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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합평회 [합평작] 부른다

2008.06.17 17:3906.17

부른다

                                                                                                 이승현


11은 새 삶

호마와 만난 자가 호마와 하나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치 생명이 나고 자라고 쇠약해져 스러지는 것처럼.
그리하여 더도 덜도 아닌 꼭 그 자신만큼의 온전함으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0.5는 0.5가 아니라도 상관없는 것

AA출판사, 마음 루게릭 투고, 무응답. BB출판사에 투고, 무응답. CC출판사에 투고, 응답, 거절. DD, EE, FF출판사 무응답. GG출판사에 투고, 수락, 인세는 칠 퍼센트, 그중 절반은 책으로. 책상 위에 흩어져 있는 정체 모를 고지서들. 세 자리, 네 자리 혹은 다섯 자리 수의 은행 잔고들. 최소 여섯 자리 정도는 돼줘야, 그래야 밥은 먹고 다니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본다. 간유리 뒤, 베란다에 사람의 형상이 어른거리는 듯하다. 사실 저건 오늘 낮에 빨아 널은 옷들이다. 그러나 세상과 내 의식을 뒤덮는 밤은 저기에 옷 대신 다른 뭔가가 걸려있다고 상상하게 만든다.
밤, 어둠. 밤에 드러나는 것들은 숨겨진 것들이다. 숨겨진 것, 나의 책은 숨겨진 것이다. 그 숨겨진 것 때문에 나는 책을 내면서도 고통받는다. 팔리지 않으므로 받는 그 초라함은 금세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으로 다가온다. 그마저도 받아주지 않을지 모른다는 암울한 미래의 전망. 내가 아닌,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의 이름을 채색하는 것도 숨겨진 것이다. 그 채색은 나의 피를 짜내, 나의 뼈를 갈아. 덕분에 밥은 먹고사는 것이지.
째깍이는 소리. 목이 반대로 돌면서 정면의 모니터를 지나 오른쪽 책장의 한 부분에 고정된다. 탁상시계 소리는 뭔가의 발걸음 소리처럼 느껴진다. 다섯 평의 이 공간에서 그 발소리는 어디론가 퍼져나갈 틈도 없이 나의 귓속으로 곧장 들어온다. 그리하여 나는 현재 진행중인 마감시한 없는 작업을 떠올린다. 과연 언제까지 다가올 소리인가? 고개는 다시 반대로 돌다가 중간쯤에서 멈춘다. 백색의 화면. 키보드 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며 조근조근 자판을 긁고 있는 손. 저녁, 저분질을 하고 네 시간째 긁적이는 손가락. 감질나게 초조한 느낌. 세상의 수많은 글쟁이들이 겪는 아지랑이 같은 마음의 병. 이 아지랑이는 가슴에서 피어오르고 올라 머리에 이른다. 그래서 생각을 흐리고 눈앞을 흐리고. 멈추지 않고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나로 하여금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한다. 감정은 가슴으로 계속 얽혀들고 사무치는데 머릿속에선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이제 손가락은 경련하듯 자판을 긁어댄다. 그 소리는 달그락, 마치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와 매우 흡사하게 들린다. 그러나 소리는 소리일 뿐. 그래서 백색의 화면. 땀이 난다. 나는 자판에서 손을 떼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본다. 주먹을 쥐고 허벅지를 퍽퍽 쳐보기도 한다. 의자 위로 책상다리를 했다 폈다를 반복한다. 무릎을 달달 떨어도 본다. 무릎으로 책상을 탁탁 쳐보기도 하고 양발을 좌우로 흔들며 툭툭 건드려보기도 한다. 그러나 시계는 계속 걷고, 그래서 나는 살아야 하지만, 그래도 조근거리는 손가락.
왼쪽에서 또 뭔가가 어른거린다. 내 고개가 급하게 돌아가며 간유리로 가려진 공간을 꿰뚫어 보려고 노력한다. 내 안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나에게 말한다. 넌 저 뒤를 보려면 움직여야해. 일어나 저 문을 열고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 나는 무시한다. 내 얼굴은 정면을 보고 내 손은 다시 키보드 위로 올라간다. 그러자 다시 피어오른다. 내 가슴에서 피어나 머리까지 다다른 아지랑이가. 그것이 실체를 갖추어간다. 이것들은 순식간에 자라난다. 가슴에서 자라나 스스로를 확장한다. 확장하면서도 안으로 얽혀 들어간다. 마치 문어가 꿈틀거리며 제 다리를 잡아먹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제 다리를 잡아먹으면서도 작아지지 않는 것은 그 에너지 효율이 백 퍼센트 이상임을 말한다. 오호라, 마음이여. 그 문어는 스스로를 잡아먹으며 커져가고 먹히는 다리는 더욱 빠르게 자라난다.
나는 다시 오른쪽의 책장을 보고 시계를 확인한다. 11시 30분. 허리를 틀어 뒤를 본다. 내 등뒤를 가로막은 또 다른 책장. 몸을 더 틀어 본다. 책장 옆 움푹 들어간 공간, 현관. 현관에 놓인 반쯤 찬 100리터 짜리 쓰레기 봉투. 난 더욱 허리를 틀고 목을 틀어 현관 옆 싱크대를 본다. 쌓인 그릇들. 난 몸을 쥐어짠다. 더 이상 돌아가지 않을 만큼 쥐어짜자 현관과 마주한 화장실이 보인다. 갑자기 허리 근육에 참을 수 없는 격통이 생겨 나는 급히 긴장을 풀어 뒤틀린 몸을 바로잡는다. 반대로 돌려주어야 한다. 반대로.
저 빌어먹을 베란다. 저기에 뭔가가 있다. 아니다. 저기엔 옷뿐이다. 어딘가 창문이 조금 열렸을 게다. 바람이 불어 그러므로 저 옷가지들이 마치 살아있는 양 나풀거리는 것일 게다. 그러나 무언가가 있다. 옷 하나가 천천히 돈다. 그 옷은 천천히 돌다가 나에게 정면인지 뒷면인지 모를 모습으로 고정된다. 움직여야 한다. 움직여서 확인해야 한다. 문이 열려서 바람이 그랬음을, 그래서 문을 닫으면 결국 저기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그러나, 네 모습을 보라. 세계에 맞추지 못해 망연한 네 모습을.'
말을 했다. 저게 말을 했어.
'내게 오면 넌 더 이상 뭔가에 맞출 필요가 없어.'
숨이 차 오른다. 목이 막힌다. 저기서 나를 보고 있는 저 옷은 가슴에 NIKE라고 찍힌 검은 색 후드티. 나는 저것을 오늘 빨아 널었다. 내가 널 빨아 널었어. 그리고 바람이 널 움직이는 거야. 나는 단지 생각할 뿐인 것이지. 다리가 떨린다. 어느새 쥐어진 주먹이 내 아랫배를, 허벅지를 친다. 퍽퍽. 옷의, 옷의 팔이 올라간다. 모자가, 모자를 무언가가 썼다.
그래, 일어나자. 밖으로 나가는 거다. 불안할 땐 몸을 움직여야 한다. 어서 빨리 움직이라고 나의 다리도 안달이지 않은가? 달달달, 탁탁탁. 손도 안달인가? 쥐었다 폈다, 주먹 쥐고 허벅지를, 아랫배를 퍽퍽퍽. 빨리 일어나 움직이라고 나를 재촉하고 있는 거다. 그래, 가끔은 육체의 부탁도 들어주어야 하지. 움직이고 싶어 이렇게 안달하는 육체가 안쓰러워서라도 일어나야겠다. 나는 내 앞에 펼쳐진 백색의 화면과 관련된 모든 것을 잠재운다. 컴퓨터. 모니터. 스피커. 일어난다. 식은땀. 아지랑이. 무슨 옷을 입지? 뭔가 제대로 차려 입은 적이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체육복을 보니 한심해진다. 요 몇 달 동안 그것 말고 다른 옷은 입은 적이 없다. 베란다 옆, 조립식 옷걸이. 조립식 옷걸이를 뒤진다. 황토색 재킷, 남색면바지, 하늘색과 흰색 줄무늬의 후드티. 빨리 나가야 한다. 눈에 띤 옷들을 꺼내어 입는다. 불안과 안도가 번갈아 밀려온다. 모자를 쓰자. 검은 색 모자를 깊이 눌러 쓰자. 눈을 가리면 더욱 안심이 된다. 나는 타인을 바라보지 않는다. 눈이 마주치지 않으면 스쳐 지나는 관계들에 대해, 언제나 편안하다. 저것은 마치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팔을 활짝 벌리고 매달려 있다. 하지만 이보게, 난 나갈 거야. 열두 시.
준비는 완료되었다. 나는 차열쇠를 집어들고 집을 나선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층수를 앞서서 헤아린다. 일삼오칠구일삼오칠구일삼오칠구. 머리 꼭대기에 소름이 돋고 나는 진저리친다. 나는 그렇게 하면 엘리베이터가 빨리 올라오기라도 한다는 듯 버튼을 다시 한 번 툭, 치고 다음엔 꾹 누르곤 손을 떼지 못한다. 그러나 내 모든 노력은 헛되어 결국은 그럴만한 때가 되어서야 땡, 문이 열린다. 엘리베이터 안, 내 손은 내 의지를 이어받아 1층 버튼을 누른다. 그리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닫힘 버튼을 다다닥 소리가 날 정도로 마구 눌러댄다. 몇 초 후 꺼질 복도등, 어둠이 내 눈에 각인되지 않도록. 문이 너무 천천히 닫힌다. 등이 꺼지고 눈앞의 모든 것이 사라지자 나는 후다닥 뒷걸음질 쳐 벽에 등을 바짝 붙인다. 문 사이로 뭔가가 손을 디밀어 내 멱살을 잡을 것만 같다. 하지만 내 불안한 기대와는 달리, 문은 그냥 닫힌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자 내 입에선 한숨이 새어나온다. 아마도 안도. 구 층에서 오 층으로 내려가는 사이 우르릉하는 소리가 들리며 엘리베이터가 흔들린다. 그리하여 또다시 나의 몸엔 식은땀, 마음엔 아지랑이. 엘리베이터가 추락할 때 이곳의 나는 어떤 모양일지 상상해 본다. 혹 오랫동안 떨어진다면, 나는 어쩌면 자신을 지켜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주아주 만약의 경우로, 공포를 잊을 수 있다면. 땡, 하는 소리를 신호로 나는 그 모든 것을 나선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쉬자 입김은 마치 화염과 같은 모습으로 방사된다. 그리곤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세상의 어디론가 흩어진다. 늦은 밤의 침묵, 바람 없는 대기는 섬세한 움직임으로 내 몸을 감싸 내 청각엔 고요를, 촉각엔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그걸 생각하고 보니 아지랑이가 사라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니, 역시나 아니다. 제 다리를 잡아먹으며 커지는 문어는, 아마 어딘가에 잠시 숨어있는 것일 게다. 잠시 먹기를 멈추고, 먹물을 뿜어 주위를 흐린 다음에.
나는 차열쇠를 찰랑거리며 지하주차장으로 향한다. 그 순간 갑자기 머리 속에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덜커덕 멈춰 선다. 맞아 그렇지. 몸을 움직이려고 했었지. 미안하다 내 몸아. 나도 모르게 그만. 열쇠를 재킷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고 아파트 단지를 빠져 나온다. 정면에 보이는 넓적한 이층 건물 그리고 간판, 교통안전관리공단. 자 이제, 어디로? 당장 걷는 데서도 느껴야 하는 선택. 펼쳐진 이차선 도로가 있고 나에겐 오른쪽과 왼쪽이 있다. 앞과 뒤는 가봐야 별 볼일 없는 곳. 위아래는 갈 수 없는 곳. 나는 오른쪽으로 걷는다.
주황색 불빛, 가로등이 인도와 차도를 밝힌다. 가지만 무성한 가로수들. 발소리가 들릴 정도의 조용함. 잠깐만에 마치 구렁이 허리같이 구부러진 길이 나타나고 그 곡선을 따라 오  분 정도 더 걷자 갑자기 어두운 세상이 밝아진다. 네온사인, 눈부신 간판들. 술과 노래와 낭만의 빛들. 수많은 빛깔들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며 내는 꽃들의 흉내. 문득 불쾌해진다. 나를 벌레 취급하는군. 이것 봐 온갖 빛들. 너흰 너무 노골적이야.
나는 반대로 걷는다. 나는 빛이 없는, 그래서 어두워 보이는 쪽을 향해 걷는다. 꽃 흉내를 내는 그 빛들을 되돌아와 구렁이 허리를 타고 반대편으로 간다. 아파트를 지나자 포도밭이 펼쳐진다. 가로등의 불빛이 드넓은 포도밭의 가장자리를 슬며시 밝힌다. 포도나무를 보니 부끄러워진다. 포도나무는 자신의 앙상함을 조금의 숨김도 없이 드러낸다. 말라비틀어진 그 앙상함은 그저 자연일 뿐이다. 나는 많은 것들을 숨긴다. 초라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저 포도나무가 부럽다.
아니다. 저 포도나무는 내 걸린 것들이다. 콘크리트 기둥과 그곳에 연결된 철사 줄에 가지가 내 걸린 것이다. 사실은 내가 그랬다. 내가 포도를 먹기 때문이다. 인간이 먹지 않는 포도가 숲 속에서 자라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렇다면, 저 포도나무들은 어딘가 굵직한 나무를 휘어 감고 자라나 보석 같은 알맹이로 그 몸통을 장식했을 것이다. 혹은 그토록 가느다란 가지들이 철사 줄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 서로가 서로에게 얽히고 섥히고 기대어 자라날 것이다. 나 때문에 저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내 걸린 포도나무. 이런 인간 또한 자연인 것. 알 수 없는 죄책감. 나는 고개를 숙이고 걷는다. 포도밭이 끝나갈 무렵 슬그머니 오른쪽을 보았다. 위대한,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올려다본다. 빨간 십자가. 아하, 그렇지. 위대한 교회로군. 위장이 클 것이다. 세상엔 먹어치우고 소화시켜야 할 것이 많으니 당연히 위대해야 한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니까.



1은 마법의 램프

그렇게 계속 걷다가 돌아본 왼쪽, 골목길. 시선으로 골목길을 따라간다. 램프. 저런 곳이 있었나? 시선을 좀더 집중하여 모아본다. 멀리서 보니 마치 뱀이 똬리를 틀고 그 고개 슬쩍 빼서 하늘을 보는 것만 같다. 왠지 모르게 끌린다. 나는 골목길로 접어들어 램프를 향해 다가간다. 가까이 가서 보니 이건 뱀이 똬리를 튼 모양이 아니라, 그게 아니라, 설마 저것이 램프일까? 배불뚝이 주전자면 딱이로군. 저 안에 사는 진은 한국형임에 틀림없어. 슬슬 비비면 도깨비가 튀어나와 방망이를 휘두를지도 모르지.
문 옆에 길게 솟은 두 개의 가로등이 보인다. 만약 가로등이 두 개가 더 있었다면 이 램프는 어쩌면 호박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진짜 호박이라면 이곳의 이름은 신데렐라이지 않았을까? 아니면 마차. 호박을 따로 붙일 필요는 없겠지. 바로 호박마차가 떠오르니까. 또는 호박죽 전문점이 되었을지도 몰라. 그렇게 빛의 조화가 세상을 분장시킨다. 이 분장은 밤에만 통용되는 것. 또는 밤에야 피어나는 상상. 다시 주위의 고요를 느낀다. 램프의 간판과 입구의 가로등만이 주위를 밝힌다. 주전자 옆구리에 달린 검은 유리창 그리고 램프의 문 사이로 빛이 샌다. 새어나온 빛이 나의 눈을 끌어당겨, 그래서 나는 램프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램프, 포도밭과 주택가 사이에서 술집과 연결될 어떤 것도 없이 이 한곳만 덩그라니 있건만 의외로 사람이 많다. 불빛이 있어도 무언가로 가려진 듯한 침침함. 짙은 갈색 테이블과 같은 색의 의자들. 정면의 바만이 명료한 불빛을 보여주고 있었고 거기서 멀어질수록 불빛은 점점 힘을 잃어 창가 쪽은 마치 희미한 검은 안개가 내린 듯하다. 각 테이블마다 뿌옇고 둥근 막에 쌓인 전등이 줄을 타고 내려와 있지만 그 전등의 빛은 오직 그 테이블에서만 유효한 것 같다. 재즈음악이 조용하게 흐르고 그 흐름과 함께 흘러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소근거림처럼 들린다. 슬며시 들리는 말소리들, 슬며시 들리는 웃음소리들. 숨겨진 맛집 또는 술집 혹은 분위기를 파는 집. 이 장소 또한 밤에야 드러나는 숨겨진 것들 중 하나인지. 나는 빛이 가장 명료한 곳으로 다가가 앉는다.
"어서오세요."
메뉴판을 내미는 여자바텐더. 쌍꺼풀 없는 눈, 살짝 곱슬거리는 짧은 머리, 나비 넥타이. 난 이 정도만으로도 벌써 당신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는군. 그래. 내가 그래도 아직은 살아있는 것 같아. 욕망은 생의 증거가 되는군. 물론 컴퓨터 앞에서 한심하게 벌벌 떠는 모습도 욕망에 근거한 생의 증거이지. 근데 그런 모습으로 자꾸 증거하면 이상한 것들이 어느새 꼬여들어 있어. 음습하면서도 노골적인 것들.
근데 이런 곳에선 무엇을 먹어야 할까. 옆자리. 누군가 자리를 비웠는지 맥주병과 반쯤 찬 잔이 보인다. 나는 메뉴는 펼쳐보지도 않은 채 그냥 말한다.
맥주, 맥주 주십시오. 아무 맥주나 주십시오. 안주는 마른안주로 주세요.
바텐더는 싱긋 웃더니 맥주의 뚜껑을 따서 잔과 함께 내준다.
"얼음 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나는 모자를 벗을까 말까 망설인다. 나를 보는 사람은 없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모자를 벗는다. 바텐더. 잠깐은 괜찮아, 잠깐은. 모자를 벗자 순간 머리위로 열기가 확 피어오르는 느낌이 든다. 더웠던가? 맥주를 잔에 따르고 마신다. 맥주가 입안에 들어오자 순간 입에서 가슴, 어깨언저리까지 짜릿해진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한 컵을 들이킨 다음 또 따르고 들이킨다. 곧바로 안주가 나온다. 잘게 잘린 쥐포를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어본다. 달달함, 그을음의 향. 아, 그래 음식은 맛이 있었어. 맛이란 게 있었지. 문득 맛이란 게 생각나는군. 근데 그게 어쨌단 말인가?
바텐더는 한 남자손님에게 가서 이야기를 한다. 주고받는 대화가 자연스럽고 밝은 것으로 보아 그는 단골손님인 듯하다. 그녀가 그를 향해 짓는 미소를 보고 나는 저 미소가 습관적으로 짓는 미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나의 조건에 따라 계속 나오니, 그래 단순작업 미소라고 부르자. 재료를 넣고 버튼을 누르면 똑같은 모습으로 계속 찍혀 나오는 거지. 그렇게 만들어 파는 웃음. 웃음을 사는 사람. 만약 내가 단골이었으면 나 또한 값을 지불하고 웃음을 사겠지. 나는 웃음을 사서 마시고 가슴에서 잠깐 숙성시킨 다음 그 향취를 보태어 미소를 날리는 거야. 재밌게 그리고 즐겁게. 진심이든 아니든. 진심 또는 거짓이란 것을 알든 모르든.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즐기는 것이니까. 웃음이란 술, 대화라는 안주를, 계속 꼬리를 물고 이어질 그것들을. 어머 또 오셨군요. 당신 보려고 왔지. 당신이 만든 웃음을 마시고 당신과 함께 말을 지으려 온 거야.
어느새 맥주 한 병을 비웠다. 슬며시 취기가 오른다.
"여기 맥주 한 병 더 줘요. "
바텐더는 뚜껑을 따고 내 앞에 맥주를 내려놓고는 다시 그에게로 간다. 그에게로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무언가를 느낀다. 나는 무심결에 그것을 살핀다. 계속 살펴보니 허허, 웃음이 나온다. 씁쓸한 미소로 가라앉는 웃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맥주. 짜릿함. 나는 결코 그녀에게 말 걸지 않을 테다. 주문은 예외. 나는 맥주를 따르고 또 마신다. 그 사이 옆자리에 검은 정장의 남자가 앉는다. 나는 얼굴을 쳐다보지 않으므로 그저 남자이고 검은 옷을 입었다는 것을 알뿐이다. 이 사람은 어딜 다녀온 것일까? 내가 맥주 한 병을 비우는 동안 무얼 하다가 이제야 나타난 것일까? 대화 없이 비워지는 맥주병들. 그런 식으로 세 병을 비우고 나니 그의 얼굴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슬며시 중턱에 오른 취기에 나의 망설임은 사라져간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본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어, 하고 나직이 비명을 지른다. 등에서 식은땀이 솟아난다. 그는 이미 나를 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마주친 그의 눈. 족히 쉰은 되었을 노신사다. 젤로 고정시킨 올백의 머리는 절반 혹은 그 이상이 희끗하다. 특이한 얼굴. 이마가 넓고 턱이 뾰족한 것이 어째 사마귀가 떠오른다. 눈이 서글서글한데다 눈썹이 짙어 인상이 강렬해 보인다. 나는 취기가 올랐음에도 나를 주시하는 그 눈을 부담스럽다고 느낀다. 묘하게 미소 띤 듯한 눈. 아니다. 가만 보니 미소 짓는 건 눈이 아니라 입이다. 그 벌어진 미소사이로 살짝 내비친 이빨. 나는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한 번 마주치자 난 이미 뭔가에 빠진 듯 하다. 새삼스럽게 내가 술이 약함을 깨닫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멋대로 튀어나간다. 머리 속, 뇌에서 발생한 신호가 통제 없이 신경을 타고 폐와 목과 입으로 전달돼 말의 형태를 만들어 낸다.
"내 삶의 모든 것으로 알았던 것을 수년 째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계속 시도는 하고 있죠. 그러나 안돼요. 아니 되기는 되죠. 겉으로는. 그러나 그 알맹이는 아니에요. 내가 처음 이 일을 했을 때는 이렇지 않았어요. 꿈이 있었고 꿈 뒤로 펼쳐진 미래가 모든 것이었죠. 그러나 내가 아무리 발버둥치고 미친 듯 뛰어가도 그 미래는 다가갈 수도 다가오지도 않아요. 마치 길도 없는 무한의 황무지에 내팽개쳐진 느낌이에요. 어디로 가도 또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그저 똑같은 무한. 차라리 미로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죽을 때까지 막다른 길만을 찾아다닐지라도, 그래도 길이 있고 되돌아 나갈 입구라도 있으니까. 미로는 그래도 희망이란 게 있죠."
나는 맥주를 마시고 슬쩍 그를 본다. 이번에는 나를 보고 있지 않다. 눈을 내리깔고 흠흠 하는 웃음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모든 것인가, 나와 모든 것은 다른 것인가. 당신은 모든 것을 얻고 싶은데 방향을 잡지 못해 고통받고 나는 모든 것과 너무 가까워 오히려 잠식당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어요. 하지만 다 나인 것인데 사실 구분하기가 힘들긴 하죠."
문득 라이터의 불꽃이 떠오른다. 그 불꽃은 순간이지만 밝고 강렬했고, 그래서 어두운 마음의 공간에 잔상이 남아 어른거린다.
"뭐든지, 뭐라도 좋으니 이야길 해주십시오."
그의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나는 다시 그를 쳐다본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퍼져나가고 이어 고개를 끄덕인다.
"좋습니다. 사실 계속 그러고 싶었죠."
정중하다. 난 당신 조카뻘이야. 그렇게 예의바르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요, 기다렸지요. 조금 일찍 말을 걸어주었으면 좋았을걸. 아, 물론 이야기는 할겁니다. 다만 누군가를 조금 일찍 만나고 싶은 마음에 그런 것이죠. 그를 만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를 한 번 말해보고 싶었어요."
그냥 한 번 깜빡이고 마는 불꽃이지 않을까? 신세한탄이면, 재미없는 이야기라면, 나는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 혼자 생각하는 것 보단 나아. 아냐, 혼자 생각하는 것이 훨씬 나아.
"그냥 당신을 붙들고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당신이 나의 이야기를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 알 수가 없었죠. 그래요 그를 만난 후부터 서서히, 아주 조금씩 현실에서도 확신이 사라져가요. 주위가 아주 조금씩 변해간다면, 그 생명의 형태가 어떻게 변해 가는 지 그 누가 알 수 있을까요. 서서히 끓는 물에 죽어갈 가재 녀석처럼. 가재는 그 물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가만있다가 어느 순간 죽죠."
그는 가만히 한숨을 쉰다. 잠시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다 담배를 문다.
"뭐, 이제 나의 예감은 거의 종말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예전 같으면 당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정확히 짚어냈겠지만 지금은 모호하고 어렴풋한 느낌밖엔 없어요. 문득 깨닫고 보니 이렇게 되어 있군요. 그래서 말을 걸지 않았던 겁니다. 하지만 당신에게선 나와 동류라는 느낌도 들었고 어쨌든 아주 오랜만에 망설이게 되었군요."
라이터 불꽃이 반짝하고 잠시 후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는 꼴깍 소리를 내며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예감이라고? 나는 묻는다.
"동류?""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면 모두 이해가 될 겁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어깨를 으쓱거린다.
"당신은 표정에서 많은 것이 드러나는군요. 예감은 없어도 될 정도로."
대체 무슨 예감. 내 목에서도 맥주는 꼴깍 소리를 내며 넘어간다. 그래, 오랫동안 사람을 대하질 못했어. 나는 많은 것을 잊어버렸군.
"내가 몇 살처럼 보입니까?"
난 잠시 고민한다. 아니 고민하는 척한다.
"사십대 중반?"
그가 미소 짓다가 소리 내어 웃는다. 흐흐흐흐. 그 웃음이 내 가슴에 이상한 궤적을 남기며 사무친다. 가슴이 무거워 진다. 그 무거움이 흔들린다.
"그 표정 좀 어떻게 하세요. 나에게 예의 차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가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나에게 신분증을 보여준다. 허어. 나도 모르게 나온 탄식에 나는 내가 어쩌면 놀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이 신분증이 그의 것이 맞다면 그는 스물 여덟이다. 현재의 얼굴에서 대략 삼십여 년의 시간을 되돌려 놓은 듯한 사진. 순간의 놀람을 지나 이성이 다시 나에게로 찾아든다. 그는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 숫자들이 거짓이거나 그의 얼굴이 거짓이거나. 나는 그의 얼굴을 꼼꼼히 훑어보지만 그 얼굴이 거짓이라는 어떤 사실도 감지해내지 못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 자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건 이야기 거리야. 심장이 두근거린다. 아냐, 기대하지 말아. 지루한 신세한탄일거야. 그리고 이 사람은 거짓말쟁이야. 그래. 순간의 불꽃은 말하자면 중증 정신분열환자가 십수 년만에 한 번 하는 제대로 된 말이랄 수 있는 것이지.
"초능력을 믿나요? 아니 그만두지요. 나 자신으로서는 믿고 말고 할 이유가 없어요. 가지고 있으니까."
아하, 초능력자, 그래 좋은 직업이로군. 그럼 초능력을 너무 많이 써서 이렇게 늙어버렸나? 에너지를 고갈시켜 버린 거야? 초능력을 이용해 부를 거머쥐곤 어느 날 보니 그렇게 늙어 있는 것인가? 이젠 능력을 쓰고 싶지 않은데 어디선가 당신의 능력을 필요로 하고 당신은 도망 다니고 도망 다니면서 어쩔 수 없이 초능력을 쓰고 에너지는 점점 고갈되어 가고 그래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죽기 전에 나에게 돈을 맡기는 건 어때. 내가 참 좋은데 써줄 의향이 있는데. 나는 혼자 피식 웃고 만다.
"나는 도박삽니다."
정정, 도박사. 그래, 내가 너무 고리타분했군.
"속된말로 꾼이라고도 하죠. 나는 상대방의 패가 나보다 높은가 낮은가를 알 수 있어요. 상대방이 어떤 속임수를 쓰더라도 말이에요. 그리고 상대의 감정도 느낄 수 있죠. 배팅의 긴장감, 좋은 패의 희열. 어떻게 아는가는 설명할 수 없어요. 그건 그냥 느낌이고 예감이니까. 폐가 공기 속의 산소를 흡수하듯 나에게 그것은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냥 아는 거죠."
그래 맞아. 나도 내가 왜 사는지 설명하지 못해. 그냥 살 뿐이야. 그건 자연스러운 거지. 이걸 굳이 설명하려들면, 그건 의도하지 않은 거짓이 되는 거야.
"낮은 패가 점점 높아지는 걸 보면 어린아이들이 뻔한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귀엽기까지 해요.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나에게 속임수는 통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한 나는 당연히 많은 돈을 벌었어요. 상대의 패를 뻔히 아는데 돈을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러던 도중 난 어떤 조직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건 예정된 수순 같은 것이었죠. 돈이 되는 것은 결코 그냥 놔두지 않는 자들이니. 그들은 나의 신통한 능력을 말 그대로 믿어줄 만큼 열린 조직이었어요. 또한 세상의 모든 것을 단 하나의 통로에만 연결시키는 그런 조직이기도 했고. 사실 내가 초능력자인지 아닌지는 사실 그들에겐 별반 중요한 것도 아니었죠. 그들은 나를 써먹고 만약에 내가 어떤 식으로든 그만둘 기미를 보이면 나의 재주를 뽑아내려 할 것이고... 하지만 그건 가능하지 않고... 아마도 나의 끝은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닐 겁니다."
나는 담배를 오래 전에 끊었지만 그렇게 말하며 연기를 내뿜는 그를 보니 가슴이 공허해진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 중독.
"보통 그런 조직에 소속된 도박사들은 그저 사기꾼일 뿐이죠. 마귀나 눈귀신이라 불리는 자들. 이름이야 음산하지만 사실은 그저 렌즈카드 같은 트릭을 이용하는 자들일 뿐이에요. 하지만 요즘엔 사람들도 눈썰미가 날카로워져서 렌즈카드 같은 걸로 속이는 것도 꽤나 골치 아파졌어요. 그래서 카드에 매우 비싼 잉크로 섬세하게 작업을 해야 하고... 걸려도 골치고 안 걸려도 골치인 사기도박인 것이죠. 사람들의 눈치도 점점 날카로워지는 시기에 제가 그들의 눈에 띤 거죠. 몇몇의 신고로 영업장 두세 곳이 경찰들에게 급습 당하기도 했고... 내가 그들에게 가자 그들은 내 모든 것을 통제했어요. 내 옷을 통제하고 내 얼굴을 통제했죠. 특이한 인상을 평범하게 보이도록 머리도 내리고 안경도 씌웠다가 나중엔 아예 화장까지 시키더군요. 뭐 당신은 그냥 이야기를 원하니 조직 이름 따윈 몰라도 될 겁니다. 그저 무척이나 돈을 밝히는 조직이라고 해두죠. 아무리 많아봐야 푼돈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을 테지만."
추가, 이름 모를 조직의 구성원.
"사람들의 내장을 긁어 영혼을 자유롭게 할 정도로 말이에요. 그 푼돈을 위해."
나는 나도 모르게 맥주 잔을 꽉 움켜쥔다. 갑자기 서늘해지는 가슴. 나의 뱃속. 그가 미소짓는다.
"무서워 말아요. 좀 있으면 재밌어지니까."
초능력은 몰라도 눈치 하나만은 끝내주는군. 아니 내 표정인 것인가?
"승부까지 갔을 때의 승률로 따지면 난 삼십 퍼센트 정도의 평균적인 승률을 가지고 있었어요. 항상 이기진 못하죠. 난 단지 상대의 감정 그리고 패가 나보다 높은지 낮은지를 알 수 있을 뿐이니까. 난 이길 수 있을 때 판을 키우는 방법을 배웠고 그렇게 한두 번이면 상대는 자신의 뱃속까지 팔아먹을 만반의 준비가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을 잃으면 남는 것은 자신의 몸뚱이밖에 없는 것이죠. 아, 두려워 말아요. 아니라고 말해봐야 소용없어요. 당신의 두려움이 확연히 느껴지는군요. 이건"
그의 눈빛이 잠시 흐려진다. 그러다가 다시 또렸해지더니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하며 말한다.
'하! 죽기 직전에 잠깐 반짝이는 그런 것인가? 뭐, 괜찮지, 좋아. 설레는군. 이제 곧, 이야기는 금방 끝날 거야."
이 자는 또 무슨 이야기를 누구에게 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눈이 허공에서 나에게로 천천히 돌아 어느 순간 못 박힌다. 처음의 눈이 아니다. 그 서글한 눈이 더욱 커졌다. 이것이 도박하는 자의 눈인가. 묘한 광기가 서린, 빛이 일렁이는 눈. 그의 눈빛이 내 눈으로 들어와 목구멍을 타고 가슴을 쿡쿡 찌르는 듯 하다. 그가 다시 입을 연다.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는 입. 그 입이 마치 카드 패를 섞는 것 같이 느껴진다. 또한 사마귀가 메뚜기를 거머쥐고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떠오른다. 문득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여긴 도박판이 아닌데. 나는 먹이가 아닌데.
배가 갈리고 장기가 빠져나가는 자신을 상상하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건 생명을 가진 무엇이 아닐 테죠. 좋아요. 이렇게 생각하세요. 이건 단지 이야깁니다. 그냥 듣고 넘어가면 그만인 이야기. 당신 머리를 강렬하게 자극하곤 어느 순간 사라질 그럴듯한 거짓인 거죠. 당신의 내장은 안전해요."
흐음, 하며 나는 한숨을 코로 내보낸다. 그래. 나는 안전해. 나는 안전하군. 가끔 아니 자주 그 사실을 잊곤 하지. 계속, 계속 말해줘. 당신 말이 맞아. 재미있군.
"그럼 다시 돌아가서, 난 많은 사람들을 파멸로 몰아넣었죠. 처음엔 단지 도박이 재미있을 뿐이었어요. 쾌감! 마지막에 웃는 자가 되는 쾌감이었던 거죠. 말하자면 나는 애송이였던 겁니다. 덜 자란 어른, 몸만 큰 아이. 하지만 그것도 몇 년 안 가 지루해지더군요. 그리고 또 얼마 후엔 지루함이 고통으로 변해버렸죠. 죽을 것이냐 통제 당하며 타인의 뱃속을 긁어낼 것이냐를 강요받다가 후자를 선택한 이후로 말이에요."



2는 선택

누가 됐든, 그가 이곳까지 오려면 기나긴 어둠의 통로를 지나와야 한다. 그 컴컴한 곳에서 불안을 느껴 그만 되돌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이 어둠의 통로는 끝나고 하나의 문이 나타난다. 만약 문을 그 자신이 열어야 한다면 그는 최종 목적지를 앞에 두고도 어쩌면 되돌아 갈 마음을 먹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문은 스스로 열 필요가 없다. 문은 문안에 속한 자가 열어준다. 그러면 그 사이로 빛이 흘러나와 그의 마음을 비추고 그렇게 밝아진 마음엔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밝지만 눈부시지 않은 빛이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고 누군가 건네주는 한 잔의 술이 그의 긴장을 풀어헤친다. 그리고 녹색의 테이블에 오면 먼저 도착한 자들이 그를 맞이한다. 그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치 그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닌 듯이 느껴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사실 먼저 도착한 척 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그곳에 속한 자들이란 것을 모르는 그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또 달콤한 술을 훌쩍이며 또는 들이키며 자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고 그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그가 모든 것을 가볍게 여기게 되면 마지막 혹은 언제든 내가 테이블에 합류하고 카드가 돌기 시작한다. 어쨌거나 나는 따게 되어 있다. 나는 그들의 패를 모두 알고 있으니까. 어떤 종류의 트릭을 쓸 필요도 없이. 그래서 문안에 속한 자들은 그를 부추긴다. 절대 내주지 않을 자신의 신장과 안구와 내장을 돈으로 바꾸겠다고 말한다. 내 존재 목적은 교묘하게 따고 잃으며 이 공간 밖의 존재가 가진 모든 것을 긁어내는 것이다.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밖에 없는 자에게서.
그렇게 나는 또 한 사람의 신장을 빼냈다. 이곳에 오기 전 그 자신만을 남기고 모든 것을 잃은 그는 오른쪽 신장을 돈과 바꾸곤 이 공간에서 그것을 잃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눈도 팔겠다고 말했다. 그의 주변엔 이미 양 눈 모두를 잃은 자도 있었으니 하나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잠시 후 그는 눈을 잃더니 잠깐의 고민도 없이 자기 신체의 남아있는 모든 것을 내던지려 했다. 자기 생명만큼의 돈을 쌓아놓으면,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끼며 그렇게나 간절한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 내던지면 나는 받아주어야 했다. 근데 왜 그랬을까. 도박장에 들어오기 전에 마신 한잔의 독주 때문일까. 나는 말했다.
"이제 그만 하시죠."
그러자 그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리고 주위에 앉은 다른 자들의 눈빛도 묘해졌다. 모든 것이 묘해졌다. 입구를 지키는 조직원의 눈길도 묘해졌다. 저 천장 구석에 매달린 감시카메라까지 묘해진 듯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가 들썩거리고 크윽크윽, 이상한 숨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두려운가? 그래, 두려웠을 것이다. 사실 진작부터 두려웠을 것이다. 나도 두렵다. 이곳에 앉기로 결정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계속해서 두려워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내뱉은 말에 대한 결과가 또한 두렵다. 나는 불필요한 말을 했다. 그가 고개를 번쩍 쳐든다. 그의 눈이 너무나 붉어, 나는 순간적으로 피눈물이 흐른다는 착각을 일으켰다. 그는 잠시 입을 뻐끔거리다 소리쳤다.
"이 개새끼!"
그의 욕을 듣고 참 당연한 소릴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금방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소파에 누워있었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모든 것이 정리된 후였다.
감시카메라에 찍힌 영상을 보았다. 그는 나의 맞은편에서 거의 날듯이 뛰어 박치기를 했다. 쓰러지는 내가 보이고 그가 달려들어 내 얼굴을 주먹으로 퍽퍽 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같이 카드를 치던 자들이 그를 나에게서 떼어내더니 넙치가 되도록 두드리는 장면도 보였다. 그는 끌려나가면서 조금씩 움찔거렸다. 그래, 그는 살아있어야 했다. 그러라고 한 말이었으니까.
나는 조직으로부터 불필요한 말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리고 또 한 번 그 장면들을 보아야 했다. 나와의 게임에서 졌던 자들이 어떻게 제 속을 내어주는지를. 그들은 그런 식으로 나에게 스스로의 처지를 의식하도록 했다. 내가 저지른 죄의 무게로 나를 짓눌러 내가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잡아두고 있는 것이다. 나는 경고에 수긍했고 그 후 내가 머무는 호텔의 바로 가서 정신을 잃지 않을 만큼 마셨다. 그리고 내방으로 가며 생각했다. 오늘 어쩌면 세상과 작별했을지도 모를 그자는 누구인가. 이전의 그 모든 사람들을 탐욕의 블랙홀로 연결시킨 나는 또한 무엇인가. 취해서도 욱신거리는 얼굴.
순간 무언가가 칼로 자른 듯 생각이 싹둑 끊겨버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시선이 느껴졌다. 무언가가 나를 따라오는 것만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 것도 없었다. 나의 걸음은 바빠졌고 내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지 못했다. 그리고 양쪽 신장이 생으로 잘려나가는 듯한 느낌에 몸서리 쳤다. 무언가가 날 따라오고 있었다. 분명히 가까이 따라오고 있는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나는 더욱 무서워졌다. 나는 거의 달리듯이 내 방으로 가서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꽂았다. 무언가가 뒤에서 내 눈을 찌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마음은 더욱 조급해지고 손은 더욱 떨려왔다. 그 두려움이 머리끝까지 올라올 무렵 찰카닥, 나는 겨우 잠긴 문을 열곤 급히 방으로 들어가 모든 잠금 장치를 걸어버렸다. 찰카닥, 덜커덕. 나의 가쁜 호흡이 느껴졌다.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에 나는 냉장고의 문을 열고 맥주를 꺼내 급히 들이켰다. 나는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계속 떠오르는 의문. 대체 뭐냐?
똑똑.
뭔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그것이 조금 전 나를 뒤따라온 무엇이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어디서부터인지 어떻게 인지 알 수 없이 어느 순간 아지랑이처럼 실체 없이 서려버린 무언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나는 마음속으로 안돼! 라고 비명을 질렀다. 두려움은 아예 머리끝에서부터 시작했다. 언제 터질지 모를 그 두려움은 사실 절대로 터지지 않는다. 터지지 않기에 두려움은 두려움으로써의 힘을 가지는 것이다. 한 번 더 똑똑 소리가 들렸다.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팽팽하게 부푼 그 감정이, 그 긴장이 나를 의자에 못 박아 두고 있었다. 잠시 후 모든 잠금 장치들이 저절로 열렸다. 그것들이 열리는 모양은 마치 누군가가 거기에 화풀이라도 하는 듯 거칠었다. 그리곤 손잡이가 돌아가고 문이 열렸다. 열린 문으로 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문 앞엔 그것이 서 있었다. 검은 정장, 하얀 셔츠.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얼굴은 검은 안개가 묘하게 어른거리며 그 실체를 가리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다가와 문을 두드리고 또 문을 열었지만 모든 것은 자네에게 달렸네. 자네가 부르지 않으면 난 들어갈 수 없다네."
마치 문을 부셔버릴 듯 거칠게 열리던 잠금 장치의 모습과는 달리 그것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심장은 마이크를 달아놓은 듯 쿵 쿵 쿵, 그렇게 뛰어다녔다.  
"부르지 않으면 돌아갈 뿐이지만, 날 여기까지 이끌어 온 것은 바로 자네이지 않은가. 그러니 이제 목적을 완성하게."
내가 불렀다고? 내가? 순간 마음속에서 뭔가가 번쩍하며 두려움이 폭발했다. 그러자 안도가 퍼져나가고 그 안도는 환희로 변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저 문 앞에 있는 그것이 느껴졌다. 내가 부르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는 그것이. 그러나 내가, 내가 저런 것을 불러올 수 있단 말인가. 저것은 혼돈. 모든 아픔과 절망의 수렁. 그 모든 어둠의 집합체이자 수백만 부정적 감정의 층을 빨아들여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소용돌이. 그래서, 그래서 내가 부른 것이구나. 그러나 저것이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들어와!"
내 목소리가 들렸다. 절규를 억지로 쥐어짜는 듯한 괴상한 소리였다. 그러자 그것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수록 나는 뭔가로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것은 사람의 형상이었고 꼭 나와 비슷한 체형이었다.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각지거나 둥글지도 않은. 그러나 나는 절대 저렇게 완전히 희거나 완전히 검은 옷을 입지 않는다. 마치 나의 체형처럼 두루뭉실하고 무어라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이 입는다. 희지도 검지도 붉지도 않게. 나는 눈에 띄지 않고 또한 쉽게 잊혀지는 것이다.
"예수가 베드로를 불렀을 때 베드로가 그토록 쉽게 그물을 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고기잡이가 지겨웠기 때문일세. 자네는 어떤가? 자넨 그물을 버릴 용기가 생길 만큼 그물이 지겨운가? 그렇다면 나는 자네에게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네."
"나, 나는."
그것은 힘이었다. 내게 꼭 필요한 힘. 그것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줄 수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내가 침몰시킨 사람들이 떠올랐다. 수술대에 눈을 까뒤집고 누워있는 모습들이 떠오르고 메스가 그들의 허리와 복부를 가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들, 그 모두가 내 머릿속 어디에선가 터져 버렸다. 나는 외쳤다.
"버린다! 당장 버리고 말겠어!"
나는 헐떡였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말했다.
"나는 사라지겠어!"
그것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야. 천천히, 다시 생각해보게."
"아니야! 난 이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이제 그만 끝내고 싶다!"
그것은 잠시 서 있다가 내게로 다가왔다. 눈앞에 뭔가 번쩍여 보니 칼이었다. 사시미라 불리는 길쭉한 회칼. 그것은 더 말하지 않고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마치 소파에 못 박힌 듯했다. 말없는 그것은 나의 바로 코앞까지 자신의 어둠을 디밀었다. 그와 동시에 내 옆구리에 와 닿는 칼의 촉감이 느껴졌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 뛰어다니고 미간으로 흘러내리는 땀이 느껴졌지만 나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살짝, 아주 살짝 밀려들어온 칼끝. 툭하고 뚫리는 느낌. 조금씩, 아주 천천히 칼이 내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생으로 내장이 잘려나가는 상상. 공포는 다시 머리끝까지 차 올라, 나는 얼어붙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모든 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입은 벌어지고 그 사이로 어어 하는 신음만이 새고 있었다.
"거짓은 필요 없네."
들어올 때와는 달리 칼은 빠르게 빠져나갔다. 그리고 내 입에선 신음 섞인 거친 호흡이 터져 나왔다. 피는 많이 흐르지 않았다. 거죽 혹은 근육까지만 뚫었던 모양이었다. 그것은 칼로 내 턱을 들어올리더니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도록 했다. 어둠에 휩싸인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마치 아득한 옛날의,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시절 내가 겪었던 한 사건의 설렘 같은 흥분. 남아있는 그 감정의 잔상들. 그것은.
"자 이제 원하는 것을 말해보게."
목이 꽉 막혀왔다. 겨우 남아있는 가느다란 통로로 나는 힘주어 말했다.
"아니야, 난 말할 수 없어. 내가,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알기나 해!"
감정이 일어나자 내 인상은 찌푸려지고 뭔가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목소리는 이상한 모양으로 꿈틀거리며 기어 나왔다.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알기나 하냐고!"
그것은 칼로 내 뺨을 톡톡 치더니 말했다.
"나는 모두 알고 있네. 말도 못한단 말인가? 괜찮으니 말해보게."
어떻게 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나는."
다시 내가 침몰시킨 사람들이 떠올랐다. 터져버린 영상들은 다시 되감겨 합쳐지고 그들 모두가 내 머리의 어딘가에서 계속 되돌아 나왔다. 수술대에 눈을 까뒤집고 누워있는 모습들, 메스가 그들의 허리와 복부를 가르고, 눈알을 뒤지는 핀셋.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흐느끼면서 겨우 내뱉었다.
"나는 행복하고 싶어. 나도 기쁨을 느끼고 싶다구."
그것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내 기쁨이지."
모든 것을 흐리는 어둠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난 그의 말에서 미소가 묻어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호마라고 부르게."
나는 그물을 버렸다. 그와 함께 내 감정의 어느 한 부분까지 같이 엮어서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도박을 시작했다. 그와의 도박에서 내 능력은 사라지고 그래서 난 마치 장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우리의 판돈은 시간이었고 나는 호마의 패를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처음엔 막막하고 답답했지만 곧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새로운 감정들이 느껴졌다. 긴장, 그리고 그 후의 폭발. 어쩌면 이것이 기쁨일까. 숨막힐 듯 조여오는 긴장감 속에서 그것이 승과 패라는 상황에 의해 터지는 감정들. 내가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좌지우지되는 것. 나는 그 감정들을 알고 있었다. 내가 파멸시킨 사람들에게서 그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직접 그것을 경험하는 것과 타인의 것을 느끼는 것은 이해의 차원이 달랐다. 나는 살아있었다. 내가 살아서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시작도 안했네, 아직."
호마가 말했다. 나는 그때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이런 것들은 모두 호마의 정해진 형식인 것임을. 세상에서 사람들이 형식을 정해 살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하기로 정해진 것이지만 때로는 약간의 편법을 쓰기도 하는 것처럼. 호마는 다가와 내가 억지로 문을 열고 그를 받아들일 선택을 해나가는 기나긴 시간과 수고를 조금 덜어준 것임을. 그는 사실 그렇게 들어올 필요도 없다는 것을.



3은 맞물려 돌아 계속 불어날 수밖에 것

"그러다가 눈을 떴고 나는 맥주를 바닥에 떨어트린 채 소파에서 잠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난 그 모든 것이 꿈인 것을 알게 되었죠. 하지만 현실보다 더 생생한 그 꿈! 아직까지도 가슴 떨리는 그런 쾌감이라니."
쾌감만? 죄책감은, 그 눈물은.
"나는 모두 버렸죠. 그것들은 불필요해요. 벌은 내가 줄 필요가 없는 것이었어요."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그는 많은 사람들을 파멸시켰지만 나는 오히려 그에게 동정을 느낀다. 나는 그의 삶을 모르지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는 않았으리란 생각도 든다. 선과 악을 알지 못하고 할 수 있는 것과 해도 되는 것 해선 안 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시기에 그는 이미 너무 많이 가버린 것이다. 다시 되돌아올 수 없을 만큼. 그리고 세상엔 사실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 그는 지금까지 오면서 누구에게도 제지당하지 않았으니. 그에게 이제 허용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젠 이 길로 계속 가면서 자신을 키워갈 수밖에 없는 것. 죽지 않는 한.
그는 답답한 듯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 푼다. 그리고 나를 보며 말한다.
"그건 그렇지 않아요. 나에겐 되돌아가는 것과 계속 나아가는 것이 나눠진 것이 아니에요. 당신도 곧 느끼게 될 겁니다. 그걸 알 수 있군요. 점점 더 강하게 느껴져요. 당신은 과연 어떤 과정을 겪을까요? 어떤 길을 발견하게 될까요?"
"무엇을 말입니까?"
그는 클클 웃으며 대답한다.
"행복 또는 기쁨으로 가는 길."
웃기는 소리로군. 나에겐 길이 없어. 아까 당신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아무 것도 없는 벌판만이 펼쳐져 있지. 그게 세계를 뒤덮고 있어. 행복과 기쁨의 나라? 죽어보면 알지도 모르겠군. 맥주를 마시며 갈증을 느낀다. 그래. 사실은 나도 기쁨을 원하고 있어. 어쩌면 술이 내 원을 부추기는 걸까. 술, 조금 충족시키고 더 많이 비워버려 끊임없이 갈망하게 하는 것들 중 하나. 그래서 나를 천천히 사라지게 하는.
그의 옷차림을 본다. 검은 정장에 흰 셔츠다. 그가 나의 눈길을 느꼈는지 말한다.
"나는 변했어요. 또한 변하고 있는 중이죠. 내 색을 숨기고 바꾸는 것은 이젠 별로 의미가 없거든요."
왜?
"들어봐요. 들어보면 알게 돼요.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지만."
말하지 않아도 아는 그가 당연하게 느껴진다. 아니면 말을 해놓고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표정인 것인지. 어쩌면 이미 취해있는 것인지. 나는 편하게 받아들인다. 그는 초능력자였어. 그는 남이 알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알아왔지. 모든 타인들이 자신이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것들을 버려 두고 절대 알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하는 모든 노력을 비웃으면서.
"처음엔 하루로 시작했죠. 판돈은 서로의 합의하에 점점 더 올라갔고 대체로 그 제안은 내가 한 것이었어요. 쾌감과 욕망에 눈이 멀어 파멸할 줄 알면서도 모든 것을 다 던지는 순진한 도박꾼처럼. 나는 더, 더 큰 기쁨을 원했으니까. 더욱 큰 희열을 원했으니까. 하루는 한 달이 되고 한 달은 일 년이, 일 년은 십 년이 되었죠. 그리고 어느 날 아침 거울을 본 나는 그만 기겁하고 말았어요. 내 얼굴은 사십 대 중년의 그것이 되어 있었거든요."
그렇게 모든 것이 섞인다. 진실, 거짓, 현실의 구분 없이. 그래, 드디어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군. 선택 후엔 선택한 이것과 지나간 저것의 갈등이 톱니가 되어 돌아가는 거지. 그렇게 계속 결과물이 나오고 그것은 또다시 선택을 불러오는 것이지.



4는 유일하게 확실한 것 또는 법칙

무서워졌다. 나는 죽음을 시시하게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착각하고 있었다. 타인의 목숨들이 그렇게나 쉽게 날아가는 것을 오랫동안 봐온 나는 죽음이 무척이나 시시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호마와 만나던 날, 그날 느꼈던 두려움은 대체 무엇이었던가. 내 육신의 파괴이지 않았던가. 그 고통의 순간과 그것이 가져올 종말이 두려운 것이지 않았던가. 생명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특히 나의 생명이 그렇다. 나, 나의 것. 나의 모든 것. 이젠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승패를 알 수 없는 도박은 언제나 파멸과 맞닿아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황당하다. 전날 밤과 다음날 아침 사이의 시간에 나는 십여 년을 건너뛰고 말았다.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 일은 일어났고 그것은 사실이 되었다. 나는 다음에 호마와 만나면 이제 이 모든 것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하리라 결심했다. 내 직업이 도박사다. 크게 잃었더라도 남은 것이 있을 때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날 밤 호마는 항상 그렇듯 처음 온 그날처럼 왔다. 문은 저절로 열리고 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이 방안의 어둠을 물리며 호마가 들어왔다. 호마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두려움을, 내 결심을. 나는 호마를 보자마자 말해야 했다. 이제 그만 두겠다고. 그러니 이제 그만 사라져 달라고. 그러나 나는 기회를 놓쳤다. 두려움이 먼저였다. 내가 그만두겠다고 하면 호마는 얼굴의 어둠을 지우고 본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그 모습은 과연 내가 견딜 수 있는 것일까? 또한 공포로 내 몸을 묶어놓고 그 회칼로 천천히 그리고 끔찍하게 나를 괴롭히다 죽이는 것이 아닐까? 호마는 말했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으며 감미로웠다. 호마의 목소리는 의미에 상관없이 언제나 나를 휘어잡았다.
"두려워 말게. 자네가 그만두겠다고 말하면 나는 그저 갈 뿐이야. 그러니 원한다면, 언제든지 나에게 가라고 하면 되네. 그러나 나는 바로 자네의 소원, 자네의 모든 것이지. 그래서 언제나 나를 불러왔지 않은가? 그렇게나 간절히 불러왔던 그것, 이렇게 자네 앞에 있지 않은가? 나를 얻고 싶지 않은가? 나를 얻으면 자네는 완전해지네. 완전해지면 자네를 위협하던 그 모든 것들이 티끌과 같이 변해버리지. 모든 시간이 자네에게로 돌아온다네. 그리고 자네는 시간을 잊게 될 것이야. 그러면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펼쳐지게 되지."
두려움. 두려움은 언제나 나를 억눌러왔다. 치기 어린 마음에 그저 승리와 명예와 우월감을 누리기 위해 시작한 도박은 이제 타인의 삶을 빼앗는 도구가 되었다. 도구가 되자 승리도 명예도 우월감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타인의 삶을 빼앗지 않으면 내 삶이 빼앗겨, 그래서 버려질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전에 나는 이미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거머쥐고 있는 초라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 남은 생명을 태우며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었다. 목숨을 빼앗길까 안절부절하며 상대의 뱃속을 훑는 참혹한 도구가 되어버린 삶.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 삶을 유지하자고 내가 호마를 버리려 했단 말인가? 삶이란 어차피 도박인 것이다. 매순간 이루어지는 그 모든 선택이 바로 도박인 것이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호마와의 만남을 유지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나는 언젠가 이 삶을 한순간에 모두 내던질 도박을, 그 선택을 할 것이란 사실을. 내 삶을 호마가 거두어간다면 그것으로 끝이고 아마도 희박한 가능성이겠지만 만약 내가 호마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수 있다면, 최소한 뭔가 다른 것이 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내 절망이 만들어낸 그저 꿈이며 환상일지도 모른다. 단지 꿈과 환상일 뿐이라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으로 끝일뿐이다. 어느 한순간 멋지고 신나는 꿈을 꾼 것으로 만족할 뿐인 것이다. 그러면 나는 남은 삶을 지켜보면서 적절한 순간에 모두 내던질 기회를 찾게 될 것이다.
내 결심이 끝나자 호마가 말했다.
"시작하지."
저 호마의 얼굴. 빛을 등지고 들어와 일렁이는 어둠.



5는 붕괴 또는 전환

"근데 내가 다음날 찾은 게 뭔지 아세요?"
이 사람은 도박을 그만두면 이야기로 먹고살아도 될 것 같다. 물론 이 말들이 거짓일 경우에 말이지. 사실 거짓이거나 실제거나 상관은 없지만 지어낸 것이 지속되기 훨씬 좋거든. 계속 먹고살아야 할 테니까 계속 지어내게 되는 거지. 허물어지지 않으려면 탄탄해야 할거야.
"수면제였어요. 깊이 잠들면 그를 만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그러나 나는 그날 밤 오랫동안 그와 도박을 했어요."
어느 정도 술이 올랐는지 그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린다. 그의 웃음소리를 듣자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같이 흐흐하며 웃음을 흘린다. 주위 사람들 그리고 바텐더까지 우리를 쳐다본다. 깨어진 그들의 순간. 그리하여 다가오는 새로운 그들의 순간. 그들은 다시 자신들 속으로 침잠하고 우리도 또한.
"참으로 초라한 두려움인 것이었죠. 그 초라함은 알아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어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 모든 것에 우선 했으니까. 나는 각성제를 쓰고 마약까지 쓰며 잠을 자지 않으려 했지만 아무 것도 쓸모가 없었어요. 내가 잠깐 조는 사이에도 호마는 나타나 나와 생명을 나누었으니까. 참으로 질긴 것이었죠. 생명에 대한 집착이란. 그러나 기쁨과 행복, 쾌락에 대한 집착은 생명 그 자체만큼이나 질긴 것이었으니... 나는 살기도 살아야 했지만 호마도 포기할 수 없었어요."
나는 그가 부러워진다. 곧장 죽음으로 직결될지라도, 나도 그런 호마 같은 존재를 가지고 싶다. 내 끝없는 황무지를 뒤엎어줄 무엇. 호마가 아니라 날 찢어 죽일 궁리를 하는 괴물일지라도.
"그사이 나는 뭔가가 점점 결여되어가고 있었어요. 아니, 이미 사라진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하나하나 깨달아가고 있었죠. 그러나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어요. 암수간의 본능에도 말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사라져가자 삶에 대한 집착도 엷어지는 것 같더군요. 아니, 더 집착하게 된 것일까요? 오직 남아있는 그 생명만을 더욱 강렬하게 사용하고 싶었으니까. 오직 단 하나에 대한 흥미만이 남아있었는데 바로 목숨을 건 도박이었던 거죠. 그래서 나는 좀 색다른 도박장을 찾았어요. 상대의 패를 알아도 어쩔 수 없는 러시안 룰렛 같은 것들 말이죠. 단 한 번 해보았어요. 아, 그런 것이 없을 것 같나요? 아니에요. 아주 당연하게 존재하죠. 그건 당연한 겁니다. 사람 사는 곳에 없을 리가 없는 것이죠. 숨겨져 있을 뿐이에요. 이 세상의 살아가기 힘들 정도의 결핍과 그냥 살기 힘들 정도의 풍요가 만나면 생겨나는 것이죠. 뭐 어쨌거나 거기엔 아주 드물게 나처럼 호마 같은 존재를 만난 이들이 오기도 하고 생의 모든 것이 끝장난 자가 두려움에 떨며 마지막 모든 것을 던지러 오기도 하는 곳이에요. 그들의 세상은 오감이 사라진 세계에요. 남은 것은 생명뿐이죠. 그저 살아야 한다는 본능뿐. 그건 일종의 법칙 같은 것이죠. 미래를 이루어갈 그 모든 것들이 붕괴되었을 때 스스로 죽을 의지마저 사라졌을 때에도 마지막까지 남는 것. 어쨌든 살아남았을 때 가끔 그 생명에서 다시 한 번 세계가 삶을 피워내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 그건 매우 드문 경우죠. 나는 단 한번 그것을 해보았어요."
소리, 색깔, 향기, 맛, 촉감. 사라져간다. 세계가 사라지고 나만이 남는다. 나만이 남아 존재할 수 있을까? 내가 모든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스스로가 무의미해져 자신을 내던지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는 것이다. 이 사람은, 아니 내가 어떠한가를 생각해야한다. 그게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생각의 통로가 어렴풋해지고 흐려진다. 술 때문? 아니면.



6은 완전함에 대한 첫 번째 출구

나는 러시안 룰렛 게임장을 찾았다. 아마 내가 도박을 그만둔 채 여기 왔다는 것을 알면 조직에선 나를 어디에 가두어 놓고 한 사흘 동안 굶기며 매질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개처럼 엎드려 빌며 용서를 구해야겠지만, 그러나 지금의 나는 멈출 수 없다. 공기를 떠도는 화약냄새가 왜 이렇게 감미롭게 느껴지는 것일까.
이곳 또한 겨우 길만 알아볼 정도의 빛만이 존재하는, 기나긴 어둠의 통로를 지나야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도착한 곳엔 관중이 있었다. 물론 그들은 가려져 있다. 육방이 거울인 이 방의 벽 뒤로 나는 그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넓직한 입방체의 공간을 거울이 막고 있자 내 시각엔 무한이 펼쳐진다. 순간적으로 경이와 공포가 동시에 몰려왔으나 벽 뒤의 구경꾼들이 느껴지자 난 이 허상을 곧바로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모두가 즐기기 위한 것. 경이와 공포로 최고조에 다다른 생명의 폭발을 즐기기 위한 놀이. 이 연출된 무한의 형상은 그런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을 알고 나니 나는 마치 검투사가 된 것만 같다. 나와 상대를 지켜보는 수많은 눈들을 다시 한 번 음미한다. 그들은 우리의 시합을 긴장 속에 바라보고 있다. 우리들의 승패엔 그들의 돈이 걸려있지만 사실 그들에게 돈이란 그저 형식일 뿐이다. 그들은 죽음을 보러 온다. 극도의 긴장과 긴장의 폭발에서 오는 쾌감을 얻고자 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이 거울의 공간만큼이나 무의미한 허상, 그들은 결코 실제를 알 수 없다.
나는 방 한가운데 원형의 탁자를 향해 걸어간다. 자리에 앉아보니 그 탁자마저도 거울로 되어있다. 내 얼굴이 보였다. 그 아래 내 뒷모습, 그 아래 내 얼굴. 그렇게 계속되는 내 허상의 무한한 연결.
상대를 보았다. 그는 백발이 성성한 영감이었다. 다듬지 않은 지저분한 머리에 수염, 자글자글한 주름, 처진 눈. 게임장에 들어서기 전 나는 그가 이곳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자들 중 한 명이란 말을 들었다. 그의 눈을 보고 나는 그것을 수긍했다. 나는 그가 호마 같은 존재와 교류하며 살았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알아보았을까? 그의 눈이 살짝 떠지는 것 같았으나 확신할 순 없었다. 기분이 굉장히 신선했다. 나는 상대의 긴장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는 최소 나와 같은 부류이거나 그 이상의 존재인 것이었다.
진행자가 다가왔고, 우리 둘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둘 다 재미없는 자로군. 손님들이 싫어하겠어."
진행자는 혀를 끌끌차며 우리를 잠시 보다가 고개를 젖더니 말했다.
"앞으로 하겠나 뒤로 하겠나?"
나는 앞, 그는 뒤를 택했다. 동전이 던져졌고 앞면이 나왔다. 나의 직감은 늦게 쏘라고 말하고 있었고 당연히 그것에 충실했다.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다. 약간 미소짓는 것도 같았다. 진행자가 육연발 리볼버에 한발의 총알을 넣고 탄창을 드르르륵 소리가 나도록 돌렸다. 소리가 꽤나 길어진다고 생각한 순간 진행자는 손목의 스냅으로 철컥 소리를 내며 결합했다. 그리곤 거울탁자 위에 놓았다. 권총이 거울 위에 놓이자 착 하는 소리와 함께 마치 자석이 들러붙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이미 알았다. 내가 살아남는다는 것을. 그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포기해라. 포기해. 끊임없이,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사실 포기란 있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존재하는 이상은. 나는 그것을 잊고 마음으로 그에게 포기를 종용했다. 그는 내 마음과는 달리 권총을 미간에 대더니 망설이지 않고 당겼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반대편에 피가 튀고 그가 쓰러질 때, 나는 그의 입가가 더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기쁜가? 죽음이 기쁜가?
그는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미래 중 가능성이 높은 하나의 경우인 것이다.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밀려왔다. 그리고 그 냄새를 타고 절망이 왔다.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절망. 나는, 나는 또 어떤 미래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이제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위대한 장기사냥꾼! 타인의 생명을 긁어 배를 불리는 마물! 파멸의 도박꾼! 내 모습이 보였다. 내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실하게.
죽어 널브러진 그를 보았다. 문득 그가 부러워졌다. 그의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가 있었다. 그의 시체가 질질 끌려나갈 때 미처 닫히지 못한 그의 눈만은 아직도 살아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눈이 넌 이제 어쩔 거냐? 라고 묻는 것만 같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좀 더 생각해 보겠어. 좀 더.
난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호마를 생각했다. 삶을 나눌 나의 유일한 친구. 내 운명.



7은 결과의 대가를 얻기 직전

"그 후로 호마가 그렇게 기다려 질 수가 없더군요. 마치 연인을 기다리는 것 같은 마음이 되는 거죠. 밤, 이 밤마다 나는 미소를 띄고 달콤한 술 한 잔을 기울이며 그를 기다리는 겁니다. 그와 생명을 나눌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죠. 지금의 내 모습을 보아 알겠지만 나는 손해를 많이 보았어요. 하지만 황홀해요. 황홀하군요. 벌써 생각만으로도. 이제 나는 멈출 수 없고 사실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나는 맥주를 따르고 마신다. 그도 맥주를 따르고 또 마신다. 나는 안주를 집어 입안으로 넣고 그는 안주를 집어들더니 눈앞에 두고서 씩 웃는다.
"그러나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같이 오죠. 나는 사람과의 도박을 그만두었고, 조직의 심기는 매우 불편한 상태에요.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 조치가 있겠죠. 나는 지금은 두렵지만, 하지만 이 두려움은 얼마 남지 않았어요. 나는 오늘밤 나의 남은 생 모두를 걸고 판을 벌일 것이니까."
웃기는 소리. 그래, 웃기는 소리다. 작가는 내가 아니라 이 양반이 하면 되겠군. 난 맥주를 마신다. 어느새 꽤 취했음을 느낀다. 나는 그래도 맥주를 따르고 마신다. 마시고 있지만 술에선 깨고 싶다. 무형의 기운으로 나의 육체와 정신을 얽어매는 이 마력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 사람에게서, 이 자리에서도 벗어나고 싶다. 이쯤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렇게 되는 유일한 방법이건만 나는 또다시 맥주를 따르고 마신다. 나는 그래도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뭐, 헛소리라고 생각해도 상관은 없어요. 처음부터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 않나요? 당신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고 난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게 중요한 거죠. 네, 그게 중요한 거에요. 서로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면 그만인 것이죠. 밤에 어울리는 일이에요.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이 밤에."
그는 일어나고 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잔을 들고 말한다.
"행운을."
그는 빙긋이 웃으며 대답한다.
"그래요. 승패를 알 수 없는 도박은 언제나 행운을 필요로 하죠. 하지만 어떤 행운? 죽음 아니면 수렁?"
그의 미소는 여전하고 나는 무표정이 되어간다. 그의 눈이 뭔가를 바라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말해준다.
"또는 자유."
그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래야 당연하다는 듯.
"친구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군요."
그의 눈길은 다시 허공에 고정된다. 나는 그의 눈에 광채가 일어난다고 느낀다. 그러나 눈부시지 않다. 그 눈이 다시 나의 눈으로 고정된다. 그 눈. 그 빌어먹을 눈. 호마는 무엇인가? 그 빛나는 눈으로 보는 세상은 대체 어떤 세상인 것인가! 그의 입이 떨어지려 하고 나는 지금 이 순간의 마지막이 될 타인의 말을 기다린다. 자, 최후일지도 모를 그 마지막 말을 해봐!
"좋은 밤 되세요."
간단한 인사. 그는 돌아선다. 그의 등이 보인다. 이야기는 끝났다. 나도 일어나야 한다. 난 집으로 가야한다. 나는 램프의 문을 열고 나와 위대한 교회를 올려다보고 포도밭을 보며 부끄러워하다가 저 멀리에 반짝이는 온갖 빛들의 유혹을 경멸의 안경을 끼고 본다. 나는 걷는다. 나는 계속 걷는다. 세계가 흔들린다. 그렇다. 세계가 흔들리는 것이다. 이 나의 세계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바로 내가 흔들리므로 세계가 흔들리는 것이다. 아파트가 무너질 듯 비틀거리며 나의 앞으로 다가온다. 나는 아파트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오 층부터 우르릉 소리가 난다. 나는 두렵지 않다. 두렵지 않으니 분노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나타난 분노는 나의 손을 들어 엘리베이터의 문을 힘껏 내려치게 만든다. 탕, 탕, 탕. 고통은 없다. 단지 얼얼할 뿐.
땡.
땡이다. 난 손가락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연다. 그 문으로 들어가 나는 널브러진다. 그리곤 세상을 향한 나의 창을 닫는다.



8은 어디나 똑같다고 말한다

세상이 보인다. 나는 고통스럽다. 전날 마신 술 때문에 그러하며 혼돈으로 지나간 꿈 때문에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똑같이 펼쳐진 생으로 인해, 그 미래로 인해 나는 또한 고통스럽다. 지끈거리는 머리와 메슥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나는 일어난다. 컴퓨터를 켠다. 물을 마신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우웅우웅, 진동한다. 나는 모자를 찾아 쓰곤 약국을 찾아 길을 나선다. 눈으로 꽂히는 햇살, 고막까지 파고드는 새들의 지저귐. 나는 속이 쓰리다. 나는 머리가 아프다. 나는 어지럽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는 사이 뭔가가 어깨를 치고 지나간다. 겨우 넘어지지 않고 돌아보니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나의 팔을 붙잡고 부축한다. 난 그의 사과를 기다리는데 그는 반응이 없다. 나는 어떤 의도도 없이 그의 얼굴을 본다. 젊은 사람이다. 나처럼. 그의 미소가 보인다. 그의 입이 떨어진다.
"좋은 밤 되셨는지요."
어쩐지 낯익은 얼굴.
눈이 떠진다. 아침인가? 낮인가? 지끈거리는 머리와 메슥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나는 일어난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후회한다. 술, 술, 술. 물을 마시고 컴퓨터를 켠다. 내가 느끼는 이 고통은 육체의 것인가 마음의 것인가. 귀찮지만 약이라도 사먹고 한 잠 더 자야겠다. 진통제는 마음까지 잠재울 수 있는가. 나는 길을 나선다. 햇살이 밝고 새들이 지저귀건만 나는 단지 속이 쓰리고 나는 단지 머리가 아플 뿐이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잠시 감는 사이 뭔가가 어깨를 퍽, 치고 지나간다. 겨우 넘어지지 않고 돌아보니 검은 정장을 입은 청년이 나의 팔을 부축해준다. 이십대 중반정도로 보인다. 그는 미안하단 말도 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순간 머리가 멍해진다. 심장이 뛴다. 점점 더 거세게 뛰어간다. 나의 입이 벌어진다. 긴장되어 벌어지는 눈꺼풀을 나는 느낀다.
"좋은 밤 되셨는지요."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



9는 아직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말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해하게 될 겁니다. 반드시."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고도 한참동안 - 이것은 얼마만큼의 시간인가? - 을 나는 멍하니 서 있다.



10은 이제 그만, 이라고 말한다

집안. 컴퓨터 앞.
세상에 밤이 내리고 밝음을 인식하는 눈앞에 한 점의 어둠이 보인다. 백색 모니터 한가운데 찍혀진 저 어둠. 저것이 웬 것인가 하며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나는 어느 순간 그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간다. 불안한 듯 느껴야 한다는 암시가 옴에도 이상하게 나의 마음은 편안하다. 어두운 공간에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그곳을 보니 저 앞에서 그가 다가온다. 그의 모습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많이 변해 있었다. 뺨은 움푹 꺼져있고 피부가 희멀건 것이 마치 분장 안한 시체 같은 모양이다. 오른쪽 눈꺼풀은 감겨 있고 그래서 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양손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손을 들어 인사의 뜻을 밝힌다. 그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상의를 들어올리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손이 없어 자꾸만 실패한다. 나는 다가가서 그의 웃옷을 들어올려 준다. 갈라진 게 아니라 아예 복부근육이 갈비뼈를 따라 아치형으로 잘려나가 있고 그 안에 있어야할 내용물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나는 그의 모습을 한참동안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말한다.
"좋아 보이는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고맙군요. 알아줘서."
그가 어딘가를 가리키자 그 어둠의 공간에 영상이 펼쳐진다. 길을 가는 그가 보인다. 영상 아래에 자막이 뜬다. '홀가분함' 한 사내가 그를 미행하다가 으슥한 곳에서 몽둥이로 그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자막이 뜬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어디론가 끌려간다. 자막이 뜬다. '한쪽 신장과 한쪽 눈을 잃은 자' 그는 발가벗겨지고 양팔이 벌려진 채 나무 탁자에 결박당한다. 머리는 그의 복부를 바라보도록 고정되어 있다.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자막이 뜬다. '이렇게 확인하게 되는군' 그는 의식이 살아 있는 채로 양손목이 잘린다. 도끼 날이 무딘 것인지 사내의 힘이 부족한 것인지 손도끼로 여러 번을 내려치고서야 손이 떨어져 나간다. 나는 절단면이 깔끔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 자막이 뜬다. '생각보다 고통스럽지 않다' 피가 뿜어져 나오자 준비된 인두로 절단면을 지진다. 자막이 뜬다. '이건 조금 아프군' 사내의 손에 메스와 같은 칼이 들린다. 그의 복부가 명치에서 좌우로 갈비뼈를 타고 절개된다. 그는 잘려나가는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자막이 뜬다. '나는 따로 놀고 있군. 하지만 그래도 확인은 문을 열고 해야지' 내장을 다치지 않으려는 듯 절개하는 사내의 손길이 매우 조심스럽다. 사내는 복부근육을 완전히 도려내더니 그것을 그의 가슴 위에 딱지를 치듯이 척 소리가 나도록 내던졌다. 자막이 뜬다. '나와는 이제 상관이 없는 저 살덩이가, 어째서 따갑게 느껴지는 것일까?' 사내는 내장이 드러나자 흥분을 참지 못하는 듯 손이 떨리는 것이 클로즈업되고 바로 옆에서 내뿜는 듯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사내는 칼을 내장에 대려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멈칫하더니 검지로 그의 오른쪽 눈을 후벼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린다. 사내의 흥분한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자막이 뜬다. '빌어! 두려워 하란 말이야! 반항해!' 화면이 바뀌고 그의 얼굴로 대장이라 짐작되는 부분이 척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그의 남은 한쪽 눈이 장기를 보려는 듯 아래위로 움직인다. 사내는 잡히는 대로 장기를 잘라내어 그의 얼굴로 던진다. 자막이 뜬다 '의식이 흐려진다 끝까지 견딜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만족한다' 소장은 열 토막이 나고 사내는 방광을 잡아뜯으려고 하다가 자꾸만 손이 미끄러져 결국 칼로 난도질한다. 자막이 뜬다. '고...' 뱃속이 너덜거리고 끝내는 비어버리자 사내는 손을 멈춘다. 그리고 구석으로 가서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숙인다. 자막이 뜬다. '의미가 없어 의미가' 다시 번뜩 고개를 쳐든다. '살아있을 때 자지를 잘라 입에 물려버리는 건데! 그리고 인두로 지져버리는 건데!' 다시 고개를 숙인다. 자막이 뜬다. '의미가 없어 의미가' 다음 순간 그 공간 속으로 대여섯의 사람들이 갑자기 들어오고 사내는 일어나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들을 둘러본다. 그리고 잠시 후, 사내는 처리된다. 사내의 육체는 돈으로 바뀌어 흩날린다.
"저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어요. 죽은 것 말고, 그 이전에 스스로에 대한 것 말이죠. 의미가 없다니, 어이없지 않은가요?"
영화는 끝났다. 그는 미소지으며 말한다.
"하지만 그에겐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가 뒤돌아간다. 나는 '잠깐!' 하고 소리친다. 그가 뒤돌아보고 나는 묻는다.
"만약, 호마가, 호마가 나를 먹어치우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는 흘깃 나를 쳐다보더니 경쾌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그의 입이 열린다.
"당신은 언제나 당신일 뿐이죠."
깊은 밤. 나는 눈을 뜬다. 왼쪽을 보았다. 저 간유리 뒤로 어제 빨아 널은 검은 옷이 팔을 들어올리고 있다. 나는 일어나 문을 연다. 그것의 뚫어진 구멍들에 어둠이 넘실거린다. 그 어둠이 모자를 쓰고 팔을 들어올리며 자신에게 들어오라고 유혹한다. 고통받지 말고 자신과 하나가 되라고. 내 입가에 그려지는 미소. 나는 말한다.
"넌 아니야. 나의 것이 아니지."
나는 문을 열어둔 채 컴퓨터 앞에 앉는다. 모니터를 통해 드러난 하얀 여백. 나는 키보드를 두드린다. 토닥거리는 소리가 마치 은밀한 주술의 주문처럼 느껴진다. 이 주문은 말하자면 두레박이다. 내 속의 깊고 검은 우물에서 이야기를 퍼 올리는 두레박인 것이다. 그렇다. 아주 오래 전부터 바로 지금까지, 내가 불러낸 것은 언제나 나였던 것이다. 그래, 나와라. 어서 나와라. 호마든 뭐든 간에.
참혹한 결말 또는 죽음. 모두 상관없이 내 어둠을 바라볼 테니, 나와서, 내게 다가와, 나에게 기쁨을 다오.



0은 부른다

호마는 한 사람에 하나 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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