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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년 전만 해도 길 가는 사람을 붙들고 "드래곤이나 엘프, 오크, 하플링 같은 단어를 들어보셨습니까?"라고 물었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듣도 보도 못한 신흥 종교 전도자가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드래곤이나 몬스터 등의 영어 단어들은 어린 아이들의 과자와 문구류에도 출현할 만큼 낯익은 단어가 되었다. 어느 통신회사의 TV 광고에는 드래곤에 맞서 싸우는 용사가 등장했으며, 소설 [해리 포터] 시리즈, 영화 [반지의 제왕]의 성공은 '팬터지'를 문화현상으로서뿐 아니라 막대한 부가 가치를 지닌 산업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팬터지 소설'이라는 용어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을 [드래곤 라자]가 출판된 1998년 경으로 잡는다면, 그 이후 팬터지 소설은 양적.질적으로 여러 가지 편차를 보이며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이 팬터지 소설이라는 장르를 한 마디로 축약하라면, 그야말로 '백가쟁명'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사람 머릿수만큼의 팬터지'가 존재한다고 해도 좋다.
 [드래곤 라자], [용의 신전], [하얀 로냐프 강] 등 처음 팬터지 소설 붐을 선도한 소설들은 대부분 서양 중세라는 사회적 배경을 차용했다. 엄격한 계급 구조 속에서 '개인'에 대한 자각이 움트던 시대인 서양 중세는 공부의 중압감에 시달리면서도 스스로를 성장시켜 나가려는 청소년의 정서에 충분히 호소하는 시대 배경이었다.
 또 전 세대에 비해 풍족해진 생활 환경에서 어렸을 때부터 동화나 환상소설, 영화, 게임 등을 충분히 즐긴 세대에게 서양 중세라는 배경은 큰 위화감을 주지 않았다. 처음 팬터지 붐을 선도하던 작가들이 대학에서 인문학 분야를 전공했고, 어느 정도 작품의 문장이 안정되어 있었다는 점도 특징이다.
 [가즈나이트], [비상하는 매], [묵향] 등이 나오면서 팬터지를 대하는 독자와 작가들의 태도는 상당 부분 달라진다. 독자와 작가가 청소년 층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팬터지 소설의 비조(鼻祖)라 할 톨킨이나 서구 환상 소설들의 문학적 전통보다는 게임과 만화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각 출판사들이 경쟁적으로 팬터지 소설시장에 뛰어들면서, 시장을 확대하기 위하여 이런 특성은 은연중에 장려되기도 했다.
 여기서 한국 장르 팬터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작가층이 어려지고 독자와 작가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동시에 출판의 잣대가 느슨해지면서, 팬터지 소설 작가와 독자들은 글을 '만만한 것', '갖고 놀아도 되는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전통적인 문학수업으로서의 글쓰기가 '혼을 담아내는 외로운 작업'이고 '뼈를 깎는 고행'이었다면, 이제 습작은 통신이나 인터넷 상에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즐거운 유희로 변한다.
 1999년 경 어느 문학평론가가 '팬터지 소설에는 문화상품으로서의 미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갈했을 때 팬터지 소설 독자들은 분노했다. 하지만 이제 새로 팬터지 소설에 입문한 청소년 독자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문화상품이 어디가 어때서? 재미만 있으면 그만이잖아?'하고 되묻는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수많은 '형식 실험'들이 어쩌면 무책임하게, 하지만 즐겁게 이루어진다. 작가가 청소년 층으로 이동하면서 청소년의 욕망을 보다 적나라하게 담아내는 소재가 쓰인다. 현실에서는 공부도 못하고 변변찮은 청소년이 어느 낯선 세계에 가서 영웅이 되는 것은 어찌 아니 즐거우랴. 이런 소재가 주로 쓰인 글들이 이른바 '이세계물(異世界物)'이라고 불리게 된다. 팬터지는 사춘기 소녀들이 성적 욕망을 환상적.우회적으로 충족시키는 미남들의 동성애 이야기인 '야오이'와 아슬아슬하게 결합하기도 한다. 청소년 자신의 세계를 반영하는 '학원물'도 상당히 많이 창작되었다. 단, 그 학원에서는 지겨운 공부 대신 검술을 배우거나 [해리 포터] 시리즈처럼 마법을 배운다.
 원래 무협소설로 출발했던 [묵향]의 주인공은 중원에서 팬터지 세계로 이동하면서 이른바 '퓨전 팬터지'라는 묘한 영역을 선보인다. [묵향]에서는 무협과 팬터지의 코드만 뒤섞인 것이 아니고, 일본 문화에 익숙한 청소년들 사이에서 통칭 '거신병기물(巨身兵機物)'로 불리는 거대 로봇 만화의 영향도 여실히 보인다.
 또, 어렸을 때부터 서구 문화와 혼종된 문화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동서양의 문화적 맥락과 상관 없이 '재미있는 것만 따오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서양 중세에 동양 닌자가 출현하면 어떨까? 성인식 이전까지는 서양 이름을, 성인식 이후에는 동양 이름을 갖는다면 어떨까? 괴이하게까지 보이는 이런 상상력은 한 반에 열 몇 명씩 외국으로 어학 연수를 떠나는 청소년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런 흐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추어 작가와 독자들은 '동양적 팬터지'의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가 하면, 고급스러운 환상소설을 바라는 독자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팬터지'의 흐름을 톨킨이나 미하엘 엔데, 보르헤스나 마르께스 등의 중남미 마술적 리얼리즘, 멀게는 신화와 영웅 서사시로 잡기도 한다. 이들의 특징은 시장의 법칙에 휘둘리지 않고 나름대로 '장르 문학'에 대한 자의식과 고민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와 독자의 거리가 가까운 팬터지 소설 시장의 특성상 이런 여러 가지 갈래의 지향들은 시장에서 각자 자기 몫을 찾는다.
 이 모든 흐름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각자 자기 길을 가고 있는 모습은 혼란스러우면서도 재미있다. 처음 팬터지 소설 붐을 일구어낸 작가들은 아직도 건재하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청소년 독자들이 소설은 재미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기본적인 문장조차 되어 있지 않은 작품도 대여점에서 빌려 읽는다. 다른 한편에서는 샐먼 루시디나 오에 겐자부로 같은 작가의 작품들을 팬터지이고 SF라고 생각하면서 차곡차곡 사모은다. 한때 운동권 학생들의 입문서였던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작품은 이들에게는 훌륭한 팬터지 소설이다.
 팬터지 소설이 젊은 층의 독자들에게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틀'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드래곤부터 처녀 귀신까지 수많은 환상적 소재들이 쓰이고 있으며, 팬터지 소설은 문화 상품일 수도 있고 문학일 수도 있다. 팬터지 소설에 정통적인 길이란 없다.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팬터지 소설은 누구나 들어설 수 있는 매력적인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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