아요.
 너머 무슨 악플을 봤길래 자꾸 그러는 거야?
 시연 악플보다 무서운 무플이라니까요. 기자들도 제 기사는 쓰지 않아요. 제가 들어온 이후 행사는 줄었고요. 거기다...!
 너머 (말을 가로막고) 다리 위에서 이럴 게 아니라 바라도 갈까? 내가 살게.

 바에서 자신의 서러운 처지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던 시연은 이마를 탁자에 대고 곧 잠이 든다. 바텐더로 있던 혈도가 시연 앞에 놓인 잔을 회수한다. 손님으로 함께 있던 타로와 달냥이 옆에 앉자 너머는 조우로 변한다.

 조우 생각보다 더 상태가 나빠.
 타로 스스로 단단히 인셉션을 하고 있는 꼴이군. 혈도, 조심해서 지켜. 시연 양의 무의식이 폭력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어. 침입자인 우리를 쫓아내려고 말이야.
 달냥 무슨 징조라도 있었냥?
 타로 조우가 말했던 이야기는 너머가 전에 썼던 곡이 맞아. 꿈속에서 그걸 알아채다니 시연 양의 무의식이 쉽게 망각에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야. 곧 작업이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지.
 조우 자기도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던데 괜찮지 않을까?
 타로 바로 그게 무의식 깊숙이 안다는 뜻이야. 더 위험해. 다들 준비하자. 일단은 시연 양이 뭔가 나쁜 낌새를 눈치챘으면 너머 쪽으로 책임을 몰고 가.
 달냥 긍정적인 메시지를 심어야 한다면서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몰고 가는 거냥?
 타로 3단계 꿈에서 역전시키면 돼. 성공하고 나면 2단계와 3단계 꿈은 그냥 자연스러운 자기 마음으로 생각하고 기억에서 사라질 거야.
 조우 이거 진짜 시연 양 스카웃해가려고 하는 거 맞아? 스키마 치료 아냐?
 타로 트라우마겠지.
 조우 지구 말은 왜 이렇게 여러 종류인 거야!

 다들 아무 대꾸도 없이 다시 한 번 팔을 걷어붙인다. 조우도 마지막으로 팔을 걷고 모두 기계에 연결하고 잠이 든다. 혈도만이 남아 카운터 아래에서 기관총을 꺼내들고 그들을 지킨다.





 

 시연은 눈을 뜬다. 자신의 몸은 곱고 치렁치렁한 흰 드레스로 감싸였고 두 팔은 엑스 자로 교차한 채 가슴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시연은 잠시 정신을 못 차리고 고개를 흔든다. 무심히 팔을 뻗으려고 했는데 위에 딱딱하고 투명한 벽이 있어 쾅 하고 부딪친다. 시연은 날카롭게 온몸을 관통하는 아픔을 느끼며 소리를 지른다. 놀라고 화가 나서 아직도 아픈 팔로 자기 위를 덮고 있는, 또는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는 유리벽을 쾅쾅 친다. 감각이 돌아와서 자기가 누워 있었단 사실, 유리벽은 자기 몸보다 아주 조금 더 크다는 사실, 아주 좁은 공간 안에 자기가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누워 있던 자신이 똑바로 서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웅성웅성대는 냐옹 소리 속에서 유리벽이 위로 들린다. ...냐옹?
 시연은 자기 눈 앞으로 보인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분명히 보고 있는데도 알아볼 수가 없다. 커다란 눈, 활짝 열려 있는 노란 눈, 앞으로 봉긋이 나온 삼각형 코, 그 밑으로 동그랗게 양쪽으로 갈라진 인중, 짧고 촘촘하면서도 부드러워 보이는 털 사이로 양 빰에 삐쳐나온 강인한 수염. 얼굴에 닿는 몰캉하면서도 부드러운 촉감과 그 위로 살짝 긁히는 날카로운 아픔을 느끼면서 최종적으로 시연은 결론내린다. 고양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고양이의 얼굴과 팔다리를 갖고 있지만 두 발로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키가 시연의 허리쯤 오는 괴생물체가 여섯 마리 더 보인다. 시연은 문득 안다. 아, 내가 백설공주고 저 아이들이 일곱 난장이인 거구나. 그런데 왕자도 없이 눈을 떴네?


 갑자기 무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왕자만이 아니라 뭔가 이상한 게 더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일곱 난쟁이가 원래 고양이 얼굴이었나?
 다음 순간 시연은 그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서술된다.

 시연을 처음으로 깨우고 만졌던 고양이 얼굴이 입을 열어 말한다, 아니 말한다고 서술된다.
 “어떻게 서술을 알아차리는 거냥?”
 “그건 내가 내 주술사 말고는 아무에게도 서술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야. 수이만이 날 서술해. 내 시점에서 온 세상이 수이 입으로 서술돼.”
 시연은 자기가 말한다고 생각하지 못하면서 말한다고 서술된다. 자기 속에 있는 서술자가 시연을 직접 인용한다고 서술된다. 고양이 얼굴 난장이가 시연을 다시 재우려고 한다고 서술된다.
 “다시? 내가 지금 자고 있는 거야?”
 여기가 꿈속이라고 서술된다. 꿈속에서 시연을 속이고 무언가를 얻어가려는 무리가 있다고 서술된다.
 시연은 입을 열어 꺼져버리라고 말하려고 한다고 서술된다. 그 순간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서술이 중지된다.
 “잠깐만요, 시연 양.”
 붉은 옷을 입고 후드까지 내려쓴 남자가 한 말이었다. 시연은 그가 낯익다는 느낌이 들지만 기억은 나지 않는다.

 시연 누구세요?
 타로 저는 Fool, 당신의 꿈을 지켜주러 온 당신의 무의식입니다. 광대라고 불러주십시오.
 시연 꿈이요? 아, 꿈이라고 했지. 그런데 지켜주러 왔다고요?
 타로 누군가 시연 양을 속이고 비밀을 가져가려는 무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지요? 그들을 꿈 침입자라고 부른다는 것도. 그래서 시연 양은 거기에 대비해서 마음을 단련받았어요. 시연 양에게 무의식 속에서 접근을 하려면 접근하고자 하는 상대를 명확히 볼 수 있거나,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할 수 있도록.
 시연 이상해요. 나처럼 인기도 없는 신인한테 누가 무슨 짓을 한다는 건가요? 마음을 단련받았다니, 난 그런 기억도 없는데.
 타로 원래 꿈속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고, 그 반대도 있는 법이지요. 간단히 말해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없다면 당신은 꿈속에 있는 겁니다. 시연 양은 이미 서술자가 가르쳐주었지만요. 그리고 그 서술자란 것이 시연 양의 마음이 단련되었다는 증거지요.
 시연 복잡해, 머리 아파요.
 타로 생각해보세요, 잠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꿈을 기억해내는 거랑 반대지만 요령은 똑같습니다.
 시연 잠들기 전에...? ...너머 언니가... 이야기를 해줬고... 그리고 술을 마셨어요.
 타로 무슨 이야기를 했죠? 잘 생각해봐요.
 시연 그게...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른’과 ‘아이’의 이야기... 새 곡을 주고 싶다고... 넌 걸그룹에 묻혀 있기 아깝다고 그랬어요! 왜 그러셨을까요?

 그때 타로와 시연이 이야기하고 있는 곳 바깥쪽에서 너머가 나타난다. 망을 보던 달냥이 먼저 발견한다.

 달냥 지금 그러고 나오면 어떡하냥?!
 너머 ...누구신지...

 뒤에서 조우가 나타나서 자기 아니라고 고갯짓을 하고 팔을 휘젓는다. 달냥은 얼른 고양이인 척한다.

 너머 ...역시 고양이 울음소리는 가끔 사람 말소리처럼 들린단 말이야. 저걸로 곡을 써야겠어.

 너머가 타로와 시연 쪽으로 걸어가고 조우와 달냥은 불안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본다.

 달냥 저건 뭐냥?
 조우 시연 양의 무의식이 만든 거야. 저걸 보면 시연 양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거야.

 너머가 접근하자 타로가 너머의 날개를 잡으며 폭력적으로 제압한다.

 시연 뭐 하시는 거예요!
 타로 당신이 한 말 기억 안 나요? 이 사람이 왜 그랬을까요?
 너머 (숨이 막혀서) 나는...
 시연 ...설마! 똑같이 어둡고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자랑하는 고고한 너머 언니가 저한테 공감하고 저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서 함께 일을 도모하려고 이 모든 일을 꾸몄단 말인가요?!

 조우와 달냥은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너머를 포박하는 데 열중한다.

 타로 이 사람 의식 속에 들어가서 직접 보도록 하죠.
 시연 좋아요! (주먹 불끈)

 시연이 먼저 팔을 걷고 잠에 빠진다. 달냥과 조우와 타로는 다시 유리관에 시연을 눕히고 담소를 나누면서 꿈에 빠질 준비를 한다.

 달냥 누구 의식으로 들어가는 거냥?
 타로 너머의 의식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시연 양의 의식이야. 자기 것이라고 생각 안 하기 때문에 오히려 솔직하고 깊을 거야.
 조우 내 꿈에서 솔직하고 깊은 이야기가 나온다고? 무섭다. 좀전에 말 길게 하는 거 봤지?
 타로 그냥 순수하고 꿈 많은 소녀일 거라고 생각하지 말랬잖아.
 조우 그런 말 들은 적 없어!
 타로 시간 없어. 얼른 들어가.

 달냥은 타로를 의미심장하게, 조우는 투덜거리면서 쳐다본다.

 타로 잘 끌어올려줘, 달냥. 부탁해.
 달냥 돌아오기나 해라냥. 또 한 바퀴 돌았다고 떠나면 안 기다릴 거다냥.
 타로 걱정 마.
 조우 왜 그렇게 애틋해? 나도 기다려주라.
 달냥 (캬앙!)
 조우 어이쿠. (눈을 감는다)





 

 시연은 눈을 크게 열었다가 다시 감는다. 눈이 닿는 곳 어디든 색이 가득 차 있는 광활하고 생생한 공간이다. 여기저기에 구멍이 있어 인력이 느껴진다. 빛의 막대기 하나가 휘리릭 돌다가 구멍에 잡혀 겹겹이 피어오르는 빛을 뿜으며 폭발한다. 장엄하다. 광활하다. 웅장하다. 빛에 압도당한 시연은 그제야 몇 가지 어휘를 떠올리다가 깨닫는다. 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붉은 꽃의 환상보다 몇 천 배 아름다운 꽃. 첫 폭발을 기점으로 여기저기에서 현란한 꽃이 폭발한다.

 타로 조심하세요. 저건 다른 종족을 위한 거고 우리가 잡히면 '자기'를 잃게 될 테니까요.
 시연 (간신히 시선을 떼고) 기가 어디죠? 너머 언니는 어디에 있어요?
 타로 한참 가야 해요. 조우, 구멍을 유인해줘. 시연 양은 내가 안내할 테니.
 조우 그래. 그럼 시간 맞춰서 만나.

 조우는 빛의 막대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진 형태가 되어서 퍼져나간다. 그동안 타로는 시연을 이끌고 성긴 실처럼 보이는 것을 따라 질주한다. 조우가 변한 꽃이 파박 꼬리를 길게 늘이며 별빛처럼 뒤로 남고 주위는 점점 공허해진다. 구멍의 수가 점점 줄어든다.

 타로 약속 하나 해요.
 시연 무슨 약속요?
 타로 거기서 뭘 보더라도 그 안으로 뛰어들지 마세요.
 시연 왜요?
 타로 우리 말로 한다면 그렇게 되면 죽어요. 그리고 이렇게 깊은 꿈에서 죽으면 깨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꿈의 밑바닥에서 헤맬 수 있어요. 위험하니까 약속해요.
 시연 음... 저긴가요?

 시연이 가리킨 곳에는 움직이지 않는 무채색의 구멍이 있다.

 타로 잃어버린 자라고 부르는 구멍이에요. 죽음이라고도, 망각이라고도 해요.

 무채색의 구멍은 인간 모양을 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목이 베였으나 서 있는 사람으로, 갑옷을 입고 있고 왼손에 자신의 머리를 들고 높이 쳐들었다. 손 위의 머리는 갸름하고 매끄러우며, 감긴 눈은 평온하고, 끝이 살짝 들린 입술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웃고 있다.
 시연은 한참 동안 말 없이 구멍을 바라보다가 불쑥 말한다.

 시연 잃어버린 게 아니에요. 잊혀진 것도 아니고.
 타로 시연 양?
 시연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타로 시연 양? 조심해요.

 시연은 천천히 구멍 쪽으로 다가가고 있다.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타로는 온 신경을 집중하고 시연을 살핀다.

 시연 사람은 타인의 죽음을 공유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어서, 그래서 그렇게 단절되었다는 게 너무나 억울해서 밤에 잠을 못 이뤘지만요.
 타로 시연 양, 물러서요.
 시연 그렇게 잠을 못 자는 밤에 누군가의 잃어버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생각했어요. 그래도, 죽음과 시간과 망각 앞에서도 어떤 이야기들은 살아남는다고. 누구나 시간이 흐르면 죽어 잊혀질 테지만 그게 커다란 위로가...
 타로 시연 양!
 시연 ...됐거든요.



 시연이 번개 같은 동작으로 허공을 차고 구멍으로 다가간다. 타로가 뻗은 팔은 허공을 움킨다. 잃어버린 자이므로 그 구멍에서는 인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타로는 시연의 뒤를 따른다. 그러나 시연은 마치 수면 위로 물을 뿜어내며 뛰어올랐다가 다시 들어가는 돌고래처럼 곡선을 그리며 그대로 구멍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자기도 모르게 같이 뛰어들려던 타로는 조우의 목소리를 듣고 멈춘다.

 조우 야! 멈춰!
 타로 조우... 아무래도 끝난 것 같다. 글렀어.
 조우 그래? 하긴 시연 양이 저렇게 됐으니 실패겠네. 나름 매력 있는 아가씨였는데 아쉽게 됐는걸.
 타로 (곰곰)
 조우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 일이 틀어진 거야? 처음부터 예상대로 돌아간 게 하나도 없잖아. 저기엔 왜 뛰어든 거고?
 타로 아무래도 우리가 꿈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시연 양의 깊은 곳을 깨운 것 같아.
 조우 우리 때문이라고? 왜? 시연 양이 고양이나 외계인이나 점술가랑 무슨 관계가 있는데?
 타로 글쎄. 그건 따라가봐야 알지 않을까 싶군.
 조우 따라가본다고? 뭐하러?
 타로 내 책임이야. 이 일을 받아들인 것은, 그래서 이 꿈들을 설계하고 시연 양을 꿈 속의 꿈 속의 꿈까지 끌고 들어온 것은 나니까 말이야. 일은 실패하더라도 여행은 제대로 끝마칠 수 있게 해야지. 이대로 두면 영원히 꿈 속에 갇혀 있을 수도 있어.
 조우 달냥한테 한 약속도 좀 지켜줘. 네가 안 오면 필시 내가 죽을 거라니까.
 타로 괜찮을 거야. 시연 양이 그러더군. 죽음과 시간과 망각 앞에서도 어떤 이야기들은 살아남는다고.
 조우 석판에 새기는 왕의 말 같은 것? 웃기지 마. 네가 없으면 이야기도 없는 거라고.
 타로 글쎄, 그걸 구분해야 할까? 어쨌든 간다.





 



 안락의자에 무릎담요를 하고 앉아 있는 노파. 옆에 책이 쌓여 있고 (거울 종이책들) 노파가 바라보는 방향으로는 해변이 있다. 해변에서부터 붉은 옷을 입은 타로가 걸어온다. 노파는 옆에 놓인 붉은 책을 바라보고, 타로를 보고 어렵게 입을 떼어 말한다.

 노파 나를 죽이려고 왔나?
 타로 ...
 노파 오래전에 꿈에서 당신을 본 적 있어. 이 책들이 사실 책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꿈이었지. 그것도 걸그룹... 아니,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였나?
 타로 늘 나왔잖아요.
 노파 그랬나? 기억이 나진 않아. 여기에서 수없이 많은 꿈을 꾸었거든. 언제나 죽는 것으로 끝나고, 점점 생생해지는 꿈이야.
 타로 죽음과 잠은 얼굴이 같지요.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죽음과 잠은 쌍둥이 형제니까. 잠은 매일 밤 찾아와 사람들을 죽음에 훈련시키지요. 수없이 많은 잠을 자면서 죽음을 연습하도록. 하지만... 잠을 못 자는 밤에 누군가의 잃어버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생각했죠. 누구나 시간이 흐르면 죽어 잊혀질 테지만, 어떤 이야기들은...
 노파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점 기억이 떠오른 얼굴로) 죽음과 시간과 망각 앞에서도 살아남는다고.
 타로 그게 커다란 위로가 된다고. 오래 기다렸나요, 시연 양?
 시연 광대 씨로군요!
 타로 (손을 내밀며) 돌아가요, 여행을 계속하고 살아남을 수 있게.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해요. 이곳은 꿈이고 이 세상은 현실이 아니에요.

 시연은 주위를 둘러본다. 책들 위로 자신이 보았던 얼굴들이 스쳐지나간다.

 시연 어떻게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무엇을 가지고 그쪽이 현실이고 여기가 꿈이라고 말할 수 있죠?
 타로 날 믿어요. 난 당신과 꿈을 공유하고 있는 영혼의 형제예요. 출발점은 달랐지만 우리는 같이 태어났어요. 기억해요?

 시연은 다시 책들을 본다.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와 [타로카드 22제]가 나란히 있다. 시연은 타로를 보았다, 책들을 보았다 고개를 돌리다가 일어선다.

 타로 날 믿어요, 제발.

 시연이 손을 내민다. 타로도 마주 손을 내밀며 앞으로 다가간다. 시연의 쭈글쭈글한 손이 점점 젊은 손이 된다.
 타로의 손과 거의 맞닿았을 때 시연이 손을 움츠리며 말아쥔다.











Cast

타로 타로카드 22제
달냥 달과 아홉 냥
조우 제15종 근접조우
혈도 혈중환상농도 13%
시연 2009 환상문학웹진 거울 중단편선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설랑 2008 환상문학웹진 거울 중단편선 눈늑대
몽몽 2007 환상문학웹진 거울 중단편선 비몽사몽
신! 2006 환상문학웹진 거울 중단편선 변신!
순백 2005 환상문학웹진 거울 중단편선
엔젤 2004 환상문학웹진 거울 중단편선
신조 신체의 조합
할티 할티노
우리부 우리가 우리의 삶을 부수기 전에 부숴야 할 것들
너머 밤 너머에
가이야 멀리 가는 이야기
의뢰인 Pena

Design & Art Effect ida
Location {황금비단} (by Amrita) - from [타로카드 22제]
Location {지구의 중력은 안녕하시니?} (by 赤魚) - from [제15종 근접조우]
Location {별} (by jxk160) - from [혈중환상농도 13%]
Location {고양이 플롯} (by 배명훈) - from [달과 아홉 냥]
Location {수이} (by 배명훈) - from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Location {우주화} (by 가는달) - from [제15종 근접조우]
Location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by 보라) - from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Location {몽중몽} (by ida) - from [변신!]

Based on Christopher Nolan’s [Inception] and directed by Pena
Mirror Entertainment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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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뇰 10.08.28 17:46 댓글 수정 삭제
    (눈물 흘리며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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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na 10.08.28 23:31 댓글 수정 삭제
    갸아아아 >_< 기쁩니다. 서하님 이다님 만세! 거울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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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밀 10.08.29 13:37 댓글 수정 삭제
    아아 정말 멋지잖아요 이건 반칙이야 ㅠㅠㅠㅠㅠ 무지 재미있고도 감동적으로 봤습니다! 이쁜 거울책들이 더더욱 사랑스러워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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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na 10.08.29 16:00 댓글 수정 삭제
    이걸 쓰느라 다시 읽으면서 느낀 감상과 일치하군요! 거울 책은 사랑스럽고도 더욱더 사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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