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집 뒤에 산자락을 에두르는 산책길이 하나 있었는데, 수도관들이 길 밑으로 깔려 있었고, 물탱크까지 걸어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길은 산자락을 비스듬히 가르며 올라갔다. 앙 편의 바닥에서는 나무 줄기 사이사이로 거북이나 자라 같은 푸른 등딱지가 듬성듬성 기어올라가고 있었다. 나무들은 컸고 나뭇잎이 많았는데, 저마다 촘촘했고 다함께 무성했다. 굽은 가지마다 잎사귀들이 한 척씩 얹혀 있었다. 이랑마다 고여있는 배처럼. 그리고 실제로 그 배 한 척 한 척이 넘실거리며 들썩거렸다. 그러면 물결이 아래로 흘러갔다. 바다에서 활엽수들이 넘실대며 밀어보내면, 작은 포말의 흰 꽃을 흰 나비들이 따라다녔고, 산등성이 아래로 흐르며 조롱조롱한 전나무 물결까지. 그리고 마지막 전나무가 키가 작아질 때면 도로가 가로놓여 그 숨죽은 소리를 집어삼켰다. 뭍으로.
  버스 정류장. 기념품처럼 가로수들이 서 있었고 보도 타일 사이로 민들레꽃이 찰싹거렸다. 버들강아지와 제비꽃의 실개천. 간혹 억새의 여울이 넓게 고였다가 사라지곤 했다. 차바퀴가 굴러가면 민들레는 잠시 더 흐르지 못했다. 길들의 침묵 때문에. 걸음걸이의 초침 때문에. 뭍에는 늘 웅웅 울리는 길들이 있었다. 도로의 아지랑이가 기어다녔고 들끓었다.
  산등성이, 일렁이는 바다가 추락하는 지평선 너머로, 활엽수의 굴곡들이 한 척씩 솟아오르다가 삼켜졌다. 세계의 끝에서는. 번쩍이는 굉음의 장막은 온통 회색빛이거나 푸른빛이었다.
보통은 깨끗한 푸른빛의 소리였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이 항해를 할 때만은 회색의 화음이 슬금거렸다. 브레를 입은 남자와 쉥즈만 걸친 여자가, 아이의 옷을 벗겨놓고 자기들도 모두 벗어버리고 길로 나갔다. 그들은 여섯 달 만에 축제 전날에 목욕을 하러 갔다. 그들은 알몸으로 길을 가로질러 우르르 욕탕으로 달려갔고 이발사가 대충 수염을 깎아 주었다. 축제 밤 그들은 모닥불을 둘러싸고 춤을 추었고 그러나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너무 멀리 항해했을지도 몰라. 여자가 생각했다. 섬나라를 지나쳐 가 추락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세계의 끝으로.
  세계의 끄트머리로. 나부끼는 굉음의 벼랑으로. 여자가 당나귀에 올라탔고 바닥에 새카맣고 동그란 그녀의 머리 그림자가 겹쳤다. 낡은 배들이 떨어져내렸다. 그들은 항해했고 이랑은 넘실거렸다. 활엽수의 부드러운 팔에 받아 전나무들이 그들을 안내했고 물러설 듯 말 듯한 버들강아지들의 포말이 그들을 흘려보냈다. 그들은 그렇게 팔을 벌려 길들과 무수한 길들을 끌어안아 방주에 실은 채 항해를 계속했다. 제비꽃과 억새의 여울이 그들을 안내했고 그들은 흘러갔다.
  도로는 굴러갔고 버스의 바퀴가 덜그덕거렸다. 민들레는 얼어붙었고 차가운 빛이 침묵을 지켰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모두 살고 있었다. 퇴적된 해안가에.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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