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그리고 문어가 나타났다

환상문학웹진 거울 대표중단편선 Vol.17 작가 후기와 발췌문

※ 게재를 원하지 않은 작가님의 후기는 제외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octopus.jpg

 

달콤한 죄를 지었습니다 - 남세오

“그렇게 멋진 걸 갖고 싶으면 그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면 되죠. 누가 말리나. 그런데 지금 봐요. 진짜 엄청난 걸 누리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요? 그 사람들은 오히려 편안하게 그걸 얻어요. 지금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게 필요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을 디저트도 못 먹게 억지로 막으면서 하루에 여섯 시간씩 꼬박꼬박 스트레스 받으며 일하게 만들고 있는 거라고요.” (36~37쪽)

뜬금없을지 모르지만 기본소득을 생각하며 이 글을 썼습니다.
인간이 기술을 개발하는 이유는 더 적은 노동으로 더 나은 삶을 누리기 위해서겠죠. 우리는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사치스러운 물질 문화를 누리고 있지만 여전히 그걸 얻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며 소모하고 있지 않나요.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느껴져요.
물론 누군가는 일을 해야겠죠. 하지만 더 많은 걸 갖고 싶은 사람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당연한 원칙은 지켜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끔은 우리가 그냥 불필요한 노동으로 서로를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피라미드 같은 걸 지으면서요. 멀쩡한 음식과 옷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대신 땅에 묻어 버리죠. 오로지 파괴가 목적인 물건들을 공들여 만들기도 하고요.
저는 인간이 쓸데없이 근면한 동물이라고 믿는 편입니다. 강제 노동에서 해방시키면 남는 시간에 알아서 쓸모있는 일을 할 인간들이에요. 그것도 즐겁게요. 그럼 그 혜택이 또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겠죠. 그런 세상을 꿈꿔봅니다.
감미료 혁명을 일으키는 소설 속 인물들이 하루에 여섯 시간씩 일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눈치채셨나요? 네. 저는 그것도 많다고 생각해요. 주 4일 하루 네 시간 정도면 일단은 괜찮을 것 같네요.


거인을 지배하는 법 - 지현상

“그들도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는가?”
“아니요. 다행히 아닙니다.” 기우가 대답했다. “다만 우리 행성의 존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 행성은 너무 작기 때문에, 신경 써서 조사해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이죠. 우리 행성은… 그들의 기준으론 소도시 하나 크기나 될까 말까 한 작은 돌덩어리일 뿐입니다.” (46쪽)

이 소설의 초고를 썼을 때가 아마 2018년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초고는 지금과는 아주아주 많이 다른 글이었고요. 그 당시 우연히 접한 ‘제3의 물결’이라는 사회 실험에 대해 꽂혀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쓰고 싶었거든요.
간략하게 요약해보자면 ‘제3의 물결’은 과거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홀로코스트를 설명하기 위해 독재 체제를 체험시켜보기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이 ‘체험’이 진행되는 동안 학생들은 점점 선생님들이 만든 규율에 억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거의 충성을 바치며 스스로는 물론 서로를 감시하며 통제하게 되었다고 하죠.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이 있으시다면 검색을 추천해 드립니다. 자세하게 설명된 자료도 꽤 있고, 이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들도 있으니까요.
어쨌든 당시에는 이 실험에서 보여준 체계의 파급력과 군중심리를 소설에 녹여내고 싶었나 봅니다. 너무 뻔하지 않게 살짝 비틀어서, 타 행성을 점령하는 방법으로 말이죠. 그런데 웬걸, 그렇게 써놓고 나니 이도 저도 아닌 글이 되어 버렸습니다. 설명은 너무 많고, 재미는 없고, 이해하기 힘든 글이었어요. 단편으로 소화하기에는 해야 할 얘기가 너무 많은 소재였거나 제 필력이 부족한 탓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원고를 다시 봤는데…… 음, 위에 구차하게 줄줄 써놓은 그 부분들만 싹 걷어내면 왠지 조금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걷어내 보니 썩 나쁘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렇게 한껏 무난해진 이 이야기는 SF를 좋아하시고 많이 접하신 분들에게는 어찌 보면 평이하고 식상해 보일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익숙하고 단순한 소재라 해도 읽는 재미와 생각할만한 무언가를 던져 줄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 역할을 제대로 소화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나름 재미있게 쓴다고 처음부터 복선들도 좀 숨겨서 넣어놨는데, 아무도 못 알아채신다면 사실 좀 서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글을 읽는 동안 즐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에는 더 신선하거나, 더 잘 읽히거나, 더 생각할 거리가 많거나, 더 재미난 이야기로 찾아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께서 쓰고 읽는 모든 순간에 영감이 번뜩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실버 해머 - 엄정진

유전자 교정으로 태어난 첫 세대의 별칭 희망둥이. 전란을 안정시키고 세계를 통합한 GOU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3대 정책 중의 하나였다. 전자두뇌 임플란트를 포함한 인체개조와 맞춤DNA로 만드는 신인류는 국가와 민족 개념을 없애고 인류를 통합하며 우주환경에 적응시키기 위한 GOU의 미래 정책이었다. (118쪽)

작가에게는 독자의 평가에 관계없이 자신이 마음에 들어 하는 소설이 있기 마련이죠. 제게는 이 단편이 그렇습니다. 저만 아는 소재나 설정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목은 비틀스의 곡 〈Maxwell's Silver Hammer〉에서 따왔으며 이 소설의 테마도 가사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 외에도 등장인물 이름을 부산 지하철 역명에서 따왔다든지, 성별이나 인종 같은 요소를 고의로 감춘다든지(작가의 의도는 백합SF이긴 합니다), 저의 이전 작품에서 쓴 명칭을 등장시키는 등 제 취미나 취향을 많이 반영했습니다.
고전SF의 오마주도 있는데, BLIT가 무엇의 약자인지 원래 원고에는 표기했는데 출판사에서 이해가 안 간다고 지적하더니 결국 지웠네요. BLIT는 'BLIT is Langford’s Image Terror'의 약자이며 GNU, PHP와 같은 재귀약어입니다. 나름대로 재치 있는 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안 먹힌 모양이네요…….


당신의 모든 것 - 클레이븐

어안이 벙벙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바닥을 번져나가는 검붉은 액체가 내가 신고 있던 운동화 밑창에 고였다. 뒤늦게 발을 뒤로 빼자, 붉은 액체가 번졌다. 문틈으로 비친 노을 빛이 얇게 번진 핏물 위에서 반짝거렸다. (149쪽)

이 작품을 구상한 것은 코로나가 한창 맹위를 떨치던 때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무너지거나, 상실하던 시기였죠. 이런 어두운 시기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염병을 소재로 단편을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전염병을 치료하는 의사의 이야기를 써보다가 너무 1차원적이어서 폐기했죠. 그러다 전염병 속에서 살아가는 로봇 이야기를 고독이란 주제로 함께 풀어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로봇 이야기는 지금 쓰고 있는 다른 작품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염병 파트는 따로 떨어져 나와 이번에 수록된 단편 작품으로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작품을 쓸 때 항상 시각적인 측면을 깊이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좋아하는 장면을 오마주 하기도 하죠. 이번 작품에도 몇 가지 오마주를 넣었습니다. 초반부 편의점의 풍경은 소일 렌트 그린에 등장한 슈퍼마켓 장면의 오마주입니다. 그리고 긴 터널을 지나는 장면은 기생충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아무튼, 이제 2022년이네요. 이 후기를 읽으시는 모든 분들에게 절대 무적의 행운이 함께하길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신강탈자 - 엄길윤

나는 방관자였다. 또다시 같은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도 외부에서 온 정보들을 받아들이기만 했다. 내 머릿속 어디에도 내 생각은 없었다.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지 않았다. (199~200쪽)

요즘처럼 심심할 틈 하나 없는 시기가 역사 속에서 존재했을까요? 세상엔 온갖 정보와 놀거리가 넘쳐납니다. 스마트폰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영화, 드라마, 게임, 책, SNS를 통한 다른 사람과의 교류까지 가능하죠. 심지어 네다섯 살밖에 안 된 아이들에게도 스마트폰을 쥐여줍니다. 아이들이 스마트폰만 가지고 있으면 거기에 집중하느라 조용해지거든요. 스마트폰이라는 작은 기기 안에 세상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타고난 겁쟁이인 저는 이런 상황이 두려웠습니다. 처음에는 무기력증에 허덕이다 멍하니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했죠. 요즘 세상엔 참 별의별 것들이 다 있구나! 괜히 투덜거리게 되더군요. 얼마 전에 지인이 추천해 준 드라마도 아직 손도 못 댄 상황이었어요. 여기저기 볼 게 너무 많아서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습니다. 할 것도 많고 볼 것도 너무 많았어요. 그러다 문득,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뜬금없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요즘에야말로 너무 많은 정보가 내 안으로 흘러들어 오는구나 이대로 놔둬도 괜찮은 걸까?
맞습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죠. 하찮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런 두려움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됐습니다. 그럼 바깥에서 들어오는 온갖 정보로 머릿속이 꽉 차면 과연 나는 어디에 존재하게 되는 걸까? 테세우스의 배 역설처럼 사방에서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다 보면 결국은 어떤 게 내가 한 생각이고 어떤 게 타인의 생각인지 구분할 수 없지 않을까? 애초에 지금의 내 생각이라는 것도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한 게 아닐까? 나라는 존재가 진짜 있기는 한 걸까? 어쩌면 해리성 정체 장애란 병도 이런 식으로 탄생한 게 아닐까? 이런 망상을 거듭하다 보니 정신을 빼앗는 존재의 정의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정신강탈자의 토대가 되었고요. 참 근본 없죠?
사실 이런 근본 없는 두려움이야말로 저의 커다란 글쓰기 원동력입니다. 때론 잘못 판단하고 사실과 다른 엉뚱한 걸 진실이라고 믿음으로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때도 있고요. 그게 글쓰기의 묘미가 아닐까요? 진실과 긍정이 무조건 선이 아니듯, 망상과 착각 또한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가치는 아닐 겁니다. 이제는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은 게 아니라 어쩌면 나보다 훨씬 더 많은 다른 어떤 것이 들어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정하세요. 요즘은 그게 가능한 시대잖아요.


원점으로 돌아가 - 전혜진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이기적이야. 아니, 여자애가 부족해서 남자애들이 짝도 부족하고 그런데. 대체 왜 여자애들을 안 낳고 그래.” (212쪽, 주인공의 아버지의 대사)
"요즘 뉴스도 안 봤어? 지금 출산율이 역대 최저라잖아. 여자들이 애를 안 낳아서 지금 사회 문제라는데. 누나는 책임감도 안 들어?" (221쪽, 주인공의 남동생 상욱의 대사)

저 두 문장은 이 이야기에서 서로 쌍을 이루는 문장이자, 살면서 현실에서 들어본 말들이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말한 저 대사는, 과거 1990년대 초, 우리 집에 왔던 친척들의 말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들은 아들을 낳아야 한다며, 딸은 낳아봤자 남의 집 사람이라고 말하던 그 입들로, 요즘 여자애가 부족해서 남자애들이 짝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우리 집안 남자애들은 다들 잘 났으니까 여자가 줄을 설 거라고, 불과 국민학생이던 내 소견에도 말같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아들만 셋인 사람들도 있었다.)
천만 다행히도 남동생에게서 두 번째 문장과 같은 개소리를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두 번째 문장은 서로 다른 여러 곳에서 듣고 또 읽었다. 아마도 그런 말을 하던 놈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누나나 여동생이, "남의 집 사람이 될" 딸은 "낳아봐야 소용없"으니 "지워야"하고 아들은 "낳아야"한다는 논리에 휘말려 태어나지도 못하고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내가 아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은 어릴 때 언니나 여동생이 낙태당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지만, 그 말을 자신에게 한 사람들이 오빠나 남동생에게는 결코 그 말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 우월한 왕자님의 인생에, 다른 사람의 죽음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은 알고 있을까. 얼마나 많은, 네가 만나지 못한 누나와 여동생들이 너 하나를 낳기 위해 살해당했는지. 그걸 알면 조금은 달라질까. 가끔 생각하곤 한다.


고쿠라에서 J를 - 고타래

그래서 사진 정리 같은 지루한 일은 늘 J 몫이었고, 스튜디오 페인트칠도 같은 맥락으로 J가 떠맡게 됐을 것이다. 하지만 고태원은 그런 J가 좋았다. 둘이 있으면 상대를 슬프게 할 정도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 J가 좋았다. (235쪽)

단골 술집이 있었습니다. 그 술집에 가면, 항상 그 직원은 저와 술을 마셨습니다. 제가 갔을 때 다른 손님들과 술을 마시고 있더라도, 그 직원은 늘 제가 있는 곳으로 와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직원한테는 당시에 제가 편의점 한다는 얘기도 했고요. 그러다 제가 그 술집에 한동안 안 간 적이 있었습니다.
밤 10시 정도 됐으려나. 서너 살 된 남자아이 손을 잡고 편의점 안으로 어떤 여자가 들어왔습니다. 저보고 잘 지냈냐고 인사를 하는데, 한 5초 동안 그 여자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누군지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는데, 여자가 살짝 미소를 짓더니 남자아이 손을 잡고 편의점을 나갔습니다. ‘뭐지!’ 그런 생각뿐이었어요. 곧이어 20대 남자 세 명이 편의점에 들어와 음료수를 고르고 있었는데, 그때 불쑥 떠올랐습니다. 그 술집에 가면 늘 저와 같이 술을 마셔주던 직원. 그래서 서둘러 편의점을 나가 왼쪽 오른쪽으로 막 뛰어다녔습니다. 여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밤 11시에 야간 아르바이트생과 교대 후 오랜만에 그 단골 술집에 가보았습니다. 물론 술집은 어느새 피부미용실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 직원은 참 말이 없었습니다. 늘 제가 있는 곳으로 와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습니다.
그 직원을 알아보지 못한 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오래 전 일인데도, 아직도 가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위화 - 최지혜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예전 생부터, 그전의 전부터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어.나는 그대의 모든 관계와 모든 감정을 갖고 싶어서 죄를 지었고, 그대와 함께 이 한숨 같은 세상에 떨어졌지. 그대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몰라도 항상 날 받아주고 곁에 두어주었고 우리는 떨어진 적이 없어. 이번 생에도 그리 해줘. (245쪽)

안예은 님의 노래를 가지고 글을 쓰자는 프로젝트가 나오자마자 환호하며 참가했건만, 이 프로젝트는 생각보다 힘든 기획이었다. 안예은 님의 노래엔 이미 들어간 서사가 있는데 그걸 그대로 써서는 안 되기 때문이랄까. 듣다 보면 "완벽한 노래가 있는데 뭐하러 여기에 글을 덧붙이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꽤 방해되는 사념이었다...... 위화는 '사랑이라는 말로는 담지 못할' 이라는 첫 구절부터 굉장히 난관이었는데, 결국은 그래서 생을 거듭하는 마음, 모든 걸 얻고자 감수하는 생을 쓰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그이'가 이번 생에서 사랑한 황제는 내 꿈에 나온 인물로, 아이유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홍연 - 구한나리

한 번도 틀린 적 없었다. 오라비의 현이 만드는 울림을 하영은 언제나 구별할 줄 알았다.
오라비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것이라고, 하나도 어렵지 않다고 그렇게 말해왔다. 어디에 있든 자신은 오라비를 찾을 수 있노라고. (289쪽)

2020년 독자우수단편 심사단 단톡방은, 가끔 자신이 앓고 있는 것들을 털어놓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이서영작가님이 가수 안예은님의 노래 몇 개를 이야기했고, 마침 멜X 플레이리스트에 안예은 님 리스트가 따로 존재하던 저는 냉큼 동조했지요.
아니 세상에 이렇게 듣는 것만으로 막 이야기가 솟구치는 노래라니. 함께 마구마구 타오르다가, 이런 엔솔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로 흘러갔어요.
붉은 실로 이어진 인연을 노래하는 홍연은, 어쩌면 그렇게 구슬프고 슬프고 절절하던지. 그 노래에서 태어난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는데, 저는 한참 끙끙거렸지요. 연애 이야기를 써도 연애 이야기가 아니어서 좋다는 평을 듣곤 했던 사람이어서, 아슬아슬한 연애 이야기가 아닌 절대적으로 이어진 믿음의 인연의 이야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붉은 실이 두 사람을 이어주고 있는 것처럼 현악기의 현으로 이어진 인연은 결국 현을 연주하는 소년과,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소녀의 이야기가 됐어요. 소녀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끌어 나갔기 때문에 소리가 없는 세상을 어떻게 묘사하느냐에 신경을 썼는데 잘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안예은 님의 노래를 들으면서 쓴 다른 글이 거울에 몇 편 더 있는데, 언젠가는 잘 묶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좋은 노래에 폐가 되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통곡왕 - 곽재식

저는 깨달음을 얻으면 깨달음 덕분에 편안해질 것이라고 막연히 착각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깨달음을 얻으면 편안해질 까닭이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320쪽)

고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이상한 우화 같은 이야기들을 짤막짤막하게 올리는 것을 가끔씩 해오고 있습니다. 2020년 서점 알라딘의 17주년 기념 소설집 열일곱에 참여하면서 소설을 하나 썼던 게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가끔씩 한 편, 두 편 이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웹진 거울에서 아마 제일 먼저 찾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댓글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25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