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이번 호에서는 정세랑 작가님의 배턴을 받은 전혜진 작가님을 인터뷰하였습니다. 
전혜진 작가님은 대원씨아이 이슈노벨 공모전에서 <월하의 동사무소>로 데뷔하신 이래로 만화스토리에서부터 각종 장르소설에 이르기까지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그야말로 종횡무진 창작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창작 에너지가 넘치시는 전혜진 작가님께 던져본 질문입니다.

 
 
 

오랫동안 작가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전혜진 작가님에 대한 여러 정보를 가진 독자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 인터뷰로 처음 작가님을 접하는 독자를 위해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전혜진
 

라이트노벨 “월하의 동사무소”로 데뷔했고, 만화 “레이디 디텍티브”와 “리베르떼”, 웹툰 “펌잇”을 작업해 왔습니다. SF 단편들을 쓰고 있는데, 기회가 닿으면 좀 큰 것을 작업해 보고 싶기도 하고요. 재작년쯤까지는 “만화도 작업하는 소설가”라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요즘은 만화가로서의 입장과 소설가로서의 입장을 어느 정도 분리하고 있습니다. 요즘의 고민은 “그래도 10년쯤 글을 썼는데, 파놓은 우물이 많다 보니 어느 우물 하나 시원하진 않더라는 것”입니다.

 
 
 

장르문학가로서, 웹툰 스토리 작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한편으로 직장생활까지 하시면서 에너제틱한 삶을 살고 계십니다. 최근엔 따님 출산과 함께 육아까지 더해져서 창작을 할 시간이 있으실까 싶으실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시죠. 한계가 어딘지 알 수 없는 작가님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하시나요?

 
전혜진
 

약한 조울증을 앓고 있는데, 1년에 두세 달 정도 조증으로 무게추가 기울어졌을 때 계약을 많이 해 버립니다. 그리고 남은 9~10개월 동안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그 미친 자(者)가 왜 또 이렇게 계약을 많이 했어” 하면서 글을 쓰고 있지요. 에너지에 한계가 없는 게 아니라…… 거의 하이드가 탕진한 카드 값을 갚느라 뼈 빠지게 야근하는 지킬 같은 기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가 생기기 전 후가 많이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창작 활동과 관련해서 작가님에게 생긴 변화가 있으신지요? 있으시다면 좋은 변화는 무엇이고 나쁜 변화는 무엇이었나요?

 
전혜진
 

아이가 생겼어도 저 스스로는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놀라울 정도로요. 다만 물질적인 면이든 정신적인 면이든 무언가를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질적으로 팔리든 안 팔리든 상관없이, 저작권은 작가가 죽고도 70년 동안 살아있죠. 예전의 저는 “인생은 유한하고 나는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늘 마음 구석에 두는 한편으로, 제가 죽으면 내가 평생 쓰고 만든 것의 가치도 모르는 사람이 그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늘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자식이 태어나니까, 내게 소중했던 무언가를, 이해하진 못해도 그게 소중했다는 것 정도는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게 평생 불안정했던 마음 일부를 조금 안정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체적으로는 많은 노화 현상과, 허리와 손목의 통증과 수면 부족이 생겼지요. 작가님들,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님들. 출산을 하시면 산후조리원에서 키보드 두드리지 말고 누워서 주무세요 제발. 그때 원고 하다가 손목 인대가 늘어나서 지금도 손목 통증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크흑.

 
 
 

다양한 장르물을 창작하고 계시는데, 작가님이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무엇인가요? 예컨대, 창작은 하지 않지만 사실 내 영혼은 이 장르에 매혹된다…같은.

 
전혜진
 

쓸 때 즐거운 것은 미스터리, 스릴러 쪽이었고 읽을 때 즐거운 것은 SF 쪽이었습니다. 생각을 계속하게 되는 것, 그리고 조금이라도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는 것들이 좋아요.
하지만 편집자님 말씀으로는 둘 다 한국에서는 돈이 되진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로맨스를 쓰라고 늘 말씀하시는데 그런 건 타고 나야 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로맨스를 결합하면 의외로 쓸 수 있는 폭이 넓어지니까요. SF든 사극이든, 로맨스가 들어가면 어째서인지 계약하기 쉬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소설뿐 아니라 만화도 작업하고 계신데, 혹시 작업하실 때 방법적인 측면이나 미학적인 측면이 크게 달라지기도 하는지 궁금합니다. (이 질문은 정세랑 작가님의 질문입니다.)

 
전혜진
 

머릿속에서 이건 만화용이다, 소설용이다가 좀 나뉘어 있어요. 소설용으로 생각한 스토리를 만화로 만들거나 만화용으로 떠올린 스토리를 소설로 쓸 때는 머릿속에서 일종의 번역작업이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은 대사가 좀 더 건조해지더라고요.
만화용의 경우에는, 이게 출판물인지, 스마트폰으로 보고 스크롤을 하게 되는지 먼저 생각을 해요. 그에 따라서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컷의 숫자라든가 크기라든가, 그런 환경이 달라지니까. 그리고는 머릿속에 프레임을 세워놓고 이야기를 집어넣어 돌립니다. 만화를 많이 읽은 만큼, 어느 정도 연출이 되어서 떠오르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런 것들을 받아적듯이 러프하게 그리고, 그걸 편집부와 그림작가님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다시 다듬어서 그립니다. 다른 이야기인데 콘티 작업을 하면서 의외로 그림이 꽤 늘었어요. 사람을 그리는 솜씨가 는 것은 아닌데, 배경의 각도나 소실점 같은 것을 어느 정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원래 글을 쓰던 사람이라, 컷 안에서 돌릴 수 있는 공간감이 조금 빠듯하다는 느낌은 해요.
다른 이야기인데, 영화나 드라마의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느냐는 문의를 받은 적이 있어요. 거절했는데, 프레임이나 카메라 워크가 제가 가진 공간감과는 다르기 때문에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까지 온/오프라인으로 출간한 작가님의 단/장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 무엇인지 제목과 간략한 내용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 작품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전혜진
 

현재는 웹툰 “펌잇(PermIT!!!)”입니다. 일단 얼마 전에 300화까지 왔다 보니, 오래 한 만큼 애들에게 정이 많이 들었고요. 그 이전에, 자리를 잡을 때 까지 길을 멀리 돌아왔던 이야기였던 것도 있고요.
펌잇은 “공대 개그 4컷만화”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그 얼개는 나우누리 만스동에서 짧게 연재했던, 대학교 컴퓨터부가 배경인 개그물에서 왔죠. 2009년에 월하의 동사무소를 마무리한 다음, 이 이야기로 만화를 만들 뻔 했어요. “하이바맨”이라는 만화였고, 회사 사정으로 초반 5화 정도만 연재하고 엎어졌고, 그 다음에는 이 이야기로 소설을 내자는 신생 출판사의 컨택을 받았는데, 알고보니 2차 저작에 대해 원 회사(원래 만화였으니까요)와 이야기도 하지 않고 진행하는, 문제가 많은 회사였거든요. 그때 이 회사가 저지른 짓을 수습하느라 당시 붓던 적금통장을 하나 깼지만, 그렇게라도 수습하고 제 인생에서 치워버려서 다행이었어요. 그리고 몇 년 뒤에 재담미디어와 만났고, 이 이야기를 4컷만화로 만들자는 의논을 했어요. 제목도 캐릭터도 배경도 달라져서, 이건 원래 “하이바맨”과는 달라졌지만 그 뿌리는 같죠. 잘려나간 나무의 뿌리쪽에 새로 싹이 터서 자라는 것 같았고, 다행히 그 나무는 크고 웅장하진 않아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같이 작업하는 이수현 작가님께 감사할 일이죠.

 
 
 

언제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셨고, 그 계기는 무엇인가요? 처음으로 창작한 소설이 어떤 것이었는지 내용 소개 부탁드립니다.

 
전혜진
 

초등학교 5, 6학년 때 연습장에 소설을 썼는데, 주로 베르사이유의 장미하고 셜록 홈즈의 팬픽이었습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팬픽 쪽은 놀랍게도 제로델이 주인공이었고, 셜록 홈즈의 팬픽은 20대의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직장 상사인 귀족 가의 아가씨와 함께 마치 만화 “쁘띠 안제”처럼 영국 사교계의 보석 도난이나 그런 걸 해결하는 이야기였는데, 추리는 영 볼 게 없었지만 그 뼈대는 지금 수학동아에서 연재하는 “아리아드네의 검”에 그대로 반영이 되었어요.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바람의 나라 팬픽도 썼고, 그 무렵 처음으로 팬픽이 아닌 소설을 썼는데, 경인선 지하철에서 사람 손목이 든 신발 상자가 발견되고, 여중생 탐정이 그걸 추적하는 이야기였어요. 고등학교 때는 처음으로 a4용지 150매가 넘는 소설을 완결지었고, 연습장 만화도 좀 그렸고요. 여성 과학자와 로봇 파일럿인 딸이 나오는 이야기를 그때 만들었던 것 같네요. PC통신 활동을 시작하고 나우누리 만화스토리 동호회에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올리면서 발전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은 무엇인가요?

 
전혜진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작가의 수지”입니다. 사실 책은 계속 꾸준히 읽어대고 있고, 어떤 것은 마음에 남고 어떤 것은 머리에 남는 것인데, 이 책은 연초에 읽고도 수시로(새 수건을 담아두는 상자 근처에 두고) 오가며 꺼내 읽으며 더러는 낄낄 웃기도 하고, 더러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앉아서 전업 작가가 되려면 얼마를 벌어야 하는지에 대해 계산하기도 해요. 물론 이 책의 기준은 모리 히로시니까, 비교하고 있으면 우울해 지지만요.

 
 
 

2017년이 끝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이것만은 꼭 이루고 싶다.’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전혜진
 

일단 올해 저지른 계약들을 어떻게든 무사히 끝낼 수 있기를. 그리고 도울 수 있는 사람을 돕고,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갈 수 있기를.

 
 
 

거울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전혜진
 

어떤 것들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중요하고 고마운데, 거울이 그런 존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속가능한 형태로 계속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요. 지금은 1년에 몇 편 단편을 올리는 것 외에는 그다지 기여하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는 좀 더 이런저런 기여를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아직은…… 당분간은 힘들겠지만요.
사실 다른 이야기인데, 인권 문제나 페미니즘 문제가 거론될 때, 제가 느슨하게 속한 다른 그룹들에서는 “그래도 우리 민족이”, “그래도 여자가 어디”같은 말을 하시는 분들도 아직 남아있고, 다른 여성 작가에게 “메갈이다 메갈”하고 조롱하는 젊은 남자 작가가 있는 그룹도 있어요. 거울은, 그런 분들이 없죠. SF쪽에 관심을 가진 작가들이 많고, 여성 작가들이 많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런 쪽에 발을 좀 담그고 있구나, 하는 게 위로가 많이 됩니다.

 
 
 

‘이 필진이 궁금하다!’ 다음 인터뷰이가 될 필진을 지목해 주세요.

 
전혜진
 

거울 최고의 생산력을 자랑하시는 곽재식 작가님의 인터뷰를 가장 보고 싶지만, 일단 이분은 제가 아니더라도 궁금해하실 분들이 많이 계실 테니까, 그럼 그 다음으로…… 손지상 작가님의 인터뷰를 보고 싶습니다.

 

시간의 잔상 » 해망재(전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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